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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4일 토요일

사도행전 2:3-17 성령과 방언.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성령과 방언
사도행전 2:3-17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 나타나서 그들 각 사람 위에 임하니, 

2:4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에서 와 머물고 있었는데, 

2:6 이런 소리가 나자 큰 군중이 모여들어 소동하였으니,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각 자신들의 본국 말로 들었기 때문이다. 

2:7 그들이 놀라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보아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2:8 그런데 우리 자신이 각각 태어난 곳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2:9 우리는 바대 사람들과 메데 사람들과 엘람 사람들이고,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2:10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그리고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며, 로마에서 온 방문자들, 

2:11 곧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크레타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우리 자신들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 

2:12 그들 모두가 놀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였고, 

2:13 다른 이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라고 조롱하며 말하였다. 

2:14 그러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이들아, 너희에게 이것을 알게 하고자 하니,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2:15 이 사람들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니, 지금은 오전 아홉 시이기 때문이다. 

2:16 오히려 이 일은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2:17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줄 것이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1. 성령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함

성령은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성령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서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우주에 충만하십니다(옘 23:24).
성령은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새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같이 계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이 여기 와 계신데, 무슨 오시오 오시오 합니까? 성령이 와 계신데 오긴 뭘 옵니까? 성령이 안 계신 곳이 없으신데 자꾸 오라고 하면 어떻게 오겠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여기 계신데, ‘아버지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 ‘아버지 오시옵소서’하면 아버지가 ‘이 녀석이 정신이 나갔나’할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와 있는데 자꾸 오라고 하면 아버지가 속상할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이 성령이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오시옵소서’하는 기도는 바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을 거두어 가시고,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거두어 가시고, 역사를 거두어 가시고, 보호를 거두어 가시고, 인도와 주장을 거두어 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감동을 받는다, 보호를 받는다, 주장을 받는다, 역사를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계시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성령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성령의 감동을 받고 주장을 받고 또 역사를 받습니다.

2. 성령은 반복적이지 않음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반복하지 않으십니다. 제이 오순절, 제삼오순절, 제사 오순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이 한 번 오신 다음에는 내내 그대로 역사하시지, 다시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고 다시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반복된다는 것은 마치 동정녀에게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동정녀에게 탄생하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동정녀에게 탄생하시고 한 번 죽으셨다 살아나셨으면 그 진리를 성경에 기록하셔서 영원히 믿게 하시는
것이지, 같은 사건을 반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것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을 우리가 믿는 것이고, 그 성령으로 우리가 믿게 된 것이고, 또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늘 계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떠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전서 1:5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우리를 능력으로 보호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마귀가 다 잡아 삼켜먹고 맙니다. 일 푼만 안 지켜주셔도, 일 푼 동안에 마귀가 우리를 다 집어 삼킵니다. 일 푼, 일 초도 성령께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늘 우리를 능력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삼키지 못합니다.

3.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시고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심하게 하면 우리에게 유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4절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 계십니다. 언제나 내 안에 계시고 내 곁에서 감동을 시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역사해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려고 애쓰시는 성령이십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

그런데, 이와 같이 애쓰시는 성령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성령이 근심합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성령께서 기뻐하셔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감동시켜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32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순종하는 자를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역사해 주시고 주장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늘 우리 위에 임하여 계신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온전히 받는 것임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하였는데,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조금 왔다가 많이 왔다가, 또 가득하게 왔다가 조금 가득하게 왔다가 하는 것입니까? 성령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성령이 조금 왔다가 많이 왔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온전히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주장을 온전히 다 받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에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그 시간 온전히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다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은 다 없어지고 자기 위하는 것도 다 없어지고 자기가 하려는 것도 다 없어지고, 온전히 성령의 인도대로 성령의 주장대로 성령이 하시는 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일시적으로 성령에 온전히 붙잡혀서 성령 충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시간에 인간의 생각이 나오고 세상 것이 들어오고 자기 생각이 나오고 자기 주장이 나오고 자기가 하려는 것이 나오면, 성령의 주장을 온전히 받지 못한 것으로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어지는 만큼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늘 성령 충만하려면 완전히 자기가 다 죽어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에 있어서 완전히 자기가 다 죽어지는 것이 절반이고, 성경 말씀을 다 순종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6:13).

