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과 위로를 통해 회개시키시는 하나님
창세기 42:24-38
창세기 42:24-38
24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25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26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27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28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29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30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여기기로 31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독실한 자요 정탐이 아니니이다 32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십이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34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5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 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36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1. 시므온을 결박함
요셉이 인정선을 떠나 형들을 회개시키고자 함
본문 24절에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왔다는 것은 ‘인정’입니다. 요셉에게 동정심이 많았는데, 그 동정심을 여러 형제 앞에서 지금 나타내면 안 됩니다. 표현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요셉이 형들을 회개시키려고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가서 울고 왔습니다. 아직 형제들에게는 절대로 동정심을 나타낼 때가 아닙니다. 시기상조인 것입니다. 자신을 나타내면 형제들이 회개 못하겠으니까,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정심을 나타낼 때는 나타내야 되고, 안 나타낼 때에는 안 나타내야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나갑니다. 무조건 동정심만 나타내면 하나님의 의가 다 무너집니다. 엄격할 때는 엄격해야지, 사랑만 하면 하나님의 의가 다 무너집니다. 엄격할 땐 엄격하고, 사랑할 땐 사랑해야 합니다. 동정심만 가지고 있다고, 사랑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만 자꾸 말해주면 안 됩니다. 아이를 자꾸 사랑만 하면 아이 다 버립니다. 대개 여자들이 아이를 사랑만 해서 다 망하게 됩니다. 또 아버지들은 엄격하게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엄격하게 아이들을 다스려야 됩니다. 어머니가 사랑만 해주고, 아버지는 엄하게 가르치지 않고 자기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사람 구실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도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사랑할 때는 물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엄격할 때는 엄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훈계할 때는 딱 잡아떼고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형이 아닌 것처럼 해야지, ‘히히히’ 하고 웃으면 아이들이 얕봅니다. ‘이까짓 것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아버지 머리까지 잡아 흔들게 됩니다. 어느 부모가 나이 들어 아들 하나를 낳아, 애지중지하며, 이 아이의 뜻을 다 받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를 때려도 웃으며 좋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때리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왜 때리는가 하면 버릇을 그렇게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때리는 아들이 있다 하고 소문이 나서 군수가 그를 불렀습니다. “너 왜 아버지 때렸느냐? 사실이냐?” 하고 물었더니,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기 때문에 한 대 때렸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네가 참 바른 중심으로 했다면, 때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니 이제부터는 때리지 말고 이렇게 이렇게 효도해라”고 다 가르쳐주고 “실천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그 아들이 다 실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천하겠다는 증거로 그곳에서부터 그의 집까지 아버지를 업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몇 십리 되는 길을 내내 업고 갔습니다. 도중에 아버지가 소변을 좀 봐야 되겠는데, “안됩니다. 원님이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잔등에 오줌을 싸도록 내내 집까지 업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충성되게 효도했답니다. 그래서 효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버릇을 잘못 가르쳐 주면 안 됩니다. 엄격할 때는 엄격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또 늘 엄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할 때는 사랑해야 합니다.
시므온을 결박하여 가둠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을 결박했는데 시므온을 왜 결박했습니까? 요셉을 애굽에 팔려고 할 때에 시므온이 제일 먼저 앞장서서 주장해서 요셉을 애굽에 판 것 같습니다. 창세기 37장 26-27절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
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죽이자고 할 때에 앞장섰던 모양입니다.
시므온은 죽이자고 할 때에 앞장 선 것이고, 유다는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이스마엘 상인에게 파는 것에 대해서 먼저 주장을 한 것 같습니다. 유다의 주장도 요셉을 살리려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구렁텅이에 빠트려 놓았으면 조금 있으면 죽겠는데, 그럴 필요 없이 상인들에게 팔아서라도 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요셉에 대해서 죽이지 않으려고 선심을 쓴 것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성격이 난폭해서 세겜에서 앞장서서 살인하였습니다. 창세기 34장 25절에 “제 삼 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라고 하였습니다. 세겜 성에서 시몬과 레위가 나가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살인하는 난폭한 성격이 있었고, 사람 죽이는 성격에 또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미워했던 요셉도 죽이려고 덤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애굽에 와서도 여러 형제들은 다 회개하는 기색이 보이는데 시므온은 아직 얼굴이 시꺼멓게 아주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시므온을 결박했을 것입니다.
