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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4일 금요일

이사야 11:1-16 그리스도의 출생과 구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그리스도의 출생과 구원
이사야 11:1-16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6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남은 백성이 돌아오리라 10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그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13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14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15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1.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하시고 심판하심

이새의 계통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예언함

본문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이새의 뿌리’라고 한 것은 다윗의 계통에서 한 싹이 나올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계통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가지가 뻗고 결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여섯 가지 신이 임함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여섯 가지 신을 가지심 

본문 2절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신이 임하신다고 하였습니까?
첫째 지혜의 신,
둘째 총명의 신,
셋째 모략의 신,
넷째 재능의 신,
다섯째 지식의 신,
여섯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성령은 지혜의 신이요, 총명의 신이요, 모략의 신이요, 재능의 신이요, 지식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신이십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한량없이 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성령으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여섯 가지 신이 임하셨습니다. 지혜가 충만하시고, 총명이 충만하시고, 모략이 충만하시고, 또 재능이 충만하시고, 지
식이 충만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충만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셔서 이러한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충만하시고, 총명이 무한하시며, 모략이 충만하시고, 모략이 무한하시며, 재능이 충만하시고, 지식이 충만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충만하십니다.

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도 여섯 가지 신이 임함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이 여섯 가지 신의 역사가 다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오시옵소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이 임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충만한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모략과 재능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에게도 이런 신이 임합니다.

3) 자라난 사람만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여섯 가지 신을 행할 수 있음

그러나 그러한 역사는 우리가 자라난 만큼만 일어납니다. 자라나지 못하면 역사가 조금씩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많이 자라난 사람은 그만큼 지혜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총명이 충만하고, 모략과 재능이 충만하게 자라나야 합니다. 1등 운전사라고 해도 기계가 시원치 않으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세계에서 1등가는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게 됐어도 먼저는 비행기의 성능이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비행기가 시원치 않은 것을 타고 조종을 하게 되면 조종사의 기능과 기술을 다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으로 인해 어느 정도 지혜가 있게 되고 예수님의 지혜를 받아 어느 정도 총명이 있게 됩니다. 모략도 어느 정도 괜찮게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라난 사람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많이 자라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재능, 모략과 지식, 여호와를 경외하는 면에서 아주 월등합니다. 하지만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같은 성령이 임하시고 같은 예수님께서 임하셔도 재능이 별로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조금 부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것이 중
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셔서 성령의 기능,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그리고 지식이 다 임하셨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라난 것만큼, 순종한 것만큼 예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하다가 실수하기 쉽고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라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대로 하면 가
다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예수님이시고 속에 같이 임하셔도 자라난 것만큼 예수님의 기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믿사오니’라고 하면서 기도를 해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대로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못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라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는 중생한 영이 예수님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대로 자기를 이용한다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심

