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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고린도후서 12:1-10 주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케 됨.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주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케 됨
고린도후서 12:1-10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
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 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12:1 자랑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으나, 주님의 환상들과 계시들에 대해서는 내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는데,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까지 이끌려 올라갔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12:3 내가 이런 이를 아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을 떠나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곧 사람이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12:5 내가 이런 이를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 자신을 위하여서는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 

12:6 내가 만일 자랑한다고 해도 참말을 할 것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랑하지 않겠으니, 이는 누가 나를 보는 것이나 내게서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2:7 또한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도록 내가 주께 세번 간구하였으나, 

12:9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나의 여러 약한 것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12: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하니,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다. 

1. 바울이 삼층천에 다녀옴

삼층천은 너무 좋은 낙원 

사도바울이 본문 9절에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바울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14년 전에 삼층천에 끌려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했습니다. 삼층천은 낙원인데, 본문 4절에“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일층천은 공간적인 하늘을 말하고, 이층천은 정신적인 사상계를 가르치고, 삼층천은 신령한 영계인 낙원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상, 철학 다 낙원에 해당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을 다 넘어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야만 낙원이 있습니다. 바울은 낙원에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그 세계가 신비롭고 너무나 좋고, 너무 훌륭하고 아름답고 너무 즐거운 세계이기 때문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낙원이라고 했습니다. 자랑을 하려해도 말로 다 자랑할 수 없고, 무엇으로 표현하여야 낙원이 표현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입신과 바울의 삼층천은 다름

요즘에 입신하는 사람 중에 낙원에 갔다 왔다거나 천당에 갔다 왔다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다녀온 삼층천과는 다릅니다. 입신한다는 것은 주관적인 환상이 나오는 몽환 가운데 빠지는 것인데,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주관에서 나오는 것이고, 제가 하려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삼층천은 객관적입니다. 입신은 주관적이고 제가 하는 것이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끌고 가신 것입니다. 입신은 인본주의고 바울의 삼층천은 신본주의입니다. 바울의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입신은 자기가 하는 것이고, 자기가 원하면 할 수 있다고 하며, 자기 환상에 빠지는 것이며, 꿈꾸는 것과 같이 사상적인 주체가 없습니다. 그저 몽롱하게 나갑니다. 그러나 바울의 삼층천은 주체적인 사상이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삼층천에 끌려간 것은 바울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입신을 했다고 하는데, 천당에 가보니까 아파트들이 많더랍니다. 믿음 생활 잘한 사람은 좋은 아파트에 살고, 아닌 사람은 그저 그런 아파트에 살더랍니다. 천당에 무슨 아파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입신을 했다고 하는데, 지옥에 가보니까 어떤 사람이 계속 목만 집어넣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살면서 늘 교만했었기 때문에 죽어서 목이 자꾸 길어져서 만날 그 길어지는 목만 집어넣고 있는 거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입신을 해서 지옥에 가보니까 조영걸 목사가 후덕덕 뛰고 있더랍니다. 조영걸 목사라고 부산에 있는 목사인데, 아마 그 사람이 평소에 조목사를 상당히 미워했던 모양입니다. 조목사가 예수 믿어서 천당에 갈 사람인데, 왜 지옥에서 후덕덕 뛰고 있겠습니까?

그처럼 입신했다는 자들이 말하는 지옥이 무슨 지옥이고 아파트는 무슨 아파트겠습니까? 그렇게 천당에 갔었다, 어디에 갔었다 하는 말들은 전부 성경에 맞지 않는 말로서, 성경에 위반된 꿈 하나 꾸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 꿈 한번 꾸고 왔나보다 하고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삼층천은 위와 같은 입신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끌어 데려갔다가 온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바울에게 가시를 주심

자기 자신을 자랑치 않은 바울

본문 5-6절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랑하고 싶지만 누가 자신의 보는 바와 듣는 바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 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자기자랑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자기 자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자랑은 하지 않고,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삼층천 다녀온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랑을 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지, 자기가 잘한 것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랑하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자랑은 자기가 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자랑하여야 하며 제가 한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무얼 하나했다고 하면 자기가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것은 ‘못한 것’뿐 입니다. 잘한 것은 하나님이 하심이고,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했고,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다고 했고, ‘사도로 칭함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되지 못한 것을 늘 말했고, 자신의 잘한 것은 자랑치 않았습니다.

