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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욥기 33:1-33 계속되는 엘리후의 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계속되는 엘리후의 말
욥기 33:1-33

1그런 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2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3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4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5네가 할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6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8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9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10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11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13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14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15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16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17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19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20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21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22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와지느니라 23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찐대 24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25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26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28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29하나님
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31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2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라 33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1. 엘리후가 욥에게 자기 처지를 말함

본문 1-3절에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32장에서부터 엘리후가 욥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랜 침묵 뒤에 숙고하여 신중히 말하는 것이며 진실하게 말해주겠으니 자기의 변론에 귀를 기울여 들어달라고 합니다. 

본문 4-5절에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할 말을 다 하고 허심탄회하게 변론하자는 것입니다. 

본문 6-7절에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흙으로 지음 받은 욥과 같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욥을 강압하지 않고 아주 겸손한 태도로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2. 엘리후가 욥의 말과 신앙을 이해하지 못함

본문 8-11절에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욥이 한 말을 듣고 욥의 잘못된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욥기 9장 21절에 욥이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라고 하였고, 욥기 34장 6절에는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욥기 13장 24절에서는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들에 대하여 엘리후는 욥이 말한 내용과는 아주 다른 시각에서 욥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징계를 받을 만한 특별한 죄를 찾지 못하여, 깊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자기의 받는 모든 징계의 원인을 찾으려 겸손히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말을 했다고 하고, 또 욥이 자신을 가리켜 아무 흠도 없다고 말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오해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욥의 말들에 담긴 근본 정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여, 본 뜻과 달리 해석하고 욥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말을 보통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아가 정죄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욥은 그러한 오해가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2절에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주권의 역사 앞에서 사람이 감히 무어라 변론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권대로 행하시고 누구에게도 그 행하시는 것을 진술하지 않는 분이시므로, 욥이 하나님께 고난 받는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고난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변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사람을 교훈하시는 방법

구약시대에 교훈하신 방법

본문 14절에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께서 모든 행하시는 일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알리지 않으시나 특별한 경우에는 당신의 뜻을 한, 두 번 계시를 해주신 다음에 성경대로 행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시를
다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 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셨고 또 사람의 귀에 음성으로 말씀해 주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계시 방법입니다.

신약시대에 교훈하신 방법

1) 예수님 재림 이후로 특별 계시는 끝이 남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계시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시대의 방법은 구약시대부터 사도시대까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다 기록해주셨기 때문에 그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던 구약시대의 꿈이나 환상, 음성, 비의적 현상, 우림과 둠밈 등의 여러 가지 특별 계시 방법은 예
수님 때까지 내려오다가 사도시대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기록된 성경을 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지 않으십니다. 

2) 오늘날 비의적 현상은 성경대로 판단해야 함

그러나 요새도 꿈이나 환상, 음성으로 계시를 주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준이 아닙니다. 때로 마귀가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생각하던 것이 밤에 꿈으로 나타나거나 음성으로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나 환상, 음성 등이 만약 성경에 딱 맞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문제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전화로 우리 교회 극동 방송 설교를 듣고 나를 안다며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뭘 알고 싶으냐고 하였더니 자기는 방배동 총회 신학생인데 요새도 진동의 은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진동이나 방언, 꿈이나 음성을 듣는 것, 또 환상이 오는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 있고, 둘째 자기가 배워서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셋째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도 있을 수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경우는 성경에 맞아야 하고, 성경에 맞다 할지라도 그것을 좋아하지 말고 성경말씀만 따라가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 자기들끼리 많은 변론을 하다가 나한테 물어본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 것들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꿈을 따르거나 진동하는 것, 방언이나 환상, 음성을 들으려고 따라가면 잘못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 그런 것이 있었더라도, 그러한 것이 없었던 것같이 여기며 말씀만 따라가야 합니다. 보통 꿈은 제 꿈 아니면 개꿈입니다. 꿈이 딱딱 맞아도 다 집어치워야 합니다. 주사야몽(晝思夜夢)으로, 낮에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밤에 꿈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기도원과 신학교 짓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신학교와 기도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가졌는데, 며칠 전 밤에 큰 집 두채가 마주 보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주사야몽인 것입니다. 낮에 생각하던 것이 밤에 꿈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낮에 생각을 했더니 밤에 그런 꿈을 꾸었나보다’하고 하나님 말씀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는데 구약시대에는 꿈이나 음성, 환상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셨지만, 신약시대에는 그렇게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전부 다 기록이 되었으므로, 성경을 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계획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 가심