본문 3절에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시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시고, 공의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즐거움을 삼는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오락하며 방탕하고 세상 육신의 쾌락에 빠져서 나가는 사람은 실제로 참된 즐거움을 모르는 자입니다. 참된 즐거움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일시적으로 즐거움이 많은 것 같지만 속에는 쓴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은 속도 달고 외부도 답니다. 다 즐겁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의대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심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시며, 공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말하는 것은 잘했다고 합니다. 또 보이는 면에 있어서도 아부하고 외식함으로 잘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들리는 대로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인도를 잘 받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 공의대로 심판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했다고 해도 공의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아무리 태도를 잘한다고 해도 공의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공의대로 알아주는 것이고, 알아준다고 해도 그것 또한 공의대로 알아주는 것입니다. 공의보다 더 알아주고 덜 알아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다섯 달란트짜리라고 하면 다섯 달란트로 알아주는 것이 공의인 것입니다. 두 달란트는 두 달란트로 알아줘야 합니다. 두 달란트가 잘 보인다고 해서 다섯 달란트와 같이 알아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짜리면 두 달란트로 알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달란트짜리면 한 달란트로 알아주십니다. 또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로 알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왕따 시켰다. 나는 알아주지를 않는다”라고 해도 왕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왕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는데 공의대로 알아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공의대로 그 사람의 정도와 분량과 신앙대로 판단하시며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잘했느냐가 문제입니다. ‘몇 푼짜리여야 되느냐? 몇 달란트짜리가 되어야 하느냐?’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장에 알아주시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면 가감 없이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되지 못하면 되지 못한 대로 나타나고, 자라났으면 자라난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는 대로 보지 않으시고, 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4절에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빈핍한 자’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인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겸손하여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자들도 정직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죄를 숨기며 돌아가도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시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입의 막대기와 기운으로 악한 자들을 다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속에 있는 대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의인인 체 하고 돌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옳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공의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공의대로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공의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본문 5절에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감하지 아니하십니다. 공의대로, 또 성실대로 하십니다. 무엇이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공의대로입니다. 공의대로 심판하시고, 공의대로 상도 주시며, 공의대로 나타내십니다. 또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시고 사랑과 공의로 겸하여 나가시는 주님이십니다.

2. 그리스도의 나라 건설

역사적인 사실, 영적 세계의 모형, 말세 예언과 천년 왕국

본문 6-8절에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곰이 암소를 잡아먹기 때문에 암소와 곰이 함께 먹지 못합니다. 또 지금은 사자가 소를 만나면 잡아먹기 때문에 그 둘이 함께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자도 소처럼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해도 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먼저 영적 세계를 말합니다.
또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은 세계가 서로 해하지 않는 세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곰과 사자와 같이 남을 잡아먹는 맹수들이라도 다 유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받은 영적 세계에서는 이렇게 다 유순하게 됩니다. 잡아먹을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다 유순하여 풀을 먹고, 서로 함께 누워 자고, 해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사자와 같이 남을 잡아먹고 곰과 같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고 돌아갔지만, 예수를 믿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 다음에는 남을 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독사와 같은 사람도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아이들이 같이 있어도 해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말세 예언적으로 보면 천년 왕국 시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언의 삼대 요소는 첫째 역사적인 사실, 둘째는 영적 모형, 셋째는 말세 예언, 이 세 가지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 있고, 영적 교훈이 있고, 그 다음에 말세 예언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병행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말세에 대한 것으로만 해석하는데, 제가 영적 모형도 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말세 예언의 요소도 있지만 영적 양식, 신령한 양식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것도 겸해서 해야 된다고 얘기해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9절에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에 로마 군대가 들어올 때에 아이들을 다 죽였는데, 아이 밴 여자들의 배를 찔러서 배 안의 아이까지 다 죽였습니다. 성경에 ‘산으로 도망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때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만 해석하고 지나간다고 하면 우리의 영의 양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영의 양식으로 먹여야 합니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한 것은 욕심이 잉태된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 것에 구원 받을 요소를 다 빼앗기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산으로 도망치라는 것은 시온 산을 향해 도망쳐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세에 가서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년 왕국 시대에는 아이들이 독사의 구멍에서 독사를 잡아 가지고 놀아도 독사가 물지 않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함께 누워 자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해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천년 왕국이 오면 그렇게 됩니다. 그때에는 모든 악이 다 빼내버린 바가 됩니다. 마귀를 잡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일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기 때문에 천 년간은 마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이 없으니까 서로 해하지 않고 다 유순해지며, 마귀가 들어오기 전과 같은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해하지 않고 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17-25절에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영적인 면과 실제 이뤄가는 면을 동시에 가지고 나가야 함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영의 구속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벌써 다 되었고, 앞으로 몸의 구속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부활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영적 부활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도 하셨습니다. 우리도 몸의 부활을 해야 합니다. 영적 부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또 안식도 영적 안식이 있는 동시에 주일을 안식하는 안식일 날이 있습니다. 또 천년 왕국 세계가 안식 세계에 와야 하는데, 이것도 한쪽만 이루어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동시에 실제적인 부활과 안식이 있어야 딱 맞지 않습니까? 성경에 ‘만유가 회복한다’는 말도 있고, ‘만물이 통일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전부 천년 왕국에 가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동시에 현재 영적 세계에서는 벌써 이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세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신다는 것입니다. 또 열방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님
께서 거하신 곳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나라로 택한 백성이 돌아옴

