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11
빌립보서 2:1-11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불쌍히 여김이나 인애가 있든지,
2:2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한 생각이 되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여라.
2:3 아무것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라.
2:4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라.
2:5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라.
2:6 그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2:7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2:8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니,
2:10 이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하시고,
2:11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셨다.
2:2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한 생각이 되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여라.
2:3 아무것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라.
2:4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라.
2:5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라.
2:6 그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2:7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2:8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니,
2:10 이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하시고,
2:11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셨다.
1. 한 마음을 품으라
권면을 잘 받으라
권면을 잘 받으라
본문 1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권면이 늘 있습니다.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은 아주 필요합니다. 잘 깨닫지 못하다가도 권면할 때에 깨달을 수 있고, 힘을 쓰지 않다가도 권면할 때에 힘을 쓸 수 있으며, 잘못 나아가다가도 권면할 때에 바르게 나아갈 수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권면이 언제나 있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권면할 수 있고, 깨닫지 못한 자를 권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권면할 때에 잘 받아야겠습니다. 권면할 때 잘 받는 사람은 소망이 있는 사람이고 권면할 때 잘 받지 않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권면할 때는 사랑으로 해 줘야 합니다. 권면 받을 때는 감사함으로 잘 받아야 합니다. 바른 권면은 잘 받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바로 하자고 권면하는데 그것을 안 받고 제 고집대로 나가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생각 한 것을 고칠 줄 모르고, 기어코 그대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가다가 결국은 망합니다. 진리문제가 아닌 것에는, 자기 생각이 달라도, 다른 사람의 권면, 특별히 윗사람의 권면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권면을 받지 않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권면을 잘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역대하 32장 23- 26절에,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열국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고 열국들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보물로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렸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자, 여호와께 기도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이적으로 죽게 될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웃시야 왕도 위대한 왕이고 많은 은혜를 받아 그의 명성이 열국에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문둥병이 들어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교만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교만이 제일 큰 죄입니다. 망하는 죄 가운데 교만이 제일 많이 망하게 됩니다. 망하는 사람 가운데 97~98% 이상은 다 교만해서 망합니다. 언제나 이 교만이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하면 패망이 오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교만해서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보답 해야겠는데 주 앞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바칠 것은 바치고, 하나님을 위하여 몸 바치고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할 것들은 충성해야겠는데 이것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매 번 받기만 하고 그 은혜를 보답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러한 마음의 교만을 뉘우쳤습니다. 히스기야는 뉘우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을 뉘우쳤으므로 예루살렘 거민들도 마음의 교만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데 교만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겸손해지면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돌이키십니다.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역대하 25장 16절에 선지자가 아마샤 왕을 책망 했을 때 아마샤 왕이 겸손히 회개해야 했는데, 회개할 줄 모르고 도리어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고 하자, 선지자가 가로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고 하였습니다. 멸하기로 결정된 사람은 선지자의 책망을 받지 않고 도리어 반항합니다. 그러나 복 받을 사람은 선지자의 책망을 잘 받고 그것을 고치고 교만을 뉘우치고 바로 섭니다. 권면을 받지않는 사람은 교만 때문에 받지 않는 겁니다. 누구든지 권면할 때에 겸손한 마음으로 권면을 잘 받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무슨 권면이나”라고 하였는데, 권면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역자가 바른 것을 권면할 때에, 권면 받는 사람이 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권면을 받지 않고 속이고 양심을 삐뚤게 쓰고 배반하면 무슨 복이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신령한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권면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권면을 받지 않는 사람은 교만해서 받지 않는 줄로 알면 됩니다. 교만은 내 생각과 내 고집을 우상으로 삼는 것인데, 그 고집 때
문에 권면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이 우상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고집이 최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고집을 버리고, 권면 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모든 면에 권면을 잘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권면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게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를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합니다. 자기보다 몇 십 년을 앞서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인도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복입니다. 부모를 순종하면 땅에서 장수한다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몇 십 년을 지내보고 흥망성쇠를 다 경험해보고 바로 인도해주기 때문에, 그 인도를 받으면 장수한다는 말은, 땅에서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권면을 듣지 않고 나아가면 가다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장수하지 못합니다. 함정에 빠지니까 장수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권면을 잘 받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도 진노를 다 돌이키십니다.
