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요나서강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요나서강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8월 12일 토요일

요나 4:1-11 생명 살리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생명 살리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
요나 4:1-11

1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더라 5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1. 요나의 노와 불평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날 때에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함

본문 1-2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했다고 하였습니다.

왜 싫어하고 노했습니까? 요나서 3장 10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려고 하시다가 용서해주셨습니다.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와 구원의 역사가 니느웨에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그 구원 역사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요나가 싫어하고 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가 나타날 때에 같이 기뻐하고 같이 즐거워해야 하겠는데,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노한 것은 마귀의 시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났
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니느웨가 멸망할 것인데, 그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으며 바로 설 때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싫어하고 노하였습니다.

요나는 40일 후에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었습니다. 40일 후에는 이 성이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굵은 베를 입고 금식을 하며 재에 내려앉아서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백성으로 시작해서 왕과 온 짐승들까지 금식을 하고 베를 입고 재에 앉아 부르짖었습니다. 또 악한 길에서 떠났습니다. 요나서 3장 8절을 보면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할 때에 악한 길에서 떠나면서 회개해야 하고,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악한 길을 걸어가면서,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을 하면서 회개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또 자기를 낮추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을 했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자기 죄를 찾아서 회개하며, 또 자기를 낮추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재에 앉아 부르짖었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면서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께 겸비하는 기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온 도시가 합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에 니느웨 도시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가 나타나면 하나가 안 됩니다. 자기가 옳다고 할 때에 하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할 때에 하나가 됩니다. 부족하다, 죄인이다, 잘못했다, 서로가 다 잘못했다고 할 때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잘했는데,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자기를 부인하며 낮아져야 합니다. 이럴 때에 전체가 다 하나가 되어서 그 뜻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에까지 상달하는, 그런 합심하는 신앙 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40일 후에 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했을 때에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이 반드시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또 하나님의 종이 그 말씀을 가르쳐줄 때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대로 믿어야지, 그대로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망한다 하면 망할 줄 알아야 하고, 40일 이후에 무너지리라 하면 무너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무너진다는 것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깨달았을 때 망하지 않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도망치는 것입니다. 니느웨가 망하겠으니, 무너질 것이니 도망쳐 나가면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치면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앙은 도망쳐도 따라옵니다. 그 도시 때문에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멸망시키려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도망치면 따라옵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유다 사람들이 애굽으로 도망쳐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쳤지만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애굽까지 따라와서 다 멸망시킨다고 하였습니다. 도망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회개하고, 자기가 죄인인 줄 알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힘써 부르짖는 생활이 사는 길입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힘써 부르짖어야 합니다.

요나가 시험에 들어 자기 중심이 됨

그런데 이와 같이 큰 구원이 이루어졌는데, 거기에 마귀가 들어왔습니다. 큰 구원이 이루어질 때 언제든지 마귀가 들어옵니다. 다 같이 즐거워하며 다 같이 기뻐 뛰어야 하겠는데, 마귀가 들어왔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따지며 자기 생명을 취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4절에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왜 죽여 달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해주셔서 다들 기뻐하는데, 자기만 죽긴 왜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요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살리신 것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죽었어야 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산 것 때문에 자신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망해야 하겠는데, 망하지 않고 살았으니 자신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40일 후에 니느웨가 망한다고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대로 안 됐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낯짝으로 돌아다니겠습니까? 자기가 말한 대로 안 되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 볼 면목도 없고 무슨 말을 해도 주위에서 믿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확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나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 명예 영광중심입니다. 자기가 해야겠다는 생각, 자기를 세워나가려는 마음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어온 것입니다. 언제나 목표가 잘못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일을 세워나가는 데에 목표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목표를 두고, 하나님의 일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잘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목표를 두어야지, 자기가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목표를 두어, 하나님의 구원 운동이 잘되면 참 감사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운동이 잘되는 것에 목표를 두면 자기가 낮아집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세례요한은 뭐라고 하였습니까?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큰 구원 운동이 나타날 때에 다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마귀 시험에 들면 안 되겠습니다. 요나가 시험에 든 것처럼, 그런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날 때에 다 같이 기뻐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만 잘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높아지는 것만 배우지 말고, 낮아지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는 하면 안 됩니다. 죽여 달라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이렇게 안 해주시려면 죽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기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시켜먹으려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주인의 위치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여 달라는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나아가지 말고 예수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운동 중심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2. 니느웨 성을 바라보는 요나