진리 안에 남은 백성을 하나님께서 건져주심

본문 11절에 “그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백성이 남았다고 하였습니까? 모든 사람이 진리에서 떠나지만 진리 안에서 남은 백성은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피난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거기에 깊이 들어가 남은 사람을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다 떨어져 나가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여러 섬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권고하셔서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남은 백성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셔서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징계하셔도 남은 백성은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가 이기는 것이고, 진리에 선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를 쓴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가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투기와 괴롭게 하던 자가 없어짐

본문 13절에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팔을 펴시어 건져주실 때에는 에브라임이나 유다가 투기하지
아니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에브라임과 유다가 서로 투기하고 싸우고 괴롭게 하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진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고, 유다는 남쪽 나라를 가리킵니다. 북쪽 이스라엘 나라와 남쪽 유다 나라는 서로 맞지 않으니까 투기하고 괴롭게 하며 다투었습니다. 북쪽 나라에서는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남쪽 유다 나라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니, 서로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남쪽 유다 나라는 7월 15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8월 15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하니, 맞지 않았습니다. 또 남쪽 유다 나라에서는 레위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아무나 제사장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이것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쪽 유다 나라에서 하나님 섬기는 방법이 성경에 맞았습니다. 북쪽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겼는데, 성경에 맞지 않는 방법, 즉 인본주의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맞을 리가 있습니까? 교리가 다르고 주장이 다르고 성경대로 하는 것이 다른데, 어떻게 맞겠습니까? 성경을 변경시키고 신앙을 변경시키기 때문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북쪽 나라는 오늘날의 타락된 교회, 인본주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성경대로 하지 않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는 있지만 성경대로 하지 않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나라는 성경대로 바로 믿자고 합니다. 유다 나라가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보고 유다 나라에서 한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투기하던 것과 서로 싸우던 것이 다 없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유다가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하고,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합니다. 담이 다 터지며 막힌
것이 없어진 것과 같이 다툼이 없어집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며 자기 지방 관념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지방 사람이면 사력을 다 쓰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당파를 묻는 것은 신앙 세계 밖의 일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지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지방이 있겠습니까? 자기 지방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지방 중심으로
다니고, 자기 지방끼리 당파를 묻고, 자기 지방에서 하는 것은 다 좋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배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자기 지방이 있습니까? 한국도 자기 지방 관념 때문에 망하게 되었는데, 지방 관념을 다 없애
야 하겠습니다. ‘어느 지방 사람이다. 이북 사람이다. 이남 사람이다. 충청도다. 전라도다. 경상도다’하는 것을 다 깨뜨려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지방 관념을 가지고 나가면 모든 것이 비뚤어집니다. 나라도 비뚤어져나갑니다. 자기 지방 사람만 내세우니 나라가 바로 되겠습니까? 어느 지방 사람이든지 자격 있는 사람, 제대로 일할 사람을 내세워야 합니다. 무조건 자기 지방 사람을 내세우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면 그런 사람은 악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면 교회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방 관념이 없는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을 한 번 더 읽어보십시오.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괴롭게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투기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로 택한 백성이 돌아옴

본문 14절에 “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블레셋 나라 사람이나 동방 백성이나 에돔이나 암몬 자손을 다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복종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이 마른 이 시대에 참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설해야 함

