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의뢰하라
고린도후서 1:1-24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17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로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3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1. 처음 인사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 것이고, 또한 우리가 직분을 맡은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맡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절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된 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보통 고린도 교회에서 안수해서 보냈는데,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안수해서 보낸 것도 아닙니다.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안수를 했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안디옥 교회에서 사람들을 안수해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인 그들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된 것이라 했고, 바울이 이를 믿었습니다. 우리도 사도됨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도 되게 하신 것과 직분 주신 것을 믿어야 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임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한다고 그랬는데, ‘하나님의 교회와’라고 그랬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의 교회도 아니고, 또 고린도에 있는 유력한 사람들의 교회도 아닙니다. 거기에 베드로도 고린도에 갔었고, 또 바울, 아볼로도 갔었지만 그 사람들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이고 직분가진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직분 가진 사도들, 또는 가서 교회 설립한 일한 자들, 가르치는 사람들, 그런 모든 사람들이 다 종입니다. 교인들도 종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본문2절)고 했습니다. 구속의 은혜, 그 결과로 영적 평강이 있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심
위로의 하나님
본문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첫 인사가 끝나고 ‘찬송하리로다’ 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말을 하려고 할 때에 제일 첫 마디가 ‘찬송하리로다’로 시작됩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하고 너무 커서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부터 나오게 됩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자비의 아버지시요’,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조건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량없는 위로를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 환난 중에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위로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위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받은 위로를 가지고 자기가 위로를 받았으니까, 다른 사람도 또한 위로해줍니다.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위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위로를 받아야만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위로를 받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받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먼저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위로 받는 것이 중요하고, 또 먼저 자비를 받는 게 중요하고,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거하는 것이 중요합니
다. 그러면 그 받은 위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도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그 세계에 들어가야 됩니다. 위로의 세계, 자비의 세계, 그리스도의 세계, 거기 들어가야만, 거기 가서 위로를 받아야만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그 세계에 들어가서 위로 받지 못하면 아무리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려고 해도 위로가 안 됩니다.
위로는 자기가 받은 걸 가지고 주기 때문에 안 받았으면 남에게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기가 은혜 받으려고 힘을 써야 됩니다. 먼저 자기가 그 세계 들어가려고 힘을 써야 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나눠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위로
본문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면 또한 그리스도의 위로도 넘친다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으면 그 위로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일 하느라고 고난당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위로가 그 사람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일을 하는데도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위로도 없습니다. 믿는 일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핍박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와서 많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만 의뢰하면 됩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위로가 한량없이 오게 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환난 받았고 고난 받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가서 전도하느라고, 고린도 교회를 세우느라고, 고린도에 가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복하느라고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위로가 바울에게 많이 왔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고린도에 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많은 위로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5~11절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할 때에 대적하는 무리가 훼방하고 심한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많은 환난을 받았는데, 고린도에 가서 전도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전하러 고린도에 안 갔다면 환난을 안 받았을 것입니다. 전하러 갔기 때문에 환난 받은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안 올라갔다면 결박을 안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라갔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안 하면 환난은 안 당합니다. 그 대신에 위로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도 없습니다. 하나님 일을 적극적으로 나가서 하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환난이 왔습니다. 환난을 마주치며 나간 것입니다.
