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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9일 일요일

아가 8:1-14 승리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승리(勝利)
아가 8:1-14

1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3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4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5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8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9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10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11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12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13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14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1. 육에 속한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령한 생활

예수님과 입 맞추는 생활

본문 1-4절까지는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본문 1절에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에서의 ‘네’는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비와 같았다면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어도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않았을 것이나 예수님이 오라비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입을 맞추면 멸시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라비와 입을 맞추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않지만 예수님과 입을 맞추면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라비는 육신에 속한 자를 뜻하는데, 육신에 속한 형제들과 입을 맞추는 것은 업신여길 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입맞춤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세상이 업
신 여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세상 말을 하면 다 좋아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오라비는 세상에 속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상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멸시할 자가 없지만,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령한 일을 하니, 신령한 세계에 이르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신령한 세계의 성도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5-6절에는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면 세상이 다 듣지만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안 듣고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예수님과 입 맞추는 생활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영의 일이고 영의 길을 걷는 것이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이상히 여기고 멸시할 것은 정해놓은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에 속한 일을 했더라면 그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신랑을 왜 업신여기는가 하면 신랑은 세상에 속한 신랑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신랑이라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신랑이므로, 그 신랑이랑 입을 맞추었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 여자를 이상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그 신령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입 맞추는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밤낮으로 주여, 주여가 뭐야? 예수만 믿으면 다 되나?’하고 멸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현실주의, 기독교 사업주의는 믿음이 없는 사람도 좋아하고, 기독교 정치주의 같으면 야당이나 여당이나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영의 운동이고 하늘의 운동이고 생명 운동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해를 못합니다.

어저께도 기도원에서 봉사하느라 일자로 서서 흙을 나르는데 논에서 일하는 사람이 척 쳐다봅니다. 척 쳐다보길래 ‘저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고 저렇게 쳐다볼까?’하고 생각해보니 ‘저것들이 정신이 있나? 이렇게 분주할 때 잔뜩 모여 흙을 나른다고 일제히 서 있고 한심스
럽기 짝이 없다’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어도 우리는 예수님과 입 맞추는 생활을 하는 것이 괜찮습니다. 보배가 있고 신랑이 있으므로 상관없습니다.

돈도 세상 일을 하면서 세상에 기부하면 다 환영해도 예수님을 위해서 바쳤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신이 나갔다. 뭐 하러 예배당에 바쳤냐?”라고 하면서 멸시합니다. 또 ‘돈 있으면 다른 것이나 하지, 예배당에 갖다 바치니 목사가 돈 많이 벌겠다’고 하며 목사가 다 받는 줄로 압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목사에게 “목사님, 교인이 몇 명이니 수입이 상당히 많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십일조를 왜 하느냐?”고 묻길래 “자기가 벌었어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또 환경을 주시고 일이 다 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당연한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라고 했으므로 해야 한다”고 하면 “목사님 혼자 많이 가져서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든 일반 교인의 연보든 두, 세 사람의 회계와 서기가 임명된 제직회라는 재정 처리 기관에서 맡아 은행에 저금을 해놓고 관리를 한다. 사용 할 때에는 꼭 필요한 데에만 제직회를 통해 결의하여 사용한다. 또 교인의 수와는 상관없이 교역자에게는 월급으로 정해진 만큼의 돈을 주고 나머지는 구제와 하나님 일에 사용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구제도 하느냐?”고 물어서 “구제를 많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때서야 이해가 되는 듯하였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신앙 생활은 무시하고 오라비 입 맞추는 세상 육신의 일을 하면 좋아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다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업신여긴다고 해도 해야 합니다.

영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으라

본문 2절에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이끌어’라는 것은 예수님을 붙잡고 이끌어서라는 뜻입니다. 아가 3장 4절에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침상에서 잠자다가 잃고 나서, 찾으려고 성읍과 거리에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갔으나 못 찾다가 바로 가르치는 교역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조금 힘을 써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고 하였는데, ‘어미 집’은 우리 영이 거듭난 집이고, 진리와 영감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어미의 집은 영의 세계이고, 진리와 영감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잉태한 자의 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서 붙잡고 어미의 집, 신령한 세계, 영의 세계로 들어가 예수님에게서 교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 예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며, 거기서 바른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께 드릴 것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라고 하였는데, 성도가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이 꿀송이보다 달게 되면 이제 예수님에게 향기로운 술, 석류즙을 대접해야 합니다. 향기로운 술, 석류즙은 말씀대로 산 열매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새김질하며, 나아가 말씀이 속에서 역사하여 그대로 살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석류즙’이라고 하였는데, 겉이 단단한 석류처럼 단단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새김질하면 그것이 생명이 되고 자기의 힘과 기쁨이 됩니다. 또 자기의 영이 소생해 올라오면 그것이 예수님에게 대접하는 향기로운 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드리면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은 석류즙으로 예수님께 마시우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마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왼손만 베지 말고 오른손에 붙들리라

본문 3절에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왼손은 위로와 안식과 평화를 주는 손이고, 오른손은 능력의 손이요 우리를 붙들어서 일으켜 세우는 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왼손을 베고 위로와 안식과 평강을 얻어야 하고, 예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서 새 힘을 얻고 벌떡 일어서서 걸어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왼손만 붙잡지 말고, 오른손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왼손만 베고 있으면 마음이 기쁘고 평안한데, 또 오른손에 붙들려야 일어섭니다. ‘주여, 능력의 손을 붙듭니다’라고 하며 오른손을 붙잡으며 ‘일어섭니다’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갑니다’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능력의 손에 붙들려서 일어서는 생활을 하면 약한 자가 강해지고 병든 자가 나아지고 힘없는 자의 다리에 새 힘이 생깁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려서 소경이 눈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혈기마른 자가 힘을 얻어 일어서고 달음박질합니다. 그런 능력의 손에 붙들려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다 능력의 손에 붙들리시기 바랍니다. ‘위로와 평강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능력의 손에 붙들리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주님의 오른손을 언제나 힘 있게 붙들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그 사람을 붙들어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새 힘을 주셔서 걷게 만드십니다. 강건하게 만드십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신앙과 술람미 여자의 신앙

본문 4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가 2장 7절과 아가 3장 5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깨우기 잘하고 흔들기 잘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잘하는 성격임을 알고 나가야 합니다. 또 예수님과 같이 사는 술람미 여자에게 “예수를 믿어도 별나게 광적으로 믿는 너는 잘못됐다”라며 흔들어 깨워서 자기와 같이 만들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 여자들, 보통 신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가 2장 7절에 ‘노루와 들 사슴으로 부탁한다’고 하였는데, 노루와 들 사슴은 놀래기를 잘하는 짐승으로서, 이것은 성도의 깨어나기를 잘하는 신앙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 예수님께도 노루와 들 사슴으로 표현한 것은(본문 14절) 예수님의 재림이 빨리 온다는 뜻입
니다. 성도에게 비유된 것은 성도가 깊은 신앙에 들어갔다가도 노루와 들 사슴처럼 후닥닥 뛰어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번 깊은 신앙의 자리에 들어갔다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는 까딱하면 노루와 들 사슴처럼 뛰쳐나오게 되기 때문에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흔들고 깨우지만, 그래도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에게 깨우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들이 깨웠으니 양심에 가책이 올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깨우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술람미 여자 같은 신앙의 성도가 가장 좋은 신령한 궁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더불어 신령한 교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깨워서 보통 예루살렘 여자들 식으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새 2부 예배, 3부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예배당이 좁아서 그런 데도 있으나, 대개는 놀러다닐 시간 외에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주일날 놀러 다니고 일하는 것을 허가 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를 드렸으니 마음 편안하게 가서 놀고, 마음 편안하게 가서 장사하고, 마음 편안하게 직장에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차라리 1부 예배를 안 보고 일을 보러 가고 놀러를 가면, 주일 범한 것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고 회개할 기회가 오겠는데 이것은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낮에 예배 1시간 왔다가 가면 주일에 믿는 일을 다 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온갖 할 일을 하고 자기 볼 장을 다 보며 돌아다니는 자들이 예루살렘 여자들입니다.

새벽 기도도 별로 안 하고, 새벽에 나와도 잠시 왔다가 가니 깊은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대로 나가려는 생각도 없이 평생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요새 신 신학 교회나 에큐메니칼 교회가 그런 식으로 하면서 연보는 잘하고 예배당 지을 때면 잘 짓고 또 사업도 잘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깊은 자리, 신령한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젖으로나 먹이는 교훈, 목사 자신이 기도도 안 하고 깊은 세계에 못들어가는데 어떻게 신령한 젖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잘 되어가고 사업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선교 사업도 많이 하지만,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므로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과 같이 들로 나가고 동네로 가지 못하므로 깊은 교제가 없고,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로 가지 못하므로 바짝 주님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통으로 그저 왔다 갔다 하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여간 깊은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서 깨지 않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앙의 길이 다르고 종류가 다릅니다. 예루살렘 여자는 술람미 여자와 다릅니다. 같이 믿는 사람이지만 신앙의 종류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하나님이시고 성경도 한 성경이고 성령도 한 성령이고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지만, 길이 다릅니다. 종류가 다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밤낮 돌아오라고 깨우고, 술람미 여자들은 언제나 깨지 않으려고 깊은 세계에 들어가 살려 합니다. 그러니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것을 분별하고 나가야 우리가 술람미 여자의 길을 걸어가며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신 신학도 같은 신자, 인본주의도 같은 신자가 됩니다. 또 교역자들이 노라리하러 다니는 것도 괜찮아집니다. 교역자들은 놀러 다니면 안 됩니다. 교역자 수양회로 모이면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배우고 일심정력을 다해서 신령한 자리에 들어가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요새 신 신학이 들어오고 교회 안에 정치 운동이 들어와서 교회가 데모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습니까? 목사나 신부가 반 정부 데모하는 것이 옳습니까? 교회가 세상 운동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유다 나라가 로마 가이사 황제의 속국이었어도 가이사 황제에게 할 것은 다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독립 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가 개인적으로 나가서 자기 소신대로 정치 운동을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안에서는 정치 운동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 맞습니다.

2. 거친 들에서 오는 성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성도가 깨어남

본문 5절에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올라오니 누구인가 하고 술람미 여자의 고향 동네 여자들이 물어봤습니다. 그 말에 왕이 대답하기를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너’는 술람미 여자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미가 복음으로써 낳느라 신고(辛苦)한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고 하였는데, 사과나무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고 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자고 있는 성도, 세상에 빠져 있는 성도를 깨워서 데리고 가시는 곳이 ‘사과나무 아래’라는 것입니다. 아가 2장 3절에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 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라고 하였는데, 성도가 깨어나려면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일심정력을 기울이며 해산하는 수고를 할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깨어나는 은사를 안 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려고 애를 많이 썼고,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습니다. 또 교인들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는데,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과나무 아래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애를 많이 쓰고 일심정력으로 나아갈 때에 깨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저것이 가짜냐 진짜냐, 참으로 예수님만 의지하고 오는 자인가, 인본주의인가’, 이러한 것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압니다. ‘거친 들’은 세상인데, 거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만 바짝 의지하고 가며 누군가 물어보니 예수님께서 낳은 자가 애를 많이 썼고 어머니가 신고를 많이 했고 자기 자신이 애를 많이 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과나무 아래에서 술람마 여자로 깨워졌다고 답한 것입니다. 교역자도 힘을 많이 써야 술람미 여자가 되어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술람미 여자는 그저 자다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쓰는 것,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3. 사랑의 힘

술람미 여자의 사랑

본문 6-7절은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본문 6절에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 자기를 인같이 예수님의 마음에 품고 또 옛 시대에 도장을 팔에 매었듯이 예수님의 팔에 매어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인같이, 도장같이 손바닥에서 떠나지 않게 해주실 줄을 믿고 간구하니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49장 15-16절의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하면 예수님께서 손바닥에 새겨주십니다. 벌써 새겨놓으셨습니다. 벌써 마음에 품고 다니십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계셔서 좀 더 깊은 사랑의 교제, 좀 더 깊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인 술람미 여자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사랑은 적극적으로는 생명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게 정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소극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우상을 섬기는 때, 예수님께서 죽음과 같은 기세로 투기하셔서 불같이 다 살라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폭포수와 같이 사랑을 쏟아 부어주시는데 거기서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아예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그냥 내리 부어주시므로 끊을 수 없습니다. 달아나면 끝까지 따라오면서 내려줍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사랑도 이제 끊을 수 없습니다.

