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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빌립보서 4:10-23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 4:10-23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4:10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제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너희가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 

4:11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궁핍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 나는 배부름이나 배고픔이나, 풍부나 궁핍이나, 모든 형편에 처하는 비결을 배웠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4:14 다만 너희가 나의 환난에 함께 참여한 것은 잘한 일이다. 

4:15 빌립보 사람들아, 복음 전파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아무 교회도 나를 위해 주고받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직 너희만 참여한 것을 너희 자신이 알고 있다. 

4:16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는 나의 필요를 위해 한두 번 쓸 것을 보내었다. 

4:17 내가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열매가 풍성하기를 바란다. 

4:18 나는 지금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넉넉하다.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로디도로부터 받아 풍족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다.

4:19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4: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을지어다. 아멘. 

4:21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여라. 나와 함께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 

4:22 모든 성도들, 특히 가이사의 집에 속한 자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 

4: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과 함께 있을지어다.


1. 일체의 비결이 되는 하나님의 능력
 
본문 10절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연보한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났다고 했는데 싹이 났다는 것은 연보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해서 연보해 주었다는 것인데, 전에는 생각만 있었지 기회가 없어서 연보를 못해 주다가 이번 기회에 연보해 준 것에 대해서 바울이 상당히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보 자체, 즉 돈을 보고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 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비결을 배웠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은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궁핍할 때나 풍부할 때나 같다는 것입니다. 비천할 때나 풍부할 때나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풍부할 때나 궁핍할 때나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믿음으로 그것을 모두 승리적으로 통과하고, 거기에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풍부하다고 해서 기뻐한 게 아니고, 궁핍하다고 해서 근심한 게 아니고, 배부르다고 해서 좋아한 게 아니고, 배고프다고 해서 실망한 게 아니고, 그 모든 것을 다 이기는 일체의 비결, 이기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나가고 모든 것을 다 승리적으로 통과하는 것입니다. 풍부할 때에 마음이 높아지지 않아서 향락주의로도 나가지 않았고, 가난할 때도 배고플 때 절망 속에 빠져 근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풍부할 때도 마치 풍부하지 않은 것처럼, 이렇게 모든 것을 믿음으로 나아갔고, 거기에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가난할 때는 정말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어제 기도원에서, 기도원에서 농사한 옥수수를 먹었습니다. 삶아서 목사님들 여러 명과 함께 식사했는데, 인태교 목사가 저하고 마주 앉았는데 옥수수하고 쌀하고 영양이 같을까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제가 영양가 조사는 안 해 보았 지만 예전에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 옥수수만 먹고 산 적이 있었을 때 옥수수만 먹으며 지낸 사람은 영양 부족이 되서 쌀밥 먹은 사람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밀가루하고 쌀하고 영양이 같을지 물어봅니다. 그러자 이번엔 옆에 있던 고석남 목사가 같지 않다는 겁니다. 영양가가 밀가루보다 쌀이 낫다는 건데,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서양 사람들은 밀가루만 먹는데 고기를 많이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쌀 먹으니까 고기 안 먹어도 된답니다. 강원도에서는 감자만 먹고 삽니다. 감자 바우란 말이 있습니다. 하여간 쌀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보리 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궁핍할 때 먹을 게 없어서 보리 여물기도 전에 물이 툭툭 튀는 것 갖다가 먹으면서 죽음을 면한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어려웠는데 하나님께서 이만큼이나 넉넉하게 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먹을 게 없어서 감자 캐 먹고 살고, 옥수수 따 먹고 살고, 익지도 않은 보리 이삭을 따서 빨아 먹고 살았던 게 한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날 배고픈 것이 없고 이젠 오히려 배가 너무 부르고 살이 쪄서, 살 빼느라고 법석인 때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습니까. 최명신 장군의 말에 의하면 월남에 한국 군대 보낼 때부터 그렇게 됐다는 말입니다. 6.25사변이 지나간 다음에 월남에 한국군을 얼마나 파송했습니까? 한 사단인가 얼마를 파견했는데 그 때부터 한국이 경제적으로도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미군이 몇 만 명이 가서도 못 하는 것을, 월남에 한국군이 파견 되서 전쟁을 잘 하니까 세계 신문에 이 한국 군대에 대한 칭찬, 한국이 굉장하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다른 나라가 한국에 돈을 빌려 주기 시작했고 또, 월남 전쟁하면서 일군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한국 사람이 다 했다고 합니다. 전쟁하려면 사람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물건 나르는 사람, 건물 짓는 사람 등 모두 한국 사람이 했답니다. 한국사람 고용시켜 달라고 하니, 월급도 많이 받으면서 다 고용되었다는 말입니다. 월남에 간 한국군인들 제대를 조금 빨리 시켜서 그곳에 취직시켜 놓고, 또 새로운 군대를 파송하면서 거기서 돈 벌어 오는 게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인정을 받으며 국이 돈 빌려 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거기서 교체되어 귀국할 때 월남에서 사용하던 M16총들을 전부 가지고 왔는데 그 때부터 한국 군대가 M16으로 전부 교체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쓰던 칼빈 소총, M 1 소총, 그거 가지고는 일이 안되었는데, 기관총 기능도 있는 M16으로 한국 군대가 무장하고, 돈도 많이 벌어 들여오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차관도 빌려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일체의 비결이라는 것은 풍부하다고 해서 더 교만하지 않고, 물질 가지고 자랑하지 않고, 또 궁핍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궁핍하면 궁핍한대로 참아나가는 것입니다. 풍부하면 풍부한대로 그것으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하지 않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하는 것, 그것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할 수 있습니까? 네, 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2. 믿음의 열매인 연보

본문 14-15절에,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도 하는 일에 여러 가지 괴로움이 많았습니다. 또 경제적으로 괴로움이 많았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연보해서 도와주니, 괴로움에 함께 참여 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괴로움에 경제적으로 도와줌으로서 같이 참여해서 반갑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 전하는 시초에 빌립보 교인들이 많이 도와주었는데, 빌립보 교인들 외에는 다른 교회에서는 도와준 일이 없는 모양입니다. 참여한 교회가 너희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6절에,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마게도니야에 있을 때도 연보를 보내주어 도왔고,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연보해서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고 했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다. 연보해 주는 선물, 곧 연보해서 주는 돈, 그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연보하는 것이 믿음의 과실이라는 것입니다. 열매인 것입니다. 

연보하는 것이 믿음의 열매인데, 그 선물이 문제가 아니고 너희가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것, 그 믿음의 과실이 번성하기만은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 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을 쓸 때 과실은 필연적인 결과로 맺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데,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연보하는 것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연보하는 일에 대해서 한 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19:16-21절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이 청년에게 계명 지키라고 하니까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니까 그 사람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렇게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다 지켰다고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합니다.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고, 또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하늘의 보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연보하는 일은 하늘에 쌓는 일이고, 하늘의 보화가 너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21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
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서 써 주시면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해질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쌓아두고 죽으면 그것은 땅에 쌓아놓은 것인데, 동록이 슬고, 도적질 당하고, 좀이 먹는 겁니다. 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면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인데 그건 동록도 해하지 못하고, 도적도 오지 못하고, 녹도 슬지 않고, 좀도 먹지 않는,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이따금 자기 재산 전체를 어느 학교에 기부한다, 또 어디에 기증한다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 400억을 고려대학교에 바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면 하늘에 보화가 있을 뻔 했는데, 그 사람은 안 믿었으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땅에 쌓아둘 생각하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어서, 하늘에 보화가 있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시가로 상당한 금액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들은 없고, 영감이 있었는데 그 남편도 인삼, 녹용을 잘 못 먹고 죽었답니다. 자녀, 남편도 없는 그 할머니가 죽을 때 자기 집을 조카에게 상속하고 갔습니다. 하나님께 바쳤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늘에 보화가 있을 뻔 했는데, 교회도 안 나오는 자기 조카에게 주고 갔으니 참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하늘나라에 무엇을 가지고 가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 자기 조카에게 자기 장례를
치루면, 장례하는 감사연보를 바쳐야 되는데, 네가 5만원 교회에 드려라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장례한지가 몇 십 년 됐는데, 그 5만원도 아직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연보도 외상으로 하고 죽는게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자기 살았을 때 해결하지 왜 조카에게는 몇 억이나 주면서, 하나님께는 5만원 바치라고 맡겼다니 그것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면, 하늘에 보화가 있다는 걸 알아서 하늘에 쌓는 게 되고, 도적질도 못하고, 동록도 안 슬고, 좀도 안 먹는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연보하는 것은 믿음을 쓴 과실, 곧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하여 맺게 된 열매입니다. 열매 맺는 걸 원하는 것이지 어떤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다음에 연보를 해야 그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것인데, 믿음으로 연보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연보하는 것은 열매 맺는 것인데, 열매를 맺어야 자라나고, 또 더 번성해나가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렇게 연보 한 사람에 대해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연보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연보하는 것이 바로 씨앗, 종자 심는 것과 같아서 심으면 더 많은 게 나옵니다. 심으면 앞으로 더 많이 준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의 모든 쓸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고 했습니다. 

3. 문안 축복

본문 20-21절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그리고 서로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도와주고 문안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서 서로 잘 있는지, 평안한지 문안하게 됩니다. 교회에 와서 서로 사랑으로 인사하고, 문안하는게 좋습니다. 교회 나왔다가 인사도 안하고 마치 배급 타러 나왔던 사람처럼 후딱 달아나지 마십시오. 교회는 배급 타는 데가 아니고 사랑의 유기체,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한 지체인데, 서로 사랑하고 문안하고 아끼고 도와주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항상 풍성하게 있기를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4:1-9 같은 마음을 품고 항상 기뻐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같은 마음을 품고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1-9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4:1 그러므로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인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이같이 주님 안에 서라. 사랑하는 자들아, 

4:2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니,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 

4:3 참 동역자인 너에게도 부탁하니, 이 여자들을 도와라. 이들은 클레멘트와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 안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던 자들이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여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여라. 

4:5 너희 관용을 모든 이에게 알게 하여라. 주께서 가까이 계신다.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라. 

4:7 그러면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4:8 마지막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참되고, 무엇이든지 경건하고, 무엇이든지 의롭고, 무엇이든지 거룩하고, 무엇이든지 사랑할 만하고,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하고, 무슨 덕이나 무슨 칭찬이 있거든 이것들을 생각하여라. 

4:9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이것들을 행하여라.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1.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함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는 특별히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사랑하고, 사모하고,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한 교회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너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심령 속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심장으로 사랑하고 또 사모하였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을 사도바울이 사모합니다. 또 교인들은 바울을 사모합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어머니가 아이를 사모합니다. 아이는 또 어머니를 사모합니다.

바르게 가르침으로 서로 면류관이 됨

또한 “나의 기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면류관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에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재림하는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자랑이 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배웠으므로 고린도 교회가 잘 되는 것은 바울의 자랑입니다. 또 면류관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자랑입니다. “바울이 잘 배워줘서 우리가 이만큼 됐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날에 고린도 교회가 자랑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됐으니까 자랑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면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잘 배워서 그대로 믿는 일을 잘 하면 가르쳐 준 사람의 면류관이요, 자랑이 됩니다. 또 자기를 가르쳐 준 사람이 잘 되면 가르쳐 준 사람이 배운 사람의 면류관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바른 복음을 잘 배위서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면류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면류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잘 배워줘서 그만큼 됐으므로 빌립보 교인들은 가르쳐 준 바울을 그들의 면류관으로 여긴 것입니다. 

또한,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잘 배워서 그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가르쳐 준 사람도 배운 사람들의 면류관이 되고, 또 배운 성도들은 자기들을 가르쳐 준 사람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배워준 사람은 교인들이 면류관인 것입니다. 잘 배우지 못하면 잘 되지 못합니다. 잘 배우지 못해서 잘 되지 못하면 면류관이 되지 못합니다. 잘못되었는데 무슨 면류관이 되겠습니까? 교인들도 가르쳐 준 사람의 면류관이 못 되고, 가르쳐 준 사람도 교인들의 면류관이 못 됩니다. 잘 배워서 그대로 믿는 일 잘 하면 피차간에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잘 배우는 것이 큰 은혜이고, 그대로 사는 것이 또한 큰 면류관입니다. 우리도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

본문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아주 충성된 여자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유오디아고, 또 한 사람은 순두게였습니다. 이 여자들은 특별히 믿음이 좋고, 교역자를 잘 받들고 교회를 잘 받들어 나가고, 연보도 많이 하고 대접도 잘하는 충성된 여자들 인 것 같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그 교회에서 두드러진 대표적이라고 할 만한 그런 여자들입니다.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교회 기둥이 된 남자들에 대하여는, 갈라디아서에 말씀하기를 초대교회의 기둥을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사람이 기둥이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특별히 교회를 잘 받들어 나가고 교역자를 잘 받들고 교회에 연보도 많이 하며, 아주 힘쓴 부녀들입니다. 특별히 나서서 교회를 잘 받들어 나가는 부녀들은 여걸(女傑)종이라 할 수있습니다. 믿음이 특별히 좋고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잘 받들어 나갔습니다. 바울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또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데 많이 도와준 여자들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는데 둘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화목이 안 됩니다. 이렇게 충성스럽게 봉사 잘 하는 사람들이 서로 라이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경쟁하였던 것 같습니다. 서로 더 잘 하려고, 서로 더 인정 받으려고, 서로 더 많이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연보하는 것도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조금 더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연보할 때 그냥 안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연보 한 다음에 아무개는 얼마 했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래서 아무개가 1억 했다고 하면, 자기는 1억1천만 원으로 올려서 연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라이벌 의식으로 마음이 맞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서로 교회 잘 받들고 교역자 잘 받들어서 봉사 잘 하는 것은 좋은데,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이 권면했습니다. “같은 마음”은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에 가능합니다. 

