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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1일 목요일

이병규목사설교집 16 창세기 下 계약신학

1. 이삭의 신앙 (창 26:12-25) ····························································· 7
2. 이삭의 축복 (창 27:1-46) ····························································· 15
3. 야곱이 벧엘에서 계시를 받음 (창 28:1-14) ································· 29
4. 벧엘의 아침 (창 28:10-22) ··························································· 47
5. 야곱이 아내를 얻음 (창 29:1-35) ················································· 59
6. 야곱의 번성(창 30:1-43) ······························································· 71
7. 야곱의 귀국 (창 31:1-55) ····························································· 85
8.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함 (창 32:1-32) ········································ 103
9.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새 출발함 (창 32:22-32) ····················· 121
10. 야곱이 돌아와 에서와 화목함 (창 33:1-17) ······························· 137
11. 세겜에서의 잘못과 하나님의 구원 (창 34:1-35:5) ····················· 149
12.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창 35:1-15) ········································ 165
13. 라헬과 이삭의 죽음 (창 35:16-29) ············································· 183
14. 에서의 자손들 (창 36:1-43) ························································ 197
15.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리움 (창 37:1-36) ························ 209
16. 다말의 득남 (창 38:1-30) ···························································· 231
17. 시험을 이긴 요셉의 신앙 (창 39:1-23) ······································ 241
18. 옥중 생활 (창 40:1-23) ······························································· 265
19. 바로의 꿈 (창 41:1-36) ······························································· 275
20. 칠년 흉년과 양식준비 (창 41:54-57) ·········································· 291
21. 회개 권유 (창 42:1-23) ······························································· 305
22. 환난과 위로를 통해 회개시키시는 하나님 (창 42:24-38) ········ 329
23. 베냐민 (창 43:1-34) ···································································· 347
24. 은 잔(銀 盞) (창 44:1-34) ························································ 375
25. 요셉이 자신을 드러내고 가족을 애굽으로 초청함 (창 45:1-28) ····································· 389
26. 야곱의 가속이 애굽으로 들어감 (46:1-34) ······························ 411
27. 요셉이 자기 가족을 바로에게 소개하고 돌봄 (창 47:1-10) ·· 425
28. 신정책(新政策) (창 47:20-31) ··················································· 437
29.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축복 (창 48:1-22) ························ 453
30. 야곱과 장자의 축복 (창 48:14-22) ··········································· 467
31. 예 언 (창 49:1-12) ······································································ 483
32. 요셉에 대한 예언 (창 49:19-25) ··············································· 499
33. 야곱의 예언과 유언 (창 49:33-50:21) ······································ 505
34. 요셉의 신앙 (창 50:15-26) ························································ 517
색 인···································································································· 533

1 이삭의 신앙 (창 26:12-25) 2005/3/13 주일오전
2 이삭의 축복 (창 27:1-46) 1997/9/14 주일오후
3 야곱이 벧엘에서 계시를 받음 (창 28:1-14) 1984/7/3 미상
4 벧엘의 아침 (창 28:10-22) 2003/1/5 주일오전
5 야곱이 아내를 얻음 (창 29:1-35) 1998/11/4 수요예배
6 야곱의 번성 (창 30:1-43) 1997/9/17 수요예배
7 야곱의 귀국 (창 31:1-55) 1997/9/21 주일오후
8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함 (창 32:1-32) 1997/1/5 주일오전
9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새 출발함 (창 32:22-32) 1995/12/31 주일오전
10 야곱이 돌아와 에서와 화목함 (창 33:1-17) 1984/7/5 미상
11 세겜에서의 잘못과 하나님의 구원 (창 34:1-35:5) 2009/1/8 주일오후
12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창 35:1-15) 2009/1/25 주일오전
13 라헬과 이삭의 죽음 (창 35:16-29) 1998/11/19 미상
14 에서의 자손들 (창 36:1-43) 1998/5/27 수요예배
15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리움 (창 37:1-36) 1997/10/1 수요예배
16 다말의 득남 (창 38:1-30) 1997/10/12 주일오후
17 시험을 이긴 요셉의 신앙 (창 39:1-23) 1997/10/1 수요예배
18 옥중 생활 (창 40:1-23) 1984/11/11 주일오후
19 바로의 꿈 (창 41:1-36) 1984/12/30 주일오후
20 칠년 흉년과 양식준비 (창 41:54-57) 1985/3/5 교역자수양회
21 회개 권유 (창 42:1-23) 1985/3/6 교역자수양회
22 환난과 위로를 통해 회개시키시는
하나님 (창 42:24-38) 1985/3/6 교역자수양회
23 베냐민 (창 43:1-34) 1985/3/6 교역자수양회
24 은 잔(銀 盞) (창 44:1-34) 1985/3/7 교역자수양회
25 요셉이 자신을 드러내고 가족을 애굽으로 초청함 (창 45:1-28) 1985/3/7 교역자수양회
26 야곱의 가속이 애굽으로 들어감 (창 46:1-34) 1997/8/20 수요예배
27 요셉이 자기 가족을 바로에게 소개하고 돌봄 (창 47:1-10) 미상 미상
28 신정책(新政策) (창 47:20-31) 미상 주일오후
29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축복 창 48:1-22) 1985/6/19 수요예배
30 야곱과 장자의 축복 (창 48:14-22) 2005/4/3 주일오전
31 예 언 (창 49:1-12) 1985/6/27 미상
32 요셉에 대한 예언 (창 49:19-25) 1985/6/27 미상
33 야곱의 예언과 유언 (창 49:33-50:21) 1985/7/3 미상
34 요셉의 신앙 (창 50:15-26) 2005/4/10 주일오전

2017년 9월 27일 수요일

누가복음 20:1-8 예수님의 교권문제,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의 교권문제
누가복음 20:1-8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대답하여 가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5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 물음

본문 1-2절에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유대나라 최고의 지도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이란 성전을 정결케 한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호산나 찬송을 받으셨는데(눅 19:38), 그 일에 대하여 이 사람들이 몹시 격분했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의 권세는 유대국가 최고의 기관인 유대교에서 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그러한 권세를 준 일이 없는데 예수님이 무슨 권세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지, 또 그런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인지 되물으심

본문 3-4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말을 저희에게 물으신 것인데,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질문에 대답하면 예수님께서도 말해준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5-6절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께서 “왜 자신을 믿지 않느냐”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먼저 계신 자인데,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할 자이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밝히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왔다”라고 대답하면, 예수님께서 요한의 증거 한 말을 왜 안 믿느냐고 할 것이라는 겁니다. 즉,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왔다고 하면 왜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안 믿느냐고 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또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들이 돌로 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로 인정을 하며,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와서 세례 베푼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람에게로부터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돌로 칠까봐 두려워서 그들은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빠졌습니다. 

양심을 쓰지 않고 성경대로 하지 않은 자들

양심을 쓰면 되겠는데 그들이 양심을 쓰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썼다면 하늘로서 왔다고 답변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와서 예수님을 증거 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 양심대로라면 자기들도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답변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와서 증거 했다고 하면 그 다음은 “그 말을 믿어라”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을 믿으려면 누구를 믿어야 되게 되어있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처음에는 몰랐어도 사람이 양심을 쓰고 성경대로 하려고 힘을 쓰면 하나님이 바로 인도해 주십니다. 양심을 쓰면 살 길이 생깁니다. 그러나 양심을 안 쓰고 성경 말씀대로 하려고 힘을 쓰지 아니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점점 더 마귀에게 끌려가고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확실히 서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아니면 끊어버려야 합니다. 말씀이 아니면 “아니다”라고 단정을 지어야 하는데, 말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지근하게 나아가다가는 반드시 마귀에게 끌리어 갑니다.

손톱으로 할퀴어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곳이 있는데, 그런 것이 성경에 있습니까? 손톱으로 할퀴어서 사람 몸에 상처를 내어 병을 고친다는 말이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하는 것이 마귀의 짓인 줄 알면 됩니다. 아무 짓을 해서라도 ‘병만 나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갈 것 같으면 도적질을 해서라도 병원에 가서 병만 나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아무 짓을 해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방법이 선해야 합니다. 방법도 성경에 맞아야 하고, 목적도 성경에 맞아야 합니다. 방법은 성경에 안 맞는데 목적만 성경에 맞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방법은 성경에 맞는데 목적이 성경에 안 맞으면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면에서 다 성경에 맞아야만 합니다. 성경에 안 맞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양심을 쓰고, 성경에 굳게 서지 않으면 언제든지 마귀의 미혹을 받습니다. 사기횡령해서라도 예배당만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이고, 구원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모든 것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다 속는 것입니다.

포천에 할렐루야 기도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가면 병을 다 낫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이 낫는다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병이 나을 사람은 병이 나을 것이고, 병이 안 나을 사람은 죽습니다. 또 그곳의 물이 한국에서 제일 좋은 생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의 물을 검사했더니 불합격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수라고 하면서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는데, 무슨 병이 낫겠습니까? 괜히 허튼 소리 하는 것입니다. 나을 병은 수돗물을 먹어도 낫습니다. 그런데 그
물 한 컵 마시고는 그 물이 병을 낫게 한 것이라고 하니 정신 나간사람들입니다. 예전에 박태선은 도라무통에 있는 물에 자기 손을 한 번 담그고서 축복해주면 그 물이 전부 생수가 되고 약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물로 아이들 헌데를 발라주면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도라무통
에 있는 물은 손 씻은 물인데 어떻게 헌데를 낫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생수를 낸 박태선은 왜 죽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게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할렐루야 기도원에 누구나 가면 거저 먹여 준다고 합니다. 일하기 싫은 것들은 다 거기 모이게 됩니다. 사람 다 못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 위반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왜 거저 먹여 주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돈이 어디서 생기냐고 하니까, 병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무조건 돈을 많이 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였는데, 병 고침을 받은 것도 거저 받은 것으로 해야 하는데 왜
돈을 많이 내라고 합니까? 이것은 안 받아야 될 것을 많이 받아서, 안 먹여도 될 사람들을 먹여 결국 사람들을 다 실업자로 만들고, 게으름뱅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미신에 빠지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병만 나으면 된다는 생각, 살인강도짓을 해서라도 병원에 가서 병만 고치면 된다는 것은 악한 생각이요, 악한 일입니다. 사람이 양심을 쓰고 성경 말씀에 바로서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하늘에서 온다”고 하는 것이 양심 쓰는 것인데, 모른다고 한 것은 양심을 안 쓴 것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성경 말씀을 순종하고, 양심을 써야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좀 잘못 되었다고 해도 양심을 쓰면 바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른 곳에서 배웠어도 양심을 안 쓰고 성경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하면, 마귀에게 끌려가고 마귀의 밥이 됩니다. 진리에 굳세게 서야 합니다. 말씀에 굳게 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습니다. “네가 말씀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양심을 안 쓰는 것은 믿음이 파선한 것입니다. 파선한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돌보아 주시겠습니까. 

양심 안 쓰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지 않음

본문 7절에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는 답변이 바른 답변입니까? 양심을 안 썼습니다. 양심을 썼다면 “하늘에서로부터 왔다”고 해야 합니다.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본문 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말하여 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심 안 쓰는 너희에게는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해 주어봤자 진주를 돼지에게, 보화를 개에게 던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말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 안 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알게 해주시지 않습니다. 양심을 써야 알게 해 주십니다. 양심을 안 쓰면 진리를 모릅니다. 아무리 배워도 모릅니다. 양심 안 쓰는 사람은 아무리 배워도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지 않기 때문에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양심을 안 쓰므로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말씀에 굳게 서고 양심을 써야 진리를 깨닫게 해주심

그러므로 말씀에 굳게 서야 하고 양심을 써야 하나님께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양심 안 쓰는 사람은 몇 십 년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양심을 안 쓰는 사람, 말씀에 굳게 서지 않는 사람은 유혹에 빠집니다. 하와가 왜 유혹에 빠졌습니까? 말씀에 굳게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실과를 다 먹지 말라하더냐”고 마귀가 말할 때, 하와가 무엇이라고 답변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실과는 먹을 수 있으나, 중앙에 있는 나무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고 답변했습니다. ‘만지지도 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안하셨습니다. 안 했는데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죽을까”로 고쳐 놓았습니다.

