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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갈라디아서 6:11-18 십자가의 규례.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십자가의 규례
갈라디아서 6:11-18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아라. 

6:12 육체에 모양을 내려 하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받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6:13 할례를 받은 자들이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는 것이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렇게 되었다. 

6:15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롭게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6:16 이 규례를 따라 사는 자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6:17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하지 마라. 내가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에 있을지어다. 아멘.

1. 십자가의 규례는 핍박이 따라 옴

십자가의 규례를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16절).

본문 11절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15에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하였는데, 바울이 눈이 나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대필시키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가 쓴 증거로, 싸인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 11절 부터는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이 큰 글자로 자기가 쓴 것 같습니다. 자신이 직접 기록한 것을 보면 중대한 일을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즉 “중대한 글을 너희에게 보냈다, 요긴한 내용을 주의해서 보고, 말씀을 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자”는 할례당을 가리킵니다. 할례당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즉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할례당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억지로 할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억지로 할례를 받았는가 하면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규례는 핍박이 따라오게 됩니다. 즉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의 길만 걸어가려고 하면 핍박이 따라오는데, 그때에 진리를 양보하면 핍박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면하기 위해 진리를 양보하고 할례를 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 된 겁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양보하지 말고, 십자가를 각오하고,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 따라가야 됩니다. 진리를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혼합시키면 핍박은 안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도에서 떠나게 됩니다.

2. 육체로 자랑하지 말라

본문 13절에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들도 율법을 다 지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율법은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서 할례를 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율법을 다 지키는 게 아닙니다.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3.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라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음

본문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31에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자랑하라, 예수님 안에서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혜요, 의요, 거룩이요, 구속함이 됩니다. 십자가에만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으로, 죄인이 죄 사함 받을 길은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하여 못 박혀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천하 인간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히 9:22).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우리가 죄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보통사람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죄 밖에 대속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하면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 뿐입니다. 의인이라고 해도 한 사람 밖에는 살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 흘려주심으로, 모든 만대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한 분의 생명은 몇 백억만, 몇 천억만의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는데, 세상은 사도 바울을 못 쓰겠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내버렸고, 또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내버렸습니다. 즉 서로 마주 못 박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바울을 볼 때에는 아주 몹쓸 자요, 쓸 가치가 없는 자로 봅니다. 즉 바울이 십자가만 밤낮 전하고, 성경만 이야기하고, 성경대로만 나가는 외골수로 도무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세상을 볼 때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만 짓고, 복음을 반대하고 나가므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그러므로 서로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만 믿고, 십자가의 길만 걸어가고, 진리만 세워 나가면 세상이 볼 때에 도무지 못 쓸 사람으로 봅니다. 주일에 무슨 대사가 있을 경우에, 오라고 하면 안가기 때문에 안 믿는 친척이 볼 때에 못 쓸 자로 봅니다. 즉 “예수 믿다가 사람 다 버렸다”고 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내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세상을 볼 때에는 우상이나 섬기고, 방탕하고, 성경을 어기고 나가므로 서로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주 못 박는 겁니다. 세상 친구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성경대로 믿으면 못 쓸 사람이라고 하며 내버립니다. 세상 친구들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술 한잔 먹자고 하면 따라 가기를 가나?, 오락을 하러 가자고 하면 따라 오기를 하나? 아무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내버리는 겁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도 세상 친구를 볼 때에는 하나도 쓸게 없습니다. 술이나 마시며 방탕하므로 세상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 못 박는 겁니다. 즉 성도는 죄만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습니다. 또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볼 때에는 못 쓸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놓습니다. 서로 못 박는 겁니다.

4.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생명의 역사가 있음

본문 15절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할례 받았다고 해서 큰 게 아닙니다. 또 할례 안 받았다고 해서 큰 것도 아닙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고 하였는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하며, 새 생명의 역사가 있고, 산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6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다 효력이 없습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시는 게 아닙니다. 또 할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덜 봐주시는 게 아닙니다. 할례를 받으나 안 받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는 말씀을 따라 가야 함

다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했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고,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씀만 따라가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성경대로 믿는 겁니다. 또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은 영적인 신앙에 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사는 생활하는 것입니다. 즉 영의 생명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떠나지 말라고 하면 안 떠나고, 떠나라고 하면 떠나며,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가라고 할 때에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니느웨로 안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스로 가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서 다시스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지고, 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할 때에, 예루살렘을 안 떠나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예루살렘을 떠나서 기도하면 그것은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할 때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안 떠나면 핍박이 오고, 환난이 옵니다. 그래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갈릴리나 산골에 가서 기도한다고 해서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계시고 기도를 들으시지만, 하나님이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안 떠나야 됩니다. 떠나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에는 특별히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해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는 곳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가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또 아무리 생명이 위태한 곳일지라도 떠나지 말라고 하면 안 떠나야 합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하면 니느웨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서야 할 위치가 어디인가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바로 찾아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일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켜 나가려고 할 때에 환난과 핍박이 오는데, 그것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환란과 핍박을 달게 받으면 자기가 연단이 되고, 자기가 만들어지고, 구원을 이루어 나갑니다.

5. 십자가의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음

본문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란 십자가의 규례를 말합니다. 규례란 법칙, 법도를 말합니다. 즉 십자가의 도, 복음 진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양보하면 안 됩니다.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는 자기가 지어야 됩니다. 바른 복음만 생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양보하고, 타협을 하면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가감하면 그것은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자는 저주를 받음

갈라디아서 1:6-8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복음인데 조금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즉 열가지 가운데 아홉은 같고, 하나만 달라도 다른 복음입
니다. 그것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열가지가 다 같아야지, 한 가지만 달라도 안 됩니다.

만 원짜리에 세종대왕의 수염이 백 개가 넘는데, 그 중에 수염 한 개만 없어도 그것은 만 원짜리로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돈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감옥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와 같이 복음도 한 가지만 달라도 복음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 마귀가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어볼 때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변경시켜 대답하였습니다. 즉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를 “죽을까 하노라”로 변경
시켜 놓았으므로 마귀의 미혹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조금만 복음을 다르게 만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양보가 없고,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 그대로만 나가야지 조금만 고쳐 놓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복음의 진리인데, 조금이라도 변경시키지 말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가감시키면 더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는데, 십자가의 규례대로 나가는 자에게는 새생명의 역사가 있고, 평강과 긍휼이 있습니다.

6.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짐

본문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흔적이란 증표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따라감으로 몸에도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즉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매도 여러 번 맞고, 감옥에도 많이 갇히며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는데, 그 때에 어떠한 흔적이 남은 것 같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바울을 내다 버린 적도 있지 않습니까?그 때에 어떠한 흔적들이 많이 난 것 같습니다. 또 영적으로도 받은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자에게는 여러 흔적이 많이 생깁니다. 즉 받은 증거가 많습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많이 따라가다가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많이 받으면 육신에도 흔적이 생기고, 영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생기며, 영혼이 많이 자라납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가면,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가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주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해야 흔적이 생깁니다. 평안하게 믿는 사람은 흔적이 없습니다.
또 힘써 믿어야 흔적이 생깁니다. 일심정력을 다해서 충성해야만 받은 증거가 생깁니다. 그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7. 영적 생활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떠나지 않음

본문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생활 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규례를 따라가는 사람, 새생명의 역사가 있는 사람, 영적 평강과 긍휼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규례를 걸어가는 사람에게 심령의 평강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따라가고, 십자가만 지고 가야겠습니다. 즉 심령에 생명의 역사와 평강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항상 같이하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갈라디아서 6:1-10 심은대로 거둔다.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심은대로 거둔다
갈라디아서 6:1-10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찌니라

6:1 형제들아, 어떤 사람이 무슨 죄를 지은 일이 드러나면, 영적인 자들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이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신을 살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2 너희는 서로 짐을 져 주어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할 것이다. 

6:3 누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6:4 각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살펴라. 그리하면 오직 자기 안에서만 자랑할 것이 있고 다른 이에게는 없을 것이다. 

6:5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한다. 

6:6 말씀을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어야 한다. 

6:7 자신을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을 심던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멸망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거두게 될 것이다. 

6:10 그러므로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선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족에게 더욱 그렇게 하자.


1. 남을 도와 주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바로하고, 선을 심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타인이 내게 범죄 했을 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어라

본문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범죄 했을 때에, 다른 사람이 내게 악하게 나갈 때에, 다른 사람이 내게 손해를 줄 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때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또 그 사람과 관계를 아주 끊어 버려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 세우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 한 사람만 바로 세워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또 바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잘못 할 때에 그 사람을 대적하지 말고, 또 같이 욕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그 사람을 바로 세우려고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바로 세우시려고 힘쓰시는 분이신 줄 우리가 알고, 우리도 그 사람을 바로 세우려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바로 되면 좋은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안 되면 그 사람을 바로 세우려고 힘쓴 것이 다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앞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심령으로 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할 때에 온유한 심령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혈기로 같이 대적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에 굳게 서서 도와 주어라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시험에 들어 잘못된 길로 나가는 사람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을돌아보아 자기도 같은 시험을 받지 않도록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건지려다 자기가 물에 빠지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잘못하여 물에 빠져 떠내려가서 죽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건지려는 것은 좋지만, 자기가 물에 빠져 죽으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을 근신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남을 건지려다가 자기가 빠지면 그것은 건지려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항상 진리에 굳게 서서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려고 힘을 쓰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한도를 넘어서 자신의 입지를 잃어버리면 결국은 마귀에게 자기가 점령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잘 지켜야 합니다. 남을 사랑 할 때도 자신을 잘 지키면서 사랑해야 됩니다. 남을 건지려고 할
때에도 자기 자신이 항상 진리에 굳게 서서, 그 진리 위에서 다른 사람을 건지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진리를 양보하거나 한 발짝이라도 떠나면 자신은 망하고 맙니다.

짐을 서로 지라

본문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남을 도와주는데 서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 할 때에도 도와주어서 바로 세우려고 하고, 무슨 사건이 생길 때에도 짐을 자기가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조심할 것은, 너도 돌아보아서 시험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입지를 굳게 세우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리에 굳게 서서 다른 사람을 힘써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리를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그만 마귀에게 붙들리워서 아무 힘이 없고, 결국은 마귀에게 끌리워 가는 비참한 결과가 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책임을 서로 지라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려면 얼마든지 질 수가 있습니다. 또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면 얼마든지 전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책임을 서로 져야 합니다. 자기에게서 책임을 찾으면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고, “내가 잘못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 또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키시려고 이런 일을 당하게 했다”하며 책임을 하나님의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한 것을 보지 말고, 자기가 잘못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됩니다.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책임을 자기가 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건져내려고 하는 자리에 서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성취되어 나갑니다. 먼저 자기의 발이 진리의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건져내려고 항상 힘을 써야 하고, 책임을 항상 자기가 지려고 하여야 합니다.
항상 회개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성취됩니다.

