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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욥기 39:1-30 하나님께서 여러 짐승들을 통해 욥을 교훈하심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하나님께서 여러 짐승들을 통해 욥을 교훈하심
욥기 39:1-30

1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2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네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4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5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7들나귀는 성읍의 지껄이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9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11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13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14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15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16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17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18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19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찌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24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
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26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28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29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1. 산(山) 염소와 암사슴의 생식에 대하여

세 번째 짐승, 산 염소

본문 1-4절에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네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세 번째 짐승이 나오는데, 첫째와 둘째 짐승은 욥기 38장 39절에 나왔습니다. 욥기 38장 39-41절에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욥기에는 들짐승의 왕 사자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짐승들이 나오는데, 마지막에는 바다의 왕 악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자가 아무리 산 중의 왕, 짐승 가운데 왕으로, 강하여 그것을 당할 짐승이 없어도 사자 역시 사냥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굴에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 아무리 강해도 먹을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할 일을 해야만 살 수 있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까마귀 새끼를 위하여 식물을 준비해놓으시고 먹게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 새끼까지 먹여 기르실 것을 그것들을 창조 하실 때에 섭리하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산 염소와 암사슴이 나왔는데, 이 둘은 다 암염소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암사슴도 암염소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산에 염소가 있고 암염소가 있는데, 그 산 염소가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또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를 아느냐, 그 낳을 때를 네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내보지 않고는 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산 염소가 새끼 낳는 것을 그것들과 지내보았으면 알 수 있지만, 지내보지 않았으면 알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너는 몇 달 만에 나와라”하고 기한을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그것들이 새끼를 낳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짐승들을 만드신 목적

1)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깨달아,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려고 여기에 짐승들이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지혜와 특정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짐승들마다 성격, 새끼를 낳는 구체적인 방식과 때, 힘, 지혜가 각각 다른데,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다르게 내셨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많은 짐승도 있고 지혜가 없는 짐승도 있으며, 사랑이 많은 짐승도 있고 무정한 짐승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짐승도 있고 아름답지 못한 짐승도 있습니다. 또 유순한 짐승도 있고 잔인한 짐승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짐승에게 다 지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짐승에게는 지혜를 주지 않으심으로, 그들로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또 다 강하게 하지 않으시고 어떤 짐승은 약하게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겠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고, 지혜 있는 것도 있고 지혜가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짐승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 지혜,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한 것도 짐승들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또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데에도 이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짐승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다 관할하시고 통솔하시며 어거(馭車)하시면서 이용해나가십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통치하시고 관할하시며 주장 하시는 것입니다. 다 어거하시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짐승들을 보고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짐승들을 보고 첫째 하나님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짐승한테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또 짐승들을 통해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는데 성도는 짐승들에게서 배울 바가 많고 감사할 바도 많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성도에게 유익을 주시려고
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성도로 하여금 유익이 되게 하시려고 모든 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 다니엘 때에는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났고, 성도가 유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증거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는 사자가 하나님의 일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들 가운데 사람에게 잘 복종하는 짐승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큰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힘이나 실력으로 보면 짐승이 더 세고 좋은데, 그래도 사람에게 잘 복종해서 사람의 일을 잘 도와주는 짐승이 많이 있습니다. 소나 말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짐승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 은혜로 주신 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무정한 산 염소
그런데 산 염소나 암염소는 새끼를 낳느라 많은 구로(劬勞)를 하는데, 낳아놓고는 내버리는 짐승들입니다. 즉, 무정한 짐승들입니다. 새끼를 낳느라 수고를 많이 했으면 그것을 잘 길러야 되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미가 기껏 고생을 많이 해서 낳아 길러놓은 다음에는 새끼가 달아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집에도 안 들어오고 부모를 돌보지도 않는 그런 아들이 있습니까? 어떤 과부가 아들 하나를 낳아서 자신을 희생하며 그 아이를 잘 길렀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그 아들을 공부시켜서 미국으로 보냈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미국에 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부 어머니가 자기 하나를 보고 여러 가지 고생을 많이 하면서 공부를 잘 시켜주었으면, 그 아들이 큰 다음에 자기 어머니를 잘 모셔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가서 의사가 된 아들이 돈 한 닢도 안 보내주고 어머니한테 한 번 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너무 섭섭해서 많이 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운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생겨먹기를 산 염소 같기 때문에, 산 염소 같은 아들 하나를 낳아 놓은 줄로 알아야 합니다. 염소가 뭘 돌아오겠습니까? 그런 줄로 알아야 합니다. 