빌립보서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화목하지 못하는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해서 화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 명예와, 자기 자존심과, 자기 영광과, 자기 위신을 다 내어 놓고 지극히 낮아져서 종노릇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대접 받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달게 받고, 지극히 낮아져서 종살이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피차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전에 어떤 한국 학생이 일본에 공부하러 가서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니까 어떤 사람이 신발장에 서서 사람들의 신을 받아서 신발장에 넣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어떤 사건이 생겨서 재판하는데 가게 되었는데, 그 재판장에 판사가 바로 그 신발장에서 신을 받아서 넣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신발을 받아 신발장에 넣던 사람이 판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는 판사이지만 교회에 와서는 종살이 하는 것입니다. 하여간 종살이 하면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다 내어 놓고, 낮아지고, 멸시와 천대를 달게 받고, 종살이 하는 마음이 되면 하나가 됩니다. 종살이 해 주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왕으로부터 거지까지 자기에게 종살이 해주면 다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언제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남을 섬기는 자리에 서야겠습니다.

3.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확신할 것

본문 3절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는 것은 빌립보 교회 교역자를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 교역자가 있었습니다. 목사가 있었습니다. 교역자에게 구하기를,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도우라’고 한 것입니다. ‘저 부녀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말합니다. 이들이 바울과 같이 복음에 힘쓰던 자들입니다. 교회 세우는데 힘을 많이 썼습니다. 이런자들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 그 외에 바울의 동역자의 그 이름들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있어야 합니다. 생명책에 있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생명책에 없으면 탈락이 됩니다. 못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나 명부에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시험이라 해도 시험 쳐서 합격한 사람은 합격자 명부에 있어야 합격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했다고 해도 명부에 없으면 탈락입니다. 합격자 명부에 있어야 됩니다. 주민등록이 있어야 되고 시민증이 있어야 됩니다. 그 나라에 가려면 그 나라 사람이라는 증명이 있어야 됩니다. 증명이 없는 사람은 불법 체류자와 같은 것으로, 불법 체류자는 쫓겨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있어야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불법 입국자는 쫓겨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남게 되어 있습니다.

혼인 잔치를 하는데 여러 사람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 하나가 쫓겨났습니다. 주인이 와서 보니까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고 하니까 그 사람이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람을 결박해서 어두운데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찬송가 532장 끝에 가사에는, ‘생명책에 기록하셨을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찬송가를 지은 것입니다. 찬송가 532장 마지막에 “기록하셨을까?”라고 했는데, 기록했다는 것입니까 안 했다는 것입니까? 확신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찬송가를 지은 것입니다. 후렴에 “주가 나의 이름 보좌 앞에 놓인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 하셨도다”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가사를 고쳐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셨도다’로 부릅시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중생한 자는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

그러면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동회 서기가 와서 주민등록 조사 하는 것 같이 이름을 조사해서 써 갔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인지 아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서 아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중생한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데, 요한일서 5장 8절에는, 피가 하나 더 들어 갔습니다. 중생하는 것은 물과 피와 성령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피는 예수의 구속의 피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씀과 예수님의 피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성령으로 믿으면 중생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생명이 살아난 사람입니다. 중생한 영, 산 영, 산 생명입니다.

산 생명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한테 ‘주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산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또 ‘주여’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자기 속, 중생한 영에서 본능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람은 산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과 성령과 피로 중생한 사람은 산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피와 말씀은 하나입니다. 피와 말씀은 하나라야 됩니다. 말씀 속에 피가 있으므로 물과 성령으로나, 물과 피와 성령으로나 하나입니다. 같은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 영혼이 살아난 사람, 죽었던 영이 살아난 사람은 생명책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아버지’하고 부르짖는 것이, 죽었던 사람이 산 증거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사랑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주님을 향하여 ‘주여’ 하고 부르짖습니다. ‘주여,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하고 부르짖는 것이 ‘아바 아버지’입니다.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지 들은 풍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우러나와서 아버지를 부르짖으니까, 그것은 진짜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책에 언제 기록되었느냐 하면, ‘주여’ 하고 ‘아바 아버지’ 할 때 기록이 되었습니다. 창세전에 기록된 것도 맞지만, ‘아바 아버지’라고 할 때 기록하는 것이 진짜 맞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예정하고 택해 놨지만 안 믿고 돌아갔단 말입니다. 안 믿고 돌아가다가 이제 물과 피로 중생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때 진짜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기록해 놓은 것은 예정록에 기록해 놓은 것이고,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진짜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말입니다. 국가로 말하면 시민증 탈 때 진짜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다음에 하늘나라 가면 “네 이름 무엇인가?”하면 “아무개입니다”할 것입니다. 이름이 생명책에 있으면 “합격, 넌 들어가라” 하고, 생명책에 없으면 “너는 불합격이다 못들어간다”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생명책에 없으면 제사장 일을 못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제사장이 포로 잡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제사장들이 왔는데, 느헤미야 7장 64절에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제사장이 와 보니까 자기 이름이 족보에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족보에서 이름을 다 대조해 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할 때, “아무개입니다”하면 어떤 사람은 “네 이름이 족보에 있다”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네 이름이 없다”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보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제사장의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범죄하면 생명책에서 지움

그리고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 버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2-33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려 달라고 하니까,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범죄하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는 일한 공로와, 인격을, 범죄하면 다 지워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고 거기에 믿는 일한 것을 다 기록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범죄하면 생명책에서 지워 버린다는 말은 본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것이 아니고, 기록되어 있는 믿는 일한 것을 지운다는 말입니다. 믿는 일 잘했다, 연보 많이 했다, 봉사 많이 했다, 전도 많이 했다, 믿음 잘 지켰다, 핍박과 환란 받으면서 믿음 잘 지켰다,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나갔다, 이런 것들을 다 기록해 놓았는데 범죄하면 이들을 지워 버립니다. 그리고 이름만 남게 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과거에 바울을 도와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하면 그 잘 한 것이 없어집니다. 그냥 이름만 남게 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의 기쁨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다는 것은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으로 말하면 시민권이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시민증 장부에 기록이 되어 있으면, 시민증을 잃어 버려도 괜찮습니다. 잃어버려도 신고하면 원 시민증 장부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다시 발급해 줍니다.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입니다. 요한계시록 21:27절에 보면 이 다음에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께 들어갑니다. ‘세상에서는 환란 당하지만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다, 순교 당하지만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내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다 도와주십니다. 미국 정부에서도 시민권 있는 사람은 책임지고 도와줍니다. 갑자기 병이 나서 돈 하나 없이 병원에 가도, 메디케어(Medicare)라는 보건복지 시스템으로 무료로 다치료해 준다고 합니다. 돈 하나 없어도 다 치료해 줍니다.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은 웰페어(Wel-fare)라는 것을 탑니다. 웰페어는 65세부터 받는데, 가난한 사람, 돈 없는 사람들도 한 달에 약 650불씩 받습니다. LA에서 650불이 한국 돈으로 65만원인데, 매달 초하루에 준다고 합니다. 병나면 병원비가 무료, 또 약도 무료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민간 할머니들이 그저 조금 감기만 들어도 병원에 간다고 합니다. 입원하면 미국정부에서 책임지고 무료로 돌봐주고 치료해 준다니, 집에 있는 것보다 거기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민증 있는 사람도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우리의 천국은 어떠하겠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있고 하늘나라의 시민증이 있는 사람은 미국시민보다 몇 억만 배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감사합니다. 다 하늘나라에서 책임을 지고 돌봐 주십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다 돌 봐줍니다. 천사를 보내서 다 구출해 줍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죽어도 감사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것을 믿습니까? 이름이 있는 것을 믿으면, 이제 자다가라도 기뻐해야 합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면, 이것만 해도 100만 불짜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돈 주고 못사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해야 됩니다. 이름이 생명책에 있으니까 괴로우나 즐거우나 환란을 당하나 핍박을 당하나 상관없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으면,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북에 있는 성도들이 감옥에 갇히고 수용소에서 고역을 당하지만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역 당하다가 죽어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4.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본문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는 모두 4장으로 되어 있고, 또 감옥에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말이 18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신령한 신앙에 선 증거입니다. 영적신앙에 서면 항상 기뻐합니다. 그 세계는 늘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하늘나라는 기뻐하는 세계이고, 감사하는 세계입니다. 영적 신앙에 서지 못한 사람은 육신중심, 세상중심, 물질중심이므로 기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신앙의 세계에서 사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합니다.

관용하라

본문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관용이란 너그러움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내게 악을 행하거나 손해를 줄 때에 잘 참고 용납하여 유순한 마음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좁혀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원수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면 모든 사람에게 화목 할 수 있습니다. 넓은 바다는 장마
때에 사방에서 개천물이 들어오고, 강물이 흘러 들어오고, 모든 흙탕물을 다 받아도 언제나 청청 합니다. 물이 흐려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넓기 때문입니다. 하도 넓으니까 들어와도 들어오나마나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과 다투지도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주께 맡기라

본문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 하는 것은 마귀의 올가미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염려”라는 올가미를 목에 씌워 잡아당깁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들어오면 주께 맡기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심을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주에 가면 길가에 버드나무가 쭉 있는데 거기에 도적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버드나무 잎사귀가 땅에까지 내려와 닿기 때문에 거기에 숨으면 안 보인다고 합니다. 거기에 숨어 있던 도적이 길 가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목에 걸어서 잡아당기면, 사람이 끌려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빼앗고 내보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주에 갈 때에는 지팡이를 하나 가지고 가야 된다고 합니다. 지팡이를 앞에 들고 가다가 도적이 올가미를 목에 걸면, 지팡이로 올가미를 걷어 벗겨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적이 끌고 들어가지 못한답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염려”라는 올가미를 성도에게 갖다가 씌우려고 합니다. 마귀가 염려라는 올가미를 갖다가 목에 걸면, 도적의 올가미를 지팡이로 벗겨내듯이 “주께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이 들어오면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끌려가지 않습니다. 모든 염려를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본문 6절 하반절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는데, “기도, 간구, 구할 것” 이 세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이고, 간구는 특별한 사건을 두고 하는 기도입니다.

본문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이란 위에서 말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즉 기도, 간구, 구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옵니다. 조그마한 것을 주실 줄 알았는데 큰 것을 주십니다. “지각에 뛰어난”이란 상상도 못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애매히 누명을 쓰고 감옥에도 갔고, 종살이 했지만 하나님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줄 꿈이나 꾸었겠습니까? 꿈도 꾸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각에 뛰어난 모든 것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믿음에 바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행하며 나갈 때에 지각에 뛰어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저는 6.25 전쟁 피난 중에 중공군에게 잡힐 뻔했고, 청천강을 건널 때에는 유엔군 비행기 폭격으로 죽을 뻔했습니다. 또 평양의 대동강을 건널 때에는, 대동강 다리가 다 끊어지고 다리 테두리만 물위에 올라와 있었는데, 그리로 벌벌 기어 올라가서 내려갈 때에는 미끄럼을 타듯이 내려가며, 다리를 건너 이남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지각에 뛰어난 모든 것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에 뛰어난 것을 주십니까? 지각에 뛰어난 것을 주십니다. 즉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십니다. 작은 것을 생각했는데 큰 것을 주십니다. 

5. 도덕적 열매를 맺으라

본문 8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란 진실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란 하나님께 바로 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에든지 옳으며”란 옳게 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에든지 정결하며”란 정결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란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란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만 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4장18절에,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나 칭찬 받을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사랑으로 하고, 신앙양심을 써서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옳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익이 될까?’하며 이익을 보려는 데로만 따라 가면 실패합니다. ‘어떻게 해야 옳게 할까?’ 생각하여 옳게 하면 성공입니다. 몇 가지입니까? “첫째는 참되며, 둘째는 경건하며, 셋째는 옳으며, 넷째는 정결하며, 다섯째는 사랑할만하며, 여섯째는 칭찬할만하며”로 여섯 가지입니다. 무엇에든지, 누구에게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익을 따라가지 말고 무엇에든지 참되게, 경건하게, 하나님께 바로 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옳게, 신앙양심을 써서 하고,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또 무엇에든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 받을만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이란 무엇입니까? 위의 여섯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위의 여섯 가지를 생각해서 그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무슨 덕이 있든지”라고 하였는데, “덕”이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에 여섯 가지를 생각해서 그대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또 “무슨 기림이 있든지”라고 하였는데, “기림”이란 자기가 예찬 받는 것으로, 자기가 예찬 받을 때에 여섯 가지를 늘 생각하여, 그 여섯 가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어야 할 때에, 즉 좋은 일을 할 때에 옳게, 경건하게, 참되게, 정결하게, 사랑할만하게, 칭찬할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때에 옳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옳게, 참되게, 진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때에 외식하지 말고, 자기 자랑하지 말고, 또 자기 칭찬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때에 옳게, 진실하게,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기림을 받을 때에도 즉 예찬을 받을 때에도 이것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찬은 다른 사람에게 받는 것입니다. 예찬을 받을 때에도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로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즉 받을 때에도 바로 받고, 줄 때에도 바로 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때에 양심을 바로 써서 옳게 하여야 합니다. 바르게, 경건하게, 더러운 생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인심을 사서 한 몫 보려고 하는 것은 옳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또 무엇을 주고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고받으려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늘 베풀어야 할 것이 많은데, 즉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 할 것,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할 것,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 등이 많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옳게 하고, 정결하게 하고, 선하게 하고, 사랑할만하게 하고, 칭찬 받을만하게 해야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이기주의로 나가지 말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남을 멸시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을 도와주며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가 예찬 받을 때에 몇 가지 생각하라고 하였습니까?
여섯 가지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옳게, 경건하게, 참되게, 정결하게, 칭찬할만하게, 사랑할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대접 받을 때에 경건하게 받아야 합니다.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거기에 빠져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옳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공경할 때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옳게 공경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공경을 옳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정결하게, 사랑할만하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내가 칭찬을 받든지, 욕을 먹든지, 고난을 받든지, 다 “옳게, 정결하게, 경건하게, 사랑으로, 칭찬 할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이 여섯 가지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때에도 이 여섯 가지대로 주고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또 남을 도
와 줄 때에도 이 여섯 가지대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받을 때에도 이렇게 받아야 합니다. 즉 옳게, 정결하게 받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줄까? 무슨 딴 생각을 가지고 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정결하게, 옳게, 바르게,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각에 뛰어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조그마한 것을 바라보았는데 큰 것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 만 원 짜리를 바라보았는데 몇 억을 주십니다. 이처럼 지각에 뛰어난 모든
선물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여야 합니다(벧후1:5-7). 우리가 덕이 있어야 합니다. 덕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못 받습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라 하였는데, 믿음은 있는데 덕이 없는 사람은 못 씁니다. 사람이 덕
망이 있어야 합니다. 덕이 없으면 남에게 욕이나 먹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저따위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네가 천당을 가면 나는 만당을 간다”는 욕만 먹습니다. 또 덕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덕이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좋게 하고 칭찬을 받는데, 믿음이 없어서 뼈가 없는 사람 같이 바로 서 나가지 못합니다. 