말씀에 에누리를 했습니다. 확실한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하고 말씀을 고쳤습니다.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고치면 마귀에게 미혹을 받아서 멸망합니다. 반드시 망합니다.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그 틈으로 마귀가 들어와서 멸망시킵니다.

2.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임

그러면,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왕권(王權)을 가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종교단체에서 준 권세를 가지고 일하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 하나님이 주신 영권,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일해야 합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는데 그 권세를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쓰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점점 더 늘어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쓰지 않으면 자라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써서 그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생명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주일학교를 맡았으면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써서 그 권세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열매가 맺히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열매가 맺히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간판만 내걸어 놓고, 교회에서 생활비나 받고 일은 제대로 못한다면, 다른 사람 할 것도 못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 열쇠를 잡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권세를 써서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셨는데, 가시는 곳마다 열매가 맺히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권세를 우리에게도 주셔서 당신의 일을 시키려고 하십니다. 그 권세를 쓰는 저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유년부도 맡아 놓으면 늘어나야 합니다. 피땀을 흘려서 전도하고, 심방을 해서 점점 늘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권세의 열매가 맺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9:12-27 므나 장사를 잘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므나 장사를 잘하라
누가복음 19:12-27

12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1. 각 자가 장사를 함

본문 12-13절에“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므나는 은의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로서 한 므나는 백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 한 므나를 다 같이 받았다는 것은 중생한 영과 그 영이 소유한 은사와 사용권을 가리킵니다.

누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중생한 영을 하나씩 받았고 또 거기에 대한 은사와 사용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죽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주여”, 하나님을“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영혼이 산 증거입니다. 중생한 영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고, 사용권이 있습니다. 이젠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장사하라는 것은 자라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중생한 영을 다같이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잘 장사해서 어떤 사람은 열배를 남겼습니다. 므나 하나 가지고 세배, 다섯배, 열배 자라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도 주셨습니다. 또 장사할 범위, 실력, 환경도 주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14-30의 달란트 비유와는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는 재능대로 사명을 맡긴 것으로 사명의 분량을 말하는 것입니다. 맡은 달란트 분량이 다른 것은 맡은 사명이 크고 작음을 뜻합니다

한 사람은 열 므나를 남김

본문 16-17절에“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열 므나를 남겼다는 것은 십수는 세상 만수이므로 중생한 영이 최대한으로 자라난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2:2에ࡒ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ࡓ고 했으며 에베소서 4:15에ࡒ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ࡓ고 했습니다. 중생한 영이 자라나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중생시킬 때에는 어린 영으로 중생을 시켰습니다(고전 3:1). 중생한 영은 다 같은 영인데 어린 영이 있고 자라난 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섯 므나를 남김

본문 18-19에“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는 것은 먼저 사람에 비해 절반을 남긴 자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중생한 영과 모든 은사를 전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재산과 건강과 시간과 힘과 환경을 열므나 남긴 사람에 비해 믿는 일에 절반만 사용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칭찬과 상급도 다릅니다.

한 사람은 한 므나 그대로 가져옴

본문 20-21에“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므나 그대로 가지고 온 사람은 하나도 못 자라난 것으로 악한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있는 것도 빼앗겼습니다.
있는 것을 빼앗는다는 말은 중생한 영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니고 중생한 영의 은사와 사용권을 빼앗는다는 말입니다. 즉 중생한 영은 그냥 있는데 중생한 영이 사용할 수 있는 은사와 환경과 실력과 분위기를 다 빼앗아 갑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열 므나 남긴 사람은 그만한 권세와 상급과 영광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 므나 그대로 가지고 온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기는 가지만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15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벌거벗고 나온 자라고 하였는데 불붙는 집에서 벗은 몸으로 나온 것과 같은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소돔 고모라에서 롯이 구원받은 것과 같습니다. 롯은 소돔 고모라의 물질과 세상을 따라갔으므로 불심판이 올 때에 자기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사위는 불에 탔고 두 딸은 음란한 여자가 되었으며 자기 자신도 정조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받았으나 부끄러운 구원이었습니다. 즉 구원은 얻었지만 상과 권세와 영광이 없습니다. 한 므나 받은 사람은 장사하지 않고 수건으로 싸서 한 므나 받은 것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2. 주인이 상과 벌을 주심

열므나 남긴 자에게 열고을 차지하라고 하심

영이 많이 자라난 열 므나 남긴 자에게 주인이ࡒ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 라ࡓ고 하였습니다.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는 것은 천년 왕국과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믿음 지킨 성도에게 열 고을 다스리는 것만큼 큰 것을 맡기고 그만한 권세와 영광을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25:21에“많은 것으로 맡긴다”는 말과 누가복음 22:28-30에 예수님과 함께 시련 받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만큼 영적 인격과 권세와 영광이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마 5:19). 어떤 성도는 구원은 받았으나 불 가운데서 벌거벗고 나온 것과 같은 자도 있습니다(고전 3:15). 하늘나라에는 어린 자가 있고, 장성한 자가 있습니다. 또 하늘나라에 가면 면류관 상급을 받는 사람이 있고, 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은 그만큼 영광이 클 것이고 그만한 권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한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19에“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서 어떤 자가 큰 자인가?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큰 자입니다.

다섯므나 남긴 자에게 다섯고을 차지하라고 하심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는“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라고 칭찬하였으나 이 사람에게는 그러한 칭찬이 없고 다섯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라고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열 므나 남긴 사람에 비해 열심과 충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한므나 그대로 가지고 온 자에게서 그 한 므나를 빼앗음

1) 장사하지 않은 이유

① 하나님을 엄한 분으로 알았음 

본문 21절에“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잘못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엄한 분이라 장사하다 밑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엄격한 구두쇠로 알았습니다.

② 하나님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는 분으로 알았음 

하나님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이시므로 자기가 장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거둘 것을 거두고 취할 것을 다 취하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안해도 하나님께서 다 하실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삼십배, 육십배, 백배 얼마든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에게 얼마든지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11:1에“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였고, 시편 126:5-6에“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들일 날이 옵니다. 땅을 파고 씨를 뿌릴 때 힘들고 고통이 많지만 가을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③ 게을렀음 

하나님이 만물을 낼 때 자라나게, 증식되게, 점점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므나 받은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좁고 게으릅니다. 그래서 장사하지
않은 한 므나 받은 사람에게“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④ 불순종했음 

잘 되게 해 주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얼마든지 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서 장사하라고 할 때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므나도 빼앗아 열므나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2) 열므나 남긴 자에게 더 주심

본문 24-26절에“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준다는 것은 충성된 자에게 하나님이 더욱 많이 준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이미 있는 은사도 빼앗깁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많은 은사를 주어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게 하십니다.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온 자는 지옥에 가지는 않고 해 받는 구원을 얻습니다(고전 3:15). 그 이유는 그도 한 므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중생한 자는 절대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가 빼앗긴 것은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능력과 은사만 빼앗긴 것입니다. 이처럼 장사하지 않으면 본전도 빼앗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 다 빼앗기고, 믿는 일 할 수 있는 환경도 다 빼앗기고, 물질도 다 빼앗기고, 건강도 다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내 놓아라”고 하기 전에 장사하라고 준 시간을 하루라도 허비하지 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나가서 장사하여야 합니다. 물고기도 새벽부터 먹을 것을 찾고, 새도 새벽부터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우리가 믿는 일 하는 것도 새벽기도부터 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 실력을 다 투자하여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2에“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힘을 다 기울여서 믿음을 쓰면 중생한 영이 자라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라고 하였는데 중생한 영이 자라나려면 복음을 전하여야 하며, 죄를 회개하여야 하며, 말씀을 사모하여야 하며 참된 것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준 시간을 다 기울여서 믿는 일을 하고, 우리에게 준 건강을 다 기울여서 믿는 일을 하고, 우리에게 준 물질을 다 기울여서 믿는 일을 하고, 우리에게 준 힘을 다 써서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모든 환경을 이용하여 최선을 다해서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였는데(행 1:8),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는 동안에 중생한 영은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받아서 그 말씀이 자기의 생명이 되면 자라납니다. 자라나는데 있어서 매일매일 자라나야 합니다. 일년이 열두 달인데 열한 달은 자라나지 않다가 한달에 한꺼번에 자라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매일 자라난 것입니다. 먹고,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매일 자라나서 큰 것입니다. 믿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생명체는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지 한꺼번에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자기가 할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믿는 일에 마음, 뜻, 성품, 힘, 목숨, 물질, 정성을 다 기울여서 나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4:15에“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나라는 것은 중생한 영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으로 영의 능력이 자라나고, 영의 지혜와 지식이 자라나고, 영의 도덕성, 즉 의와 진리와 거룩과 진실과 사랑이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엡 4:24). 자라난 영은 장성한 영입니다(히 5:12-14).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갔다고 하였습니다(눅 2:52). 그 지혜가 자라났다는 것은 영이 자라났다는 말씀입니다. 

영이 자라난 자는 천국에서 큰 자이고 자라나지 못한 자는 작은 자 입니다. 성도의 영이 단단한 식물을 먹고 자라나야 합니다. 성도의 영이 자라난 그대로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많이 자라났으면 큰 자는 큰 자에 대한 상이 있고, 작은 자는 작은 자에 대한 상급이 있습니다. 성도의 영이 점점 자라나서 그리스도와 같은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최고 목표입니다(요일 3:3) 

그러므로“나는 다 이루었다”고 해도 안되고“나는 할 수 없다”고 해도 안 됩니다. 오직 푯대를 향해서 달음박질할 것뿐입니다(빌3:12-14). 못된 마음, 못된 성품을 회개하고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다 기울여서 믿는 일을 하면 자라납니다. 자라난 것만큼 영원한 영광, 영원한 능력, 영원한 존귀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므나 장사를 잘하는 자가 되어 주님 앞에 설 때에“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과 상급을 받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2017년 9월 25일 월요일

누가복음 19:28-48 예수님이 나귀타고 상경하심,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이 나귀타고 상경하심
누가복음 19:28-48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46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
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1.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내용입니다. 본문 30절에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그 매인 것을 왜 푸느냐고 물어 오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고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대로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가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즉시로 나귀 새끼 주인이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나귀가 귀중한 짐승으로 값이 비싸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바로 보낸 이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 그는 나귀 덕분에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했습니다. 나귀를 타고 왕의 거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나귀가 없으면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지금은 나귀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나귀 주인이 나귀를 아낌없이 단 마음으로 바쳤을 때, 그 나귀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바로 그 마음이 하늘나라에 상달이 된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주님이 필요하다”하실 때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또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하실 일을 해 나가십니다. 만일 그 사람이 나귀를 안 바쳤다고 해도, 그 나귀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또 나귀 안 바치고 살면 그가 얼
마나 잘 살았겠습니까? 바쳤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남아 있고, 또 지금 만대(萬代)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가 된 것입니다. 즉 자기의 영적 구원이 이루어졌고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으며 하늘 나라에 쌓아 놓은 것이 되었습니다.

본문 37절에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나귀를 예수님이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 이용 당하는 일,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이 나귀는 예수님을 태워 온 나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
습니다. 길 가에 옷을 펴서 나귀가 그 옷을 밟고 가게끔 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둘러 서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따라갔습니다. 이 나귀가 그 전에 사람 옷 위로 걸어가 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옷을 밟고 걸어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태우면 나귀라도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습니다. 실은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귀까지 대우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하게 대우 받아 귀하게 됩니다. 

또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갔다는 것은 그 나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나귀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태운 일은 만국(萬國)에 처음 있는 사건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이용당한 나귀가 귀하고, 나귀를 바친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주님께 이용당한 만큼, 주를 위해서 쓰여진 만큼 하늘나라에 상급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그 만큼 도움이 된 것이며 그것이 하늘나라에 쌓여집니다.

본문 37절에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라고 하였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은 조금 경사가 졌는데, 가까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감람산은 높지 않은 산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이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오는데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을 하며 따라 왔습니다.