본문 15-16절에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
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해고’라는 것은 바다를 말하는데,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16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6장 12절에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
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브라데 강은 이스라엘과 이방의 경계선인데,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는 것은 이방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1장 7절에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이방 나라의 경계가 유브라데 강인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와 이방 나라 사이에 그어주신 이상적인 경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일곱 갈래로 갈라져서 마르게 되니까 사람들이 신을 신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요새 예수 믿는 교회와 이방 나라의 경계선이 다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말세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이방의 경계선이 다 없어져서 이방의 모든 것이 교회로 들어오고 교회의 모든 것이 이방으로 나가는데, 그것이 말세의 타락된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 재림의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이며,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 나라와 교회의 경계가 있습니까? 경계가 점점 없어져 갑니다. 많은 교회들이 다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을 교회에 들여서 주일날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쓰고, 다른 날은 연극장, 연락하는 장소, 춤추는 장소가 되는 교회가 많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안 믿는 사람을 교회에 다 끌어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끌어들이려니까 예수 믿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그저 좋은 가수들을 데려다가 음악이나 들려주고, 연극을 하고, 잘 해먹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입니까? 안 믿는 사람을 교회로 다 끌어들이면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포도주에 물을 탄 것과 같습니다. 물도 조금 탄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는 조금 넣고 물은 많이 넣었습니다. ‘은이 찌끼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는데, 찌끼가 들어와 다 낀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세상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된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예배를 제대로 드립니까? 세상의 곡조를 조금만 고쳐서 세상 곡조로 노래하고 흥분시키고 도취시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점점 없어지게 됩니다. 가라지와 가시나무들이 들어와 왕성한데, 곡식이 어떻게 자라나겠습니까? 그 안에서는 곡식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가시나무와 가라지들이 들어와서 세력을 바짝 쓰는데, 곡식이 자라날 리가 있습니까? 기운이 다 그리로 빠져 나가고 기진맥진해서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죽어가는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참된 곡식은 죽어가는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새가 말세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교회들이 세속화
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이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담을 헐어서 세상적인 교회가 점점 더 많아집니다.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만약 그것을 막으면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열어놔야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안 들어오고 가라지, 가시나무만 들어오니까 곡식은 시들어지고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말세에는 유브라데 강이 말라 경계가 다 없어지기 때문에 각종 세상의 음악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안 믿는 가수들을 불러다가 돈을 많이 주고 세상 노래를 하게하고, 또 복음성가도 하면서 강단에 나가 춤까지 춥니다. 강대상은 다 집어치우고 무대만 크게 만들어서 춤을 출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강단이 춤을 추는 데입니까? 그것은 곡식이 아니고 가시나무, 가라지들이 들어와 교회의 세력을 꽉 잡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가 귀에 들리겠습니까? 오히려 설교를 간단하게 15분만 하라고 합니다. 또 목사들도 설교 15분을 한다면 그 시간 전부를 성경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성경한 절 보고 세상 이야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이렇게 교회들이 몽땅 세속화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이 마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교회가 바로 되는지를 보고 나가야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창광교회에 나오는데, 집에서부터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가족들에게 가까운 교회에 나가자고 했답니다. 할아버지가 한 80세는 되신 것 같은데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가까운 데에 나가자고 해서, 가족들이 한 번은 가까운 교회로 새벽 예배를 모시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할아버지가 저에게 가까운 교회에서 새벽 예배를 드렸는데, 북을 치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닌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음이 없어도 다 아시고 그 다음 주일날 또 창광교회에 나왔습니다. 즉, 믿음이 없어도 새벽 예배에서 북 치는 것 하나만 보고도 다 아는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하였는데, 신령한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음성’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음성인데, 성도는 신령한 음성을 알아서 그것으로 자기 영을 살려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유브라데 강이 다 말라서 세상이 들어오고 가라지가 들어오며 세상 물결이 들어와서 성도의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야말로 참 교회를 세워나갈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많지만 세상이 자꾸 들어오니까 참 교회를 세워서 참 곡식을 길러내는, 참된 교회가 필요한 이 시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