2.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자임

본문 3절에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되지 못한 것을 붙들고 탄식하며 회개하여야 하고, 자기가 되지 못한 것을 늘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신자가 되고, 하나님이 같이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는 자입니다. 즉 “이만하면 내가 됐다, 괜찮다” 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아직도 되지 못했다, 부족하다, 내가 참아야 했는데 못 참았다, 내가 용납했어야 했는데 용납하지 못했다” 하며 언제나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고, 책임을 자기가 지며, 회개하면서 나가는 사람이 희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하여 혈기를 부렸다고 하면 나에게 혈기 부린 사람이 나쁘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이 왜 내게 대하여 혈기를 부렸을까? 생각해 보고, “내가 이러한 말을 했더니 그것에 격동되어 혈기를 부린 모양이다, 이 다음에는 그런 말을 안 해야겠다”고 하며 나가는 것이 자기 짐을 자기가 지는 것이고,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 상대방이 악하게 나와도 “저 사람이 왜 악하게 나오는가? 내가 잘 해주지 못하여서 악하게 나오는가보다”하며 잘해주려는 생각을 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악하게 나온다고 틀렸다고만 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고 하다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다가 핍박이 들어오면 “하나님이 내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신다.” 생각하며 잘 참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리어 유익하게 해 주십니다.

3. 자기의 일을 살피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음

본문 4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잘 살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5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11:30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만 자랑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일을 잘 살피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않습니다. 즉 자기의 일을 잘 살피는 성도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또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잘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자기 혼자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의 일을 잘 살피면 자랑할 것은 자기의 약한 것만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를 잘 살피면 자기가 잘못한 것을 발견 할 수 있고, 자기의 약한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의 되지 못한 것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즉 자기를 잘 살펴보면, 누구나 자기가 믿음으로 하지 못한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살펴보지 아니하고 남만 보면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 다른 사람이 악하다,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언제나 자기를 살피라는 것입
니다. 자기를 살피면 근본 원인은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내가 약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하며 자기가 잘못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약하고 미련해서 마귀에게 속은 것, 자기가 믿음으로 하지 못한 것 등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발견하면 이제는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에 바로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 합니다. 자기를 만들지 못하면 남을 아무리 도와 주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구원해도 자기는 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는 전파되지만 자기는 버림을 당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진리에 굳게 서서 진리를 양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자기를 잘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즉 자기의 부족한 것을 찾아서 고치고, 자기의 약한 것을 찾아서 고치고, 믿는 일을 하려고 힘을 쓰며, 영이 사는 길로 가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4.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

본문 5절에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지우지 말고 자기가 지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할 일은 자기가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일을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자기의 짐을 자기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짐을 잘 지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짐을 안지고 나가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 짐만 잘 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할 책임, 자기가 할 도리,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자
기가 잘 감당해 나가야겠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안하고 남에게 맡기는 것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언제나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해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할 일을 해도 충성되이 하여야 하고, 부지런히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책임을 다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책임을 안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내 책임이 무엇인가? 내가 짐 지고 나가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자기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자기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하고, 직장에 나가서도 자기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하고, 교회에서도 자기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권찰은 권찰의 책임이 있고, 주일학교 반장은 주일학교 반장의 책임이 있습니다. 또 집사는 집사가 져야 할 책임이 있고, 장로는 장로가 져야 할 책임이 있고, 목사는 목사가 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짐을 안지면 하나님 앞에 가서 책망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다 맡겼는데, 자기 짐을 잘 지고 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달란트 장사를 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책임을 잘 하려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힘을 써야 됩니다. “어떻게 하여야 내 책임을 다 하겠는가? 주가 맡긴 짐을 내가 어떻게 잘 감당해서 잘 지고 나가야겠는가?” 하면서, 자기가 져야 할 짐, 즉 자기가 감당할 사명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짐을 안지는 것은 하나님께 죄입니다. 일단 맡은 자는 자기가 질 짐이 다 있는데, 그것을 잘 지고 나가야 하나님께 합당 합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또 세상 일도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남한테 도와 달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자기 짐을 자기가 지지 않고 먹는 것입니다. 일하고 먹어야 자기 짐을 자기가 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자기 짐을 잘 지고 나가는 사람이 필요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이 자라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5. 심은 대로 거둠

가르치는 자를 공궤하라

본문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물질 면으로 교육자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 있으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물질 면에 있어서 좋은 것을 함께하는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즉 물질로서 보답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공궤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또 공궤를 해야만 자기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심

본문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것을 거두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아니하는 자는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만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둠

본문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심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심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가?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심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서 심으면 무엇을 거둡니까?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무엇을 거둡니까? 영생을 거둡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육신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육신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을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생각도 육신을 위해서 생각을 하고, 또 걸어가는 것도 육신을 위해서 걸어가고, 일하는 것도 육신을 위해서 일하고, 계획하는 것도 육신을 위해서 계획하고, 사는 것도 육신을 위해서 삽니다. 그것은 전부 썩어질 것을 거두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걸어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서 말씀대로 걸어가고, 하나님의 명령만 따라가는 사람이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입니다.

사도행전 4:19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해야겠습니까? 사람을 순종해야겠습니까? 어디에 순종을 해야겠습니까? 사도행전 5:29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으로 삼고, 신앙양심을 써서 말씀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성령을 위해 심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생을 거둡니다. 반드시 영이 살고 하나님이 같이 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대로 나가고, 또 사람의 뜻을 따라 나가고, 사람의 계획대로 하면 썩어질 것밖에 거둘 것이 없고,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계획, 인간의 뜻,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등은 하나님이 안 도와 주시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썩어질 것만 거둡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만 따라가야겠습니다. 말씀이 무엇인가?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만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며 성경만 따라가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하겠는가?” 하고 그것만 따라 가야 합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서 말씀만 따라 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서 말씀만 따라 갔고, 하나님만 따라갔습니다. 또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에 독자도 하나님께 바치고 말씀만 따라갔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만 따라 가야 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라가야 합니다. 항상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되고, 육신을 위해서는 심지 말아야 됩니다.

세상 따라 가는 것, 세상 계획, 세상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등이 다 육신을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까? 잘 입을까?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출세할까? 하는 것 등이 다 육신을 위해서 심는 자이고, 육신을 따라 가는 자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위해서 심으라고 하였는데, 성령을 위해서 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천하를 다준다고 해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사자굴에도 가고, 풀무불에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 희생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 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6.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거둠

본문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위해서 심으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을 위해 심는 자는 때가 이르면 반드시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안 됩니다. 내가 선을 행하는데 왜 이렇게 잘 안 될까?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환난이 많을까?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왜 사자굴이 왔을까? 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연단 시켜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말씀대로 끝까지 계속 나가야 합니다. 안 되어도 말씀 양보하지 말고 계속 나가야 합니다. 안 된다고 양보 하면 안됩니다. 안 된다고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안 되어도 낙심하지 말고 말씀대로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나가고 또 나가면 마침내 거둘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거두게 해 주십니다.

농촌에서 비가 안 오는 해는 마른 모내기를 합니다. 비가 안와서 저수지에 물이 다 마르고 모내기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모를 심을 시기가 지나가면 모를 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마른 논에 말뚝으로 구멍을 내고 모를 열서너 개 넣고 구멍에 흙을 메웁니다. 그렇게 마른 모를 합니다. 그러나 며칠 있으면 비가 오지 않으므로 모가 다 마릅니다. 모가 다 말라서 검부레기가 되어 쓰러집니다. 새파란 모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말라서 누렇게 되어 이제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계속 마른 모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장마가 옵니다. 장마가 오면 마른 것은 다 쓰러졌지만 그 뿌리는 아직 안 죽었으므로 속에서 새싹이 나와서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고통을 당하고, 실패 한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성경대로 될 것을 믿고, 계속 하나님 말씀대로만 나가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권고 하시는 날이 옵니다. 거둘 날이 옵니다. 끝까지 참으면 됩니다. 욥이 얼마나 잘 참았습니까? 욥이 끝까지 참으므로 갑절의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지켜 나가다가 핍박이 오고, 환난 고통이 오고, 다 실패 한 것과 같이 되어도 말씀대로 나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거두게 해 주실 날이 옵니다. 욥과 같이 재산이 다 없어지고, 자녀가 죽는 여러 가지 곤궁(困窮)이 올지라도 “내가 지금까지 말씀대로 나갔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말씀대로 나갈 것이다, 죽어도 그대로 나간다.” 하며 끝까지 나가면,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거두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고, 피곤해서 쓰러지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걸어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권고가 옵니다.

7.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하라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착한 일을 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해야겠습니다. 즉 믿음으로 나가는 성도의 가정을 먼저 도와주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 짐을 자기가 지라고 하였으니까 도움을 안 받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 하다가 안 되면, 다른 사람이 도와 줄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줄로 알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자기는 노력 하지 않고 도움만 받으려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성도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 짐을 잘 지고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노인들, 노약자들, 어린이들, 고아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수해 당한 사람들을 각 교회서 연보해서 도와주지 않습니까? 도와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선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6-26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16-26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5:16 내가 또 말하는데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라.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이다. 

5:17 육체가 원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른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한다. 

5: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에 의해 인도를 받으면,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5:19 육체의 일들은 명백하니,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종과, 

5: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당 짓는 것과 불화와 이단과, 

5:21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이와 같은 것들이다. 전에 너희에게 경고한 것같이 지금도 경고하는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이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할 법이 없다. 

5: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면, 또한 성령을 따라 행하고, 

5:26 헛된 영광을 추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질투하지 않도록 하자


1. 성령을 좇아 행하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함

본문 16-17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했는데, 육체의 소욕은 뭘 거스릅니까? 성령을 거스릅니다. 또 성령의 소욕은 뭘 거스릅니까? 육체를 거스릅니다. 둘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니까 서로 대적하니까 밤낮 싸움만 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육체의 소욕하고 성령의 소욕하고 싸움만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싸움만 하는 것입니다. 속에 옛사람이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중생한 영이 있고 또한 부패성이 있는데 밤낮 싸우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대로 나가려니까 성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소욕대로 살려니까 육체가 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김

그렇게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하는 방법이 없습니까? 하는 방법,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속에서 지금 서로 싸움만 하는데, 육체대로 살려니까 성령이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려니까 육체가 거스르면서 서로 싸움만 합니다. 괴롭기만 합니다. 그럼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좋은 방법은 여기 16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이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은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려고 하지 말고, 제가 하려고 뭐 육의 사람 영의 사람 싸우고, 이렇게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란 말입니다. “주여! 성령이여!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소욕은 점점 없어집니다. 맥을 못 춥니다.

