2017년 11월 6일 월요일

사도행전 9:1-31 사울의 회심(回心).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사울의 회심(回心)
사도행전 9:1-31

9:1 사울이 아직도 주님의 제자들을 향해 위협과 살기가 가득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로 보낼 편지들을 요청하였으니, 이는 그가 남녀 누구나 이 도를 따르는 자들을 발견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 였다. 

9:3 그가 길을 가는 중에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왔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9:4 그가 땅에 엎드러져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므로, 

9:5 그가 말하기를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 

9:6 일어나 성읍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네게 일러줄 자가 있을 것이다." 

9:7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을 뿐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자신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손으로 이끌어 다마스쿠스로 들어갔다. 

9:9 그가 삼일 동안 보지 못하였으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9:10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고 하는 어떤 제자가 있었는데, 주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나니아야." 하니, 그가 말하였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9:11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곧은 길이라고 불리는 거리로 가 유다 집에서 사울이라고 하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보아라, 그가 기도하고 있다. 

9:12 그가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하는 것을 보았다." 하시니,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내가 이 사람에 대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들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고, 

9:14 여기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로부터 받았습니다." 

9: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도록 내가 택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 하시므로, 

9:17 아나니아가 가서 그 집에 들어가 그에게 안수하며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네가 오던 길에 네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네가 다시 보게 되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하니, 

9:18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그가 시력을 회복하였고 그가 일어나서 세례를 받았으며, 

9:19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을 함께 있었다. 

9:20 그가 즉시 회당들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자, 

9:21 듣는 자들이 다 놀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진멸하던 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가 여기에 온 것도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9:22 사울은 더욱 힘을 얻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9:23 많은 날이 지난 후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9:24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 알려졌다.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 위하여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키니, 

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를 광주리에 태워 성벽으로 달아 내렸다.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않고 두려워하였다. 

9:27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9:28 사울이 그들과 함께 지냈으며 예루살렘에 출입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다. 

9:29 그가 헬라파 사람들과 말하며 논쟁을 벌이자,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9:30 형제들이 그것을 알고서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갔다가 다소로 보냈다. 

9:31 그러는 동안에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에 있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갔으며,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행하여 수가 더 늘어 났다. 

1.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

본문 1-2절에 “사울이 주인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선봉을 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최후 발악적으로 이제는 대제사장에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이방도시 다메섹에까지 가서 믿는 사람들을 결박해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했다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에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는데 그 공회의 권세로 사람을 결박하여 옥에 가둘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공회의 권세로서 사람을 결박하여 옥에 가둘 수 있도록 사울에게 권세를 주었습니다.

본문 3절에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믿는 사람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에까지 갔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고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특별히 부르신 역사입니다. 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고 하였는데, 육신의 눈에 보이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사울을 그곳에서 굴복시키신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길로 나가는, 마귀의 종 노릇하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갑자기 비추어서 꺼꾸러지게 하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사울아, 사울아”하는 말씀이 들려왔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영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마귀는 어둠에 속하고 하나님은 빛에 속합니다. 요한일서 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빛으로 역사하십니다. 마귀는 어두움의 권세를 잡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극도의 어두움에 달한 마귀의 역사를 빛으로 굴복시키시고 어두움을 정복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둘러 비춘 빛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도록 비추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6:14에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22:9에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 22장 말씀에서 당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말하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울도 하나님의 빛을 보았고 또 같이 가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빛이 내리 비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리는 사울만 듣고 같이 가던 사람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내용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그저 ‘무슨 소리가 난다’ 이런 정도로만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육신의 눈으로 빛을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빛이시라”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어둠을 정복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신데, 사울에게는 육신의 눈을 통해 보이신 것 뿐만 아니라 특별 계시해서 “사울아, 사울아”하시며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이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다 아십니다.