성령은 항상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므로, 언제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완전히 다 받으려면 신, 구약 성경을 다 순종해야만 합니다. 말씀을 조금이라도 순종하지 못하면 성경을 어긴 것입니다. 성경을 어긴 사람이 무슨 성령 충만입니까? 그러므로 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일생동안 신, 구약 성경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내내 다 순종했겠습니까? 신, 구약 성경을 완전히 다 순종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순종하다가 부족해도 안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과 순종함에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만점 받도록 순종을 해야만 그것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순종했다고해도 부족하게 순종을 했으면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 4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의 성령 충만은 그 시간에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즉, 그 시간에 성령의 인도를 전적으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성령 충만을 늘 받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은 인간의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것을 전적으로 없애려고 하면 만들어지지 못한 사람이 그만큼 제제를 받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꼭 한 번 혈기를 부려야 하겠는데 못 부리고 제 맘대로 가 보아야 하겠는데 못 가게 만들어 놓기 때문에 속상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지를 양반 집에 갖다 놓으면 속상해서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버선 신기고 꼬인 다리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면 그 거지가 얼마나 속이 상해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거지는 맨발로 깡통 차고 돌아 다녀야 속이 편하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온전히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자기의 것은 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온전히 성령에 붙들리어야만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가 또 인간의 것이 나옵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 못 됩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의 것이 나왔습니다. 또 모세도 사람을 때려 죽였고 “내가 너희에게 물을 내랴”하며 혈기로 반석을 두 번 쳤고, 베드로도 성령 충만했지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할례 받은 사람들이 내려오므로 안 먹는 체 하고 돌아앉았습니다. 그래서
바울한테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성령 충만이라고 나오는 것은 자기 진리를 아는 범위에서, 또 그 시간만 성령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시간에는 성령의 인도를 못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하여간 성령 충만함을 받겠다는 소원은 좋은 것입니다. 온전히 성령에 붙들리어서 ‘성령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신, 구약 성경을 다 순종해야만 온전히 성령 충만에 들어가기 때문에, 완전하게 성령 충만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러 성령 충만 받았다는 것은 그 시간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 시간에는 온전히 성령에 붙들리어서 인간의 것은 다 없어지고 성령의 주장대로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보혜사 성령으로, ‘보혜사’는 ‘대언자, 변호자, 도와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위로자도 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만 말하려고 힘을 많이 씁니다. 한 번 발표하려면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고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확실한 것을 깨닫고 많은 책들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반드시 신학을 해야만 허튼 소리를 안 하게 되고, 미혹을 안 받게 됩니다. 신학을 해도 제대로 하는 신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학교 졸업을 쉽게 하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일 년에 졸업하게 해 주십시오, 이 년에 졸업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오는데, 그러면 다른 데나 가보시라고 합니다. 등록금을 다 낼 테니까 졸업 맞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만 원을 주어도 안됩니다, 가십시오”라고 합니다. 졸업장을 주어서 내어 보내려면 제대로 가르쳐서 내 보내야지, 무슨 싸구려 물건 만들어 놓도록 그렇게 해서 불량 교역자를 만들어 내면, 불량 식품 먹고 죽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을 가르쳐 주어도 제대로 가르쳐 주려는 정신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4. 성령은 하나님이심