본문 16절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인은 치는 것처럼 심령 속에 인이 박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꾀를 많이 베푼다고 해도 그 꾀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꾀를 내고 계획을 세워서 그대로 일이 되게 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일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획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교만도 버려야 하는데, 자기가 뭘 하는 줄로 알면 안 됩니다.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될 것 같아서 자기가 꾀를 내어 밀고나가도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되는 것이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그저 순종하는 정신과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계획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13-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계획을 잘 세웠더라도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불러 가시면 내가 세운 계획대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할머니 한 분이 75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할머니가 금년 겨울을 대비하여 연탄과 쌀을 전부 다 사다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울도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불러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다 놓은 연탄과 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일 어떻게 될 지는누구도 알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날 괴로움 주신 것을 족한 줄로 알고, 현재에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만사를 다 작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작정과 예정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을 전부 계획하셨습니다. 우주 창조에 대한 작정, 해와 별과 달, 춘하추동을 다 작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조를 비롯하여 모든 것, 전체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전부 작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작정해놓으신 대로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정은 사람이나 천사,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시기로 한 예정, 또 구속하시기로 한 예정, 천사를 심판하시기로 한 예정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중심으로 인간 구원, 하나님의 심판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것이지, 사람이 계획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나라의 왕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작정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이만큼 된 것도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해주셔서 된 것입니다. 나에게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고 하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예수를 믿고,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며, 선교 사업도 도와주고, 신학교 허가도 내줘서 일꾼을 많이 양성하며, 복음 전파를 도와줄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워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로 이만큼 살게 해주신 것은 그 목적이 복음 전파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사업을 밀어주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나와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좀 강하게 나가고 유능한 사람이 나와서 우리 한국이 전 세계 선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기도원을 다 철거하다가 망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절만 세워놓고 전국에 있는 기도원을 몇 개 안 남기고 많이 철거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다 없앴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시겠습니까? 나는 박 대통령이 자기 부인 말만 듣고 절간만 세우다가 망했다고 봅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은 왜 망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신학교는 가만히 놔두었는데, 전두환 대통령은 신학교를 전부 탄압하였습니다. 신학교를 다 없애라고 탄압하다가 그만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 도와주는 것에 중점을 두며 살아야 함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 도와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살면 잘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로 행하면 잘될 것이고, 하나님께 바로 하지 못하면 나라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복을 받도록 행하였으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잘못하였으면 가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바로 하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선교 사업과 신학교를 도와주고, 기도원도 도와주면서 하나님의 일이 잘되게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신학교하지 말아라. 기도원도 하지 말고 다 철거해라. 선교 사업하는 것도 하지 말아라’고 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나와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얼마 가지 못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교회 복음 전도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만큼 한국을 세워주셨는데, 그 일을 못하게 만들면 그런 대통령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하여간 앞으로 우리가 복음 전도하는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관련한 여러 가지 일들을 잘해나가야겠습니다. 기도도 다 같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을 다하고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원도 짓고, 신학교도 지어서 신학생이 많이 오게 해야 되겠습니다. 또 남, 북 통일이 되면 우리 교단에서 교역자를 한 백 명은 북쪽으로 들여보내야 하는데, 지금 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습니다. 교역자를 많이 길러야 되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워놓으셨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잘되도록 어떻게든 우리가 협조하고 받들어나가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 해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 가면 ‘잘하였도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택한 백성을 다 건져내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드리고 가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것입니다. 