2세기 경에 폴리갑이라는 감독을 로마 정부가 잡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 태워 죽일 때에 예수님을 한 번만 모른다고 하면 놔준다고 하자, 폴리갑이 “예수님은 나를 86년 동안 사랑하시되 한 번도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모른다고 하리요”라고 하여 불타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에 감격해서 사랑에 삼키어진 순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그 사랑 가운데 거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생명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그를 징벌하고 성도를 죄짓게 하는 것을 투기하셔서 다 멸망시키십니다. 여호와의 불을 누가 막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투기로 내려오는 그 불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 7절에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3장 2-4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만큼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폭포수와 같이 계속해서 쏟아 부어주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이 와도, 불이 와도, 죽음이 와도, 다른 어떤 것이 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또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사랑할 때에 창수가 나도 죽음이 와도 예수님을 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에 감격해서 그사랑에 삼키어져서 생명을 단 마음으로 내놓고 나가는,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이 술람미 여자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우리가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4. 작은 누이 보호

심령이 어린 성도를 돌봐야 함

본문 8절에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의 고향에 왔을 때, 그 형제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술람미 여자가 어렸을 때에 그들의 형제들이나 남동생이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영적으로는 작은 성도, 즉 심령이 어린 성도를 말합니다. 영이 자라나지 못한 성도는 심령이 어리니 말씀을 잘 먹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나눠 먹여줄 수 없는 것을 유방이 없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좀 도와주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어린 성도를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좋겠는가 하며 심령이 어린 성도를 위해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은으로 망대를 세워주고 백향목 판자로 둘러줄 때에 감사할 것

본문 9절에 “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성도가 성벽이라면 또는 문이라면 우리가 은 망대가 되어 또는 백향목 판자가 되어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어리니 분멸하지 못하여 사이비나 이단, 또 인본주의나 비 진리 등의 잘못된 것이 와도 예수님이면 다 좋다고 받아주게 됩니다. 자기 심령에 손해를 줄 이리 떼인 줄도 모르고 문을 열어주어 일이 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을 판자로 둘러서 막아야 어린 심령이 손해를 안 보고 곁길로 안 갑니다. 여기서 ‘백향목 판자’라고 한 것을 보면 그 판자가 값을 많이 들인, 좋은 향기가 나는 고급의 목재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일심정력을 기울여 공력을 많이 들인다는 뜻입니다. 하여간 은 망대를 세워 올라가서 원수를 막아주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매우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린 누이가 조심할 것은 막아줄 때에 “막지 말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거 하나 모르겠느냐? 내가 철이 없느냐? 날 아이로 본다”라고 하거나 “내가 예수 믿은 지가 몇 십년이 되었는데 그거 모르겠느냐? 다 가라, 보기 싫다”고 하면 막아주려고 해도 막아주지 못합니다. 자기가 어리면 어린 줄 알아야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가만히 있으면 거저먹을 것인데 공연히 반대하다가 그만 일이 다 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가 복이 있고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겸손하고 순종하면 와서 망대도 세워주고 판자도 둘러주고 신앙이 보전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잘 자라나서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입니다. 자라난 사람들은 가서 이렇게 만들어 주어야 하고,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만들어줄 때에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5. 포도원을 위해 일하는 자의 상급

자라난 성도가 귀함

본문 10절에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여자의 말입니다. 쑥 자라나서 키가 종려나무와 같이 많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견고한 성벽, 쇠기둥, 놋 성벽, 유방은 망대와 같이 많이 자라난 술람미 여자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화평을 얻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라난 성도가 귀한 것입니다. 자라난 성도는 이 만큼 견고해져서 악한 자가 와서 침입하지 못합니다. 유방은 망대와 같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아주 견고하고 신령한 젖이 풍성해서 많은 사람에게 나눠 먹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만드신 목적

본문 11절에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 고향 근처에 바알하몬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솔로몬의 포도원이 있습니다. 바알하몬은 세상을, 포도원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포도원, 즉 교회를 두셨는데, 그 실과를 인하여 예수님께 은 일천을 바쳐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일천이라는 것은 많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을 맡은 사람들은 일심정력,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아름다운 행실을 하나님께 많이 돌려야 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모든 좋은 것과 값진 것을 하나님께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될 것을 안 바치고 자기만 먹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십니다. 먹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조금 먹고,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 다 바쳐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충성하고 전심전력으로 예수님께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마음을 바쳐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더 많이 받으십니다. 실과를 지키는 자는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몫의 5분의 일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주시면 조금 받고, 예수님께만 다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주신다며 더 받으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포도원, 즉 교회는 이제 예수님을 위해서 은 일천을 바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은 일천을 바친다’는 것은 모든 정성과 물질, 모든 힘과 노력, 희생,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과를 지키는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조금 떼어 주십니다. 영화롭게 되도, 새 힘을 주시며, 존귀하게도 해주십니다. 모든 것을 조금씩 주십니다. 포도원을 지켜서 예수님께 다 바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5분의 1만 받아도 대단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에게 속한 포도원이 이렇게 술람미 여자 앞에 있는 것입니다.

6. 동산에서 재림을 고대함

본문 13절에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말입니다. ‘동산에 거한 자’는 술람미 여자인데, 술람미 여자가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어 부르는 새 노래를 예수님께서 듣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도 듣기 원합니다. 좋아합니다.

본문 1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신데, 즉 ‘예수님이시여, 빨리 달리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산들에서’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또 노루와 사슴은 빠른 것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 하늘나라에서 빨리 달려오십시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합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기를 날마다 고대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잘 준비한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 속히 오시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자리에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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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8일 토요일

아가 7:1-13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
아가 7:1-13

1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7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8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10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1.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

복음을 전하고 심방하러 다니는 발이 아름다움

본문 1절에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9절은 왕의 말입니다. ‘귀한 자의 딸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존귀하게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존귀한 자이고, 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딸이 되었으니 귀한 자의 딸이 된 것입니다.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는데, 첫째는 성도의 신을 신은 발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에베소서 6장 15절의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는 말씀처럼 ‘복음의 신’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신을 신고 다니는 성도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신을 신고 다닌다’는 것은 복음대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 말씀대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신을 신은 것입니다. 제 마음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복음을 가지고 산을 넘는 자에 대하여는 이사야 52장 7절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러 다니는 발, 심방하러 다니는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다. 성도가 복음대로 걸어가는 발이 아름답고, 복음을 전도하러 다니는 발이 아름답고, 심방하러 다니는 발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의 뜻입니다.

윤 할머니가 9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 전도하러 많이 다녔습니다. 전도지를 이고 남산에도 가고 바깥 공원에도 가고 형무소에도 갔습니다. 그리고 갔다 와서는 나보고 어디에 갔었다고 말을 해줍니다. 그렇게 90세가 넘도록 전도하러 다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
다. 전도하러 다니는 발,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또 심방하러 다니는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다.
요새 노인들이 구경을 잘 다닙니다. 어떤 노인 부부가 1년에 4번씩 구경을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안 가본 데가 없이 홍도며 울릉도 등 다 가봤다고 합니다. 무슨 온천이고 할 것 없이 다 가 봐서 이제는 가볼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일 년에 4번씩 여
행을 다니느냐고 물어보니까 동네에서 구경을 시켜준다고 합니다. 동네에서 누가 공짜로 구경을 시켜주는가 하면 국회의원 출마하는 사람, 동네에서 인심 쓰려고 하는 사람 등이 일 년에 2번씩은 구경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영감님 부부 고향이 파주인데, 서울에 있는 아들들이 일 년에 2번씩 여행을 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번씩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행 다니는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까? 여행 다니는 발이 아름다운 발이 아닙니다. 복음의 신을 신은 발, 복음을 들고 가는 저 성도의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다. ‘신을 신은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신을 잘 신고 다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신을 벗고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까? 자기 신입니다. 제 마음대로 하는 신, 제 주장, 제 뜻대로 하는 신, 자기 완력, 자기 방법으로 하는 신, 자기를 위해서 다니는 신을 다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신을 신고 복음대로만 걸어가야지,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주장대로 하는 자기 신을 그대로 신고 나가면 안 됩니다. 자기 신은 벗고 복음의 신을 신은 성도의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다.

연합함이 아름답고 힘이 있음

그 다음에 둘째는 넓적다리가 나왔습니다.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넓적다리가 둥글어서 구슬 꿰미 같다고 하였습니다. ‘넓적다리’가 나왔는데, 이것은 두 넓적다리가 연합해서 힘을 쓰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넓적다리
가 합해서 그것이 연합이 되어 몸뚱이 전부를 운반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연합의 힘, 연합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서로 연합해서 나갈 때에 힘이 있습니다. 넓적다리가 힘이 있지 않습니까? 또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연합할 때에 힘이 있고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시편 133편 1-3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아름답다고 하였습니까?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이 흐르는 것과 같고 옷깃까지 또 헐몬 산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영생의 복이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연합의 힘,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택할 때에 입후보한 이가 두 사람이었습니다. 공천할 때에 누구를 공천했습니까? 한 사람은 맛디아이고, 한 사람은 바사바입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으로 둘을 택하라고 하였습니까?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지금까지,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자 가운데에서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 둘째는 우리와 더불어 증거할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항상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은 제자들 중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어디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환난이 오고 고난이 오며 십자가가 닥쳐도 항상 함께 다니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여야 합니다. 또 우리와 ‘더불어 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불어 정신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더불어 하자. 연합하자. 같이하자’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주의가 아닌 연합하여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합당치 않습니다. 자기 개인주의를 버리고 더불어 정신, 같이 협력하고 같이 세워나가고 같이 받들어나가는 더불어 정신이 있는 사람, 그 가운데서 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넓적다리’가 바로 더불어 정신입니다. 그것이 구슬 꿰미와 같이 아름답고 공교한 창식을 만들어놓은 것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연합하는 힘이 아름답습니다. 연합하면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연합하면 한 사람이 넘어질 때에 옆에서 일으켜 세워준다고 하였습니다. 연합할 때에 한 사람이 넘어져도 다른 사람이 일으켜준다는 것입니다. 연합할 때에는 힘이 있습니다. 한 겹 줄은 끊을 수 있지만 두 겹, 세 겹으로 연합한 줄은 끊을 수 없습니다. 전도서 4장 9-12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연합된 힘,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연합하지 못할 때에는 그만 다 망하고 맙니다. 연합하지 못하고 저희끼리 물고 찢고 싸우고 다투면 그들은 다 망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소(小)를 버리고 대(大)를 살려서 연합해나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먹음

본문 2절에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배꼽’이라는 것은 모태에서 피를 먹던 것인데, 모태에서 배꼽 줄을 통해서 피가 공급됩니다. 성도의 배꼽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먹은 자취입니다. 배꼽이 피 먹은 자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속의 피를 먹은 그 자취가 아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피를 먹지 아니한 자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구속의 피를 먹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얼마나 아름답게 보는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라고 하였는데,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이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주를 부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 즉 구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구속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먹은 자취를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과 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아주 아름답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

넷째는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것으로 허리의 띠를 띠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것으로 허리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허리는 자기의 몸을 가리키는 것인데, 옛사람은 쳐서 복종을 시키고 진실한 것으로 허리의 띠를 띤 것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다는 것입니다. 밀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잘 익은 밀을 낫으로 베어 단을 묶어 세워놓으면 그 곡식이 가득한 밀단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밀단에는 밀이 달리지 않았습니까? 소득이 풍성하며,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와 같이 성도의 허리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허리, 진실한 것으로 띠를 띤 허리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허리가 백합화로 둘러놓은 밀단과 같이 아름답게 보이고, 소득이 많다는 것입니다. 밀단의 소득이 많지 않습니까?
양식이 많고, 향기가 납니다. 백합화를 둘렀으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자기를 쳐 복종시키고 진실한 것으로 허리의 띠를 띠어서 언제나 진실하여야 합니다. 첫째도 진실, 둘째도 진실, 셋째도 진실입니다. 진실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기선 목사님한테
어떤 사람이 가서 “성도가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이기선 목사님께서 “첫째가 진실이다”라고 하셨답니다. 또 “성도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둘째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둘째도 진실이다”라고 하셨답니다. “셋
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진실이다”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도 진실, 둘째도 진실, 셋째도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단속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백합화를 두른 밀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령한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아름다움

다섯째는 두 유방입니다. 본문 3절에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유방’은 믿음과 소망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먹여주려고 준비한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젖을 먹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먹여주려고 준비해가지고 있는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새김질하고 자기 양식으로 삼아서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유방과 같이, 쌍태 암사슴과 같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방비하는 목

여섯째로 본문 4절에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망대가 높지 않습니까? 목이 망대처럼 높아야 합니다. 목이 좀 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망대가 얼마나 높습니까? 성도의 목은 길어서 멀리까지 쳐다보아야 합니다.
기린의 목이 길지 않습니까? 목이 집 한 채만큼 높을 것 같습니다. 어떤 기린은 다리가 길어서 집 한 채만 하고, 목이 길어서 집 한 채만 해서 2층만큼 높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2층만큼 높이 올라가 있습니다. 다리가 집 한 층, 목이 또 집 한 층, 그 다음에 머리가 2층만큼 올라가 멀리 쳐다봅니다. 왜 그렇게 멀리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자기 잡아먹으려는 짐승을 쳐다보다가 ‘저기 오는구나’하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목이 짧아놓으면 잡아 먹으려고 가까이와도 모르고 있다가 확 덤벼들면 죽을 것이 아닙니까? 기린은 약한 짐승이니까 원수가 많습니다. 아무에게나 잡히면 먹히는 것입니다. 싸울 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약합니다. 그러니까 멀리까지 쳐다봤다가 저기서 오면 미리 달아나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성도는 목이 길어서 멀리서 오는 원수를 바라보며 미리 방비를 잘하여야 합니다. ‘어디서 원수가 잡아먹으러 오지 않겠는가? 악한 짐승이 오지 않는가? 대적이 오지 않는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살피지 못하고 있다가는 언제 다 잡아먹힐지 모릅니다. 자신이
잡아먹히고 나아가 양 떼도 다 잡아먹히면 안 됩니다. 따라서 항상 망대와 같이 잘 살피는 성도의 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멀리까지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먼 곳까지 바라봐야 합니다. 근시(近視)가 되어서 발부리 앞에만 바라보지 말고, 성도는 멀리 바라보면서 믿음을 잘 써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바라보는 것을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멀리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앞에 조금만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창세기 13장 14-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이 롯에게 양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양보하였습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니까 소돔과 고모라 땅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양보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양보하고 롯이 떠난 다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자기 기업을 삼고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귀히 여기시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네가 바라보는 땅을 다 너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그냥 보통으로 서서 천천히 눈을 들어서 바라봤을 것 같습니까? 바라보는 것이 전부 자기 땅입니다. 그러니까 목을 길게 빼가지고 발뒤꿈치를 들고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보통 보는 것과 달리 조금만 더 쳐들고 보면 몇 십리가 더 보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아브라함이 허리를 쭉 펴고 목을 쭉 빼고 발꿈치를 들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성도의 목은 이렇게 멀리까지 바라보고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근시가 되어서 당장에 발부리 앞만을 보고, 당장에 자기에게 유익된 것만 보며, 당장에 자기 편한 것만 보면 안 됩니다. 멀리까지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고생스럽지만 멀리 볼 때에 어떻게 되겠는가? 장래에 내가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은 내가 좋은 것 같지만, 장래에 어떻게 되겠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장래를 생각하고 멀리 바라보는 신앙, 현재 내가 이렇게 나가다가 장래에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요새 내가 이렇게 기도를 안 하다가 이 다음에 어떻게 되겠는가? 요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을 안 하다가 이 다음에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언제나 바라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는데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당장에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얼마 후에 망합니다. 불평하고 불만하는 사람은 얼마 있다가 망합니다. 망하는 것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고생하고 수고하지만 이렇게 멀리 나가면 잘될 것이다. 현재 내가 고생하고 어려움
이 많지만 얼마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반드시 거둘 것이 많게 해주실 것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죄를 짓고 있으면 장래에 망한다는 것을 알고 죄를 끊어 버리고 믿음에 서야 되겠습니다. 현재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목을 길게 해서 멀리 쳐다보고 멀리 오는 환난, 멀리 오는 예수님의 재림, 멀리 오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나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여간 멀리까지 바라보면서 대적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그것을 다 방지해나가야 합니다. 멀리까지 바라보는 성도의목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목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상아 망대와 같이, 상아로 만든 아름다운 목으로 봐주십
니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맑은 눈

그 다음에 일곱째는 성도의 눈입니다. 본문 4절에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헤스본’은 사해 북단에서 동쪽으로 60마일 지점에 위치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이 맑은 못, 좋은 못인가 봅니다. 그리고 성도의
눈은 신령한 눈입니다. 즉, 성도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갈 때, 그 눈이 맑은 못과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는 코

그 다음에 여덟째는 코입니다.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라고 하여 성도의 코가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코’라는 것은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코가 냄새를 맡아서 분별하지 않습니까? 또 코로 호흡을 하는데 호흡은 기도를 가리키고, 냄새 맡는 것은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분별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하는 성도, 분별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여야 하고,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분별하여야 합니다. 또 육의 운동과 영의 운동을 분별하여야 합
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만 비 진리를 용납하고 나가고 인본주의인 줄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그만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것이 영의 운동이냐 육의 운동이냐를 분별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분별할 줄 모르는 성도는 가다가 그만
함정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코는 분별력을 잘 가진 코여야 합니다. 또 성도의 코는 예민해야 합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나가다가는 잘못됩니다.