낮추시기 위해 가시를 주시는 하나님

그래도 바울이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또다시 교만이 나옵니다. 교만은 실력을 배경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시를 하나 주십니다. 교만하면 망할까봐 바울을 낮추시고, 바울을 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시를 주신 목적은 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

낮아져야 삽니다. 하나님이 가시를 주심은 낮추심이 그 목적입니다. 낮춰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고, 신명기 8장 16절에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광야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낮추시며 성도를 시험하사 마침내 성도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시를 주십니다. 성도를 낮추어서 마침내 복 주시려고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눈병

가시는 찌르는 것입니다. 가시는 사탄의 사자입니다. 이 가시는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눈병입니다. 그것을 왜 사탄의 사자라고 했는가 하면, 바울이 이전에 사탄의 종노릇하며 성도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갈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바울이 거꾸러졌는데, 그 때에 바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그 뒤에 성 안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았을 때, 그 비늘이 벗겨져서 보긴 봐도 아주 다 낫지를 아니하고 그때 생긴 눈병이 내내 있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했는데,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눈병 때문에 잘 보지 못하고 보기에도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한 것을 보아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에 다른 사람에게 대서를 시키고, 마지막에 가서 큰 글자로 싸인하는 식으로 문안 축복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눈병을 ‘찌르는 가시’라 한 것을 보면, 쿡쿡 찌르는 고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그 눈병 때문에 전도하는 일에 지장이 많았습니다. 보기도 좋지 않고,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면서 자기의 병은 못 고친다는 비방을 받게 되고, 바울 스스로 앞을 보는 것에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 눈병인 가시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가시만 없어진다고 하면 호랑이에게 날개 돋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참 잘하겠는데, 이 눈병 때문에 남의 멸시가 있었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눈병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특별 기도를 했습니다. 본문 8절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눈병이 낫게만 된다면 하나님 일도 잘할 수 있고 남에게도 체면이 설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3. 약한 것을 자랑할 것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가시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본문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이 나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시를 준 것은 바울에게 은혜로 준 것이라 하십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고난도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에 은혜라 함은 고통은 하나도 없고, 병도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형통한 것만 은혜인 줄로 아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도 은혜로 주셨고, 가시도 은혜로 주셨고, 병도 은혜로 주셨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
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으로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아니시면 주는 법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주십니다. 복이 아니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가시를 주시는데 이것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약한 것, 질병, 자기를 찌르는 것 등이 있습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가시로 주셨습니다. 능욕 받는 것, 멸시와 천대 받는 것이 하나님이 가시로 주신 것입니다. 또한 궁핍한 생활도 가시인데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핍박도 가시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또한 곤란도 가시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과 무시 받는 것과 궁핍당하는 것과 고난당하는 것 전부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가시입니다.

자기를 찌르는 사람이 하나있으면, “이것은 은혜로 주신 가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교만해서 망할까봐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일이 잘 되는 것만 은혜가 아니고 일이 잘 못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고구마넝쿨이 뻗쳐 나가는 것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끝머리를 잘라주는 것도 잘되는 것입니다. 또한 잡아 뒤집는 것도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마찬가지로, 그냥 뻗쳐나가면 잘될 것 같
아도 잘라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냥 뻗쳐나가지 못하도록 잡아 뒤집어 가지고 아래에다가 놓아서 햇빛에 말라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근본 뿌리에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세상에 붙은 뿌리를 뽑아 하나님 앞으로 돌리심

우리의 근본 뿌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는 것이 근본 뿌리이지, 세상 뿌리는 뽑아주어야 합니다. 뽑아서 말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다가 재미 붙이면 안 됩니다. 어디에다가 마음을 좀 붙이면 안 됩니다. 어디에다가 소망을 붙이면 안됩니다. 붙으려 하면 뽑아주어야 합니다. 돼지밥통 뒤집듯이 잡아 뒤집어 말려놓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근본 뿌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이제 거기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순이 나는 것을 잘라 주어야 합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식구가 가시인 사람도 있고,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가시입니다. 밥해먹는 가시, 세탁하는 가시, 다림질하는 가시, 그런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재미를 붙이고 뿌리를 붙이고 세상으로 나가려는 것을 잘라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해서 못나가게 만들고 아예 실패하게 만들어 놓아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될라 하면 뿌리를 뽑아놔야 합니다.

일이 틀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시로 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시려고 주시는 가시이기에, 그런 가시가 하나씩 다 있어야 합니다. 다 잘되면 안 됩니다. 다 잘되어나가면 하나님이 가만히 안 두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가만히 둬 두시지 않습니다. 가시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가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용한 사람을 더 귀히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쓰실 때에, 그 종들을 만드시고 길러 가시면서 쓰십니다. 이용물로 만들어서 이용해먹고 내버리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만들어 가고 길러가고 온전케 만들어 가시면서 사용하고, 다 사용한 뒤에는 더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서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십니다.