환난 중에 큰 위로를 주심
그렇게 환난이 온 것만큼 하나님의 위로도 또한 넘치게 왔습니다. 그리고 밤에 환상 중에 주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잠잠하지 말고 두려워 말고 나가서 담대히 말하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전도하다가 환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 지키다가 환난 받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다가 환난 받을 때 벌써 하나님께서 큰 위로를 심령 속에 주십니다. 그렇게 환난 받을 때에 기도를 많이 하게 됩니다. 환난 받으면서 기도 많이 하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그 심령 속에 같이 하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서 역사합니다. 외부적으로 환난을 받지만 속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능력이 속에서 넘쳐 나오게 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상급이 크게 됩니다. 그렇게 환난과 위로와 구원, 이것은 다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너희 구원과 위로를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건 ‘너희 구원 위함이라’는 것인데, 또한 위로 받는 것도 ‘너희 위로를 위함이라’ 하십니다. 바울이 환난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즉시로 심령 속에 위로가 왔고, 능력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는, 복음 전하는 것에 열매가 잘 맺혀 나아가는 것을 볼 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환난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얼마 있다가 보니까 많은 열매를 맺힌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량없는 위로를 또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가 몇 가지입니까? 복음 전하다가 환난 당하니까, 믿음 지키다가 환난 당하니까, 그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위로를 주시고, 기도할 힘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니까 위로를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모든 환난을 이길 능력을 주심
위로만 주신 것이 아니고 모든 환난을 이길 만한 능력을 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사람에게 능력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그 많은 열매가 맺혔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서 나오고, 영이 살고, 하나님의 사람이 점점 온전케 만들어져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에 한량없는 위로가 왔습니다.
본문 14절에,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난 받으면서 복음 전하니까 교회가 잘 되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잘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위로를 바울이 받았습니다.
본문 7절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너희에 대해서 견고하다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위로에도 참여해서 모든 일이 성공되어 나가고, 영적 일이 잘 되어 나가고, 하나님의 일이 성공이 되어 나가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있어도 소망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구출해주심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
본문 8~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했는데, 아시아에서 얼마나 큰 환난을 받았습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살 소망이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 죽었다’하면서, 사형 선고 받은 줄 알았는데, 그가 이같이 우리에게 살 소망까지 끊어지도록 가만 내버려 둔 것은,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고 그들의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살 소망이 있으면, 저들이 그것을 가지고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안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뭐 조금 소망이 있고, 세상에 조금 희망이 있고, 자기가 조금 뭐 할 것 같으면 그것 가지고 하려고 하는데, 이제는 다 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소망이 다 끊어졌습니다. 할 수가 없으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하나님만 이제는 의뢰하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인간의 소망이 끊어져버리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제가 하겠다’고 허우적거리고, 자기가 뭐 된 줄로 알고, 자기가 뭘 할 줄 알고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만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다가 결국 보면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들에게 이제는 살 소망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때에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건져주십니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려고 세상 것 다 하나님께서 끊어버려 주십니다. 세상 소망이 다 없어지게 만들어 놓으십니다. 하나님만 소망하며 살라고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한 “건지시리라”고 하십니다.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했는데, 세 가지입니다.
과거에도 사망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큰 사망에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인데, 또한 현재에도 건져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라도 건져주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란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또한 현재에도 사망에서 건져주고 계십니다. 또한 장래에도, 그 이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를, 즉 말하면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를 건져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건져주실 것을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우리를 건져주신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 번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났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 번 건져주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현재에도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래에도, 그 이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면서 사명을 다하는, 복음 전파하는 사명을 다하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기도해줌으로 하나님의 일이 잘 됨
본문 11절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것은 기도함으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기도해주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기도해주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복음을 잘 전하게 해주신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는 은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바울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주니까 바울이 담대히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해서 기도해주었기 때문에 바울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잘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받아서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그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많이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해주는 것, 교역자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면 나가서 하나님 말씀 잘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또 하나님께 은혜 받아서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서서 하나님께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기도해줌으로 같이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같이 계신다고 했는데, 주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
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잘 전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진실
진실함이 떠난 신자는 껍데기임
본문 12절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바울이 늘 행했습니다. 진실이 생명입니다. 진실을 떠나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진실을 떠난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알맹이가 다 빠져나간 것입니다. 진실이 알맹이인데, 진실을 떠난 신자는 알맹이가 다 빠져나간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언제나 진실이 생명입니다.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모든 것을 해야 됩니다. 말도 진실하게 해야 되고,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면 안 됩니다. 실제 있는 그대로 말해야 됩니다. 그대로 말해서
손해를 봐도 그대로 해야 됩니다. 매를 맞아도 그대로 해야 됩니다.