에베소서 3:14-15에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각사람에게 이름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셨고 인격을 주셨고 분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다 아셨습니다. 베드로도 아시고 나다나엘이 올 때에도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또 부활한
다음에 마리아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의 이름을 특별히 불러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의 이름을 전부 다 불러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너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3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다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도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부족하고 또 어린 아이일지라도,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생명책에 다 기록해 놓으시고 불러주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각각 다 불러 인도하여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10:3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날마다 불러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 예수를 믿게 하셨으며, 또 어떠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늘 들여다보고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9:15-16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서 늘 들여다보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러면 잘난 사람이나 불러주고 변변치 않은 사람은 안 불러 주십니까? 부모의 아이가 7, 8명이라고 하면 그 부모가 제일 똑똑한 아이의 이름만 불러주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아이는 잊어버리고 불러주지 않습니까? 똑똑한 아이는 불러다가 밥을 먹이고 몸이 약하고 변변치 못한 아이는 밥도 안 먹이고 그냥 지나갑니까? 밥 먹을 때에 누구부터 먼저 찾습니까? 좀 변변치 못한 아이를 그 부모가 먼저 찾아서 먹이려고 합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다 알아서 먹을 것이므로 그냥 두지만 변변치 않은 아이는 가만히 두면 굶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여러 명이어도 그 부모는 한 아이라도 마음을 안 주는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여러 신자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거나, 한 사람이라도 등한히 여기거나, 한 사람이라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기억해 주십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와 약한 자의 강함과 고통당하는 자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을 다 아시고 불러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또, 자기 양의 이름
을 각각 불러 인도해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처지와 형편을 그대로 모두 아시기 때문에 그대로 인도하시며, 그대로 길러나가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신 것은 그 상태를 바로 다 아신 것입니다. 사울이 택한 백성인데 마귀의 종이 되어 교회를 핍박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가만히 내어 버려두면 망하겠다는 말입니다. 택한 백성을 망하는 대로 그냥 두면 안되겠으므로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게 하나님의 빛이 나타난다든지 또 육신의 귀로 듣게 불러주신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도 사람들이 빛은 어느 정도 보았지만 말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사울만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육신의 귀로 듣게 하는 것이 위주가 아니고, 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불러내어 인도해주시는 것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앞에 꺼꾸러졌습니다.
주의 빛을 보고 그 음성을 듣고 꺼꾸러졌습니다. 꺼꾸러져서 “주여 뉘시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주여’라는 말은 그때의 존칭어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알고 ‘주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뉘시오니까”할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음성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는 죽어서 없어진 줄 알았는데 빛을 비추면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말을 들을 때에 ‘예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로구나’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
활하신 예수님이요, 살아계신 예수님이요, 또 자기 이름을 기억해 주시고 불러주시며 건져주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느냐 하지 않으시고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자기의 몸과 같이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매 한 대 맞으면 예수님께서 매 한 대 맞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사람의 마음이 아프면 예수님의 마음도 그 만큼 아픕니다. 믿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면 예수님도 같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너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고, 예수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고난 당하는 것은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이 핍박 당하는 것은 내가 핍박 당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일, 예수를 위해서 고난 당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 당하시는 것으로 인정하고 대신 그 고난을 당해 주십니다. 대신 짐을 져주십니다. 예수를 위해서 믿음으로 고난 당할 때에 예수님께서 대신 고난을 받아 주십
니다. 그러므로 그 짐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5장에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 값으로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께서 도와 주시 않으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죄 값으로 고난 당할 때에는 안 도와 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막대기를 들고 때리십니다. 인생 막대기, 사람 채찍 등으로 어떠한 사건을 들어서 때리십니다. 그 때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 당할 때에는 주님이 대신 전부 감당해 주시기 때문에 마음의 위로가 풍성하게 됩니다. 마음이 시원하고, 더워도 덥지 않게 해 주시고, 매 맞아도 아프지 않게 해 주시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게 해 주십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대신 감당해 주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풀무불 가운데 들어갔지만 그 풀무불 가운데서 주님이 대신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막아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 당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풀무불이 능히 그들의 머리털도 그슬리지 못했습니다. 또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으나 사자가 능히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고난 당할 때에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를 위해서 고난 당하면 주님이 대신 걱정해 주시고 대신 핍박을 받아 주시고 대신 감당해 주십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하면 그것은 예수님과 더욱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또 고난 당할 때에 예수님께서 대신 고난을 감당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할 때에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며 못하게 막아 주신 주님이십니다.

본문 8절에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음식을 전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지만 사울은 소경이 되었습니다. 또 다메섹에 가서 사흘동안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한 것입니다.

사울이 그동안 마귀의 종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그 대가가 왔습니다. 즉, 사단의 사자가 왔습니다. 사울이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마귀의 종 노릇한 영향력입니다. 즉, 영안(靈眼)이 어두워서 그동안 마귀의 종 노릇을 했는데, 그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려고 육신이 눈을 멀게 하신 것입니다. “한 번 눈이 어두워봐라, 네가 영안이 어두워서 마귀의 종 노릇한 것을 깨닫지 못하겠으면 육신의 눈이 어두워보아야 네가 영안이 어두워서 마귀의 종 노릇하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며 징계로서 육신의 눈을 잠시 동안 어둡게 하신 것입니다.