본문 5절에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요나가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려는지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면으로 보면 니느웨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 또 다르게는 그것을 알면서도 니느웨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 니느웨 성이 망해서 자기 위신이 서기를 바라며, 니느웨와 짝한 사람들, 즉 원수가 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망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어도, 아직 자기가 너무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강해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이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주 악한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며 자기 위신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의 뜻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만 생각해야 믿음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요나를 박넝쿨로 교훈하심

요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고 고난을 주심

본문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자라나게 하셔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셨습니다. 서늘하게 해주셨습니다. 중동 지방이 매우 더운 곳인데, 그 사막 땡볕에서 성을 바라보려니 얼마나 더웠겠습니까? 그런데 박넝쿨이 머리 위에 나서 그 잎사귀로 해를 가리어주니 서늘해서 좋습니다. 요나가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면서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은총을 풍성히 베풀어 뜨거움을 면하게 해주시고 시원하게 해주시며 평안하게 해주시고 위로해주실 때에 기뻐하는 데에만 그치면 안 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나는 시원하다고 해서 기뻐하는 마음만 가졌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기뻐하는 마음에서 나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발전하여야 합니다. 내가 심은 것도 아니고 내가 자라나게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주셨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설사 자기가 심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잘 자라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잘해주실 때에 기뻐만 하지 말고 감사할 줄 알고, 또 불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무성한 박넝쿨 잎사귀 사이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그 빛이 들어오는 것 때문에 불만을 가지면 안 됩니다. 큰 것을 받았는데, 작은 고난이 온다고 하여 원망하고 불만을 품으면 안 됩니다. 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큰 것을 생각하고, 작은 것은 잘 참고 나가야 합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지 말고, 작은 괴로움이 와도 큰 것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며 찬송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셨는데, 그 아이가 조금 괴롭게 한다고 매일 같이 불평, 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소를 주신 것이 큰 것인데, 소가 그 자리를 더럽히고 냄새를 피우고, 또 파리가 끓는다고 하며 불평하면 안 됩니다. 잠언 14장 4절에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힘이 들어도 소 먹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실 때에 작은 고난이 따라옵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것처럼, 사람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그림자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림자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요새 유럽에서는 결혼을 안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결혼 생활하는 것도 하기 전보다 고생이 많습니다. 여자는 남자 짐 하나 맡아놓은 것이고, 남자는 여자 짐 하나 맡아놓은 것입니다. 짐을 안 지고 혼자 가는 것이 홀가분한데, 하나 맡아놓으면 서로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나 자연 은총에 대한 축복은 반드시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처럼 그만한 고난이 따라옵니다. 그때에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지 말고, 큰 것에 작은 것은 덤으로 오는 줄로 알면 됩니다. 따라오는 그림자를 죽이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떼어 내버리려고 해도 못 떼 내버립니다.
그림자와 싸우다가는 자기가 속상해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그림자는 안 떨어져나갑니다. 소를 사면 소가 오줌과 똥을 싸고 먹이를 달라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됩니다. 그것 때문에 소를 때리면 소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로 나가지 말고, 니느웨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죽을 고에 빠졌었는데 하나님께서 박넝쿨로 인해 나를 살려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니,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총을 베풀어서 그들을 살려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죽을 고에 빠진, 사지에 빠진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시원하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건져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기뻐해야 합니다. 내게도 이렇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자연 만물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깨닫고, 뜨거워 죽을 지경을 당한 사람들에게 시원한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자기 혼자 평안하다, 좋다 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면 좋겠다는 마음, 또 그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좋겠다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이기주의로 나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위로와 구원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주신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에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며, 고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야 함

