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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0일 일요일

누가복음 5:36-39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말라,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말라
누가복음 5:36-39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본문 36-38에“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새 포도주는 점점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이 없는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점점 팽창하여 그 낡은 가죽 부대가 감당하지 못해서 터집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1. 새 포도주는 새 생명 운동

새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새 포도주는 진리와 영감으로 이루어지는 새 생명운동으로 성도의 영적 생명을 살려 나갑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새 생명운동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이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이 하신 생명운동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질, 가치, 용도, 위치, 맛, 색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하여 새 사람이 되는 일이 예수님이 하시는 새 생명 운동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을 떠다가 항아리에 부으라’할 때 하인들이 항아리 아구까지 가득 차게 순종하였습니다. 순종할 때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먼저 죄를 날마다 회개하여야 하고 말씀을 날마다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는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가득히 채운 것처럼 충분한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순종할 때 자기가 마땅히 순종하여야 할 것을 순종하여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순종하여야 합니다. 절반만 순종하고 그만 두면 안 됩니다. 주일 지키는 것, 십일조 드리는 것, 우상의 제물 먹지 않는 것부터 순종하고 부모 공경하는 것, 형제 우애하는 것등을 순종하여야 합니다. 끊어버릴 것을 끊어버리고 끝까지 순종하면 하나님의 만능으로 마귀의 역사를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죄를 이깁니다. 범사에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명령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인격이 변화되고 얼굴과 환경까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금 순종하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생명운동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나중에 떠 온 포도주를 마시고 “보통 잔치 집은 처음에는 좋은 것을 내어 놓다가 차차 나쁜 것을 내어 놓는데 당신네는 어떻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두었습니까!” 하며 칭찬하였습니다. 세상의 것은 처음에는 좋다가도 나중에는 차차 나빠지고 쇠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이것이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

영적 생명의 역사를 낡은 부대에 가두지 말라

로마서 7:6에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을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은 율법의 의문과 증서를 가리키고(골 2:14), 영적 생명이 없는 외형적인 모든 종교 의식과 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낡은 가죽 부대는 의문과 의식주의를 가리킵니다. 의문과 의식주의는 묵은 것이며 영은 새 것입니다. 영을 살리는 영적 역사는 새 것인데 이것을 묵은 의문과 의식주의 속에 넣으면 안 됩니다. 구약의 의문과 제도와 인본주의의 모든 것이 의문과 의식주의 입니다. 그것은 낡은 가죽 부대이므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둘 다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영적 생명의 역사는 없고 의식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배당을 지나치게 크게 지어 장식하고 많은 돈을 써서 강단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나, 의식에만 치우쳐서 예배 순서를 장황하게 하는 것이나, 구약시대 제사장이 예복을 입듯이 값비싼 가운을 입는 것 등은 의식주의로 나가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성도가 육신을 따라 의식주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죽은 예배입니다. 이것은 쌀을 버리고 겨로 밥을 지어서 부모에게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이 사는 것이 새 생명 운동입니다. 영의 운동을 의문과 의식주의의 속에 넣어두면 영적 운동이 실패됩니다. 교회는 영을 살려내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주의와 인본주의와 의식주의로 나가게 되면 영의 운동이 되지 않습니다. 영혼이 살아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의식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식주의로 기울어지면 영적 운동을 할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6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것이 아닌 모든 의문들은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영으로 인도하면 살고, 의문으로 인도하면 죽습니다. 교역자가 영의 역사로 교인들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교인들의 심령이 움직이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 영의 역사가 없고, 심령에 감동이 없으면 의문과 형식적인 예배가 됩니다. 의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살지 못하면서 의식주의로 나가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누더기 옷을 입고,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그 아이가 살아 있으면 자라나고 앞으로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운동은 계속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의문과 제도와 의식과 인본주의에 영의 역사를 넣으면 영의 역사가 중단이 되고 또 의문도 못 쓰게 됩니다. 어느 시대나 의문을 따라가는 교회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의식과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 운동은 점점 자라나며, 점점 커지며, 점점 창성해 나가므로 새 술을 의식과 제도인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부대를 터치고 나갑니다.
따라서 영으로 살려면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하며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시간보다 앞서 나와서 기도하고 성령을 힘입어서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 새 생명의 역사가 있음

요한복음 4:23-24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자가 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의문을 물어 본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
한다,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며 서로 의견이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도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좀더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 물어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참으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에 있는 것입니다. 신령이라는 것은 영의 세계에 들어가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하고, 진정은 진리라는 말로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한다, 봉사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성령을 힘입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영적 교통을 하며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새 포도주이며, 새 생명이며,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얽매이지 말고 영의 자유를 쓰라