바른 권면을 받지 않으면 고집이 우상이고, 자기가 우상이고, 자기의 생각과 뜻이 우상인데 그 이상이 없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얼마 가다가 거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거꾸러진 것입니다. 고집이 우상인데, 영적으로 보면 벌써 우상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무엇이 될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떠납니다. 권면을 잘 받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3절에 보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나옵니다. 윗 사람과 친구들이 바른 권면을 할 때에 잘 권면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위로와 성령의 교제를 하라
“사랑의 무슨 위로나”라고 했는데, 여러 가지 사랑으로 위로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아주 필요합니다. 권면도 필요하지만 사랑으로 위로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래 전에 병든 성도에게 심방했었는데, 그분이 얼마 전에, 자기가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내가 심방을 와서 자기 병든 몸에다가 “회개하라”고 소리를 치고 가더랍니다. 그 때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말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런데 요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 말이 딱 맞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심방 갔었던 것을 잊고 있었는데, 그분은 얼마나 섭섭했으면 한 20년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바르게 하긴 했지만 위로를 해 주지 못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병든 사람 집에 가서 ‘회개하라, 죄가 있어서 연단 받는 다는 곰국 이야기(주: 푹 삶아지도록 연단되고 결국 영혼의 보양이 된다는 의미) 만 밤낮 하지 말고 위로해주는 일도 상당히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나서 교회에서 심방을 갔는데 회개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곰국 먹는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이 오더니 회개하라고 하고, 이번에는 또 다른 권찰이 와서도 또 회개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오면 다들 그 소리를 하니까 보기도 싫어서, 교회에 안 가야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가서 회개하라는 말도 물론 할 필요 있지만 사랑으로 위로해주는 것을 더욱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위로해주는 것을 더 많이 하고, 동시에 권면도 하는 것입니다. 매는 세게 때리고, 사과는 일곱 개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더 많이 하라는 말입니다. 심방 가서 사랑으로 위로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쓰러진 사람을 기름 발라주고, 싸매주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위로해 주는 그 위로가 교회에는 늘 있어야겠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야 하며 교역자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무슨 교제나”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교제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교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교제입니다. 은혜를 받아서 은혜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소통하고, 믿음으로 하고, 성령을 힘입어서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힘입어서 받고, 성령을 힘입어서 주기도 하는 성령의 교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긍휼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서로 긍휼을 베푸는 생활, 자비를 베푸는 생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서로 자비를 베푸는 마음 이것들이 중요합니다.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을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위로해주고, 성령으로 서로교제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언제나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같은 사랑으로 한 마음을 품으라
본문 2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사랑은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은 합하고, 마음은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고, 사랑이 같고, 뜻도 합하고, 마음도 하나라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간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이기주의는 마음이 같을 수도 없고, 또한 사랑이 같을 수도 없고, 뜻을 합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마음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한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사랑, 뜻, 마음이 있는데, 자기는 부인하고 나는 쇠해야겠고 그는 흥해야겠다는 입장에서 주의 사랑과 주의 마음을 가지고 주를 위하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면 다 하나가 됩니다. 언제나 주의 몸,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나는 아무리 쇠해져도 주의 몸 된 교회만 잘 되면 된다, 주의 진리만 세워나가면 된다, 어디가나 이것들을 잘 되게 해야겠다’고 나아가면 자기 뜻은 다 없어지므로 마음이 합해지지 않겠습니까?
주의 사랑을 가지고 주의 마음을 품어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다 죽이고, 전부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위하는 것들을 다 부인하고 자기는 다 깨져 나가고 마음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위하는 마음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을 위하는 뜻,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곧 진리를 세워 나가는 데 뜻을 합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데 뜻을 합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에든지 경쟁심으로, 허영심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내세우면 합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사람은 둘도 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은 다 버려야 하고 주의 뜻을 찾아서 마음과 뜻을 합해야 하며, 주의 지체를 사랑하며 세워나가는 마음으로 뜻을 합해야하고, 같은 진리를 세워나가는 마음으로 뜻을 합해야 되겠습니다.
