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옮기는 믿음
마가복음 11:4-26
마가복음 11:4-26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많은 사람은 자기 같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12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은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베투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16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대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과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
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네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1. 예수께서 나귀타고 입성하심 (4-1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앞과 뒤로 가면서 호산나를 불렀고 나귀 위에는 옷을 벗어서 깔고 또 길에도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옹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호산나 하는 뜻은 ‘구원 하소서’ 하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 하소서’ 하는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옹위해서 들어갔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때에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탄 것은 겸손한 왕, 평화의 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예수님께서 말을 타고 나오셨는데 말 타고 나오실 때에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말탄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심판하실 예수님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 타고 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평화의 왕’을 상징하고 ‘겸손’을 나타냅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니”라고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였는데, 겸손의 왕을 상징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겸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였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다 비었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 마음.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주께 맡기고 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만 해나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겸손을 언제나 배우고,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모든 염려도 주께 맡기고, 빈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예수님을 순종하는 마음만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에게 만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 또 무화과나무 저주한 일, 이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영접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
예루살렘에 들어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전적으로 영접해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호산나 주여, 구원 하소서” 하며, 예수님께서 구원해주시면 구원 받을 수 있고,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지 않으면 영영히 멸망할 줄 알고, 언제나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대망하는 믿음을 항상 가질 때에, 이러한 능력의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2.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12-14)
열매를 찾으시는 예수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한번 돌아보시고는, 저녁에 베다니에 가서 주무셨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성에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이른 아침 일찍 들어오시는데 멀리서 보니까 저기 무화과나무가 길가에 서있었습니다. 큰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왕성한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시장하신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좀 얻어 잡수실까 하고 무화과나무를 찾아 갔습니다. 찾아가 보니 잎사귀만 왕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이라.”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말은 무화과의 때가 되었으면 다른 사람이 따먹어서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다른 사람이 따 먹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되겠는데 누가 따먹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화과의 때, 추수할 때가 되기 전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면 무화과가 열매를 맺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이렇게 무화과나무를 예수님께서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열매 없는 유대교가 저주받을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교나 유대교가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은 의식은 많이 성했지만 의식주의였기에, 실제로 들어가서 보면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하고 그만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에도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도 잎사귀만 왕성한 것,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 많이 모이고 의식이 발달되고 또 사업을 많이 하고, 이런 것은 다 잎사귀만 왕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큰 행사를 하는 것은 다 잎사귀만 왕성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잎사귀 왕성한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받으셔야만 그 시장한 것이 면해집니다. 반드시 열매를 드셔야만 시장하신 것이 면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요구하시는데 열매 없는 것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을 가리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면하게 해드리고 만족시켜 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이 의식만 왕성하고 외부적인 면만 이렇게 부흥되고 발전되면 이것은 예수님의 요구에 만족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열매 맺히길 원하시는 예수님
열매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원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는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그 생명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었다고 했는데,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포도가 맺혀야 됩니다. 포도나무만 많이 자라나고 잎사귀만 왕성한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포도 열매가 맺힌 것을 보십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역사가 믿는 사람 속에서 역사해야 되고 생명의 열매가 맺혀야 됩니다. 생명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자라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 중생한 영혼이 연합이 되서 생명의 교통이 있어야 됩니다. 영적 생명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자라납니다. 자라나는 것이 열매입니다. 자라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만족하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체가 커지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제일 기뻐하시고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소금의 역할, 빛의 열매를 원하시는 예수님
또 열매가 무엇입니까? 에베소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빛의 열매가 맺혀야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랬는데, 그 빛의 역할이 나타나고 소금의 역할이 나타나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 빛의 역사와 소금의 역사, 그것이 열매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맛 잃은 소금은 하나님께서 내버리고 사람들은 발로 밟고 자기 속에는 신앙의 맛이 다 없어진다고 그랬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열매 맺지 못하는 소금입니다. 소금이라는 것은 가서 그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심심한 것을 짜게 만들어야 하고 썩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소금 치면 썩어지는 것이 방지됩니다. 또한 맛을 내야 됩니다.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납니다. 어디가나 맛을 내야 되고 부패를 방지해야 됩니다. 또한 소금에는 생명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래 유지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 소금의 역할을 하는 성도여야만 열매 맺는 성도입니다.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자신은 녹아져야 합니다. 녹아져서 없어져야 됩니다. 소금 한 알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소금의 역할을 못합니다. 어디가나 희생하고 자기는 낮아지고 녹아져서 어디가든지 맛을 내고 덕을 세우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는 희생하고 부패를 방지하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했는데 나가서 빛의 역할이 나타나야 합니다. 역사가 나타나야 됩니다. 빛의 역사가 나타나면 의로움과 착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원하시는 예수님
그 다음은 에베소서 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의, 진리, 거룩함을 입은 새사람을 입는 이것이 열매입니다. 열매가 얼마나 맺혔는가 하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믿음의 열매가 얼마나 맺혔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매가 얼마나 맺혔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는 열매가 맺혀야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매, 그 열매를 예수님께서는 요구하십니다.