그러면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였는데(요 16:13),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시고 또 하나님이십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아버지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말씀은 ‘로고스’인데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말씀이신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것은 아들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16). 사도행전 5:3에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네가 성령을 속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속인 것이 곧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하나님 아들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입니까? 세 분이 아닙니다. 위(位)가 세 분이십니다. 위가 세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의논해서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창세기 1:26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영혼을 먼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놓으시고, 그 다음에 육신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썩을 장막입니다.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연결을 시켜야 산 영이 됩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죽은 영혼이 됩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는데,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영혼을 불어 넣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놓으니 생령이 된 것입니다. 즉, 산 영혼이 되었습니다. 생기를 불어 넣으시기 전에 벌써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육체는 흙으로 만드셔서 그 다음에 사람이 되었는데, 거기다 하나님께서 진리와 영감으로 연결을 시키시어 산 영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2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과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은 같은 뜻입니다. 즉, 진리와 영감으로 생명을 연결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2:7에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이 영혼이라고 하면, 영혼은 피조물이 아니고 유출설(流出說)이 됩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속에서 흘러나온 유출설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혼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피조물입니다.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에 있던 기운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생기를 불어 넣었기 때문에, 생령이라는 말과 생물이라는 말이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24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생물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생물’이라는 말과 창세기 2:7에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에서 ‘생령’이라는 말이 히브리 원어로 모두 ‘네페쉬카야’입니다. 생물과 생령이 같은 ‘네페쉬카야’입니다. 그러면 짐승은 죽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생물이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사람의 영혼도 죽어 없어진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짐승이 죽어 없어지므로 사람의 영혼도 죽어 없어진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기운이다’ 이렇게 갖다 붙여 이단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 가운데 제일 악독한 이단입니다.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과육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2장에서 육신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을 세부적으로 재론(再論)하는 것입니다. 1장은 창조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고 2장은 세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2장은 재 강론입니다. 집을 먼저 짓습니까? 사람이 먼저 나야 되겠습니까? 아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다고 하면 아들을 낳은 다음에 집을 짓습니까, 아들을 낳기 전에 집을 짓습니까? 아들을 낳고 장성한 후에 집을 짓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흙으로 육신을 만드는 것이 먼저 이겠습니까,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 먼저 이겠습니까? 영혼 창조가 먼저입니다. 영혼은 주격이고, 육신은 쓰고 살던 장막집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후, 쓰고 살 장막집이 필요하기 때문에 육신을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어 진리와 영감으로 연결을 시켜서 산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연결되어 산 영혼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에도 삼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우리가 내려가서 언어를 혼잡케 하자”라고 하시며 의논하시어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하나님 아들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신데, 왜 일체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아들은 요단강에 계시고, 성령께서는 하늘로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아버지는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버지는 하늘에 성령은 공중에 아들은 요단강에 계셨는데, 어떻게 일체가 됩니까? 그것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하나’라고 하였으므로 삼위 일체입니다. 요한복음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입니다. 또 신명기 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입니다.

여호와는 ‘엘로힘’이라는 말인데, 엘로힘은 ‘하나님들’이라는 뜻으로 복수입니다. 삼위 일체는 간단한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한하신 삼위 일체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의 지식으로 알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 사람 사는 것을 다 알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사람들이 자동차를 어떻게 타고 다니는지, 전기불을 어떻게 켜고 끄는지, 비행기는 어떻게 타고 다니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면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백 년 가르쳐도 못 가르칩니다. 구두를 어떻게 짓고, 양복을 어떻게 만들고,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비하면 우리는 개구리보다 더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다 알겠다고 합니까? 성경에 그렇다고 하면 그저 ‘예,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알아야지,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며 ‘왜’를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랬다고 하면 “예”하는 것뿐입니다. 성경에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 하였으므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신 줄 믿는 것입니다. 토틀리안 교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을 태양에 비교했는데, 태양의 본체는
성부와 같고 태양의 광선은 성자와 같고 태양의 열은 성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하나이다, 하나인데 열이 있고 광선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성령은 열이시고 뜨겁게 하는 본체는 하나님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써 사례를 든 것뿐입니다.

5. 성령의 권능을 입어라

결사각오로 말씀을 지키라

본문 5-13절에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을 준비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은 말씀을 지켜야만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야만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기 쉬운 데에서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큰 환난이 있던 곳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던 곳이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기독교 박멸 운동이 있는 사탄의 위가 득세한 곳입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를 힘써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즉, 기도하는 환경이 중요한 것입니다.

힘써 기도하라

어려운 환경에서 말씀을 지키면서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데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수 없는 환경 가운데에서, 큰 환난이 일어나는 데에서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면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 가지 큰 환난과 시험이 올 때에 말씀을 지키면서 진리를 양보하지 않고 힘써 기도할 때에 그것을 이길 만한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열흘 동안의, 하나님의 내정수인 기한이 차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문제는 말씀으로 해결하라