아들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염소 같은 아들, 송아지 같은 아들, 망아지 같은 아들 등, 여러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좋은 아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산 염소와 같은 아들은 그저 달아나면 안 오는 아들로 알면 됩니다.

2. 들 나귀와 들소에 대하여

들 나귀로서의 삶의 결과

본문 5-8절에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 나귀는 성읍의 지껄이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들 나귀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후덕덕하고 제 맘대로 뜁니다. 누가 와서 끌고 가려고 해도 안 끌려갑니다. 들 나귀는 자기 자유대로 사는 나귀인 것입니다. 또 들 나귀가 빠르며 누구한테 매이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성읍에서 사람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제 맘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 나귀를 끌고 가려고 아무리 와서 얼리며 별 소리를 다해도 귀를 딱 막아 안 듣고 제 맘대로만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 자유이고, 빨리 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또 제 맘대로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좋은데, 결국 들 나귀는 짠 땅,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불모지에 산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8절에 보면 들 나귀가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제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나가지만 사는 곳이 시원치 않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 배고픈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들 나귀와 같이 제 맘대로 돌아가면, 그 결과가 비참하게 됩니다. 예전에 장영자, 이철희 사건이 크게 났는데, 그들이 둘 다 들 나귀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 이철희 씨가 옥중에서 이혼을 하고 장영자 씨는 골수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죽게 생겼습니다. 들 나귀가 아무리 뛰어다니면서 돈 몇 천 만원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는 옷장을 몇 천 만 원짜리로 해놓고 의복은 몇 벌이며, 하여간 세상 것을 다 자기가 소유한 것처럼 돌아갔지만, 결국은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골수암에 걸려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되었고 또 이혼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 나귀 말고 집에 있는 나귀는 어떻습니까? 집에 있는 나귀는 들 나귀만큼 자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 순종을 잘하고 주인을 잘 도와주며 자기 할 일을 잘하기 때문에 먹을 것 걱정이 없습니다. 일 잘하는 나귀는 주인이 그 구유에 매 끼를 주고 외양간에는 북데기
를 깔아줍니다. 뜨뜻하게 잘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 나귀가 제 자유대로 후덕덕하고 뛰어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먹을 것이 없고 거처도 시원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잘 지키고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자기의 할 일을 제대로 잘하는 나귀가 좋습니다. 집에 있는 나귀와 같이 주인을 잘 알고 주인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은 주인이 잘해주므로 먹을 것 걱정이 일평생 없습니다. 병이 나도 걱정이 없습니다. 집도 가장 좋은 곳에다 지어줍니다. 겨울에는 북데기를 깔아서 뜨뜻하게 해줍니다. 좋은 데에서 잘 길러주는 것입니다. 또 병이 나면 고쳐줍니다. 

그러므로 자유가 좋은 것 같지만, 진리 안에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진리 밖에 있는 자유는 제 본분을 하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들 나귀와 같은 사람으로, 사람이 거하지 못하는 건건한 땅에 가서 거하며 영적으로 배고파하며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그 육체도 비참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옵니다. 