본문 7절에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벌레가 박넝쿨을 씹어서 넝쿨이 잘라졌는데, 거기에 동풍까지 불어서 바짝 마르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이렇게 고난이 올 때에 한꺼번에 겹쳐서 옵니다. 시험이 올 때도 겹쳐서 오고, 고난이 올 때도 겹쳐서 옵니다. 한 가지만 오면 어느 정도 헤어나갈 수 있겠는데, 더 큰 것이 덮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개, 세 개가 올까 하지 말고, 한 가지가 오면 두 가지가 올 줄 알았다 하십시오. 두 가지가 올 때는 세 가지가 올 줄 알았다고 여기면 됩니다. 여러가지가 겹쳐서 올 때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보통 그렇게 오는 줄로 알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해가 쨍쨍 쬐므로 급기야 요나가 힘들어 죽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고난이 들어와서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나이고, 또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요나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들어올 때에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 역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에 부모님들이 책망도 하고 매도 때리는데, 그때 아이들이 죽으면 좋겠다, 죽여 달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얼마나 불효자입니까? 사랑으로 때리는 것이고 바로 세우려고 때리는 것이고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때리는 것이지, 죽이려고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이 올 때에 아무리 죽을 지경을 당했어도 거기서 죽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은 접어 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고난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을 주려 하시는 것이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그 고난은 깨닫게 하시고 바로 세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들어올 때에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언제나 책임과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또 원망하면 안 됩니다. 원망하다 보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요나도 고난이 들어올 때에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았어야 합니다. 처음에 본문 3절에서 죽여 달라고 기도한 것은 니느웨가 망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8절에서 죽여 달라고 한 것은 자기에게 고난이 오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받는 고난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기를 원한 것이 잘못된 것이고, 성 동편으로 나간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하여간 고난당하는 것은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인 줄 알면 됩니다. 요나가 일 처리와 행동을 잘못하였습니다. 또 초막도 잘못 지었습니다. 사막 지대에 초막을 지으려면 초막의 옆을 다 없애고 위만 지어서 바람이 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련하게 천막을 쳤습니다. 사막에 천막을 쳐놓으면 한증막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경우에 일 처리를 잘못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좋겠다는 말이나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곤고하고 혼비할 때, 죽게 되었을 때에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고 회개하여 바로 서서 잘못된 것들을 고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이 들어올 때 행동을 고치고 마음을 고쳐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는 것과 모든 태도를 고쳐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고난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거두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깨우쳐주십니다.

살리는 것이 중요함

본문 9-11절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신용 잃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고 크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말한 대로 안 되어 자기의 위신이 떨어졌다고 성이 나서 죽으려 하였습니다. 또 자기를 위하여 박넝쿨을 아낀 순전한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아끼십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이만여 명은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범죄를 짓기 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이들도 물론 다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기 때문에, 아직 철이 없어서 나쁜 짓한 것이 별로 없는데, 어른들의 죄 때문에 같이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니느웨 성에 악한 일한 것이 별로 없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이만여 명이 있고 육축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요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 살리는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겠다’는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생명을 살려나가는 주님의 구원 운동을 흥왕케 하여야 겠다는 생각으로, 넓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사람을 살리는 생명 운동, 구원 운동에 참여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요나 3:1-10 요나의 사명과 니느웨의 구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요나의 사명과 니느웨의 구원
요나 3:1-10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4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6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7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함

본문 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악
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했으므로 일어나 외치라는 말씀(욘 1:1-2)에 이어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선포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몸과 마음과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서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고, 시키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하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건져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기도하므로 여호와께서 그 물
고기에게 명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에 요나는 서원한 것이 있기 때문에 건져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기쁘게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삼 일을 걸어가야 반대편에 닿을 수 있을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80리를 걸을 수 있다고 하면, 삼 일 길은 240리입니다. 서울에서 인천이 100리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해볼 때 당시에 직경으로 삼 일 길을 갈 만큼 큰 도시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도하면서 온 성읍을 돌아다니는데, 삼 일이 걸린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2. 요나의 전도와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

본문 4절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으로 전도하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때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여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또 그 소문을 들은 니느웨 왕이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요나서 4장 11절을 보면 그 성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아이들이 십이만여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이를 2명씩만 낳았다고 해도 어른들이 육 만이면 아이들은 이십만 명인 것으로 어림잡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 5-8절에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말씀을 전했는데, 이것은 사형 선고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를 뜻하는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왕도 보좌에서 내려와 굵은 베를 입고 비천한 자리를 의미하는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 모두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물도 마시지 말 것과 굵은 베를 입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각기 악한 일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공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악한 일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몸이 악한 일과 강포에서 떠나야 합니다.