이기는 법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결심해서 이기는게 아닙니다. 성령을 좇아 성령께서 말씀으로 인도하는데, 그 말씀을 순종하면, 성령을 순종하면 육체의 욕심은 점점 잊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도록 성령을 계속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은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패잔병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아니하고 육신을 좇아 행하니까 속에서 밤낮 싸움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니까 이건 안 된다고 하고, 저렇게 하려니까 평안치 않습니다. 또 육신대로 좀 나가려니까 성령이 또 허락지 않습니다. 성령을 좇아가려니까 또 육신이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거 비위 맞추려면 저게 죽는다고 하고 저거 비위 맞추려면 이게 죽는다고 하고, 이건 아내 둘 데리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본처 비위 맞추려면 첩이 죽는다고 하고, 첩의 비위 맞추려면 본처가 죽는다고 합니다.

아내 둘 데리고 사는 사람들 수고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거 죽을 지경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은 혈압 올라서 죽었습니다. 젊었는데 아내 둘 데리고 살다가, 이쪽 맞추려면 저게 안 되고, 저쪽 맞추려고 하면 이것도 안 되니까 얼마나 혈압이 올랐겠습니까? 혈압 올라서 죽었습니다. 50세 조금 넘었는데 그만 죽었습니다. 그거 아주 수고들 많이 합니다. 하나만 데리고 살면 좋을 텐데, 왜 둘 데리고 살면서 죽을 지경에 빠지냐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서로 긁어대는데 이 집에 가면 얼마나 괴롭고, 저 집에 가면 얼마나 괴롭겠느냐 말입니다. 또한 기도하려면 양심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예 죽는게 낫다고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릅니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게 아무리해도 둘 다 원하는 것이 안 됩니다. “에이, 그럼 다 집어치워라”하고는 뭘 따라가면 됩니까? 성령의 소욕만 따라가면 됩니다. “주여! 성령이여!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하겠습니다.”하면서 계속 성령님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인도를 받으려고 하고 한참 따라가다 보니까 육신의 소욕은 점점 쇠잔해졌습니다. 아무 힘이 없어졌습니다. 한참 따라가니까 육신의 소욕은 납작해 졌습니다.

육신의 소욕은 그렇게 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는 법이 그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면 이길 것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가 하려고 하면 밤낮 싸움만 하고 일이 안 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서 다 이기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

2. 열 다섯 가지 육체의 소욕
성적인 소욕

본문 19-21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육체의 소욕 몇 가지입니까? 15가지입니다.
육체의 소욕 첫째가 무엇입니까? 음행이란 말입니다. 음행이고, 둘째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것, 이것도 다 음행에 속한 것입니다. 음란 방탕, 음담패설 이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가 무엇입니까? 호색, 이것도 다 음행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성적인, 남녀간 성적인 관계에 대한 죄들입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

그 다음에 넷째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입니다. 다섯째는 술수이고, 여섯째는 원수 맺는 것입니다. 원수 맺는 것이 육체의 소욕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원수 맺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싸우고 원수 맺었다 하더라도 술 한 잔 먹으면 다 풀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도 안 먹으니까 눈이 말똥말똥 해가지고 이건 한 번 원수 맺으면 풀어지지 않는다
고 합니다. 몇 년 가도 안 풀어진다고 합니다. 이건 안 믿는 사람보다도 못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술 한 잔 먹으면 다 풀어지는데, 이건 뭐 술을 안 먹으니까 안 풀어진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사돈끼리 원수가 되었는데, 한국에서 원수가 되고나서 사돈 하나가 이민을 갔습니다. 아마 남자 쪽 가정이 간 것 같습니다. 이민 가서 여러 해 동안 캐나다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해 후에 다른 사돈 하나도 거기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자기 부모 초청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만에 사돈끼리 만나게 된 것인데, 아마 한 10년도 넘었을지 모릅니다. 몇 년 만인지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사돈이 오는데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런데 자기 아들이 다니는 교회 나오다가 사돈이 온다니까 그 길로 다른 교회로 갔습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사돈 보기 싫어서 그런다고 합니다. 이제 사돈이 왔으니까 그 교회 가면 사돈을 만나겠기에 아예 딴 교회 간 것입니다. 물론 공항에도 안 나가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모습입니다. 그 사돈 둘 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악합니다. 10년을 가도 원수진 것이 안 풀어지고 계속 원수 맺고 나가는 것입니다. 딴 교회 가서 안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 죽도록 까지 안 만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둘 다 불쌍합니다.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목하려면 한 사람이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나중 온 사람이 먼저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먼저 피했으니까 찾아갈 리가 없고, 나중 온 사돈이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찾아가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보기 싫어서 딴 교회 갔는데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아마 피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밤낮 집 안에서만 있겠습니까? 아예 문밖에 나오는 시간에 가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올 때 인사하고 반갑게 하는 것입니다. 인사 안 받아도 또 그렇게 하
는 것입니다. 여러 번 그렇게 하고, 맛있는 거 하면 갖다 주고 하면 화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편이 다 풀고 자꾸 사랑하고 화목하려고 하는데 반대편도 다 녹아지지 안 녹아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화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화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원수가 되어 화목 안 해도, 자기가 자꾸 계속 먼저 화목하려고 힘을 쓰고 좇아가고 또 인사하고, 어떻게 하든지 사과할 건 사과하고 화목하자고 애를 쓰면 화목이 되는 것입니다. 화목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화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목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자기도 살고, 하나님과 통하고 사람과 통합니다. 사람과 통해야 하나님과 통합니다. 사람과 막히면 하나님과 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된 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풀어야 믿음 지키는 것입니다. 안 풀면 믿음 못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사돈처럼 원수 맺은 사람 보기 싫어서 다른 교회 가고 말면 평생 믿음 못 지킵니다. 그 교회에 있으면서 원수와 어떡하든지 화목해야 합니다. 그렇게 원수 맺는 것과 그 다음에는 분쟁, 당파를 먹어가지고 분쟁하는 소욕이 있습니다.

시기와 분을 품고 가는 일

그 다음에 여덟째는 시기입니다. 사촌이 전답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배 아파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그 다음에 분 내는 것입니다. 그저 분이 나서 눈이 시뻘개져서 분 잘내는 사람이 있는데, 분 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분 낼 일이 생겨도 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꼴을 보고 참았는데, “나도 참자. 참는 것을 배우는 자다. 나는 이럴 때 참아야 된다”하면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도 용서해야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자기도 그것을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을 다 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분을 풀어야 합니다.

분한 일이 생겨도 분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손해가 나고 뺨을 맞았어도, 그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잘 참고,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렇게 나가야 자기 믿음 지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 딱 기억하고 그것을 원수로 갚으려고 하면 믿음에서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 못 지킵니다. 자기부터 벌써 하나님께 막힌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 분 품지 마십시오. 분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귀 상통이 어떻게 생겼다고 합니까? 마귀 얼굴 봤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분 냈을 때 거울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 상통이 거기 있다고 합니다. 분났을 때 거울을 보면 마귀가 그렇게 생긴 줄 알라는 것입니다. 눈이 시뻘개가지고, 마귀가 그 다음에는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 하고, 마귀 구경 못했으면 분났을 때 가서 거울 보라는 것입니다.

당 짓고 싸우는 것

그 다음에 당 짓는 것입니다. 당파 짓고 무슨 당파다 하고, 자기 지방 사람들끼리 당파 짓고, 젊은 사람들끼리 당파 짓습니다. 노장파, 소장파 구한국시대에 사색당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무슨 말입니까? 노론, 소론, 남인, 북인으로 남인당파, 북인당파, 노론당파, 소론당파 사색당쟁 하다가 한국이 망했습니다. 그 사이에 일본은 자꾸 발전 했습니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서 자꾸 발전하는데, 우리는 싸움만 하다가 일본이 침략하니까 꼼짝 못하고 일본한테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파싸움이나 하다가 자기나라 건설하지 못하는 나라는 다 망합니다. 우리나라는 당파싸움하다가 망할까봐 지금도 좀 염려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힘을 합해서 나라가 잘 되도록 해야 되는데, 오히려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 죽이고 자기 권세 잡으려 하고, 상대방은 안 죽으려고 상대방 죽이려고 하니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당파 싸움하면 안 됩니다. 당파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단에서도 당파 지으면 안 됩니다. 당파 짓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열한 번째는 분리함, 열두 번째가 이단입니다. 열 셋째는 투기, 열넷째는 술 취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는 것 이것이 육신의 소욕입니다. 열 다섯째는 방탕입니다. 방탕하고 나가는 것, 방탕 하는 것이 육신의 소욕입니다.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못 받는 죄들입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지 아니하면, 이런 죄를 짓는 사람들은 벌써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을 만났습니다. 흑암을 만났습니다. 이대로 하늘나라 가면 상급 없습니다. 구원 이루어 나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죽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따라가는 것이 죽이는 방법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자꾸 나오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수와 당 짓는 것과 분 내는 것이 나오면, “아! 이건 안 되겠다. 내가 이것을 죽여야 되겠다”고 하지 말고, “주여!” 하고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 이러한 육체의 소욕을 다 죽일 수 있습니다. 항상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만 육신의 소욕 15가지, 이것들을 다 죽일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열매
9가지 성령의 열매

본문 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몇 가지입니까? 9가지입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둘째는 희락, 셋째는 화평, 넷째는 오래 참음, 다섯째는 자비, 여섯째는 양선, 일곱째는 충성, 여덟째는 온유, 아홉째는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첫째가 사랑입니다. 사랑. 그러니까 성령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성령의 세계, 생명의 세계, 빛의 세계, 믿음의 세계가 전부 하나인데, 첫째가 사랑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또 희락이 속에 있습니다. 또한 화평하려 듭니다. 영적 화평,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려고 합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오래 참습니다. 조금 참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니고 오래 참아서 하나님께서 잘되게 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기다립니다.
그 다음에 자비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선한 일을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충성됩니다. 그리고 온유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온유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절제, 모든 것을 절제해서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입니다. 시간도 절제하고, 그것을 떼어서 하나님께 바로 쓰라는 것입니다. 물질도 절제해서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은 바치고 하나님 일에 쓸 것은 쓰라는 것입니다. 자기 정욕도 절제하고 마음도 절제하고 모든 형편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해야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지, 절제 못하는 사람은 믿는 일도 못하고 하나님 일도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 9가지 한번 해 보십시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이다.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이다. 충성, 온유, 절제다”,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을 금지할 법은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이것은 다 좋아합니다. 사랑하는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하는데 어느 나라에서 이것을 싫어하겠습니까? 어느 나라에서 이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또 오래참고 자비하고 양선과 충성하는데 그 누가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어디 가든지 온유와 절제하는데 누가 그 사람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다 좋아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히면 어디가나 좋아하고, 어디가나 환영하고, 그것을 막는 법이 없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본문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그 ‘정과 욕심’도 죽었습니다. 육체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나를 위해서 지셨으니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정과 욕심과 육체를 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은 자요, 산 것은 내 안에서 예수가 산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삽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본문 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는데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체에 소욕을 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해 주십시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16-26 성령을 좇아 행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성령을 좇아 행하라
갈라디아서 5:16-26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5:16 내가 또 말하는데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라. 그러면 결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이다. 