출애굽기 18:21에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울 때에 이드로가 모세에게 재덕이 겸전한 사람, 즉 재주와 덕이 겸전한 사람을 택하고, 진실 무망한 사람, 즉 진실하고 망령되이 행치 않는사람,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몇 가지 입니까? 
첫째는, 재덕이 겸전한 사람, 
둘째는, 진실 무망하고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사람, 
셋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택하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사람은 재간은 있는데 덕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덕은 있는데 재간이 없어서 매사를 비뚤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실 무망하고, 불의한 재물을 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덕이 있어야 합니다. 덕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에도 남을 도와주는 정신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6. 바른 진리를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본문 9절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바른 진리를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진리를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른 진리를 배우고, 그 다음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여야 합니다. 행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평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인간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빌립보서 3:18-22 성도의 나라는 하늘에 있음.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성도의 나라는 하늘에 있음
빌립보서 3:18-22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3:18 내가 너희에게 여러 번 말을 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만, 많은 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고 있다. 

3:1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며, 그들의 신은 배이고,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운 것에 있으며, 그들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그곳으로부터 오실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3:21 그분께서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실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1.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

본문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역(舊譯)성경에는 ‘안 믿는 사람 가운데 십자가의 원수가 많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전부다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믿는 사람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 가운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로 행하는 사람 가운데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미혹 받지 말아야 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다니는 사람들입니까? 

본문 19절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 세 가지. “저희의 신은 배요”란,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란, 부끄러운 일로 영광을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것은, 세상 일만 생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구역성경에는 “다니는 사람 가운데 십자가의 원수가 많으니 저희는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고, 세상일만 생각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이런 것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십자가의 원수가 많은 데, 어떤 자들인가요?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자들,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즉 십자가를 안지고 자유방종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먹자주의’로 ‘방탕주의’로 나가고,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안지고 예수 믿겠다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라고 하였는데, 넘어지게 하는 자가 십자가의 원수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안 지고 이렇게 ‘자유, 방종주의’로 나가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고 했는데, 십자가를 안 지면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 안 지고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 지고 따라 가겠다는 그것이 사탄이고,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 안 지고 예수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 또 방종주의로 나가는 사람들, 먹자주의로 나가는 사람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인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인 가운데에도 많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나가는 자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구속의 자리를 무너뜨리는 자가 됩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예수님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고, 예수님의 구원운동을 넘어지게 하는 자이니까 십자가의 원수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믿는 사람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참된 십자가의 도를 무너뜨리면서도, 믿는다고 하니까, 바울이 볼 때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

배로 하나님을 삼는다는 것은 ‘먹자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먹자주의’는 그저 먹고 살자, 기름을 칠해야 된다, 주일날도 사다 먹여라, 찬양대도 먹여야 한다, 기름을 쳐야 돌아간다, 주일에 한 턱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정신이 빠져나가 주일 범하면서, ‘먹이면 잘한다, 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배로 삼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것 아닙니까? 주일에 사다 먹으면 안됩니다. 주일에 외상으로 거래하는 것도 절반은 사는 것이니까 절반은 죄진 것입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왜 사다 먹죠? 주일날 왜 사다 먹습니까? 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것입니까? 배로 하나님을 삼으려고요? 주일날 굶으면 어떻습니까? 하루 굶으면 못 삽니까? 열흘도 금식기도를 하는데 하루 굶는다고 그것을 사 먹습니까? 그러니까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는 말입니다. 먹자주의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자

그저 모여서 먹자, 친목회하자, 뭘 하자, 이건 전부 다 놀자주의이고 먹자주의이고, 방탕주의입니다. 어느 목사가 집사들 데리고 야외 예배 가면서, 부부간 함께 나오라고 하더랍니다. 혼자인 사람은 다른 남자하고 짝하고 나오라고 하더랍니다. 과부는 남자 홀아비하고 짝하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서 손잡고 춤추고, 별에 별 것을 다 했다고 합니다. 남자 집사들을 뽑아서 여자 집사들을 업어오라고 그랬답니다. 아무게 여자 집사를 업고 오라고 하면, 업고 가야 합니다. 목사는 어떤 여자 집사 하나 업어오라고 뽑혔답니다. 그거 업고 갔겠어요? 뽑았으니까 안 하면 안 된답니다. 그래서 업고 갔답니다. 자 이게 다 뭡니까?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은 것 아닙니까? 

세상 일만 생각하는 자

세상 일만 생각하는 자는 현실주의자입니다. 기독교 현실주의, 내세는 이대로 가면 가는 거고, 못 가면 관두고, 현실에서 재미나게 하고, 현실에서 잘 살고, 현실에서 그저 친목 잘하고, 서로 그저 사랑하고 현실에서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전부 십자가 없이 믿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 없이 믿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 없이 자유, 방종, 방탕, 먹자주의, 놀자주의 이렇게 나가면서 믿는 것이 모두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 안 지고 믿고, 그저 방탕하고 놀러 다니며,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겠다고 예수 믿는 것 전부가 다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요새 그런 교회가 많습니다. 거기에 미혹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경건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는데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다음에 상급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달음박질 할 거 아닙니까? 바울은 십자가를 져도 예수님만한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는데, 우리는 조그마한 것도 안 지겠다고 방탕하게 나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다 져야 할 텐데, 조그마한 것도 하나 안 지겠다고 방탕하게 나갑니까? 향락주의로 나가고, 안일주의로 나가고. 기독교 안일주의, 향락주의. 이런 것들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2.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는 세상

본문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하늘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나라는 나그네로 온 나라이고, 여행 온 것입니다, 여행자들이라고 베드로전서2장 11절에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잠시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 길 지나가는 사람 행인,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을 가리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잠시 잠깐 후에 본향으로 간다. 본집으로 간다. 나그네로 왔는데 나그네 끝마치면 잠깐이면 우리 본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나그네로 생활할 때는 언제나 장막 집에서 살았습니다. 뭐 잘 차려 놓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로 있는데 뭘 잘 차려 놓겠습니까? 잘 차려 놓아도 어차피 떠나면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나그네로 왔을 때에는 좀 불편해도 불편해 하지 않습니다. 며칠 후에 가면 되니 말입니다. 좀 괴로워도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며칠 후면 가면 되니까 뭘 괴롭다고 할 게 있습니까? 좀 배가 고파도 뭐 배고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먹을 거니까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행인이요,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깐 있으면 우리 본향인 하늘로 가는데, 이 세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거기서 사는 것이 내 나라요, 내 집입니다. 그 나라를 우리가 사모하고 날마다 준비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삶

‘하늘에 있는지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언제나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 있으면 간다, 잠시 잠깐이면 간다, 조금만 참자, 어려워도 참고, 또 뭘 잘 해먹자, 배로 하나님을 삼자고 하면 안 된다, 난 배로 하나님을 삼을 자가 아니다, 난 좀 있으면 갈 자인데, 요기나 면했으면 됐지, 뭐 하러 배로 하나님을 삼겠나, 나는 가는 거다, 나는 거기 가서나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준비하다 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준비를 우리는 매일 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 본향인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매일 그 나라 갈 생각과,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주님 언제 오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매일 기다리고, 주님 맞을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는 지혜 있는 다섯 처녀와 같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3. 예수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몸의 형체로 올라감

본문 21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변화되어 공중으로 올라감

우리를 변화 시켜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공중 재림이 먼저 있고, 그 때 자던 성도가 부활해서 올라가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올라갈까요? 예수님은 공중에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고, 자던 성도는 무덤이 터져 올라가고, 살아남은 성도도 다 변화돼서 공중에 올라갑니다. 올라가는데 예수님의 능력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강대상만한 지남철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바닥에 바늘을 많이 뿌려 놓으면, 바늘이 훌떡훌떡 다 올라가 버립니다. 바늘이 무슨 날개가 있나, 프로펠러가 달렸나, 제트 엔진이 있나, 어떻게 공중에 올라가겠죠? 지남철 자석의 힘으로 바늘이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아무 날개가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으로 쑥 들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때 공중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면 다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할 때 올라가면 과거에 앞서간 성도들을 다 만납니다. 다 변화돼서 올라가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변화돼서 올라갑니다. 예수 믿고 죽은 성도는 우리보다 먼저 올라가서, 산사람보다 먼저 올라가 있으니 우리는 올라가서 만납니다.

“하늘공중 바라보니 두 팔을 펴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맞아주도다, 잘 있거라 세상아 나는 가노라 환난 핍박 다 받고서 나는 가노라.”하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올라가세, 올라가세 구름을 타고, 성신 바람 불어오매 높이 올라가”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공중에서 세상을 심판함

그리고 올라가서는 이 세상나라를 심판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세상나라를 심판합니다.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깨뜨려 내버린다고 그랬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마지막에 보면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깨뜨려 내버리는 그런 심판을 공중에 있는 동안에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심판합니다. 성도가 올라간 후에 세상나라는 일곱 번째 나팔이 부는 동시에 일곱 대접의 후반기 종말 재앙이 임하여 세상에 큰 환난이 옵니다. 우리는 전반기 환난을 받은 후에 예수님 공중 재림하실 때에, 공중으로 들려올라가고, 후반기 대환난은 받지 않습니다. 그 때는 우리가 하늘에서부터 일곱 대접재앙을 쏟아 내리 붓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 독창이 나고, 흑암을 만나고, 해가 어두워져서 다 타서 죽고, 다 아마겟돈 전쟁으로 형편없이 멸망합니다. 무기를 불사르고, 시체는 다 장사지내는데 우리는 공중에서 그러한 일들을 다 하게 됩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천년 왕국에서 왕노릇함

그래서 후반기 대 환난 다 지나간 후에는, 이 세상에 지상 재림을 하게 됩니다. 공중에 올라가 있던 성도들이 하늘에서부터 다 내려오게 됩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듯이 내려옵니다. 공중에 있던 성도가, 열두 문이 있고, 금, 은, 보석으로 꾸며놓은 새 예루살렘성으로 다 들어갑니다. 그렇게 새 예루살렘 성은 공중에 있던 성도들이 다 탄 다음에 쑤욱 이 세상에 내려와 앉습니다. 그 때부터 이 세상의 마귀는 잡아 무저갱에 가두고, 하나님이 미가엘 천사를 보내서, 세상의 죄악은 다 없어지게 됩니다.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성도와 같이 내려와 앉은 다음에, 그 때부터 이 세상나라가 천년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잡아 가뒀고,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니까, 천년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죄가 없습니다. 마귀를 잡아 무저갱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뿌리인 마귀를 잡아 가두었으니까 이 세상나라에는 죄가 없게 된 것입니다. 죄는 다 마귀가 일으키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천년동안은 의가 충만하고, 평화가 가득하고 다시 전쟁이 없습니다. 이 세상나라에서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농사만 해서 먹고 살게 됩니다. 각자가 자기 포도원에 앉아서 자신의 집을 짓고 자작농해서 먹고 삽니다. 반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성도들은 다 변화된 성도들인데 그들은 농사해서 먹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 밖에 있는 사람만 농사해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성 밖에 있는 사람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인데, 농사해먹고 밥 해 먹어야 되고 자녀를 낳으면서 밖에서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맞고 새 예루살렘을 타고 내려온 사람들은 변화된 사람들이므로, 시집이나 장가가지 아니하고 신령한 몸들이며, 먹지 않아도 되고 다 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밖에 나가서 왕 노릇 하다 들어오고, 또 왕 노릇 하다 들어오곤 합니다. 이 세상나라, 즉 새 예루살렘 성 밖에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죽지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그대로 천년왕국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죄가 없는 세계인데 사자가 소와 같이 풀을 먹고 서로 안 잡아먹습니다. 이리와 양이 서로 풀을 먹고 같이 눕고 아이가 독사를 잡아 가지고 놀아도 독사가 물지 아니하고, 거기는 해함도 없고, 서로 잡아먹는 것이 없는 시대입니다. 의가 충만합니다. 즉 에덴동산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천년을 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지고 살며 천 년을 삽니다(이사야65:20). 혹시 100세에 죽는 자가 있으면, 젊은이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100세 된 사람이 죽은 것을 젊은이가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는 사람들은 천년왕국 들어가기 전에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혹 죽는 사람들이 있지만) 천년동안 죽지 않고 계속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습니다.
할머니가 아이를 낳고, 증조할머니가 아이를 낳고, 고조할머니가 아이를 낳고 그렇게 계속하여 낳습니다. 아마 천년동안에 아이를 한 300명 낳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300명 낳고, 250명 낳고, 200명 낳고, 100명 낳으며 천년이 지나는 가운데, 새 예루살렘 성 밖에는 사람들이 가득해 집니다. 예수님이 공중재림하신 후에 성도들은 다 들려 올라가고 난 후, 후반기 대 환란 때 아마겟돈 전쟁에 다 죽고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천 년을 죽지 않고 아이를 낳으니까 이 세상이 사람들로 가득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은 변화한 사람들로 예수님이 같이 계십니다. 