후에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밝아졌지만 아주 밝아진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2:7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사자를 육체에 주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눈병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사단의 노릇을 하다가 얻은 병이기 때문에 사단의 사자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인데, 사울은 그 징계를 단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또 사흘 동안 다메섹에 가서 음식을 전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꺼꾸러졌는데, 이제는 거기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다른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 가려고 하다가 그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고 꺼꾸러진 것 아닙니까? 그것으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졌는데, 이제는 거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므로 다메섹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금식 기도하며 머문 것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려고 예루살렘에 내려간 것인데, 이제 그 예수 앞에 꺼꾸러져서, 또 소경까지 되어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바울이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더니 하나님 앞에 벌을 받아서 소경이 되었다고 망신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야지, 여기에 있다가는 망신만 당하겠다’하고 슬그머니 내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육신의 생각은 다 쓸데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오직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나 하는 생각, 자기 위신 문제는 다 내어 놓아야 합니다. 또 지금까지 내가 주장하던 것을 갑자기 돌이킬수있겠나 하는 생각도 다 내어 버려야 합니다. 다 내어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잘못된 것이 발견 되었으므로, 즉,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했으므로 이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메섹에서 사흘 동안 음식을 전폐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눈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을까요? 회개의 기도를 했을까요? 아마도 회개의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소경 된 것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 앞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발견한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몰라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런 악한 일을 행하였는가, 사람을 핍박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다’라고 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생각하십니다. 또 성도를 피 흘려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성도 하나하나를 예수님의 생명과 같이 여기십니다. 한 생명이라도 피 흘려 구속한 예수님의 생명체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같이 다메섹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자기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며, 이제 발견한 예수님을 경외하고, 그 예수님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바로 정리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심령을 예수님 앞에 바로 정리해야 되고, 자기의 모든 태도를 바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리하기 전에는 그곳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 사건을 당면한 바로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똑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을 찾아서 바로 해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멸시한다고 해도, 또 자기 위신이 다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눈이 낫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바로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흘 동안 음식을 전폐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울을 보실 때에 참으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왜 기뻐하셨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바로 하려고 하고 주님 앞에 잘못된 것을 찾으려고 하고 자신의 모든 태도를 바로 하려고 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앞길을 열어주어야겠다’하시고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고 하는 사람의 앞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사울이 아나니아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됨

본문 10-12절에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다메섹의 아나니아라 하는 성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서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의 아나니아는 5장의 죽은 아나니아가 아니고 다른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믿음이 독실한 신자입니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로부터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간다는 소리를 듣고서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피난을 갔을텐데, 아나니아는 그 말을 듣고도 다메섹을 떠나지 아니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메섹의 한 사람을 써야 할 상황에 그를 찾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한 사람을 보내야 하겠는데 누구를 보내어 사울에게 안수를 해 주어야 하나,라고 찾아보신 것입니다. 이에 찾아보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충성스럽게 환난을 각오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즉, 잡혀갈 각오를 하고 아예 순교를 각오하고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아나니아를 내가 쓰면 되겠다’하시고 그를 찾아 가셨습니다. 이때 아나니아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을 잡아 죽이고 또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여기 다메섹에도 잡으러 온다는 것을 다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오는 날이다, 조금 있으면 다메섹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잡혀서 감옥으로 갈 각오를 하고, 아예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나니아가 기도 하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기도를 얼마나 힘 있게 하였겠습니까?

또 사울은 기도를 얼마나 힘 있게 하였겠습니까? 마귀의 종 노릇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책망을 받았고 또 소경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또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을 당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울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생명을 내놓고 다메섹을 떠나지 아니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에게 가 보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쓰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떠한 사람들을 쓰십니까? 생명 전체를 다 내어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또 다메섹을 떠나지 아니하고, 즉 자기의 위치를 떠나지 아니하고 어떠한 환난이 와도 생명 전체를 다 내어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믿음을 지키겠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길도 열어 주시고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게으르고 나태해서 기도한다는 간판만 갖다 붙이고, 실제 생명 전체를 쏟아 부어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일심전력을 기울이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지 않으십니다. 전폭을 쏟아 부어서 기도하고, 또 자기 위치를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사람들이 지금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온다고 해서 자기 위치에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피난 가라고 하실 때에 피난 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때 아나니아에게는 피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 사울에게는 그곳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여기서 해결하라는 말입니다.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데 갈 수 있겠느냐, 해결하기 전에는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에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이 행한 성도 핍박에 대하여 다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신자들에게 해를 끼치고 다메섹에도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왔다는 것을 알지만, 사울에게 가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해를 받아야 할 것을 내가 너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상 밖의 일입니다. 사울이 사람 잡아서 죽이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하십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들어서 이방사람, 임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이처럼 판이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만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또 있습니다. 가령 사람은 열 냥짜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백 냥짜리로 쓰실지 모릅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택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겠는지, 그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고 심부름만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곡식을 내다 뿌리라면 뿌리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잘되겠는지, 저것이 잘되겠는지, 또 둘 다 잘되겠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하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가 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바로 순종해 나가면 됩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 하십니다.