5:17 육체가 원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른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한다. 

5: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에 의해 인도를 받으면,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5:19 육체의 일들은 명백하니,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종과, 

5: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당 짓는 것과 불화와 이단과, 

5:21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이와 같은 것들이다. 전에 너희에게 경고한 것같이 지금도 경고하는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이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할 법이 없다. 

5: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면, 또한 성령을 따라 행하고, 

5:26 헛된 영광을 추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질투하지 않도록 하자.


1. 성령을 좇아 행하라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음

본문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령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1) 단회적으로 받았음 예수 믿을 때에 오순절 보혜사 성령을 단회적으로 받았습니다. 즉 한번에 받았습니다. 성령은 반복적으로 받는게 아닙니다. 성령은 받고 또 받는 게 아니고 단번에 단회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을 “또 받아야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2)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증거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기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사람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언제 받았
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성령이 와 계시고, 성령이 떠나지 않으십니다.

3) 성령은 떠나지 않으심 한 번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내내 내주해 계시며 감동을 시키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서 잠시라도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성령이 우주에 충만하고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했는데, 성령이 떠난다고 하면 성령이 안 계신 곳이 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4) 우리가 받은 성령은 보혜사 성령임 우리가 받은 성령은 오순절 성령으로 강력한 보혜사 성령입니다. 보혜사는 대언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주는 성령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6:13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보혜사 성령으로 세상 끝날까지 내내 성도의 속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성령은 신약시대의 성령보다 약한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성령이 역사하셨는데 그것은 오순절 보혜사 성령보다 약합니다. 제일 강한 성령이 오순절에 임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성령과 예수님 당시 때의 성령과 오순절에 임한 보혜사 성령이 왜 다릅니까?

5) 오순절 성령은 완성된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심 성령은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에 진리가 약하면 성령의 역사도 약합니다. 진리가 강하면 성령의 역사도 강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진리가 약하므로 그 시대에 성령의 역사도 약했습니다. 즉 구약시대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등을 증거했지만 그것이 의문과 제도 속에 쌓여서 희미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진리가 약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도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후에는 예수님께서 진리를 많이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그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했습니다. 또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오신, 오순절 성령은 예수님이 승천하기전의 성령보다 강한 성령입니다. 더 강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십자가에 대한 진리, 부활에 대한 진리, 승천에 대한 진리가 다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만큼 진리가 약하기 때문에 성령이 약하게 역사했고, 오순절 성령은 십자가의 구속이 다 완성된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만큼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즉 십자가, 부활, 승천의 진리를 다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강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 일류 비행사가 옛날 비행기를 가지고 조종하면 빨리 못갑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빨리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신형 비행기를 조정하면 그 만큼 빠릅니다. 비행사는 같은 비행사인데 비행기가 구식이냐 신식이냐에 따라 가는 속도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진리가 좋아야 성령도 그 능력을 다 발휘합니다. 진리가 좋다는 것은 진리가 다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다 나타나려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다 나타나야 됩니다. 그 전에는 십자가, 부활, 승천의 진리가 다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지고 역사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제일 강한 성령입니다. 그 제일 강한 보혜사 성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예수 믿을 때에 받았습니다. 단번에 받았습니다. 즉 일회적으로, 단회적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더 받을 게 남아 있습니까? 더 받을 게 없습니다.

6) 성령은 인격자이심 성령은 인격자이십니다. 인격자가 왔는데 뭘 “더 오십시오” 합니까? 아버지가 오셨는데 “아버지 더 오십시요”하면 아버지가 “얘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내가 여기 왔는데 뭘 더 오라고 하느냐”할 것 아닙니까? 성령이 한 번 오시면 된 것이지, 더 오시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방법

1) 죄를 회개 하여야 함 

그러면 왜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약한가? 같은 성령을 단번에 다 받았는데 성령의 역사가 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그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성령이므로 죄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나가면 강한 성령이 오시긴 오셨으나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2) 자기가 죽어져야 함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자기가 죽어야 됩니다. 자기가 살았는데 어떻게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죽어야 됩니다. 자기 고집, 자기 주장, 자기 뜻, 자기 욕심 등을 회개하고 자기가 죽은 만큼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하면 마귀가 옵니다. 죄가 가득한데 어떻게 성령이 오시겠습니까?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시러 오시겠습니까? 사람의 욕심을 채워 주는 것은 마귀 밖에 없으므로 마귀가 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려고 하다가 마귀 받는 게 다 그래서 받는 겁니다.

본문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육체도 못 박고 정과 욕심도 못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어져야 합니다. 산 것은 못씁니다. 제단에 산 짐승 갖다 놓을 수 없습니다. 소나 양을 잡아서 각을 떠서 제단에 놓는 것이지, 살아있는 소나 양을 제단에 갖다 올려 놓고 제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어져야 됩니다.

자기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나는 죽은 자다, 나는 산 자가 아니다” 하여야 합니다. 자기는 죽은 사람으로 전적 무능하고 전적 무익한 자로,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여야 합니다. ‘자기’라는 것이 있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나를 없애야 됩니다. 처음에 “나, 나” 하다가 그 다음에는 “나, 예수”로 “나” 다음에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나”입니다. 예수를 앞세우고 다음에 “나”인데, 이것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예수”로 무엇만 남아야 합니까? 예수만 남아야 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예수님만 남아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3) 순종하여야 함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순종하여야 됩니다. 성령이 오른쪽으로 가자고 하는데 나는 왼쪽으로 가니까 성령하고 반대 아닙니까? 성령과 반대인데 어떻게 성령의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를 사모해야 됩니다. 즉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자기는 죽어져야 하며, 말씀을 순종해야 됩니다.

4) 사모하여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함 

또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합니다.

5) 힘을 써야 함 

또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고 힘을 써야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성령의 힘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2.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림

성령의 힘과 중생한 영과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롬 5:5) 합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하였는데, 법은 권세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권세와 성령의 권세가 너를 인도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욕심대로 나가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성령의 소욕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7-18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대로 하려고 하고, 성령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을 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육체의 소욕도 절반, 성령의 소욕도 절반인 상태입니다. “동”으로 가자는 것이 절반, “서”로 가자는 것이 절반인데, 절반씩 하면 일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성령은 “서”로 가자고 하고, 육체의 소욕은 “동”으로 가자고 서로 그러는데 어떻게 갑니까? 가지 못합니다. 진보가 없습니다. 즉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예수를 여러 해 믿는다고 해도 내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개꼬리 삼년 묵어야 황모 못 된다”고 하였는데, 원래 개꼬리대로 돌아갑니다. 여기에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개꼬리 신자가 많습니다. 왜 개꼬리 신자가 있습니까? 육체의 소욕 절반, 성령의 소욕 절반인 상태로 신앙생활 하므로 개꼬리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죽여야 됩니다.

육체의 부패성은 마음에 있음

육체의 소욕은 육체의 욕심이라고도 하고, 죄성이라고도 합니다. 즉 육체의 부패성입니다. 육체의 부패성이 우리의 영혼에 있는 게 아니라 육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부패성은 영의 것이 아니고 육체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패성, 즉 육체의 소욕은 육체에 있습니다. 육체에 있다는 것은 살과 피와 뼈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살이 많은 사람은 죄가 더 많고, 빼빼 마른 사람은 죄가 더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육체의 부패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마음에 부패성이 있다고 하지 않고 육체의 소욕, 육체의 부패성, 육체의 일, 육체의 정욕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마음과 육체가 합하여 죄를 짓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와서 마음을 충동하면 마귀의 충동을 받은 마음이 육체를 지배하여 죄를 짓게 합니다. 또 한 쪽은 성령의 소욕이 마음을 주장하여 마음을 거룩하게 만들고, 육체를 거룩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이것이 옛사람과 새사람의 싸움입니다. 옛사람은 부패한 마음과 육체, 또 마귀가 합하여 옛사람의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성령의 역사와 중생한 영이 합하여 새사람의 행동이 되는 것으로, 중생한 영은 마음과 몸을 이용하여 거룩한 마음, 거룩한 몸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을 누가 인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깨끗한 마음, 거룩한 마음이
되고, 몸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인도를 받으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악한 마음이 됩니다.

마음은 육체에 속함

그러면 마음은 영에 속한 것인가? 육에 속한 것인가? 마음이 어디에 속했습니까? 마음은 육체에 속했습니다. 중생한 영에 속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부패성을 가리켜서 “육체의 정욕, 육체의 소욕”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전적 부패하였으므로 마음이 영에 속했다고 하면 중생한 자들이 전적부패한 자들이 됩니다. 마음만 부패한 것이지 중생한 자의 영혼은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3. 육체의 소욕을 좇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

본문 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15가지로 첫째, 둘째, 셋째가 성적 범죄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다 성적 범죄로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성 범죄가 제일 강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우상 숭배와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내는 것,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하는 것, 방탕 등이 육체의 부패성에 속한 겁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술 취하는 것도 부패성에 속한 겁니다. 그러므로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하늘나라의 영광과 존귀와 상급을 받지 못함

본문 21절에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15가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예수믿는 사람이 이런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는가? 지옥은 안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당을 다 받아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지옥에 갈래도 못갑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천당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존귀와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2:7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육신의 소욕을 좇는 자는 영이 사는 일, 영이 자라나는 일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자리, 하나님 나라의 존귀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해 받는 구원을 얻음

고린도전서 3:15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는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불 가운데서 나온 것처럼 해 받는 구원 밖에는 받지 못합니다. 영광의 자리에 못 들어갑니다. 면류관 받는 자리에 못들어갑니다. 존귀한 자리에 못 들어갑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 많이 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은 얼마나 존귀한 자리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만 짓다가 죽을 때 회개하고 죽은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런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로 지옥 고통을 당함

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다른 뜻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징계로 지옥 고통을 당하다가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잘 지키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고, 세상에 있는 동안 천국입니다. 항상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해서 근심, 걱정, 환난, 고통, 괴로운 자리에 빠집니다.

4. 성령의 열매

본문 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항상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있습니까? 사랑이 넘쳐흐르고, 희락이 넘쳐흐르고, 화평이 넘쳐흐릅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데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희락은 무슨 희락입니까? 근심, 고통만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이 옵니다. 제 힘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이 와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이 주신 기쁨으로 도를 받아서 즐거워했다고 했는데, 성령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항상 즐거워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즐거워했습니다. 성령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 받는 사람은, 모든 어려움을 다 이기고,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할수 있고, 또 화평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합니다. 원수도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원수를 다 이기고 나갑니다. 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참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참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참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비, 사랑,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다 할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있고, 온유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 24-26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정과 욕심까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다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다 죽어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왜 격동이 됩니까? 자기가 살았으므로 격동이 나오는 겁니다. 왜 분한 마음이 나옵니까? 자기가 살았으므로 분한 마음이 나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분한 마음이 나옵니까? 자기 육체도 십자가에 못 박고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다 죽어졌습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또 시기하는 것 없습니다. 다 죽어졌습니다. 격동하는 것, 분내는 것, 투기하는 것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무슨 투기를 하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죽은 사람의 위치에서, 자기는 죽은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즉 자기를 죽이고 예수님만 살아야 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나가면 항상 성령의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7-15 교회를 훼방치 말고 사랑으로 용납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교회를 훼방치 말고 사랑으로 용납하라
갈라디아서 5:7-15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였느냐? 