이것을 말해 주는 이유는 말세에 대한 것을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림에 대한 것을 바로 알아야 되고 천년왕국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소경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 가지만 알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우리의 구원을 바로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말해주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무천년론자들입니다. 성경에 천년왕국이 있다고 하는데 없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둘 중 하나가 진짜인데, 진짜는 하나입니다. 천년왕국이 있다면 없다고 하는 것이 가짜이고 그건 잘못 믿은 것이고, 또 없다면 있다고 하는 것이 잘못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다음에 천년왕국이 없을 것 같은가요? 성경에 있다고 그랬으니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바로 배워서 바로 믿어야지 성경 바로 못 배우면 이 다음에 수치를 당합니다.
믿어도 헛 믿은 것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했으니 헛 믿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장로회 신학교인데 거기에서 무천년설을 가르칩니다. 천년왕국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신학공부한 사람들이 합동측 총회 신학대학에 많이 가서, 또 무천년설을 가르칩니다. 또한 그들이 다른 신학교에도 많이 들어가서 거기서 또 무천년설을 가르칩니다. 한국교회는 무천년설이 계속 팽창해 나가고 있습니다. 총회신학교는 대체로 무천년설을 배운 교수들이 배운 대로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합동신학의 교수들도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도 무천년설을 가르칩니다. 미국 Faith 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그들은 전천년설입니다. 천년세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 웨스트민스터는 술과 담배를 용납합니다. 하지만 Faith 신학교는 술, 담배를 반대합니다. Faith 신학교는 천년왕국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우리와 맞습니다.

천년왕국은 분명히 있는데 천년왕국 시대에 우리 성도는 왕 노릇합니다. 백성보다 왕이 많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왕이 많으면 뭐 어떻습니까?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고, 왕의 권세를 행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고 우리 믿는 사람은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난 사람이 진정 왕의 권세를 갖는 것이지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바보 왕 같이 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그저 이름만 왕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라나야 천년왕국에서 왕권을 가지고 제대로 왕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

천년왕국 다 지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천년이 다 지나간 다음에는 하나님이 사탄을 잠깐 놓아 줍니다. 마귀를 놓아주는 이유는 천년동안 세상에서 번창한 지상에 남은 자들 중에서 택자와 불택자를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천년동안에 태어난 자 가운데 불택자와 택자가 섞여 있습니다. 불택자를 갈라 놓으려면 마귀가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가만 있다가 넌 지옥가라 하면 ‘내가 지옥에 왜 갑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그러나 마귀를 놔주면 마귀에게 붙어서 마귀 짓을 하고 죄를 짓는 자가 생깁니다. 그들은 죄 값으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천년왕국 끝에 마귀를 잠깐 놓아 줄 텐데, 그러면 마귀세력이 형성이 되고 무신론자들이 생기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가 생기고 죄가 들이차고 이들이 뭉칩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도대로 뭉칩니다. 두 패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새 예루살렘 성은 그대로 있고, 마귀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곡과 마곡의 진이 따로 있고, 그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는 성도의 진이 또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곡과 마곡세력은 바다 모래와 같은 수를 모
아서 기독교 박멸주의를 써서, 교회와 성도를 없애기 위해 성도의 진을 다 포위합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새 예루살렘 성도 침범하려고 둘러쌉니다. 그 성에는 예수님도 계시고 왕들도 있는데, 염치가 없지 그게 어디라고 둘러쌉니까? 마침내 곡과 마곡 세력이 다 성도들의 진을 포위하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새 예루살렘성을 포위해서 점령하려고 할 때에, 유황불이 내려 와서 곡과 마곡세력을 불로 다 지져서 죽입니다. 유황불로 곡과 마곡세력들을 지져서 다 멸망시킵니다. 지질 때 머리부터 지질 것 같은데, 그래서 요새 머리 지지는 것이 아마 그 때 지지는 것 연습하나 봅니다.

백보좌(白寶座) 심판

이제 세상은 멸망시키고 성도는 다 데리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같이 올라가고 성 밖에 있던 믿는 성도들도 변화돼서 공중에 올라갑니다. 예수님도 올라가서 백보좌 심판대에 앉아서 공중심판을 합니다. 공중에 올라간 모든 성도는 다 예수님의 오른쪽에 섭니다. 이때 불신자도 다 부활하는데 창세로부터 죽은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합니다. 그들은 다 왼쪽에 섭니다. 가인, 사울, 김일성, 스탈린, 가룟유다, 빌라도 등 지옥에 간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오른쪽에 전부 아담, 셋, 에녹, 아브라함, 노아 쭉 오른쪽에 다 섭니다. 노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심판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감옥에 있을 때 돌봐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병들 때 돌봤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랬습니까?’ 물어보면, 예수님은 ‘나를 믿는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대접한 것이 전부 나한테 한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올라간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들은 “올라가~, 올라가~~, 천당에까지~!” 노래하며 천당에 가면 모든 천사가 마중 나와서 “딩동댕~~!” 하면서 이리 오라며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는 ‘이 염소 새끼들, 너희는 창세로부터 예비한 불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안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안주고, 병이 났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 예수님은 ‘여기 있는 소자 하나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 내게 행치 아니한 것이다. 너희는 마귀와 같이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은 자들은, “내려가~, 내려가~, 지옥에까지... 아따 뜨겁다, 뜨거워!!!” 할 것입니다. 요새 댄스 하는 것 그 때 가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는 사람들은 댄스 연습 할 필요 없습니다. 즐거움으로 찬송만 하고 “딩동댕~”만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영생을 얻게 되고, 달음박질 잘하고 달려갈 길 많이 간 사람은 상급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넌 면류관 하나 받아라, 넌 금 면류관 받아라, 넌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라, 넌 의의 면류관을 받아라, 넌 영광의 면류관 받아라, 넌 썩지 않을 면류관 받아라, 넌 시들지 않는 면류관 받아라” 하시며, 그 때 면류관을 많이 주실 텐데 면류관 받는 사람은 참 좋습니다. 너무 감격에 넘쳐서 “내가 어떻게 이 면류관을 받겠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한 사람은 뻔뻔합니다. 면류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금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쓰고 찬송을 하는데, 뻔뻔주의로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한 것을 만들어 나가야 됩니다. 영원한 면류관, 영원히 자라나는 일, 천당 갈 준비, 그것이 중요합니다. 잠시 잠깐이면 가는데, 나그네 생활인데, 그저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것을 우리가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달음박질을 잘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는 자리까지 달음박질하고 전진하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빌립보서 3:12-17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라
빌립보서 3:12-17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3:12 내가 이미 붙잡았다거나 이미 온전해진 것이 아니므로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붙잡혔기 때문에 나 또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3:13 형제들아, 나는 나 자신이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고자 하여, 

3:1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위로부터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3:15 누구든지 온전한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자. 너희가 무언가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3:16 오직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을 좇아가도록 하자.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어라. 또 너희가 우리를 본 받는 것처럼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주목하여라. 


1. 예수께 붙들리어 달음질하라
본문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어느 정도 온전해졌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은 이미 교만한 자이고, 교만한 자는 이미 넘어진 자입니다. ‘얻었다’, ‘이루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또한 이루지 못했다고만 밤낮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도 아니며, 또 ‘이루지 못했다 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겁니다. 

그리고 된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잡힌 바 된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잡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됐는데, 잡힌 바 된 것은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셨고 우리는 잡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신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을 향해서 끌고 가시는데, 나도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야 됩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으신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중생한 영혼을 주셨고, 또 예수님은 우리를 붙잡으시고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목적을 향해서 끌고 가십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심령에 매인 바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 20장 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심령에 매인 바가 되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매였다는 것은 붙잡히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
다. ‘예수님께 붙잡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결박이 기다려도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인도하셔서 가실 때에 가만있지 말고 나도 그걸 붙잡으려고 좇아가야 된단 말입니다. 이제 그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셨다는 말입니다. 붙잡으셔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가자!” 하고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나도 갑시다! 같이 가요” 그러면 됩니다. 붙잡아서 끌고 가는데 안 가려고 하면 그 다음엔 매나 얻어맞고 별 수 없습니다. 

붙잡아서 저 목적지를 향해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끌고 가실 때, “예수님 갑시다!” 그러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붙잡으셔서 끌고 가는데, 빨리 따라오니까 얼마나 참 좋아하시겠습니까? 자기도 발자국을 떼야 됩니다. 발자국 안 떼고 매달려 놓으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매나 얻어맞고 그 다음엔 예수님 붙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매달리는 거 어떻게 붙들고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붙들고 예수님이 늘 끌고 가십니다. ‘심령에 매인 바 되어’라고 하였는데, 심령을 붙들고 끌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쓰려고 끌고 갈 때에 “나도 거기로 가겠습니다” 해야지 “난 저리로 가겠습니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끌고 가시는 데로 가야지 “아, 나는 그리로 안 갑니다. 저리로 갑니다. 나는 니느웨 안 갑니다. 다시스로 갑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 할 때에, “예! 갑시다” 하고 갔으면 고기 뱃속에 안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것을 왜 다시스로 가겠다고 뒤로 꽁무니 빼다가 환난만 만나고 그거 참 얼마나 고통 많이 당했습니까? 또 다른 사람도 얼마나 고통 많이 당했습니까? 한 배에 탄 사람들, 다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붙들고 끌고 가는 데로 어디든지 나는 가겠습니다. 환난과 결박이 기다려도 나도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올라갑니다” 하고 바울이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많이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됩니다. 신앙 양심을 깊이 살펴보아야 됩니다. 주께서 나를 붙들고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그것을 잘 발견하여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안 따라가면 안됩니다. 안 따라가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주님은 끌고 가서 저기서 쓰려고 하시는데, 안 따라가니까 그 다음엔 무용지물입니다. 못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용지물 되지 말고, 주님이 붙들고 끌고 가는 데로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끌고 가는지 안 가는지 모르겠으면 기도를 많이 하고, 회개하고, 특별히 고집을 회개하고, 교만을 회개하고 자기 자신이 깨져나가고, 빈 마음이 되도록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의 인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인도를 발견할 때, 그 인도를 따라가면 됩니다. 따라가면 하나님이 만능으로 태산을 넘게 만들고, 홍해를 가르고, 강을 건너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기 도달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령에 매인 바 되어 끌고 가는데 “난 안갑니다. 돈 좀 벌고 가겠습니다”, “또 부친 작별하고 가겠습니다”, 또 한 사람은 “가족을 작별하고 오겠습니다”, 또 “고난 많이 받으면 난 원치 않습니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니까, “나는 고난 너무 많이 받으면 못 견딥니다. 몸이 약합니다”하고 꽁무니 빼면 그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저 가야 합니다. 당나귀 쓰시겠다 하면, 내놔라 하면, 당나귀 내놓는 것이고,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내놔라 하면 내놓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다락방 내놔라 하면 내놓는 것입니다. 누가 다락방 내놨지요? 마가 요한입니다. 그것 다락방 얼마나 가치가 있게 썼습니까? 그거 안 내놨으면 뭘 하겠습니까? 안 내놨으면 다 없어졌을 것인데 내놨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기억한 바가 되고 영원히 그 다락방이 가치 있는 다락방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붙들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나는 좇아가노라’ 좇아가는 것뿐입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얻었다 해도 안 되고 이루었다 해도 안 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으셨고 끌고 가시잖습니까? 나도 그것을 붙잡으려고 따라가란 말입니다. 같이 따라가란 말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가기가 쉽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끌고 가시면, 나는 발자국만 슬슬 들었다 놨다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가 6.25때 이북에서 피난 나올 때 청천강을 건너는데 물이 허리에 거의 올라왔습니다. 피난민이 많이 그리로 오는데 어떤 영감님 한 분이 짐짝에다 어린아이를 올려놓고 건너오다가 중간에 강물에 넘어졌습니다. 영감이 자기 혼자 몸으로도 물살이 센데, 거기다가 또 짐 지고 어린아이까지 놨으니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붙잡아줬습니다. 붙잡으니까 “아, 선생님 살려 주세요, 선생님 살려 주세요” 그럽니다. 붙잡아서 일으켜줬습니다. 붙들고 나가자고 하니까 “아, 선생님 살려 주세요”하며, 발자국 뗄 때마다 “선생님 살려 주세요, 선생님 살려주세요”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이라니요, 하나님이 살려주시지 내가 어떻게 살려주겠습니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영감이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살려주세요”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영감님 끌고 나왔는데 이 영감님은 다리만 슬
슬 들었다 놨다 하면 거저 오는 것입니다. 뭐 다리 하나 올리기만 하면 거저 오는 것입니다. 내가 끌고 가니까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강을 쉽게 건넜습니다. 영감이 넘어져서 물에 빠져 죽을 것도, 붙잡고 가니까 발자국만 뗐다 놨다 하면서 거저 가는데,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붙잡고 가는 것은 그보다 더 확실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 붙잡고 가는 것은, 발자국 한 번 뗐다 놓으면 벌써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가는 게 아니고 그거 붙잡은 사람의 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우리도 “나도 갑시다” 하고 예수님과 같이 가면 그저 슬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이 안 듭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힘들지 않다고 했죠?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떡하면 힘이 들겠습니까?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힘듭니다. 예수님이 이리로 끌고, 난 저리로 가려니까 예수님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누가 힘이 세겠습니까? 예수님이 힘이 세실 건데 그것은 죽을 고생당합니다. 예수님이 끌고 가시는 데로 안가고, 반대방향으로 가다가는 그것은 죽을 고난을 당하고 결국엔 실패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쉽고, 못 믿으려면 아주 힘듭니다. ‘아, 예수님 믿기 힘들어서 못 믿겠다고’고 합니다. 이것은 억지 쓰는 것입니다. 붙들려 가는 게 얼마나 쉬운 건데, 제가 하려고 힘을 쓰니까, 그만 힘들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됩니다. 붙들리어 끌고 가는 데로 순종하면 그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아주 쉬운 길입니다.