완악한 사람은 갑자기 회개하지 못합니다. 또 회개한다고 해도 여전히 완악하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전에도 세겜 성에서 사람들을 죽였고, 그 다음에 요셉이 왔을 때도 죽이자고 주장을 했을 것이고. 현재에도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진 것 같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시므온을 가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므온은 형제들의 대표로 갇혔습니다. 두목을 다스리면 그 아래 것은 자연히 다스려 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두목입니다. 열두 형제 가운데 나쁜 짓 하는 데에 두목입니다. 나이로 말하면 르우벤이 두목이고, 나쁜 짓 하는 데는 시므온이 두목입니다. 그 다음에는 유화정책을 쓰는 데는 유다가 잘합니다. 장기가 다 있습니다. 언제나 나쁜 짓할 때에는 시므온이 앞장섰던 것 같습니다. 성질이 난폭해서 무조건 해치우자는 것입니다. 세겜에서 사람들을 죽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일에는 시므온이 앞장서는 겁니다. 그러므로 악한 짓하는 두목을 가둔 것입니다. 악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두목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목은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다스릴 때에는 두목만 다스리면 되는 것이지 다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여럿이 한꺼번에 잘못했을 때에는 두목만 잘 다스리면 되는 것입니다. 두목만 잘 다스려 놓으면 그 아래 것은 잘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을 결박하였습니다. 그들 앞에서 단단하게 결박을 했을 것입니다. 꼼짝 못하게 결박했습니다. 무섭게 쇠사슬로 매달아서 결박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죄가 무섭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 자신도 회개시키려는 목적입니다.
형들이 돌아갈 때 후대함
본문 25절에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은혜로 베푼 것입니다. 돈을 도로 자루에 넣어주고, 또 길 양식, 즉 가다가 먹을 양식을 주었습니다.
쌀을 가령 열 말을 샀다고 하면 열 말 그대로 다 주고, 또 돈은 받았던 것을 도로 넣어 주고, 그 이외에 가다가 먹을 양식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후대한 것입니다. 곡식 사러 온 사람에게 갈 양식을 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후대하고 또 돈도 도로 넣어 주고, 이렇게 요셉이 형들에게 깨닫게 하려고 후대해주었습니다.
2. 돈 뭉치를 보고 놀라고 부친에게 보고함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는 것에 놀람
본문 26-28절에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
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이시라도 긍휼을 베풀어주는 하나님을 여기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므온을 잡아 가뒀고 정탐으로 몰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베풀어 주었습니다. 돈을 자루에 도로 넣어 준다든지, 길 양식을 준 일이라든지 하는 긍휼을 많이 베풀어줬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면서 회개를 시키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생각지 않았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거리가 한 사흘 길이니까 아마 여관에서 이틀이나 사흘정도 자야 갈 수 있는데, 여관에서 나귀에 먹이를 먹이려고 자루를 풀어보니까 자루 아구에 돈이 도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벌벌 떨면서 혼이 났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한 다음에는 그저 감사뿐인데, 회개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오해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빠졌습니다.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는 것에 놀람
본문 26-28절에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
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이시라도 긍휼을 베풀어주는 하나님을 여기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므온을 잡아 가뒀고 정탐으로 몰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베풀어 주었습니다. 돈을 자루에 도로 넣어 준다든지, 길 양식을 준 일이라든지 하는 긍휼을 많이 베풀어줬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면서 회개를 시키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생각지 않았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거리가 한 사흘 길이니까 아마 여관에서 이틀이나 사흘정도 자야 갈 수 있는데, 여관에서 나귀에 먹이를 먹이려고 자루를 풀어보니까 자루 아구에 돈이 도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벌벌 떨면서 혼이 났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한 다음에는 그저 감사뿐인데, 회개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오해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빠졌습니다.