고린도후서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영의 자유와 생명이 있습니다. 영적세계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영적 자유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며, 생명의 세계이며, 자유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영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므로 진리 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영의 자유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자유를 써야 됩니다. 영의 자유가 없으면 생명의 역사가 중단됩니다.
영의 자유는 영이 원하는 대로 하고, 영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혼이 자유하는 세계는 성령이 같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의 자유는 성령 안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영의 자유를 빼앗기면 생명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유, 말씀을 따라가는 자유, 죄를 이기는 자유를 주셨는데 자유를 써야 영이 자라납니다. 영은 무한히 자라나
고, 무한히 향상하고, 무한히 전진하고, 무한히 달음박질 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는 것은 낡은 가죽 부대로 막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이 중생할 때는 어린 영입니다(고전 3:1). 그 영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영이 자라나는 것은 영의 능력이 자라나고, 영의 지혜와 지식이 자라나고, 영의 도덕성(의, 진리, 거룩, 진실, 사랑... )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라나려면 얽매이는 데가 없어야 합니다. 얽매이면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므로 영의 자유를 써야 합니다. 영의 자유를 쓰면 낡은 가죽 부대가 터집니다.
직장에 얽매이고, 사람에 얽매이고, 제도에 얽매이고, 돈에 얽매이고, 국가에 얽매여서 영의 자유를 못 쓰면 10년 믿어도, 20년 믿어도, 50년 믿어도 자라나지 못합니다.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20년 믿으나 30년 믿으나 나아지는 것이 없고 힘이 없습니다. 자라난 자는 하늘나라에 가서 큰 자가 됩니다.
천국에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19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이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지 못하였으므로 주님을 좀 더 발견하는 것도 없고, 좀 더 주님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것도 없습니다.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새 생명의 역사가 점점 힘을 얻어서 생명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고, 하나님을 찾아 높이 올라가야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는 영혼이 중생하였는데 중생한 영에게 사용되는 양심은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 찾아 갑니다. 이 양심은 불신자의 양심과 다릅니다. 신앙양심을 쓰면 새 힘이 점점 납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가 고프고 의지할 데가 없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는데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야 젖도 먹고 보호도 받고 사랑도 받고 평안함도 누립니다. 그와 같이 우리 중생한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갑니다.

무한히 자라나는 새 생명의 역사

예수님의 구속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새 생명의 역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예수님을 향해서 올라가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점점 능력이 많아지고, 점점 지혜가 많아지고, 점점 거룩한 데로 나아가고, 점점 의로운 데로 나아갑니다. 기도하는 것이 나아지고, 성경읽는 것이 나아집니다. 전에는 성경을 볼 때면 잠만 왔는데 이제는 말씀이 꿀 송이보다 답니다. 전에는 기도하는 것이 재미가 없었는데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이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항상 힘을 많이 쓰고 사모하면 새 생명의 역사는 무한히 자라나고 계속 커 나갑니다. 한 달이 지나면 그만큼 나아지고 일년이 지나면 그만큼 나아지고 삼년이 지나면 그만큼 나아집니다. 그것이 산 것입니다.
이제는 “나는 집사다, 나는 장로다, 나는 목사다” 하며 낡은 가죽부대인 껍데기 의식과 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의문과 제도는 낡은 가죽부대이므로 다 버려야 합니다. 직분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함

본문 38절에“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가 고프고 의지할 데가 없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는데 자기 어머니를 찾아 가야 젖도 먹고 보호도 받고 사랑도 받고 평안함도 누립니다. 그와 같이 우리 중생한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갑니다.

무한히 자라나는 새 생명의 역사

예수님의 구속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새 생명의 역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예수님을 향해서 올라가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점점 능력이 많아지고, 점점 지혜가 많아지고, 점점 거룩한 데로 나아가고, 점점 의로운 데로 나아갑니다. 기도하는 것이 나아지고, 성경 읽는 것이 나아집니다. 전에는 성경을 볼 때면 잠만 왔는데 이제는 말씀이 꿀 송이보다 답니다. 전에는 기도하는 것이 재미가 없었는데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이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항상 힘을 많이 쓰고 사모하면 새 생명의 역사는 무한히 자라나고 계속 커 나갑니다. 한 달이 지나면 그만큼 나아지고 일년이 지나면 그만큼 나아지고 삼년이 지나면 그만큼 나아집니다. 그것이 산 것입니다.
이제는 “나는 집사다, 나는 장로다, 나는 목사다” 하며 낡은 가죽부대인 껍데기 의식과 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의문과 제도는 낡은 가죽부대이므로 다 버려야 합니다. 직분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함

본문 38절에“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중생한 영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우리의 영적 생명이 점점 창성하고 생명의 역사가 커 나갑니다. 말씀 안에 있는 신앙의 자유, 말씀 안에 있는 신앙의 달음박질이어야 합니다. 말씀에 맞지 않으면 새 부대가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역사는 말씀에서 점점 더 힘을 얻어 나갑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새 것을 원하지 않음 

본문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새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주의와 의식주의와 명예 영광주의에 빠지면 육체적으로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영의 길은 육체적으로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제도에서 재미를 본 사람은 새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왜 그렇게 믿느냐? 힘들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느냐? 아무 재미가 없다, 옛날대로 가면 재미가 있다” 하며 먹자주의, 놀자주의로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포도주에서 신앙의 맛, 진리의 맛, 영이 사는 맛을 얻어야 하고 영이 사는 길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