2.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달음질하라

본문 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했는데,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려야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달음박질 하지 못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대로 달음박질 하겠습니까? 과거의 것은 다 잊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묻지 마세요’ 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과거의 것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것 생각하면, 못한 것 생각하면 낙심이 나고 잘한 거 생각하면 교만해집니다.
과거 것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세상 것입니다. 세상 것은 다 뒤에 있는 것이고 앞에 있는 것은 예수님 한 분 밖엔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 앞에 있고 세상 것은 다 뒤에다 돌려 세워놓아야 됩니다. 과거에는 세상을 앞에다 두고 예수님을 뒤에다 두고 살았는데, 이제 돌이킨단 말입니다. 돌이키니까 예수님만 앞에 있고 다 뒤에 있게 됩니다. 세상 것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이젠 앞에 있는 푯대, 즉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향해서 달음박질 합니다. 그래야 달음박질 잘 할 수 있습니다. 

롯의 처는 돌아서긴 돌아섰지만 뒤에 있는 것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음이 가 있다가 도로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됐습니다. 뒤에 있는 것 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버리고 ‘내가 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서 달음박질 하는 거 하나다’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냈으니까 먹을 것도 같이 내셨을 거고, 또 제 밥 먹고 살지 어머니 밥 먹고 사는 것 아닙니다. 아이들이 밥 달라고 할 때에 ‘어머니 밥’을 달라고 합니까? ‘아버지 밥’ 달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내 밥’ 달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 밥 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당당히 ‘내 밥’을 달라는 것입니다. 세살짜리 아이도 자기 밥 먹고 살지, 부모가 준 밥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다 자기 밥 먹고 살 건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냈으니까 하나님이 그 아이를 기를 책임이 있습니까.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놓고 죽이려고 냈겠습니까? 사람이 소 사다놓고 죽이려고 사다 놨겠습니까? 소 사다놓고 먹을 것 안 주고 죽이면 그것은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지혜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내놓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 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향해서 달려가라는 말입니다. 뒤에서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히지 말고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붙잡으려고 할 때에붙잡히면 안 됩니다. 또 혼자 달려가야지 다른 거 붙잡고 달려가려면 못 달아납니다. 이것도 좀 붙잡고, 또 저것도 붙잡고 하면 뒤에서 매달려서 못 갑니다. 다른 거 붙잡지 말고 “난 달려갈 거니까 넌 따라오너라” 해야 합니다. 안 따라오면 관두라고 하고, “난 달려간다” 하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안 따라오던 것이 이제는 뒤에 자빠져서 한참 바라보니까, 앞서 가던 사람이 벌써 저 만치 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가야 되겠다. 이제 안 되겠다’ 하고 부슬부슬 의복을 입고 그냥 따라오는 것입니다. 롯의 처가 롯이 환난 받을 때 뒤에서 매달렸죠? 뒤로 나가 자빠졌습니다. 그래도 롯이 롯의 처 때문에 달음박질 잘못했습니까? 그것은 문제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간다”하고 달음박질 계속 해나가니까 롯의 처가 생각하기를 과부가 되겠으니까 따라왔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뒤에다 세워놓고 하나님께 맡기고 달아나면 뒤로 전부 따라옵니다. 재산도 따라오고 가족도 따라오고 자녀도 따라오고 다 따라옵니다. 뒤로 많이 따라옵니다. 세상이 다 따라옵니다. 달음박질 하는 사람,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음박질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게 다 따라옵니다. 그런데 따라오는 게 좋다고 해서 돌아서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또 달아납니다. “아, 이게 다 내 뒤를 따라 온 거다, 가자 우리 같이 살자” 하고 붙잡으려고 돌아서면 한 발자국 뒤로 달아납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한 발자국 달아나고 두 발자국 달아납니다. 많이 따라올 때에 “아, 이젠 이만큼 따라왔으니까 이제 붙잡아가지고 살아야 되겠다,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돈도 많이 따라와서 “아, 이제 돈 가지고 좀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또 다른 것들이 많이 따라오니까 “아, 이거 가지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고 그것을 돌아서서 붙잡으려고 하면 그것들이 달아난단 말입니다. 한 발자국 달아난 것을 잡으려고 한 발자국 따라가면 두 발자국 도망치고, 두 발자국 따라가면 네 발자국 도망치고, 네 발자국 따라가면 여덟 발자국 도망치고, 여덟 발자국 따라가면 열여섯 발자국 도망칩니다. 따라가서는 절대 못 잡습니다. 그것을 잡는 법은 예수님만 향해서 달음박질하면 이것들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계속 주님만 향해서 뒤에 있는 것 다 잊어버리고 달음박질하면 다 따라옵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잡아야 할까? 뒤로 그것을 바라보지 말고 뒤로 손을 내밀어서 하나씩 잡아다 먹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돌아보면 다 잃어버립니다. 뒤를 보지 말고 뒤로 모두 따라왔으니까 예수님만
향해서 달음박질하면서 뒤로 손 내밀어서 하나 잡아 먹고, 또 이거 하나 잡아먹고 또 하나 잡아먹고 이렇게 하면 세상 것 다 잡아가져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달아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음박질하기만 하면 다 따라옵니다. 이것이 달음박질하는 자세입니다. 잡은 줄로 여기면 달음박질 하지 못합니다. 벌써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지게 됩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지게 되고 언제나 자기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아야 됩니다. 

3.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라

‘푯대를 향해서 달음박질 한다’는 것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해서 달음박질하는 것입니다.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해서 거기에 도달하기를 달음박질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얻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려고 달음박질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알고, 알기 위해서 달음박질 한다는 말입니다. 좀 더 얻으려고 달음박질 하는 것, 일심정력한다는 말입니다. 좀 더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달음박질 하는 것, 그 다음엔 좀 더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고 달음박질하는, 이것이 목표가 돼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달음박질의 목표라는 것, 푯대라는 것, 거기에 도달하려고 달음박질을 계속 해나간단 말입니다. 

4.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음질하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는 것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 달음박질을 잘한 사람은 상이 많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박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상을 얻는 자가 하나라는 것은 금메달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을 얻기 위해서 달음박질하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만 위하여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상은 하나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 얻으려고 계속 달음박질을 해나가야 됩니다. 

5.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것 다 벗어버리고 달음질하라
 
히브리서 12장 1-2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했는데 모든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것 다 벗어버려야만 달음박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가지고 달음박질하려면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를 온전히 다 벗어버려야만 달음박질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무거운 것도 벗어버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무거운 것이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라 한 거 보니까 죄는 아닙니다. 얽매이기 쉬운 무거운 것은, 뒤에 매달
리는 것인데, 자기가 짐을 지고 가는 게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자기가 짐 지고 가려고 하지 말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짐은 하나님께 맡기고 달음박질하야만, 달음박질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지고 가려면 그건 무거워서 달음박질을 하지 못합니다. 다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자기가 하겠다는 것,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 자기가 뭘 하는 일들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목표로 하고 달음박질만 계속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너희 모든 짐을 다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나아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가는 것들, 다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맡깁니다”하고 맡기십시오. 가족도 맡기고, 자기가 하는 사업도 맡기고, 교회도 맡기고, 다 맡겨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자기는 달음박질만 하는 것입니다. 그거 맡겨놓으면 하나님이 잘 해주십니다. 자기가 해놓은 것보다 더 잘해주십니다. 자기가 하려면 잘 안 됩니다. 내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의 내 짐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걸어나가는 것입니다. 내일 일 그것은 모릅니다.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고, 오늘에 내가 달음박질 하는 것만 하는 것입니다. ‘내일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또 ‘장래에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도 하나님이 아실 것이고, 그것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오늘 내가 최선을 다해서 달음박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짐 맡겨놓고 최선을 다하면, 제일 좋은 걸로 골라서 반드시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유익된 것이니까, 감사하게 받고 달음박질 하는 것만 계속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달음박질 하는 것입니다. 죄는 회개하고, 내가 지고 나가야 할 무거운 짐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달음박질 하는 신앙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좀 더 알고, 좀 더 얻고, 그 안에서 좀 더 발견되고, 그를 좀 더 닮아가고, 그것을 목표로 해서 달음박질 해 나갑니다. 그러면 달음박질 하는 데 따라서 이제 하나님 앞에 가면 상 주십니다.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데 많이 예수님을 닮아온 사람은 상급이 많고, 달음박질 많이 한 사람은 상급이 큽니다. 하지 못한 사람은 상급이 없고 조금한 사람은 상급이 적습니다. 달음박질 하는 데에 따라 상급이 정해집니다. 그러므로 달음박질을 잘 해야 되겠습니다. 

6. 전심전력하여 달음질하라

그런데 자기의 모든 힘을 다 기울여서 달음박질해야 됩니다. 달음박질을 할 때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모든 것을 기울이고 달음박질해야 됩니다. 전심전력, 자기에게 있는 모든 힘, 모든 마음, 모든 것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푯대를 향해서 달음박질하고, 또 주의 명령대로 달음박질해야 됩니다. ‘푯대를 향해서 나가는데 주의 명령대로 달음박질해야 된다’고 했는데,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해야 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힘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힘이라 하면 우리가 힘쓸 수 있는 것, 손으로 힘쓸 수 있는 것, 또 다리로 힘쓸 수 있는 것, 그것도 우리에게 있는 힘입니다. 이렇게 힘쓸 수 있는 기간에 달음박질 잘하라는 말입니다. 이제 좀 있으면 그 힘 다 쇠해질 날이 옵니다. 누구든지. 힘이 쇠해지기 전에 그 힘을 가지고 믿음의 달음박질을 잘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무슨 힘이 있습니까? 경제적 힘, 하나님이 자기에게 경제적 힘을 주셨는데 그 힘을 다 기울여서 달음박질해야 됩니다. 그 있는 힘을 기울여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해 나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 하는 명령을 따라서 내게 있는 힘, 이 몸의 힘, 또 마음의 힘, 경제적인 힘, 하나님이 준 힘, 그것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복음 운동에 많이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음박질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기주의로, 자기중심으로 하지 말고, 자기는 다 죽어지고 예수님만 위하는 정신, 또 자기 개교회 위주로 나가지 말고 개교회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일에 전부 협력해서, 선교사업이나 복음사업에 모든 것을 다 기울여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달음박질 많이 할 수 있습니다. 