본문 38절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는 이 말씀은 누가복음 2:14 말씀과 비슷합니다. 2:14에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영광’은 본문 19:38의 언급과 같은 의미이며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부분은 문자적으로 다른 표현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 왕인 동시에 우주의 왕으로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모든 마귀를 다 멸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통치하실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시고 통치하시며 잘 길러 가시는 왕으로서 믿고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님은 영적 왕이자 우주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적을 멸하시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잘 통치해서 육성시켜 나가시는 그러한 왕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또 누가복음 2:14에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하였는데, ‘하늘의 평화’나 ‘땅의 평화’나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나 그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신령한 영역을 뜻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란 예수님의 구속을 입고 영적 생명으로 기뻐하는 자들을 가르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영적 생명이 살고 그 영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은 신령한 면인데, 이 신령한 면이 곧 하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평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이 말씀은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심령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가 나올 때에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본문 39절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말씀에는 돌 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사람들이 소리 지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방은 돌 감람나무라 하였고, 유대는 참 감람나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가만히 있으면 돌 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

눈이 어두워져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함

본문 41-42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신 일이 3번 나와 있습니다. 한 번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또 한번은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을 보시고 우셨으며,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또 히브리서 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42절에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네가 알았다면 망하지 않을 뻔 했는데, 평화에 관한 일을 네가 알지 못하고 눈에 숨겨졌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에서 ‘좋을 뻔 하였거니와’는 작은 글씨로 썼습니다. 성경에 작은 글씨로 쓴 것은 번역하는 사람들이 그 뜻을 해석해서 옮긴 것입니다. 원문에는 큰 글자로, “평화에 관한 일을 았았더면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이라고 하였는데, 평화에 관한 일이 무엇일까요? 평화에 관한 일은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원수가 되었는데, 원수 된 사람들을 화평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 사이를 화평케 하시며 죄 된 상황에서 건저 주시려고 이 세상에 하늘 영광을 다 내어 놓고 찾아오셨습니다. 평화하자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평화에 관한 일은 또 무엇입니까? 죄 사함 받는 길입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하나님과 막혔던 그 죄, 그로부터 사함 받는 길을 네가 알고 그 길로 가서 하나님과 평화 했다면 좋았을 것인데 이것을 못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함 받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평화 하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59:1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이라는 것은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막힌 죄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은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데,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로 예수님이 오셨는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죄가 그냥 있어서 죄 값으로 멸망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 하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것을 보여 주고 말해주어도 너희가 모르고 결국에는 망하겠기에 이에 예수님께서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셨습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숨기워졌습니까? 평화에 관한 일을 알만하게 다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전부 숨기워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게 해 놓으셨음에도 눈이 어두워져서 평화에 관한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은 멸망의 길로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왜 눈이 어두워 졌을까요? 믿지 않기 때문에 어두워 졌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중심과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 져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느냐? 이 시대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천기(天氣)의 기상은 분별하면서 너희가 이 시대를 분별하지는 못 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를 보는 눈이 가려졌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6:3에는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이 가려져서 보지도 못합니다. 또 신령한 진리를 듣는 귀가 다 어두워졌습니다. 시대를 분별할 만한 징조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고, 평화의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나아가다가는 망하게 굅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를 분별할 만한 징조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세례 요한의 운동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중요한 표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엘리야의 심정으로 왔고 또 권능으로 왔는데, 그것은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과 같은 위대한 징조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타난 것을 보고도 사람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무엇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는 눈이 가리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그런 회개 운동이 없었습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회개 운동입니다. 오랫동안 회개 운동이 없다가 세례 요한 때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를 자복하는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보면 알만 하지 않습니까? 앞서 언급한대로 세례 요한이 나타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요한 같은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또 요한의 말을 듣고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먼저 계시고 나는 그 신들메도 감당치 못한다, 그는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그 말을 듣고 분별할만 함에도 그 시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귀로 들을 줄도 모르고 마음으로 생각할 줄도 모르니 왜 이렇게 되었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 평화에 관한 것을 알라

우리는 언제든지 신령한 눈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신령한 귀가 열려서 신령한 말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신령한 눈이 열려서 그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상이 무엇입니까? 종교가 부패하고 죄악이 관영한 것입니다. 그것이 시대상입니다. 그것을 보고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소, 양, 비둘기를 파는 곳으로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가 부패하고 죄악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노아 시대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분별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느 때입니까? 우리도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도 노아의 때와 같이 죄악은 관영하고, 종교는 부패하고, 하나님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가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과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듣는 귀가 열려 평화에 관한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에 관한 것을 모르고 그저 맹목적으로, 의식적으로 나아가다가는 결국 예루살렘 성의 멸망당할 사람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심으로 심령의 평화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영적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더불어 화평하며, 죄 사람을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언제나 하나님과 화평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실현되어 나가야 합니다. 영이 사는 평화의 세계에서 말씀이 실현되어 나가야만 온전히 바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바로 보고, 진리에 대해서 바로 듣고, 시대의 죄악과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멸망함

본문 43-44절에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즉 평화의 관한 일을 알고, 날마다 권고를 받아서 회개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고, 점점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으로 깊은 교통을 하며, 그로부터 날마다 더욱 더 많이 평화를 얻어 나가는 생활, 또 하나님과 평화 하는 동시에 사람과 평화 하는 생활, 이것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망한다는 뜻입니다. 원수가 너를 둘러싸고 어떻게 한다고 하였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지만 죄 값으로 망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여 다 무너지고, 과거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 사람들을 앞으로 원수가 와서 죽인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돌로 다 메어쳐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눈으로 이러한 상황을 다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눈으로 성의 죄악상과 앞으로 임할 심판, 그리고 평화에 관한 일을 보시고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망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 평화에 관한 일 모두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 세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가 노아의 때와 같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하고, 또 종교는 타락 되어서 의식주의와 물질주의로 기울어 진 것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타락된 교회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평화에 관한 것과 심판에 대한 것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다 보셨습니다. 어느 시대나 죄악이 들어차면 심판이 옵니다. 죄악의 결과는 멸망이므로 반드시 망합니다. 공자(孔子)도 “죄악이 들어차면 하나님이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원리적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원리적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이치와 순리를 말하는 것으로, 공자는 과거 어느 시대에나 죄가 들어차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죄악이 들어차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입니다. 노아 시대에 죄악이 들어찼기 때문에 그 사회가 망했고, 소돔 고모라도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말세에도 죄악이 관영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심판은 죄 때문에 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온 것입니다. 죄악이 들어차면 공산주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차고 넘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공산주의 사상을 보내어 죄를 때려 부수십니다. 공산주의가 한 번 점령하게 되면 그 사회는 더욱 고통스럽고, 괴롭고, 말 한마디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자유가 없는 사회가 됩니다. 생활은 점점 더 곤란해집니다. 실제 지금 공산주의 사회를 보면 경제적으로 어렵고 여러 면에서 얼마나 곤란합니까? 북한과 남한을 보아도 처음 해방 때에는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했는데, 오늘날 얼마나 차이가 많습니까? 또 월남, 동독과 서독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가만히 두어도 점점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내보내셨기 때문에 그 도구로 사용하시고, 후에 공산주의 자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말세입니다. 

죄악이 들어차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처럼 ‘죄의 대가로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나 죄악이 들어차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서울에 고층 건물이 많이 올라갔지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질 날이 오고, 사람들이 아무리 많지만 다 죽는 날이 옵니다. 그런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공산주의를 끌어 들이고, 멸망으로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바로 서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는 사람이 없으면 다 망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평화에 관한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패한 종교사와 평화에 관한 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생명을 살려 나가시는 역사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살아있는 생명 운동을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권고를 받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이
는 권고받는 날을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였는데, 권고를 받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지나가면 권고 받지 못합니다. 정해진 기간이 있는데, 그 기간에 권고를 받으면 하나님의 긍휼의 팔이 임해서 건짐을 얻지만, 권고 받는 기간에 권고를 받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 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권고 받는 기간에 권고를 받아서 부지런히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회개의 권고를 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찾아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를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한 죄,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한 죄를 전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기주의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이용당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으로부터 권고를 받아서 그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에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권고 받아 하나님 앞에 매일 충성하고,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몸 바쳐서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권고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할 때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에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야 하며, 나귀를 바쳐라, 할 때에는 나귀를 바쳐야 하고, 독자를 바쳐라, 할 때에는 독자를 바쳐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적극적인 권고가 있습니다. “네 몸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하실 때에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그 정도로 권고를 잘 받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잘 이루어져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성전을 정결케 하심

본문 45절에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며 순전히 주님만 섬기는 장소가 소나 양, 비둘기를 팔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나아가 출세를 꾀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용인에 있는 어느 기도원에서 사람 다섯 명이 비정상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전에 죽어 나간 사람들과 합하면 이곳에서 족히 삼십 명 가량은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기도원이 사람 죽이는 곳이다”라고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왜 기도원에서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정신질환자나 마귀 들린 사람들을 위하여 순수하게 기도해 주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영리적으로, 즉 돈을 벌 목적으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병이 낫지 않으니 막대기로 때려서 마귀를 내쫓는다고 하다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돈 벌 목적으로 사람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막대기로 때려서 마귀를 내쫓는다고 하면 마귀가 막대기한테 혼이나 나겠습니까? 그러다 여러 사람을 죽이고 결국 다른 모든 기도원도 수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기도원에 환난이 한 번 올 것 같습니다. 때려서 사람이 죽으면 한 달에 얼마씩 받고 무조건 파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강도의 굴혈과 같습니다. 지금 종교가 돈 버는 것에 눈이 다 팔려 이만큼 부패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무슨 기관, 무슨 사업 하면서 이제 사람을 다 죽이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피해가 막심하게 가게 되고, 이에 참된 종교들도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안 믿는 사회에서 보면 기도원, 하면 사람 죽이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기도원 가겠다,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못 가게 할지도 모릅니다. 안 믿는 식구가 있으면 요새 기도원은 사람 죽이는 곳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쉬우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원은 기도 하는 곳이지 때리는 곳이 아니다”라고 잘 이야기 해주십시오.

안수 기도 한다고 때려서 병 고치는 곳도 있습니다. 삼각산 임마누엘 기도원에 가면 전진이라는 전도부인이 있는데 때려서 병을 낫게 한다는 것입니다. 박신원 목사가 간암이 들렸는데 그 기도원에 갔다가 매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성경 말씀대로 영리적 강도의 굴혈이 되어서 이권 문제와 의식주의, 그리고 교권주의로 기울어졌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파는 것을 다 내어 쫓으시고 정결케 하시며 기도하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2017년 9월 24일 일요일

누가복음 19:1-10, 28-44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
누가복음 19:1-10, 28-44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