본문 29절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여기기로”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 가서 보고를 했습니다. 누가 보고했겠습니까? 유다가 했을 것 같습니다. 유다가 언제나 말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이 후에 보면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37절에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반대하니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말째 베냐민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 아들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말할 줄 모릅니다. 아버지에게 손자가 되는 자기 아들들을 죽이면, 즉 아들 하나 잃어버렸다고 손자들을 죽이면 아버지가 그 속병이 풀어지겠습니까?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물론 그는 잘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유다가 나서야 됩니다. 그 쓸데가 따로 있습니다. 유다가 나설 때는 유다가 나서야 됩니다. 르우벤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맏형이라고 해도 나서면 안 됩니다. 형제들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 유다가 말하였을 것 같습니다.
사실대로 간단하게 보고함
본문 30-34절은 형제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입니다. 아버지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 차례차례로 자세히 그 내용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유다가 말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차례차례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말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할 줄 모르면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운데 한마디 쑥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만두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모르게 만들어 놓게 되어 일이 안됩니다. ‘처음부터 사실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고 ‘이렇게 이렇게 됐습니다’ 하면서 자세하고 확실하게 상대방이 사실을 알도록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말 안하고 있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니 보고는 해야 합니다.
그때 사실 대로 차례차례로 요긴한 것만 보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단하면서도 요긴한 사실을 다 드러내면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보고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 것 같습니까? 길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할 때 간단하게 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길게 하는 것은 잘 못하는 것입니다.
간단하면서도 요긴한 것을 다 말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우리도 그걸 배워야 됩니다. 나중에 보충 할지언정, 처음에는 간단하게 해야 합니다. 일단 요긴한 것만 말해놓으면 또 보충 질문이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해 놓고, 보충 질문이 나올 때에 자세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역자들도 말하는데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와서 간단하게 하지 않고 가운데 이야기만 몇 마디 툭 하고는 그만 두는 사람이 있는데, 도무지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이 그 가운데 말 하나만 툭 내 놓고 그만 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과만 툭 내 놓고 관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을 한 번 하면 몇 시간 동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인데도 원인을 길게 말합니다. 한참 지나도 계속 원인에 대해 설명합니다. 또 원인의 원인까지 설명하느라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사람이 말하자고 하면 끔찍합니다. ‘이 분이 또 얼마나 오래 하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은 기합을 받는 겁니다. 그것은 못 씁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말을 할 때, 말의 대가리나 꼬리만 내 놓지 말고, 가운데 토막만 내 놔 도 안 됩니다. 차례차례로 간단하게 말하는 것을 연습해야 됩니다. 너무 길게 말하다보면 아주 골치가 아파서 무슨 소리하러 왔는지 모르
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듣기가 싫어서 아예 안 듣게 됩니다. 상대방을 염증이 나게 만듭니다. 역정이 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가 사실을 간단하게 발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대로 전부 다 숨기지 말고 하나도 빠치지 말고 다 전하되, 간단하게 해야 합니
다. 언제든지 간단하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다 말하면서도 차례 차례로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본문 35절에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 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과 아버지가 자루 속의 돈 뭉치를 보고 두려워한 것은 그 돈 때문에 무슨 화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당하지 않게 수입이 된 돈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므로, 전에 요셉을 팔아 정당치 못하게 돈을 얻었던 것이 생각나게 되어 회개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3. 야곱이 자식들로 인하여 탄식함
야곱이 지나친 추측으로 탄식함
본문 36절에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들들의 보고를 들은 아버지가 이제 또 슬픔에 빠졌습니다.