맞지 않는 것은 다 자기 주장대로 하려고 해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 문제가 아닌 것은 자기만 죽어지면 다 맞습니다. 그러나 진리문제 때문에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진리 문제로 교단이 갈라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문제가 아닌데 왜 뜻이 갈라지느냐? 그것은 전부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 뜻, 자기 생각, 자기 고집을 세우려고 하니까 진리문제가 아닌데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지면 맞습니다. 죽어지면 왜 맞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없어져 주의 뜻만 따라가려고 하고 주의 말씀만 세워 나가려고 하고, 주님의 지체된 교회만 잘 되어가게 하려고 하는데,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데 맞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자기가 죽어지고, 자기는 쇠해지며, 주의 것만 가지고 살고, 주님의 것만 잘 되게 하려고 하며, 주님만을 위하면 뜻이 맞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문제가 아닌 것에 뜻이 맞지 않는 것은 자기가 죽어지지 않는 증거입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다 틀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가 죽어지면 다 맞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왜 맞지 않겠습니까? 진리문제가 아닌 것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는 것이고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나가는 것인데 왜 맞지 않겠습니까? 희생의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희생의 정신 아닙니까? 나는 쇠해져야 하는 것도 희생의 정신 아닙니까?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나아가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보내는 것도 다 할 수 있고, 개척교회 하는 것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
본문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툼이나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가 제일이고 남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어떤 면에는 자기가 낫지만, 다른 면에는 다른 사람이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
다. 다 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릿느릿 해도 보리밥은 잘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느릿느릿 하고, 똑똑하지 못하지만 보리밥만큼은 잘 한다는 말입니다. 보리밥은 그 사람이 해야 맛이 있습니다. 천천히 뜸을 들이면서 밥을 오랜 시간 동안 하는 바람에 보리밥이 아주 맛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빠른 사람은 밥도 빨리 해내지만 맛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느린 사람이 자기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패성, 속에 있는 눈의 들보를 늘 보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낫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인 것을 늘 깨닫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낫게 여겨집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할 때 잘못한다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기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내 꼴을 보시고 참으셨으니 나도 참자” 하면서 참았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내 꼴을 보시고 참으셨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내 꼴은 그 꼴보다 더 하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잘못된 것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꼴을 보시고 참으셨는데 나도 참자” 하고 참는 겸손한 마음,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됩니다. 자기 속을 늘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부패성과 싸우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제일 못된 건 자기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각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죄인 가운데 괴수인 줄 알면, 다 자기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괴수야말로 죄가 제일 많은 것이 아닙니까? 죄인 가운데 죄 많은 자가 자기인데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는 낫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입니다.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남을 낫게 여겨라. 어떻게 해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까? 자기가 제일이고 다른 사람이
다 자기만 못한데 어떻게 낫게 여길 수 있습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제일이어서 무엇이 틀리고, 무엇도 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눈에는 남이 틀린 것만 보입니다. 그 사람 눈에는 목사도 틀렸다, 무엇도 틀렸다 하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하나 해 놓으면 그것도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왜 잘못되었냐고 물어보면 자기 생각대로 안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왕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든지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고 해야 되겠습니까? 또 뭘 하나 하려고 하면 의견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자는 의견이 있고 저 사람은 저렇게 하자는 의견이 있는데 누구의 의견을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진리 문제가 아닌 것은 순종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진리 문제라면 그것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문제가 아닌 것은 순종해야 합니다. 사사 건건 이것은 이것이 틀렸다, 저것은 저것이 틀렸다, 또 그것도 틀렸다 하면, 무슨 일을 할 수있겠습니까? 진리문제가 아닌 이상 윗사람이 하는 것에 따라 순종하고, 교회 당회에서 하는 것에 순종하고, 총회에서 하는 것들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지, 매 번 하는 것마다 성토하고 비판하고 나아가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옆에서 그렇게 하면 일이 안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 사마리아 여자한테 뭐 하러 갑니까?”,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을 때 왜 가만히 둡니까?”, “300데나리온을 가지고 구제를 하지 왜 쓸데없이 허비하게 가만히 둡니까?” 하면서 옆에서 제자가 불평하는 그 식입니다. “얘들아, 마리아가 기름 부었는데 가만히 둘까? 책망을 할까?” 하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어봐야겠습니까? 제자들이 선생이고 예수님이 제자입니까? 그러면 못 씁니다.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고 따라 다니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배우고 협조할 생각을 해야지, 자기 생각과 맞지 않다고 불평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일이 안되겠습니까? 