7. 자기의 환경을 다 이용하여 달음질하라

또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환경, 그것도 자기 힘입니다. 이용할 수 있는 환경도 다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달려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 간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자기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명, 모두를 위해서 복음 전파하는 사명, 이것이 달려갈 길인데 이것을 위해서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자기 환경을 다 이용해야 되겠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다 이용해서 달려갈 길을 가야 됩니다. 이제 좀 있으면 그것은 다 없어집니다. 그것이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힘이 있을 때 그것을 써야합니다. 그것 가지고 달음박질 해야지, 달려갈 길을 가야지 가만 둬두면 다 없어집니다. 동록이 슬고 좀이 먹고 도적질해가고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있을 때에 이 달려갈 길에 사용을 해야 되겠습니다. 안 쓰고 달려갈 길 가지 아니하다가 얼마쯤 둬두고 몇 십년 지나가면 다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보면 달려갈 길 제대로 못하고 나이만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달려갈 수 없습니다. 나이 많은데 어떻게 달려가겠습니까? 또 이용할 수 있는 환경 다 잃어버렸고 돈 좀 있던 것도 다 없어졌는데 무엇을 이용하겠습니까? 그래도 입으로만 큰소리 쾅쾅 치고 앉아있는 사람이 있는데, 입으로 암만 큰소리치면 무슨 소용입니까? 나이가 많으니까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또 뒤에서 누구 받들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달려갈 길을 가는데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그 힘을 다 이용해서 가야 합니다. 그러면 힘 있게 달음박질 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 몇이 있는데 아들들을 다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 달려갈 길 갈 수 있습니다. 아들들이 재산 좀 있으면 “돈 좀 내라”고 해서 달려갈 길, 하나님 일 하는데 다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용할 수 있고 어머니가 이용할 수 있습니다. 또 교단 이용해서 그 교단의 힘을 또 뒤에서 배경으로 해서 갈 수 있고, 선교사 가는 것도 여러 것을 다 이용할 수 있는 대로 이용을 해야 됩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재산도 이용하고, 또 자녀들도 이용을 하고, 자녀들 재산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서 달려갈 길 좀 더 많이 하고 하나님께 가야만 상급이 큽니다. 달려갈 길 많이 가고 하나님께 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좀 더 가면, 좀 더 있으면 못 갑니다. 그러니까 힘이 없어지기 전에, 자기가 힘이 있을 때에 하라는 말입니다. 달음박질, 달려갈 길을 달려가라는 말입니다. 시간 다 가면 다 끝나는 겁니다.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달려갈 길 부지런히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좋은 환경 주셨을 때 그 환경을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환경 이용해서 달려가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자기 혼자 하려면 못합니다.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혼자서 얼마나 하겠습니까? 혼자 하겠다는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혼자서 중국선교를 하겠다고 합니다. 혼자서 선교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도와주는 사람, 배경이 없는데 무슨 힘으로 하겠습니까? 돈도 없고, 나이도 많은데, 혼자서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환경, 그것도 자기 힘입니다. 그것을 다 이용해서 달려갈 길 많이 가고 하나님께 가면 이제 면류관 상급이 큽니다. 바울이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하나님께 가면 면류관이 있다’ 안 그랬습니까? 얼마나 면류관을 받겠느냐? 달려갈 길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고 하나라도 더 하고 가십시오. 가만 앉아있지 말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용할 수 있는 대로 다 이용하십시오. 작은 아들, 큰 아들, 딸 할 것 없이 다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용해서 달려갈 길 가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나라 가서 면류관 받을 때, 도와준 사람도 같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상급을 나누어 줍니다. 교단 배경, 또 자기 자녀들 배경, 자기 있는 현재 재산 배경, 많지 않습니까? 그것 다 자기 힘인데 이용할 수 있는 것 다 이용해서 하늘에 가면 쑥 올라가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더 많이 가면 면류관 상급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누가 얼마나 더 달려갈 길 가겠느냐가 문제입니다. 교인들도 앞에서 복음 전하는 일하는 사람들, 선교하러 나가는 선교사 등을 도와주는 것도 달려갈 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여러 면으로 개인이 달려갈 길 달려가고, 교회적으로 달려가고, 또 복음 전도하는 데 도와주고, 선교를 도와주고, 여러 면으로 우리가 달려갈 길을 힘 있게 달려가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면류관 상급이 있습니다. 면류관 상급을 받을 때까지 계속 달음박질 합시다. 뛰는 마라톤 선수들 보니까 계속 뛰다가 마지막 금메달을 땁니다. 결승선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뛰다가 결승지점에 가서는 푹 넘어지는 것입니다. 죽을 힘 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도 계속 달리다가 그 마지막 선에 가서는 팍 넘어지는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 썼으니 이젠 죽습니다. 쓰러집니다” 합시다. 계속 달리다가 거기 그 마지막 선에 가서 쓰러지면 그 다음엔 금메달입니다. 금메달 상급인 것입니다. 상급을 하나님이 주시니 참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면류관이고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세상 면류관은 썩는 것인데, 우린 썩지 않을 것, 영원한 것, 금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을 우리에게 줍니다. 

8. 깨닫게 해 주실 것을 믿고 달음질하라

본문 15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얻었다 함도 아니다’ 하고 푯대를 향해서 달음박질만 해야지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고 거기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생각하라’ 그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 잡으라고 달음박질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했는데,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고 자기 생각이 좀 다르다고 하면 그래도 달음박질만 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안 맞는다고 해서 반대하지 말고, 내가 지금 이게 안 맞아도 달음박질만 계속하면,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자라나지를 못해서 모르니까 현재 자기가 안 맞는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도달한 정도에 따라서 깨달음이 다릅니다. 1 계단짜리가, 2계단 하려하니까 안 맞습니다. 2계단짜리가 5계단을 하려 하면 안 맞습니다. 그것이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얼마동안 배워서, 자라나보면 그게 맞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 살 난 아이에게 결혼생활 하는 것을 아무리 가르쳐줘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라나야 아는 게 있다고 했습니다. 자라나지 못해서 안됐다, 못됐다 하면서 괜히 불평하면 자기만 손해납니다. 안 맞아도 그대로 순종하고 계속 달음박질만 하면 좀 있으면 알아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계속 달음박질만 하면 하나님이 다 알게 해준다는 겁니다. 좀 있으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면서 달음박질 하는데 왜 안 알아주겠습니까? 

9. 계속하여 달음질하라

16절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행할 것이라”가 무슨 말입니까? 달음박질 하라는 겁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뭐 조금 간 사람, 좀 많이 간 사람, 좀 더 많이 간 사람, 천층만층 있는데 거기서부터 계속 그대로 달음박질을 계속 하라는 겁니다. 많이 간 사람은 거기서 달음박질하고, 중간 간 사람은 거기서부터 달음박질하고, 처음에 출발하는 사람은 거기서부터 달음박질하고, 3분지 1 간 사람은 거기서부터 달음박질하고, 현재 자기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거기서 계속 달음박질하면 됩니다. 뭐 나는 많이 왔다, 적게 왔다, 앉았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언제 가느냐? 아 이제 갈 길이 지금 먼데 내가 언제 거길 가겠느냐’ 하지 말고,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그저 계속 달음박질하면 도달할 날이 올 것을 믿고 달음질하는 것입니다. 또 거의 다 갔다고 해도, 거의 다 가서 맥 놓으면 뒤떨어집니다. 많이 간 사람이 많이 갔다고 맥 놓으면 그만 뚝 떨어지고 맙니다.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계속 달음박질 하다보면 도달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탓하지 말고, 또 많이 가도 교만하지 말고, 방종하지 말고, 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갔다 해도, 이제 출발한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가면 언젠가는 도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거기서부터 가라는 것입니다. 뒤떨어졌다, 앞서 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성경 말씀대로 달음질하라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라” 

고린도전서 4장 6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고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자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와 아볼로를 본받으라는 말은 기록한 말씀 밖에 더하지 말라, 즉 성경 말씀대로만 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나아가지도 말고, 성경보다 덜 나아가지도 말고. 성경대로만 하는 것을 바울에게서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대로만 하는 것을 본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라는 인격을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성경대로 하는 그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또 성경말씀에서 덜 나가지 않은 것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나가도 안 되고, 덜 나가도 안 됩니다. 성경대로 하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믿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지키면서 믿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 지키는데 뭐부터 지키라 했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부터 하고, 십일조 드리는 것부터 하고, 우상의 제물 먹지 않는 것부터 지키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바울에게서 뭘 배워야 하냐면, 성경 지키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주일 지키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주일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 뭘 사고팔고 예배드리고 나서 주일에 뭘 사도 안 됩니다. 또 주일에 결혼식에 가도 안 됩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에 이 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 날에 뭘 사고파는 것은 죄입니다. 또 결혼식 가는 것도 다 죄입니다. 아예 생명 내놓고 주일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 드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를 구약성경에만 있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마태복음 23장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라는 건, 의와 인과 신이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건, 십일조 하는 것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 하라고 했는데, 십일조 안하는 건 성경대로 믿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 제사 하러 다니는 사람은 죄 짓는 것입니다. 제사 하러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큰 집에서 제사한다 해도 가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사 음식 먹으면 안 됩니다. 상갓집의 것은 제사 놓지 않았던 것만 먹으면 됩니다. 제사하기 위해서 차린 것은 전부 다 제물입니다. 제사 전에 먹어도 제물입니다. 명절날 제사하기 위해서 차린 것은 전부다 제물입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가지 지은 죄 있죠? 거기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뭐죠? 우상 섬기고, 간음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고. 그 4가지 하다가 망했습니다. 4가지 죄 가운데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모두 다 나왔지만 광야에서 다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섬기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하나님 시험하지 말고, 원망하지 않아야 됩니다. 성경대로 믿는 것을 바울에게서 본받아서 우리가 성경대로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라’는 것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을 보라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나타나야 되고, 그 사람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따라옵니다.

빌립보서 3:4-11 바울의 소원.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바울의 소원
빌립보서 3:4-11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4 비록 나도 육신을 신뢰할 것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육신을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다. 

3:7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며,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이다.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 


1. 육체의 자랑하던 것들

본문 4-6절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레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로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육체로 자랑하는데, 바울도 육체로 자랑한다면 자랑할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모태(母胎)로부터 하나님을 공경한 것입니다. 출생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모태로부터 하나님을 공경했다는 뜻입니다. 또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가리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이방사람들, 그들은 다 개 따위의 짐승과 같다’라고 취급했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족속이었습니다. 베냐민 족속은 양반입니다. 역사적으로 열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져 나가 혼열 민족이 되었는데,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남쪽 유다나라에 남아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통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래서 양반 족속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히브리 말로 ‘건너가는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갈대아 우루에서 건너온 백성들, 즉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의미입니다. 섞인 것이 없습니다. 또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교파는 정통 보수파입니다. 사두개파는 교리가 잘못되어서,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천사나 영광과 내세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정통입니다. 바울이 바로 정통파에 속한 그런 바리새교인이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까지 바리새 교회들에게 충성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볼 때 흠이 없을 만큼 바울이 모든 것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갖다놔도 번듯합니다. 어디에 갖다놔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어디에 갖다놔도 베냐민 지파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 교파라고 하면 당시 세상이 알아주는 보수파입니다. 또 앞서 언급한대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즉,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공부를 많이 한 율법 학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모든 면에 원만하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또 할례파들이 할례를 가지고 자랑하지만 바울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니 할례파 가운데에서도 우수한 할례파에 속합니다. 이렇게 어디 갖다놔도 바울이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자였습니다.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다 드러내 놓고 자랑하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 했고, 또 우러러 볼 만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세계를 발견함

본문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겁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거기다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전에 자랑하던 것이 전부 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발견하고 보니 예수님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예수님의 그 세계를 영적으로 발견한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니 그 세계를 발견하게 되고, 그 세계를 발견하니 예수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너무나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하면 예수님이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빛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하면 기쁘고 충만합니다. 그곳은 기쁨의 세계, 즐거움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보배롭고 존귀합니다. 그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심령이 소생하고 새 생명을 얻습니다. 그 세계는 극락의 세계입니다.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시편 43장 4절에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극락의 하나님이십니다. 극락의 하나님이시니 예수님도 극락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밖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즐거움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극락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하면 마음이 거기에만 가있고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여기 있는 게 좋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 보배로우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니 그 전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것이 다 쓰레기와 같습니다. 그것들은 다 생명이 없고 빛도 없고 낡아질 것이고 썩어질 것들입니다. 부패하는 것들이고 쇠하여 지는 것들이고 냄새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한번 발견하고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에 비할 바가 안 됩니다. 

이제 세상을 보니 쓰레기통과 같고 배설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항상 극락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세상의 좋은 것으로 갖다 주어도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못쓰겠다고 내버린 것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예수님으로 더불어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과거에 유익한 것으로 여겨 자랑하던 것들이 전부 다 해가 되었습니다. 손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방해물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베냐민 지파, 율법으로 흠이 없는 것, 바리새인 교파,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보니 전부 방해물이 됩니다. 예수님만이 보배이고 예수님만을 따라가야 하겠는데, 전에 자랑하던 것들이 방해가 되니 버려야겠습니다. 그런데 버리려고 하니 아깝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방해물입니다. 그런 것들 가지고서는 예수님을 못 따라갑니다. 그것은 마치 신랑을 따라가야 하는데 친정에서 장난감 많이 해준 것이 있어서 그것 버리기 아까워서 잘 못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롯의 아내는 자기 집에 해 놓은 것들이 아까워서 소돔 고모라에서 나가다 뒤를 돌아보았고 소금기둥이 됐습니다. 전부가 방해물입니다. 다 내버리고 가야 하는데 내버리기가 아깝습니다. 번쩍번쩍하는 것들, 과거에 그것들로 한 몫 보고 살았는데 다 내버리려니 아깝습니다. 애착이 있습니다. 아직도 좋아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해가 됩니다. 방해물이입니다. 육신으로 좇던 것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전부 방해물입니다. 

잉꼬부부가 있는데 잉꼬부부가 방해물입니다. 떼 내버리고 가야 하는데 잉꼬부부가 되서 따라오고 떼 내버릴 수도 없고 그러니 방해물입니다. 보통으로 살아야지 지나치면 방해물입니다. 어떤 가정을 방문하니까 그 집에서 한 남자가 쑥 나옵니다. 그 부인만 우리교회 나오는데, 그 남자가 저더러, 안에 있다고 들어가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하니까 동거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밖에 나간 분은 누구인가 물었더니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안은 부부간을 동거인으로 하고 사는가 봅니다. 잉꼬부부보다 낫습니다. 경주 김가, 전주 이가, 안동 김가, 이런 양반들은 허풍을 떨곤 합니다. 자기네 여러 조상들이 왕을 해먹었다, 장관을 해먹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왕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장관들이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 모릅니다. 조상 잘난 거 없습니다. 양반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상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믿었다, 정통파다, 이러한 것들 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데 방해물입니다. 과거에 한문학자다, 한문학자라면 좋은 것 같은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됩니다. 성경을 배워주면 집에 가서 한문책과 대조해 봅니다. 공자와 대조합니다.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잘 안 믿습니다. 그럴 바에 한문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과거에 한문 많이 공부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쑥쑥 들어가지 못합니다. 들어가다가 한문에 걸립니다. 그래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고생하다가 한문 버리고 예수님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한문 배운 것을 내세우고 나가면 예수님을 믿는데 조금만 믿습니다. 한 절반만 믿습니다. 얼마나 방해입니까. 