이북에도 복음 전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지금 공산권이 문을 열어서 각 나라, 여러 지역으로 교회가 들어가고 있는데, 이북에만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월남에도 교회가 들어갔고, 중국에도 들어갔습니다. 저, 동부권에도 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북에만 못 들어가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열어놓으셨습니다. 과거에 이북에 교회가 많았고 성도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만 못 들어가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반드시 이북에 교회가 서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또 이북의 많은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셔서 믿게 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 믿습니다. 우리가 조금 있으면 이북에 일꾼을 보내고 그들을 후원해서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 전체로 생각하면 교역자를 약 삼천 명은 들여보내야 합니다. 또 거기서 제대로 일할 만한 사람을 들여보내야지, 가서 잘못하면 쓸데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모든 일이 사람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을 믿고 나가야겠습니다. 인간의 교만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준비와 순종을 하여야겠습니다. 또 인간의 꾀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대로, 문을 열어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받들어나가는 정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징계로 교훈하심

본문 18절에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9-22절에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뼈가 늘 쿡쿡 쑤시는 징계를 받는 사람도 있고 거의 다 죽게 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대속적 구원을 찬송함

본문 23-24절에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찐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는 라는 것은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천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해석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뜻입니다. 또 대속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그 사람에게 입혀주심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징계를 받아 거의 다 죽게 됐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 바르고 정당한 길을 걸어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속의 공로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멸망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 사람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오실 구속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것을 말하였습니다.

징계가 임할 때에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며,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고 나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내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먼저 영혼을 구해주시고, 육신도 건져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무튼 그 사람이 십자가의 대속을 바라보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대속자의 구속을 기초로 그 사람을 용서해주십니다. 회개하는 것을 들어주시고 소년 때와 같이 회복시켜주시며 하나님의 얼굴을 즐거이보게 해주십니다. 또 의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징계 받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도다”라고 했고, 잠언 29장 1절에는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징계를 받을 때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죄를 찾아서 회개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불순종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의 계획대로 하려고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무(無)요 공(空)이 되어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겸손히 자기 죄를 찾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건성으로 왔다 갔다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징계가 임할 때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용서해주십니다. 또 소년 때를 회복시켜주시며, 의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리고 자기 얼굴을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보게 해주십니다.

본문 27-28절에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찬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29-30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도 재삼 가르쳐주시고, 징계도 계시의 말씀도 재삼 가르쳐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영혼을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셔서 처음 믿음, 처음 은혜 가운데로 다시 인도하시며 생명의 빛으로 인도해주시려고 재삼 말씀과 징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5. 엘리후가 욥에게 잠잠하여 말을 들으라고 함

본문 32절에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말을 해도 이 사람과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엘리후가 하는 말들은 진리이긴 하나 보편적인 진리여서 욥이 처한 특수한 처지에는 맞지 않습니다.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보편적인 원리로 따지면서 욥에게 자꾸 말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진리를 가지고 그 안에서 믿는 사람의 신앙 세계는 보통 정도로 믿는 사람이 아무리 따지고 물어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바른 진리를 받은 사람은 끝까지 그 진리를 붙들고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하고 정죄해도 그냥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진리를 양보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욥이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욥은 끝까지 참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욥을 반대하는 친구들도 믿는 사람들이고 엘리후도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보편적인 진리만 깨닫고 있어서 깊은 진리 안에 서있는 욥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욥은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끝까지 바르게 나가고자 하며, 자기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에서도 잘 참으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의 신앙입니다.

욥기 32:1-22 엘리후의 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엘리후의 말
욥기 32:1-22

1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6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7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8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9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10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1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
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12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찌니라 14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15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16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18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19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20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22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1. 엘리후가 참고 있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함

엘리후가 연로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기다림

본문 1-5절에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전(前) 장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순종한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순종만 하면 됩니다. 순종만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순종하는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고난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다고 성내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을 잘 순종해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으로 그 사람에게 채워주십니다. 

본문 6-7절에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연로한 사람이 말을 다 할 때까지 잘 참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인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입니다. 

연장자가 말을 할 때에 젊은 사람은 끝까지 듣고 있다가 연장자가 말을 마치면 자기 말을 해야 합니다. 연장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기 생각대로 말해버리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말한 것이 나이 많은 사람이 한 말과 같겠습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지혜도 더 많으니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욥기 12장 12절에 “늙은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늙은 사람이 더 지혜가 있습니다. 엘리후가 이것을 알고 나이 많은 사람이 말을 할 때까지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지 않고 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며 자세히 들은 것입니다. 