본문 17-19절에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지만, 고린도후서 12장 7절 말씀에 아주 다 나은 것이 아니고 사단의 가시로 조금 남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늘 사울을 찔러서 사울을 살리고 그를 망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즉 찌르는 가시로써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다 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눈의 가시로 말미암아 사울이 세 번 하나님께 나아가 특별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것은 은혜로 준 것이니 다시는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로 준 것이다, 가시가 없으면 망할까봐 너를 만들려고 가시를 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시가 하나씩 다 있는데, 그것은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만들려고, 즉 성자로 만들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가시를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선 나를 성자 만들려고 주신 것이다’ 이렇게 믿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 나가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눈이 보이게 되었으며 또 그가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3. 사울이 즉시로 복음을 전함

본문 20-21절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 3일간 금식기도하고, 눈에 비늘같은 것이 벗어진 다음에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발견한 다음에는 즉시로 나가서 전파하는 일이 귀한 일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발견했는데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몰랐을 때에는 몰라서 안했지만 분명히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안 후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시다”하며 즉시로 나가서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즉시로 나가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사울이 회개하고 즉시로 나가서 전도했는데, 전도하는 것은 무엇을 많이 알고 난 후에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나가서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나가서 전도하는 것을 우리도 배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우리의 구주 되시는 것과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과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과 안믿으면 지옥에 가는 것을 즉시로 나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즉시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하는 것에 힘을 쓰고,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세상 말을 하다가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을 쓰면 하나님 기뻐하십니다. 또 복음을 들은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계속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맘이 편안하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전파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왔길래 그 사람한데 왜 술을 마시냐고 물어 보았더니 술을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 된다고 합니다.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그 보다 더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모든 스트레스가 다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기회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하여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도하는데에 힘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는데에 힘을 쓰지 않았습니까?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데 험상궂게 생긴 분이 내 앞으로 지나가면서 수건을 하나 집어 주길래 감사하다고 하며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 분은 가끔 절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죄사함을 받는 도리가 아니고 죄사함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만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수건을 제게 건네준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전도하라고 그런 기회를 만드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회가 생기면 전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즉시로 전도하는 것처럼 우리도 즉시로 전도하는 것을 배우고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택한 백성들이 교회로 나올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저 사람이 수단을 쓰려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아니냐? 하며 다른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이상히 여기고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 22절에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기도하여 얻은 영력과 진리에 대한 힘으로 봅니다. 사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동안 기도를 하고 힘을 더 얻어가지고 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또 진리를 많이 깨닫고, 힘을 더 얻어가지고 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를 할 때에 많은 사람이 그 영권에 굴복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는 영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1:17-18에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라고 하였습니다. 아라비아에서 3년간 기도하고 힘을 더 얻어 다메섹에 와서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며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4. 사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함

본문 23-24절에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란 바울이 회개한 후 여러날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했습니다. “이 사람을 두었다간 다 예수 믿는 사람이 되겠다”하고 공모하였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본문 25절에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담아 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2-33에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한 것에 대해서 늘 자기의 부족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담대히 나가다가 순교당하지 못하고 광주리를 타고 도망 간 자기의 연약한 것을 언제나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지만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2:17-18절에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 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하며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나갔습니다.

5. 바나바가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함

본문 27절에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를 잘 해 주었습니다. 사울 자신이 자기를 소개하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이 소개해 주는 것이 상당히 효과가 더 많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이며, 좋은 사람이며, 착한 사람이며, 믿음이 독실한 사람입니다.

본문 11:22-24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해던 것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바나바의 말을 믿고 “사울이 참으로 회개한 모양이다”하며 믿었습니다.

본문 28-29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출입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바울이 철학을 많이 알고 있으므로 나가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명하면서 변론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죽이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본문 30절에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사울의 고향 다소로 보내었습니다. 

6. 교회가 든든히 서 나감
 
본문 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란 사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한 것을 말합니다. 즉 사울이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였었는데 이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다시 전하므로 여러 지방의 교회 즉 유다와 갈릴리, 또 사마리아의 교회들이 평안해지고, 든든히 서 가고, 성령의 위로가 같이하고 수가 날마다 더 많아지며 부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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