거짓말해서 무슨 유익이 온다고 생각하여 거짓말 하면 안 됩니다. 진실하게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진실하게 하지 않으면 자기 양심이 알고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자기 양심이 진실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아시고, 또한 자기 양심도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일시적 오해를 했다가도 얼마 가면 다 풀어집니다. 진실한 것은 다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실하지 아니하면 일시적으로 자기가 환영을 받고 칭찬을 받고 유익이 오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할지라도 조금 있으면 다 알려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진실하고 거룩함으로 해야 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라고 했는데, 육체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단, 방법,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인도대로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했지, 인간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 양심이 증거 하는 바라”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을 바로 써야만 믿음이 됩니다. 양심 쓰는 게 진실 아닙니까? 양심 안 쓰는 것에 대해 김현봉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냐하면, 믿음에서 양심을 빼내버리면 벼 알에서 쌀 빼내버린 것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벼 알에서 쌀 빼내버리면 뭐 남습니까? 겨만 남습니다, 왕겨만 남습니다. 왕겨만 남은 것은 껍데기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빼내버리면 안 됩니다. 언제나 진실을 빼내버리면 안 됩니다. 진실을 빼내버리고 나면 그 믿음은 껍데기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도와
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이 바람에 날아갑니다. 언제나 양심, 진실, 이것을 생명으로 삼고 나가야 됩니다.
전도할 것
본문 13~14절에,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란다’고 했는데, 바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또한 바울이 어떻게 가르친다는 것도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가르친 그것, 어떻게 바울이 행했는지, 그것이 다 증거가 되는데 “끝까지 알기를 원한다”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잘 되면, 앞으로 하나님께 가서 상 받는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된다고 하십니다. 사람 앞에서의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입니다. 전도를 새로이 안 했어도, 이미 믿던 사람이라도 잘 가르쳐서 그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게 하면,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 나간다고 하면,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 가서는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전도 하나도 안 한 사람은 자랑도 없고 면류관도 없습니다. 칭찬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인데, 주인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오니까 뭐라고 하였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에게 왜 악하다고 그랬습니까? 그 사람은 믿는 일 안했기 때문입니다. 악하다는 건, ‘믿는 일 안 했다’는 말입니다. “넌 믿음 쓰지 않았다”, 믿음 쓰지 않으니까 악한 것입니다. 또한 믿는 일 안 하니까 악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니까 악한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자기 하나만 신앙 잘 지키겠다는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데 안 가는 것이 악한 것이고, 믿음으로 바치라고 하는데 안 바치는 것이 악한 것이고, 떠나라고 하는데 안 떠나는 것이 악하고,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는데 안 떠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몸 바치라고 하였는데 안 바치면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 것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시는데, 게으른 것은 못 씁니다. 언제나 시간 약속에 늦어지고, 게을러서 뭘 못 하는 그런 사람은 구실을 못합니다. 신자 구실도 못합니다. 예배시간에 내내 늦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 거의 다 끝나려고 하면 그 때에 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대문간에 왔다가도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합니다.
