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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수요일

요한복음 10:14-40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안다,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안다
요한복음 10:14-40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22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37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39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1.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영적 본능이 있다

거짓 선지자는 위험이 올 때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본문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는데, 이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을 아시고, 양도 예수님을 압니다. 요한복음 10:3-4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라고 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소들이 우리에 파이프(pipe)로 자리를 해놓으면 자기의 자리를 알고 찾아간다고 합니다. 10번이 자기 자리라면 10번을 알아서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소들이 글자를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래스카의 연어들도 고향을 떠나 바다에서 여러 해 생활한 후에 자기를 낳아준 곳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자기가 본디 태어난 곳을 어떻게 알고 돌아가는지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가령 어미 연어가 한강에서 알을 낳았다고 하면, 그 새끼가 황해를 거쳐 동해로 해서 알래스카 바다에까지 갔다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돌아와도 낳아놓은 바로 그 자리, 마포면 마포, 이렇게 정확하게 돌아온다고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도 몇 시간이 걸릴 거리인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능적으로 찾아오게 만들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본능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아는 영적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찾아가는 본능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자신의 영적 생명에 딱 들어맞습니다. ‘아, 이것이 주님의 음성이구나, 내가 이 말씀을 들어야 살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제가 어디로 가오리까”라고 말했던 베드로와 같이, ‘진짜’를 아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았는데, 어디 다른 데를 가겠습니까? 다른 데는 목자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허튼 소리, 속여먹는 소리, 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육신적입니다. 설교를 들어보니, 세상적이며 추구하는 것이 육신적이면,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은 신령한 음성인데, 그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이 평안하고 심령이 안정되고 속에서 힘이 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심령이 소생해 올라옵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음성 한 마디를 들으면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 더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기선 목사님의 대소지가 있는데, 한 번 봤더니 얼마나 좋은지 눈이 번쩍했습니다. 최 모 조사 보고 한 번 빌려달라고 했더니 못 빌려준다고 합니다.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못 빌려준다고 합니다. 옛날 것이라 새로 살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와서 베껴 쓰면 빌려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로 가서 밤을 새어 노트에다 다 베꼈습니다. 밤새도록 베끼고 돌려주었고, 최 모 조사는 원본을 가져갔습니다. 저는 그때 그 노트 베낀 것이 너무 좋아서 얼마나 기쁜지 그것을 보배와 같이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보면 압니다. 바로 되었는지, 이것이 주의 음성인지 압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기선 목사님 대소지 책을 출판하려고 합니다. 신약만 출판하는데, 8월 말 즈음이면 나올 것입니다. 아주 좋은 것입니다. 나오면 사십시오.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압니다. 그 음성을 아는 것이 양의 특징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들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 요구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 앞으로 있어야 할 것들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전부 아시고 기도하기 전에 다 주십니다. 또, 기도해야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정을 다 아십니다. 이미 말했듯이 다 아시고 필요한 것들을 다 주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키십니다. 보호해 주시고 원수가 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꼴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우리에 들어간 양과 그렇지 않은 양

본문 16절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 무엇입니까? ‘이 우리에 들어가는 양’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중생하여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는 사람이 이 우리에 들어가는 양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방 사람이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 우리에 든 사람은 당시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 몇 명밖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몇몇 사람만의 목자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은 ‘이방 사람이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모든 믿는 사람들의 목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당시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만의 목자라는 의미일리는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신 것도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당시 예수님 곁에 있는 몇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 음성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그 음성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목자, 모든 성도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내 음성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도의 이름을 안다’라고 해석을 해야만 바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즉, 현재 당신 주위에 있는 몇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술람미 여자와 예루살렘 여자들