폴리갑이라는 감독이 있었는데 한 2세기경에 서머나교회 감독입니다. 그때는 로마에서 기독교를 대박해하던 시대로 많은 사람을 잡아 죽이는 때였습니다. 그 폴리갑 감독을 로마관리들이 잡아 죽이려고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올려놓고 불을 놓아서 죽이려고 하는데 그 얼굴을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관리들이 당신이 이제라도 예수님을 한 번만 모른다고 하면 집에 보낼 거니까 한 번만 모른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만 모른다고 하면 로마법에 안 걸리니, 한 번만 모른다고 하고 내려와서 석방 되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이 하는 말이 “예수님은 나를 86년 동안 사랑했지만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모른다고 하리요?” 하고 거기서 순교 당했습니다. 장작불에 타서 순교 당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매, 이런 열매를 예수님께서는 요구하십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이 자라는 것, 이것이 생명의 열매입니다. 이런 열매가 있는가, 예수님은 언제든 찾아오셔서 그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잎사귀만 있고, 나무만 크고 왕성하기만 했지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생명의 역사도 없고, 자라나는 것도 없고,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저주하신 것을 볼 때, 열매 없는 종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3. 성전을 정결케 하심 (15-18)
성전에서 매매함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 보니까 매매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그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거나,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다 내쫓았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은 이권주의, 탐심을 가지고 매매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기자 하는 표어를 내세워가지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소나 양은 아무거나 잡아 제사하면 안 되고 어렸을 때부터 잘 구별해서 기른 것을 잡아 제사해야 하나님께서 잘 받는다고 교인들 앞에 가르치고 그 양을 비싸게 받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시장에서 흠 없는 것 사다가 제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대로 하지 않고 의식으로 너무 치우치기 때문에 의식주의로 나갔습니다. 또 돈을 아무 돈이나 가져다 연보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가이사 화상 그려진 그런 돈을 가지고 연보하면 안 되고, 별도로 성전에서 쓰는 세겔이라는 돈과 바꿔가지고 연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꾸는데 또 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이 나눠먹느라고 돈 버느라고, 그런 방법을 세워놨습니다. 그러니까 이권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탐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의식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교권주의를 써서 교인들의 모든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는 이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전인 우리 안에서 더러운 것을 다 내버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내 쫓았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믿음이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은 성전 정결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고, ‘너희가 성전인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께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멸망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 합당치 않은 것, 욕심, 물욕, 또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모든 요소들, 성전을 더럽힌 모든 것들을 찾아서 다 내버려야 되겠습니다. 회개하고 내버려야합니다. 성전에는 예수님만 들어와 계셔야 됩니다. 다른 것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너희가 성전이다’라고 했으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다 성전이고 믿는 사람들 속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셔야만 됩니다. 다른 것은 다 내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즐거워하고 예수님으로 생명을 삼고 예수님으로 더불어 사는 그런 성전생활을 우리가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능력 있는 신앙에 서지 못합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고 모든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오직 빈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런 영적 성전생활, 기도하는 생활을 늘 해야 되겠습니다.
4. 산을 옮기는 믿음 (19-26)
믿으라, 믿으면 산을 옮기리라
그리고 그날 또 저녁에 베다니에 나가서 주무셨습니다. 그러다 그 다음날 들어오는데 이는 셋째날 아침입니다. 19절에 이제 그 다음날 아침에 들어가다가 보니까 예수님께서 어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단 말입니다. 그때는 안 말랐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들어가다 보니 무화과나무가 말라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어제 저주한 것이 생각이 나서 말을 했습니다. “뿌리로부터 말랐는데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랍비여’는 ‘선생님이여’ 하는 말입니다)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였습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이 무화과나무 저주해서 마른 것 이것이 큰 것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큰 산이라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된다는 그것입니다. 산이 옮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였습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이 무화과나무 저주해서 마른 것 이것이 큰 것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큰 산이라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된다는 그것입니다. 산이 옮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했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거저 믿사오니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거저 믿사오니 하는 것은 미신이고 맹신입니다. 참된 믿음은 말씀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거저 믿사오니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이 성경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거저 믿사오니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미신이요 맹신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시 받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도 안 됩니다. 요새는 표준계시가 종결된 때입니다. 성경을 믿어야 되는 것이지 계시 받은 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계시 받은 것도, 꿈꾼 것도 성경에 맞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어야지 그것 믿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 맞지 않으면, 그건 다 제 꿈 아니면 개꿈인줄 알면 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 계시를 봤다든지, 성경에 맞지 않는 환상을 봤다든지, 성경에 맞지 않는 꿈을 꿨다든지, 그건 다 제 꿈 아니면 개꿈입니다. 그런 것 믿으면 안 됩니다. 또 꿈이 딱딱 맞는 수가 있습니다. 꿈이 딱딱 맞아도 그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믿다가는 그만 신앙에서 탈선되고 마귀에게 끌리워갈 날이 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이 믿는 겁니까? 