또, 가룟 유다의 죽음 문제로 의혹이 들어왔을 때에 성경으로 그 문제를 바로 해결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느냐? 예수 따라가면 복 받는다고 하였는데 왜 그 모양이 되었느냐? 이런 의혹으로 기도에 힘을 못 쓰게 되었는데, 그때에 베드로가 “그것은 마땅하다, 시편에 거처가 황폐하여 거기 거하는 자가 없다고 했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한다고 하였으므로 가룟 유다에 대한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 집이 저주 받아 망한 것이 마땅하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한 것이 성경대로 된 것이다”라고 하며 성경대로 규명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룟 유다 대신 다른 한 사람의 제자를 보충 시키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면서 세울 일꾼을 세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끝까지 했습니다. 또, 힘써 기도하지 않고서는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셨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파가 되어야 하겠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6. 성령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

고난 당한 거기에서부터 빛이 비쳐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야 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열흘 동안 기도할 때에 점점 더 환난이 심했지만, 끝까지 참고 기도할 때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이 입혀지게 되었습니다. 큰 권능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크게 임하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의 심령이 벌떡 일어나고, 새로워지고,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세계가 발견이 되고, 영혼이 자라나게 됩니다. 즉, 세계가 새로워지고, 사람이 새로워지고, 영혼이 새롭게 자라나고, 인격이 새로워지고,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될 때에는 말하는 것도 새로운 말이 나오게 됩니다. 전부 다 새 것인데 말만 새 말이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권능이 임하기 때문에 영혼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모든 진리가 명백하게 깨달아졌습니다. 새로운 진리가 깨달아지고 새로운 인격이 자라나고 심령이 새로워졌습니다. 영혼이 자라났습니다. 사람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새 말이 되고 노래도 새 노래가 됩니다. 성령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2장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14:3에는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나라가 새로워지고 세계가 새로워졌기 때문에 새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7. 방언

방언의 종류

1) 외국어 방언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방언의 종류가 세 가지 있는데, 첫째는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방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방언은 다른 나라의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그 말로 전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6절에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모인 무리가 각자 자기 나라의 말로 제자들이 전도하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또, 8절에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다”고 하였고 11절에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나라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대, 메대, 엘림, 메소보다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야 등 여러 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그 나라 말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배우지 않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까? 말을 누가 내셨습니까? 

출애굽기 4:11-12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였습니다. 말하게 하시는 이가 누구이고, 벙어리가 되게 하시는 이가 누구이며, 또 여러 나라 말로 갈라놓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배우지 않았어도 그 나라 말이 필요할 때에는 그 나라 말을 하게 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간혹 “제자들이 유대 말로 말을 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6절에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즉, 제자들은 유대 나라 말로 말을 했는데 자기 나라의 말로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각 사람 나라의 말로 방언할 때에 사람들이 들었다고 하였습니
다.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의 말을 해서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즉, 성령에 붙잡혀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그 나라의 말을 모르시겠습니까? 성령은 한국 말로 기도하는 것도 다 아십니다. 또 일본 말로 기도하는 것도 아십니다. 다 아시는 성령께서 그 나라 말로 말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온전히 성령에 붙들려서 성령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능히 다른 나라의 말도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서 새 사람이 되어서 성령이 명령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또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방언인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언은 하나님 앞에 비밀을 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통역이 없이는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이 없이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 미쳤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3에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4:11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통역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에서 말하게 되면, 말하는 자도 야만이고 듣는 자도 야만이 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에서 통역 없이 말한다고 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 
첫째는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하였고(5절), 
둘째는 유익이 없다고 하였고(6절),
셋째는 분별치 못한다고 하였고(7절), 
넷째는 나팔이 분명치 못하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전쟁을 예비치 못한다고 하였고(8절), 
다섯째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고(9절), 
여섯째는 야만이 된다고 하였고(11절), 
일곱째는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였고(14절), 
여덟째는 방언할 때에 감사할 수 없다고 하였고(16절), 
아홉째는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이 성경 다섯 마디만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고(19절), 
열째는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표적이라 하였고(22절), 
열한째는 미쳤다, 무식한 자들이라고 하였고(23절), 
열두째는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되는 것이라고 하였고(28절), 
열셋째는 하나님께서는 어지르는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였고(33절), 
열넷째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34절).
그러나 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통역을 세워 말하게 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통역을 세우고 할 때에는 가짜 통역을 세우면 안 됩니다. 진짜를 세워야 합니다. 한 사람이 방언을 하면, 통역할 사람 둘이상이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통역을 할 때에 말로 하지 말고 노트에 기록해서 서로 대조하여 보고 둘이 같아야 합니다. 둘이 같으면 인정해 줄 수 있고 둘이 다르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3) 새 방언 새 방언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자기 나라 말로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것은 처음 듣는 말이고 그 내용이 새로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새 방언이라고 합니다.