들소와 같은 자유는 그 결과가 비참함

본문 9-12절에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들소가 아무리 힘이 세도 쓸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들소의 힘이 집소보다 더 세고 강하지만, 들소는 무용지물입니다. 저 혼자 힘을 쓰고 돌아가지만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힘이 세고 뭘 잘하기는 잘하는데, 말을 안 듣고 멍에를 메지 아니하므로 쓸 데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덕덕 뛰어 돌아다니고 곡식을 먹으라고 해도 안 먹고 밭을 갈자고 해도 안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어거당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들소와 같은 사
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힘을 가지고 이 사회에 유익되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 혼자 힘 자랑만 하고 돌아가다가 그만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하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복음 운동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뭘 합니까? 교회에 유익을 주나 사회에 유익을 주나, 저 혼자만 힘이 세다고 돌아가면서 제 볼 장만 보면, 그 사람은 들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집소는 들소만큼 힘이 세지 못해도 그 주인을 위해서 충성합니다. 이 사회를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소는
들소보다는 약해도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집소는 외양간에 잘 머물게 하며 잘 먹여줍니다. 하여간 힘이 세다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지 않으며 교회에나 사회에 유익을 주지 아니하고 제 힘으로만 나가는 사람은 안 됩니다. 돈이 있다고해서 돈만 믿고 제 맘대로 나가고 이용당하지 않는 사람은 들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 맘대로 나가므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 자기 볼 장만 보므로 다른 힘이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력이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하여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도 하나님의 일에 유익을 주지 못하므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들소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만 못해도 잘 순종하고 제 자리를 잘 지키며 자기 맡은 바 직분에 충성하면, 그 사람은 집소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집도 주십니다.
소가 주인을 위해서 충성할 때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꼬리를 툭툭 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좋아서 순종을 합니다. “이랴”하면 가고 “와”하면 서고 “도치”하면 돌고 또 “이랴”하면 갑니다. 또 “마라”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외나”하면 왼쪽으로 가는데, 그것만 하면 편안하고 매는 한 번도 안 맞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하다가 들어오면 먹을 것 걱정은 하나 없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소물을 다 끓여다가 한 다라에 콩을 섞어서 가져다 줍니다. 또 점심 때가 되면 주인 아주머니가 여물 통 한 통에다 조짚, 콩짚, 볏짚을 썰어 한 데 다 섞어가지고 거기에다가 콩을 한 데 두고 끓여가지고서는 가져다가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껏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랴”하면 가면 되고 “와”하면 서면 되고 “도치”하면 돌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저녁에 또 먹을 것을 한 다라씩 해서 가져다가 줍니다. 그리고 겨울에 추우면 북데기를 가져다가 두툼하게 깔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소는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외양간이 있습니까? 겨울에도 찬 데에 가서 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가 좋다고 하면서 제 자유대로 힘 자랑하면서 다니지만, 결국은 실속이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있을 곳도 시원치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도 진리 안에 있는 자유,
제 책임을 다 하는 자유, 자기 위치를 지키는 자유, 법도를 지키는 자유여야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는 자유는 들소나 들 나귀와 같은 자유입니다. 그 결과가 비참하게 됩니다. 자꾸 “자유다, 자유다”라고 하며 나가다가는 결과가 비참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자유, 자기의 본분과 질서를 유지하는 자유, 제 책임을 잘하는 자유가 되어야겠습니다.

3. 타조에 대하여

타조와 같은 사람은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함

본문 13-18절에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타조는 날개를 치면서 달아날 때에 매우 빠르다고 합니다. 얼마나 빠른가 하면, 한 시간에 42.6km를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에 백 리 정도를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열 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타조는 한 시간이면 다 갑니다. 그렇게 빠릅니다. 말보다 더 빠르다고 합니다. 아마 짐승 가운데 타조가 제일 빠를지 모르겠습니다. 또 날개가 상당히 크고 그 날개를 칠 때에는 아주 위엄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조가 달아날 때에는 따라갈 짐승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타조에게 지혜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무정합니다. 그렇게 힘이 세고 위엄이 있고 털이 많고 날개를 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사랑도 주지 않으셨고 지혜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아가지고는 그것을 내버리고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짐승은 자기 알을 까며 새끼를 사랑하여 모성애(母性愛)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새끼를 잘 기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타조는 그것이 없어서 알을 낳아놓고는 내버리고 달아납니다. 새끼를 까겠으면 까고 말겠으면 말고 알을 까먹겠으면 까먹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관념치 않습니다. 한 번 낳았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조의 종류가 없어질 것 같은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것도 새끼를 까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사막의 모래가 따뜻하기 때문에 그 모래의 따뜻한 기운을 받아 새끼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조와 같은 것들도 살게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짐승들에게는 지혜와 사랑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을 주신 것을 생각하며,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타조한테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타조와 같이 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제 책임을 다 하며 자기 아이들을 자기가 잘 길러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해야 될 것은 자기는 잘 하는데 다른 사람이 타조 같다는 생각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무개는 타조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도 타조와 같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얼마나 잘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남보고 타조 같다고 하지 말고 자기나 타조 같지 굴지 말자고 하며, 자기도 타조와 같은 줄을 알고 배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배울 생각은 안 하고 자기는 다 된 줄로 알고 남에게만 갖다 붙이면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되다 만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빠지면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타조가 달아날 때에 얼마나 잘 달아나는가 하면, 본문 18절에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 탄 사람이 아무리 말을 때려 몰아도 타조를 못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빠르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빠르면 뭘 합니까? 또 큰 날개로 날개를 친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무엇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제 책임을 다하고 자기의 할 일을 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 혼자 날개를 치고 돌아간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의 진리
운동에 유익을 줄까? 교회에 유익을 줄까? 어떻게 해야 개척 교회를 좀 세울까? 다른 사람을 전도할까? 교회에 봉사를 좀 할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타조와 같이 저 혼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빨리 뛰어다닌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4. 말[馬]에 대하여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말