성경을 믿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으면 믿는 것이고 다른 것 믿는 것은 다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미신이요 맹신입니다. 성경을 믿는데, 마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여서 순종하는 것 하고, 즉, 마음으로 믿는 것 그 다음에 몸으로 행하는 것, 그 둘이 합해야 온전히 믿음이 됩니다. 성경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믿는 것하고 그것을 몸으로 행하는 것 하고 둘을 합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행하여야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서 ‘믿습니다’ 하는 것은 믿음의 절반이고. 그대로 ‘행합니다’ 하고 행하면 온전한 믿음입니다. 특수한 것은 마음으로만 믿어도 되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보편적인 모든 진리는 마음으로 믿으면 믿음의 절반이고 몸으로 행해야만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순종을 하는 것,그리고 몸으로 그 말씀을 가서 순종을 하는 것, 이것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야 산이 옮겨진다
하나님 명령에 ‘산을 가서 옮겨가라고 해라’ 하는 말씀이 있어야합니다 첫째, 명령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명령이 없으면 아무리 산을 옮겨달라고 와서 기도해도 안 되고, 철야기도해도 안 되고, 금식기도해도 안되고 죽어도 안 됩니다.
서울의 남산이 인천 앞바다에 빠지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금식기도해도 안 되고, 철야기도 해도 안 됩니다. 그것이 왜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는 것은 암만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남산에게 들려서 인천앞바다에 빠져라. 가서 해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했다고 하면 될까요, 안될까요?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남산을 인천 앞바다에 빠지라고 했으니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는 것입니다. 남산에 가는 겁니다. 회현동으로 해서 남대문으로 해서 남산에 가서 큰 소리로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산아, 인천 앞바다에 빠져라” 하면 훌쩍 들려서 인천 앞바다에 빠집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 명령 임하기 전에 아무리 가서 “빠져라, 빠져라” 소리해도 그건 안 빠집니다. 말씀이 없으면 안 빠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명령 있을 때에는 가서 한마디만 하면 훌쩍 빠집니다.
왜 빠지는가? 하나님의 명령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만 하고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한 마디 했으면 만능으로 그대로 이루어 놓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가서 명령하면 이것이 인천 앞바다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빠쳐놓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산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명령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내가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대로 순종하면 만능이 나타납니다. 산도 옮겨지고 홍해바다도 갈라지고 또 애굽 사람도 다 멸망시킬 수 있고, 다 할 수 있습니다. 반석에서 물도 나올 수 있고 메추라기도 내올 수 있고 만나도 내려오고 다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이것이 중요한데 명령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만능으로 역사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놓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알고 성경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순종하면 만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만능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성경 명문에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우리에게 사건들이 수백 가지, 수천 가지, 수만 가지로 닥치는데, 그것들이 다 성경 명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 명문에 있는 것은 성경 명문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이고, 명문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성경에서 찾아야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해 나가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그리고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해 나가시는 것을 척 보면,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비추어서 하나님께서 섭리해 나가는 것을 볼 때에 ‘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깨닫게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신앙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는 성경,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감동, 신앙 양심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야합니다. 이것이 참 힘듭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해 주십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 하면 그대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순종만 하십시오. 순종만 하면 태산이 훌쩍훌쩍 날아나가고,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막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당장 죽을 것 같아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목말라서 쓰러질 것 같아도 생수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만능으로 다 해 나가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계신데, 이런 능력을 믿으면 우리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13에는 “믿는 자에게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때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찾아서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해서 무덤 속에 들어가서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지만,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이 말씀입니다. ‘믿으면’ 하는 것은 순종을 말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순종입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고, 몸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죽어서 장사해서 썩어져서 냄새가 나는데 무슨 영광을 보느냐고 하지만 그래도 네가 순종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돌을 옮겨 놔라. 무덤을 돌로 막아 놨는데, 돌을 옮겨 놓으라고 그랬습니다. 마르다가 “돌을 옮겨놔야 아무 쓸데없습니다. 냄새 더 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래도 옮겨 놔라. 네 생각을 버리고 옮겨 놔라.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옮겨 놓으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벌떡 일어서 나왔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썩어져 냄새가 났었는데 벌떡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살아나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아나고 홍해 바다도 갈라지고 산도 옮겨지고 만능의
역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살아나게 만들어주고 건설하게 만들어주고 형통하게 만들어서 생명 길로 인도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