방언의 출처
방언의 출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방언이 있고, 
둘째는 마음에서 나오는 방언이 있고, 
셋째는 마귀로부터 나오는 방언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방언은 에스겔 13:2에도 있고, 예레미아 23:16에 있습니다.

예레미아 23:16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고, 에스겔 13:2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방언도 마음에서 하려고 애를 쓰고, 연습을 하면 나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방언도 배워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지옥 간다” 하며 방언을 하도록 애를 쓰게 만듭니다. 그리고 말을 빨리 하라고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계속 며칠을 시키는데 한 사흘만 계속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속에 그것 밖에 없는데 “랄,랄,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 있습니다. 마귀가 광명한 천사인체하며 방언을 시켜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 듣는 것도 출처가 세 가지입니다. 꿈꾸는 것, 환상 보는 것, 음성 듣는 것, 방언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있고, 마귀에게로부터 오는 것이 있고,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꾸었다고 꿈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꿈이 많습니다. 자기 마음에서 내일 일본 간다고 하면 밤에 기차타고 한참 일본을 갑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여자들은 자기 친정에 며칠 있다가 간다고 하면 벌써 며칠 전부터 친정에 갈 꿈만 꿉니다. 그리고 코에서 석탄냄새가 나고 멀미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석탄을 때면서 기차가 갔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공장에 다녔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먹는 꿈만 꿉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꿈입니다. 주사야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꿈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맞아야 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제 꿈 아니면 개꿈입니다. 꿈, 환상 등 이런 것을 따라가는 것은 제 꿈 아니면 개꿈을 따라가는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 따라가는 것입니까? 자기 따라가지 않으면, 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것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꿈을 꾸었을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성경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꿈 꾸고, 무슨 말한다고 해서 따라가는 것은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꿈을 꾸니까 이렇더라” 하면서 꿈을 따라가는데 절대 꿈 따라 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제 꿈 아니면 개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따라
다니는 것은 개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또 마귀를 따라 가는 것이고, 자기 감정주의로 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성경을 따라가야 됩니다.

8. 영혼의 능력이 강해지는 길

영혼의 능력이 강해지는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데서 강해집니다. 즉 말씀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많은 환난을 통과 하면서부터 능력이 입혀집니다. 그러므로 절대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오고, 환난이 오고, 잡아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떠날 수 없다, 죽여도 못 떠난다”하며 이겨 나가야 합니다. 한 마디만 양보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지만, 말씀 하나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모든 환난을 다 겪어 나가야 됩니다. 그 때에 열흘 동안 죽을 각오를 하고 참아야 합니다. 

열흘은 하나님의 만수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정하신 때가 차기까지 참으면 마침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그 사람이 새롭게 됩니다. 영혼이 자라납니다. 그러면 능력이 입혀집니다.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된 생활입니다. 말씀을 전하게 되고, 또 입으로만 전할 뿐 아니라, 자기의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벌써 자기 자체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해나가십니다. 그럴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게 됩니다.

9.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 역사하심

본문 12-13에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새 술에 취하였다 하는 것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허튼 소리 하는 것을 보니 좋은 술이 나와서 술을 먹은 모양이다 하며 비방을 합니다. 신비주의로 나가는 청년들이 우리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새 술에 취했다는 것은 제정신 없이 비틀비틀해서 돌아가는 것을 빗대어 비방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답변을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14-15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때가 제 삼시니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취했다고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으므로, 오해한 것으로부터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너희가 우리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삼시로 술 먹는 시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술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시는 우리 한국 시간으로 말하면 여섯 시간을 두어야 됩니다. 유대 나라 시간과 우리나라의 시간에는 여섯 시간 시차가 있습니다.