본문 19-22절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찌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좋은 동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에게 힘을 주시고 또 말로 하여금 사람에게 잘 순종하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순종을 잘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말과 소가 사람보다 힘이 세지만, 그것들은 사람에게 잘 순종해서 사람의 일을 잘 도와줍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해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타조 같은 사람, 들소 같은 사람, 산염소 같은 사람, 들 나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알고 잘 도와주며 용맹이 있는, 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도 내셨습니다. 말은 목이 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목에 흩 날리는 갈기를 주셨습니다. 말의 목을 긴 털이 덮고 있는데, 말이 달릴 때에 흔들흔들하는 것이 바로 그 털, 즉 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아름답게 해놓으셨습니다. 말에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것을 주시고 용맹 있게 하셨습니다. 울음소리도 굉장히 크게 해주셔서 말이 한 번 ‘히히힝’하고 울 때에는 산이 쨍쨍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에게 위엄스러운 콧소리를 주셨고 뛸 때에는 메뚜기처럼 매우 빨리 달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힘이 있어서 평평한 땅에서만 뛰면 좀 심심하니까 골짜기에 빠지기도 하면서 경사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기뻐합니다. 골짜기에 한 번 빠졌다가 후덕덕 하고 산으로 뛰어 올라가야 기분이 나는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늘 평평하기만 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에 좀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맛이 있어야 말도 기분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 역시 늘 평평한 것만 좋아하지 말고 깊은 데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용맹을 가져야 합니다. 또 말은 전쟁에 나가면 적군이 아무리 많아도 두
려워하지 아니하며 군사들을 맞이합니다.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가지 아니하며 맞으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때에 말을 타고 나가면 대적이 많아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 마주 나가는 것입니다. 칼을 가지고 나와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끝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가는 것이 말입니다.

말과 같은 신앙을 가지라

본문 23-25절에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아무리 전쟁 마당에 나가서 원수가 많아도 무서워하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와 장군의 소리와 떠드는 소리에 용기를 얻어 냅다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탄 장군의 소리, 나팔 소리, 군사들의 고함치는 소리에 말이 힘이 나가지고 힘껏 원수의 적진으로 진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 같이 사람에게 잘 순종하고 용기가 있으며 빠르고 적군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동물을 사람에게 주셔서 큰 일을 하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 들소와 같고 들 나귀와 같으면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말 같은 동물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잘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말한테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용맹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팔 소리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잘 순종하며 자기 윗사람의 말을 잘 듣고 전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말이 주인의 말을 순종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말은 자기가 부리는 주인의 말을 잘 순종해서 아무리 험한 데라도 가자고 하면 생명을 내놓고 달아납니다.
상대가 아무리 빛난 창과 검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가되, 골짜기가 있으면 더 좋아하는, 그런 용맹 있는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좋다고 하다가 골짜기가 하나 닥치면 빠져서 못 나온다고 하지 말고, ‘골짜기야 오너라. 내려갔다가 올라오면 된다. 더 좋다’고 하면서 달아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5. 매에 대하여

