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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일요일

사도행전 7:51-60 5대 충만의 스데반 순교.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5대 충만의 스데반 순교
사도행전 7:51-60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의 조상들처럼 항상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 

7:52 너희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선지자가 있었느냐? 의인이 올 것을 미리전해 준 자들을 그들이 죽였는데, 이제 너희들이 그 의인을 배반한 자와 죽인 자가 되었다. 

7:53 너희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7:55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 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7:56 그가 말하기를 "보아라, 내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 하니,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읍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쳤으며 증인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고 불리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7:59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니, 그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잠들었다.

※ 다섯 가지 충만으로 스데반이 승리적인 순교를 당했습니다.

1. 성령 충만

다섯 가지 충만 중의 첫째는 ‘성령 충만’ 입니다. 본문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했는데,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스데반의 첫째 충만 입니다.

우리가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되고, 그 감동을 소멸하지 아니 하여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그런 자리에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하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감동을 멸시하지 않고 언제나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성령 충만해집니다.

2. 신앙 충만

둘째 충만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신앙 충만’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앙, 하나님 우편에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보는 신앙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 돌을 들어서 때려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 이를 갈면서 달려드는 원수들을 바라보지 않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앙망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 세상엔 마귀역사가 많고, 달려들면서 죽이려는 자도 많은 이렇게 악한 세상이지만 그런 것을 바라보지 않고 위를 쳐다보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보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도 바로 보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라

우리는 위를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면 언제나 환란과 마귀역사가 보이고 고통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위에 것을 바라보면 거기는 항상 평화스럽고 사랑이 충만하고,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골로새서 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했는데,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였는데, 본문에 스데반이 위를 바라보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다가 스데반을 도와주시려고 일어서신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이 순교 당하게 될 상황이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아, 이제 스데반이가 순교 당하게 되겠구나. 도와줘야 되겠다’고 하시며 도와주시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어서셨고,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것은 넘어지게 하는 사망의 것이다

위에 것을 찾고, 언제나 위를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땅에 있는 욕심, 세상의 것은 다 지나가고 말 것이고, 또한 잠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의 것은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17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적인 것, 이생의 자랑적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적인 것으로서 다 욕심입니다. 말하자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는데, 욕심을 따라가면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어디로부터 온다고 했습니까?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위를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아래를 쳐다보고 아랫것을 찾으려고 하면서 돌아가면 그 결과는 사망이고, 위를 쳐다보고 위에서부터 오는 것을 받으면 생명이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위를 바라보면 살 길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러러 하늘을 앙망하고 사모하고 위에 것을 찾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니까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려고 서서 계셨습니다.

3. 예수 충만

세 번째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첫 번째는 성령 충만, 두 번째는 신앙 충만, 세 번째는 예수 충만하여 스데반이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도와주시려고 일어서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반드시 도와주시는 예수님이시고,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계속 앙망하고, 사모하고, 계속해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임하여,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라는 찬송도 있는데 들어와 계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나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영광에서 영광으로 화한다’고 그랬습니다.
참 좋습니다. 이 말씀만 해도 백만 불짜리보다 더 됩니다. 백만 불짜리보다 더 되고 금메달보다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주의 형상으로 화 한다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본 스데반의 얼굴이 무슨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6:15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아졌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리나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스데반이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렀고, 그것은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형상으로 화합니다. 화장할 것이 없습니다. 화장 안 해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아졌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화장합니까? 다니엘이 채식만 먹었는데, 잘 먹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윤택하였다고 그랬습니다.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의 얼굴이 환해졌다고 합니다.
화장하는 것도 모자라 요즘은 성형 수술한다고 하는데, 어떤 여자는 성형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아예 성형수술을 하지 마십시오. 생긴 대로 살지, 깎아 내고 수술하면 뭐하겠습니까? 그것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화하는 것입니까? 성형수술해서 얼굴이 이상하게 되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어떤 사람 보니까 이전과 다른 얼굴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성형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서 오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전에 얼굴이 좋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그것이 화장입니다. 화장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저는 화장 안 했어도 화장한 사람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형상과 같이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리니, 주의 영광으로 말미암음이 됩니다.