예수님을 보기 위해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감

여리고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 가운데 첫째가 삭개오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여리고라는 도시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세리장이요, 부자요, 키가 작은 사람이요,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듣고 보고자 하여 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늘 오시기를 기다리던 구속주, 메시아가 오셨다는 말을 삭개오가 듣고서 나아온 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구속주의 오실 것을 믿고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여리고의 삭개오가 있는 그 동네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본문 3-4절에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셨는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갔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또 자기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이리로 지나가시는데 내가 금번에 반드시 예수님을 봐야 되겠다’는 간절하게 소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사람 위로 넘겨다 볼 수 없었고, 또한 예수님을 둘러싸고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뚫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달아 나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뽕나무가 길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면 그 옆의 길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세리장이라 하면 그래도 괜찮은 직책의 사람인데, 요새로 말하면 세관장 같은 것입니다. 그 지위가 상당합니다. 또한 부자이고 그러면 나이도 꽤나 됐을 것입니다.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보통 뽕나무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남 보기에도 그렇고 위신도 안 되고 말입니다. 또한 세리장의 지위를 가지고 아이들처럼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자기의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만나려는 것이 원 목적이었습니다. 무슨 부자다, 세리장이다, 이런 지위, 자존심, 이것들을 다 내버리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한 분 지나갈 때에 내가 보면 최고의 만족이다’라고 생각하고, ‘이 기회 지나갈 때에 못 보면 일평생 예수님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젊은 아이들 같으면 쉽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수 있지만, 나이든 사람은 힘듭니다. 오르다가 떨어질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사람이 많고 예수님을 볼 수 없는 난관 가운데, 어떻게 하든지 이기고 기어코 예수님을 보고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 여러 가지 어려운 난관이 많지만 그런 난관을 다 돌파하여 이기고 기어코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기회라는 것은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나가십니다. 삭개오의 집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지나가십니다. 지나가는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지나가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여리고라는 동네를 쭉 지나가시는데, 그 동네 지나가는 시간이 불과 몇 십분, 얼마 안 걸릴 것 같습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얼마 안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 예수님이 찾아오신 그 기회, 이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갈 수 없는 상황, 여러 부분에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갈 수 없는 면이 많았습니다. 남들이 다 아는 사람이고, 부자이고, 세리장이며, 그 동네에서 그래도 높은 지위에 있는데, 뽕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보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목적이지, 다른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지나보내면 이젠 구주를 영접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생각하지 않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실 때에 보고자 했습니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예수님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시다가 길가의 뽕나무 위에 삭개오가 있는 걸 아시고 우러러 쳐다보셨습니다. 이에 삭개오가 얼마나 기뻤는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자기를 쳐다봐 준 것이 얼마나 반갑습니까? 앞에만 보고 가실 줄 알았는데, 뽕나무 위에 있는 자기를 이렇게 아시고, 우러러 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자기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실 때에 너무나도 감개무량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시며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 집에서 머물러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까지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쳐다보시고, 와주시고, 또 자기를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는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너무 즐거워서 본문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급히 내려와서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얼마나 참 기쁘고 감사할 일인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귀한 일이고, 아주 큰 은혜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무엇 때문에 찾아 오셨겠는가? 찾아오신 것이 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하시러 찾아오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리고에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셨는데, 그 여리고에서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가 하면, 삭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 하나 찾으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도 아시고, 삭개오가 구주를 사모하는 것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가시기 전에 다 아셨습니다. 영을 통해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할 때가 많았는데,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아직 오시지 않으셨는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이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멀리서부터 영적으로 그 나다나엘과 통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렇게 사모하는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삭개오가 여리고에 있는 것을 아시고 가셨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까지 아시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왜 찾아가셨습니까?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가신 것입니다. 오신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것까지는 지금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만 듣고 너무 즐거워서 예수님을 보고, 한 번 바라만 보려고 이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며 삭개오를 불러주신 예수님,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께서 불러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는 말씀, 불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의 이름을 알아주시고, 우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는 그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은 삭개오

기회를 지나보내지 않는, 잃어버리지 않는 삭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구원하러 찾아오셨지만, 그때 상황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가 뽕나무에 안 올라갔다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이 가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함께 가는데, 엠마오라는 동네를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두 제자가 간청을 해서 예수님을 엠마오로 모시고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지나가시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 기회를 지나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못 찾습니다. 기회를 지나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붙들고, 이제는 집에 모시고 들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들어가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붙잡으면 들어가시려고 하십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생명수를 주시고, 모든 은사를 주십니다. 구하는 자, 사모하는 자, 갈급증이 난 자, 목마른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수를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지금 지나가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사모하고 영접해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다 지나가고 맙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회에 예수님을 사모하고 만나보려고 애를 써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이 있어도, 난관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방해되는 것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뽕나무에까지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방거리가 될 만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찾아보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바라보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기회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보고, 찾아보고, 가까이 하고 영접하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영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기뻐서 ‘내가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집에 같이 들어가십니다. 우리 집이 예수님을 모시는 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에 들어가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모시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만 영접하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은 그런 행동을 비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뭘 저렇게 하는가. 예수가 뭐 길래 영접하는가’하고 이렇게 비방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왜 죄인의 집에 들어갔는가’하고 흠을 잡아서 비방하는 사람도 언제나 있습니다. 

재산을 의지하던 삭개오가 회개하고 변함

본문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이렇게 그 속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삭개오가 믿음이 쑥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것이 너무 커서 감격하게 됩니다. 그 때에 회개할 마음도 나오고, 또 선한 일을 할 생각도 나왔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한 것은 선한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쌓아놓고 그것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과거 이 재산을 의지하고 살려고 했던 것이 어리석고 죄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2:1에 보면 “남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은 사배나 갚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배를 갚는다는 것은 성경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자기 죄 지은 것을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리장으로서 세금을 받을 때에 너무 많이 받거나, 불의하게 세금을 거둬놓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네 배나 갚아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성경대로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부자로서 자기 재산을 의지하고 살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 재산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예수님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면 살고, 또 데려가시면 가고,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예수님 한 분이시면 됩니다.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이제 다 해결이 됐는데, 그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재산 절반을 뚝 잘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구제 사업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재산은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쓰라고 주셨는데, 쓸 때 정당하게 쓰고, 또 구제사업도 하고, 하나님의 일 하는 데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색한 것, 남에게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으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믿음을 쓴 것입니다. 믿음을 쓰면 재산을 초월합니다. 그 물질을 가지고 선한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물질 가지고 살아보려고 하며 물질이
우상이 됩니다. 믿음 없을 때는 물질 가지고 살려고 하지만, 믿음이 들어오면 하나님으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됩니다. 그와 같이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물질은 하나님께 바로 쓰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바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주님을 영접을 하고, 주님을 깨닫고,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또한 주님과 사람에게 합당한 일을 행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의 뜻대로만 살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물질부터 주의 뜻대로 처리를 하고, 그 다음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순종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본문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을 영접한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본문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바로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기 위해서, 죄인을 순종시키시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도 이런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이름을 알아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 집에 유하려고 하십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유하시는 예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
수님을 모신 사람은 이제는 주를 위해서 살고, 주의 뜻대로 살고,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리고로 가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뽕나무에까지 올라가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구원하시고 그 집에 들어가셨으며, 큰 구원의 역사가 그 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영접한 자들

나귀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려고 했는데, 벳바게와 베다니 동네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저 동네 들어가면 아직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볼 것인데,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주인이 왜 푸느냐고 물어보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2-34절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했습니다. 나귀의 임자들에게 “주께서 쓰시겠다”하니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나귀 임자들은 벌써 예수님을 위해서 나귀를 바치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저 동네 있는 아무개가 하나님을 위해서 나
귀를 바치려고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어 가서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풀어 오라고 그러셨습니다. 나귀 풀어올 때에 누가 왜 푸느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푸는데, 주인들이 나와서 왜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그들은 가져가라고 단 마음으로 그 나귀를 바친 것입니다. 나귀 주인의 이름은 여기 기록이 안됐지만 무명으로 나귀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35-36절에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라고 했는데, 그것은 나귀 새끼에 안장이 없으니 예수님께서 타시기 위해서 겉옷, 즉 두루마기 같은 것을 제자들이 나귀 새끼에다 얹어서 그 위에 타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왕의 거동을 하시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왕으로서, 영적 왕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려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신 목적이 있습니다. 나귀는 평화의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서 오십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구약에 그리스도께서 ‘나귀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자기 옷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영접한 자들

그렇게 나귀에다 자기 겉옷을 펴고 예수님을 태운 제자들, 예수님께서 타고가실 때 나귀가 걸어가는 길바닥에다가 사람들도 옷을 벗어서 폈습니다. 나귀는 그 옷 위에 턱턱 발을 딛고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 위에다 옷을 벗어서 깔아준 제자와 나귀가 걸어갈 때에 길에다 옷을 벗어서 깔아준 군중들은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옷을 하나님의 아들 앞에,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 갖다가 깔아줬다 하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옷에 앉으라고 할 만한 자격이 못되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마당에 자기 옷이라도 벗어서 깔아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깔아드릴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는 마음으로 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깔아드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가는 길가에도 옷을 깔아드렸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옷을 깔아드린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자기 옷 위로 하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셨는데, 그 얼마나 영광입니까? 

자기 옷 위를 안장으로 해서 예수님을 그 위에 타시게 한 것이 영광이고, 예수님 타고 가시는 나귀가 자기 옷 위로 걸어가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옷 위로 걸어가신다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그 옷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이고, 하늘나라에 쌓은 복이 되었습니다. 그 옷을 그냥 자기가 입고 다녔으면 얼마 안 있어서 다 째져 없어졌을 텐데, 예수님을 위해서 이용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까지 그 옷이 보배로써 상달이 된 것입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신령한 성도에게 평화가 임함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예수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가셨습니다. 본문 37-38절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왕이시여”, 예수님은 왕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왕을 상징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것인데, 이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왕이신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놓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2:14에는 천군 천사가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천군 천사가 부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천사가 찬양합니다. 

본문의 38절에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했는데, 하늘에 있는 평화라는 것은 구원받은 신령한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평화라는 것은 ‘구원받은 신령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이 땅 위에서도 성도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하늘에 속한 자들이고, 벌써 하늘에 올라가 앉은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14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얼마나 지금 복된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 예수이신데,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그 백성들, 하나님을 나귀에 태우고 이렇게 모시고 가는 군중들이 그 얼마나 복된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또한 구속주이신데, 하나님이신 동시에 구속주이십니다. 우리들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오신 구주를 위해 이렇게 옷을 나귀 위에다 깔고, 예수님을 태우고, 그 나귀가 가는 길에다가 옷을 펴고 자기 옷 위로 나귀가 걸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바로 영접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큰 구원이 그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벌써 하늘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신령한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구주로 모시고,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즐거워하고,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하늘 세계의 일인데, 이것을 그 사람들이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는 평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영적 평화가 있을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들을 시켜서 하신 말씀인데,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시켜서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일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여리고 성에서는 가장 큰 일이지만,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나귀를 태우고 올라가는길에 제자들과 모든 군중들에게도 큰 구원이 임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그곳에 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큰 구원이 그 자리에 임했습니다. 

어느 곳이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데가 하늘나라입니다. 뽕나무 위에나 자기 집이나 길가에나 나귀가 있는 곳이나, 그 어디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 곳이고 영적 생명이 사는 곳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 생명이 살아서 다 기쁘고 즐거워하면서 ‘호산나!’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큰 구원이 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고 가면, 이런 큰 구원이 우리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아낌없이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내 옷이라도 바쳐서 주님을 좀 더 영화롭게, 좀 더 잘 모시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쓴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 겉옷이 가장 귀한 것이지만 이것도 바쳐서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하나님을 예수님을 좀 더 영광스럽게 하려고 바쳐드리는 그것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3. 멸망의 날이 가리워져서 알지 못함

그런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본문 39절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왜 책망하라고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왕이라 하고 그리스도라 하며 예수를 이렇게 존귀하게 대하니, 시기가 나서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본문 40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이 잠잠하다면 여기 있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렇게 큰 구원이 임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믿지 아니하고 이렇게 비방만 하느냐, 반대만 하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41-44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을 바라보시고 우셨습니다. 이런 큰 구원이 왔지만 구주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만 지으니, “너의 멸망은 이제 눈앞에 가리웠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날을 알지 못하고, 회개시키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바른 생명의 길로 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거역하고 죄만 짓고 나아가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제 눈앞에 가리워진 것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멸망이 오겠는데, 그것을 눈이 가리워져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는지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한국이나 서울을 바라보실 때에, 하나님의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거역하고 죄만 짓고 나가는 이것을 볼 때에 이렇게 우실 것 같습니다. 큰 구원이 왔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구원 받을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거역하고 죄만 짓고 나아가는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처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심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오는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심판이 오겠는데, 오늘날 이 세상은 소돔 고모라와 같습니다. 음녀(淫女)와 같은 이 대도시들에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심판이 멀지 않은 줄 알고,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참으로 모시는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히겠습니다.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누가복음 19:1-10 삭개오의 신앙,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삭개오의 신앙
누가복음 19:1-10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 난관을 돌파한 신앙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심