철새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

본문 26절에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라고 하였습니다. 매는 추울 때에 남방으로 가서 털갈이를 하는 철새와 같은 새입니다. 그런데 제비나 학, 두루미, 매와 같은 종류가 자기들이 남방으로 가서 겨울을 나야 할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학교를 세워놓고 강습을 시켰습니까? “황해는 건너가는데 몇 킬로다. 또 강남으로 가야 한다. 강남은 어디에 있다. 또 몇 시간만 날아가면 강남이 있다. 날아가다가 아프면 어떤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내려서 쉬고 가면 된다”고 하며 지도를 다 그려주고 강습을 시켜서 갑니까? 강습을 누가 시키겠습니까? 그래도 그것들이 압니다. 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보다 낫습니다. 사람이 강남을 어떻게 갈 것인지를 어떻게 압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연어 같은 것은 조그마한 새끼 때에 놓아주면 알라스카에 가서 여러 해 동안 큰 고기가 되어 가지고 다시 자기를 놓아준 데로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곳을 어떻게 찾아 갑니까? 조그마한 새끼가 어떻게 알라스카를 알고 갑니까? 알라스카에 가려면 서울에서 비행기로 8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놈이 어떻게 비행기로 8시간 가는 곳을 갑니까? 물로 가려면 아마 몇 달을 가야 될 것입니다. 몇 달 동안 알라스카를 어떻게 찾아가는가 말입니다. 인천에서 놓아주면 인천으로 오고 부산에서 놓아주면 부산으로 온답니다. 자기 고향을 찾아 간다는 것입니다. 조그마했을 때에 떠났는데 어떻게 자기 고향을 알고 찾아옵니까? 지도가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자기를 놓아준 고향을 압니까? 놓아준 그 골짜기를 찾아온다고 하니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아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알라스카에 놓아두고 걸어서 한국을 찾아오라고 하면 올 수 있습니까? 또 배 타고 가라고 하면 갈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매에게 지혜를 주셔서 추워서 못 살 때에는 더운 데에 나가서 살도록 만들어놓으셨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또 오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6. 독수리에 대하여

독수리와 같은 삶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

본문 27-30절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험산 준령 뾰족한 바위 틈에 보금자리, 둥지를 틀고 거기에다 새끼를 낳는답니다.
누가 와서 침범하지 못하도록 아예 견고한 피난처를 만들어놓고 새끼를 낳고 잡아먹을 것이 있는가 멀리까지 바라보면서 쥐새끼 같은 것이 기어가면 빨리 가서 그것을 움켜다 잡습니다. 그리고 자기 새끼에게 가져가서 찢어가지고 피를 빨아 먹인다는 것입니다. 바위 틈 피난처에다 자기 집을 짓고 자기 새끼를 누가 와서 침범하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만들어 방위선을 잘 치고 난공불락의 자기 둥지를 틀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멀리 보면서 삼킬 것을 사방으로 살피다가 하나 있으면 가서 움켜다가 먹는 것입니다. 그런 독수리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남을 잡아먹고 사는 짐승,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짐승입니다.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체, 죽은 것을 먹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독수리가 높이 올라가며 견고한 데에 집을 짓고 남을 잡아먹고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에게는 멀리까지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독수리가 몇 백 미터 되게 높이 떴어도 땅에서 쥐새끼가 기어가는 것을 다 봅니다. 눈이 얼마나 밝은지 모릅니다. 사람 눈보다 독수리 눈이 아마 몇 십배 밝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하나 기어가면 쏜살같이 내려가서 잡아다 먹는 것입니다. 높은 데에 자기 집을 견고하게 지어놓고 남을 잡아다가 먹고 침범을 못하게 만들어놓고 살고 있으니, 독수리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독수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갔어도 그것이 바라보는 것은 땅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남 잡아먹을 생각만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만 차지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독수리는 아무리 자기의 도성을 견고하게 만들어놓고 아무리 높이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위대하게 있어도, 결국은 땅만 바라보고 위를 바라볼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 잡아먹을 생각만 하고 잡아먹은 것으로 새끼나 길러놓고 죽은 데나 가서 거기에나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수리가 위엄 있게 날아다니는 것이나 높은 곳에 집을 짓는 것에 비하면, 실제 죽은 것이나 먹고 살고 남의 피나 빨아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같은 사람은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손해만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오면 다 망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그러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재에 무엇을 잘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잘 지어놓았다. 사업체를 견고하게 해놓았다. 자녀들을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그 안에 넣어놓아서 누가 와서 꿈쩍을 못한다’고 하지만, 남을 잡아먹고 사는 결과는 비참한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짝하고 나가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밖에 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