그러면 삼시에 여섯 시간을 더하면 오전 9시입니다. 오전 9시는 낮인데, 유대 나라 사람은 낮에 술 먹는 법이 없습니다. 밤에 술을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7에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전 9시인데 무슨 술을 먹었겠는가?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증거 하지 않느냐? 술 먹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첫째 “구약의 선지 요엘이 예언한 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이다, 술 취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요엘 2:28-32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세의 뜻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 마지막 끝도 말세이고, 또 예수님 초림에서 재림까지가 말세입니다. 즉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부터 재림 때까지가 전부 말세입니다.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는 상고시대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중세시대이고, 예수님부터 세상 끝날까지는 말세입니다. 여기는 예수님 초림 때부터 재림까지의 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0에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세라는 것은 예수님 초림부터 말세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6에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끝에”란 말세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것이 세상 끝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때부터 재림까지 그 기간을 전부 말세로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성경에는 세상 마지막 끝을 말세라고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를 말세로 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히브리서 9장, 사도행전 2장은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를 말세라고 하였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갔다가 서울에 올라오면 이젠 집에 다왔다고 합니다. 또 집이 신촌이라면 한강만 넘어와도 집에 다 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아담 때부터 생각한다면 예수님 초림 때부터 벌써 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2:17에 있는 말세는 어느 말세인가? 그것은 세상 끝을 가리키는 말세인가?, 그렇지 않으면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의 말세를 가르치는가? 이것은 세상 마지막 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초림 때부터 재림까지의 전체를 다 가리키는 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가?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가 그것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엘서에 예언한 예언이 베드로 당시 때인 오순절날 이루어졌으므로 초림 때부터 재림까지의 말세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합니다. 

오순절날 강림한 성령이 말세에 부어주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다 부어주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은 언제부터 죽을 때가 되는 것입니까? 죽는 날이 죽을 때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는 시간이 되어야 죽을 때가 되는 것인가? 늙어서부터 죽을 때가 되는 것인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은 숨이 넘어가는 시간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고, 또 며칠 전부터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죽을 때도 여러 가
지입니다. 이와 같이 말세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초림 때부터 세상 끝까지를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오순절에 벌써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했기 때문에, 초림 때부터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성령이 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한번 임하면 가지 아니하고 세상 끝날까지 계속 역사하십니다.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이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이십니다. 요엘서에는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는 “육체에 부어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민은 육체와 같은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부어준다는 말입니다. 

육체를 헬라어 원어로 “삯스”라고 하는데 “삯스”를 육신으로 해석을 하지 아니하고 죄악성으로 해석하면 죄악의 동물에 성령을 부어주는 것이 되고, 또 요한복음 1:14에도 맞지 않게 됩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육신을 죄악성인 “삯스”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죄악의 덩어리가 됩니다.