5:8 그 설득은 너희를 부르신 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5:9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다.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확신한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고 있겠느냐? 그렇게 했더라면, 십자가의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어 졌을 것이다.

5:12 너희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잘라 버렸으면 좋겠다.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다만 그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여라. 

5:14 이는 온 율법이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하나의 말씀안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5:15 그러나 너희가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면, 피차 멸망할지 모르니 조심하여라. 


1. 누룩을 제거하라
꾀어 훼방케 하여 성도의 달음박질을 막는 자

본문 7-9절에,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달음박질을 잘해야 되겠는데 요새는 그만 달음박질을 잘 못합니다. 달음박질을 잘 안 합니다. 다들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비방하고 훼방하고 악평하니까 달음박질하다가 그만 중단을 했습니다. “내가 괜히 그러면 안 되겠다. 내가 정신을 좀 차려야 되겠다. 내 볼 장도 좀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달음박질을 잘하던 사람을 자꾸 충동시키고 훼방하고, “너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달음박질 할 필요가 뭐 있냐? 전적으로 그렇게 다 바칠 필요가 뭐 있냐? 목사만 따라 갈 게 뭐 있냐? 예수 믿어도 자기 볼 장을 좀 봐야지 그렇게 하면 너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 목사도 사람이다. 요새 목사들 봐라. 얼마나 사기꾼 많나? 너희 목사도 사기꾼인지 너 어떻게 아느냐?”고 유혹하여 괜히 달음박질 잘하던 걸 훼방합니다.

“이병규 목사 두고 봐라. 이제 어떻게 해 먹을지 모른다”고 어떤 사람이 와서 나보고 그럽니다. 목사님 이름으로 다 해놨다고 이제 앞으로 목사님 죽으면 자손들에게 다 돌아간다고 그러는데, 제가 다 해놨습니까? “뭘 해 놓았습니까?”물으니까 의정부 땅, 천안 기도원 땅, 광주 기도원 땅, 창광교회 예배당 다 목사님 이름으로 해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 들어와서 훼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목사도 제 이름으로 다 해놓고 욕심 채운다고 그러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내 이름으로 해 놓은 거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창광교회도 제 이름으로 한 것 하나도 없고, 또 광주 기도원 땅을 제 이름으로 하겠다고 하면 하는 것인데 장로들이 하자는 걸 제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 했습니다. 제 이름 안 들어갔습니다. 의정부도 제 이름 하나도 안 들어갔습니다. 또한 천안 땅도 제 이름 들어간 것 없습니다. 천안은 창광교회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대표자는 제 이름으로 되었는지 그건 모릅니다. 그랬더니 저는 대표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표가 제 이름으로 되었어도 그건 나하고 상관없습니다. 교회로 등기가 되어있으면 대표는 그건 뭐 제직회 한번만 하면 바뀝니다. 그건 아무 실권이 없습니다. 내 이름으로 대표가 되었는지, 안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창광교회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도 제 이름으로 해 놓은 것이 없는데 뭘 해먹는다고 합니까? 그런 소리를 누가 했는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고 가서 전해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훼방하여 사실과 달리 뒤에서 자꾸 속여 댑니다. 속여서 이 목사님이 다 해먹는다며 훼방하며 나갑니다. 해 먹은 거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해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줄만 아십시오. 제가 뭐 해먹어서 뭐하겠습니까? 이제 좀 있으면 천당 갈 텐데, 해먹고 가면 하나님 앞에 가서 책임져야 하고 책망 받을 일인데 그런 일을 왜 하겠습니까?

사실 해먹으려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십일조 갖다가 십일조 좀 내달라고 하면서 제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제가 먹어도 뭐 교회에 알리지 않으면 알게 무엇입니까? 그래도 하나도 떼어 먹지 않고 다 교회 갖다가 내는 것입니다. 이다음에 심판대 앞에 갈 생각을 해야지 그거 조금 먹어가지고 뭐하겠습니까? 천지만물이 다 우리 아버지 것인데, 깨끗한 것들, 좋은 것들을 먹어야지, 뭐가 없어서 그 시시한 것들 그 시커먼 것들을 먹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도 “달음박질 잘 하더니 왜 누가 너희를 꾀어가지고, 훼방을 하고 속여가지고, 참소를 해가지고 너희를 달음박질 못하게 했느냐? 왜 너희가 정신없이 거기 넘어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그것은 누룩적인 요소인데, 다른 사람을 속이고 훼방하고 달음박질 못하게 하는 것은 다 누룩입니다. 율법주의도 누룩이고, 이런 것은 다 누룩입니다. 그 누룩은 바리새인의 의식주의, 인본주의가 다 누룩입니다.

교회를 요동시키고 손해 주는 자는 심판받음

그것이 너희 온 덩이에 퍼지는데, “그것을 왜 용납을 하느냐?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하였는데, 요동케 하는 것은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는데, 교회를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 받고, 교회에 손해 주는 자는 심판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심판 받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체이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주셔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인데, 여기에 손해를 주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손해를 주는 사람은 아주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심판받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교회에 손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손해 주는 자는 저주받습니다. 노아의 작은 아들 ‘함’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누워있는 것을 폭로시켰다가 저주받지 않았습니까? 그럼 왜 저주받았는가? 그 당시에는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운동을 했습니다. 함이 구원운동에 손해 줬기 때문에 저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구원운동, 하나님의 교회에 손해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고 그랬습니다. 심판 안 받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로 인해서 교회에 손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저 말하고 싶다고 돌아다니면서 다 말하지말고 또 무슨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해서 말 돌리지 말고, “교회에 덕이 되겠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을 해서 교회에 손해 안 가겠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가서 다 말해놓으면 교회에 손해가 납니다. 어떤 말을 해서 목사가 잘했다고 하겠는지, 못했다고 하겠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말하고 돌아가다가 목사님께서 알면 잘못했다고 할 것이다’ 싶으면 그만 두는 것입니다. 목사가 알면 잘못했다고 할 것을 왜 돌아다니면서 말해서 손해 주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손해 주는 것은 교회에 손해 주는 것입니다. 손을 들어서 도와주려고 해야 하는데, 돌아다니면서 요동케 하고 손해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해를 주면 하나님께 심판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습니다.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습니다.

진리 양보 말고 교회를 어지럽히지 말 것

본문 11절에,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핍박을 안 받을 것인데, 할례를 안 받기 때문에 바울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즉 말하자면, 진리를 양보 안하기 때문에 핍박받는 것입니다. 진리를 양보했으면 핍박을 안 받을 것인데, 양보하지 않고 일시라도 복종치 않기 때문에 바울은 핍박을 받고 나갑니다. 양보 안 하고 핍박 받으며 나가는 것이 생명이 사는 길입니다. 양보하고 핍박 안 받으면 이건 죽습니다.

본문 12절에,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는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한다는 말은 너희가 믿음에 서고, 그들이 자퇴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베어 버린다는 것은 자퇴를 말합니다. 스스로 자퇴하는 것, “뭐 잘랐다. 뭘 했다”하지 말고 너희를 어지럽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할 바에는 차라리 자퇴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괜히 싸우고 다투고 물고 찢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2.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가정에서 사랑의 법으로 서로 종살이 함

본문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는데, 자유라고 해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시는데, 가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무슨 법을 세워놓고 몇 조에 의해서 뭘 한다고 하는 곳이 아닙니다. 남편은 몇 조에 의해서 이렇게 하고, 아내는 몇 조에 의해서 밥을 해줘야하고, 시아버지는 몇 조에 의해서 돈을 내야하는 그게 아닙니다. 가정에는 법이 없습니다. 법이 없이 사랑의 법만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로 종살이 하는 것입니다. 서로 종살이하기를 남편은 아내의 종, 가정에 종살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가서 돈 벌어 오라 하면 그저 죽을지 살지 모르고 나가서 돈 벌어 오는 것입니다. “일찍 나가라” 그러면 나가는 것입니다. “돈 가져와” 그러면 종이니까 갖다 주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는 “밥해라. 넌 하루 세끼 딱딱 해라. 또 뭐해라” 그러면 그 집의 종살이니까 그저 종노릇 잘 하는 것입니다. 종살이기에 소 먹여라, 돼지 먹여라, 닭 먹여라, 청소해라 그러면 다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잘 돌봐주는 종이고,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가정에 대해서 종살이 하는 게 있습니다. 가정은 서로 종살이 하는 곳입니다. 서로 종살이하는데 법 없어도 잘 됩니까? 법 없어도 잘 됩니다. 사랑의 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슨 법을 따져서 법 몇 조에 의해서 뭘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벌써 사랑의 법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저 사랑으로 서로 자원해서 종살이해야 합니다.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종살이,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하십니다.

다투다가 피차 멸망하지 말고 양보할 것

본문 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하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5절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피차 멸망합니다.

서로 물고, 먹고, 싸우고, 다투고, 남을 헐뜯고 그렇게 하면 피차 멸망 합니다. 자기는 괜찮을 거 같죠? 남을 물고, 남을 비방하고, 남을 모략 중상해서 남에게 손해주면 자기는 괜찮을 거 같지만, 자기도 그 길을 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당한 사람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또 이 사람을 물고, 이 개가 저 개 물면 저 개가 또 이 개 물지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 개는 저 개 물고, 저 개는 이 개 물고, 서로 물고 서로 귀때기 물고, 서로 죽인다고 다리 물고 다 물어 치웁니다. 그럼
둘 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립니다. 닭싸움 하는 것을 보면 서로 죽도록까지 싸웁니다. 결사각오하고 하던데, 그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죽으면 뭐하겠습니까?