요새 기독교가 정치 운동하는 것이 진리 운동입니까? 기독교가 정치 운동하는 것은 세상 운동이지, 진리 운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영혼을 구원하는 교이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
어나가는 교이지, 세상 정치 운동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코에 고장이 생겨가지고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 운동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분별력 있는 코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분별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고, 분별한 다음에는 아닌 것은 떠나야 하고 옳은 데는 서야 합니다. 분별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분별을 하나 마나입니다. 좀 변하긴 변했다고 하면서 먹으면 그때는 병이 안 납니까? 음식이 변한 줄 알았으면 먹지 말아야지, 썩어진 냄새가 나긴 나는데 그래도 먹자 하며 나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섞어진 냄새가 나면 안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와 같이 높은 데 올라가서 바라보면서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망대에 올라가 있는 것과 같이 높이 올라가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성도에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호흡은 기도인데, 기도를 많이 하는 코,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상하고 견고한 성도의 신앙 사상

본문 5절에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머리가 갈멜산 같다’고 하였습니다. 갈멜산은 높고 견고한 산인데, 성도의 신앙 사상이 갈멜산과 같이 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신앙 사상은 못씁니다. 갈멜산 같이 고상하고 견고한 성도의 신앙 사상이어야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습니다. 시편 27편 6절에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에게서 머리를 들게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권세에 순종하여 존귀와 영화가 있음

그 다음에는 머리털입니다. 성도의 머리털은 권세 아래에서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권세 아래에서 순종하는 것이 머리털입니다. 머리털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세들이 있는데, 부모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세입니다. 남편도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세입니다. 또 선생이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다 순종해야 합니다. 어디 가든지 윗사람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상관이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세이고, 국가의 권세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권세입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빛이 있다’는 것은 존귀와 영화를 가리킵니다. 다니엘5장 16절에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주 옷을 입힌다고 하였습니다. 존귀롭게 하며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권세 아래에서 순종하면 존귀를 얻고 영광스러운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권세 아래에서 잘 순종하면 예수님께서 아주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그 머리카락에 매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권세 아래 순종하는 데에 예수님의 마음이 매
인다(끌리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권세에 복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시고, 마음이 그 사람에게 쏠려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권세에 잘 순종하면 존귀해집니다. 영광스러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세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존귀하던 것도 점점 천해지고 영광이 있던 것도 다 떠나게 됩니다. 권세에 순종하지 않은 성도는 점점 더 천해지고 점점 더 낮아지고 존귀와 영화의 반대가 됩니다.

아하수에로의 왕후가 권세에 잘 순종했습니까?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자기 남편의 권세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것인데, 그 권세에 순종을 안 했기 때문에 왕후 자리에서 폐하여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에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에 잘 순종했습니다. 자기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세 아닙니까? 부모 대신 사촌 오빠가 길러줬으므로, 모르드개는 사촌 오빠라고 해도 부모를 대신하는 윗사람으로서의 권세가 있습니다. 부모 대
신이니까 부모의 권세까지 겸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권세에 잘 순종했기 때문에 존귀한 왕후의 자리까지 나아갔고, 왕후가 된 다음에도 왕의 말을 잘 순종했으며, 부모를 대신해서 길러준 자기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말도 잘 순종하였습니다. 그렇게
권세에 잘 순종했기 때문에 에스더가 귀한 왕후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건져낸 구세주의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왕 앞에 나가서 간청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낸 것이
아닙니까?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지 않았다면 유다 백성들이 다 멸망할 뻔 했는데, 이렇게 자기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말을 잘 순종했기 때문에 유다 백성 전체를 사경에서 건져냈습니다. 에스더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리가 되었습니까? 유다 백성들은 은혜 입은 날을 기념하여 그 날을 대대손손이 부림절이라고 하여 지켰습니다. 부림절을 지킬 때에 에스더를 잊어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림절을 지킬 때에 에스더의 존귀와 영화를 모든 사람이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권세 아래에 복종하는 것이 ‘머리털’입니다. 그리고 권세 아래에 잘 복종할 때에 권세와 영화가 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 머리털에 매여 있습니다. 권세 아래에 복종을 잘할 때에 예수님께서 마음을 기울여서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존귀롭고 영광스럽
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로 즐거워하시는 예수님

본문 6절에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성도로 즐거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아가 1장 5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하였고, 아가 1장 6절에는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티티해지고 게달의 장막같이 컴컴하고 너저분해도 예수님께서는 그 얼굴을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호화찬란하게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이렇게 보아 주시니 성도가 아주 존귀한 것입니다.

성도가 자라나는 것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심

본문 7절에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가장 높은 곳에서 열매가 이따금 맺히는데, 이 말씀은 성도의 키가 큰 종려나무와 같이 높아지고 자라나서 커졌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자라나는 것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자라나려면 모든 죄, 시기, 비방, 악독, 궤휼, 외식을 다 내버리고 갓난아이와 같이 신령한 젖, 즉 말씀을 사모하고 새김질해야 합니다. 그래야 점점 자라나 열매가 맺힙니다.
‘종려나무 열매가 유방과 같다’고 한 것은 자라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 먹여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 호흡은 사과 냄새 같음

본문 8절에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종려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종려나무와 같이 크게 자라난 성도를 기뻐하셔서 그에게 오시고 같이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자라난 성도는 젖을 먹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고 성경말씀을 와서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이 신령한 젖과 단단한 식물을 많이 먹고 새김질하고 그 다음에 자기 심령 속에 있게 된 신령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먹여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아주 즐거워하십니다.
또 ‘네 콧김은’이라고 하였는데, ‘코’는 호흡하는 기관이고 냄새를 분별하는 기관으로, 콧김은 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가 기도의 영적 호흡을 하면 예수님께서 아름답게 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과 냄새 같이 아주 향기롭게, 아주 아름답게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는 입

본문 9절에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고 하였는데, ‘네 입’은 성도의 입을 가리키고, ‘포도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즉, 이 말씀은 은혜로운 말씀을 증거하는 입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성도가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사기 9장 13절에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한 포
도주처럼, 성도에게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은 사람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바가 됩니다. 따라서 은혜로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말씀대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서 모든 말을 할 때에 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가시가 돋친 말, 뼈가 있는 말은 하지
말고, 은혜로운 말, 부드러운 말, 다른 사람의 심령을 윤택하게 하는 말, 건설적으로 살려나가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은 잠자는 심령들을 깨워 그 입을 움직이게 해놓는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남을 살리는 데에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입을 주셨는데, 말 한 마디를 해도 가시가 돋치게 하고, 송곳과 칼과 같이 찌르고 째서 남의 맘을 상하게 만들면 자기부터 불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런 자를 가증하게 보시고, 그 사람의 입을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그 발부리에 저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로 화목하고 먼저 대접하라

우리는 언제나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살리는 일, 건설적으로 도와주는 일, 건져내는 일, 화목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는 서로 대접을 먼저 하고, 또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며, 사랑으로 원수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운 행동, 은혜로운 생각, 은혜로운 태도를 가지고 건설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좋게 말하고, 살리는 말을 하고, 도와주는 말을 하고, 유익되는 말을 하고, 또 화목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하는 사람은 따라가면서 화목하고, 대접은 먼저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화목하기를 힘쓰고, 은혜로운 말, 도와주는 말, 좋은 말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입술에서 나오는 열매요, 포도주가 나와서 잠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 13가지
성도의 아름다움이 전부 13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성도의 아름다운 것이 13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본문 1절에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복음의 신을 신고 말씀대로 걸어가며 말씀을 전하러 다닐 때에, 그 성도의 발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아름답습니다.

둘째는 넓적다리인데, 넓적다리가 둘인 것처럼 성도가 연합해서 힘써 하나님의 일을 받들어나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 만들어놓은 구술 꿰미가 됩니다.

셋째는 배꼽입니다. 배꼽은 모태와 연결되어 아이가 영양을 공급받는 것인데, 그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내 피를 먹고 내 살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를 먹은 그 성도야말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는지 모릅니다. 마치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
근 잔과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넷째는 성도의 허리가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허리는 진실한 것으로 띠를 띤다고 하였습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자기 옛사람을 단속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것으로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참 아름다운 성도가 됩니다. 백합화로 두룬 밀단 같고 곡식이 가득하고 백합화 냄새가 물씬 나는 보기에 아름다운 그런 성도의 허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성도의 유방이 아름답습니다. 유방이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 ‘믿음과 사랑의 흉패를 붙이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라는 뜻이 있고, 또 어린 심령들에게 젖을 나눠 먹여주려고 신령한 젖을 준비하여 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여섯째는 성도의 목이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성도의 목은 높은 망대와 같이 길어야 합니다. 육신의 목은 짧아도 괜찮으나 영의 목은 기린의 목같이 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멀리까지 내다보면서 원수가 오는 것을 잘 살펴 미리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게 보이는 땅을 다 네게 주신다’고 하셨을 때에 그가 목을 늘여 눈을 높이 뜨고 봤다고 한 것처럼 가까운 데만 보고 좋다고 하며 먹을 것만 보지 말고, 멀리까지 미리 다 보면서 소망이 커야 하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제대로 해나가야 합니다. 근시적인 눈은 못 씁니다. 멀리 오는 것을 보고서 준비하는 것을 개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멀리 오는 환난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요새 내가 한 결과가 후에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하며 나중까지 준비를 잘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성도의 목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아름다운 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일곱째는 눈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눈이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눈, 물욕과 정욕과 사욕이 없이 거룩하게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아름다운 눈입니다. 이사야 3장 16절에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가증한 눈입니다. 성도가 복음의 신을 신어야 되겠는데 아기작거리는 신을 싣고 슬슬 정을 통하는 눈으로 돌아다니니 틀린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눈을 떠야 합니다. 잠언 6장 17절에 보면 ‘교만한 눈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덟째는 성도의 코가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분별을 잘하는 코가 아름답습니다. 분별을 잘하여야 합니다. 코가 분별을 하지 못하면 썩은 음식도 모르고 먹고서 병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코로 분별을 못해서 가스 냄새를 못 맡으면 집에 불이 납니다. ‘썩어진 것인가? 안 썩
은 것인가?’, 이것을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인본주의인가? 신본주의인가?’, 잘 분별하여야 하고, ‘진리인가? 비 진리인가?’, 이것을 잘 분별하여야 하고, ‘영의 운동인가? 육의 운동인가? 천국 운동인가? 세상 운동인가?’, 이것을 잘 분별하는 성도의 코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분별을 못하고 섞어진 것도 모르고 마귀도 모르고 비 진리도 모르며 따라가다가는 나중에 망하는 것입니다. 코는 분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또 코는 숨을 쉬는 호흡 기관으로, 기도하는 코가 아름답습니다. 기도하는 성도, 분별하는 성도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아름다운 머리인데,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사상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습니다. 신령한 갈멜 산이 높지않습니까? 높고 신령하며 견고한 산과 같은 신앙 사상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열 번째는 머리털인데, 자주 빛 머리털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머리털은 권세 아래에 복종하는 것, 자주 빛은 존귀와 영화를 말합니다. 이렇게 권세 아래서 성도가 잘 복종하면 존귀하고 영화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열한 번째는 키가 종려나무와 같이 높이 자라나는 성도가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라나려면 모든 죄는 벗어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열두 번째가 콧김입니다. 성도가 기도하는 것은 사과 냄새와 같고, 또 향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3-4절에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향연이라고 하였고, 본문에는 사과 냄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열셋째는 은혜로운 말씀이 나오는 성도의 입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잠자는 성도를 깨우치는 데에는 은혜로운 말이 상당한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이 아니고 가시가 돋친 말, 트집 잡는 말, 비방하고 악평하는 말, 미워하는 말, 욕하는 말
은 악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입은 독사의 독이 있는 입술이고, 저주 받는 발걸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손해를 주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되는 말만 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므로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잘못된 것을
자꾸 트집 잡지 말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놔두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인사를 안 하니 나도 인사 안 한다고 하면 그것은 마귀에게 걸려들어 간 것입니다. 시험에 빠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생각입니다. 먼저 인사를 하려는데 안 받겠다고 달아나면 따라가서 하고 와야 합니다. 따라가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은혜로운 말로 성도에게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심령을 살려내고 유익을 주면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나는 과연 만들어졌는가를 놓고 기도할 것

이제 예수님께서 성도의 기뻐하시는 것 13가지를 알았으니, 이 목표를 가지고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목과 코, 머리의 신앙사상, 발의 복음의 예비하는 신, 또 넓적다리와 같이 연합해서 서로 힘써나가는 것이 있나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를 내가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먹여주었는가 살펴봐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먹여주는 신령한 젖을 준비하고 다니는가? 하는 것들을 언제나 살피면서 회개할 바는 회개하며 나가야 합니다.
머리털은 순종을 잘해서 자주 빛과 같이 존귀스럽고 영화롭게 되었는가를 살피고, 키는 종려나무와 같이 자라나서 커졌는지, 기도의 콧김은 요새 얼마나 하나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가 살피면서 날마다 회개하고 기도하여 자기가 만들어지
는 그런 자리에 나가야 되겠습니다.

2. 주와 같이 여행함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본문 10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께 속했고,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모하시며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라고 하였습니다. 왕궁에만 있지 말고 들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들로 나가서 예수님과 같이 속삭이고 은밀한 교제를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잡하며 화려한 곳에만 있으려고 하지 말고, 들에서, 동네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깊은 기도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귀는 자리로 나가야 되겠습니다. 기도원에 온 것도 들로 온 것입니다. 요란하고 화려하며, 또는 평안히 상아 침대를 갖다놓고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모시고 들로 나와 사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면 왕궁에 사는 것보다 불편합니다. 그래도 집에서 좋은 침대, 좋은 이부자리 덮고 자는 것보다 들로 나와서 예수님을 사귀는 그 맛이 있어야 합니다.