그러면,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신령한 성도가 아닌 신자들을 말합니다. 즉,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술람미 여자와 예루살렘 여자들이 나옵니다. 아가서 1:5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와 술람미 여자가 있는데,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따라서 그 침궁에까지 들어가는 여자입니다. 그 깊은 자리에까지 들어가는 성도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바깥으로 나오시면 나왔다고 환영하고, 들어가시면 들어간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고 맙니다. 깊은 방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신자이긴 신자입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성도가 있고, 육신에 속한 성도가 있습니다. 신령한 성도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성도이고, 육신에 속한 성도는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다른 양’입니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육신에 속한 성도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술람미 여자가 아니고, 다 신령한 성도가 아닙니다. 신령한 성도도 있고 육신에 속한 성도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육에 속한 성도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인도하시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양을 위하여 목숨을 스스로 버리시는 예수님

본문 17-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하여 자원하시어 목숨을 버리십니다. 양을 위하여 자원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양 때를 건지려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부득불 잡혀 죽으신 것이 아니고,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마주나가서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자원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께서는 그 내놓으신 것을 다시 찾으실 권세도 가지고 계십니다.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순종할 때에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목숨을 버리시고 순종하심으로 다시 목숨을 찾으십니다. 목숨을 버리고 순종하면 다시 찾습니다.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인데, 순종함으로 버린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됩니다. 

3. 예수님과 같이 마귀의 격동을 이기라

본문 19-21절에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떤 사람은 “귀신 들렸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다, 귀신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귀신 들렸다는 말을 들으시고 속상해 하셨습니까? 억울하다고 머리 싸매고 드러누우셨습니까? 아닙니다. 

파리 백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남들이 뭐라고 해도 안 잡아먹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화가 나서 안 그랬다며 붙들고 싸우면, 그것은 마귀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되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놔두면 되는 것입니다. 간혹 본인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남들이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말을 듣고, 남들이 욕하고 비방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속상해 하면 안 됩니다. 속상해 하면 마귀에게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에게 무슨 억울한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아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드러누웠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어와서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고, 또 바로 하던 사람은 그 말에 머리 싸매고 드러눕는 경우, 이 둘 모두 마귀의 역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 역사를 이기려면,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걸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마귀는 그러다 그만둡니다. 마귀가 그러다 그만 둘 것을 속상하다고 드러누우면, 그 사람은 마귀에게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앞의 경우, 그 마귀는 두 사람을 다 잡았습니다. 하나는 거짓말로 공격하게 만들고, 하나는 바로 하다가 머리 싸매고 드러눕게 만들었습니다. 둘 다 잡은 셈입니다. 둘 다 잡히면 그것이 얼마나 손해입니까? 누가 귀신 들렸다고 해도 가만히 있으면, 그러다가 관둡니다. 무엇 하러 싸웁니까? 싸우면 일이 더 커집니다.

4. 예수님의 양이 아니면 증거를 봐도 못 믿는다

본문 22-24절에 수전절이 되었습니다. 성전 한 솔로몬 행각에 예수님께서 다니실 때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니 그들이 의아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중에 믿는 사람들도 생기니 이에 밝히 말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무엇이 증거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당신을 증거하는데, 왜 안 믿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무슨 일들이었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일, 신령한 눈을 뜨게 한 일, 생명을 살린 일,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소경으로 하여금 육신의 눈과 신령한 눈을 뜨게 하시고, 생명을 살려 나가며 구원 운동을 이루어 나가는 일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일들이 증거가 되는데, 다른 무엇을 증거로 대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 영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 양의 우리로 들어가게 하는 일, 이것들이 증거하고 있는데, 그 외에 무슨 증거가 더 있어야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제일 큰 증거

제일 큰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 그 운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증거하는데 무슨 다른 증거가 필요하느냐,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이 있고 예수님의 양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류가 다릅니다. 양이 아닌 사람, 즉 염소가 있습니다. 그러한 종류가 있기 때문에 ‘아닌 사람’은 못 믿습니다. 염소를 아무리 잘 먹여도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 택자와 불택자, 가라지와 곡식이 있습니다. 가리지에 비료를 아무리 잘 치고 잘 길러도, 그것이 곡식이 될 수 없습니다. 종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도 종류가 다 다릅니다. 믿을 사람이 있고 안 믿을 사람이 있습니다. 안 믿을 사람은 아무리해도 안 믿습니다. 믿을 사람은 한 마디만 던져줘도 후떡 하니 믿고 따라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받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의 우리에 있는 양은 누구도 빼앗지 못함