예전에 어느 집에 심방을 가 보았는데 세탁감이 쌓여가지고, 방 안에 요강이 그냥 있고, 밥상 차려놓은 아침 먹던 게 그냥 파리가 왕왕하며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배 시간은 평생 늦었습니다. 그런 여자성도가 하나 있었는데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그 여자가 젊었는데도 죽었습니다. 그것 잘 죽었습니까? 아깝습니까? 그래가지고 살아서 뭘 합니까? 밤낮 사람 구실하겠습니까? 예배 시간 평생 늦는 사람, 또는 폐회할 때 얼굴만 들이대러 오는 사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그대로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살아서 뭘 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믿는 일이 되겠습니까? 그 여자 성도 죽은 후에 남편이 다른 아내를 데려왔는데, 심방 가보니까 집이 말끔했습니다. 요강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찾아도 볼 수도 없었습니다. 밥상 다 어디 갔는지 없었고, 그저 뭐 집안을 말끔하게 해놨습니다. 처음하고 나중하고 비교해보니까 천지 차이입니다. 처음 여자는 인종지말이고, 밤낮 늦어지고, 그저 제대로 일 안 하는 사람이었고, 나중 여자는 아주 우수하더라는 말입니다. 나중 여자가 들어오자 그 가정이 말끔해졌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소리 듣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믿음 안 쓰는 것이고, 가라고 할 때 안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환난 있다고 안 가는 것이고, 예루살렘에 환난 있다고 안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복음을 전한 것으로 자랑이 됨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자기를 통해 복음을 받아서 그 사람이 잘 되었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의 자랑 아닙니까? “또 우리가 너희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배워서 이만큼 되었다”, “바울 일행이 우리 안 배워줬으면 이만큼 될 수가 있나?”고 할 텐데, 이것은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둘째로는 바울과 그 일행의 은혜로 이만큼 되었다 하고 바울을 자랑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해서 많은 열매가 맺히면 그것이 자기의 자랑이 되고, 또 그 사람에게는 자기가 또한 자랑이 되고 면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가 많이 맺히는 그런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위로를 먼저 받아야 됩니다. 위로를 받아야 다른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 위로를 해줘야 소망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심령이 소생해 올라옵니다. 자기가 먼저 위로를 받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그 자리에 서면, 자기도 위로를 받고 그 사람은 구원을 받고, 또 그로 인해서 자기가 또한 더욱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어도, 사형 선고 받은 줄로 알았어도,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편하게만 있으면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 하나 믿을만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집어 치우십니다. 그것 믿고 살까봐 그렇습니다. ‘하나도 이젠 믿을 것도 하나도 의지할 것도 없고, 이제 살 소망이 다 끊어져가지고 이제 죽었다’고 할 그 때에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만 의뢰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오고, 위로가 오고, 생명의 역사가 오고,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생명을 주고, 많은 열매가 맺히게 만들고, 영광이 됩니다.
바울의 경영 -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하게 대답함
본문 15~17절에,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겠다고 미리 통지해놓고는 그 뒤에 안 갔습니다.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간다고 했는데, 고린도에 안 가고 마게도냐로 곧장 갔습니다. 고린도에 간다고 약속한 그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거 바울은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고 약속 안 지키고 바울은 양심 안 쓴다”며 이렇게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라고 합니다. 먼저 고린도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는 그 윗 고을인데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갔다가 이제 다시 고린도에 가서, “너희로 유다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라고 했는데, 유다로 가기를 경영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라고 했습니다.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라고 했는데, 이제 문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통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로 갔다가, 윗 고을 마게도냐로 올라갔다가, 다시 또 너희에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유대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에 먼저 갔다가 그 다음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고린도에 갔다가 그 다음 유다로 간다고 그렇게 통지를 해놓았는데, 바울이 고린도에 안 가고 마게도냐로 곧장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일이 되었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바울은 약속 안 지킨다. 아 우리에게로 왔다가 마게도냐로 간다고 했는데 왜 곧장 갔느냐? 바울 말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로 많은 시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거기에 대한 참된 변명을 합니다. 이것은 나쁜 변명이 아니고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라고 합니다.