과거에 유익하던 것들이 전부 다 방해물이고 손해가 됩니다. 육신으로 좋아하고 자랑하던 것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는 전부 방해물이 됩니다. 확실합니다. 없는 것이 낫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세리와 창기 이런 자들이 잘 믿습니다. 한국에도 양반들이 예수님 잘 믿지 않았습니다. 바닥의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린다면 잘 못 믿습니다. 또 믿어도 그런 사람들은 자꾸 걸립니다. 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가지고 믿으니 자꾸 걸려서 고생하게 됩니다. 그러니 과거에 유익하던 것들이 다 해가 된다는 것이 맞습니다.

3. 바울의 소원
그리스도를 아는 것

바울도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보니 과거에 유익하던 것들이 다 해가 됐습니다. 나아가 유익하던 것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 해가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본문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첫째는 아는 것이고 둘째는 얻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아는 데 더 알아야 하고 또 영으로 알아야 합니다. 영의 세계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스도를 좀 더 발견해야 합니다. 발견한 만큼 보배롭고 영광스럽고 즐겁고 기쁩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 가까이 가보십시오. 좀 더 발견하고 좀 더 예수님을 알고 좀 더 가까이 가보면 예수님만큼 좋은 것이 천상천하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도 아직도 조금만 압니다. 하나님을 알아도 조금만 압니다. 하나님이 지구(地球) 만하다고 하면 우리는 모래알만큼 안다고 보면 될 겁니다. 좀 더 알아 나가야 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을 좀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예수님을 좀 더 아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알아야 다 알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무한하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무한히 알아나가야 합니다. 계속 알아 나가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

첫째가 아는 것이라면 둘째는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안 다음에는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심중에 끊임없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심중에 끊임없이 모시는 생활, 예수를 얻는 것, 예수님의 생명력이 내 속에서 계속 역사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 모시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 힘으로 사는 생활이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
지 말고 가서 예수님을 얻으십시오. 소유하십시오. 예수님을 소유하면 부자가 되고 예수님을 한번 잃으면 거지가 됩니다.

예수님 소유하면 부자가 됩니다. 예수님 한 번 잃으면 거지가 됩니다. 예수님 소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북에서 부르던 것인데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이북의 공산당 환란이 동남풍 서북풍 서남풍 환란이지만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린다 그 공산당 환란에서 예수향기 날린다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북의 심을철 목사님께서 많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한다 해서 이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 한 번 얻으면 나는 부자가 되고 한 번 잃으면 나는 거지가 되고 예수님 한 분이면 지옥도 천국이 되고 예수님 없으면 천국도 지옥이 되고 예수님 없는 사업은 성공도 안 되고 실패하고 예수님 있는 생활은 만사 유익합니다.
아무리 동남풍 서남풍 다 불어도 예수님 한 분 계시면 거기서 예수님의 향기가 날립니다. 예수님을 소유합니다. 소유한다는 말은 ‘중심에 모신다, 끊임없이 모신다, 예수님의 생명력이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소유한다, 얻는다는 말은 내가 그를 힘입어서 그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알고, 둘째는 예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예수님 소유 못하면 안 됩니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예수님께서 늘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언제나 예수님을 모시는 생활을 못하면 그만 생명력이 없습니다. 마음에 끊임없이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생명력이 있고 언제나 그를 힘입어서 사는 생활이 예수님을 모시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셋째는 9절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셋째로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 되려고 바울이 힘을 썼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데만 그치지 말고 예수님을 얻어서 잘해야 되고 그 다음엔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한마디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화(化)하는 것입니다. 내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와 화하고, 본질과 본성이 예수 화하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인도와 주장을 온전히 받아서 나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인도와 주장을 온전히 받아야 합니다. 온전히 내가 예수님께 이용만 당하니까, 예수님만 나타나고 발견이 됩니다. 예수님께 이용당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내 주장 내 뜻 하나도 없어지고 내 볼 장 보는 것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이용물이 되서 피동(被動)되어서 예수님만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 아닙니까? 내 몸과 맘 예수님께 심신이 젖어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은 참 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보면 어떤 예수님인지 알게 됩니다. 아, 예수님께서 저런 분이구나 다 알게 됩니다. 온전히 예수님께 이용만 당하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입니다. 지금 초보적으로 하면 슬슬 넘어가고 관둡니다. 초보적으로 예수님 알고, 얻고, 발견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 영의 안식으로 깊은 도리, 이것을 먹어야 우리가 자라날 수 있기 때문에 단단한 식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젖이나 먹어서는 자라지 못합니다. 힘도 없고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자기의 힘이 되고 양식이 되고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그저 믿는다 간판만 갖다 붙이지 말고, 예배당에 왔다갔다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도 별로 변화가 없고, 개꼬리 삼년 묵어야 황모 못 된다고 하듯이 밤낮 깨꼬리 되지 말고, 이제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야 합니다. 작년보다 좀 더 알고 좀 더 얻고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 년만 지나도 상당한 유익이 됩니다. 한 해가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가도 아무것도 못하고 지나가면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년에는 이것을 결심하고 나서야 합니다. 즉, 내가 예수님을 좀 더 발견해야 되겠다. 성경 읽으면서 발견하고 기도하면서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예수 그리스도시냐 얼마나 좋으냐 얼마나 좋길래 다른 사람들이 이러나 하면서 알아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발견 못한 것입니다. 아직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에 못 들어 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어야 합니다. 실제로 발견하면 그 이상으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가장 존귀하고 보배롭고 영광스럽고 세상 모든 것이 여기에 비할 수 없습니다. 세상 것은 이에 비하면 쓰레기통과 같습니다. 배설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 세계를 걸어가는 사람은 저 세상 내려다보면 천하게 내려다보입니다. 술집에서 술 먹고 둘이서 쌍쌍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화장실 안에서 구더기들이 쌍쌍이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럽기 한이 없고 유치하기 한이 없습니다. 형편없습니다. 이 세계를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알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어 가져야 합니다. 

발견만 하고 얻지 못하면 안 됩니다. 가다가 밭에서 무엇을 발견했죠? 보화를 발견했는데 숨겨두고 돌아가서 자기는 다 팔아다가 그 밭을 사서 그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전부 보화입니다.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 영적인 세계, 전부가 보화입니다. 일단 발견하면 가서 자기 것을 팔아서 그 보화를 사야만 자기 것이 됩니다. 얻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에 희생이 들어가야 되고 노력이 들어가야 되고 내 것을 포기해서 거기에 투자를 하고 일심정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고, 얻은 다음에는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화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성품과 성질과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화하는 것입니다 인격이 온전히 이용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이용물이 되고 피동 되는 것입니다. 이용되고 피동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울은 힘썼습니다. 발견하려 함에 힘을 쓰는 것입니다. 힘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하였듯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난 벌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가 됐다, 그 의의 위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가 됐습니다. 의인이 됐는데 그 이상의 그리스도를 얻고 발견되고 그 안에서 의를 건설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얻었으니까 우리가 다 얻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저 얻은 것입니다. 예수의 의를 받았고 예수님의 구속을 우리가 힘입었기 때문에 모든 죄사함 받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도 다 사함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를 예수님이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믿음으로 거저 주셨습니다. 거저 받았으니까 구원받았다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달음박질입니다. 그것을 알기를 힘을 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

본문 10-11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바울의 네 번째 소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부활의 권능,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만 자기에게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것은 만물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 권능이 자기 속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에게 능력이 많이 있습니다. 현재에 있는 능력도 많이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자기가 다 입고 하나님 앞에 가기를 원합니다. 

믿는 방법은 무엇인가? 부활의 권능을 자기가 입는 방법이 있는데,
본문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듯이,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려면 먼저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참예하려면 먼저 예수님의 순종에 참예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순종하셨습니다. 신, 구약 성경을 다 순종하고 죽기까지 하나님을 복종했는데 먼저 예수님과 같은 순종에 참예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같은 인내에 참예하고 예수님과 같은 고난에 참예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순종, 고난, 인내에 참예하고 예수님과 같은 죽음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같은 권능이 그 사람에게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힘든 것입니다. 거저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순종을 하면 예수님과 같은 고난이 옵니다. 예수님은 신구약 성경 다 지켜 나가셨습니다.
하나도 안 빼놓으시고 다 지켜 나가니까 대단히 큰 고난이 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이 옵니다. 그것을 다 참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활의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거기에 동참하려고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매일 힘쓰는 것입니다. 

한강 물이 흘러 내려오는데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진리는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조그만 고기가 올라가면 마찰이 적고 큰 고기는 마찰이 큽니다. 한강 절반만한 고기가 올라가면 절반만큼 고통이 오고 물이 몰려오니까 한강만한 고기가 올라가면 한강 물 전체가 반대합니다. 고기가 클수록 고난이 심합니다. 순종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이 거슬러 내려가는 세상인데 우리가 올라가는데 조금 순종하면 환난이 작게 옵니다. 조그만 고기, 멸치 같은 것, 송사리 떼 만 한 것 올라가면 물이 그 만큼 밖에 고통이 없습니다. 작으니까 그렇습니다. 숭어나 큰 것 큰놈이 올라가면 그만큼 물의 반대가 심함니다. 그만큼 고통이 옵니다. 그만큼 힘이 있어야 합니다. 큰 고기는 그만큼 반대가 심해서 그만큼 힘이 있어야 합니다. 좀 더 큰 고기는 반대가 더 심합니다. 한강 절반만한 게 올라가면 한강 물 절반만한 물이 내리밉니다. 그래도 올라갑니다. 그만큼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한강만한 물고기는 한강 물 전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 그만큼 고난이 많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구약성경을 전체를 다 순종하셨기 때문에 다 거슬러 올라가셨습니다. 세상 전체를 다 거슬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만한 인내가 있었고, 그만큼 고난이 왔고 그 다음엔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은 천상천하에 모든 것을 이길만한 그런 권능이 왔습니다. 그런 권능에 사도 바울도 참예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포부가 큽니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다 거슬려 올라가는 신앙 가지고 가야 그만큼 고난이 오겠는데 송사리만큼 가려다 죽으면 뭐합니까? 좀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에 참예한다, 그리스도의 순종 다 한다, 다 겪어 나간다, 그래서 죽는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만한 권능이 오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만한 권능에 참예한다고 바울은 힘을 많이 썼습니다. 편안하게 예수님 믿겠다는 사람들, 고난 안 받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송사리와 마찬가지 입니다. 새끼손가락만한 것 모래무치 등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되고 싶습니까? 큰 인격자가 되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야지 새끼손가락만도 못한 채 올라가면 안 됩니다. 큰 인격자가 영광으로 면류관 써서 나가는데 모래무치 만한 것 송사리만한 것이 되면 되겠습니까? 쉽게만 먹어서 그렇습니다. 
교역자들도 너무 평안하게 교회 다닐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떤 목사들은 개척교회 보내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이만하면 됐으니까 다시 가서 개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현재 있는 교회가 편안하니까 고난 많은 교회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역자가 바로 됐습니다. 소망을 가져야지 교회 하나 맡아서 평안해서, “그거나 하다 죽자”하면 너무 소망이 없습니다. 소련 갈 사람은 가고, 중공 갈 사람은 가고, 각자 나서야 합니다. 바울과 같이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려면 고난이 와야지,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참예합니까? 올라가야합니다. 거기서 참고 견디면 그 다음엔 큰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기울여서 노력하고 생명까지 희생될 각오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니까 나도 죽자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서자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그 권능에 참예하려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썩어질 소망은 소용이 없습니다. 큰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0-11절을 다시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려고, 예수님의 고난에 먼저 참예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그런 큰 고난에 참예하면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권능이 그 사람에게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되고 선교사로 나가서 고난 받을 각오도 하고 나가는 사람을 우리가 뒤에서 도와주면 동참한 상급이 같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빌립보 교인들이 도와주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상급을 같이 받는다고 했고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빌립보 교인들이 다 같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상급을 같이 받습니다. 우리도 구 공산권 선교사 파견하고, 선교사는 생명 내놓고 나가고, 우리는 뒤에서 도와주고, 모든 정성과 물질과 마음으로 기도로 거기에 참예하면, 그 상급을 같이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에 참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해서 오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면서 죽기까지 복종하면, 그만큼 그리스도의 권능이 이루어지고, 선교사나 개척교회에 파송하고 여러 면으로 도와주고 자기의 모든 물질을 기울여서 도와준다고 하면, 거기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급이 같고 이루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힌 다음에 자기도 생명 내놓고 나도 갇힐 각오를 하고 더욱 힘 있게 전도를 했는데 그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데 함께 참예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만한 권능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이루어 진 것입니다. 마음으로 참예를 했으니까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전도를 했으니까 물질로 공궤를 했으니까 거기에 참예한 것이 됐습니다. 우리도 여러 면으로 참예하는 데 힘쓰는, 순종하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

빌립보서 3:1-3 세 가지를 삼가고 세 가지를 행하라(三愼三行).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세 가지를 삼가고 세 가지를 행하라(三愼三行)
빌립보서 3:1-3

1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3:1 마지막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해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롭지 않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다. 