본문 11-12절에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귀를 기울였고, 기다렸고, 자세히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자세히 들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잠언 18장 13절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사연을 바로 안 다음에 답변하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하여 다른 사람이 말할 시간을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연도 바로 안 다음에 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또 나이가 많다고 자기 생각대로만 얘기하며 상대방의 말은 끊는 사람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엘리후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되다가 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어두운데서 헤매는 자이며 흑암에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또 자세히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잘 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다른 사람들의 흥망성쇠를 다 보고 산 사람입니다. 성경도 10년을 연구한 사람보다 20년을 연구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 것이고, 40년을 연구한 사람은 더욱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이 많은 사람이 오랜 경험과 여러 사람의 흥망을 살펴보고 경험하면서 몇 십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에 젊은 사람이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보통은 노인의 총명이 깊지만 예외도 있음

본문 8-9절에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노인과 장수하는 자가 더 지혜가 있고 모든 면에서 낫지만 그러나 전부 그렇지는 않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심령이 있다는 말은 성령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계시므로 젊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자의 기운을 그 사람에게 주셨기 때문에 젊은 사람도 깨닫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통은 젊은 사람과 노인을 비교하면 노인이 낫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모를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젊은 사람에게 그것을 알도록 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2. 엘리후가 세 친구의 말보다 더 나은 말을 하겠다고 함

본문 10-13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 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기 속에도 계시며 자신에게 총명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참고 있다가 이제는 말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세 친구는 말로 욥을 이기지 못하나 자기는 젊었어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욥을 이길 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33장 19-22절에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는 말을 잘하여 욥의 세 친구처럼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엘리후가 잘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엘리후는 지금 세 친구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 친구의 말은 욥에게 합당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엘리후도 자기는 잘한다고 했어도, 결국 욥에게 바른 말을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바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3. 엘리후가 할 말이 많다고 함

본문 15-20절에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안하니까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속에서 자꾸 자기 의견이 나와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음이 마치 봉한 새 포도주처럼 계속 올라오고 가죽부대가 터질 것처럼 나온다는 것입니다. 

4. 엘리후가 아첨하지 않는다고 함

엘리후가 욥을 향해 자신의 신앙 정도에서 말함

본문 21-22절에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자기는 절대 아첨을 하지 않고 바른 말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속으로 참으려고 하였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서워서 자기의 할 말을 못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첨하지 못한다. 사람의 낯을 보지 않는다. 나이 많은 사람의 말을 들어도 결국은 시원치 않다. 부득불 자기가 말할 수밖에 없어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엘리후가 자기 신앙의 정도에서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엘리후의 신앙으로는 욥의 깊은 신앙 세계를 알 수 없음

그러나 엘리후의 말은 욥의 신앙 정도로 볼 때에 바른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욥에게 괴로움을 주는 말입니다. 그가 참으려다가 속에서 나와 할 수 없이 얘기한다고 했지만, 기껏 이야기한 것이 ‘욥이 병상에서 고통 받는 것은 징계를 받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엘리후는 굉장한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자기가 제일 옳게 말하는 것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그 말은 엘리후 자신에게는 합당한 말이지만 욥에게는 합당치 않은 말입니다. 

높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과 얕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과는 신앙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얕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이 높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을 볼 때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므로 잘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아브라함이 독자(獨子)를 바치는 것을 보면서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 모세가 애굽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 한 것을 보고도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그가 공주의 아들이라는 높은 지위와 재산과 향락을 다 내버리고 떠난 것을 볼 때에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의 외삼촌이 장로인데, 조카가 평양 신학교에 간다고 하였을 때 그 외삼촌이 “할 짓이 없어서 목사가 되겠다고 거기를 가느냐?”고 하였답니다. 그 장로는 돈도 많고 사는 것이 괜찮았던 모양인데, 자기 조카가 신학교에 간다고 하자 세상에서 잘 살지, 뭐 하러 고생을 하느냐고 나온 것입니다. 목사 일은 고난이 많습니다. 미국 LA의 한 교회에서는 당회를 한 번 하려면 목사가 혈압이 올라 그 예방으로 청심환 2알을 미리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목사를 얼마나 못살게 하면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그 외삼촌은 조카에게 목사를 하지 말라고 나왔던 것입니다. 장로의 정도가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정도가 어린 자는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것이며, 먼저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구제를 받는 것이 복이고 도움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으로 볼 때에는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신앙이 얕은 사람은 받고 기뻐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은 주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실 때에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근심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이것은 다 신앙 정도의 차이인 것입니다. 

