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6일 월요일

사도행전 20:1-27 바울의 강론과 유두고의 실족.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바울의 강론과 유두고의 실족
사도행전 20:1-27

20:1 소요가 그친 후에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면하고,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하여 작별하고 떠났다. 

20:2 그가 그 지역을 두루 다니며 여러 말로 권면한 후에 헬라로 가서, 

20:3 석 달을 지냈다. 그가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려 할 때에, 유대인들이 그를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자,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20:4 그와 동행한 자들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테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다. 

20:5 이들이 먼저 가서 트로이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오일 만에 트로이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거기에서 칠 일을 머물렀다. 

20:7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빵을 떼려고 함께 모였을 때에, 바울이 그들에게 강론하였는데, 그가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한밤중까지 말을 계속하였다. 

20:8 우리가 모인 다락방에는 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20:9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문에 앉아 있다가 깊은 잠에 빠졌다. 바울이 더 오랫동안 강론하니, 그가 잠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그를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하게 하지마라. 그의 목숨이 그에게 있다." 라고 하였다. 

20:11 바울이 올라가 빵을 떼어 먹으며 날이샐 때까지 오랫동안 이야기한 후에 떠나갔다. 

20:12 그들이 살아난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20:13 우리가 먼저 가서 배를 타고 앗소로 갔는데, 이는 거기에서 바울을 배에 태우려는 것이니, 이는 바울이 자신은 육로로 가고자하여 이렇게 정한 것이었다. 

20:14 그가 앗소에서 우리를 만났고, 우리가 그를 배에 태워 미둘레네로 갔다. 

20:15 우리가 거기에서 배를 타고 떠나 이튿날 기오 맞은편에 이르고, 그 다음날 사모에 들렀다가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렀다. 

20:16 바울이 에베소를 지나쳐 항해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그가 아시아에서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가능하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다.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20:18 그들이 그에게 오자, 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너희와 함께 모든 시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너희가 안다. 

20:19 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기고, 또한 유대인들의 음모로 내게 닥친 모든 시험들을 겪으며, 

20:20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너희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너희를 가르쳤으며, 

20:21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 

20:22 보아라, 이제 내가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내게 닥칠 일들을 내가 알지 못하나, 

20:23 다만 성령께서 각 성읍에서 내게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신다. 

20:24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하여, 나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20:25 내가 너희 가운데 두루 다니며 그 나라를 전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 모두가 더 이상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안다. 

20:26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는데, 나는 모든 피에 대하여 깨끗하니, 

20:27 이는 내가 감추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너희에게 전하였기 때문이다. 

1. 헬라에서 석달 동안 하나님 말씀을 강론함

본문 1절에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갔는데, 마게도냐는 빌립보가 있는 지방입니다. 에베소 소동이 있은 후에 바울이 윗 지방인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거기는 빌립보와 헬라가 있는 곳입니다.

본문 2-3절에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여러 말로 제자들을 권면하고 헬라에 갔습니다. 마게도냐에 헬라가 있습니다. 전에 세운 교회가 있으므로 헬라에 석 달을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 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했습니다. 곧장 가면 유대인들이 해하려고 공모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이고, 빌립보, 헬라, 마게도냐는 유럽입니다. 헬라를 떠나서 즉 유럽을 떠나서 에베소로 가려고 합니다. 즉 아시아로 가려고 합니다. 아시아로 가려고 길을 떠났는데, 아시아까지 동행한 사람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또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가이오와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등 모두 일곱 명입니다. 일곱 명이 함께 바울을 따라서 아시아로 왔습니다.

2. 드로아에서 이레동안 하나님 말씀을 강론함

본문 5절에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일곱명이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바울의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본문 6절에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에서 빌립보로 가서 무교절까지 있다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배를 타고 닷새 동안 간 것을 보면, 아마 여러 곳을 들렀다가 간 모양입니다. 그때에는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 때이므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제일 좋은 여행편 같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배를 타고
닷새 동안을 가는 것도 큰 고욕입니다. 파도가 일어나면 그것은 더 큰 고역이고, 파도가 안 일어나도 배를 타고 닷새 동안 간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3. 유두고가 실족하여 떨어져 죽음