싸우고 다투고 서로 물고 먹으면 둘 다 망할 것이니까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고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하고, 그저 억지로 오리 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십리를 가주면서라도 싸우지 않으며 믿음 잘 지키면, 그게 제일 큰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른 뺨 치는 자에게 왼 뺨까지 맞고라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성전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믿음을 잘 지켜나가면 그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서로 네가 나 한 대 때렸으면 나는 너 두 대 때린다 하고, 서로
마주 때리고 서로 멱살 붙들고 돌아가면 피차 물고 먹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믿음 못 지킵니다. 믿음 못 지키면 둘 다 망하는 것 아닙니까? 둘 다 망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싸우지 말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안 맞을 땐 의좋게 갈라질 것

그러다가 정 안 맞으면 갈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같이 있으려고 많이 노력해 보다가, 사랑으로 서로 다 용납하고 해 보다가, 정 불가능하다 할 땐 갈라지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하고 조카 롯하고 내내 같이 있다가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서로의 목자들끼리 싸우니까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라고 아브라함이 그랬는데, 이것이 선한 방법입니다.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하고 롯하고 싸울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조카가 자기 따라온 건데, “넌 나 따라 와가지고 번창했으니까 다른 데 가라”고 보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 나 따라와서 이 만큼 되었으니까 다른 데로 가라고 이렇게 할 수 있지만 롯은 롯대로 할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롯은 뭐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삼촌이 나 도와준거 무엇입니까? 이거 다 내가 한 것이지 삼촌이 언제 해 줬습니까? 난 양 한 마리 받아먹은 것 없는데, 왜 나보고 가라고 합니까? 내가 여기 내 발로 왔지 뭐 삼촌이 업어다 놨습니까? 가려면 삼촌이나 가십시오”라고 롯도 할 말이 다 있을 것입니다. 삼촌은 ‘너 나 따라다니다가 이만큼 되었으니까 딴 데 가라’ 할 수 있고, 그것도 정당한 이유가 됩니다. 또 조카는 ‘삼촌이 나 도와준 것 뭐 있습니까? 도와준 것이 없이 따라다니면서 내가 다 양 쳐서 한 것이고, 삼촌의 양 한 마리도 먹은 것이 없다’면서, 갈려면 삼촌이 가지 왜 나보고 가라고 하냐며 서로 물고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랬으면 둘 다 망할 뻔 했는데 “네가 좌하면 난 우하고 네가 우하면 좌하겠다. 동으로 가면 난 서로 간다. 네가 먼저 해라”고 해서 서로 의좋게 갈라졌습니다. 의좋게 갈라지니까, 소돔 고모라 망할 때 아브라함이 기도해주었고, 롯이 잡혀갔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318명 데리고 가서 건져주지 않았습니까? 서로 의좋게 나가면 갈라져도 서로 건져주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피차간 물고 먹으면 둘 다 망합니다. 물고 먹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8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의 자유로 자라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의 자유로
자라나라
갈라디아서 5:1-8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
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
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
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
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
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
라 7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5:2 보아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다시 증언하니, 이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는 자이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다. 

5:5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소망을 고대하고 있다. 

5:6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였느냐? 

5:8 그 설득은 너희를 부르신 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1. 자라나도록 영의 자유를 주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의 자유를 주심

본문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
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
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
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
유를 줬으니까 이제는 굳세게 서서 그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
입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시는데, 생명의 자유, 영
의 자유, 양심의 자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자유를 잃어버
리지 말아야 합니다. 영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것에 제제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로 나가다가
어디 가서 걸리면 안 됩니다. 막히면 안 됩니다. 막혀서 종살이하면
그 자유가 그만 거기서 중단이 됩니다. 그리고 자라나지 못합니다. 생
명 길을 걷지 못합니다. 자유가 중단이 되면 안 됩니다. 계속 자유해
야 합니다. 자유에서 자유, 자유에서 자유, 오늘도 자유, 내일도 자유,
모레도 자유, 계속 자유에서 자유로 나가야만 자라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유는 영의 자유이며 양심의 자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
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는데, 영의 자유를
찾아야 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야 되고, 양심의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자유’를 쓸 때 자라남
‘자유’입니다. 영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이고, 성령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이고, 우리 생명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입니다. 거기에서 자유를
막으면, 막혀서 자유를 못 쓰면, 거기에서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이 됩니다. 그러기에 막히지 않아야 됩니다. 계속 나가야 됩니다. 계속 자라나야 됩니다.

중국에 발이 조그만 여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발이
조그맣습니다. 그런 여자들 봤습니까? 요새도 중국에 그런 여자들 있
습니까? 나이는 많은데 발이 어린아이 발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발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여자아이가 어렸을 때 가죽으로 버선을 만들
어서 어린아이에게 신기고 벗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발이 자라나질
못합니다. 가죽으로 딱 한계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자라나려 해도 자라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발이 조그맣습니다. 나이는 많지만 서너 살
난 아이의 발처럼 작습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에 빨리 가지 못하고 띠
뚝 띠뚝하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작아졌냐하면 발이 자유
로이 자라나야 되겠는데, 발이 자유로이 자라나는 것을 버선으로 딱
갖다 씌워가지고 못자라 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도 계속 자유로이 자라나야 되겠
는데 못 자라나도록 한계를 정해놓고 “이 이상 못 간다. 종의 멍에를
메라”고 하며, 가죽부대를 씌워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못 자라나는 것
입니다. 못 자라나면 그것으로 생명의 역사가 중단이 되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못합니다. 내내 그렇게 가다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자라나
지 못한 상태로 그냥 하늘나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자라나야 되겠는데. 자라나려면 어떻게 해야 자라
나니까? 자유를 써야 자라납니다. 자유를 써야 영의 자유, 생명의 자
유, 양심의 자유가 자랍니다. 자유를 써야 자라나는데, 자유를 써서 나
가다가 무엇에 막히면 못 쓰게 됩니다. 또한 어떠한 막는 것 때문에
못 씁니다. 자유를 쓰려고 하다가 막혀서 못씁니다. 그렇게 못 쓰면
거기서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막히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영의 자유는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고 팽창해나감
사실, 자유를 진짜 잘 써 나가면 어떠한 막는 세력도 다 뚫고 나갑
니다. 새 술을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새
술은 자꾸 팽창해서 많아져 나갑니다. 새 술은 자꾸 불어나가는데, 낡
은 가죽부대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결국 터집니다. 새 술의 힘은
자꾸 팽창해 나가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고 나갑니다.

진짜 새 술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립니다. 터뜨리는 것이 진짜 새
술입니다. 새 술이지만 기운이 다 빠져나간 새 술이라면, 팽창해 나가
다가도 낡은 가죽부대 안에 넣어놓으면 못 팽창해갑니다. 그것으로 끝
납니다. 낡은 가죽부대 때문에 못 불어납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 있는 것은 터뜨리고 나갑니다. 가죽부대 터뜨
리고 나가는 것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새 술은 어디에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새 가죽부대입니다. 새 부
대는 안 터집니까? 새 부대는 안 터집니다. 새 부대는 새 것인데 왜
터지겠습니까? 새 부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진리 안
에 있는 자유는 참으로 사는 자유입니다. 자유도 살고 진리도 살고 또한 점점 많아집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어떤 제도와 의식과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이런 것들이 막아서 자유로이 팽창하는 것을 막
으니까 터뜨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진짜 새 술이고, 진짜 새 술의 역
사 같으면 다 터뜨립니다.
낡은 부대를 터뜨리는 게 진짜입니다. 낡은 부대에 갇혀 있는 것은
맥이 다 빠진 술입니다. 새 술이 아니고 다 묵은 술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를 다 터뜨려야지 왜 못 터뜨립니까? 헌 것인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고 나가야지 그것도 하나 못 터뜨리는 묵은 술이 되어가지고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새 술은 터트립니다. 터트려 자라납니다. 계속 자라나고, 계속 커지고, 계속 전진하고, 계속 향상하고, 계속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참으로 생명 있는 신앙은 막지 못합니다. ‘자유’인데 자유를 누가 막겠습니까? 국가에서도 막지 못하고,
율법주의도 막지 못하고, 어떠한 인본주의도 못 막고, 제도와 의식으로도 못 막고, 결국 다 터트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새 술의 역사는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 자유를 주었다고 했는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
라하십니다.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자유에서 사는 것이 되어야지, 자유를 잃어버
린 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왜 자유를 잃어버립니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 이 새 술은 자유이고 팽창해 나가는 것인데, 영의 자유, 양
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생명의 자유입니다. 자유로 계속 나가는데,
그것을 막는 것은 터뜨리고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운이 좀
약해진 새 술은 가다가 그만 막는 것이 있으면 더 못나갑니다. 거기서
생명이 중단이 됩니다.

2. 진리 안에서 자유 할 것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 것
자유로 한다고 하니까, 신앙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뭐 남의
말을 안 듣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먹고 싶으면 먹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게 됩니다. “자유인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서, 때리고 싶으면 때리는 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마귀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
는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유니까 아무
렇게나 하는 것이 자유라고 하면서, 남의 실과 따 먹어도 자유이고,
아무 말이나 해도 자유이고, 또 방탕해도 자유이고, 술 먹어도 자유라
고 합니다. 예배당 가고 싶으면 가는 이것도 자유이고, 자리정돈 안
하는 것도 자유라고 하는 이런 자유는 마귀의 자유입니다. 육체의 자
유입니다. 이런 것은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자유를 주셨는데, 이것은 하늘나라까지 가는 자유
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누가 말을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있느냐? 내 마
음이지 왜 간섭하느냐? 자유다”라고 하며 육체의 기회를 삼는 자유는
망하는 자유입니다. 마귀의 자유이고 망하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영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 죄 짓는 사람들은 “자유인데 누가 와
서 날 간섭하느냐? 난 자유이다”라고 하면서 누구의 말도 도무지 안
듣고 나갑니다. 요새 젊은 사람 중에 육체의 자유를 가지고 나가는 사
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 안 듣습니다. 자기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무
슨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자기들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고, 하고 싶
은 대로 하는 것이고, 자기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도 이런 풍속이 들어옵니다. 자기들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해서 누구의 말도 안 듣습니다. 이것은 육체
의 자유인데, 그것은 마귀의 자유이고 망하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망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무한히 자라나는 자유
그러면 자유는 어떤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까? 새 부대에 넣은 자유
가 진짜 자유입니다. 아까 새 부대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진리의 말
씀, 성경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속에 있는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또한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했는데, 선한 양심을 쓰는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선한 양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말
씀대로 나가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양심인데, 진리에 비판 받은 양심
입니다.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중생한 영은 진리와 영감
에 의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영감으로 사는데 진리와
영감에게 이용당하는 양심, 그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이어야만 진짜입니다. 선한 양심 아니고 보통양심은 안 됩
니다. 보통 양심 쓰는 사람은 양심대로 하느라고 조상에게 제사한다고
하고, 양심대로 한다며 우상 섬기고, 양심대로 한다며 주일날 결혼식
을 하고, 양심대로 하느라고 다른 사람과 원수 되고, 싸우고 하는데,
그러한 양심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이 제사하는 것은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까? 양심을 어
기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은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
일에 결혼식 하는 것도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 국가에서 주일
에 선거한다고 하면, 그것은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양
심은 못 쓸 양심입니다. 마비된 양심이고,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인간적인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은 무엇이 선한 양심입니까? ‘진리에 비판 받은
양심’이 선한 양심입니다. 그것은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고, 그 양심의 자유에 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선한 양심이 아니면 못 삽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 성경에 있는데,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못 찾
아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도 선한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벌써 믿
음을 버린 자입니다. 파선한 사람들입니다. 선한 양심을 안 쓰는 사람
은 믿음이 파선되었다고 했습니다. 배가 깨졌다는 그 말입니다.

