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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빌립보서 2:19-30 주님을 본 받은 두 사람.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주님을 본 받은 두 사람
빌립보서 2:19-30

19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21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26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29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2:19 주 예수님 안에서 디모데를 너희에게 속히 보내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나도 위로를 얻으려는 것이다. 

2:20 그와 같은 마음으로 너희의 사정을 진실하게 염려할 자가 내게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2:21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일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 

2:22 너희가 디모데의 연단을 아는 바와 같이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 복음을 위해 그가 나를 섬겼다. 

2:23 그래서 나는 나의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원하며, 

2:24 나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한다. 

2:25 나는 나의 형제이며 동역자이고 함께 군사 된 자이며, 또한 너희의 사신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자인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2:26 그가 너희 모두를 늘 사모하고 있으며, 또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너희가 들은 줄 알고 늘 근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2:27 그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나도 긍휼히 여기셔서 내가 근심 위에 근심을 갖지 않도록 하셨다. 

2:28 그러므로 내가 그를 급히 보낸 것은 너희가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고 내 근심도 덜려는 것이다. 

2:29 너희는 주님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이런 이들을 귀하게 여겨라. 

2:30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일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하였어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너희가 나를 섬기는 일에 부족한 것을 그가 보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1. 디모데의 동역
 
본문 19절-20절에,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심복이었습니다. 뜻을 같이 할 자가 또 나의 사정을 알고 너희 사정을 아는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러 사람을 길러냈지만 뜻을 같이 해서 진실히 생각할 자는 몇 사람 안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본문 21절에,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처음에는 바울과 일을 같이 했지만,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기 일을 구하면서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나, 예수’ 식입니다. 처음엔 ‘나’가 있고, 둘째는 ‘나, 예수’이고, 셋째가 ‘예수, 나’이고, 마지막이 ‘예수’
이기 때문입니다. 계단을 예로 들어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첫째 계단에는 ‘내’가 있는 자리요, 둘째 계단엔 ‘나, 예수’가 있고, 셋째 계단에는, ‘예수, 나’가 있고, 그 다음에는 나는 없어지고 ‘오직 예수’만 남는 겁니다. 처음엔 나, 나 하고 다닙니다. 내가 이렇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등 이렇게 온통 중심이 ‘나’ 인 모습이고, 그 다음엔 ‘나, 예수’ 즉, 자기 다음에 예수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중심, 자기를 내 세우고 그 다음에 예수 내세우는 겁니다. ‘나부터 살고 나서 예수다’라는 식으로, 자기 볼 장 다 보고, 예수 볼 일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셋째 계단은 조금 나은 사람인데, 예수 볼 장을 먼저 보고, 자기 볼 장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볼 장은 안 보고,예수 볼 장만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느 계단에 사람이 제일 많을 것 같습니까? 예수 생각 안 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나, 나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자기 다음에나 예수 생각 하는 둘째 계단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앞세워서 예수 위하는 일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자기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나는 없어지고, 자기 볼 장은 안 보는 넷째 계단의 사람이 많겠습니까? 믿는 사람들 중에 첫째 계단이야 없겠습니다. 그러면 둘째, 셋째, 넷째 중 어느 계단에 많을 것 같습니까? 아마, 자기 볼 장 먼저 보고 예수 볼 장 보는 사람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거의 자기 볼 장 먼저 보고, 예수 볼 장 보는 겁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런 줄 알면 됩니다. 셋째 계단으로만 넘어가도 괜찮겠습니다. 예수 볼 장 먼저 보고, 자기 볼 장 봐도 썩 괜찮은데, 그런 사람은 많지 않고, 마지막 넷째가 진짜인 것입니다. 자기 위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예수 위하는 일만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디 가느냐 하고 물으면, “예수 볼 장 보러 갑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 뭐 하고 왔어요?”물으면, “예수 위하는 일 하고 왔어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진짜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뀌어야 됩니다. 자기 볼 장 먼저 보고 예수 볼 장 보는 사람은 바꾸십시오. “예수 볼 장을 앞세워라, 내 볼 장을 뒤로 세워라”하면서 좀 나아가다가, 자기 볼 장은 없애고, 예수 볼 장 만 본다 하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이 나와야 제대로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는데 그는 같이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따라 다니던 사람인데 그레스게는 또 어디로 갔습니까? 갈라디아로 갔는데, ‘갔다’라는 표현이 아마도 바울이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간 것 같습니다. 디도는 어디로 갔습니까? 달마디아로 갔다고 합니다. 이들도 자기 볼 장 본 다음에, 예수 볼 장 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 달아났습니다. 처음에는 나와 같이 복음을 변명하던 자들이었는데 다 달아났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처음 변명할 때, 곧 복음 증거 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지금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겁니다. 데마는 세상으로 갔는데,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디도는 갔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디도인지 디도서를 지은 다른 디도인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누구만 남았습니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고,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여기 누가 하고 마가는 그래도 예수 볼 장 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예수만 남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예수 볼 장 보고, 자기 볼 장 보는데서 좀 더 나아가서 아마 예수 볼 장만 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에바브로디도와 누가도 아마 예수 볼 장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볼 장은 안 봅니다. 자기 볼 장 안 봐야 진짜입니다. 자기는 낮아지든지, 흙덩이가 되든지, 멸시를 받든지, 어떻게 되든지, 자기 볼 장 안 보고 예수 볼 장만 보는 것이 진짜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진짜 본받는 사람이됩니다. 자기 볼 장 보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성경에 어디 자기 볼 장 보라고 했습니까? 예수 볼 장만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가고, 예수님만 위하고, 예수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따라가고, 하나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위하라고 했지, 자기 위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위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4장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의 것을 가지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왜 자기를 위해 사는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를 위해 살고 다 자기를 위하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다 낙오자가 되고 뒤로 물러가고 후퇴합니다. 자기 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예수만 잘 되면 되고, 주의 일만 잘되면 그것으로 만족인데 무엇 때문에 뒤로 물러가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일만 봐야 됩니다. 다 자기 일을 구하되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아버지와 같이 받들면서 복음을 위해서 모든 고락과 모든 수고를 같이 했습니다. 수고를 수고롭다고 생각지 않고 힘든 것을 힘들다 생각지 않고 어디든지 가라면 가고, 무엇이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디모데는 아주 충성된 제자였던 것입니다. 충성된 제자가 참 중요합니다. 어디에 무슨 일이 있는데 디모데를 보내면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충성되이 하고 오는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여기 보내고 또 저기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 빌립보에도 보내지 않았나요? 그러므로 디모데와 같이 자기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만 구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이 모두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모두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만 구하는데 왜 귀히 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한번 쓰시려고 하면, 핑계를 대면서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쓰시려면 “예” 하고 가야 됩니다. 오라고 하니 “나는 소 사러 가야합니다”, 또 하나 오라고 하니 “나는 밭 사러 갑니다”, 또 하나 오라니까 나는 “장가갑니다”, 또 하나 오라니까 이번엔 뭐라고 했습니까. “소 다섯 마리샀으니 먹여서 시험해 봐야겠다”라고 했습니다. 다들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자기 볼 장 다 보는 겁니다. 