본문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라는 도시는 염해 위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 지방은 향품이 많이 나서 경제적으로 부유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그곳에 세리장을 파견하였고, 세관도 그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는데, 세리장이며 또한 부자입니다. 당시에 세리장은 돈을 꽤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로마정부에서 세금을 받을 때, 세리장들에게 청부를 주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지방에 “1년에 얼마씩 세금을 상납하라”는 청부를 주고 세금을 징수하는데, 그 지방 세리장의 자유대로 세금을 거둬들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정부에서 청부한 액수보다 몇 배나 더 세금을 많이 받아도 괜찮았습니다. 세금을 백성들에게 많이 받아서 로마정부에는 정해진 세액만 상납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방 세무서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세금을 많이 착복하여 치부(致富)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리라고 하면 백성들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 백성들의 물질을 착취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본문 3절에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보았는데, 작은 키 때문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려고 했지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상당히 작았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뚫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옆에서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본문 4절에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한 번 보려고 늘 사모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늘 들었으며, ‘어떠한 예수님인가? 한 번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항상 사모했고, 또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예수님을 꼭 뵈어야겠다, 영접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말이 삭개오에게 들려왔습니다. 이에 ‘옳다, 이번에 내가 예수님을 뵈어야겠다, 이 지방에 예수님이 한 번 오시기가 아주 힘든데, 이번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보면 한번이라도 보는 것이고 이번 기회를 잃어버리면 앞으로 보기 힘들다,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보겠다는 간절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들이 많고 키가 작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가지 난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할 때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난관이고, 키가 작은 것이 난관입니다. 키만 크면 넘겨다보면 되겠는데 키가 작으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며 포기하고 집에 돌아갔으면 다 끝났을 것입니다. 일생 동안 예수님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꼭 한 번 보겠다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든 봐야 한다, 이번 기회에 못 보면 일생 못 볼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도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무슨 방도가 없을까?’라고 삭개오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어 뚫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좀 들어가 봅시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들어가 보게 하겠습니까? 서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새치기하겠다고 하면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원망해야 쓸 데 없는 것이고, 원망하면 죄만 짓는 것입니다. 또 키가 작아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원망해도 쓸 데 없습니다. 본래 작게 생긴 것을 갑자기 크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낙심하기 쉽지만 삭개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인데 그 외의 것을 원망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꼭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을까? 얼핏 생각난 것이 뽕나무에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앞으로 뛰어나가 뽕나무에 기어 올라갔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리장 쯤 되었으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장’자리, 즉 세리장 쯤 되려면 40~50대는 되었을 것 같습니다. 또 삭개오는 부자이므로 몸도 뚱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삭개오는 키가 작고, 몸은 뚱뚱할 가능성이 있으며, 나이도 꽤 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그 동네에서 세리장은 로마 관리이므로 나름대로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이들같이 뽕나무 위에 기어 올라간다는 것은 세리장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새 군수, 경찰서장, 세무서장 등이 보통 유지급인 것처럼 당시 세리장도 상당한 유지입니다. 그 유지급이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군수가 뽕나무에 기어 올라갔다고 해봅시다. 저 따위가 무슨 군수냐?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그럴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삭개오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다’는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속에서 불붙듯 올라왔기 때문에 체면을 차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는 생각할 바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식구들도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멸시할 수 있습니다. 혹 주위에서 자녀의 동무들이 “너의 아버지, 저기 올라갔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얼마나 멸시하겠습니까?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올 때 다윗이 그 앞에서 춤추는 것을 보고 부인 미갈이 멸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또 뽕나무에 나이 많은 사람이 올라가면 떨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기어 올라가도 괜찮은데, 나이 한 50쯤 되면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모험을 무릅쓰고 또 위신이나 자존심, 명예심 등을 다 내어놓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한 번 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실은 뽕나무보다 더한 데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 하면 아무데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가 어떻게 장애가 됩니까? 아무데라도 올라갈 수만 있으면 다 기어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할 것입니다. 소나 나귀의 잔등이에라도 기어 올라갈 수 있고, 나무 단 쌓아 놓은 데도 올라갈 수 있고, 낫가리 위에도 올라갈 수 있고, 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데 체면이 어디 있으며, 위신이 어디 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겠냐, 는 것을 왜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보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해서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속에 불붙듯 올라왔기 때문에, 어디를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데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남이 못 올라가는 데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남이 멸시와 천대를 하여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뽕나무를 쳐다 보신 예수님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우러러 바라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날 네 집에 가서 유숙하여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삭개오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한량없는 즐거움에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분명하다, 내가 뽕나무에 오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또 삭개오라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을까? 또 나 같은 죄인의 집에 어떻게 오시겠다고 하시는가?’, 감개무량한 마음이 생기고 믿음이 쑥 들어갔습니다. 이에 과연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뽕나무를 쳐다보며 가셨을까요? 보통 앞만 보고 가지, 나무 꼭대기를 왜 쳐다보겠느냐는 말입니다. 뽕나무 위를 안 보고 지나가셨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요? 예수님은 벌써 다 아셨습니다. 여리고에 가시기 전부터 그곳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말해 드리지 않아도 모두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것을 다 알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신 목적은 삭개오를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니고 삭개오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이므로 내가 삭개오를 가서 만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시지 않았어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시고 “우러러보시고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찾아오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예수님을 사모하여 간절히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 멸시받는 것, 위험한 것, 이 모든 것을 다 무릅쓰고 뽕나무 위에 올라간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 자기는 키가 작고, 죄인이라는 것 등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조건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3가지 난관을 다 돌파하고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보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교회와 집에 찾아오셨고, 우리 심령 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곳에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하시러 찾아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불러서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과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가서 유하여야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머물 데가 없어서 그 집에 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집에 선물을 주시려고 가시려는 것입니다. 그 집에 구원의 선물을 주시려고, 사죄와 칭의의 선물을 주시려고, 의를 주시려고, 영생을 주시려고, 삭개오를 불러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세리 노릇을 하다 죄만 짓고 망하겠으므로 예수님께서 가만히 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삭개오는 택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만히 두시면 죄만 짓다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차차 뒤로 미끄러져, 그만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죄만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는 일 안하고, 믿음은 다 내어 버리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과 더불어 짝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이름을 부르시면서 ‘너 거기에 있지 말고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네가 살고 있는 이 여리고, 네가 하던 일, 네가 생활하던 그 행태, 네가 하던 행동 등, 그대로 두면 안 되겠으므로 속히 거기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바라만 보지 말고 어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내려오라고 하실 때 내려와야 합니다. 내려오는 것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로 내려가야 합니다. 겸손히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로 내려가라는 말입니다. 바라만 보지 말고 더 가까이 예수님 곁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있던 위치에 있지 말고,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더욱 더 예수님을 찾아가는 생활, 한걸음 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생활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날마다 가까이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뽕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

삭개오는 내려가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악수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악수했다는 말씀은 없는데, 아마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주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너무 귀하고, 삭개오는 예수님이 귀합니다. 그래서 한참 서로 쳐다보았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어떤 성도가 “이병규 목사를 찾아 왔다”고 하길래 “내가 이병규”라고 하니 얼굴을 가까이 하고 한참을 쳐다봅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느냐고 하니 여러 해 동안 한 번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어 한참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쳐다보아야 아무 볼 것도 없는 것을 쳐다보면 뭘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한참 쳐다보면 그것은 참 볼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아야 볼 것 없습니다. ‘주여, 바라봅니다’하고 예수님만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더 가까이,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내려오시라고 하시는데,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또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자리, 그 자리에까지 나아가야겠습니다. 이 기회가 지나가면 못 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한 번 지나가시면 다시 오시기 힘듭니다.

삭개오는 그 기회를 잘 붙잡았습니다.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붙잡지 않으면 기회는 지나가버립니다. 오늘 할 일을 오늘에 해야 합니다. 지금 할 것을 지금 해야 합니다. ‘내일 하겠다, 이 다음에 하겠다’하면 결국 마귀에게 다 빼앗깁니다. 내일은 마귀의 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일 잘 하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잘해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너라” 하실 때에 내려가야 합니다. ‘이만 했으면 족합니다’하지 말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야 말입니다. 

본문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한 사람은 마음이 즐겁습니다. 또 영접할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로 발견한 사람은 그 속에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모시는데 왜 즐겁지 않겠습니까? 한량없는 즐거움이 그 속에 생깁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만족하게 됩니다.

예전에 최권능 목사의 집이 조그만 오두막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선교사가 최권능 목사의 집에 온다고 하니 사모님이 “이런 집에 어떻게 선교사가 오겠습니까?”하고 좀 꺼렸다고 합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가 “아니, 우리 집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선교사가 왜 못 오겠는가? 예수님이 계신 얼마나 좋은 집인데 못 오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선교사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형편없는 집인 모양인데, 그래도 최권능 목사는 바로 그 집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크고 훌륭한 외관의 집들보다 더 좋은 집으로 알고 항상 만족하며 감사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한 번은 최권능 목사의 따님이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자기 아버지의 신앙을 간증하면서 전도한다고 합니다. 그 따님이 우리 강해서를 한 질 달라고 해서 주었습니다. 강해서를 가지고 가르쳐야지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전화가 왔는데, 강해서 가지고 전도하니 다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 못 다한 것 다 하시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셋집이라 해도 하나님을 모신 집이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집입니다. 두, 세 사람 밖에 누워있지 못할 만한 좁은 방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모신 집이 왕궁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죄인으로 지목하고, 자신의 집을 죄인의 집이라고 하지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본문 7절에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니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죄인의 집도 모르고 들어갔다”고 비방을 했습니다.

2. 말씀대로 행하는 신앙

회개한 삭개오

본문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4배나 갚겠다는 말은 출애굽기 22장 1절에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라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또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는 것은 이제는 “성경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또 성경대로 바로 하는 마음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기쁨으로 준 삭개오

그 다음에 자기의 소유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믿음을 쓴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너무 감사해서 내가 무엇으로 보답을 할까? 하나님을 내가 무엇으로 기쁘게 해 드릴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는데, 내 재산 절반은 팔아서 구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그 재산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 사용하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해서 인색한 사람은 믿음을 쓰지 못합니다. 물질에 대해서 믿음을 써야만 다른 데에도 믿음을 쓸 수 있습니다. 물질이 제일 기초입니다. 첫 계단이 되는 물질에 대해서 믿음을 안 쓰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예 절반 뚝 잘라서 “이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에 쓰겠습니다”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 재산 절반을 팔아서, 뚝 떼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에 써야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선교하는 일도 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는 것, 믿는 일에 쓰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 재산 절반을 아예 팔아서 뚝 떼어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쓰겠습니다’는 신앙을 가지면 삭개오와 같은 신앙을 소유한 것입니다. 

지난날, 없이도 살았는데 절반만 있어도 많은 것입니다. 6.25때 피난 갔던 일을 생각하면 절반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신학생들도 처음 입학할 때 빈손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4, 5년 지나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면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또 더러는 조사가 되어서 교회 나갈 때면 짐을 한 차 싣고 갑니다. 한 번은 “언제 이렇게 많이 모아서 한 차 싣고 가느냐?”라고 물어봤더니 다 주워 온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 동네에서 부자들이 새 것으로 사다 쓴다고 좋은 물건들을 내어다 버릴 때 그것들을 주어다 놓으면 아주 멀쩡하하다고 합니다. 나도 사무실에 주어다 놓은 옷장 두어 개가 있는데 모두 멀쩡합니다. 빈손 들고 왔어도 4, 5년 정도 되면 한 차 싣고 가는데, 우리가 왜 못살겠습니까? 다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해서 마음을 바로 해야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물질에 인색한 사람은 그저 쌓아놓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기도 못 쓰고 죽습니다. 죽은 다음에 그 자손들이 그것을 다 지키겠습니까? 그러기도 쉽지 않고, 또 자손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 그 물질 때문에 방탕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한 삭개오가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아예 처음에 소유 가운데 절반 뚝 잘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남은 것 가지고 토색한 것을 4배로 쳐서
갚으면 그 재산 다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했습니다.