잠언 30장 8절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부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을까봐 부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가난하게 되면 도둑질을 하여 하나님께 욕이 돌아 갈까봐 가난하게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날, 그날 먹을 것만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 사람 신앙에는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풍성할 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고 배부를 때도 있고 굶주릴 때도 있는데, 그 모든 가운데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정도에서는 잠언의 기자와 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많이 주셔도 거기에서 신앙을 잘 지키고, 아무리 없어도 거기에서 신앙을 잘 지켰습니다.
잠언 30장의 사람은 많이 주면 신앙을 배반하고, 적게 주면 도둑질을 하니까 필요한 양식으로 채워달라는 것이 그 신앙의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신앙의 정도대로, 자기 신앙의 척도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 엘리후도 자기의 신앙 정도대로만 판단한 것입니다. 욥의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 깨닫지 못하고 자기 신앙 정도로 나간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양심, 자기의 생각대로 말한 것입니다. 또 양심대로 한다고 다 바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양심이 바로 된 것입니다. 양심대로 하려고 사람을 죽이고, 양심대로 하려고 제사를 하고, 양심대로 하려고 별 짓을 다 하는데, 성경에 순종한 양심이 바른 양심인 것입니다. 엘리후처럼 자기 판단이 다 옳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서너 살 된 어린 아이가 친구들과 놀다가 “친구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다”고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 말대로 친구가 그 아이의 집에서 밥을 먹었고 아이는 양심대로 말한 것이지 아첨하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을 통해서 그 친구는 밥이나 얻어 먹으러 다니는 아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대로 했다고 다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맞는 말이 바른 말임

바른 말이라도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실상 바른 말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잠언 30장의 기도는 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본인은 바른 말만 한다고 하지만, 돌아다니며 사건만 일으키고 남의 속만 상하게
만들며 일에 방해만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일에 손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은혜 받지 못하게 말하고는 그것을 바른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일에 손해를 주는 일만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은 바른 말이 아닌 것입니다. 엘리후가 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의 신앙 정도와 욥의 정도는 천지 차이입니다. 그래서 그가 욥을 정죄하며 욥을 이긴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오지만 욥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욥이 이겼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얕은 신앙을 가지고 ‘내가 바른 말을 한다. 양심대로 말한다. 아첨하지 않는다. 사람의 낯을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말은 자기 속에서 참을 수 없이 나오는 하나님의 말이라고 하지만,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맞는 말만 바른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복종한 양심만 바른 양심입니다. 아무리 바른 말 같아도 성경에 맞지 않으면 바른 말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를 성경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무슨 문제가 생길 때에는 주위에서 바른 말이라고 하며 해주는 말을 듣지 말고, 먼저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바른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에 따라, 그 정도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요새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역자를 자주 이전하지 말아라. 한 교회에 오래 둬야지, 교회가 좀 되려고 하는데 이전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시험이 들어오고 교인이 많이 떨어지는데, 그래도 오래 있어야 하는지, 교인 절반이 떨어져도 부목사를 두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를 위해 있나, 목사가 교회를 위해 있나 생각해보고 교회가 시험에 들고 교인이 떨어지면 목사가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면 옮기는 것이 옳다는 것도 바른 말이고, 옮기지 않고 오래 둬야 한다는 것도 바른 말입니다. 둘 다 바른 말이지만, 어떤 바른 말이 옳은 말이 될 것인지는 경우가 다 다르고 정도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