언제나 우리는 진리 문제가 아닌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말은 다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창광교회는 마이크를 왜 한 개 놓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한 개 놓아도 괜찮았습니다. 이제는 마이크를 두 개 놓았습니다. 그럴 때에, “왜 이병규 목사가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사람이 변했다”는 식의 말쟁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오르간이 저게 뭐냐? 제대로 사다 놓고 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불평하려고 하면 한이 없습니다. 그저 진리 문제가 아닌 것은, 그렇게 해야 되겠기 때문에 그렇게 했겠거니 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엇에나 다른 사람을 저보다 낫게 여기라’ 하는 말을 늘 기억하며, 자기는 죄인 가운데 괴수인 줄 알고,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늘 볼 때라야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본문 4절에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고 하였습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돌보고 남에게 신세 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 일을 자기가 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다 한다는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자립정신(自立情神), 즉, 내 일은 내가 한다, 남에게 신세 지지 않겠다는 정신, 남을 도와주겠다는 정신이 바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기 일을 자기가 안 하고 남에게 도움만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복도 복 대신 거꾸로 화가 옵니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의 신세 지려 하지 말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하고, 자기의 당한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고, 남을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힘을 써야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내 일은 내가 한다, 남에게 신세 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을 도와준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내가 자립적으로 한다, 우리 교회 일은 내가 한다, 자력으로 해야 된다, 도움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남을 도와준다, 다른 교회 도와준다, 다 그런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교인들도, “내 일은 내가 한다, 내가 나가서 무슨 노동을 해서라도 벌어서 남 신세 지지 않고 생활해 나간다, 그리고 남을 도와주는데까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바로 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본문 5-6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예수님을 배워 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됩니다. 예수님을 배우는데 예수님 마음을 배우지 못하면, 껍데기만 배우는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가짜입니다. 속은 그게 아닌데 껍데기만 좋은 것 갖다 붙여놓으면 그게 가짜 아닙니까? 속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마음부터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기를 비움
첫째, 예수님의 마음은 내놓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똑같은 영광과 권세와 보좌와 능력과, 하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그것을 다 내놓으셨습니다. 자기 영광과 권세와 보좌와 지위, 이것을 모두 내놓는 것이고, 내놓고 비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비었다는 겁니다. 다 내놓고 비어 놓는 것이 첫째입니다.
지극히 낮아짐
둘째, 지극히 낮아지신 것입니다. 본문 7-8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낮아지셨습니다.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잠언 8장에 보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계셔서 창조자가 되셨다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획하시고, 실제로 창조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창조자께서 피조물이 되셔서 지극히 낮아지신 것입니다. 탄생할 때부터 말구유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말구유에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낮
아지시고 섬기는 일을 하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 종살이하는 데 서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낮아지신 것, 이것이 예수님 마음의 두 번째가 됩니다.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자기가 만들어놓은 피조물이 되셨으니 얼마나 낮아진 겁니까. 지극히 낮아지셔서 낮은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셨습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고난 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괜찮은 나라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로 간 것과 같아서, 형편없는 그 나라에 가서 그 사람들과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자면, 얼마나 고난이 많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전에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처음 왔을 그 때가 얼마나 형편 없는 때였는지, 한 백 년 전 아닙니까? 그때 와서 한국 사람들하고 조그만 방에서 같이 먹고 자기도 했는데 그때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옥수수밥 먹고 조그만 방, 움막 같은 그런 데서, 같이 자면서, 같이 전도했습니다. 형편없는 고생을 그 때 많이 했습니다. 또 같이 걸어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는지, 오늘날 우리보고 지금 굶어 죽는 나라, 저 소말리아 같은 나라에 가서, 그 사람들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거기서 같이 전도해라 할 때, ‘예’ 하고 가는 사람이라야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대상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다시 말해서 사람이 만들어놓은 피조물, 물건과 같이 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네가 만들어놓은 물건이 되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물건이 되기까지 낮아지
는 마음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물건이란 것은 놓아 둔 데로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까? 또 옮겨 놓으면 옮겨지는 것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이 되는 건 당신께서 만들어 놓으신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가방을 예로 들면, 사람이 만든 것인데, 하나님이 “너 이 가방이 되라” 하시면 “예, 저 가방 되겠습니다.” 하고 가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방이 되면, 들고 다니면서 여기 갖다 놓으면 여기 있고, 저기 갖다 놓으면 저기 있고, 또 열면 또 열리고, 닫으면 닫히면서 별의 별 것을 다 집어넣어도 가만히 있습니다. 가방 한번 열어 볼까요. 자 여기에 별의 별 것, 수첩, 마스크, 여기 소금병도 가지고 다니네요. 소금이 소독약이라고 해서, 소금병도 넣고 다닙니다. 별 것을 다 가지고 다닙니다.