4배나 갚겠다는 말은 성경에서 나왔는데, 성경대로 하겠다는 정신이 삭개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즉, 성경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는 것을 보니 삭개오에게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죄는 날마다 찾아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전 삭개오의 생활이 법에 걸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금은 로마정부에서 받으라고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받았고 또 바칠 것을 다 바쳤으므로 저촉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고소해도 걸릴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생각할 때에 삭개오에게 죄가 많습니다. 이에 토색한 것이 있으며 4배로 갚아야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른 생각하면 다 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죄가 많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눈에 있는 티고, 자기 속에 있는 죄는 들보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속에는 여러 가지 죄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입술로 지은 죄, 행동으로 지은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되 부족한 것, 또 순종하지 못한 것 등 이러한 것들이 다 죄인데 그것을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성경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생(餘生)은 ‘성경대로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겠다’라고 의식하며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라는 삭개오의 말은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정한 세 외에 더 받지 말라”고 한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한 세 외에 더 받는 것은 자기
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바, 바로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간음하는 자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다 있습니다. 각자에게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말씀이 다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주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봄철이 되어 날이 따스해지고 곧 꽃이 피겠는데, 이제 주일에 꽃 구경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안 가려고 해도 집안 식구가 가자고 하면 할 수 없이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운 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심판받는 사실을 모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일에 놀러 다니면 안 됩니다. 예배시간에 빠지고 주일날 놀러 다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팔아먹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식구가 가자고 해서 가면 식구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어기고 다른 것을 따라가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우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우상을 이겨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이겨야 할 것을 이겨야 합니다. 또 마땅히 자기가 지켜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세리가 지켜야 할 진리는 정한 세 외에 더 받지 않는 것입니다. 더 받았으면 4배나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지켜야 할 말씀을 바로 지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가 다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욕심 부리는 사람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십일조 드리지 않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서 인도하시는데, 신앙 양심을 써야만 합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켜야 할 진리를 지키면 됩니다. 

3. 구원받은 삭개오

본문 9, 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집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즐거워하며, 또 예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진리를 그대로 지키는 사람의 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심령 속에 예수님을 모셨으므로 벌써 구원이 이르렀고, 또 재산을 가지고 믿는 일에 쓰게 되었으므로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모하여 난관을 돌파하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애를 써서 예수님을 만나고, 죄를 회개하고, 자기가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것을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전심을 기울여서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을 이제는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내려오너라” 할 때에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죄인이라서 못갑니다’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모시면 다른 사람이 비방하지 않을까, 이런 염려로 “못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은 천재일우의, 큰 복인데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즐거움이 생기고 회개가 나오고 소유한 재산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지켜야 할 성경 말씀을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오늘날 우리 에게도 오셨습니다.

2017년 9월 4일 월요일

마태복음 9:1-8 반신불수가 완전하여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반신불수가 완전하여짐
마태복음 9:1-8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1. 병의 원인 

본문 1-2절에,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신 것을 보면, 이 중풍 병이 죄 때문에 들린 것이 분명합니다. 병이 죄 때문에 들리는 것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병 들리는 것도 있고(요 5장), 마귀로 인해 병 들리는 것도 있고, 신체가 고장이 나서 되는 병자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마귀 때문에 들리는 것도 있지만, 전부 마귀 때문에 병 들린 것이라고 하면서 마귀 내쫓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김기동씨의 경우 모든 병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귀만 내쫓으면 병 낫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병은 죄 때문이기도 하고, 마귀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죄 때문에 병이 들렸습니다. 

본문 3-5절에,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인 반신불수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니까,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참람하도다’하며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사람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 중에 어느 말이 쉽겠습니까? 여기서는 “걸어가라”하는 것이 더 어려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병이 났기 때문에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에는 죄 사함을 받은 결과가 담겨있습니다. 걸어가게 되면 죄 사함을 받은 증거가 됩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은, 병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이고,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은, 죄 사함의 결과를 가리키는데 어느 것이 더 쉬운 말입니까? 결과가 더 어려운 것입니까? 원인이 더 어려운 것입니까? 결국, 죄 사함을 받아야 걸어가는 것이니까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쉬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2. 중풍병자를 고치심

본문 6절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걸어가라 하실 때에 걸어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줄을 너희가 알라는 말씀입니다. 걸어가는 것이 죄 사함을 받은 결과이니까,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걸어가지 못합니다. 걸어가라 할 때에 걸어가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7절에,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병자를 보고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셨고,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병자가 곧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네 사람이 메고 다니던 중풍 병자입니다. 또한 그 중풍 병이 오래된 병자입니다. 그 반신불수가 되어 침상에 누워 걸어가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환자를 보시고 뭐라고 하습니까? “일어나라”고하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실 때에 일어나면 됩니다. 아무리 오래된 병이어도 “네!”하고 일어나면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38년 된 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실 때에 일어나면 병이 38년 되었어도 일어나고, 중풍병자도 일어나고,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누웠던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자가 자기의 침상을 가지고 가니까 기쁘고 즐거움으로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8절에,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했습니다. 

3. 믿음의 반신불수

반신불수, 이것을 예수님께서 고치러 오셨는데,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고침을 받았습니까? 요새, 믿음의 반신불수가 많습니다. 한쪽은 건전하고 한쪽은 병들어서 못 쓰는 믿음의 반신불수 입니다. 한쪽은 괜찮은데 한쪽이 병들어 못 씁니다. 이렇게 온전하지 못합니다. 요새 신자들이 어떤 면으로 보면 괜찮은데, 다른 쪽으로 볼 것 같으면 다 병신입니다. 다 병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힘을 못 씁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면은 건전하여 잘 믿는 것 같고 괜찮은 것 같은데, 다른 면을 보면 이것이 개차반입니다. 나가서 못된 짓 다하고 돌아가고, 죄만 짓고 돌아가고, 아무 힘을 못 씁니다. 약간의 반신불수는 어떻게 걸어갑니까? 한쪽 다리는 잘 올라갔다가 한쪽은 짧게 떨어집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한 주일은 잘 나왔다가 또 다른 한 주일은 쏙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신불수 입니다. 어떨 때에 보면 잘 믿는 것 같은데, 어떨 때 보면 쏙 들어가서 없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어떤 날은 잘 나오고 어떤 날은 쏙 들어가서 없습니다. 그것이 반신불수 입니다. 기도원에 오는 것도 어떤 날은 잘 오는데, 어떤 날은 쏙 들어갔습니다. 오늘도 쏙 들어간 사람 더러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십일조를 내는데, 어떤 때에는 안냅니다. 어떨 때에 십일조 안내는가 하면 액수가 많을 때 안냅니다. 만원에 천원, 십만 원에 만원 이렇게 액수가 적을 때에는 잘 하는데, 한 일억 대의 돈이 들어왔으면 얼마를 십일조 해야 합니까? 천만 원을 해야 합니다. 또 십억이 들어왔으면 얼마를 해야 합니까? 일억을 내야합니다. 이것이 힘듭니다. 그 때에 쏙 들어가기 쉽습니다. 그렇게 반신불수 신앙이 많습니다. 

시종일관, 추우나 더우나, 분주하나 괴로우나, 계속 걸어 나가야 되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어떤 때에 쏙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통 때에는 잘 나가다가 어떤 때에 쏙 들어가는 것이 반신불수 신앙인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것을 늘 메고 다니고 하면 그 사람이 무슨 사람구실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고쳐주시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십니다. 반신불수를 고쳐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십니다. 

4.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려하니까 사람들이 많아서 갈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병자를 메고 갔다고 했는데, 여기 메고 간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자들입니다. 지붕에 그 반신불수를 데리고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네 사람이 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반신불수를 데리고 올라간 자들의 신앙도 아주 좋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그 병이 나을 줄을 믿는 신앙, “믿습니다”하는 반신불수의 신앙, 메고 간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고쳐주실 줄을 믿습니다”하는 신앙입니다. 난관이 많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고침을 받아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모두 다 같습니다. 난관을 돌파하고 달아 내리우니까 예수님께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믿습니다’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일어나라”고 하실 때에는 일어나면 됩니다. 벌떡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는 말씀하실 때에는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일어나게 하시는 모든 권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그 말씀 속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이루어 놓으시는 권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하고 일어나면 벌떡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신불수가 다 낫습니다. 다리가 다 말라서 비틀어지고 말라지고 꼬부라져서 안 펴지고 해도 일시에 다 펴지고 그 혈기가 다 통하며, 일시에 다 나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하실 때에 “못 일어납니다”하면 못 일어납니다. 일어나라 하실 때에 “예!”하고 일어나려고 힘을 쓰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하실 때에 “제가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습니다. “제 다리가 가늘어지고 꼬부라지고 비틀어졌는데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라는 잔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일어나라!”하실 때에 “예!”하고 일어나면 다 일어납니다. 병자가 올 때에 자기 힘이 아니라 메여져서 왔습니다. 메는 사람들이 가자고 하니까 메여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실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믿고 “예, 오늘부터 일어납니다”한 것입니다. 일어나면 일어나게 됩니다. “힘이 없습니다. 못 일어납니다”하면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능인데, 무엇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능인데, 아무리 말라 비틀어졌어도 일어나고, 38년 되었어도 일어나고, 58년 되었어도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실 때에 일어나십시오. 절름발이들 다 일어나십시오. 한 주일은 나왔다가 한 주일은 안 나오는 사람들, 다 일어나십시오. 또 무얼 좀 하다가 못하는 사람들 다 일어나십시오. 빠지는 사람들 다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을 하니까 그 능력이 쑥 들어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습니다. 
일어난 다음에는 네 침상을 가지고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 침상을 가지고 가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일어났으면 내어버리고 가도 상관없을 텐데, 환자의 냄새나는 침상을 병이 낫고 난 뒤에 가져갈 생각이 없겠지만, 필요가 없겠지만, 버리고 가고 싶겠지만, 그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하실 때에 “네!”하고 둘러메고 가야합니다.

그 침상을 두어두면 어떻게 됩니까? 또 와서 드러눕고 싶어집니다. 거지노릇 사흘만 하면 그보다 더 좋은 팔자가 없다고 하는데, 누워 있을 때에 좋은 것도 있습니다. 누워먹는 팔자가 좋았는데 일어나 한참 걸어가려면 힘이 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워있을 때에는 누가 먹을 것을 갖다가 주었겠지만, 이제는 걸어 다니니까 누가 먹을 것을 갖다가 주겠습니까? 힘들어서 다시 가서 누우면 좋겠다고 하고 다시 가서 누우면 안 됩니다. 아예, 네가 병신노릇을 하고 거기서 발버둥을 치고 냄새가 나고, 걸어가지 못하고 병신 노릇하던 것 그 자리를 아주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두어두고 가면 안 됩니다. 자리를 들고 가서 없애 치워야지, 자리가 있으면 가다가 힘들면 또 가서 누울 것입니다. 다시 가서 누울 수 없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끊어버렸으면 다 집어치워야지, 그것을 두어두면 이 다음에 또 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렇게 다 집어서 치우고, 이제는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리를 두어두지 말고 메고 가야 됩니다. 드러누울 곳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5. 갈 길을 찾으면 길이 있음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오면 고침을 받을 줄 믿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께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내려가는 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리 난관이 첩첩으로 가로막히고 갈 길이 없어도, 그래도 갈 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갈 길이 없어도 찾으면 갈 길이 있습니다. 갈 길이 어디입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서로들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겹겹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침상이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겠습니까? 

예수님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다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가 되어서 자기가 은혜를 받아야하고, 자기가 나음을 얻어야 하고, 자기가 복 받으려고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생각 못합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이기주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보니까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고, 남을 위하는 생각은 없고 전부 이기주의자들이라는 생각에 “가자. 여기서 무얼 바랄게 있겠는가?”하고 돌아갔으면 그 반신불수는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그 병자가 예수님 따라다니는 사람들 보고 왔습니까? 누구를 보고 왔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왔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이기주의이고 양보하지 아니하는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리 안 내어주면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그래도 “나는 나가야겠다. 예수님께 가서 해결을 받아야겠다”하니까 길이 하나 났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지붕에 올라가서 구멍을 뚫고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저 앉아서 길이 없다, 못한다 하지 말고, 아예 나서면 길이 생깁니다. 

코소보에 다음 주간에 목사 한 사람을 보내는데, 코소보에 가면 말이 제일 문제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러시아말도 못하고, 코소보 알바니아 말을 한다고 합니다. 누가 알바니아 말을 알겠습니까? 그래도 그저 “믿습니다”하고 가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어떻게든 열어주실 것을 믿으면 됩니다. 다음 주간에 목사님 하나 가는데, 가면 어떻게든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가면 전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실 것이고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지붕으로 해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붕 뚫을 때에, 집주인은 예수님 오셨더니 집다 허물어진다고 걱정하며 책망도 했을 것입니다. 그까짓 주인의 욕하는 말은 귀에도 안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고, 자기의 병이 낫는 것이 목적이지, 그런 욕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소자야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참 좋았을 것입니다.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조금 있으니까 바리새교인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하시더니, “일어나라!”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얼마나 천하의 희소식이었겠습니까? 그 말씀에 일어났더니, 그 다음에는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침상이 자기가 누워있던 것인데 조금 무거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들고 걸어가니까 발목에 힘이 생기고 안 펴지던 것이 펴져서 척척 걸어가는 것입니다.