또 ‘동네에서 유숙하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옛날로 말하면 멀리 가다가 주막에 가서 한 열 명, 스무 명이 한 방에 자는 것입니다. 자다가 발로 차기도 하고 불편해도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또 들에 가면 고생이 많습니다. 기도하느라 천막을 치고 있을 때는 고생이 막심합니다. 비가 줄줄 오면 천막에 비가 다 들어오고 자다가 젖을 때가 많습니다. 또 천막 안에 뱀도 들어옵니다. 예전에 우이동에 천막을 쳤는데 뱀이 한 마리 들어오려고 해서 삽을 가져다가 목을 잘라 치웠습니다. 요새 천막은 밑에까지 달렸지만 예전 천막은 위에만 덮는 것으로 아래는 덮는 것이 없어서 뱀이 들어오면 이불 안에까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들로 나가서 예수님과 같이 살면 영권이 많아지고 하나님의 신령한 모든 것, 집에서 받지 못하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신령한 비밀의 말도 해주십니다. 동네에 가면, 구경도 잘 시켜주시고, 신령한 비밀의 말씀도 깨닫게 해주시며, 모든 사정, 신랑 되신 예수님의 사정을 다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따금 집을 떠나 동네에 나가는 생활, 들로 나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편하지만, 불편한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좀 더 깊은 교제가 있게 되고 알지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 집이 좋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원에 안 오면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일찍 일어나서 할 일

본문 12절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술람미 여자들은 일찍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늦게 일어납니다. 그들은 늦게 일어나도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느냐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 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또 왕과는 멀리 떨어져서 한 낮에 왕의 출입 시에나 한 번씩 수종만 들면 되므로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는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술람미 여자 급에 들어가고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예루살렘 여자 급에 들어갑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에 못 나오는 사람은 ‘나는 예루살렘 여자다’하고 자면 됩니다. 예루살렘 여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다. 따라서 ‘나는 술람미 여자가 되어야겠습니다’하는 사람은 일찍 일어나십시오. 신령한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포도원으로 구경하러 갔습니까? 일하러 갔습니다. 포도원으로 가서 열매를 맺힐 포도의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를 살펴보고 돌봐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할 것이 많습니다. 방심하며 부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동행
하면서 들로 나갔어도 어린 신자를 돌봐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마음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힘을 써야겠습니다. 동네에 나가서 예수님과 같이 동행해서 자고 일찍부터 일어나서 기도하며 포도원에 나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일도 시키시면 그것도 하면서 포도원도 돌봐야 합니다. 포도원 돌보는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시키시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농사를 시키시면 농사하고, 살림을 시키셨으면 살림을 잘하고, 아이들 기르는 것을 맡기셨으면 아이들을 잘 길러야 합니다. 직장을 다니라고 하시면 직장을 다니면서 포도원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가서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고, 다른 사람의 심령에 유익되는 일을 하며, 자기 심령의 포도원도 힘써 다스려서 잘되게 만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의 포도원도 잘되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들로 나가는 생활, 일찍 일어나는 생활, 포도원에 나가서 포도원을 돌보는 생활, 이 세 가지를 계속 해나가야 되겠습니다.

3. 성도가 주를 위해 예비한 것들

합환채(合歡菜) - 생명을 다해서 사랑을 바쳐 드림

본문 13절에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에게서 예수님을 향한 애정이 나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합환채’란 애정(사랑)의 과실이라고 하는데,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라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속에서부터 향기를 토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 심령, 생명의 역사가 있는 성도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고, 사랑하므로 병이 다 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생명 전체를 다 기울여서 사랑으로 바쳐 드릴 그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합환채가 향기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나드를 가져와 예수님께 부은 것도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므로 갖다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쏟아져 나오므로 가장 귀한 것을 가져다가 쏟아 부은 것입니다. 이 술람미 여자도 마리아와 같이 그 심령 속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뜨거워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양 귀한 실과 -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

그리고 ‘우리 문 앞에는’이라고 하였는데, 문 앞은 외부를 가리킵니다. 즉, 속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바깥인 몸에는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많이 맺혀나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 선한 열매, 신령한 열매가 맺히되, 새 것, 묵은 것, 좀 전에 열린 것, 새로 나오는 것 등 할 것 없이 자꾸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달마다 열매가 새로 맺힌다’고 하였는데, 달마다 사건마다 시험 당할 때마다 한 과정이 지나갈 때마다 새로운 열매가 가득가득하게 맺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 바치려고 전부 다 쌓아둔 열매들입니다. 합환채 향기도 예수님을 향해서 쏟아져 나오고, 모든 열매도 예수님을 향해서 맺혀지는 것입니다. 이 열매를 예수님께서 먼저 따 잡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아가 6:1-14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권위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권위
아가 6:1-14

1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 4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5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7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11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3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1. 동산에 계신 주님

예루살렘 여자들도 함께 주님을 찾음

본문 1절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고 예루살렘 여자가 말하였습니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는 술람미 여자를 가리킵니다. 신령한 성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잘 따라가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여자들도 그를 어여쁘게 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는 하나님이 어여쁘게 보시며 사람들도 어여쁘게 봅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고 하였는데,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애를 쓰며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여자가 같이 찾으러 가자고 합니다. 신령한 성도가 예수님을 깊이 사귀어 체험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면 육에 속한 성도들도 예수님을 흠모하며 함께 찾으려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와보라고 했을 때에, 그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요 4:39). 이와 같이 예수님을 발견한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말해주어서(아 5:10-16) 예루살렘 여자들도 함께 찾으러 가자고 나선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3절은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셨다고 했
는데, 이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라고 하였는데, 성도들이 믿음 쓰는 것은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믿음을 쓰는 교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 말씀을 지키는 교회가 향기로운 꽃밭이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계십니다.

거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습니다. 영적 신령한 꽃, 믿음의 꽃이 제일 잘 핀 것을 꺾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의 눈물이 없는 영광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게 하십니다. 백합화가 잘 피지 못한 것은 좀 더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것은 잘 핀 백합화부터 꺾어 가십니다. 열매로 말하면 잘 익은 열매를 먼저 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따 가시는 열매, 먼저 꺾어 가시는 백합화는 참 좋은 것입니다.
요새도 사방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잘 익은 열매를 따시고, 꽃이 잘 핀 좋은 백합화를 먼저 꺾어 가십니다. 사람들도 잘 익은 열매를 먼저 따고 설익은 과실은 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은 백합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양을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양 떼를 잘 먹이
시고 백합화를 잘 가꾸어서 피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잘 익게 해서 다 데리고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산으로 가야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음

예수님을 찾으려면 예수님의 동산으로 가야 찾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 동산에 가면 안 되고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술람미 여자의 신앙이 좋아도 자기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못 찾고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산은 예수님을 위하는 동산이고 예수님이 계신 동산입니다. 주님을 위한 동산, 주의 인도를 받는 동산, 주를 순종하는 동산, 주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는 동산이 예수님의 동산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교회에 다녀서도 안 되고 자기의 것을 만들어 놓아도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동산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자기의 것을 만들어 놓지 말고 내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예수님의 것으로 만들어 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의 동산에 갈 수 있고, 그것이 주의 동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됩니다. 주를 위하여, 주의 것으로 삼고, 주의 뜻대로, 주만 순종하는 동산이 주의 동산입니다.

교회도 자기 교회를 만들어 놓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의 동산이 아닙니다. 자기 동산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한 분 계신데 자기가 돈을 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잘 됐다고 합니다. 교인이 몇 백 명이 모이고 목사님도 모셨는데 그 교회에서는 그 권사님만 의지하고 그 권사님을 주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에 가야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세운 교회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교회를 자기 교회로 만들어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에 가서 조그만 교회를 더 세우든지 다른 교회를 나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돈을 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해도 교회가 자기 교회가 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 거기에 예수님께서 안 계십니다. 예수님의 교회, 주가 인도하는 교회, 내 것이 아닌 주의 것, 주의 명령대로만 순종하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앉으라 하면 앉고, 서라 하면 서면서, 주의 동산을 만들어 놓아야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안에 있고 그곳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산이 되고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자기의 것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주님께서 슬슬 보따리 싸서 떠나시는 것이 됩니다. 그곳이 예수님의 동산이 아닌데 거기에 왜 예수님이 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슬슬 떠나가시면 그 다음에 마귀가 슬슬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도 다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영권이 다 떠나고 일이 안 됩니다. 아무 일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서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 그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십니다. 자기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는 주님이시고 사람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사람의 동산을 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동산, 예수님의 동산으로 삼고 주님이 돌아와서 자기 동산에 계시도록 하고 당신의 뜻만 이루어 나가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양 떼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의 동산을 만들어 놓아야 예수님께서 들어와서 양 떼를 먹이시고 예수님께서 들어와서 왕 노릇하시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런 동산이 됩니다. 우리 마음도 예수님의 동산, 우리의 몸도 예수님의 동산, 우리의 가정도 예수님의 동산, 교회도 예수님의 동산, 교단도 예수님의 동산, 진리와 영감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져 나가는 그러한 동산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거기로 가서 예수님께서 양도 먹이시고 그렇게 해야 양들이 잘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백합화를 먼저 꺾으심

그 다음에는 ‘백합화를 꺾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을 먹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왜 꺾으십니까? 가져가셔서 더 귀하게 사용하시려고 백합화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백합화를 꺾을 때는 잘 핀 것을 꺾을 것입니다. 가지가 지저분하게 잘 피지 못하고 꽃이 제대로 피지 않고 꽃이 몇 개 안 피거나 아예 피지도 않은 그런 것은 안 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꺾으실 때에 꽃이 잘 피고 가지도 잘 치고 향기도 잘 나고 흠이 없고 아름다운 그런 백합화를 먼저 꺾어다가 귀한 자리에다가 귀하게 쓰시려고 먼저 꺾어 가십니다.

‘백합화를 꺾는다’는 것은 주님이 성도를 먼저 불러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꺾어서 먼저 데려가셨고, 야고보를 꺾어서 데려 가셨는데, 백합화를 잘 피웠기 때문에 꺾어서 먼저 데려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꾸로 순교 당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백합화를 잘 피웠기 때문에 주님이 데려가신 것입니다. 또 주기철 목사를 꺾어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꺾어서 데려가는 성도가 있는데 그는 백합화를 잘 피운 성도로, 그를 먼저 꺾어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꺾는 백합화는 아름다운 것이고, 귀한 것이고, 주님이 꺾어다가 귀한 자리에다가 놓고 사용하시려고 먼저 꺾어 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절에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환난이 오기 전에 미리 피난처로 데려간다고 하였습니다. 백합화는 잘 핀 것을 먼저 꺾어가고, 열매는 잘 익은 열매를 먼저 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퍼렇게 선 것을 따다 무엇을 하려고 따겠습니까? 백합화도 잘 피고 제대로 된 것이 필요한 것이지, 잘 피지도 못하고 한 편은 벌레가 먹은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잘 꺾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데려가는 성도, 순교의 자리로 인도하는 성도, 환난과 고난 받는데로 인도하는 성도는 다 예수님께서 쓸 만하기에 꺾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반열에 가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꺾어 가시는 성도는 아름다운 백합화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귀한 자리에 놓고 예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해서 거기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려고 꺾어 가십니다. 그리고 양 떼를 길러 가려고 먹이시는데, 먼저 잘 먹인 양 떼가 잘 자라나면 꺾어 가시고 또 다른 양 떼를 먹이시는 데가 예수님의 동산입니다.

아직 백합화가 변변하게 피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안 데려가십니다. 좀 놔두었다가 꺾어 가시려는 것입니다. 열매로 말하면 아직 설었습니다. 익은 다음에 따가려고 열매를 가만히 놔두시고 잘 익은 것은 미리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또 순교의 자리에 나가게 하는 것은 더 좋은 자리로 인도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참 복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꺾어 가시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갖다 쓰려고 데려가시는데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성도입니다.

본문 3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속하셨고, 내 모든 것은 주의 것이며, 주의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인도를 받고 주의 주장을 받는 그 자리에서 살게 됩니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백합화가 핀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십니다. 가시밭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고, 골짜기의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는데 이렇게 바람이 불어오면 꽃잎이 찢겨서 향기가 날리는 그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고 또 골짜기와 같이 아무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백합화를 피운 성도처럼 그 가운데서도 양 떼를 계속해서 먹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2.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권위

본문 4-10절까지는 왕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가서를 공부할 때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육신으로 생각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벌을 받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육신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신령한 도리를
가르쳐주느라 이렇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어여쁘고 고움; 둘째, 위엄스러움

본문 4절에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라고 하였는데 성도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어여쁘다는 것입니다. 디르사만큼 어여쁘다고 하였습니다. ‘디르사’는 고대 북방 나라의 수도라고 합니다. 수도의 명칭입니다. 이렇게 북방 나라의 훌륭한 도시만큼 예수님께서 성도를 보실
때에 어여쁘게 보신다고 합니다. 또 여기에는 기쁘게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그런 성도라는 것입니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성도의 고움이 예루살렘과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또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이 있습니다. 성도의 아름다움은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있는 그런 아름다움입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성도이기 때문에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 있게 보이고, 또 백합화 꽃이 피었기 때문에 아름답게도 보이는 것입니다. 또 디르사와 같이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보여집니다.

셋째, 눈; 넷째, 머리털

본문 5절에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는 것은 성도의 눈이 예수님을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왜놀랍니까?
요한계시록 1장 17-18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볼 때에 너무 무서워서 앞에 거꾸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완전무결하시고 영광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자기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 앞에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거룩하고 너무 완전하고, 자기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놀랜다는 것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햇빛을 바라볼 때에 눈으로 밝은 햇빛을 바라보면 눈이 잘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5절에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화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였는데,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만국의 여호와 왕을 뵈었기 때문에 화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도가 놀라는 그런 상태입니다. ‘네 눈이 놀래니 나를 돌이켜 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성도가 회개하고 점점 눈이 밝아지는 것만큼 예수님을 쳐다보게 됩니다. 죄가 있는 더러운 눈, 세상에 속해 있는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놀랍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정결한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신령한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라고 하였는데, 성도의 머리털은 권세 아래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권세 아래에서 순종하는 생활은 예수님 보시기에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와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이

본문 6절에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이는 쌍태 암양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랫니와 윗니가 딱 맞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김질하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대로 지나가지 말고 이 말씀을 씹어서 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그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대로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새김질하면서 자기 자신이 그대로 만들어지고 나가서 그 말씀을 자기 영양소로 만들어서 그 말씀이 자기 힘이 되고 생명이 되고 자기 자체가 되도록 새김질하는 성도의 이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는 그런 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여섯째, 너울 속의 뺨

본문 7절에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너울 속의 너(성도)의 뺨’이라는 것은 겸손한 성도의 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석류는 쪼개면 안이 시뻘겋습니다. 그러므로 속에 은혜가 뛰노는 성도의 뺨이라는 것입니다. ‘너울 속’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여 구속의 은혜 가운데 뛰놀고 너울을 썼으므로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께만 향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예수님께만 향하는, 구속의 은혜가 넘치는 성도의 얼굴, 그 뺨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얼굴이 윤택합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그런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왕후와 비빈과 시녀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완전한 자

본문 9절에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왕후가 육십이나 되고, 비빈이 팔십이나 되고, 시녀가 무수하게 많지만,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딸’,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제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제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합니다. 제일 많이 사랑하니 예수님도 그 술람미 여자를 제일로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모든 전체를 다해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을 제일로 사랑하되 독자와 같이 사랑하고 외딸과 같이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가장 귀한 그 사랑으로 예수님은 성도를 인도해 주십니다.