디모데는 오라 하면 예, 하고, 소도 안 사고, 밭도 안 사고, 자기 집에 소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구애 받지 않고 오는 것입니다. 가라하면 또 가는 겁니다. 이거하라 하면 이거하는 겁니다. 척척 이뤄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디모데와 같이 나서라하면 어디든지 나서고, 가라하면 어디든지 갈 때, 집의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해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다 되도록 하십니다. 소 먹여야 되겠다, 밭 사야 되겠다, 장가가야 되겠다, 뭘 해야 되겠다고 핑계를 대는데, 하나님이 가라 하는데 장가를 간다고 못 갑니까? 장가가기 전 새벽에 하나님 말씀대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밤에 결혼식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가라하면 갔다 와서 밤에 결혼식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왜 결혼식 하느라 못 가느냐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만 구하는 사람이 세상일을 하나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할 때에, 세상 일은 하나님이 다 해 주십니다.
또 할 시간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뒤에서 다른 사람이 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가면 다른 사람이 해냅니다. 큰 말이 나가면 작은 말이 큰 말 노릇 하게 되어있는 걸 알아야 합니다. 괜히 집안에 붙들고 앉아 있으니까 할 게 많지, 싹 떠나면 뒤에 사람이 다 할 수 있습니다. 왜 안하겠습니까?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 해먹게 되어 있지, 밥 해줘야 먹는다는 것은 뭡니까? 자기 식구들은 자기가 해줘야 먹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밥 안 해주면 굶는다는 건데, 정작 자기가 죽어 봐요, 죽어 가면 가만히 있던 식구들이 직접 나가서 다 해먹습니다. 아니, 쌀 있는데 굶어 죽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바보 같아도 자기가 다 해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와 같이 바울과 함께 모든 수고를 다하고, 어디든지 가고, 모든 고난을 같이 당하고, 같이 생명을 내놓고 나가는 사람이 주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바울을 통하여 진리운동을 해나가는 시대가 아닙니까? 바울을 통하여 진리운동을 해나가니 같이 받들어 나가고 같이 나가는 겁니다. 같이 고난을 받으면서 같이 연단을 받으면서 같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본문 23-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본다’는 것은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놓이게 되면 너희에게 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디모데를 보내려 하는데, 바울도 감옥에서 놓이게 되면 속히 너희에게 간다고 약속했습니다.