요나가 한 번 가서 전도했는데 큰 열매가 맺혔습니다. 많은 말이 아니라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으로 전도했는데, 큰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짐승까지 금식하게 하고, 베옷을 입게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악한 일과 강포에서 떠나는 큰 역사가 일어날 줄은 요나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요나는 회개해야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사십 일이면 니느웨가 무너져 망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한 사람의 전도, 한 마디의 말씀이 이렇게 큰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이 한 마디를 전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회개하지 못하고 모두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그 말씀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정신이 아찔했을 것이고, 백성을 통해 그 말씀을 전해들은 왕도 크게 놀라서 금식하고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셔서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왕까지 전부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했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람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종 살이하던 한 여자 아이의 한 마디를 듣고 군대 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이 나은 후에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략할 뻔했을 때 그 아이로 인해 공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파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가 아주 큰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우편에 서신 것, 하늘이 열린 것, 원수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옆의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때부터 회개할 마음이 일어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것이 외부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모든 감독과 총독들에게 전도했을 때에도 당시에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아그립바 왕이나 베니게나 벨릭스나 베스도 같은 사람들이 그 말로 인해서 회개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지만 그 후에 헤롯 왕과 그 아내된 여자가 회개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만 전해놓으면,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여 어떤 열매가 맺힐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요나의 전도는 힘이 있는 전도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되었을 때, 거기서 진정한 회개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와 같이 진정한 회개를 하고 나온 사람, 생명을 내어놓고 나가는 사람, 몸 바쳐서 죽도록 충성하는 전도자에게 힘이 있습니다. 사선을 넘는 기도를 한 요나는 회개하고 서원하고 나온 강한 전도자입니다. 이런 전도자가 가서 전도하니까 하나님의 만능이 역사하여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받아야 합니다. ‘니느웨가 어떻게 무너지겠는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무너진다고 하셨기 때문에 무너질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노아는 물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배를 높은 곳에 가서 지어도 그것이 뜬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뜰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각산 꼭대기에 가서 배를 지으면 그것이 뜬다’라고 말씀하시면 뜰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백두산, 에베레스트 산 위에 지으라고 하셔도 뜰 것을 믿고 짓는 것입니다. 구십구 세가 된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면 될 것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죄를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들이 회개할 때 금식하며 물도 마시지 않고, 짐승까지도 굵은 베옷을 입히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습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보면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본래 손으로 강포를 행해서 다른 사람을 압제하고 핍박하고 괴롭히며, 빼앗고 죽이는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낮아졌습니다. 어떻게 낮아졌습니까? 왕이 보좌를 내어놓고 조복을 벗고 베옷을 입으며 재에 앉았습니다. 삼 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짐승까지 굵은 베를 입혔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죄인인 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타내어야 합니다. 양심을 똑바로 써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기도해도 되지 않습니다. 바로 하면서, 바로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의 죄는 심판하지 않으시지만, 그것들이 사람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낮아지면 짐승도 낮아져야 합니다. 주인이 죄로 인해 망하게 되면 짐승도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짐승도 베옷을 입히고 낮아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한 것입니다.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죄를 자신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내며,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성경을 배우지 못한 니느웨 사람들이지만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고 멸망치 않게 해주시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믿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 

본문 10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하는 것과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간 것, 니느웨에서 전도한 것,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서 낮아지고 회개한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이렇게 회개했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과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하나님께서 멸망치 않게 해주실 것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망할 것이라고 선고하셨던 자 들을 용서하시는 것 모두가 큰 역사입니다. 