선한 양심 안 쓰니까 믿음이 파손되었는데, 배가 깨지면 다 침몰될
것이 아닙니까? 그거 타고 나가다가 다 죽을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선한 양심 안 쓰면 그것은 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다가 망
합니다. 양심 안 쓰다가 망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한 양심을 써서
하나님을 향해서 무한한 자유로, 무한히 찾아가고, 무한히 자라나고,
무한히 향상하고 전진하는 이 자유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로 한다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
다. 자유에는 법이 있는데, 새 가죽부대 즉, 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자
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
유라는 말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자유, 성령 안에 있는 자유, 이 자유
는 참 좋습니다. 기쁘고 즐거움이 충만하고 무한히 자유스럽게 나가
고, 어디 하나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무한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1-8 자유의 법.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자유의 법
갈라디아서 5:1-8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5:2 보아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다시 증언하니, 이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는 자이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다. 

5:5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소망을 고대하고 있다. 

5:6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였느냐? 

5:8 그 설득은 너희를 부르신 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1. 영의 자유
진리에 순종하는 자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유의 세계에서 사니까 좋습니다. 우리 신앙도 자유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영의 자유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껍데기만 예배당에 나와서 왔다 갔다 하고, 직분이나 좀 맡고, 좀 칭찬이나 해주고, 자기 높여주면 좋아하는 것은 다 껍데기입니다. 영에서 살아야 되고, 영의 자유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유의 생활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나가는 자유입니다. 말씀대로 나가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못 나가면 자유가 거기서 중단이 됩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유입니다. 중생한 영이 순종을 하고, 양심도 순종을 합니다. 순종하는 자유입니다. 내 몸도 순종하고 마음도 순종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자유, 영으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영의 자유를 가지고 진리에 순종합니다. 그것이 참된 자유의 세계입니다. 자유의 세계에서 자라나고, 자유의 세계에서 전진하고, 자유의 세계에서 올라가야 합니다. 자유의 세계를 벗어나면 자라나지 못합니다. 영의 자유의 세계에서 살아야 자라납니다.

영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들

자유의 세계는 어디 있습니까? 진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안에서 우리는 영의 자유를 얻어서 이 자유를 써나가야 합니다.
진리라면 가야합니다. 안 가면 죽는 것입니다. 양심에 옳은데 왜 안갑니까?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 방향으로 가야 되겠는데 왜 그 방향으로 안 갑니까? 그렇게 안 가는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난다는 사정, 이대로 하면 가정에서 핍박이 온다는 사정, 친척과 친구들이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정, 옳은 줄 알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면 손해가 난다는 사정, 또한 핍박을 받는다는 사정, 그 길이 옳긴 옳지만 세상에서 매 맞는다는 사정, 이렇게 가다가는 이용
당한다는 사정, 또 이렇게 가다가는 쫓겨나고 만다는 사정 등, 여러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들 때문에 자유로 나가다가 중단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할례 안 받으면 지옥 간다. 방언을 해야만 천당 간다”고 하는데, 이것도 자유로 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해야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또한 병을 고칠 수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것, 저것 다 가지고 와서는 자유를 쓰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것으로 가두어 놓습니다. 멍에를 메워 꼼짝 못하게 합니다.

또한 이북에서는 자유를 쓰면 숙청당한다고 하고, 감옥에 가둔다고 합니다. 자유를 쓰면 쫓겨난다고 하고, 죽인다고 합니다. 거기에 얽매여서 자유를 쓰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갇혀서, 옳은 줄 알면서도 자유를 쓰지 못하고, 주일 지켜야 옳은 줄 알면서 주일 지키지 못하고, 믿음 써야 되는 줄 알면서도 못쓰고, 안 믿는 체 하면서 숨어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자유를 쓰는 것이 진짜입니다. 이것이 산 것입니다. 자유를 쓰는 것이 산 것입니다. 이제 북한이 열리면 가서 교회를 세워야 되겠는데, 연약해서 쓰러지는 양떼들과 자유를 쓰지 못하고 밧줄에 얽혀 매여서 꼼짝 못하고 있는 양떼들을 먼저 건져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면 숨통이 트였다고 하면서 교회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안 믿는 사람들을 인도해야 되겠습니다. 얽매여서 자유를 쓰지 못하는 성도를 먼저 건져내야 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들부터 먼저 건져내야 되겠습니다.

2. 자유의 법
신앙 양심대로 사는 것이 자유의 법대로 사는 것

그런데 자유에도 법이 있습니다. ‘자유의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법대로 심판 받을 줄 알라고 야고보서 2장 12절에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있습니다. 또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자유의 법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법, 도덕법, 율법, 자유의 법, 영의 법, 전부 몇 가지입니까? 세상의 법이 있고, 그 이상에 도덕법이 있고, 그 이상에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 그 이상에 자유의 법이 있습니다. 자유의 법이 영의 법입니다. 믿는 사람은 자유의 법을 써서 살아야 됩니다. 자유의 법을 쓰는 것은 신앙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에 옳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신앙 양심에 옳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자유의 법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의 법에 의해 심판 받습니다. 자유의
법을 쓰지 않아도 당장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결국 심판 받습니다.

자유의 법을 쓴 사도바울과 다니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바울 자신의 신앙 양심에 옳다고 인정이 되었지만, 사실 그가 거기에 안 올라가도 괜찮습니다.
모든 제자들도 올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기 때문에 올라가지 말라고 다들 붙들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할 때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안 가면 다들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 가면 바울 자신도 편안합니다. 그런데 예수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립니다.
그래도 바울은 거기로 갔는데, 왜 올라갔습니까? 심령에 매여서 한 것입니다. 그는 자유의 법대로 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유의 법에 매여서 올라간 것입니다. 자유의 법에 매였는데 안 올라가면 안 됩니다. 안 올라가면 사도 바울의 생명이 없어집니다. 육신은 평안하고, 제자들은 기뻐하지만, 자유의 법에 의해 올라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라는 것이 없지만 자유의 법에 의해 올라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성경에 하루에 기도 세 번 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또 문 다 열어놓고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지만, 다니엘은 문 열어놓고 기도하면 뻔히 사자 굴에 들어가서 죽을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왜 예루살렘을 향해서 창문 다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까? 그것은 전에 하던 습관대로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의 법대로 한 것입니다. 전에 늘 하던 것인데, 오늘은 위험하니까 창문도 닫고 기도도 세 번 하지 않는 것이, 다니엘에게 있는 자유의 법이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양심이 편안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의 법대로 하느라고 문 다 열어놓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자유의 법을 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 양심을 안 쓰고, 옳은 줄 알면서도 안 가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끊어 버리지 아니하고, 자유의 법은 도무지 안 쓰고 이기주의, 욕심, 물욕, 정욕, 사욕, 자기 좋아하는 대로 행하면 안 됩니다. 육신 중심으로 육신의 기회를 삼으며 나가면, 이 다음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3. 자유를 씀으로 자라나라

육신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갖다가 육신의 기회를 삼으면 안 됩니다.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옳으면 가라는 것입니다. 영이 사는 길이면 사는 길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왜 안 가느냐 그 말입니다. 해야 될 것은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감동시키면 바치라는 것입니다. 왜 안 바칩니까? 물질이 아까워서 아나니아 부부와 같이 절반 감추고 하지 말고, 이 자유의 법대로 쓰라는 것입니다. 왜 양심의 가책되는 일을 합니까? 연보 작정해 놓고 안 하고, 왜 안 합니까? 다른 데는 다 쓰면서 왜 연보 작정해 놓은 것은 안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양심입니까? 자유의 법을 안 쓰면 자유의 법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 중국에 선교 가는 것도 자유의 법대로 가야 합니다. 교역자들 선교 가는 것도, 물론 가라하면 가긴 가겠지만 가기 싫으면 그만두십시오. 바울이 환난과 결박이 기다려도 가는 것처럼, 자유의 법이 ‘내가 가야 되겠다.’고 인도하면 가십시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가면 어떻게 되겠나? 감옥에 갇히지 않겠나?’ 이렇게 걱정하면서 못가는 것은 자유의 법을 다 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자유의 법의 심판이 옵니다. 안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의 법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법대로 하라고 했습니까? 자유의 법입니다. 가기 싫으면 그만 두십시오. 억지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법이 가라고 하면 가십시오. 양심대로 안 가면 죽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중단됩니다. 자유의 법에 대해서 우리가 이번에 배웠으니까 어디 한번 다들 어떻게 하는지 봐야겠습니다.
중국에 선교하러 여러 사람이 가야 되겠는데, 자유의 법을 쓰는 사람은 갈 것입니다. 그 법 안 쓰는 사람은 그만 두십시오. 억지로 보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억지로 한 것 받는다고 하셨습니까? 성경에 ‘즐겨내는 자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연보도 억지로 내는 것을 받는다고 하셨습니까? 안 받으십니다. 즐겨내는 자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선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유의 법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즐거워서 하는 것을 받으시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으십니다. 억지로 할 것 같으면 아예 그만 두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까 굳세게 서서 그 자유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자유를 쓰라는 말입니다. 자유를 써서 자유대로 나가고, 자유에서 자유, 자유에서 자유, 자유에서 자유, 그렇게 계속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전진하고 향상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계속 자유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계속 확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서 확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못 자라납니다.

4.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

본문 2-4절에,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했는데, 율법의 종이 되었으니 벌써부터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했는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하나만 하면 안 됩니다. 다 해야만 의가 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했는데, 율법으로 구원받겠다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그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5절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행해서 구원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떨어집니다.

“무엇을 행해서 구원 받겠다. 할례 받아서 구원받겠다. 안식일 지켜서 구원 받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언해야 구원 받겠다”면서 예수 믿어도 또한 방언을 해야 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할렐루야 기도원은 무엇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합니까? 병을 고쳐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 믿어도 무언가를 해야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다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뚝 떨어진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무얼 행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율법주의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끊어집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끊어지면 일이 다 틀어진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생명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의인이 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자유의 율법을 쓰지 않으면 중생한 영혼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생명이 자라나야 되겠는데, 점점 자유의 세계가 넓어가야 되겠는데, 하나님의 자유의 세계를 좀 더 많이 소유해야 되겠는데, 이게 그만 중단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자유의 율법을 쓰지 않는 자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유의 율법을 써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

본문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할례 받은 것, 할례 안 받은 것 그것은 뭐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할례 받았다고 해서 무슨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례 안 받았다고 해서 무슨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무엇 뿐 입니까?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십니다.