본문 7-9절에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란 성찬예식을 하기 위해서 모였다는 말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주일을 말합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란 바울이 주일날 강론하기를 밤중까지 계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삼층 누에서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마 다락이 삼층이었던 모양입니다. 창에 걸터 앉았다가 안으로 떨어졌으면 괜찮았을텐데 밖으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은 것이 틀렸습니다. 남들은 다 방안에 앉았는데 왜 창에 걸터앉았습니까? 그것은 유두고가 바깥도 좀 내다보고, 안도 좀 들여다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두고의 신앙 상태가 절반은 바깥으로 마음이 가 있고, 절반은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곳에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깥 좀 쳐다보느라고 말씀 듣는 데에는 전력을 다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모아서 말씀 듣는 데에 열중하지 않고 마음이 반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졸게 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한 귀는 하나님 말씀 듣는 데다 두고, 한 귀는 밖에다 두고 걸터 앉은 것입니다. 신앙상태가 시원치 않으므로 앉아 있는 것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졸 수 밖에 없고,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요새는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듣을 때 절반은 기울이고, 절반은 세상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한 발은 교회에 들여다 놓고, 한 발은 세상에 내어 놓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몸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할 생각을 가지고 달려 붙어서 나가지 않고, 그저 어느 정도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하고, 그 다음에 어느 정도는 세상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현 상태도 유지하지 못합니다.
얼마가면 떨어집니다. 즉 신앙이 타락이 됩니다. 신앙이 죽은 신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걸쳐놓은 것은 시원치 않습니다.
즉 “반신반의”는 시원치 않습니다. 전적으로 믿고 따라가야 되는데, 전적으로 믿고 따라가지 않고 한 발자국은 들여놓고, 한 발자국은 안 들여놓는 것은 시원치 않습니다. 곧 떨어집니다. 신앙의 졸음이 옵니다. 일심전력을 다 해야만 졸음이 오지 않습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졸음이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가 믿는 일에 모든 정성, 모든 마음,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서 주님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생명으로 삼고 따라가야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랬지만 어떻게 그렇게 다 할 수 있습니까?하며 말씀을 전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쉬운 것만 하여야 겠다고 하는 것은 유두고와 같이 걸터 앉은 신앙입니다. 언제 성경에 그랬는가? 또 어떻게 성경대로 다 하겠는가? 쉬운 것은 할 수 있지만 전적으로는 못 따라간다, 예수님도 따라가고, 내 볼장도 보아야겠다는 것은 절반씩 걸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 가면 다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볼장 보지 말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됩니다. 하나님 볼장만 보고, 예수님 볼장만 보고,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창에 걸터 앉아서 깊이 졸다가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삼층 누에서 떨어져 일으켜보니 죽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도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걸터 앉아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방안에 들어와 있긴 있지만 마음이 걸터 앉았습니다. 신앙 상태가 걸터 앉았습니다. 이 걸터 앉은 사람이 많은데 걸터 앉은 사람은 졸게 됩니다. 심령이 졸게 됩니다. 신앙 상태가 졸다가 떨어지게 되고 그 다음에는 죽게 됩니다. 아무 생명이 없는, 감각을 잃어버린, 죽은 믿음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방해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습니까? 예배 시간에 졸다가 떨어지므로 내려가서 일으켜보니 죽었습니다.

4. 바울이 유두고를 살림

본문 10절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강론하다가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바울이 내려가서 그 몸을 안고 아마 기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올라가서 떡을 떼어 먹고”란 성찬예식을 말합니다. 성찬예식을 한 후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본문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두고를 안고 “생명이 있다, 죽지 않았다” 하고 어디에 갔다가 누인 모양입니다. 아마 교회 유아실 같은 곳에 누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강론을 오래 하고 떠났는데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이제 유두고가 회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 번 떨어져서 죽었다가 살아났으므로 이제야 진짜 회개를 하고, 다시는 그렇게 앉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 곰국을 먹어야 정신을 차려서 다시는 걸터 앉는 짓을 안합니다.

한 번 징계를 받고, 죽을 고에 빠져야만 다시 이제는 그런 일을 안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주게 됩니다. 유두고가 만약에 다시 걸터 앉았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소도 한 번 빠졌던 구렁텅이에는 안 들어간다고 하는데, 전에 걸터 앉았다가 떨어져 죽었던 것을 바울이 기도하여 하나님이 살려 주셨는데, 다시 걸터 앉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한 번 곰국을 먹고, 죽을 고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준 다음에는 다시 걸터 앉는 일을 안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라가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13-14절에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라고 하였습니다.지금 바울이 드로아에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에 바울이 강론하다가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것을 바울이 살렸습니다. 왜 떨어졌습니까?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왜 창에 걸터 앉았습니까? 바깥도 좀 쳐다보고, 또 말씀도 좀 받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한곳으로 모인 것이 아니고 양쪽을 나뉘어졌습니다. 말씀 듣는데에 마음이 절반 오고, 바깥 쳐다보는데에 마음이 절반가고 졸음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졸음이 오니까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전심전력을 다해서 전적으로 믿고, 전심전력을 다해서 믿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음의 일부만 하나님께 기울이고, 마음의 일부는 세상에 두면 유두고와 같이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를 다 기울여서 믿는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또 몸의 태도도 안에 들어와 앉아있지, 왜 걸쳐 앉았는가? 몸의 태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생활을 해야 되겠는데 이것은 한 절반만 바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몸을 절반만 바치는 생활은 떨어져 죽는 생활이며, 조는 생활입니다.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으나 바울이 내려가서 살렸습니다.