2. 에바브라디도의 동역

본문 25절에,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을 본받은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그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먼저 보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려 했는데 에바브로디도룰 먼저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한 연보를 가지고 바울에게로 파송을 받아서 간 빌립보교회 교인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연보를 가지고 로마 감옥의 바울에게 가서 오랫동안 바울을 잘 공경했는데, 지금 바울이 그를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라고 했는데, 함께 수고하는, 같은 교역자가 됐다는 말입니다. 바울에게 얼마동안 가 있는 동안에 같이 교역자가 된 것 같습니다.

본문 26절에, “그가 너희 무리는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 빌립보 교인들이 알면 얼마나 걱정할까 염려 했는데, 결국 빌립보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든 것을 교인들이 알게 된 것을 심히 근심했습니다. 자기 병 때문에 근심하는 것보다, 교인들이 얼마나 걱정할까 그것만 염려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아닙니까? 보통 사람은 빌립보 교회에서 여기까지 파송되어 와서 이렇게 죽게 되었는데 한 번도 안 들여다본다고 섭섭해 할 것도 같은데 에바브로디도는 그와 반대였습니다.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인들이 알고 얼마나 걱정할까 하면서 교인들을 정말로 아꼈습니다. 얼마나 교인들을 위하며, 얼마나 교인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교인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하고,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하고, 어떡하든지 자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게 하는 것이 교역자의 태도입니다. 어떤 교역자는 조금만 아파도, 약이나 사줄까 하고 아프다고 광고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교역자는 교인들에게 뭘 얻어먹을 생각, 대접 받을 생각,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교역자는 죽을지언정 대접 안 받을 생각을 해야 하고, 교인들은 어떡하든지 교역자를 대접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지언정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을 보면 그렇습니다. 죽을지언정 대접 안 받을 생각을 가졌습니다. 결심한 것입니다. 교인들은 대신에 눈이라도 빼 주려고 했고, 사도바울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된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대접 받으려 생각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폐가 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든지 대접 받으려는 생각은 다 빼내어
버려야 교역자가 제대로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든지 기대려는 생각, 교인들을 의지하려는 생각,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있으면 하나님이 쓰지 않습니다. 폐를 끼치게 되는데 쓰시겠습까? 아예 대접 안 받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잇어야 하나님이 기뻐 쓰시고, 교인들은 어찌하던지 교역자 대접하려고 애쓰고 잘 받들려고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교역자는 안 받으려고 하고, 교인들은 대접하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낫게 하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뿐만 아니라 바울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바울의 근심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근심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낫게 해주셔서, 내 근심을 하나님이 덜어주셨고, 너희 근심도 덜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나았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의 근심도 덜어 주었고, 바울의 근심도 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참 사랑이 넘치는 세계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문 28절에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병이 나은 다음에 에바브로디도를 속히 빌립보로 보냈습니다. 왜 보냈습니까? 너희 근심도 면하고 내 근심도 덜기 위함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라디도를 보고 기뻐하고 기뻐했는데, 내 근심도 던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병이 다 낫게 되었을 때 근심이 바로 다 덜어졌을 텐데, 무엇을 덜려는 것입니까. 에바브로디도가 병 든 것을 보고 바울이 근심했는데, 바울의 근심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이 근심하게 됩니다. 빌립보 교인이 근심하는 것을 바울이 또 근심합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근심할까 하면서, 이제는 병이 나았기 때문에 빨리 보내면 빌립보 교인들의 근심이 없어져 기뻐할 것이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염려도 다 없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 교회입니다. 근심을 덜려고 빨리 보낸다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존귀히 여기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는 사람, 그런 교회가 되어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대접 안 받으려는 생각을 가져야 되고, 교회는 기쁨으로 영접해야 하고 존귀히 여기는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른 교회입니다. 
 
본문 30절에,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저가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면서 바울을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위태한 가운데 있지만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사명은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아 자기의 책임을 잘 하고 직무를 잘 감당하면서 바울을 잘 보필하라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병들어 죽게 되었어도, 바울을 섬기는데 너희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고 자기 직무를 자기 생명 내놓고 해 나갔다는 말입니다. “하다가, 다 하다가 죽자, 내게 맡긴 이 책임을 다 하다가 죽자”하는, 그런 결심을 가지고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갔습니다. 우리도 “내게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다 죽자, 생명 내놓고 죽기에 이르러도 이 사명 감당하다 죽자”고 하는 그런 결심을 가지고 각자에게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