여덟째, 아침빛 같이 뚜렷함; 아홉째, 달 같이 아름다움;

열째,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함

본문 10절에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렇다는 것입니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라고 하였는데, 아침빛은 새로 올라오는 빛이 아닙니까? 새로운 역사, 새로운 소생함,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이것이 술람미 여자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침빛 같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날마다 새 사람, 날마다 새 노래, 날마다 소생함, 날마다 새롭게 되어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실 때에는 ‘야! 아침빛 같이 뚜렷하구나. 날마다 아침이로구나. 늘 아침 같이 새롭게 솟아올라오고, 아침 같이 새롭게 소생해 올라오는구나. 새로운 생명의 역사
가 아침 같이 새롭게 생명의 역사가 있구나. 광선이 비추어 나오는구나’라고 하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아침빛 같이 뚜렷하게 나오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다음에 ‘달 같이 아름답고’라고 하였습니다. 달은 태양빛을 반사해서 세상에 비추어 내보내는 천체입니다. 즉, 성도가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내보내는 때에 예수님께서 그 성도를 달 같이 아름답게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 내보내야 합니다.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봤다는 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생활, 예수님을 받아가지고 보여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달의 역할입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도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에 예수님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빛이 없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주는 이 사람을 달과 같이 아름답게 예수님께서 보아주십니다. 또 어두운 세상이 그만큼 밝아집니다. 해 같이 맑고 밝게 진리를 그대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빛으로 내보내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만 바울은 혼잡하지 아니하고 진리 그대로를 빛으로 내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해 같이 맑고’라고 하였는데,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도 섞지 아니하고 무엇을 가리지 아니하고 인본주의를 쓰지 아니하며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증거하고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은 해 같이 맑은 사람입니다. 또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은 선한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나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도가 선한 싸움을 잠시라도 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잘 싸워서 나가니,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들어와도 꼼짝 못하고 다 격퇴를 당합니다. 따라서 원수가 그 동산에 침입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기치를 벌이고 잘 싸웠기 때문에 원수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하였습니까? 4절부터 첫째 성도에 대해서 어여쁨이 디르사와 같고 고운 것은 예루살렘과 같고 그 위엄은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위엄스러운 것, 셋째는 성도의 눈, 넷째는 머리털입니다. 성도의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새끼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권세를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을 순종하는 것도 인간에게 주신 권세이고, 부모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세입니
다. 그러므로 부모를 잘 순종하고, 선생을 잘 순종하고, 나라 권세에 잘 순종하고 공장이나 회사의 윗사람, 군대의 상관 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세에 잘 순종하는 성도는 머리털이 아름다운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와 같이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다섯째는 성도의 이입니다. 성도의 이는 쌍태 노루, 아래 위가 딱딱 맞아서 새김질 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김질하지 안하고 성경을 배우고 그냥 내버리고 돌아가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새김질해서 그대로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할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잘 새김질해서 진리를 세워나가고 그 진리를 즐거워하므로 새김질을 잘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이가 아름다운 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너울 속에 뺨입니다. 겸손히 예수님만 향하고, 구속의 은혜가 뛰노는 성도의 얼굴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석류 한 조각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곱째는 완전한 자, 외딸,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첫째로 여기고 제일 사랑하고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갖다 바치고 예수님을 제일 귀중히 여기고 믿는 사람이 제일 첫째이고 그것이 외딸입니다.
세상을 둘째, 셋째로 여기는 그 사람이 완전한 자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시간도 첫 시간, 마음도 첫 마음, 물질도 가장 좋은 첫 열매, 귀중한 것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완전한 자이고 하나밖에 없는 자이고 가장 귀중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아홉째는 달과 같이 아름답고, 열째는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러운 여자입니다.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러운 성도인데 선한 싸움을 잘 싸우니 사랑이 충만한데도 위엄스럽다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이 예수님을 받아서 예수님을 비추어 내보내고 진리를 받아서 얼굴에 진리가 나타나고 진리를 입으로 밝히며 나가니까 해와 같이 맑고 아침 빛 같이 뚜렷하며 날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역사. 새 노래, 새 사람.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 성도가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 개가 맞습니다. 4절의 아름다운 것, 고운 것을 합해서 열 개로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가 5장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것이 열 개가 되기 때문에 성도에 대한 것도 열 개여야 맞습니다.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합해서 열 개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것이 열, 성도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것이 열, 그렇게 해야 좋겠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보니까 아름답고, 예수님은 성도를 보시므로 아름답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보니 아름다운 것이 열입니다. 열 가지 아름다움, 예수님의 십대 미(美)가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보니 몇 가지가 아름답습니까? 성도의 십대 미가 있습니다.
열 가지가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술람미 여자와 같은 길을 걸어갈 때, 새김질 잘하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구속의 은혜가 속에서 역사해서 얼굴에서 뛰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예수님을 잘 비추어서 내보내고 명랑하게 말씀을 바로 받아서
진리의 빛을 전파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잠자는 성도가 되면 안 됨

잠자는 성도는 어떻겠습니까? 잠자는 성도는 이가 다 썩었습니다. 말씀을 새김질을 못하므로 썩은 이입니다. 뺨은 구속의 은혜에 뛰놀지 못하여 시꺼멓고 머리털은 새어 꽁지만 남았고 완전하여 하나뿐이 아니라 여러 사람 가운데서도 맨 꼴찌입니다. 왕비들이 칭찬하기는 커녕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아침빛 같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 저녁빛 같이 차차 저물어 컴컴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빛 같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구름장에 다 가리어졌고 아무 권위가 없어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입니다.

잠자는 성도가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깨어서 살 소망이 있는 성도가 되고 생명 있는 길, 아침마다 새로워지고 새 생명의 역사가 있고, 새 노래, 새 사람, 새로운 소생함이 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합니다. 자기 동산에 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자기라는 것은 다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것도 다 내놓고 자기는 무요, 공이 되고 예수님의 것에 들어가 살아야 합니다. 내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의 주만 보이는 예수님의 동산에 들어갈 때에 새로워지고 새김질하고 산 역사가 있습니다. 술람미 여자와 같이 따라 가야 합니다. 레바논에서 일어나서 따라가야 합니다.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를 향해서 따라가고 사자굴, 표범산이라도 달음박질하여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끝까지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성도가 됩니다.

3. 호도 동산에 내려감

성도의 할 일 - 교회를 잘 돌보고 호도 송이를 먹음

본문 11절에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어디로 갑니까?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 람미 여자)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포도원을 돌보는 생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가 교회를 잘 돌보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순이 났나’라고 하는 것은 어린 성도들에게 순(믿음)이 났는지를 본다는 뜻이고,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라고 하는 것도 어린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돌보고 어린 양 떼들을 잘 살피고 잘 돌보는 생활을 하며 자기는 호도 동산으로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호도 동산’은 진리의 동산입니다.
호도는 겉은 딱딱한데 껍데기를 까면 그 안에 먹을 것이 많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단단한 식물, 진리의 말씀을 먹으려고 호도 동산에 가는 것입니다. 물렁물렁한 젖이나 먹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진리의 말씀, 단단한 식물을 먹고 딱딱해서 까기는 힘이 좀 들지만 그래도 이것을 먹어야 속에 영양가치가 있고 내가 힘을 얻고 내가 소생함을 얻고 달음박질을 하기 때문에 호도 송이를 먹으려고 호도 동산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단단한 진리를 먹어야 심령이 힘을 얻어서 달음박질을 할 수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로 말씀을 먹어야 함

단단한 식물이라는 것은 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젖으로 먹는 것은 성경을 쉽게 해석하는 것이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을 좀 더 깊이 해석해서 잘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주고 알지 못하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좀 더 깊은 뜻을 알게 해 주는 것인데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자기 심령이 힘을 얻습니다. 단단한 식물을 얻지 못하면 힘을 못 얻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다 젖으로 먹일 수 있고 다 단단한 식물로 먹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다’고 하는 말씀도 젖으로 먹이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젖으로 먹이려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달 같고 다 해 같다고 하면 됩니다. 또 그 말도 안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해같고 달 같고 아침빛 같으니까 좋긴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 놓으면 할 것이 없습니다. 다 되었는데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힘이 안납니다. 힘을 쓸 것도 없고 또 힘을 안 쓰니깐 힘이 나지도 않고 진보도 없고 자라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단한 식물을 먹인다고 하는 것은 한 계단 더 들어가서, 아침빛 같이 뚜렷하다는 것은 ‘새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된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 새로운 소생함이 있어야 한다. 산 역사가 있어야 한다. 새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 나가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또 힘이 나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새롭게 되어야겠다. 아침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되겠다. 자라나야 되겠다. 소생해 올라가야 되겠다. 이렇게 하니 힘이 납니다. 그렇지만 먹기에는 힘이 듭니다. 새로운 역사가 날마다 있으려고 하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힘을 많이 써야 하므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껍질이 딱딱해서 껍질을 까기가 어렵습니다. 깨닫기도 힘이 들고 그대로 하기도 힘듭니
다. 공짜로 먹는다고 해야 입을 넙죽 벌리고 좋아할 텐데 거저먹는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까느라고 힘을 써야 하고 기도해야 되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호도 동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경회를 하는 것은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농사해서 먹는 것만 배우면 안 되고, 농사하는 법을 배워야 함

요새 부흥회라고 하는 부흥회들은 대부분 젖으로 먹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다 복 받고, 다 잘되고, 다 하늘로 올라가며, 다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하하하”하고 입을 벌리고 웃으며 좋아하지만 실제로 된 것이 있습니까? 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농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농사해서 먹는 것만 가르쳐 준 것과 같습니다. 먹는 것만 자꾸 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농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농사하면 인절미도 먹고 기장도 먹고 차조도 먹고 또 구이로도 먹고 쪄먹고 부침개도 해 먹고 국수도 해 먹고 오이도 따 먹고 참외를 따먹고 토마토도 따 먹고 딸기도 따 먹고 사과도 먹고 배도 먹고 밀감도 먹고 바나나도 먹고, 이렇게 한참 하는 것입니다. ‘이거 신난다, 당장에 부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란 농사를 해서 당장에 다 먹는 것과 같습니다. ‘나도 농사하겠다. 나도 농사하겠다’라고 하며 들뜨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바나나 한 개를 먹을 수가 있습니까? 되어야 먹을 것이 아닙니까? 당장 무엇이 나옵니까? 먹기에 좋은 것과 좋은 열매만 자꾸 말해주면 복이 하늘에서 다 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 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단한 식물을 먹어서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힘을 들여서 땅을 파야하고, 심어야 하고, 소독을 해야 되고,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해야 된다는 등 이렇게 저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가을에 가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단단한 식물로 가르쳐야만 힘이 나옵니다.

새김질을 해야만 합니다. 새김질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단단한 식물입니다.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럽다는 것은 ‘성도가 이렇게 위엄스러워 마귀가 꿈쩍 못한다’라고 가르쳐주는 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이것도 맞습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거
가지고 뭐 힘이 납니까? 나가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싸우는 성도가 되어야 마귀가 꿈쩍 못하는 위엄스럽고 승리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앞에 말한 것과 같이 다 된다는 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단단한 식물로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호도동산에 내려가서 호도를 먹이는 자리에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본문 12절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부지중에 거하다 보니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예수님과 같이 타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이 할 일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모시고 수레 가운데 타고 가는 것입니다. 한참 하다 보니 언제 예수님께서 오셨는지 예수님과 같이 수레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부지중에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하면 됩니다. 골짜기에 내려가서 잘 살피고 포도나무 잘 돌보고 어린 신자들을 잘 돌보고 전도하고 석류나무 꽃이 잘 피었나 보고 그 다음에 호도 동산에 내려가서 호도와 같이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애를 한참 쓰다 보니 언제 오셨는지 예수님의 수레 가운데 타서 귀한 백성 가운데로 그 수레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자기 할 일만 잘하면 예수님의 수레를 부지중에 함께 타고 가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할 일을 안 하고 수레만 타겠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태워 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안 태워주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할 일을 부지런히 해 나가면 부지중에 어느덧 수레 가운데 타고 가는 것입니다.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하고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자꾸 애를 쓰고 새김질하고 단단한 식물을 먹고 또 새김질하면서 포도원을 돌보고 또 나가서 전파하다보면 부지중에 예수님의 수레 가운데 같이 타고 하나님 백성, 내 백성 가운데 이르게 됩니다.