또 성령도 죄악의 덩어리에 부어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삯스”를 죄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삯스”를 육체라고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또 성경에 전부 육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삯스”를 죄라고 해석한데가 없습니다. 죄는 육체의 부패성, 육체의 욕심. 육체의 정욕. 육체의 소욕입니다. 육체 자체는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5:19에 육체의 소욕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수와 우상 섬김이나 당 짓는 것 등 19가지 그것을 육체의 소욕이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2:11에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지 육체를 제어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육체라고 할 때에 육체의 정욕까지 포함시켜서 육체라고 할 때도 더러 있지만 육체 자체는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고깃덩이입니다. 이 고깃덩이는 죄가 아닙니다. 육체 자체가 죄라고 하면 뚱뚱한 사람은 죄가 더 많고, 빼빼 마른 사람은 죄가 적을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삯스”는 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쏘마”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그것은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은 육신과 이성과 영혼까지 포함시켜서 몸이라고 할 때도 있고, “삯스”는 “육”만 “삯스”입니다. 로고스가 “삯스”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죄가 없는 육신입니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으로 당신의 할 일을 해 나가시는 성령이십니다.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붙드시고,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온전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시라고 하였는데, 성령께서 의인을 감동 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육신의 부패성이 있는 사람들을 성령이 붙드시고 하나님의 할 일을 해나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다음에 세 가지가 나왔는데, 너희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요, 너희 젊은 자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은 예언, 젊은이는 환상, 늙은이들은 꿈. 이 세 가지가 나왔습니다. 이 세 가지를 원리의 뜻으로 해석을 하면 성령께서 오순절날 임하실 때에, 자녀나 노인이나 젊은이들에게 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즉 “꿈으로, 환상으로, 예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성경에 기록을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다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정하시고, 그리스도는 그 예정한 것을 성취하시고, 밝히 보여 주시고, 성령은 그것을 적용시키시는 것입니다. 다 같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꿈으로나 환상으로나 예언으로 주어서 책에 기록을 시켜 후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역사를 성령께서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해 나갈 것이 예언입니다. “내일 비온다, 흉년이 든다, 풍년이 든다” 등 이런 예언이 아닙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앞으로 걸어가야 될 길을 말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되지 않은 것을 말씀으로 깨달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 예언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하는 것도 예언이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하는 것도 예언이고, “이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예언이고, 또 “이대로 순종 안 하면 망한다”고 하는 것도 예언입니다. “십일조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예언입니다. 또 “순종하면 복 받는다, 주일 지키면 복 받는다, 십계명을 지켜야 복 받는다, 죄 지으면 망한다” 등도 다 예언입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자기가 걸어가야 될 길을 밝히 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느냐”하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를 성경에서 바로 찾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예언을 하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언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생명이 자라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성경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성경에서 모든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고, 자기의 영의 양식을 성경에서 늘 새롭게 받아먹는 사람이 예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자라나는 사람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였는데, 표준계시 종결 전까지는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자녀나 노인이나 젊은이들에게 꿈과 환상과 예언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 주셨고, 그 말씀을 성경에 기록시키셨습니다. 오늘날에는 꿈과 환상을 보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 다른 뜻으로, 젊은이는 환상을 본다는 것은 성경을 환상적으로 보고 가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젊은 사람이 성경을 보긴 보는데 잊어버립니다.

환상이라는 것은 보고 잊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 말씀을 깨닫고 가르쳐 주는데, 자라나지 못하는 사람은 환상적으로 구경만 하고 그 다음에는 가서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자라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지 아니하고,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적으로 구경만 하고 가는 것입니다. “목사님, 강연 잘 한다”하며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서는다 잊어버립니다.

또 늙은이는 꿈을 꾼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 꿈속에 있는 세계의 일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열왕기상 13:11-32에 늙은 선지자 있는데 그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젊은 선지자가 벧엘을 떠나 유대로 가는데 늙은 선지자가 젊은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고 모셔다가 대접할 생각이 났고, 진정으로 대접하였습니다. 또 늙은 선지자
의 입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하나님은 늙은 선지자를 이용 해서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고 책망을 해주었습니다.

또 젊은 선지자가 올 때는 나귀 타고 온 것 아닌데, 갈 때는 나귀를 태워서 보냈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호라 나의 이 형제여”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계획적으로 죽이려고 했으면 죽은 다음에 왜 울었겠습니까? 그 다음에 젊은 선지자의 시체를 말에다 실어왔습니다. 사자가 옆에서 잡아먹을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실어온 것을 보면 그 늙은 선지자가 젊은 선지자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슬퍼하면서 장례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또 자기 아들보고 젊은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와서 예언한 것이 그대로 꼭 이루어질 것이니 내가 죽은 다음에 그 젊은 선지자의 무덤 옆에 나를 장례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늙은 선지자도 믿긴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늙은 선지자는 신앙이 노쇠해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자리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양심을 안 쓰고, 거짓말 하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다가 그만 젊은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늙은 자가 꿈을 꾼다는 것과 바울은 반대입니다. 바울은 “겉 사람은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날로 젊어지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젊어지는 신앙이 좋은 신앙인입니다. 겉 사람은 뻔뻔하게 살이 쪄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늙는도다, 맥을 못추는도다, 점점 쇠퇴해가는도다”하면 그것은 늙은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되면 성경말씀을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봅니다. 그저 자기 볼장 다 보고 돌아가다가 예배당에 와 서 성경말씀 좀 듣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또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라고 하였는데 “자녀들”의 신앙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나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였는데(마11 :25) 어린아이의 특징은 첫째가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낮추어야 합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아” 언제나 갈릴리 사람들아 하는 말을 늘 들어야 됩니다. “사도님들이여. 왜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십니까? 이 예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올라가신 대로 그대로 오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갈릴리 천한 지방에서 고기 잡던 사람들아”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