보고를 듣고, 또 자루 속의 돈 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야곱도 두려워하고 온 형제들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말하기를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없어졌습니까? 시므온도 없어졌습니까? 다 있습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 베냐민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세 아들을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닌데, ‘다 잃게 됐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나친 추측과 지나친 의심과 오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요셉이 돈을 도로 넣어준 것은 자비를 베풀어 주려고 한 것인데, 그것도 의심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있습니다. 절대 의심하지 말고 지나친 추측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과 지나친 추측 때문에 고통 가운데 빠지고, 슬픈 가운데 빠지고, 놀래서 벌벌 떨게 되고, 파괴를 초래하게 됐습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지나친 추측하지 않고, 오해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전부 유익인데, 오해해서 그만 큰 고통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고아원을 운영하는 목사가 돈을 받아서 오다가 여관에서 잤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여관에 들어갔는데, 먼저 한 사람이 자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도적이 아니겠나 의심하고는 호주머니에 돈을 넣고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그 사람
도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는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답니다. 자기가 잠을 자면 저 사람이 와서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낼까봐 돌아눕는 척하고, 또 저 사람도 돌아눕는 척하며 밤을 새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보니까 그 사람은 장로라고 하였습니다. 장로와 목사가 한 방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알았더라면 밤새도록 편안하게 잠을 잤을 텐데, 한잠도 못 잤다는 것입니다. 서로 빼앗길까봐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해와 의심이 그 사람들을 밤새도록 못 자게하고 고통을 준 것 아닙니까?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빼앗길까, 또 잃어버릴까 놀라는 것입니다. 오해와 지나친 추측과 의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추측에 대한 예를 들면, 자기 남편이 감기가 조금 들었는데, 이제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추측입니다. 그러면서 죽은 다음에 어떻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장례는 어떻게 할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에 대한 대책을 꾸미는 것이 지나친 추측입니다. 감기 들었다가 나을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닌데, 지나친 추측을 해서 장례까지 치를 것을 계산하고 딴 궁리로 별의별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 지나친 추측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가 오는 날에 바깥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다가 이혼을 당했답니다. 남편이 비 오는 것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부인이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아 있느냐?’ ‘이전에 알던 어떤 여자 생각하고 앉아 있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남편이 아니라고 하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냐며 싸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지나친 추측이 지나친 결론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혼해도 좋다’, ‘네 까짓 것, 당신 없으면 못 살줄 아느냐’고 하면서 싸우고 이혼했다고 합니다. 지나친 추측으로 말할 때는 취급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나친 추측을 슬슬 풀어줘야 됩니다. 남편에게 아내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했으므로 그것을 잘 알고 지식을 따라 잘 동거하는 것을 잘 배워야 되겠습니다. 남편이라고 해서 완력으로 나간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독사 독이 오를 때에는 독사 독을 살살 빼 줘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독이 다 없어집니다.
지나친 추측과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함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자기도 속은 것입니다. 또 없어지지 않은 것을 없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 값을 받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회개 시키시려고 이렇게 자식들에게 속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회개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에 대한 합당한 징계를 내려서 그것을 회개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때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지나친 의심과 지나친 추측 때문에 불상사가 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루에 돈을 은혜로 넣어 주게 하신 것인데, 괜히 지나친 의심을 한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도록 이미 요셉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길 양식을 혜택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형제들은 자루에 돈 넣어준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돈을 자루에 넣어 주고는 그것을 올무로 해서 자기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돈을 빙자해서 자기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지나친 추측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안 하겠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가 연극을 꾸며서 자기가 자루에 돈 넣어 주어서 그것을 올무로 삼아서 종을 삼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왜 사람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의심을 합니까?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면 그런 의심을 안 해야 합니다. 그런 지
나친 추측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 섬기는 사람 같으면, 또 가짜로 섬기는 사람 같으면 물론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 하면,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지나친 추측하고 오해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괜한 추측을 많이 합니다. 자기 기분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친절하게 안 해주면 자기 미워한다고 하고, 인사 한 번 안 하면 자기가 교회에 안 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자꾸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인사 한 번 안 했다고 교회 안 나옵니다.
‘나를 그렇게 보기 싫어하는데, 내가 나가서 뭘 하겠나?’ 하면서 ‘안나가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고 목사에게 죄 안 짓게 하는 것이다’라고 혼자서 추측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목사를 위해주기 때문에, 목사가 사람을 미워하는 죄 짓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안 나가면 목사가 죄 안 짓게 하는 것이니까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 추측입니다. 한 가지 가지고서 의심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왜 나를 기도 안 시킬까?’ 합니다. ‘기도 안 시키는 것은 벌써 이건 나를 의붓아들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을 해서 그 다음엔 여러 가지를 갖다가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를 내고 마는 것입니다. 결단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없는 증거이고, 마귀의 역사입니다.
만약 믿음을 쓴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믿으면 하겠네’라고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범사에 믿는다고 하면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이다’라고 믿어야 됩니다.