우리도 요나와 같이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회개하고 겸비하여 말씀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 2:1-10 회개하고 바로 서면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계약신학

회개하고 바로 서면 구원해주시는 하나님
요나 2:1-10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스올에 빠짐

본문 1-2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
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물에 회개하면서 빠진 것입니다. 그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 벌써 회개가 되었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진정한 회개를 하는 기간을 가진 것입니다. 삼 일 삼 야의 회개하는 기간을 가진 것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라고 하였는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니 고난이 많았을 것입니다. ‘스올’이라는 것은 무덤, 죽음의 상태, 죽어서 영혼이 가는 곳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한 것입니다. 스올이라고 하는 곳은 좋은 곳이 아닙니다. 무덤도 스올이라고 하였고, 죽음의 상태도 스올(Sheol, Hades: 구약 성경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거하는 곳을 가리킴)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과 같은 상태에 빠진 것을 가리킵니다. 희망이 없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그곳에서 요나가 삼 일 동안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부르짖는 기간을 가진 것입니다. 기도는 기한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한 마디를 해도 되지만, 한 마디를 하는 것보다는 기한을 정해놓고 결심하며 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 동안 기도하는 것이 낫고, 하루 동안 기도하는 것보다 삼 일 동안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기도하는 기간은 감옥에 갇혀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간 깊은 기도를 한 것도 기도하는 기한을 가진 것입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기도하면서 연구한 것도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기간과 같습니다. 또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과 욥이 독창이 나서 죽게 된 것 역시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 기도하는 기간들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지키다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당하는 때가 가끔씩 옵니다. 물론 하나님께 순종을 잘못해서 오는 것입니다. 요나도 하나님께 순종을 잘못해서 자기 중심과 이기주의,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하다가, 스올과 같은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그곳이 성소가 됨

그런데 그 기간에 주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거기가 성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당장에는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것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거기가 성소가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1장 16절에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열국에 흩어서 열국의 뱃속에 들어가 나올 수 없는 상태에 있지만,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거기로 성소가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기 뱃속이 성소가 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2. 깊은 물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함

본문 3절에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는 주께서 바다 속으로 던지신 것을 믿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안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는 자신이 깊은 바다 속에 던져진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았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이 주님의 목전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하며 소망을 가졌습니다. 고기 뱃속에 있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해서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시키고 바로 세워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할 일을 시키시려고,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고기 뱃속, 스올 속에 있는 것같이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 있을지라도 소망이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요
나는 성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본문 5절에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혼까지 하였사오며’라는 것은 마음속에까지 물이 들어온 것 같다는 뜻입니다. 또 고기가 바다 풀 속에 있으니까 바다풀이 자기 머리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3. 절망 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확신하고 기도함

본문 6절에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는 것은 아주 깊은 바다에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땅이 빗장으로 오래 막아서 나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문을 잠그고 빗장으로 질러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렇게 땅이 깊음 속에 요나를 던지고 빗장을 막아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에 돌을 굴려놓고 거기에 인지를 붙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오지 못하게 빗장으로 잠가놓았지만 거기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구덩이에서도 건져주실 수 있으십니다.

본문 7절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기 뱃속에 있을 때가 피곤한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기 뱃속에서 하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평안할 때 하는 것보다 이런 죽을 고비에 빠져서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는 지경에 빠졌을 때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있고,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상달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이 생명을 내어놓고 하는 기도입니다. 고기 뱃속에서 생명을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므로 주의 성전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고기 뱃속에서 하는 기도는 생명을 내어놓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일심정력을 다해서 기도하므로 주의 성전에 그 기도가 미쳤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라고 하였습니다. ‘거짓되고’라는 것은 비진리이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라는 것은 도망치고자 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도망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였는데, 이제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한 배은망덕한 자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면 순종해야 하겠는데,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에 가야 하겠는데, 가라는 곳에 안 가고 가지 말라는 곳에는 가는,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린 사람,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에 가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입니다. 또 자기 생각대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배은망덕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그 은혜를 배반하고 버린 사람이라고 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한 회개를 했습니까?

본문 9절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서원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기 뱃속에서 건져주시면 어디든지 가고, 무엇이든지 하고, 죽도록 충성하며,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서원했을 것 같습니다.
야곱에게 3가지 서원한 것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28장 21-22절에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평안히 돌아가게 해주시면 첫째는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셋째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몸 바쳐서 생명을 내놓고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여기서 다 죽은 것과 같게 되었으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이 목숨 다 하나님께 바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하고 최후의 서약을 하였습니다. 죽을 때에 하는 서약과 같습니다. ‘살려주시면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서원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원한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살려주시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서원한 대로 지키려고 작정해야 합니다.