본문 18절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2:13에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경영할 때에 고린도에 가겠다고 했으면 고린도에 가야지 왜 마게도냐로 곧장 갔습니까? 잘 되었습니까? 잘 되었습니다. 성경에 잘 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잘 된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바울이 이랬다, 저랬다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해놓고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 19절에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만 있지 “아니라”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만 있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언제 “아니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만 하고 “아니라”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언제나 “예”만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5:30에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2:8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지 “아니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하고 복종하신 것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도 “예”만 하시고, “아니라”함은 없습니다. 그저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만 있고 “아니라”고 한 적이 없고, 그저 복종한 것뿐입니다. 고린도에 가려고 하다가 안 간 것은 “예”하느라고 안 간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여 안 간 것이 아닙니다. 소를 주인이 몰면 “예”만 있습니까? “아니라”하는 것이 있습니까? “예”만 있습니다. “아니라”하면 소가 주인한테 매 맞습니다. 소는 주인이 하라는 대로만 합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예”만 있지, “아니요”는 절대 없습니다. “예”만 신앙입니다. 예수님도 “예”만 있고, 바울도 “예”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서’로 가라고 하면 바울이 진실한 마음으로, 거룩한 마음으로, 양심을 써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서’로 갔습니다. ‘동’으로 갈 때에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동’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동으로 가라고 할 때에는 동으로 가는 것이 진실한 마음이고, 거룩한 마음이고, 양심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서’로 가라고 하실 때에 ‘서’로 가는 것이 양심을 쓰는 마음이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마음이고, 거룩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했다, 저렇게 하라 했다가 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이 이리로 인도하셨다가 저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에 직선으로만 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이 떠났다가 시내산에 두 달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름 기둥이 에돔 땅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이 에돔 땅으로 들어가므로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에돔 땅으로 갑니다. 에돔 땅으로 가면 가나안 땅이 가깝습니다. 그런데 구름 기둥이 가다가 싹 돌아섭니다. 또 에돔 백성들이 나와서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지나가도록 막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까 구름 기둥을 돌아서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기둥을 따라 돌아갑니다. 또 세일자손이 있는 곳으로 구름 기둥이 가므로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곳으로 열심히 갔는데 세일자손이 막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니까 세일자손을 피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아까는 에돔 땅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갔는데 결국 그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또 세일자손의 땅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갔는데 또 그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에돔 땅으로 가면 죽을까봐 겁나서 안 간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가느라고 이리로 갔다가, 또 저리로 간 것입니다. 전부 “예”이지 “아니라”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양심을 쓰는 것이고, 언제나 순종이고, 언제나 생명 내놓고 나가는 것이고, 언제나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는데 있어서는 변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다시 고린도에 갔다가 유대로 가기를 경영했는데, 곧장 마게도냐로 간 것은 바울이 이랬다, 저랬다 한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 앞에서 “예” 한 것이지, 바울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할 것은 자기 생각대로 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 저렇게 하라고 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발람의 기도가 됩니다. 자기의 유익을 보려고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성도는 한 번 작정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단 하나님이 이리로 인도하실 때에는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또 갈려고 하다가 하나님이 못 가게 하시면 안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언제나 신앙양심을 쓰고, 진실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쪽으로 인도하시다가 서쪽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동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변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맹세하지 말라는 것도 한 번 맹세해 놓으면 변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맹세했다가, 얼마 후에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는데, 맹세해 놓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성도인데, 일단 맹세해 놓으면 맹세에 걸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갈 수 없습니다. 가령 처녀가 시집 안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작정했는
데,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시집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다면 “내가 맹세했는데 어떻게 시집가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혼자 살다가 시집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시집가라는 것입니다. 또 맹세했더라도 시집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 사람의 맹세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다 모릅니다. 그래서 그 날 그 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5. 약속의 보증
본문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만 된다는 것입니다. “예”하고 순종하는 것뿐이지 사람의 지혜가 가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하고 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입니다.
본문 21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름 부었다는 것은 중생한 영혼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시켜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인을 쳐 주셨습니다. 말씀의 인을 쳐서 우리에게 보증해주셨습니다.
6. 신앙 보조
본문 23-24절에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안 간 것은 고린도 교인을 아끼려 함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안 가는 것인 줄 알고 안 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면 바울이 치리하게 되겠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많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안 가는 것인 줄 알고 안 갔고, 너희를 아끼느라고 안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하였는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회개함으로 고린도 교회와 바울이 서로 기쁨을 얻고자 함입니다. 우리도 서로 기쁨을 돕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