속에 예수가 충만하여 나오는 전도가 진짜다

그렇게 되면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예수님이 충만해집니다. ‘예수 충만’, 예수가 충만하니까 속에서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속에서 예수가 충만해서 나오는 전도, 속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 그것이 진짜입니다.
속엔 예수님이 없는데 전도하라고 하니까 겨우 나가서는 “예수나 믿어보세요”라고 합니다. 아니, 예수나 믿어보라는 건 뭡니까? 그럼 듣는 사람이 예수 믿겠습니까? 최권능 목사가 평양거리에 다니면서 “예수천당! 예수천당!”하고 돌아다니니까 교통순경들이 “아, 좀 가만 있으라고, 왜 영감 떠들고 돌아 다니냐”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 목사가 “자동차는 빵빵거리는거 왜 가만 두냐?”고 하니, 자동차는 사람 칠까봐 빵빵 하기 때문에 가만 둔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최 목사가 “나는 사람들이 지옥 갈까봐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속에서 나오는 전도입니다. 속이 충만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충만해집니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생활, 날마다 바라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땅에 것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땅에 것을 바라봐야 ‘이거 어떻게 할까? 저거 어떻게 할까? 이거 하면 좋을까? 저거 하면 좋을까?’하는 욕심이 속에 들어오고 그렇게 하면 속에 평안이 없습니다.
땅에 것을 가지고 평안을 누리려 하면 절대 평안이 없습니다. ‘돈 좀 벌면 평안하겠다’, ‘아파트 조그마한 거라도 하나 사면 평안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더 큰 것 사면 좋겠다’고 해서 더 큰 것 샀다가 세금이 1년에 5백만 원이 나온다고 합니다. 세금이 5백만 원 나오니까 팔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그래도 아깝더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땅 위에 것 가지고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 신앙 충만, 예수 충만이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충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속에서 넘쳐 나오는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나눠주지 못해서 속에서 안타까워서 하는 전도,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 충만해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리니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 예수 충만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4. 소망 충만

네 번째는 ‘소망 충만’입니다. 본문 7:59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라고 했습니다. 돌로 스데반을 치는데, 돌 하나 맞으면 살 한 점이 떨어지고, 또 하나 맞으면 살이 한 점 또 떨어지고 피가 나오고 그러는데, 스데반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천당 가는 것입니다. 천당 가는 것은 본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로 와서 잠깐 있다가 가는 세상입니다. 나그네 세상입니다. 나그네로 와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당분간 있다가 가는 것이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세상 떠나는 날은 본향으로 가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본향을 사모하라

본향 가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신랑은 누구입니까? 본향의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는 신랑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신랑 만나러 가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이 세상 떠나는 건 더 좋은 우리 본향, 더 좋은 신랑, 이 세상 신랑보다 더 좋은 신랑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나는 간다. 잘 있거라 세상아 나는 가노라. 너희들은 잘 있거라 나는 가노라”하며 가는 것입니다. 더 좋은 하나님의 나라, 본향, 사모하던 나라, 그 나라에 가는데 울 필요가 없습니다. 더 좋은 나라 가는데, 신랑 만나러 가는데, 잘 가시라고 하면서 울지 말아야 합니다. 딸이 시집가는데 웁니까? 옛날에는 울었다고 그럽니다. 잘 가라고 해야지, 내내 딸을 데리고 살 겁니까? 시집가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가 우리나라인 줄 알고 언제나 갈 준비 하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육신으로 살지만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살 욕망을 가진 게 더 좋다. 육신으로 사는 것 하고,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 하고 두 사이에 끼어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육신으로 사는 것이고, 세상 떠나면 하늘나라 가서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 됩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원하느냐고 그러니까,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다 가져야 됩니다.

하늘에 가는 날까지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날에 가야지, 그 전에 가면 안 됩니다. 주께서 오라고 할 때 까지는 자기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각자가 할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다 있습니다. 그걸 잘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가야 됩니다. 하늘에 가는 날까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알아야합니다.