3:2 개들을 주의하고, 악행 하는 자들을 주의하며, 거짓 할례자들을 주의하여라. 

3:3 이는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 할례자들이기 때문이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생활

본문 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란 이젠 종말로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바울이 여러 번 했던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18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에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빌립보서에서는 기뻐하라는 말이 18번 있습니다. 이 짧은 성경에 기뻐하라는 말이 제일 많이 있습니다.
또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는데,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옥중에서 기록을 하면서 ‘나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이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영으로 사는 생활을 해야 항상 기쁩니다. 영적 세계에서 살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기쁨이 충만한 세계이고, 빛의 세계이고, 생명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생활, 신령한 세계에서 주와 동행하는 생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사는 생활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빠져서 살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초월해서 신령한 세계의 길을 걸으면 이 세상의 어떤 환난과 고통이 많아도 항상 기쁨으로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이 땅 위를 걸어가려면 강도 있고,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많습니다.
또 비도 오고, 눈도 옵니다. 그러나 구름 위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 하나도 걸리는 것이 없고, 가리는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령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 여러 가지 우여곡절 많이 있지만, 거기에 장애를 받지 않고 항상 기쁨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언제나 영적 세계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2. 반복하여 가르침으로 신앙의 체계에 굳게 서도록 할 것

그 다음에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란 바울이 같은 말을 또 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리 말했지만 같은 말 또 쓴다는 것이고, 또 전에 말해줬지만 같은 말을 또 쓴다는 것이며, 전에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에 말해준 바가 있지만 지금 또 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기록한 바가 있지만 지금 또 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어서 말하고 있는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삼가고, 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나가는 것에 대하여, 전에도 말한 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28절에,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에 말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가 많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가라’고 자주자주 말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자주자주 말합니다. ‘그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요긴한 것을 반복해서 말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해주는 것이 너희에게 안전하다는 것’은 너희의 신앙이 안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신앙이 안전해진다는 걸 생각할 때에 수고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긴한 것을 반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세 가지를 반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양심을 똑바로 써라, 일심정력하라, 삼가조심하라’는 말을 늘 해줬는데, 그 요긴한 것을 반복해서 자주 말해줬기 때문에 김 목사님한테 배운 사람은 보통 다 양심을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삼가 조심은 잘 못하는 거 같습니다. 또 일심정력하는 것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줬지만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안 들은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요긴한 것을 반복해서 자주자주 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하지 말고, 벏은 진리의 세계의 다른 면을 또 충분하게 말해줘야 됩니다. 구원관, 하나님에 대한 신관, 예정론, 교회관, 천년왕국에 대한 것, 내세에 대한 것, 또 인간론, 조직신학에 대한 넓은 세계를 말해줘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넓게 여러 면을 다 아는 동시에 요긴한 것은 자주자주 말해서 그 요긴한 것이 성도들의 신앙에 굳게 서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긴한 것을 자주자주 말해주지 않고, 그저 한 번 말하고 지나가고 말면, 교인들이 신앙의 체
계가 서질 않습니다. 신앙의 체계가 서지 않기 때문에 자기 설 자리도 모르고, 노선도 없고 방향도 없이 그저 가다가, 그 다음엔 미혹을 받고 곁길로 걸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에 체계가 서야 어디 갖다 내다 놓아도 자기 설 자리가 있고 자기 갈 길을 압니다. 체계가 서 있질 못하면 태평양 바다에 던져 놓았을 때, 갈 방향을 모르고, 그저 아무데로 가다가 큰 고기들한테 잡혀 먹히고 맙니다. 그러니까 자주자주 요긴한 것을 가르쳐서 신앙의 체계가 서도록 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안전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교인들에게는 안전하게 신앙 안에서 잘 자라나도록 하기 위하여,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계가 서야 되겠습니다. 체계가 안 선 사람은 아무 교회에 나가도 배우는 것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걸 가르치는데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데 신신학과 합작하는 곳이 있어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속에 체계가 안 서 있기 때문에 분간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자주 요긴한 것을 반복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고, 또 그 몇 가지만 밤낮 가르치지 말고, 또 광범위한 성경의 여러 면을 다 가르쳐야,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모든 걸 바로 분별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가르쳐 놓으면 그 다음엔 그것 밖에 모르고 다른 것을 모르니까 갈 길을 모릅니다. 여러 면을 다 가르쳐서 모든 걸 분별할 줄 알고 또 모든 것을 같이 평가할 줄 알고 뭐가 잘못된 줄 알아야 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여러 면을 가르치는 동시에 요긴한 것을 자주자주 반복해서 가르쳐야 됩니다.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는 겁니다. 이사야 28장 9절~10절에,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서 비방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뭐 젖 떨어진 아이냐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라고 비방했습니다. 요긴한 것을 이사야가 계속 반복했지만 비방만 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이사야가 안타까워서 그랬겠습니까? 요긴한 것을 꼭 이대로 해야겠는데 듣지 않으니까, 그래서 또 하고, 안 들으면 또 하고 또 하고 한 것인데, 그게 비방거리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반복해서 가르치더라도 교인들이 바로 서는 게 중요합니다.

3. 삼신 삼행(三愼 三行)
세 가지를 삼가라(三愼)

그 다음 본문 2절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말씀했는데 세 가지를 삼가라는 말입니다. 세 가지를 삼가야 하겠는데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했습니다. 

1) 개들을 삼가라 
이사야 56장 10-12절에 개에 대해서,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파수꾼이라는 건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선지자, 교역자 이런 사람들이 파수꾼입니다. 그 파수꾼들은 다 뭐라고 했습니까? ‘소경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또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
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하는 이런 것이 개라고 했습니다. 소경이요, 벙어리개요, 짖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소경이라는 건 죄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고, 벙어리 개라는 건 죄를 책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도적이 오는데 가만히 있습니다. 도적이 온다고 짖어야 되겠는데 부르짖어야 되겠는데 교역자들이 죄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좋은 말만 해주는 겁니다. 또 사람들이 좋은 말해주는 걸 좋아합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좋으신 하나님만 소개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복 준다, 우리를 사랑한다, 또 복 받는다, 뭘 해준다, 좋으신 하나님, 이거만 계속 말해줘야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겁니다. 듣기 싫은 소리, 죄 소리 하면 그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죄 소리 하지 않는답니다. 죄 소리 1년에 한 번도 안 하고, 그저 좋으신 하나님만 말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벙어리 개인 줄 알아야 합니다. 당장에 도둑이 와서 양떼를 물어 가는데 개가 짖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당장 맹장염이 걸려서 터지게 됐는데 괜찮다고 아무 일 없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병 났다, 째야 된다, 수술해야 된다’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좋은 것만 자꾸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교역자들이 소경이 되고, 죄를 바로 볼 줄 모르고, 시대를 분별할 줄 모르고, 벙어리 되고, 미리 짖지 못합니다. 

또 ‘꿈꾸는 자여, 누운 자여,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라고 했는데 꿈꾸는 자라는 건 세상주의로 나간다, 잠자기를 좋아한다, 영적 신앙의 잠자기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신앙의 잠이 깊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로 알지 못하고 탐욕이 심합니다. 탐욕주의로 나가고 또 자기 길로 간다고 했습니다.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자기 볼 장만 보고, 포도주를 먹고 독주도 먹고 이렇게 세상주의에 도취되어 나가는 사람들이 파수꾼이란 말입니다. 이런 파수꾼은 개라는 말입니다. 개들을 삼가라고 하였는데, 개들을 삼가지 못하여 그런 교역자에게 한 번 걸려놓으면 그만 다 빼앗기고 맙니다. 자기 구원을 이루어나갈 수도 없고 모든 걸 다 빼앗기고 관둡니다.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 

교역자 가운데 행악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기꾼, 강도들, 도적 이런 목사도 많습니다.

3) 손할례당을 삼가라 

손할례당은 율법주의자들인데, 율법을 행하고 특별히 할례를 주장하면서 남에게 손해를 주는 자들입니다. 신앙에 손해를 주며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 할례 안 받으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면서 할례를 주장하면서 남의 신앙에 손해만 줍니다. 그래서 손할례당을 삼가라는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남의 신앙에 손해를 주니까 손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또 폐법주의자가 있는데 폐법주의자들은 ‘율법은 필요 없다, 이젠 믿음으로 구원 다 받아놨는데 율법이 무슨 필요 있느냐, 다 집어치워라,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도 손해주는 사람입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은 할례를 주장하면서 손해를 주고, ‘율법이 필요 없다 이제는 율법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사람은 율법을 폐하면서 손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삼가라는 겁니다. 삼가지 아니하면 까딱하면 걸려들어 신앙의 손해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를 행하라(三行)

본문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참된 할례당, 즉 참된 믿음은 어떤 신앙이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가 곧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할례의 뜻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정욕을 제거한다는 뜻이 있고, 둘째는 약속의 표고, 셋째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이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는 정욕을 제거한다고 했습니다. ‘정욕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할례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약속의 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로써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뜻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의 참 뜻이 여기 다 나왔습니다.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건 하나님께 속한 것이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게 하나님께 속한 거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한다’는 건 언약에 참여한 표란 말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한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으로 참여한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했습니다. 그 다음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욕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 할례, 육신적으로 양피 끝을 베어 버린 것이 참된 할례가 아니라 할례의 근본정신을 실행하는 사람이 참된 할례를 한 것입니다. 

참 할례의 근본정신은 세 가지인데, 언약에 참여하고 정욕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또 참으로 언약에 참여한 사람은 언약의 중심이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정욕을 제거한 사람은 육체를 의지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할례의 근본정신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할례의 근본정신에 참여한 사람인데 외적 할례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의 근본정신이 중요하니까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참여한 사람이다,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이다, 영적 할례 받은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1) 성령으로 봉사하라 
그러면 영적으로 하나님께 바로 되려면 무엇으로 봉사해야 됩니까? 성령으로 봉사해야만 바로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건 예배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는다고 했는데 성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되고 진정으로 드려야 된단 말입니다. 그게 참된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그랬죠? 신령이란 성령으로 드리는 것인데 우리 중생한 영혼이 성령을 힘입어서 성령으로 드리는 거고, 진정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헬라 원문에 보면 진리라는 말하고 진정이라는 말하고 같은 ‘알레테이아’인데 헬라어 ‘알레테이아’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걸 진정이라고 또 번역을 한 겁니다. 그래서 진리나 진정이나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또 성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데 성령을 힘입어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참된 예배가 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드리는 건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말씀으로 드리는 것은 성경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겁니다. 복종하며 드리라는 겁니다. 못한 거 회개하고 중심으로 복종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진리로 예배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힘입어서 성경 말씀을 복종하면서 예배를 드려라 이것이 참 예배라는 겁니다.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건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인데 성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한다는 건, 진리의 중심이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로 예배를 드린다, 자랑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즐거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즐거워하고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자세히 가르쳐주는 성령입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바로 믿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자랑한다는 말에는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라는 겁니다.

3)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 육체는 육체의 정욕을 제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면서 육체의 것은 다 신뢰하지 않으면서 다 떠나면서, 영으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드리는 것이야 말로 참된 예배입니다. 또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 가운데 정욕을 제거한다는 뜻도 있지만, 육체의 신뢰할 것들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본문 5-6절에,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들이 다 육체를 신뢰할 것들인데 과거에는 이런 육체의 것을 자랑하고 신뢰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을 전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반이다, 8일 만에 할례 받았다, 베냐민 지파다, 또 히브리 사람이다, 이런 육체의 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베냐민의 지파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 요새로 말하면 ‘난 어디 사람이다 어느 지방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지역주의 다 없어져야 합니다. 지역주의는 예수님을 믿는데에 방해물입니다. 그건 육체를 신뢰하는 겁니다. 자기 지방 사람들 끼리끼리 모이는 지방 사상, 그건 분명히 육체를 신뢰하는 건데, 그건 영적 신앙하곤 반대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사람이 지방으로 기울어지면 벌써 그건 다 끝난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지방주의에 절대 빠지면 안 됩니다. 투표할 때도 자기 지방 사람만 많이 투표해준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하면 그건 다 육체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런 것에서 떠나야 됩니다. 또한 학벌주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나 어디 나왔다, 서울대학 나왔다’, 서울대학이 천당 가는데 무슨 상관있습니까? 괜히 육체 것 자랑하려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떠나야 합니다. 또, 예를 들어, ‘경주 김가다’라고 하는데 경주 김가가 예수 믿고 천당 가는데 무슨 상관있습니까? 전주 이가다, 또 유씨도 양반 무슨 유가다, 이런 양반주의도 다 집어치워야 합니다. 양반은 무슨 양반입니까? 그건 육체를 신뢰하는 겁니다. 양반이 육체를 자랑하는 바람에 예수님을 잘 안 믿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이지, 육체 신뢰하는 것은 참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에다가 찌꺼기 끼워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찌꺼기들, 배설물입니다. 믿음은 금과 같은 것인데,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변소 간에 가서 배설물을 퍼다가 금 옆에 좀 담아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금과 같은 금 그릇을 만들어 놨는데 배설물 한 사발 옆에다 가지고 다니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육체 것을 가지고 오면 배설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배설물을 다 집어치워야 합니다. 다 떼 내버리라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곧 참된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신앙에 서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