이와 같이 너는 피조물이 되라, 낮아져라, 저 아프리카 형편없는 나라에 가서 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같이 자고, 같이 먹으면서 전도해라 하면 “예” 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전도하다가 십자가 못 박혀 죽어라”고 하면 “예” 하고 가야 됩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북한에 문이 열리면 평양에 가서 교회 세우러 가면 좋겠습니다. 창광교회를 누가 맡아주면 나도 가서 복음 전하다가 순교 당하면 그거 얼마나 좋습니까? 거기 가서 복음 전하다가 천당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저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 세상 떠나면 뭘 합니까? 복음 전하다가 떠나는 게 얼마나 귀한 겁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됩니다. 아예 이기주의는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의 이기주의도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다 비우신 것입니다. 다 비우셨습니다. 자기 것이 1%도 없습니다. 백만 분의 1%도 없습니다. 완전히 다 비우셔서 지극히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아지라 하시니까 지극히 낮아지셨습니다.
섬김
셋째, 섬기셨습니다. 종으로 섬기라 하시니 여러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섬기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첫째는 영광, 권세 다 내놓으시고 비우시는 것, 둘째는, 지극히 낮아지신 것, 셋째는 섬기는 것입니다. 이미 죄를 다 씻어주셨는데,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어도 족하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신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6-27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종이 큰 자고, 섬기는 자가 하늘나라에서는 큰 자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많이 섬긴 자가 그만큼 큰 자입니다. 제일 많이 섬긴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자로 높여 주십니다. 많이 섬기는 자가 그만큼 큰 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좀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많이 섬기라는 말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게 좋은 것입니다. 섬겨야만 큰 자가 됩니다. 여러 교인들을 섬기고 여러 교회들을 도와주고, 여러 곳을 우리가 선교하고,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일 때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섬기는 자가 하늘나라에서는 큰 자입니다. 그게 예수님 마음입니다. 파출소에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써 붙였는데, 미국에서도 성경에 근원을 두어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May I help you?) 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도와주기만 하면 수가 나는 겁니다. 도와주기만 하면 수가 납니다. 봉사만 하면 수가 납니다.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우리가 어디서든지 봉사하려고 힘을 쓰라는 겁니다. 종의 자세로 섬기는 것은 큰 유익이 됩니다. 예수님은 종으로 우리를 섬겼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희생과 충성
넷째는 희생, 충성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 마음입니다. 희생, 충성하고 그 다음에는 복종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사는 것보다는 복종하고 죽는 게 낫습니다. 생명을 바쳐놓으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한 번 죽을 건 마찬가지인데 희생, 충성하고 복종하다 죽으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부활할 때, 하늘나라 갈 때, 큰 영광의 면류관이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넷째가 희생, 충성인데, 곧 예수님은 충성이십니다.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6절에,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고 하였습니다.
희생, 충성입니다. 아들로 충성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시다가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함
다섯째,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 어디까지 복종해야 할까요? 죽기까지 복종해야 합니다. 자기가 유익한데까지만 복종하는 게 아니라 죽기까지 하는 복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걷다가, 최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너희도 이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라,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복중에 있을 때부터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아마도 마리아 복중에서 성자의 영은 감옥에 있는 것과 같았을 것 같습니다. 살기까지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자, 죽는 게 영광이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복종은 죽도록 까지 해야 됩니다. 나 죽을까봐 순종 못한다 하면서 죽을까봐 순종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종하다가 죽는 것이 사는 길인데, 왜 죽을까봐 순종 못합니까? 죽을까봐 충성 못하면 그건 말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이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 마음만 배우면 우리가 살 길이 생깁니다. 이것이 사실은 사는 길이고 높아지는 길입니다. 또 이와 같이 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같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같이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가 있고 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같이 하십니다. 잠시라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곧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건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또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고, 그리고 항상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 마음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항상 은혜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늘 찾아오셔서 그 사람을 늘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 품은 사람은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낮아지면 끝까지 낮아진 대로 두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낮아진 대로 두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마음 품은 사람을 어떻게 하시는지 한번 봅시다.