요즘 원로목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로 목사들 회의에 가서 한 300명 되는 원로목사들에게 말씀을 전해야겠습니다. 이전에도 한번 말씀을 전했었는데 전에는 한 150명이 됐었습니다. 지금은 한 배나 늘었다는데 원로 목사들도 부흥되는 모양입니다. 한번 우리 신학대학원에서 전했으면 좋겠는데, 천만 원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 3만원씩 대접해야 되고, 음식도 대접해야 하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원로 목사들을 모아 놓고 제가 무엇을 전하면 좋겠느냐하면, 세상 떠날 때까지 할 일이 있다고 전하고자 합니다. 전할 내용은 ‘할 일이 있다. 놀지 말라’고 원로목사들 놀지 말고 할일 하라는 것입니다. 달란트 장사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달란트 장사를 아직도 다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달려갈 길이 남았다는 것, 그런 것을 전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소망이 충만했는데,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평생 소망을 두던 나라에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기쁘고 즐거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가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콱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시는 날 동안 믿음 잘 지키고 할 일을 다 하는 게 중요합니다. 각자가 할 일이 다 있습니다.

5. 사랑 충만

다섯 번째는 ‘사랑 충만’입니다. 본문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고 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사랑 충만이었습니다.
자기를 때려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서 ‘이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사랑 없는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해 줬는데, 사랑이 얼마나 많아서 이렇게 기도가 나왔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 충만입니다.

우리가 사랑 없는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만한 사랑 있습니까? 때려 죽이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으로 기도해 줄만한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걸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사랑 없는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사랑이 있어도 그저 부스러기나 조금씩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음으로 통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사랑은 통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통사랑,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 이 사랑이 충만해서 나오는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지, 죽이려는 사람들이 자기를 때려죽여도 마음이 편안하고 사랑이 쑥 나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6:24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가롯 유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팔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만 가롯 유다 때문에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가 팔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대로 가는것입니다.

예정한대로, 기록한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겁니다. 그것에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예정대로,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가시는데 가룟 유다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을 비뚤게 쓰고, 의리를 다 내버리고, 배은망덕하고 선생을 팔아먹고 잡아주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정대로 가시는데, 하나님께서 구약에 기록한대로, 예정한대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고 가시는데, 가룟 유다는 지금 그냥 죄만 짓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은 자기 갈 길을 가시는 건데, 가룟 유다는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괜히 죄만 짓는 것이니 그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니까 불쌍히 여겨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나온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기도

스데반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불쌍한지, 이 사람들이 돌로 치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스데반이 죽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건데, 그 사람들이 죄만 짓는 것을 보니까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속에서 나왔습니다. 사랑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하려고 결심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속에 계시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나왔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예정대로 가는데 순교의 반열에 참여하게 됐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앓다 죽는 것 보다는 순교당하는 것이 큰 복입니다. 앓다 죽는 것보다 순교당하는 게 몇 억만 배 더 큰 복입니다. 앓다 죽는 것이 복이 하나라고 하면, 순교당하는 것은 복이 억만 배이상 됩니다.

스데반이 이런 좋은 복을 만났고 하나님의 예정대로 가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돌로 스데반을 치니까 얼마나 불쌍한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용서해줘야 되겠습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으면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서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이 속에서 쩔쩔 넘쳐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 위해주고, 호의를 베풀고, 친절하고, 사랑합니다. 사랑이 충만해 집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기도해주고 순교의 복된 길로 걸어갔습니다. 순교의 복된 길로 걸어가서 지금도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해 있습니다. 순교를 그때 안 당했으면 몇 년 더 살겠습니까? 스데반이 순교 안 당했으면 100년 더 살겠습니까? 100년 더 못삽니다. 그때 나이가 한 40이었다면 40-50년 더 살았겠고, 100세 산다고 하면 60년 더 살고 그만 둘 것인데, 순교 당했으니 지금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과 같은 5대 충만의 신앙을 가지고 나가다가 주를 위해서 오라할 때에 나가는 정신, 그리고 오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 가지 않는 정신으로 자기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오라고 하실 때에 “예”하고 가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