6. 온전한 신앙을 갖고 걸어가라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반신불수, 믿음의 절름발이를 고쳐주시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실제로 신체의 반신불수를 고쳐주셨는가 하면, 모든 믿음의 반신불수도 일으켜 고쳐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것의 표징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전부 표징입니다. 병 고쳐주시는 목적은 영적인 병을 고쳐주시는 것에 대한 표징, 그 증거로 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신불수를 고쳐주시는 표징으로 이런 신체의 반신불수를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표징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다 고침 받아야 됩니다. 병신노릇하지 말고, 쓰러져 있지 말고, 한쪽을 못 쓰고 있지 말고,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야 합니다. “예!”하고 대답할 때에 병이 다 낫습니다.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병이 다 나아서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걸어가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마태복음 8:19-27 머리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라가자 이병규목사성경간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머리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라가자
마태복음 8:19-27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1. 머리 둘 곳이 없으신 예수님을 알고 따라가라

본문 19-20절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 어디를 가시든지 나는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따라가면 잘 될 줄 알고 따라간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 따라가면 여러 면에서 잘 될 줄로, 세상에서 잘 될 줄로, 또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행복을 누릴 줄 알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지 십자가 지지 않고 따라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것, 머리 삼고 있던 것, 다 포기하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은, 쉬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개 베고 쉬는 것처럼 쉬는 것, 휴식, 안식, 평안을 누리는 것, 이것이 머리 둘 곳인데 ‘나는 세상에 그런 것이 없다. 너도 나를 따라 오려면 세상의 평안과 세상의 안식과 세상의 행복과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고 따라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머리 두실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머리 두실 곳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두실 곳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머리를 두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고, 언제나 편히 쉬고, 거기서 행복을 누리고, 거기서 모든 충만, 만족과 충만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뜻은, 하나님께 머리를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머리 둘 곳이 없다’ 하는 말의 요지는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아야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간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편히 쉬고,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기쁘고 즐거움을 누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삼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머리 둘 곳을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아야 됨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머리를 세상에 둔다면, 하나님께 둘 머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 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머리를 두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고, 편히 쉬고, 행복을 누리고, 만족하고, 충만하고,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머리 둘 곳을 삼고 따라가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안에 머리 둘 곳을 삼지도 않고, 세상에도 머리 둘 곳을 삼지 않고, 둘 다 없으면 그것은 불쌍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안식을 누리시는 주님이신데, 편히 언제나 쉬시는 예수님이신데,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항상 마음이 즐겁고, 항상 마음이 안식을 누리고, 항상 쉼을 얻고, 언제나 은혜가운데 강건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2. 예수님을 중단 없이 따라가라 

본문 21-22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 중 또 다른 하나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하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9:59-62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부친을 장사하고
와서 예수님을 좇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보고 “죽은 자들로 저희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또 다른 사람이 나왔는데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친 장사를 하고 좇겠다는 것은, 부친이 세상 떠난 것이 아닌데, 앞으로 부친을 모시고 있다가 세상 떠난 다음에 와서 예수님을 좇겠다는 것입니다. 부친이 안 믿는다면, 그 부친의 영혼이 죽은 것인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끼리 장사하게 두어두란 말씀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인데, 안 믿는 사람은 다 영혼이 죽은 자니까 죽은 사람끼리 장사하게 두어두고, 너는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는 살았으니까 산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산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가정을 작별하고 나서 좇겠습니다”하니까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족에게 작별하는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따르는 것을 ‘중지’하고 가족과 작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따르는 것이 생명인데, 생명 길을 중지하고 가족과 작별하겠다는 것은, 가족을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것이고, 부친을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다 앞세우는 것은 전부다 우상입니다. 부친이든 가족이든 돈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첫째이지 가족이 첫째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효도해야 되고, 예수님 따라갈 때 효도할 수 없으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족 작별하는 것도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가족을 위하는 것이고, 예수 따라가면서 가족을 위할 수 없으면 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 보다도, 부친보다도, 가족보다도, 예수님을 첫째로 하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됩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삼고 예수님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고 따라가야 됩니다. 그리고 산 자는 산 자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악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족을 돌보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첫째로 하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가면서 가족을 돌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상이 되고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첫째로 하고 따라가면서 예수님께 몸과 마음 다 바쳐놓고 주를 위해 따라가면서, 다른 것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머리 둘 곳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따라가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는 우리가 다 되어야 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걱정이다, 무엇이 안 된다, 무엇이 속상하다, 무엇 때문에 신경 쓰인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평안하고, 항상 안식을 누리고, 항상 쉬고, 언제나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근심 걱정이 다 뚝뚝 떨어져나갑니다.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데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 예수님을 머리 둘 곳으로 삼고 따라가라

본문 23-27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 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참 가는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하시고 편안히 주무셨다고 했습니다(막 4:38). 그런데 노도광풍이 일어나가지고 물결이 굉장히 높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배가 지금 당장에 전복되어가지고 바다에 다 빠질 것 같았습니다. 높이 올라가니까 배가 뒤집어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우면“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랬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랬습니다. 다 죽게 됐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손짓 하시며 설명) <<바다에 나갔다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배가 이렇게 바다로 가다가 물결이 일어나서 이렇게 됐다가 또 이렇게 됐다가 이렇게, 이렇게 되었는데, 여기에 사람이 있으면 물결이 와서 이것이 올라갈 때에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물결이 올라가면 배가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사람 타가지고 사람하나 있었다라고 하면 물결이 이렇게 될 때 이리로 불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 죽게 되었습니다. 또 물결이 배에 다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 뒤에서 평안히 고물(배의 뒤)을 베개하고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와서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하며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상당히 무서워한 것 같습니다. 정신 다 없어져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잠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잠을 주무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평안히 잠을 주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노도광풍이 일어나고 배가 아무리 당장에 전복될 것 같고 했지만,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시는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잠을 주무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았으면 하나님께 다 맡긴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 주실 줄 믿고 주무셨습니다. 범사에 믿으며, 범사에 바라며, 범사에 견디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바다를 내신 것도 하나님께서 내셨고, 바람을 내신 것도 하나님께서 내셨는데, 그저 막 내신 것이 아니라 한계를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뚜껑을 덮어 놓으셨고, 아무리 물이 철렁거려도 뚜껑을 덮어놓으셔서 그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자나 짐승들이 무섭게 돌아가지만 코를 다 꿰고 목을 다 매가지고 잡고 계십니다. 무서운 사냥개가 있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사냥개의 끈을 잡고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사람을 죽이려는 무서운 황소라도 아버지가 황소고삐를 잡고 계십니다. 코를 꿰어놓고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뚜껑을 다 덮어놓고 있으십니다. 아무리 솥에 물이 끓고 있어도 뚜껑을 덮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시되 한계를 달아 놓으셨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바닷물은 모래의 한계를 넘어오지 못합니다. 여러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소의 고삐를 누가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고삐를 쥐고 계십니다. 아무리 바람 불어도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면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이 있는데, 바람 아무리 불어도 고삐로 목 매가지고 사자나 무슨 황소나 다 아버지께서 잡고 계시고, 아무리 바다 물결이 높이 올라가도 한계 안에 있습니다. 한계 여기까지 밖에 못 옵니다. 여기 안에서만 찰랑 거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정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한계를 다 정해 놓으시고, 또 목을 매서 고삐는 아버지가 쥐고 계시고, 그러니까 겁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아버지께서 지켜주시고, 하나님으로 생명을 삼고 하나님으로 안식을 삼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을 계속 누리고 있으시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셨습니다. 무엇하러 보내셨냐 하면 구속사역을 이루시려고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분이 아버지이시고 목적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려고 보내셨는데 죽을 수 있습니까? 구속사역 이루기 전까지 죽을 수 있습니까?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 안 죽으십니다.
요한복음 8:20에,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고 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잡으려고 하지만 잡는 사람이 없습니다. 못 잡았습니다. 왜 못 잡았습니까?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못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사에 때를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 안 죽습니다. 바다에 안 빠집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안 빠집니다. 안 죽습니다. 구속사역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어야만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셔서 구속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때가 안 되었는데 바다 물이 아무리 흉흉하다 할지라도, 때가 안 되었는데, 왜 죽겠냐는 말씀입니다. 죽을 염려가 절대 없습니다. 죽을 염려는 절대 없고 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장해 놓으셨습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을 보증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고삐는 누가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결의 꼭지, 바람의 꼭지, 한계의 뚜껑을 다 덮어 놓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더 못 올라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바람아 불어라. 물결아 쳐라. 그래도 내 아버지께서 너의 목을 매서 네 고삐를 다 붙잡고 있다. 염려 할 것 없다. 그리고 구속을 위해서 보내셨으니까 구속을 이루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안 데려가실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확신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바람 불어도 문제없습니다. 바람이 조금 부나, 많이 부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편안히 고물을 베개하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잠이 더 잘 왔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 잠재울 때 그네 같은 것에 흔들흔들해두면 더 잘 자지 않습니까? 가만히 바닥에 눕혀 놓는 것보다, 아이들 왔다 갔다 할 때 더 잘 자는 것처럼, 예수님께
서 파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까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러니까, 바람이 더 시원시원한 것이 더 잘 주무시지 않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심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나아와 깨우며 말하기를 “주여 구원하소서. 죽겠나이다” 그랬습니다.
마가복음 4:38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지금 ‘아고고, 아고고’ 하면서 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고고, 아고고’ 했을 것 같습니까? 배가 올라갔다 이리로 치면 일단 ‘아고고’ 하면서 붙잡고 매달리고 일어설 적에 ‘아고고’ 하면서 이쪽으로 왔다 갔다 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한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한 것을 보면 그 말에 짜증이 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왜 안 돌아봐 줍니까?” 하는 제자들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왜 그랬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4:40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것이 여기서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이 언제나 믿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다음에도 귀신 하나 못 쫓아내가지고, 예수님께 “패역 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믿음이 없고 패역 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아야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다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인데, 왜 이렇게 믿음이 없습니까? 몇 년 동안이나 같이 계시면서 가르치셨는데, 몇 년 동안 있으면서 같이 가르치시고 또 하나님을 다 보여주시고, 예수님께서 신앙의 모든 모본을 다 보여주시고, 어떻게 믿는 것인지 다 보여주셨는데 제자들이 믿음이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 책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 책망 안 받을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시고 살지 않으셨습니까? 이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으로 좀 머리 둘 곳을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세상은 머리 둘 곳을 삼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 그 믿음, 그 믿음이 너희에게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너희가 편히 쉬지도 못하고 이렇게 난리가 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왜 너희에겐 이렇게 없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들 곳을 삼았다고 할 것 같으면 너희가 이렇게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서워하지 않았어야 하겠는데 무서워하는 것을 보니까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제대로 삼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머리를 제대로 두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
다. 언제나 만족과 충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하고 시기하고 원망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너희가 이런 상태에 있겠느냐?’라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또 무슨 믿음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바다 물결도 또 바람도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 또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인명재천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손에 다 있는 것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바람 부는 것도 누구 손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고, 물결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 주권, 운전해 나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세계를 운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생명, 자기생명이 우상이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생명인데, 예수님의 피에 우리는 팔리어, 우리의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 것입니다. 나는 죄로 인해서 죽은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인해서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제 산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불러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속사역을 하시려고 불러주셨습니다. 구속사역을 하려고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는데, 구속을 이루기 전에 왜 죽겠냐는 말입니다. 왜 데려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목적은 구속사역을 위해서인데, 한 몫 쓰시려고 불러 주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주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이 죽을 수 있습니까? 죽이시려고 부르셨습니까? 쓰려고 부르셨는데, 구속사역에 사용하시려고 부르셨는데 때가 되기 전에 왜 데려가시겠냐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 안 죽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데려 가십니다. 예수님도 때가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되시고, 제자들도 때가 되면 데려가신다는 말입니다. 때가 되기 전엔 안 죽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죽으려고 목 내놓고 다녀도 안 죽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또 자기네들을 불러 주신 목적이 구속사역을 위해서 불러주신 줄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명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 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자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라고 했는데, 우리는 예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아야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되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인 줄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줄을 믿고 나가야 되고, 예수님이 영생이신 줄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생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벌써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육신이 살았어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을 가지고 살고, 육신이 세상을 떠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나 저 세상에서 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쓰고 살던 장막 집만 벗어놓고 저기 가서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서 살던 사람이 서울 와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시골에서 농사하는 더러워진 옷 끼고 살다가 벗어놓고, 도시에 와서 또 이젠 다른 것 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난 부산에서 왔습니다.”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정읍에서 왔습니다.” 또 “홍성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왔습니까?” “농사 해먹다 왔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을 때보다 여기에 와 있으면 달라져서 있습니다. 의복은 다 다른 것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의복은 다른 것을 입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거기서 살던 사람이 여기서도 같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고 영생인 것, 이것을 아직도 믿지 못 했습니다. 죽긴 왜 죽습니까? 죽을까봐 겁이 난 것인데 죽긴 왜 죽습니까? 영생을 받았는데 죽긴 왜 죽습니까? 그것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쌀이 없다, 반찬이 없다, 간장이 없다, 아파트가 없다, 자동차가 없다, 무엇이 없다, 무엇이 없다 해도 돈 하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없다, 없다 해도 돈 있으면 다 살 거니까 돈 하나 없다고 하면 다 같은 말인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 때문에 겁나고 저것 때문에도 겁나고, 또 무엇 때문에 겁나고, 다 겁나고 무서워하는 것만 모아 놓으면 겁나는 원인이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왜 다 겁난다고 합니까? 원인이 하나인데,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죽을까봐 입니다. 죽을까봐 겁난다는 것입니다. 테러가 났다, 뭐가 생겼다, 전쟁이 났다 하는데 왜 겁이 납니까? 죽을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쌀값 올라간다, 기름 값이 올라간다 하는 것도 죽을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이 죽는 문제 하나 해결해 놓으면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생명을 허락받아 놓았으면 겁날 것이 무엇입니까? 화재 나고 불 가운데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아무데나 가도 괜찮습니다. 로봇은 안 타지니까 불 가운데도 막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는 소방서에서 로봇을 만들어서 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많은데, 로봇이 들어가면 찢어져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찢어졌다가도 또 건져내서 로봇을 틀어놓으면 또 돌아갈 것이니까 로봇은 죽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때가 이르기 전에는 육신의 생명도 안 죽습니다. 또 육신의 생명이 죽어도 안죽습니다. 영원히 안 죽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 생명 가지고 살았다고 하면 왜 무서워하겠습니까?
무서워하는 것은 아주 육신의 생명만 가지고 산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생명을 가지고 살지 아니하고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하고 꾸짖으셨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4:40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머리 둘 곳이 없으신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신 것, 모든 것을 다 승리하시고 나가시는 예수님의 신앙을 따라서 우리도 어떠한 경우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기쁘고 즐
거움으로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언제나 안식을 누리면서 나가는 이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8:1-22 예수님의 병 고치심과 종주각오 (從主覺悟)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예수님의 병 고치심과 종주각오 (從主覺悟)
마태복음 8:1-22