요셉의 형들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루에 돈 넣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그 말을 하면서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
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까지만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알았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것은 알지 못하여 두려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루에 돈을 넣어주신 것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인데 벌로 주신 줄로 알았습니다.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을 벌로 주신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까지는 잘 얘기했는데 왜 주셨는가에 대해서는 목적이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으로 믿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괜히 의심해서 ‘우리에게 손해를 줄 것이다’ 하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 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믿는 사람은 손해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함
또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믿으면 유익이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유익되게 해주시려고 주신 것으로 믿어야 됩니다. 요셉의 형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또한 야곱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범사에 유익하게 해 주신 것을 믿었다면 문제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해주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돈도 하나님께서 넣어 주신 것이고, 시므온도 하나님께서 감옥에 두게 하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그랬으니까 또 해택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감사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할 것뿐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것과 같이 ‘믿으면 하겠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믿음으로 해야 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 하였습니다(롬 14:23). 범사에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추측하지 말고, 오해하지 말고, 범사를 믿음으로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께서 유
익하게 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현재는 잘못될 것 같아도, 시므온이 거기 지금 갇혀 있는 것이 잘못되는 것 같아도 결국 유익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손해를 주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유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지, 왜 남에게 손해를 주겠습니까? 우리도 형제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이라고 하면 남에게 손해를 주는 형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있어서 손해 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유익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을 믿고,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을 믿고, 절대 의심하지 말고, 추측하지 말고, 나쁜 결과가 올 줄로 생각하지 말고, 좋은 결과가 올 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가는데 왜 좋은 결과가 안 오겠습니까? 좋은 결과가 올 줄 알고 믿음으로 나가야 됩니다.
모든 일에 선으로 해결해야 함
불의하고 악한 일을 당해도 선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좋은 면으로 해결을 해야 됩니다. 언제든지 좋은 면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죄에 대해서, 또 마귀 역사에 대해서는 손해를 봐서는 안 됩니다. 특히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한 뜻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 유익이 됩니다. 가령 지교회를 한다고 할 때에도 ‘지교회하면 얼마나 좋은가? 서로 받들어 주고, 유대관계를 갖고 좋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교회를 개척하면 앞으로 교단에서 빼앗을 것이다. 그러니 안 빼앗길 궁리나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 악의로 생각하고 지나친 추측과 의심을 하면 일을 다 그르치게 됩니다. 지나친 추측과 의심이 사건을 그만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선하게 생각할 때에는 다 좋은 것입니다. 지교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뭐하려고 교회를 빼앗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해보자는 정신이 있는 사람이 남의 것을 왜 빼앗겠습니까? 괜히 지나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자기 죄 때문에 지나친 추측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욕심이 있으니까 지나친 추측을 해서 그 욕심에 무슨 손해가 조금 날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그 욕심만 없다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다 좋은 것입니다. 지나친 추측하지 말고,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유익하게 해줄 것을 믿는 신앙을 가질 때에는 전부 다 유익되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이요, 다 자기를 위해 주시는 것이요, 다 하나님의 일이 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선으로 해석을 하고, 악으로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으로 해석하는 것은 마귀가 망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지나친 추측, 의심, 오해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그만 일을 결단내고, 진리에서 다 떠나고, 진리 운동에 막대한 손해를 주고, 자기는 진리에 서지 못하고 비참한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우리가 모든 것을 선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선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유익하게 해주실 것을 믿고, 참으로 믿는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또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을 알리지 않는 것은 복수하는 정신이 아니고, 인정도 떠난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으로 치우치지 말고, 과거에 잘못한 것을 복수하려고 그 사람을 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만 언제나 서나가
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서 배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의를 이루는 데에 서는 것, 인정이나 복수에 치우치지 말 것, 오해하지 말 것, 추측하지 말 것, 의심하지 말 것,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믿음으로 나가면 모든 것이 다 유익된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믿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은 과거의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20년 전의 죄를 회개시키려고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또 삼 일 동안 가두어 둘 때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가두었다가 위로를 주실 때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격하게 나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엄격하게만 나가지 말고 사랑을 해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위로가 엄격한 것에 같이 할 때에 회개하고 바로 서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