5. 밀레도 행로

그 다음에는 드로아에서 떠나서 앗소라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바울은 걸어서 가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앗소로 갔습니다. 가서 바울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왜 앗소까지 걸어갔습니까? 배를 타고 가면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습니다. 아마 걸어가면서 무슨 볼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도 하느라고 걸어갔는지? 또 어떤 교회를 한 번 들렸다가 가려고 걸어갔는지? 하여간 걸어갔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서 앗소에서 먼저 기다렸습니다.

본문 14-15절에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기오 앞에 왔다는 것을 보니 하루동안 배를 타고 왔습니다. 또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하였는데, 며칠 동안 배를 탔습니까? 앗소에서 배를 타고 이튿날 어디로 갔습니까? 기오에 갔습니다. 기오까지 하루 왔습니다. 또 거기서부터 그 이튿날 사모에 왔습니다. 이틀 동안 배 타고 오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갔습니다. 사흘 동안 배를 타고 밀레도까지 갔습니다. 바울이 며칠 동안씩 배를 타고 다녔는데 배가 여행하는데 제일 좋은 방편 같습니다. 그 때에는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는 때이므로 말이나 병거를 타지 않으면 배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배를 사흘 동안 타고 갔습니다.

6. 바울의 권면

과거

겸손과 눈물로 가르침 본문 16절에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려고 급히 행선을 했습니다.

본문 17-19절에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하였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이란 바울이 언제나 겸손으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즉 눈물을 흘리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는 눈물,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비참하게 될 것을 불쌍히 여겨서 눈물로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란 여러 가지 시험을 많이 당했지만 참은 것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주를 섬긴 것과”란 여러 가지 시험이 많아도 잘 참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시험을 바울과 같이 잘 참으면서 주를 섬겨야 되겠습니다.

유익한 것은 꺼림 없이 전하여 가르침 

본문 20절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하였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유익한 것은 각 집에서도 꺼림이 없이 가르치고, 공중 앞에서도 꺼림이 없이 가르쳤습니다. 유익한 것은 그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가르치자” 하지 말고 공중 앞에서 서게 되면 거기서 가르치고, 또 공중 앞에 서지 않을 때에는 집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조건 어디에서나 꺼림이 없이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집에 다니면서 가르치고, 모아다 놓고 가르치고, 심방 가서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본받아야겠습니다.

본문 21절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각 처에 다니면서 가르쳤습니다.

현재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감 본문 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감동을 하시는 대로, 성령의 감동에 붙잡히워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깨달았습니다. 즉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고 간다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고 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였는데 앞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달려감 

본문 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까? 주께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하는 것이 자기의 달려갈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께 받은 사명이 나의 달려갈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고 나갔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생명을 내어놓고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명을 위해서 살다가 사명을 위해서 죽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사명을 다하고 죽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에는 진리 안에서 해야 됩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안에서 해야 됩니다. 바른 진리 안에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진리에 서서 자기 영혼이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바른 진리에 대한 사명을 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기가 진리에 바로 서서 진리에 대한 사명을 다해야 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 안다”고 하였는데 예루살렘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므로 생명을 내어 놓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함 본문 26-27절에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3:18-19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하지 않으면 악한 사람은 자기 죄 값으로 죽지만 그 피 값은 전하지 않은 사람의 손에서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듣는 사람이 안 듣고 그냥 나가다 망했으면 그것은 책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악한 사람이 망하는 것은 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다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자기가 전할 바를 다 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몇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였는지 하여간 전하라고 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다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깨끗합니다. 전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죄 값으로 망하지만 그 피 값은 전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니라” 하는 증거를 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전해야만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복음을 전해야 될 사람에게 다 전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멀리 이방 나라에 가서도 전할 수 있는 대로 전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 할 사람은 가야 되겠습니다. 또 심방할 사람은 심방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 하면 반드시 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만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바로하므로, 이 복음 전하는 사명에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힘써 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