본문 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달게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아시고 양은 예수님을 알고 따라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우리는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합니다. 마귀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못
빼앗습니다. 그러나 우리 밖에 나가면 안 됩니다. 우리 밖에 있으면 마귀가 집어 삼킵니다.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을 때, 양에게 원수가 와도 손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 28-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예수님의 손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데, 그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유보다도 크십니다. 만유
라는 것은 만물,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모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6.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본문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고 성령과 아들이 하나이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하나, 일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삼위가 다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하나님이시다, 는 말은 요한복음 1:1에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빌립보서 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야를 보고 “네가 하나님을 속였다”라고 하면서, 성령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그와 같이 성령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도 하나님 아들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 하나님이 셋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벧후 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합니까? 한 분은 땅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내려 왔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하나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신명기 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엘로힘’이라고 하는데, 이 ‘엘로힘’이라는 글자는 신들이라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신들이 오직 ‘하나’라는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 신들이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꼭 들어맞는 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 태양과 같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빛이 있고 열이 있고 본체가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계시대로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음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데, 영원히 나오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영원히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고, 미완성이 아니라 항상 계속되면서도 항상 완료된, 신적 역사이십니다. 아버지께로서 아들이 나오시는 것은 영원히 나오시는 것입니다. 미완성이 아니라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고 아들 성자에게서도 나오십니다. 언제 나오시느냐? 그것도 영원부터 나오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이냐? 영원까지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가 바로 되어야 교회가 바로 서고 부패하지 않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헬라 정교회가 갈라졌습니다. 교리가 달라서 갈라졌습니다. 헬라 정교회는 성령은 아버지께로만 나오고 아들에게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아버지께로부터 또 아들에게서도 성령이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성부 성자 모두에게서 성령이 나온다는 말이 옳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갈라졌습니다. 헬라 정교회는 나중에 많이 타락이 되었습니다. 이후 헬라 정교회는 러시아로 들어갔는데, 러시아 교회들이 전부 헬라 정교회입니다. 정교회는 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여간 부패한 것이 아니고 아주 타락이 되었습니다. 요즘 헬라 정교회에서 우리 신교(新敎)를 탄압하고 전도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못하게 막아도 우리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성경에 하나이시라고 나왔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나오시는 신적인 역사를 계속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삼위일체가 되었습니까? 사람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조금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가축이 다 알 수 없습니다. 가축이 사람이어야만 사람이 하는 일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성경에 계시해 주신 것만 아
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믿고 아는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영적 본성에 딱 들어맞습니다.
삼위일체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또 성령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들었을 때,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명, 그 본질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심령에 들어맞고 기쁘고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설명은 못합니다. 성경에 그렇다고 나와 있으니 믿는 것이지, 다 설명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알고 믿는 것이 있고 믿고 아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은 믿고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믿고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대속(代贖)과 부활은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이 있고, 믿고 아는 것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믿고 아는 것입니다.

7.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믿으라

본문 31-33절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데, 선한 일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참람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참람함이란 주제 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으로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했다며 돌로 치려한 것입니다.

본문 34-3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시편 82:6을 보면,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됩니다. 즉,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재판관들을 가리키며, 또한 유대인들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모세를 신이라고 부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용하셨습니다.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는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신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자신을 신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적d니 역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이 신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본문 36-39절에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심령을 살려내시는 일입니다. 영적 생명의 역사, 영적 병 고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 일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신적인 역사, 하나님의 하시는 일, 생명의 역사, 생명을 살려나가시는 일,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 시는 것으로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벗어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