1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E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18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 가기를 명하시니라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1. 문둥병을 고치심

본문 1-3절에,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했습니다. 팔복을 가르치시고 그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나의 문둥병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시니까, 즉시 문둥병이 깨
끗해졌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만능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문둥병, 모든 병이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약 레위기 14장에 문둥병이 발하면 제사장에게 예물을 가지고 가서 드려서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대로 해야 했습니다. 문둥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면서 문둥병 나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나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2. 백부장의 신앙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에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면서 말했습니다.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인이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백부장이 자기 마음으로 심히 괴로워하면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본문 7절에,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시려는데 못 고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나님 말씀 한마디면 다 될 줄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사오니 이제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백부장이기 때문에 자기도 천부장의 수하에 있다는 것이며, 또 백부장이므로 자기 아래 군사가 한 100명 될 것입니다. 백부장도 종을 부리므로, 종더러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그들이 오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또 주인이 종더러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이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상관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면 복종하는 것처럼’ 다 복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자기 하인에게 발한 중풍병도 주님 말씀 한마디에 다 순종 할 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 하시면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 된다는 것입니다. 다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마치 군대의 상관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면 순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다 되겠습니다. 수고스럽게 오시지 마시고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다 준비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병도 순종이고 중풍 병 걸린 모든 것도 순종이고, 또 어디가 사고가 나서 중풍 병에 걸렸으면 그것도 순종이고, 혈관이 막혔으면 그 혈관도 순종이고, 또 수족을 못 쓰면 그 수족도 순종이고, 못 쓰는 수족도 그 명령아래 말씀 한마디면 다 순종할 것을 믿었습니다.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다 순종할 것을 믿었습니다.

본문 1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다 될 것을 믿었습니다. 자기 하인의 병도 말씀 한마디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절대 주재이시요, 모든 것을 다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말씀만 하시면 다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주인 명령 한마디에 하인이 순종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주인인 것을 믿었습니다. 또 만왕의 왕인 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을 다 말씀으로 주장 하시는 것을 믿고, 다 그대로 될 것을 믿고, 모든 사람도 다 그대로 될 것을 믿
고, 병도 그대로 나을 것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시면서 좇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것을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부장의 신앙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주님의 명령 한마디에 다 순종할 것을 믿는 신앙, 이 신앙을 예수님께서 만나보시지 못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다 순종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자기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자기는 감히 하나님을 집에 모시지 못하는 것을 알고, 죄인인 것을 알고, 명령 한마디면 다 될 것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이만한 신앙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1-12절에,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의 본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은 믿지 않았다가 이제는 쫓겨날 것이고, 이방사람은 많은 사람이 돌아와서 아브라함의 자리에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백부장도 이방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사람 되는 백부장도 믿음이 좋아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늘나라에 가서 앉을 것인데, 유대사람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쫓겨나서 바깥 어두운 가운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방사람들 중에,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교만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믿어야 되겠지만, 마음이 강퍅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본 자손이 먼저 믿어야 되겠고, 먼저 전도를 했어야 했지만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시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 자손들이 쫓겨난다고 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는데 가까운데 귀한 것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귀하신 것을 모르고, 그 말씀이 귀한 것을 모릅니다. 늘 전도했지만 듣고서도 모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몰랐지만, 이방사람은 아주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말씀이면, 명령이면 다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 위대한 신앙입니다.

본문 13절에,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백부장이 주의 말씀 한 마디면 다 나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대로 이 하인이 나았을 것이다” 라면서 그를 보냈습니다.

3. 능력을 나타내어 교훈하심

본문 14-16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38-39에,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나와 있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대’ 열병에게 나가라 하시니, 그 즉시 병자의 병이 나아서 예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면 다 순종합니다.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령 한 마디면 다 되고, 하고자 하시면 다 됩니다.

그럼, 병이 낫지 않는 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명령 한마디면 다 나을 수 있는데, 기도해도 안 낫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셔서 낫지 않는 것입니다. 명령을 안 해주셔서 입니다. ‘왜 명령을 안 해주실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데려갈 사람은 데려가시고, 또 연단시키고 더 좋은 것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기도함으로 주님의 명령이 임하는 사람은 다 나을 것입니다. 명령 안 해 주는 사람은 안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늘나라 데려갈 사람은 데려가십니다.

본문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에서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인데,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해주시고 병을 짊어져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당시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져 주시는 그리스도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그대로 되었습니다.

4. 종주각오 (從主覺悟)

본문 18-19절에,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종주각오’는 예수님을 따를 바른 각오를 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습니다. 그 때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쫓아가겠습니다”라고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머리 둘 곳이 없으신 예수님인 줄 알고 따를 것

본문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다는 말은, 누가복음 13:32에 보면 헤롯왕을 여우라고 했는데, 여우와 같이 간교한 헤롯왕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에 거처가 있다는 말입니다. 공중의 새와 같은 마귀의 종들도 다 거처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머리를 삼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 머리를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안식처를 삼고 하나님 안에서 살고, 세상에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머리를 어디에다 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안에 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쉬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세상 육신의 머리 둘 곳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쉴 곳이 없다, 편안히 쉴 곳이 없다, 안식처가 없다, 휴식처가 없다, 늘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으로 항상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고난을 각오하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따라왔습니까? 이 사람은 못 따라왔습니다. 왜 못 따라왔습니까? 예수님 따라가면 잘 살 줄 알고 편안할 줄 알고 따라가려 했는데,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니까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나 싶어서 그만 둔 것입니다. 가다가 어려운 일 당하게 되고 고난이 많게 될 것 같으니까 아예 그만 둔 것입니다.

중단 없이 예수님을 좇을 것 

본문 21-22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제자 중 또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부친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친을 모시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 장사하고, 그 다음에 와서 예수님을 좇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부친이 앞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안 믿는 부친은 ‘죽은 자’입니다. 안 믿으면 영혼이 죽은 영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영이 죽은 영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끼리 장사하게 하고 너는 이 생명의 길을 발견했으니까 너는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부친 때문에 예수님을 좇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이 첫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야 되겠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 따라갈 생각은 있지만, 그 부친 때문에 못 따라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또 한 사람이 “가서 가족과 작별하고 좇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들 돌아다보면 합당치 않다”라고 하십니다. 그도 가족이 예수님보다 앞선 것입니다. 가족과 작별하는 것은 인사하고 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따르는 것을 중지하고 가족에게 가서 작별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가족작별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가서 가족에게 입 맞추고 온다는 것은 인사하고 온다는 것이라서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먼저 가서 예수님을 따라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가족을 작별하려고 하니까, 예수님을 따라 가다가 가족에게로 향하여 뒤로 돌아다 본 것입니다. 즉, 가족이 예수님보다 앞선 것입니다. 가족을 예수님보다 앞세운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가족을 앞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만 따라가야 되고 예수님만 따라가면서 인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는데 못하게 되면 못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가족이 먼저가 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따르는 것을 먼저 해야지 부친이 먼저 되면 안 됩니다. 부친 장사하는 것이 먼저 되면 안 됩니다. 효도하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을 부모보다 앞세우고 먼저 따라가고,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고 효도하는 것은 부모가 우상 되는 것이고 아버지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고 가족을 작별한다고 했는데, 그건 가족작별 하는 것이 예수님보다 먼저니까 그것이 뒤를 돌아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가족 작별이 먼저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합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앞세우는 것은 다 안 됩니다. 먼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효도하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보다 먼저 되면 안 됩니다. 앞세우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다 따라가서 대접하고, 그 다음에 부모공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이 좋지만 예수님 따르는 것에 지장을 주고 중지하고, 이렇게 가족을 돌본다는 것은 가족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먼저 따라가며, 가족보다 먼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다 뒤에다 세워놓고, 주님을 먼저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 따라가면서 가족 못 돌보면 못 돌보는 것입니다. 돌보게 되면 돌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돌볼 수 없으면 못 돌보는 것입니다. 가족 다 내 놓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감옥 갈 때 가족다 내 놀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가족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돌보아야 하겠지만, 또 부모에게 효도도 해야겠지만, 예수님 따라가려니 까 그것을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게 되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전문적 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 돌보는 거기서 장애를 받으면 안 됩 니다. 지금 생명 길로 걸어가는데, 쟁기를 잡고, 가족을 돌보려고 뒤 를 돌아다보면 되겠습니까? 앞을 바라보며 나가면서 가족에게 할 수는 있지만, 나가다가 가족 때문에 따라가는 일을 일시라도 중지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중지하면 안 됩니다. 어떤 일에도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면 안 됩니다.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이 첫째이고 그것이 전부인 것입니다.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고 하게 되는 것은 하는 것이고, 예수님 따라가는 것만 해야 됩니다. 다 버리고 따라가야 됩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줄 알고 따라가야 하고, 다 버리고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가면서 그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가족을 돌보거나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 따라가느라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첫째입니다. 예수님 따라 가는 것이 첫째이고, 다른 것들은 둘째이고, 셋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를 하고 따라가야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