4. 여호와께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하심

본문 10절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물고기도 그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니느웨 앞 바다로 가도록 명령하셨고, 니느웨 앞 바다에 가서 토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겠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고, 어디든지 가라 하시면 가겠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과 무엇이든지 바치라는 것은 다 하고 생명까지 다 바치겠습니다’하고 서원을 하자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토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세상에 나오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건져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스올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과거에 도망치던 것을 회개하고, 거짓된 것 가운데로 가던 것을 회개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까 그 목소리가 상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서원을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토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소망이 되시고, 다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짐을 받은 후에는 서원한 것을 꼭 갚아야 합니다.

요나 1:1-17 요나의 도망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요나의 도망
요나 1:1-17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4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5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7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3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1. 여호와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심

본문 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하
였습니다. 요나는 주전 79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께 사무쳤기 때문에 40일 후면 멸망한다는 것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2.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선가(船價)를 주고 배에 오름

본문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욥바라는 항구로 가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선가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합법적인 수속을 마치고 배를 탔습니다.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하는 이유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니느웨로 가지 않은 이유는 3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니느웨로 가서 외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시므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40일 후에 그 성이 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서 외쳐보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면, 자신은 무시를 당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누가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고, 수치와 멸시를 당하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이 외쳐도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망하지 않게 하신다면 자기가 무시를 당하고, 인심과 신용을 잃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둘째, 니느웨의 사람들은 모두 악독이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40일 후에 망한다고 하면 그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잘된다고 해주어야 하는데, 망한다고 하면 생명에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셋째, 긍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셔서 니느웨 사람들을 살리려고 애를 쓰시는데, 요나는 긍휼이 없었습니다. 악독이 가득한 사람들은 망해야 마땅하다는, 긍휼 없는 마음과 판단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신데, 하나님의 사람인 요나는 긍휼이 없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요나가 자기 중심으로 행동하였습니다. 자기의 생긴 대로 생각하고, 자기의 된 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가서 전파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면 자신이 망신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 욕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또 죽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가 하나님 중심, 하나님 나라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하여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세례 요한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구원 운동은 잘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것이 참 선지인데, 요나는 반대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기도 흥하여야 하겠다 하거나 자기는 흥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든지 말든지 하며,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참 선지, 참 성도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쇠해지고 낮아지며,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하나님의 일만 잘되면 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당해도 하나님의 일만 잘되면 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낮아지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가 욕먹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고 하며, 자기가 잘 되려고 하면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로만 가야 함

그런데 요나가 도망치려고 욥바라는 항구로 갔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길이 열리니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길이 열리는 대로 가야지 어떻게 하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 열리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반가워서 착착 길이 열린다고 생각 하면서 뱃삯을 주고 합법적인 수속을 다 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누가 봐도 손색이 없는 상황입니다. 마침 길이 열려서 가는 것이고, 뱃삯을 내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요나가 잘못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요나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요나의 양심도 압니다.
요나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그 길로 배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길이 있다고 다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이 열렸다면 좋은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길이 열렸다면 그것은 요나의 길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길이 열릴 수 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인지 뜻에 맞지 않는 길인지 판단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길로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일이 닥치고,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망신과 수치를 당해도 그 길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길이 열린다고 다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길이 열린다고 주일에 시험을 치고, 길이 열린다고 주일에 운동회를 하고 결혼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지 순례하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누구나 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전에 무료로 성지 순례를 보내준다고 해서 많은 목사님들이 참여했는데, 다녀와서 보니 문선명 파에서 나온 돈으로 다녀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험에 들고,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길이 열리고, 오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3. 요나가 풍랑을 만남