4. 유혹과 보호

그들로 돌아오게 하고, 너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

본문 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소리치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합니다.
돌아오라는 말이 네번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여자’는 보통으로 믿는 신자을 가리키고, ‘술람미 여자’는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말씀대로 신령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믿는 성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골방에 들어가서 신령한 교통을 하며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동행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호도 동산에 가서 호도를 먹는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으면서 가는 성도가 술람미 여자인데 예루살렘 여자는 자꾸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야,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가지 말고 자기들과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무슨 예수를 그렇게 믿느냐?” 아무래도 예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이 안 됐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믿자. 우리에게로 좀 돌아오라”, 자꾸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야 될까요? 안 돌아가야 될까요? 돌아가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그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도 모두 왕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예수님을 같이 섬겨도 다릅니다. 술람미 여자가 가는 길이 다르고 예루살렘 여자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또 술람미 여자가
있는 장소가 다르고 또 예루살렘 여자가 있는 장소가 다릅니다. 먹는 양식도 다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젖이나 먹고 살고 술람미 여자는 단단한 식물, 호도 동산에 가서 호도를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고 새김질하면서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로 가는 것입니다. 험산 준령으로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는 평탄한 길로만 갑니다. 왕궁에만 있습니다. “허허” 좋아만 합니다. “하하”하면서 좋다고만 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무슨 예수를 그렇게 믿느냐?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술람미 여자야”라고 하면서 자
기와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인경수 목사가 캐나다 교회를 맡으려고 그쪽 교회의 초청으로 떠날 때에 제가 예레미야 15장의 말씀을 가는 선물로 주었습니다. 캐나다 가는 사람에게 선물로 아무것도 줄 것이 없고 또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므로 그 말씀(돌아가지 말라는 것) 하나를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9절부터 내가 읽고서 그것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9-20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 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이제 외국에 나가면 여러 목사들이 다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같이 나가자고 합니다. “다 같이 하자. 유별나게 믿을 것이 뭐 있느냐?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라고 나올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래도 너는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네게로 돌아오는 것은 괜찮지만 네가 그리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제가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리고 인 목사님한테 얼마 지나, 한 달쯤 있다가 편지가 왔는데, 선물로 준 예레미야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고 늘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돌아오라’는 유혹이 있음

예루살렘 여자는 돌아오라고 하면서 바로 믿으려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좀 신령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단단한 식물을 먹고 말씀대로 바로 믿으려고 하고 진리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것이 뭐 있느냐? 우리도 다 예수님 믿는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이 예수님을 믿고 같은 성령인데 뭘 그렇게 별나게 하느냐? 돌아와서 우리와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것이 언제나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입니다. 신사 참배 바람이 불어올 때에도 신사 참배하는 목사들이 안 하는 목사들에게 “돌아오라. 독선주의로 나가면서 유별나게 그럴 것이 무엇이냐?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돌아오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고,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준다고 했다. 또 스가랴에 보면 하루 동안에 죄를 사해준다고 했고, 권세를 복종하라고 했는데, 그 독선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따라 가지 말고 돌아오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8.15 해방 후에 또 시험이 들어왔는데, 이북에서 주일날에 선거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때에 주일 날 선거를 하면 주일날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못 한다고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안 하려고 작정을 하고 나갔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 교인이 거의 백 몇 십명이 됐는데 처음에는 일, 이십 명이 안하겠다고 나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로 한 분이 나가서 “우리가 일본 시대 때에도 진리를 다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 어떻게 이대로 하겠느냐? 이번에는 주일날 선거를 하고 그 다음에 잘 믿어야겠다”며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 선거하기로 돌아서고 몇 명이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 남은 소수의 사람들도 위협과 공갈을 받자 다 넘어가고 결국에는 얼마만 남았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성경적으로 바로 믿으려고 하고, 신령한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서 영적 신앙의 생명의 길을 걸으라고 하면, 언제나 돌아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너라.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왜 그렇게 하느냐? 뭐 이상하게 믿을 필요가 무엇이냐?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물 음식을 왜 안 먹느냐? 돌아오너라. 우리는 먹고도 잘만 믿는다. 돌아오너라. 먹어도 괜찮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 먹어도 괜찮습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성경 어디에 나왔습니까? 사도행전 15장 28-29절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성령이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요긴한 것만 우리에게 말한다고 하면서 이 네가지,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하는 것을 멀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믿으려고 하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직장에 안 나가 간다고 하면 유별나게 믿지 말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장로이고 집사이지만 다 나오는데, 네까짓 것이 무엇이냐? 집사도 못 되지 않았느냐? 나오너라, 나오너라”라고 하면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에게로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

그런데 돌아오라는 유혹이 있을 때에 그 유혹에 넘어가면 일이 다 잘못됩니다. 주님께서 아주 섭섭하게 생각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 여자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가 섬기는 정도하고, 술람미 여자가 단단한 식물을 먹고 침궁에까지 들
어가서 섬기는 것과는 정도가 다릅니다. 그 길이 다릅니다. 정도가 다르고 그 길이 다르고 예수님을 취급하는 정도가 다르고 예수님을 발견하는 정도가 다르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정도가 다른데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아가면 예수님의 일이 다 낭패가 됩니다. 예수님의 신부 하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말이 됩니까?
마리아가 믿는 신앙하고 베드로나 제자들이 믿는 신앙하고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는데, 그것이 술람미 여자의 신앙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화를 내면서 “그것을 왜 허비했느냐?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 돌아오너라. 그런 짓을 하지 말고 돌아와서 우리와 같이 되거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오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전폭적으로 쏟아 부어서 말씀 전체를 다 지켜 나가려고 하는 이 술람미 여자와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자꾸 돌아오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자꾸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주 섭섭하게 생각 하시고 술람미 여자는 그만 낙제합니다. 예수님의 좋은 신부로 나가다가 뒤로 나가 그만 나동그래지고 마는 신부가 됩니다. 나가 자빠져서 머리가 다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그런 신부가 됩니다. 안 돌아가고 계속 술람미 여자의 길을 걸어가야 예수님이 아주 기뻐서 강건하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고 호도 동산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같이 계시고 수레 가운데 태우고 가고 동거동락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해서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 되어 예수님께서 같이 오셔서 마시고 먹고 흘러내려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주는 이런 귀한 일이 가득하게 되었는데 왜 예루살렘 여자 쪽으로 돌아갑니까? 그리로 가면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아가
면 안 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본문 14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꾸 돌아오라고 하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하십니다. 여기 ‘마하나임’이라는 곳은 춤추는 장소입니다. 춤추는 장소에서 춤추는 여자들처럼 술람미 여자들을 그렇게 구경이나 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 여자들을 그저 춤추러 다니는 여자들로 생각합니다. “돌아오너라. 돌아와서 구경이나 좀 하자”, 이렇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을 따라가려고 보려는 것이 아니라 구경을 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좀 보자”라고 하며 구경만 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구경만 하고 그 신앙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성경말씀을 구경만 하고, 바로 믿는 사람을 그저 구경만 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네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너희가 하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이 그 신앙을 본받으려고 돌아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믿는 것을 구경이나 하려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경거리 삼으려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삼손에게 주어진 재주를 구경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주 한번 부리라고 하면서 그들의 신전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만 해도 삼천 명인데 그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서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 좀 부려보라고 했습니다. 구경 좀 하자고 하면서 무슨 재주를 구경하려고 했습니까? 과거에 신앙 생활하던 것을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자를 찢어 죽인 일, 또 나귀의 뼈로 천 명을 죽인 것, 여우새끼 300마리를 잡아다가 꼬리를 매어 불을 놓은 일 등 과거에 신앙생활하던 역사를 이제는 그 사람들이 구경을 좀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경 좀 해보자는 것입니다. 구경거리로 믿는 일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요새도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를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려고 내세워주기는 합니다. “잘한다, 잘한다”라고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잘한다. 잘한다”라고 하지만 자기가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안 들어가면서 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 추도 예배를 사방에서 다 합니
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하고 신비주의에서도 하고 통합 측에서도 하고 합동에서도 하고 고려 파에서도 합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실제로는 안 따라가려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를 보고 “돌아오라. 나도 너희와 같이 믿겠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에 참여하려고 하고, 그런 신앙에 자기도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술람미 여자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는 동시에 구경거리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잘 믿나 보자. 잘 믿었으면 왜 그 모양이냐? 잘 믿었으면 좀 된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잘 믿었는데 왜 그렇게 못 사느냐? 왜 배를 쫄쫄 곪느냐? 집도 하나 없느냐? 잘 믿었으면 왜 그 모양이냐?”라는 식으로 어떻게 하든지 돌이켜서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믿으려고 하는 것을 춤추는 것처럼 구경거리로 삼아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절대 돌아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돌아오라고 해도 너희는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술람미 여자의 그 길을 걸어서 신앙의 맛을 보았는데 맛을 보고 믿는 사람이 맛을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한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맛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진리가 달다고 하고 예수님이 좋다고 하고 말씀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고, 맛을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가다가 늘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맛을 보지 못했으니 쓰다하면 쓴 줄만 알고 맛이 없다고 하면 맛이 없는 줄만 알기 때문에 그것을 표준으로 하면 안 됩니다. 맛을 본 사람이 양보하지 말고 그 말씀에 굳게 서서 끝까지 이것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돌아가면 안 됩니다. 핍박과 환난을 받아도 그게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로 가는 것입니다. 사자굴, 표범산에 가도 양보하지 말고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지켜서 험산 준령을 핍박과 환난을 받으면서 걸어 나가야만 나도 살고 예수님께서도 그 동산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역사가 흘러가게 됩니다. 나눠줄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에게로 돌아가지 않아야만 그런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아가 5:1-16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심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심
아가 5:1-16

1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2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6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9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10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11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12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13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14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15다리는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1. 주님께서 성도를 즐거워하심

본문 1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의 말인데,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향해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라고 하였는데, 성도는 예수님의 동산입니다. 내 동산은 성도의 심령 속을 가리킵니다. 성도의 심령 속은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동산입니다. 성도가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주님과 교통하면 성령의 열매가 가득하고 꽃이 만발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산에 들어와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꿀송이와 꿀을 먹고 포도주와 젖을 마십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내를 내면 예수님께서 그 향 재료를 거두십니다.

‘꿀송이와 꿀을 먹고’라고 하였는데, 꿀송이와 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시 19:10).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이 자기의 생명이 된 성도의 심령 속에는 꿀과 꿀송이가 가득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꿀송이보다 달게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 성도의 심령 속에 오셔서 즐거워하십니다. 성도만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같이 먹습니다.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라고 하였는데, 포도주는 구속의 은혜를 가리키고, 젖은 진리, 즉 신령한 양식을 가리킵니다(사 55:1; 벧전 2:2).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간직하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의 역사가 그 속에서 뛰놀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 속에 있는 포도주와 젖이며 주님이 제일 먼저 마시고, 다음에는 예수님의 친구들과 사랑하는 자들이 마시도록 하십니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고 하였는데, ‘나’라는 말이 한 절에 열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나의 누이, 나의 신부, 내가 내 동산에, 나의 몰약, 나의 꿀송이, 내 포도주, 내 젖, 나의 친구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열 번이나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오셔서 같이 먹고, 같이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고 하였는데,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은 예루살렘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술람미 여자 속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넘쳐나오니, 그 향기로움과 아름다움을 예수님이 먼저 거두시고, 다음에 다른 성도들에게도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심령 속에 은혜와 진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예수님이 오셔서 즐거워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잔치집이 됩니다. 술람미 여자와 같은 성도가 한 교회에 몇 사람만 있어도 온 교회가 즐거워하게 됩니다.

2.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심

신앙의 잠이 듦

본문 2절에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신앙의 잠이 들었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교통하였으나 여기서 잠깐 신앙의 잠이 들었습니다.

믿음 좋은 성도들도 때때로 신앙의 잠이 드는 수가 있습니다. 노아가 신앙의 잠든 때에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있었고, 세례 요한은 신앙의 잠든 때에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잠이 든 다음에는 알쏭달쏭
해집니다. 과거에 확실히 증거하던 일도 ‘그런가, 안 그런가’하고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도 신앙이 잠든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였고, 다윗도 신앙의 잠이 들었을 때에 범죄했습니다. 엘리야도 신앙의 잠이 들었을 때에 로뎀 나무 아래에
서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잠든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신앙의 잠이 들었으나 마음은 깨어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깨어있다’는 것은 자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예수님을 찾아 만나야겠는데, 처음 사랑과 처음 은혜를 다시 찾아야 되겠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믿던 성도가 신앙의 잠이 들어도 전에 받은 은혜를 늘 생각합니다. 이전에 어떻게 말씀을 들었으며, 어떻게 주님을 따라다녔으며,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어떻게 은혜를 받았던가를 생각합니다. 지금은 신앙이 타락되고 믿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으나 깨어나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앙이 잠이 들었으니 말입니다.

밤새껏 이슬을 맞으시며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하시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머리에는 무엇이 가득했다고 하였습니까? 이슬이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밤이슬이 가득하도록 문을 두드리고 계셨지만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어가지고 어느 정도 문을 두드리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을 안 열어주고 예수님을 밤새도록 밖에 세워놓고 밤이슬이 가득하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 얼마나 한심합니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예수님을 밤새도록 밖에 계시게 하고, 예수님 몸에 밤이슬이 가득하게 해놓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가시지 않고, 초저녁부터 밤새도록 이슬을 맞으시면서 계속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무한한 사랑입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감동을 주고 양심에 가책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문을 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대로 나가는 완고한 문, 자기의 지혜와 지식으로 닫아 놓은 문, 물욕․정욕․사욕으로 기울어져서 닫힌 마음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안일

본문 3절에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하나님의 일하던 것을 그만 두고, 옷을 벗고, 발을 씻고, 마음 놓고 자려고 침상에 누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고 잡니까? 옷을 벗고 잡니다. 또 발은 어떻게 하고 잡니까? 발은 씻고 잡니다. 이것은 다 걷어 버리고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무엇을 또 계속 하겠느냐? 이제는 다른 사람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주의와 안일주의와 자유 방종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6장 3-8절에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와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침상에 눕습니까? 상아 침상에 누웠다고 하였습니다. 침상 가운데 상아 침상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또 살찐 송아지를 잡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립니다. 포도주는 대접으로 마십니다. 성경에 포도주는 보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먹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값비싼 기름을 사다가 바릅니다. 요새 남자들도 목욕탕에 가보면 몸에 계란, 우유 등을 바릅니다. 다른 곳에서는 굶고 있는데 그게 무슨 짓입니까? 몸에 귀한 기름을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서는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환난은 믿음 지키다가 당하는 환난입니다. 믿음을 지키려면 환난이 계속 옵니다.