산 믿음은 역사가 있고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의 세계와 영의 세계와 빛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는 하나입니다. 하나라서 갈라놓지 못합니다. 사랑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는 하나입니다. 그 세계가 그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가 또한 그 세계입니다. 빛의 세계가 또한 그 세계입니다. 빛의 세계가 또한 그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가보니까 사랑이 있습니다. 영의 세계 가보니까 또한 사랑이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거기입니다. 영의 세계나 빛의 세계나 생명의 세계나 사랑의 세계는 하나입니다.

사랑의 역사를 하는 산 믿음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산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산 믿음, 산 생명, 산 역사가 있는 그것이 참 믿음인데, 그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합니다. 사랑이 넘쳐흐릅니다. 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역사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산 믿음 가졌으니까 자동적으로 사랑이 나오고, 믿음의 역사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원수를 사랑하게 되고, 일곱 번씩 일흔 번도 용서해 주게 되고, 어떻게 하든지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랑을 나눠주려고 하고 친절히 친절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사랑을 베풀게 되는 이것이 역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례 받았다”, “할례 안 받았다”고 논쟁하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런 것은 다 집어 치우십시오. 받았으면 뭘 하고 안 받았으면 뭘 하겠습니까? “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베냐민 지파다”하는 이것도 다 집어 치우십시오. 베냐민 지파면 뭐하고 아브라함 자손이면 뭐합니까? “나는 양반이다. 경주 김 씨다”, “전주 이 씨다”, 그런 것들 옛날 왕 한번 해 먹은 거 내세워서 한 몫 보려는 것입니다. 옛날 왕들이 뭐가 좋다고 그런 것을 내세웁니까?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랑하지 말고, ‘할례 받았다. 안 받았다. 양반이다. 뭐 했다’ 이런 것을 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 뭘 했다’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뭐가 중요합니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 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입니다.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종, 자유자, 유대인, 헬라인, 여자, 남자 차별이 없습니다. 이남사람, 이북사람, 영남사람, 호남사람, 강원도 사람 차별이 없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세계는 딴 세계입니다. 전에 살던 세계는 껍데기이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세계는 새로운 딴 세계인데, 전에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 입니다. 본문 7-8절에, “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17-31 영적 자유자의 핍박과 창성.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영적 자유자의 핍박과 창성
갈라디아서 4:17-31

17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4:17 그들이 너희에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 다만 너희를 내게서 떼어놓아 너희가 그들에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뿐이다. 

4:18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뿐 아니라 항상 좋은 일이다. 

4:19 나의 자녀들아, 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안에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해산하는 고통을 겪는다. 

4:20 이제라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서 나의 어조를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으니, 이는 내가 너희에 대하여 당혹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4:21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는 자들아, 내게 말해 보아라. 너희는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4: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를 가진 여자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4: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를 가진 여자에게서 난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 

4:24 이것은 비유로 말한 것인데,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다.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서 종 노릇 할 자를 낳은 자, 곧 하갈이다. 

4: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한다. 그 여자가 자기 자녀들과 함께 종노릇하나, 

4:26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인, 곧 우리 어머니이다. 

4:27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 질러 외쳐라. 이는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들이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다. 

4:29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지금도 그러하다. 

4:30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여종과 그 여자의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이 결코 자유를 가진 여자의 아들과 함께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4:3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여자의 자녀이다.


1. 교역자와의 이간

본문 17절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미혹하는 사람들이 와서 미혹을 했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그만 마음이 떠났습니다. 바울을 존경하고 사모하던 것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와서 비방하고 악평하는 바람에 바울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졌습니다. 미혹하는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잘해주었습니다.
다른 복음 가진 사람들이 열심히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잘 해줬습니다. 그렇게 다른 복음 가진 사람들이 너희에게 와서 열심으로 사랑하고 봉사하고, 뭘 주고 잘 해준다고 하고, 병 고쳐준다고 하는 그런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건 너희를 이간시켜서 바울에게서 마음을 떠나게 만들어서, 자기들에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고 너희에게 좋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는 것은 좋지만, 그들은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자기들을 거기로 끌고 가려고 너희에게 열심내고 잘해줬는데 왜 그걸 따라갔느냐는 것입니다.

2. 교역자의 수고

본문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려면 해산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교역자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인들 자신도 각각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해산할 때 아이도 복중에서 힘써야 하고, 산모도 힘을 써야 합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병아리 까는 것도 암탉이 알을 품고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됩니다. 암탉도 21일 동안 알을 계속해서 품고 있으며 수고하여야 하고, 병아리도 때가 되면 제가 알을 깨고 나와야 됩니다. 사람이 까주면 안 됩니다. 밖에서 대신 알을 까주면 병아리가 알에서 나와도 얼마 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안일주의에 빠져서 평안하려고만 하고, 향락주의에 빠지고, 교회 나와서 교제나 하고 평안히 예수 믿으려고 하면 자라나지 못합니다.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고, 그리스도의 형상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점점 이루어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상급을 많이 주십니다.

본문 20절에,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책망을 했으나 앞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하면 부드러운 음성으로 권면하려는 것입니다. 아직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의심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편지로 책망만 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가기 전에 바로 서기를 원하고, 또한 바울이 방문하면 책망하는 음성으로 할 게 아니라 사랑의 온유한 말로 권면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3. 두 여자의 비유
율법의 종과 영적 자유자

본문 21-23절에,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사라를 통해 낳은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 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제 일이지만은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즉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그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으며 언약궤 안에는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성전에서는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지이며, 하가는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난 자유자와 같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예루살렘, 우리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입니다. 유대에 속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에 속한 예루살렘 사람은 율법의 종노릇 하는 것이고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예루살렘인데, 하늘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유자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언약, 복음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어머니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의 언약, 즉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낳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고전 4:15). 우리는, 하가가 육신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 같이 육신으로 낳음을 얻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직 약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이루어져서 약속대로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은 것처럼,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음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 아니라 약속으로 구원받은 영적 자유자들입니다.

영적 자유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난 구원받은 자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구원 받겠다는 사람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또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것과 같은 것이며 율법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방사람이 예수를 의지함으로 자녀가 많아짐

본문 27절에,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잉태치 못한 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구로치 못한 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소리 질러 외치라’고 하십니다.

남편이 하나님입니다. 이사야 54장 5절에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육신의 이스라엘을 남편으로 삼고 나왔는데, 그런 사람들의 자녀보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 즉 율법도 없고,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사람들 중에 구원 받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고 율법을 자랑하고, 육체로 이스라엘임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자녀 보다, 자랑할 낯이 없는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붙들고 그 언약의 말씀에 참여하고 영적 이스라엘 생활을 하면, 그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나가고, 그 다음엔 영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신령한 예루살렘 생활을 하면 계속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교단이 크다”, “교회가 크다”, “사람이 많다”, “공부 많이 했다”, “돈이 많다”, 그렇게 뭘 잘해 놨다는 것들 보다, 자랑할 낯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만 붙들고 따라가고 말씀을 순종하고 영적 생활 하면, 이것이 더 창성해 진다는 것입니다. 할 낯이 없는 것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전에도 할 낯이 없었지만 지금도 할 낯이 없다는 것입니다. 할 낯이 없다는 것은 보잘것없다는 뜻과 비슷하지만 그것보다 아주 더 보잘것없다는 뜻입니다.

4. 육체의 아들과 영의 아들
신령한 신자는 핍박을 받음

예수를 바로 믿으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참된 바른 복음을 가지고 나가려고 하니까 육체를 가진 자들이 핍박을 했다고 했는데, 본문28-29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죽이려고 핍박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육신에 속한 신자가 신령한 신자를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도 율법주의자들이 신령한 신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육신에 속한 신자와 신령한 신자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3장에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육신에 속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젖이나 먹는 육신에 속한 신자들은 육신 중심, 모여서 좋아하고, 친목하고, 놀러 다니고, 육신을 즐겁게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신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육신에 속한 신자가 신령한 신자를 핍박을 합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습니
다. 신령한 신자들이 원래 할 낯이 없는 자들이지만, 핍박을 하기 때문에 더욱 할 낯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할 낯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었습니다. 가난하고, 아무 보잘것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에게 오라고 했을 때 그들이 왔습니까? 안 왔습니다. 소 사러 가고, 밭 사러 가고, 시집가고 장가가느라고 안 왔습니다. 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긴 어떤 사람만 온다고 했습니까? 할 낯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들어오는 것이 훌륭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와 같은 자, 이런 자들이 교회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핍박 받아 할 낯이 없는 자를 창성하게 해주심

에스겔 34장 20절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파리한 양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믿으려면 핍박이 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핍박을 받으니까 할 낯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안 믿는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지만, 믿는 사람에게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살찐 교회가 파리한 교회를 핍박한다고 했습니다.

핍박받아 할 낯이 없어서 예수님만 붙들고, 그 말씀대로만 나가는 이런 사람이 계속 충성해 나갑니다. 도와주는 사람 많고 돈 많고 세력이 많다고 교회가 잘 되는 게 아니고, 할 낯이 없어서 예수님만 붙들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속 창성하게 해주십니다.

교역자들도 할 수 없는 자들이 되어서, 영이 살려고 애를 쓰고, 말씀을 사모하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나가면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이 잘되게 해주신다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교회 일을 육신의 수단 방법으로 하려고 하면, 그게 ‘남편’이 됩니다. 큰 세력이나 붙들고 교회 일을 하려고 하면 그게 ‘남편’이 됩니다. 그런 것은 다 없어져야 됩니다. 도움 받을 사람도 없고, 할 낯도 없어서 “주여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고 영이 살아나가려고 애를 쓰고,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 자녀가 많아집니다.

이사야 54장 1-3절에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녀가 많아지면 장막을 자꾸 넓히라고 하겠습니까. 할 낯이 없어서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부르짖고, 예수님 아니면 못 살 줄 알고, 그 언약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말씀대로만 살려고 하고, 영이 살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하면 자녀가 계속 많아집니다. 이게 교회가 계속 부흥되는 비법입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이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고 하셨는데, 육신에 속한 자녀가 영에 속한 자녀를 핍박을 합니다. 그러니까 할 낯이 없어지는 것이고, 결국 자녀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1장 10, 12절의 인용 입니다. 이삭을 핍박하는 계집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계집종의 아들과 갈라지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들, 율법의 종 이스마엘은, 약속의 아들인 사라의 아들, 자유하는 이삭과 유업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육에 속한 것과 비진리를 끊어 버려야, 자유자로서 신령한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본문 31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속한 종의 자녀가 아니고 영이 자유하는 복음의 자녀입니다. 참 성도는 날마다복음 진리를 깨달아 그 진리 안에서 영의 자유와 새 생명을 얻어 창성해 나갑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붙들고, 약속의 말씀만 순종하고, 영이 자라나는 대로만 나가면 하나님이 창성하게 해주십니다. 그 세계는 참으로 무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