본문 4절에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니 큰 폭풍이 왔습니다. 더 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고난을 당하여 살 길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본문 5-6절에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공들이 각각 자기의 신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배 밑층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요나를 깨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왜 잠이 들었습니까? 요나가 잠을 잘 형편입니까? 요나가 잠이 든 이유는 심령에 잠이 들어서 흑암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잠이 들면 누구나 흑암을 만나게 되어 육신 중심이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마귀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이사야 29장 10절에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고 하였습니다. 잠들게 하는 신을 보내신다고 하였는데, 요나도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는 신을 보내셔서 깊이 잠들게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안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거역하는 사람에게 잠들게 하는 신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일을 안 하고, 양심을 안 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로 가면 심령에 잠이 들고, 흑암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신앙에 잠이 오게 하는 신이 와서 낮잠에 들게 합니다. 다윗도 낮잠을 자다가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요나도 마귀의 인도를 받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신에게 구하고 있는데, 이제 요나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가는 길인데, 그 기도를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잠언 28장 9절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순종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본문 7절에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제비를 뽑게 되었는데, 요나가 그 제비를 뽑았습니다. 지금까지는 합법적으로 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너다!’라고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가 뜨끔해서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니까 풍랑이 와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뉘우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8-11절에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무리가 요나에 대해 물었고,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이에 무리가 심히 두려워하며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잔잔해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4.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

신앙 양심에 따라 자신이 큰 죄인인 줄 알아야 함

본문 12절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는 자기 죄 때문에 풍랑이 일어난 것을 깨닫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을 자인 줄로 알고,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서 요나만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배에 있던 여러 사람들에게 죄가 없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요나보다 죄가 작았다고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순종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것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죄를 범하였는데, 그 배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근본부터 잘못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죄가 요나의 죄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죄가 더 많은 사람들인데, 요나는 이 풍랑 만난 것을 그들의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가지만 너희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 양심이 아닙니다. 신앙 양심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는 것입니다. 양심을 안 쓰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고 해도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양심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보고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으니 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항상 죽을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가 자신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를 죽이면 풍랑이 잔잔해진다고 하였습니다. 공동묘지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지만 아무 말도 없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아무 말도 없는 것입니다. 풍랑을 해결하는 법은 신앙 양심으로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으니 나를 바다에 빠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6·25 사변 때 제주도에 피난 오신 많은 목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때 조사였는데, 당시 고려 신학교 교장이셨던 박 목사님께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사경회를 인도하러 오셔서 요나 1장에 대해 설교하신 것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우리 때문에 6·25 사변이 났으니 각자가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한다고 하셔서 당시 큰 은혜가 있었고 목사님들이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다 쫓겨나서 멀리까지 왔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망할 것같이 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잠을 잘 곳이 없어서 목사님들이 예배당에 짐을 놓고 잠을 자면서 그 말씀을 들었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하나님께서 UN
군을 보내주셔서 인민군을 뒤로 쫓아주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망하게 하신 것인데, 그렇게 역사해주셨습니다. 교역자와 성도들이 회개하면 폭풍과 풍랑으로 다 망하게 되었던 것에서 다시 건져주십니다.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죄 값으로 살 도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죄가 얼마나 크냐 하면 우리 몸을 다 팔아서 바쳐도 부족하고, 처와 자식과 소유를 다 팔아서 빚을 갚아도 부족합니다. 마땅히 죽을 자인데,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가다가 친구를 만났는데,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자신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는데, 그 친구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하며 옥에 가두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 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보다 나는 60만 배는 더 큰 죄를 하나님께 탕감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
니다. 사람에게 다 죄가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보다 60만 배나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 죄가 있지만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문제인 것을 알고, 자신의 들보를 봐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부터 열까지 죄를 짓는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한 가지 죄를 짓는 요나 때문에 풍랑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신을 들어 바다에 빠뜨려야 할 만큼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아직 요나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기 위해 다시스로 도망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 징계하십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서 징계하시고, 사랑하는 한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다른 사람은 죄악이 가득차도 그냥 두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한 사람을 택해서 회개시켜 사용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한 몫 쓰시려고 풍랑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3절에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빠뜨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를 저어 배를 돌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바다가 흉용해져서 요나를 빠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5. 요나가 큰 물고기에게 삼키움

하나님께서 요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가심

본문 14-17절에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나 스스로 나를 죽이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마침내 사람들이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요나가 회개를 철저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는 삼 일 삼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바다 속에 들어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비참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진정으로 회개시켜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