호세아 7장 14절에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를 갖다가 먹으면서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발을 씻고 침상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하라고 하셨지, 그만 두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에 순종만 하면 되는데, 자기가 하려고 하니까 힘들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심부름만 하면 됩니다.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해나가십니다. 그런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더럽히랴’라고 하며 안일과 방종에 빠져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심

본문 4-5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문틈으로 손을 들이 밀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좀 나서 일어났습니다.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감동과 역사가 나타난 것을 가리킵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통으로 감동시키는 것이고, 손을 들이미는 것은 특별한 감동, 특별한 역사로 성도를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특별한 섭리와 징계 등은 예수님이 손을 들이민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와 간섭이 있을 때 즉시 깨닫고 속히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문을 여니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지방에 뚝뚝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얼마나 많이 바르고 잤습니까? 몰약을 얼마나 많이 발랐고, 몰약의 즙을 얼마나 많이 발랐기에 일어나서 문을 여는데 그 몰약이 뚝뚝 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귀한 기름을 몸에 뚝뚝 떨어지도록 바르고 잤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옷을 벗고, 또 발을 다 씻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입겠느냐는 것입니다. 아예 완전히 자려고 작정을 하고 누운 것 입니다. 그런데 문틈으로 예수님께서 손을 들이 밀었습니다. 기회를 이용해서 감동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시킬 때에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냥 누워 있으면 문틈이 생깁니다. 문틈이 생기면 그제서야 “아이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디로 문틈이 생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자녀, 남편, 사업 등 여러 가지 종류로 문틈으로 들이미실 수가 있는데, 그것은 특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문틈으로 예수님께서 손을 들이밀었을 때에 술람미 여자가 일어나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기름을 발랐기 때문에 문지방에 기름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성도들이 생활이 부요해지고 평안해지면 이런 자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들어오고 고통이 심할 때는 예수님께 부르짖고 예수님만 따라가려고 하지만 세상의 것이 넉넉해지고 풍성해면 심령의 잠이 드는 자가 많습니다. 이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 사자굴, 표범산으로 갈 때는 예수님께 바짝 붙어서 예수님만 의뢰하고 전적으로 예수님만 따르나 평안해질 때에 신앙의 잠이 듭니다(호 13:5-6). 풍성해지고 평안해지면 육신의 일들이 많아져서 이것 저것을 하느라 시간과 마음을 다 빼앗기고 주님을 잃어버
리기 쉽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서 바벨론의 최고 학문을 공부하게 하고 명예와 출세를 얻게 해주었을 때에, 거기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켜서 심령이 잠들지 않았습니다.

3. 술람미 여자가 주님을 찾아 나섬

본문 6절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라고 하며 후회하였습니다. 밤새도록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에 왜 문을 열지 않고 있었습니까? 미리 일어나서 문을 열었더라면 예수님께서 가지 않으셨을 것이라면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릴 때 일어나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물러가셨습니다. 그 후에 문을 열고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만날 수 없고,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큰 일이 난 것입니까? 일어나서 문을 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벌써 예수님께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를 때 그 감동을 무시하면 그 사람이 부를 때에 예수님께서도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찾을 때에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호세아5장 6절에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실 때에 안 열다가 그 다음에 아무리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하나님께 갈지라도 하나님을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잠언 1장 28-30절에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가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찾을 때 속히 일어나 영접해야 합니다.
주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순종하며 주를 위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아무리 예수님을 찾으려고 해도 못 만납니다. 한번 타락하면 원상회복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처음 사랑에서 떠났다가 다시 찾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찾아도 못 만나고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감동을 시키실 때에 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에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을 때에 해야 합니다. “힘들다, 고생이 많다, 교인들이 순종을 안 한다, 어려운 고통이 많다”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면 괜찮습니다. 사자굴도 괜찮고, 표범산도 괜찮습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므로 나는 순종만 하면 됩니다. 발자국만 떼면 거저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대로 거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 씻고 들어앉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한 시간 남았어도 발 씻지 말고 나가서 해야 됩니다. 한 시간 일한 것도 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할 기회를 한 시간만 주셔도 그것이 큰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깊이 타락된 다음에는 벌써 시기가 늦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신 다음에 일어나서 물을 열었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벌써 예수님께서는 물러 가셨습니다. 찾아도 만나지 못합니다.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타락이 깊어진 것을 어떻게 압니까? 밤새도록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셔도 안 열어준 것은 타락이 깊어진 증거이고, 또 옷을 벗고 발을 씻고, 기름을 뚝뚝 떨어지도록 발랐으니까 얼마나 안일주의, 육체주의, 방종주의에 빠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유 방종, 이기주의 입니다. 자기중심이고 안일주의이고, 술 취한 것입니다. 술 취한 것은 술 먹는 것도 술 취하는 것이지만 세상에 도취가 되는 것도 술 취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과 노는 데 도취되면 안 됩니다. 취해 가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타락이 깊어진 것입니다. 자기 몸 하나 단장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는 돈을 아낍니다. 자기 위해서는 몇 천만 원씩 써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렇게 안 씁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된 것입니까?

요셉의 환난을 위해서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타락이 깊어진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문틈으로 예수님께서 손을 들이밀 때에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올 때에 일어났습니다. 안 일어 날 수 있습니까? 안 일어나면 죽겠는데, 마지막에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회개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잃어 버렸는데 얼마나 회개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에서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는가를 살펴보고 처음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처음 사랑을 어디에서 떨어뜨렸습니까? 몸에 기름을 철철 바르다가 떨어뜨렸습니다. 또 어디서 떨어뜨렸습니까? 의복을 벗고 발을 씻고 침상에 눕다가 떨어뜨렸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편안히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옷을 벗었습니다. 옷을 벗지 않으면 밤낮 “오고 가라, 이것 해라, 저것 해라”고 해서 편안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 벗었습니다. ‘아, 이제 난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 옷을 벗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옷을 벗었으니 자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문틈으로 들이미시면 그때에는 안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일어나서 순종하려고 해도 벌써 예수님께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비슷한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잠을 자지만 그래도 마음은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양심은 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이 깊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세계에 있는 성도들이 다 이와 같은 환경에 빠진 것 같습니다. 너무 평안하고, 너무 좋으니까 다 안일주의에 빠졌습니다. 다 신앙의 잠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언제 신앙의 잠에 빠졌습니까? 전쟁할 때에 신앙의 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침상에서 낮잠 자며 안일주의에 빠졌을 때에 신앙의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일주의, 이기주의, 육체 중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과 같은 성자도 신앙의 잠이 들었는데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엘리야도 얼마나 위대한 선지자입니까?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거짓 선지자 850명을 숙청한 위대한 선지자인데 어디서 잘못했습니까? 이세벨이 잡아 죽이겠다고 하니까 도망치다가 로뎀 나무 아래서 기진맥진해서 잠들어서 죽여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잠이 드는 것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너무 평안하고 안일주의에 빠졌을 때에 신앙의 잠이 들고, 또 너무 위급해서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에 신앙의 잠이 듭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나 세례요한 같은 경우는 너무 고난이 심하므로 신앙의 잠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잠이 들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 사자굴과 표범산이라도 십자가를 지고 결사각오하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본문 7절에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후에 예수님을 찾으려고 다녔습니다. 다니던 중에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과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예수님을 물어보고 찾으려 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에게 상처만 받고 웃옷만 빼앗겼습니다. 또 성벽을 지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니까 거기서 만났습니까? 거기서도 못 만나고 웃옷만 벗기었습니다.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 성벽을 파수하는 자는 교역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3절과는 달리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인도하는 교역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참 성도에게 상처만 주고 웃옷을 빼았습니다. 웃옷은 성도의 의로운 행실입니다(계 19:8). 성도가 구원을 이루어나간 것,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 잘못 가르치는 교역자는 그것까지도 빼앗아갑니다. 그들은 술람미 여자에게 “잘못 믿는다, 그렇게 믿으면 안된다”고 핍박하며(요 16:2),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며 세상과 짝하게 만듭니다(계 2:14, 20).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을 때에 제자들이 분히 여기며 마리아를 책망하며 괴롭혔는데(마 26:7-10), 이것이 상처를 주는 것이며, 웃옷을 빼앗는 것입니다.

영적 면에 손해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요새도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신령한 골방에서 주님과 교통하던 신자가 깊은 신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게 가서 예수님을 찾으려 하면 찾을 수도 없고 도리어 상처만 받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왜정 말단에 많은 교회가 신사참배를 죄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을 때에, 신사 참배를 주장하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죽은 어머니 젖을 빨면 젖이 안 나오고 죽은 피가 나온다”고 말하며, 그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벗긴다는 것은 성화를 제거시키는 것으로, 외부적인 부흥 운동, 전도 폭발, 열린 예배 등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영적 면에 손해를 주고 외부적인 교회의 성장 방법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런 곳을 찾아다니다가는 손해만 본다는 것입니다. 상처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본문 8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라고 하였습니다. 참 성도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므로 병이 날 정도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은밀한 골방으로 돌아가 주님을 영접하는 데까지 나가야 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술람미 여자와 같이 침상에서 옷을 벗고, 기름을 바르고, 사치 향락하며 자기중심, 자유 방종 주의로 살았는데, 이것을 회개하여야겠습니다. 주님을 찾으려고 일심전력을 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영이 깨어 있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병이 날 정도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4.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 여자의 주님을 향한 사랑을 알지 못함

본문 9절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성도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사모하며 그 말씀을 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볼 때에 보통 신자들인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의문을 갖고 질문하게 됩니다. 술람미 여자가 사랑하는 주님은 어떤 분이기에 그 분을 사랑하므로 병까지 났으며, 그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본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성전 마당까지만 왔다 갔다 하는 신자들입니다. 침궁까지는 못 들어간 성도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이 “네가 예수 믿는 것과 내가 예수 믿는 것과 같은데 그렇게 골똘하게 병이 나도록 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주님과 살려고 하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5. 술람미 여자가 주님의 아름다움을 증거함

본문 10-11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질문에 술람미 여자가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라고 하였는데, 희다는 것은 성결과 승리를 가리키고, 붉다는 것은 구속으로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성결하시며, 우리를 구속해 주심으로 영광이 충만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또 만 사람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세상 어느 위인보다도 뛰어나신 분이며, 아무도 예수님과 비교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머리는 정금 같고’라고 하였는데, 머리는 주권을 가리키며(고전11:3), 정금은 믿음을 가리킵니다(벧전 1:7).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머리털이 고불고불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머리털은 순종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시고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도 순종하시고, 저런 면도 순종해나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모든 면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또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심한 고난을 받으신 면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셔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참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12절에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다’는 것은 지혜와 자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주님이시고, 자비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눈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본문 13절에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향기로운 꽃밭 같아서 향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향기가 납니다.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다’는 것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몰약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사랑과 사죄와 구원의 음성, 즉 복음이 뚝뚝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입이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본문 14절에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구원해주신 손이고,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손입니다, 또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손이므로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위하여 구속의 제물로 바쳐진 몸이므로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의 몸은 상아에 청옥을 입힌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본문 15절에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다리는 믿음으로 걸어가시고 모든 의를 이루신 다리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다리이므로 정금같이 아름답고 화반석 기둥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형상은 레바논 같다’는 것은 높고 위엄스럽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의 형상은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향기롭습니다. 백향목은 여러 나무모다 뛰어난 나무로 향기가 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만인 위에 뛰어나시며, 향기가 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예수님의 형상에서 나옵니다.

본문 16절에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이 심히 달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입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답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란 예수님 전체가 다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체가 사랑이시요, 우리를 사랑하사 피 흘려 주셨기 때문에 그 전체가 사랑스럽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입에서는 꿀이 나와 달고,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아서 우리를 구속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손입니다.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은 다리는 믿음으로 걸어 다니면서 우리를 구속해주신 다리이고, 형상은 레바논 같이 고상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발견한 술람미 여자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시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모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는 그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하고 따라 다니지만,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깊이 알고, 더 깊이 깨닫고, 더 깊이 사귀며 나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느라 병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예수님을 찾으려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레바논을 떠나서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로 찾아 갑니다. 이런 예수님이신데 안 찾아갈 수가 있습니까? 찾아가면 큰 복입니다. 만나면 복이고, 가까이 가면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사모하므로 찾으려고 애쓰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란 예수님께서는 아름답고 귀하신 분이시므로,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친구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아가 4:1-16 일어나 같이 가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일어나 같이 가자
아가 4:1-16

1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2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6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 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9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1.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

본문 1-2절에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의 말인데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를 이렇게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게달의 장막 같고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포도원을 지켜야 했지만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느라고 포도원을 잘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어여쁘고 어여쁘게 보시며 귀하게 보십니다. 믿음 쓰는 것을 보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육십 명 가운데 포함되어 하나님의 연을 옹위해나가는 것을 보시고, 기둥을 세워나가는 것을 보시고, 칼을 차고 싸우며 나가는 것을 어여쁘게 보십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너울은 면사포를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 때부터 썼는데 이것을 쓰는 이유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네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은 눈의 영안이 떠서 영의 세계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비둘기의 눈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 있으면 예수님이 아주 아름답게 보아주십니다. 영안이 밝아서 영적 면을 다 분별하고 신령한 세계를 향해 나가는 것을 보면 아주 귀한 것입니다.

‘머리털’은 권세 아래 있는 것을 말하는데,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권세 아래 있어서 잘 받들어나가고 순종하면 길르앗 기슭에 누운 염소와 같이 아름답다는 것 입니다. 교역자들도 권세 아래, 제도 아래에서 윗사람을 잘 받들어 나가고 그 제도를 잘 받들어 나가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귀한 자가 됩니다. 순종을 잘하고 머리를 잘 받들어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가 권세 아래서 머리를 잘 받들고 순종을 잘해나가는 것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성도의 이’, 치아는 말씀을 씹어 먹는 이를 말하는데, 단단한 식물을 잘 먹고 새김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단단한 식물을 잘 씹고 되새겨서 그것을 생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 기도를 했지만 그대로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되새기라는 말입니다. 육십 명 가운데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 하고 기둥을 세워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일을 잘해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말씀을 받은 후에는 씹어서 새김질을 해야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기도할 때에 말씀을 새김질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배운 말씀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바로 서는 생활을 해야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라는 말씀은 윗니와 아랫니가 잘 맞추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잘 씹어서 새김질하고 잘 소화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새김질하는 성도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본문 3절에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성도의 입술과 입과 뺨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대하여 증거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입술과 입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히 13:15).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감격하여 입술로 찬송하며 증거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므로, 입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힘써 복음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세상 떠나고 나면 한마디도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너울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석류 한쪽은 붉은 빛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성도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자리에서 구속의 은혜가 얼굴에 넘치는 성도가 주님 보시기에 이감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영적 생활을 하는 자는 심령이 평안하고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같이 광채가 납니다.

본문 4절에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의 목이 망대 같다고 하였는데, 망대 중에서도 원수를 이긴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가 달린 견고한 망대와 같습니다. 목이 망대와 같다는 것은 진리를 어기는 일에 목을 굽히지 아니하며 또 진리의 말씀을 굳게 세워나간 것을 말하는데,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나가는 견고한 성도의 목은 일천 방패가 달린 다윗의 망대와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목은 꺾여도 심령의 목은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 목을 굽히는 것은 개의 목과 같습니다(사66:3). 불의한 일에 머리를 숙이고 진리와 신앙양심을 양보하는 것은 꺾여진 개의 목과 같아서 하나님 앞아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술람미 여자와 같은 목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지켜나가시며 세워 나가십니다. 또한 술람미 여자의 목은 멍에를 잘 메는 목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잘 메는 목이 아름다운 목입니다.