3. 그리스도를 높이심
본문 9-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심
첫째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지극히 낮아져서 희생, 충성하고, 종살이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또 죽기까지 복종하며 나가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볼 때 다 감동하여 우러러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높이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지극히 높여 놓으셨으며, 천지 만물을 다 예수님에게 맡기셨습니다. 부활 시키시고, 만물의 권세, 하늘과 땅의 있는 권세를 주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장사한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했는데 하늘에까지 높여주셨으니 얼마나 높아진 것입니까. 가장 요긴한 자리, 중요한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에 마귀도 벌벌 떨고, 예수 이름에 천지 만물이 다 벌벌 떱니다. 주여! 이 한 마디를 하면 마귀는 물러납니다. 마귀 시험이 오면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주여, 한 마디 하면 마귀가 물러납니다. 삼각산에서 기도할 때, 나는 이 쪽 굴, 다른 목사는 저 쪽 굴에서 기도를하는데, 밤이 되자 다른 굴에서 기도하던 목사가 기도할 때에 여러 마귀들이 왔다고 합니다. 자기 목을 누르고, 소리를 질러도 할 수 없었는데 “주여!” 한 마디 하니 다 도망갔다고 합니다. 찬송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라는 단어만으로 찬송해도 됩니다.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어서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이면 천당에도 갈 수 있고, 마귀를 이길 수 있고, 모든 세상을 다 이길 수 있으니 얼마나 권세가 많습니까. 이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를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세상을 이길 힘, 권세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님에게 꿇게 하심
두번째는, 모든 무릎을 예수님에게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예수 이름에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마침내는 하나님이 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꿇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심
세번째는, 본문 11절에,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듯이, 이제 모든 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여 영광 돌릴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주시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들을 복종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모든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왕, 영원히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것은 마치 요셉이 팔려서 종살이하고 감옥살이 하다가 왕의 꿈을 해석하여, 왕이 총리를 삼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왕이 요셉을 애굽에서 제일 높여 놓았고, 가나안 땅에서 종으로 팔려온 온 요셉에게 다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강제로 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로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이 처음에는 강제로 무릎을 꿇었지만, 7년 흉년 때에 요셉의 지혜와 통치로 굻어 죽지 않고 살게 되었을 때 감복하여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처음에는 이렇게 부활, 승천시켜 그 이름을 높여 놓으시고, 두 번째로는 모든 무릎을 강제로 그 이름 앞에 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꿇으면 살고, 꿇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재림할 때,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에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날이 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범으로 이렇게 했으므로,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면 우리도 예수님의 높아지신 것과 같이 높아집니다. 부활하고 승천하고 또 천년왕국의 왕이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기 권세와 영광을 내 놓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 존귀, 권세. 지위를 다 내놓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피조물이 되는데 까지 낮아지심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종살이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 종살이한 것, 즉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는 생활입니다. 섬기는 생활이 좋습니다.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심부름하고 많이 이용당하고 멸시 천대받는 것, 수욕도 달게 받고, 다른 사람이 무시하는 것도 달게 받고, 그 사람을 섬기는 것, 낮아지는 것, 복종,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을 배우면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고, 순종을 배우지 않으면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나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자기에게 유익되는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순종하는 것입니까? 예, 죽기까지 입니다. 순종하다 죽으면 얼마나 영광입니까. 죽지 않고 죽을 때까지 끝까지 순종하는 것도 귀하지만 죽는 게 더 귀합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가면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여러 면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사람에게는 안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볼 때에 “아, 그 사람, 참 잘한다, 결함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는 모든 면에서 순종하는 것이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사업할 때도, 직장에서, 또 가정에서 성경말씀 대로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 할 때도, 교회에서도, 교회에서 연보할 때도, 성경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주시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높여 놓으신 다음, 강제로 모두를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아 놓고 복종 안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지내보니까 과연 주님이십니다, 과연 당신 덕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주’라 시인하며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낮아지셨고, 손해가 나도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성경대로 무엇을 하든지, 성경대로 어디를 가든지, 성경대로 죽기까지 복종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높여 놓으시고, 모두의 무릎을 꿇게 만들어 놓으시고, “지내보니 당신 때문에 우리가 살았습니다”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섬기는 일, 종살이하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성경대로 죽기까지 순종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