세상 기구나 이용물은 쓰면 쓸수록 닳아져서 없어집니다. 세상은 헐면 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은 그게 아닙니다. 쓰면 쓸수록 만드시고 더 좋은 것으로 연단시키시고, 또한 기르시고 자라나게 만드시고, 많이 쓸수록 많이 만들어서 더 좋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혹자는 더러 “사람을 이용해먹으려 합니까?”하는데, 맞습니다. 이용해 먹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이용해먹으면 그건 큰 복입니다. 하나님께이용만 당하면 세상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것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으로 연단이 됩니다. 이용당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용 안 당하는 것은 무용지물입니다.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하나님이 이용하시려고, 만드시고, 기르시고, 연단시키시고자 했습니다. 금, 은, 보석으로 점점 만들어야 되겠는데, 이용만 해먹고 버릴 것 같으면 이용만 하면 그만이겠지만, 이용한 것을 하나님이 내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 좋게 쓰고 더 크게 만드시고, 더 아름답게 만드시고, 더 보배롭게 만드시고, 더 영광스럽게 만드십니다. 그러기에 가시를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만큼 가시를 주십니다. 만들어서 귀히 쓰시려는 만큼 더 가시를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를 바울이 듣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것은 쓰면 점점 닳아져서 없어집니다. 삽이나 곡괭이는 쓰면 점점 닳아져서 없어집니다. 자동차도 오래 쓰면 점점 닳아져서 없어집니다. 무슨 그릇도 쓰면 점점 닳아져서 없어집니다. 가스레인지나 무슨 기구나 수저들 다 쓰면 점점 닳아져서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쓰면 쓸수록 점점 실력이 늘고, 키가 크고 몸도 굵어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갖다가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됨

그러므로 가시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자기가 핍박당하고 무능하여 할수 없는 것들이 많아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서운 것도 있고 못가는 곳도 있어야 되는데, 갈 곳 다가고 못하는 것 없이 다 해치우고, 못할 말 없이 말을 다하면 못씁니다. 가다가 못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제제를 받는 것이 있어야 하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바울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 하여집니다. 약하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만 의지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머물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강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약할 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자기가 하려하면 안 도와주십니다. 자기가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질 때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같이 해주십니다.

어린아이의 손에다가 싸인펜이나 붓을 쥐라고 하고 천하명필인 아버지가 아이 손을 붙잡고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아이가 자기가 뭘 좀 하려는 게 없어야 합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올려 그으면 올려 그어야하고 내려 그으면 내려 그어야 할텐데, 이 아이가 자기가 좀 해보겠다고 하면 되지를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동하는 대로 동하고 정하는 대로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인데 자기가 좀 해보겠다고 하나 이렇게 해보고 저거 저렇게 해보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와주시옵소서!”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사용하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할수 없겠다는 자를 도와주시고 자기가 하겠다는 자를 내버리십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질 때에 제가 헤엄쳐 나오려다가 점점 더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할 수 없으니까 “주여! 나를 건지소서”하고 붙드니까 예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약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약할 때에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약할 때에 자신이 무능한 것을 깨닫게 되고, 약할 때에 자신이 할수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주님께 그저 이용되기를 원하고 어디든지 가라하시는 데로 가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서 머물게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전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재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출애굽기에 바로와 싸워서 이긴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저 순종만 한 것입니다. 홍해바다 건넌 것도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건너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을 이긴 것도 하나님께 순종해서 이겼습니다. 모세는 손만 들었습니다. 광야 통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통과한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넌 것입니다. 여리고성 점령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점령한 것입니다. 가나안 7족속 멸한 것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멸했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는 일 전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지혜 있고 통달하였다고 되는 게 아니고, 세상의 지식 많은 자가 그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돈 많은 자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능한 자가 그 유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권세 많은 자가 그 권세로 되는 게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약한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강한 자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하려하면 제가 하는데 어떻게 나타납니까? 아이 손을 붙들고 아버지가 글자를 쓰려는데 아이가 제가 하려하면 되겠습니까? 자신은 약해서 아버지만 의지해서 하면 명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아버지 손 붙잡고 아버지 하는 대로만 따라가면 천하명필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만 가면 명필이 됩니다. 

창세기 21장 1-2절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했는데, 말씀대로 사라에게 권고하셨고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행하시고, 그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서 아들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말씀이 아닌 것은 하지 마십시오. 말씀 아닌 것은 전부 마귀의 역사입니다. 말씀에 안 맞는 것은 전부 마귀역사이니까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안 될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만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능력으로 이루어나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