본문 5절에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새끼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두 유방은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한 말씀과 같이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라고 하였습니다. 흉배라는 것은 가슴에 붙이는 것인데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므로 의의 흉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믿음과 사랑, 의와 사랑을 앞세우고 나가라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성도가 가는 곳에는 의와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의와 믿음, 사랑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성경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믿어야 옳은지를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은 용납하지 말고 남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만드는 일도 없도록 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끝까지 용서하고 전면에 옳은 진리를 내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유방의 다른 의미는 성도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와 같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나타나고 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주 아름답게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고 하였습니다. ‘날이 기울었다’는 것은 말세를 말하고, ‘그림자가 간다’는 것은 종말이 왔다는 뜻입니다. 말세가 되어서 날이 다 기울어지고 종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성도는 순교를 각오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몰약 산은 순교의 산이고 유향의 산도 향기로운 죽음의 산을 말합니다. 순교를 당하는 것은 제일 큰 복인데, 순교를 당하지 못하더라고 ‘몰약의 작은 산이라도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각오로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8-1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순교 당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교를 당하며 가는 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운 바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몰약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순교를 당하지 못해도 성도는 유향의 작은 산에라도 가야 합니다. 즉 죽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향기로운 죽음을 하라는 것입니다. 순교 당하는 것이 제일 큰 복이고, 순교를 당하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에 향기를 날리며 죽어야 합니다.

2. 일어나 같이 가자

레바논을 떠나 함께 가자

본문 7절에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게 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허물을 대속해주시고 아무 흠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허물이 많지만 예수님께서 피를 뿌리셔서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고 사랑하시므로 아무 흠이 없게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순전히 어여삐 여기시고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독생자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성도이므로 외모로 보면 아무 보잘 것이 없지만 믿음을 보시고 진정으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가 1장 5-6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게달의 장막이 컴컴하고 아무 보잘 것이 없는 것처럼, 외모는 아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에 솔로몬의 휘장 같이 호화찬란하며 빛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해졌어도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아주십니다.

본문 8절에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고 하였습니다. 레바논은 술람미 여자의 고향인데 ‘나의 신부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성도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편 45편 10-11절에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레바논에 있는 네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기 백성, 자기 집을 다 버리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분만 바라보고, 예수님 한분만 사랑하고, 예수님 한분만 위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은 다 잊게 되는 것입니다. 룻이 “어머니의 백성, 어머니의 나라가 나의 나라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자기 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기 지방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난 생각이고 자기 지방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난 것임을 자기 스스로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육신의 나라를 떠나지 못하면 하늘의 나라를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에게 고향인 레바논을 떠나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향에 연연하지 말고 고향을 깨끗이 떠나 예수님과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고향이 우리 고향이 되고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나라가 되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가고 예수님의 백성이 우리 백성이 됩니다. 과거에는 레바논이 자기 고향이고 자기 집이고 거기서 살았지만 다 떠났습니다. 친척과 아비 집 등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는 곳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병나는 사람들을 보면 근심걱정 불만, 두려움으로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병이 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운한 것, 섭섭한 것, 원수 맺는 것, 과거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병이 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집사가 집을 사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것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원통하게 생각하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 목사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고생을 많이 하다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걱정할 것 없이 이미 떠난 사람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돈도 떼인 것이 있다면 잊어버려야 하며, 그러지 못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꾸 속상해 하고 한탄해 하면 병이 납니다.
또 어떤 집사는 다른 사람들과 도박을 하다가 다 떼였던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 얼마나 근심 걱정을 하고 속을 태웠는지 병이 났는데도 계속 그 사람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도 그 생각만 자꾸 하여서 이제부터는 그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것 없이도 집도 있고 먹을 것이 있으니 다 잊어버리라고 하였더니, 이제는 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또 그 이야기를 하여 안 하겠다더니 왜 또 하느냐고 해도 계속 그렇게 염려하다가 결국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다 잊어버리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잊어버리십시오. 동대문시장 나가서 소매치기 당한 줄 알고 싹 다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근심한다고 해서 누가 가져다주겠습니까?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는 것도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 잊어버린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잘 잊어버리는 것이 복인 줄 알고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으로만 나가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또 잘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됩니다.

이기선 목사님께서 과거에 잘한 것을 생각하면 교만해지고 과거의 잘못한 것을 생각하면 낙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잘못한 것을 회개하며 이제부터는 어린아이처럼 새 출발을 하면 됩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
면 주님께서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며 건져주십니다. 걱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생활로 레바논에서 완전히 떠나는 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고향, 같은 지방 사람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고향 사람이다. 우리지방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은 다 레바논에서 떠나지 못한 생활들입니다. 그러므로 싹 떠나야 됩니다. 떠나지 못하고 말뚝을 박아 놓고 자기 고향 사람만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다 떠나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나가는 것이 레바논을 떠나서 가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으로 가자 예수님께서 레바논을 떠나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길은 헤르몬 꼭대기, 스닐 꼭대기, 산꼭대기로 가는 길, 또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어서 잡아먹는 짐승도 있는 험한 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환난과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며 환난의 길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산꼭대기로 가는데 힘들고 가다가 사자굴이나 표범산이 있어서 잡혀 먹힐 염려도 있어서 가다가 ‘나는 힘들어서 산 아래로 내려가 평탄한길로 가겠으니 예수님은 그길로 가시려면 가십시오, 나는 거기로 못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평지로 가면 예수님과 동행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산꼭대기로 가시고 나는 평지로 가는데 어떻게 동행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대로 가야 합니다. 자기마음대로 가지 말고, 자기 이로운대로 가지 말고, 자기 쉬운 대로 가지 말고, 또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산꼭대기로 가자고 하시면 산꼭대기로 가고, 사자 굴로 가자고 하시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가야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자굴이나 표범산으로 가다가 잡아먹으려고 하면 절대 예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미국에서 사파리 투어를 가자고 해서 가 보았더니 맹수들이 있는 곳에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사자들과 표범들이 많이 엎드려 있었고 이 맹수들이 차가 지나가면 차위에 올라타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자동차 문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으르렁대기는 하지만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잡혀 먹힙니다. 마찬가지로 환난과 핍박이 와도 예수님만 바짝 의지하고 딱 붙어서 따라가야지 조금이라도 떨어져서 가면 사자에게 잡혀 먹힙니다. 예수님만 바짝 의지하고 가면 예수님께서 다 물리쳐주시고 예수님을
떠나면 사망이지만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예수님과 같이 가면 즐겁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은 참 즐겁습니다. 가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아름답게 여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
다. 한 번 순종하면 예수님께서 아름답게 봐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됩니다. 또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는 사람들도 회개해야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돈을 바라보지 말고, 방탕하는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기쁘고 즐거우며 죄가 들어 오려다가도 다 쫓겨납니다.
이렇게 순종을 하면 예수님께서 아주 아름답게 봐주십니다.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험산준령으로 가고 표범산과 사자굴이 있는 산으로 가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 가면 예수님께서 아주 귀하게 여겨주시고 돌봐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건져주시고 이기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일날 교회에 가자고 하시고, 가족들은 놀러가자고 합니다. 토요일 날부터 가자고 합니다. 토요일 날 놀러 가면 주일날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물론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은 주일날을 생명을 내놓고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것은 이 성경말씀대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를 이기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는 것은 고향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고향에서부터 떠나자는 것입니다. 레바논에 살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떠나서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는데 이것이 진짜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명기 3장 9절에 “헤르몬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칭하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칭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 올라가야 합니다. 시룐과 헤르몬은 다 같은 한 산입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태백산맥과 같이 한 줄기로 되어 있는데, 이 높은 산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룻이나 요셉을 보면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높은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얼마나 높은 길을 걸어갔습니까? 생명을 내어 놓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구해주실 것을 믿은 신앙이었습니다. 도지사 직분을 다 내놓고 목숨과 가족까지 다 내놓고 높은 경지의 신앙의 길을 걸어갔는데 지금 우리에게도 이 길을 걸어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도 세상을 멀리 떠나 방주를 준비하는 높은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재산과 70년의 시간을 방주 짓는 데에만 투자하고 하나님께 바쳐서 방주를 잘 지어나간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그대로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고상하고 높은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산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을 내려다 보아라

그런데 이런 길을 걸어가면 아주 힘이 듭니다. 평탄한 땅이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로 걸어 가려니 힘이 드는 그런 험산 준령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가서 두려움이 없고 힘들지 않고 기쁨이 있게 됩니다. 또 주님이 붙들어주셔서 힘 있게 가는 것입니다. 발자국을 떼었다, 짚었다만 하면 거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힘이 들지 않고 예수님이 붙들어주시니까 발자국만 떼면 가게 되는 길이고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산으로 가니까 아주 힘든 길인 것 같아도 그곳이 즐거운 길인 것입니다
또 거기에다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어도 잡히지 않게 해놓으셨습니다.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을 때에는 예수님을 바짝 의지하면 사자와 표범도 예수님을 보고 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짝 의지하고 계속 의지하며 나가면 주님이 다 통과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주께서 맹수라도 오지 못하게 천사를 보내어 다 묶어 두십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고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아주 높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길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곳으로 가도 성도는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짝 붙어서 가면 해하지 못한다
는 것을 믿고 즐거움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다 보아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세상을 내려다보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 작아 보이고 볼 것이 하나도 없고 형편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새로운 새 생명의 길을 동행하며 내려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올려다보면 안 됩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로 가도 즐거움이 있고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곳으로 가도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3. 주의 마음을 빼앗음

본문 9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눈으로 한번 바라만 보았는데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만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옵니다. 앙망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로 옵니다. 우러러 바라봐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고 사모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바라보면 예수님이 좋아서 그 마음에 오시게 됩니다. 

목에는 구슬 한 꿰미를 달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순종을 말합니다. 잠언 1장 8-9절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 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금 사슬이고 눈으로 예수님을 한 번 바라보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아주 아름답게 보시고 성도에게서 예수님의 마음과 눈이 떠나지 않고 손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순종만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바라만 보고, 한 번 순종만 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4. 사랑과 진리 생활

본문 10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 보다 승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주는 달콤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취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은 달콤하고 서로 기쁘게하며 취하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고, 또 성도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본문 11절에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꿀방울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시편 19편 10절에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되새김질 하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혀 밑에는 젖이 있다고 하였는데 젖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5. 잠근 동산 생활

본문 12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라고 하셨는데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은 왕만 먹는 것입니다. 비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와서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 되시는 예수님만 그 동산에서 즐거워 하실 수 있고, 예수님만 그 덮은 샘물을 열고 예수님만 그 봉한 샘물을 잡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로 더불어 즐거워하시고 같이 먹고 같이 즐거워하십니다. 예수님과 동거, 동락,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이만큼 잠근 동산만큼, 덮은 우물만큼, 봉한 샘만큼 성도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에는 잡다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 안에 다만 예수님만 들어와서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을 언제나 잠근 동산처럼 잘 지켜야 합니다. 동산 문을 잠그지 않으면 지나가던 사람도 들어오고 장사꾼도 들어오고 불량배도 들어오고 도적도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을 잘 잠가두어 예수님만 들어와서 편히 쉬고 즐거워하는 동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자기도 나가지 못하게 하여 예수님과 온전히 교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심령은 언제나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 지켜져야 합니다. 잠근 동산이 되어야 합니다.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라고 하였는데, 우물에는 물이 고여 있고 샘에는 물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물은 생명의 역사를 가리키는데, 성도 속에는 언제나 진리와 영감으로 인한 생명의 역사가 흘러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14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역사가 있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항상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보기에는 게달의 장막 같고 얼굴은 거무튀튀하여도,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봐주시고 잠근 동산같이 봐주시고 덮은 우물과 같이 봐주시고, 봉한 샘같이 봐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도와 더불어 낙원에서 사는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레바논을 떠나서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말씀만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3-14절에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아름다운 골방 생활을 상징합니다. 성도가 침궁에 들어가서 예
수님과 같이 살며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영적 생활을 하며 생명의 역사가 있을 때 거기에는 언제나 신령한 꽃이 피어 있고 또 신령한 과수의 실과와 향기 나는 기름과 향품이 가득하게 됩니다(갈5:22-23; 엡 5:9). 신령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히게 됩니다.

본문 15절에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레바논의 산들은 높기 때문에 언제나 눈이 덮여 있고 그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은 고갈함이 없이 변함없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심령 속에는 끊이지 않는 생수의 강이 계속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네 개의 강이 나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생명의 강이 흘러 내려가서 많은 사람을 소생시킵니다.

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본문 16절에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북풍’은 찬바람, ‘남풍’은 더운 바람을 말하는데, 북풍은 환난과 핍박을, 남풍은 안일과 풍부와 유혹을 가리킵니다. 성도가 심령 속에 향기를 가지고 있다가 바람이 불면 향기를 멀리까지 날려 보냅니다. 이것은 마치 가시밭에 있는 백합화가 바람이 불면 찢기지만 향기가 더 많이 나와서 멀리까지 날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새 너무 풍성하고 너무 평안한 것도 일종의 환난입니다. 강압적으로 내려오는 환난은 북풍이고, 따스하게 만들어서 녹이는 환난은 남풍인데, 요새는 남풍이 부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힘을 못 씁니다. 그래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향기가 납니다. 풍부와 평안과 유혹이 온다고 해도 거기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향기를 더욱 날립니다(히 11:24-26). 요한계시록 12장에 용이 물을 토한다고 하였습니다. 용이 물을 토해서 계속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향기가 나오고 열매를 맺힙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믿음 지키는 성도는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또 강압적으로 가정에서 핍박하고 쫓아내려고 해도 거기에서 믿음 지키면 향기가 나며 열매가 맺힙니다.
어떤 집에 남편이 매일 핍박을 하는데도 부인이 그것을 잘 이기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남편이 방법을 바꿔서 계속 부인이 원하는 것을 사다주며 잘해주었습니다. 얼마 후 교회에서 심방을 가니까 부인이 남편이 잘해준다고 남편 밖에는 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남편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신앙을 양보한 것입니다. 아무리 북풍과 남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북풍이 불다가 남풍으로 돌아서도 속에 신앙만 있으면 다 이기고 거기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레바논을 떠나서 주님과 같이 가는 생활을 하면 이 시험, 저 시험이 와도 괜찮습니다. 속에 술람미 여자와 같을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다 이깁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와 같은 신앙을 갖지 못하면 바람이 불어오면 넘어지고 썩어져서 냄새가 납니다.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나는 예수님 한 분만 사랑한다’는 결심을 가지고 결사각오하며 나갈 때 향기가 날립니다. 또 예수님께서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거두십니다.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실과는 성도가 믿음 지킨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