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갈라디아서 5:1-8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의 자유로 자라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의 자유로
자라나라
갈라디아서 5:1-8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
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
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
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
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
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
라 7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5:2 보아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다시 증언하니, 이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는 자이다.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다. 

5:5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소망을 고대하고 있다. 

5:6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였느냐? 

5:8 그 설득은 너희를 부르신 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1. 자라나도록 영의 자유를 주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의 자유를 주심

본문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
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
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
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
유를 줬으니까 이제는 굳세게 서서 그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
입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시는데, 생명의 자유, 영
의 자유, 양심의 자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자유를 잃어버
리지 말아야 합니다. 영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것에 제제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로 나가다가
어디 가서 걸리면 안 됩니다. 막히면 안 됩니다. 막혀서 종살이하면
그 자유가 그만 거기서 중단이 됩니다. 그리고 자라나지 못합니다. 생
명 길을 걷지 못합니다. 자유가 중단이 되면 안 됩니다. 계속 자유해
야 합니다. 자유에서 자유, 자유에서 자유, 오늘도 자유, 내일도 자유,
모레도 자유, 계속 자유에서 자유로 나가야만 자라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유는 영의 자유이며 양심의 자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
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는데, 영의 자유를
찾아야 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야 되고, 양심의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자유’를 쓸 때 자라남
‘자유’입니다. 영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이고, 성령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이고, 우리 생명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입니다. 거기에서 자유를
막으면, 막혀서 자유를 못 쓰면, 거기에서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이 됩니다. 그러기에 막히지 않아야 됩니다. 계속 나가야 됩니다. 계속 자라나야 됩니다.

중국에 발이 조그만 여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발이
조그맣습니다. 그런 여자들 봤습니까? 요새도 중국에 그런 여자들 있
습니까? 나이는 많은데 발이 어린아이 발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발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여자아이가 어렸을 때 가죽으로 버선을 만들
어서 어린아이에게 신기고 벗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발이 자라나질
못합니다. 가죽으로 딱 한계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자라나려 해도 자라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발이 조그맣습니다. 나이는 많지만 서너 살
난 아이의 발처럼 작습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에 빨리 가지 못하고 띠
뚝 띠뚝하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작아졌냐하면 발이 자유
로이 자라나야 되겠는데, 발이 자유로이 자라나는 것을 버선으로 딱
갖다 씌워가지고 못자라 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도 계속 자유로이 자라나야 되겠
는데 못 자라나도록 한계를 정해놓고 “이 이상 못 간다. 종의 멍에를
메라”고 하며, 가죽부대를 씌워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못 자라나는 것
입니다. 못 자라나면 그것으로 생명의 역사가 중단이 되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못합니다. 내내 그렇게 가다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자라나
지 못한 상태로 그냥 하늘나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자라나야 되겠는데. 자라나려면 어떻게 해야 자라
나니까? 자유를 써야 자라납니다. 자유를 써야 영의 자유, 생명의 자
유, 양심의 자유가 자랍니다. 자유를 써야 자라나는데, 자유를 써서 나
가다가 무엇에 막히면 못 쓰게 됩니다. 또한 어떠한 막는 것 때문에
못 씁니다. 자유를 쓰려고 하다가 막혀서 못씁니다. 그렇게 못 쓰면
거기서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막히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영의 자유는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고 팽창해나감
사실, 자유를 진짜 잘 써 나가면 어떠한 막는 세력도 다 뚫고 나갑
니다. 새 술을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새
술은 자꾸 팽창해서 많아져 나갑니다. 새 술은 자꾸 불어나가는데, 낡
은 가죽부대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결국 터집니다. 새 술의 힘은
자꾸 팽창해 나가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고 나갑니다.

진짜 새 술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립니다. 터뜨리는 것이 진짜 새
술입니다. 새 술이지만 기운이 다 빠져나간 새 술이라면, 팽창해 나가
다가도 낡은 가죽부대 안에 넣어놓으면 못 팽창해갑니다. 그것으로 끝
납니다. 낡은 가죽부대 때문에 못 불어납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 있는 것은 터뜨리고 나갑니다. 가죽부대 터뜨
리고 나가는 것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새 술은 어디에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새 가죽부대입니다. 새 부
대는 안 터집니까? 새 부대는 안 터집니다. 새 부대는 새 것인데 왜
터지겠습니까? 새 부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진리 안
에 있는 자유는 참으로 사는 자유입니다. 자유도 살고 진리도 살고 또한 점점 많아집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어떤 제도와 의식과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이런 것들이 막아서 자유로이 팽창하는 것을 막
으니까 터뜨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진짜 새 술이고, 진짜 새 술의 역
사 같으면 다 터뜨립니다.
낡은 부대를 터뜨리는 게 진짜입니다. 낡은 부대에 갇혀 있는 것은
맥이 다 빠진 술입니다. 새 술이 아니고 다 묵은 술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를 다 터뜨려야지 왜 못 터뜨립니까? 헌 것인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리고 나가야지 그것도 하나 못 터뜨리는 묵은 술이 되어가지고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새 술은 터트립니다. 터트려 자라납니다. 계속 자라나고, 계속 커지고, 계속 전진하고, 계속 향상하고, 계속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참으로 생명 있는 신앙은 막지 못합니다. ‘자유’인데 자유를 누가 막겠습니까? 국가에서도 막지 못하고,
율법주의도 막지 못하고, 어떠한 인본주의도 못 막고, 제도와 의식으로도 못 막고, 결국 다 터트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새 술의 역사는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 자유를 주었다고 했는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
라하십니다.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자유에서 사는 것이 되어야지, 자유를 잃어버
린 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왜 자유를 잃어버립니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 이 새 술은 자유이고 팽창해 나가는 것인데, 영의 자유, 양
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생명의 자유입니다. 자유로 계속 나가는데,
그것을 막는 것은 터뜨리고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운이 좀
약해진 새 술은 가다가 그만 막는 것이 있으면 더 못나갑니다. 거기서
생명이 중단이 됩니다.

2. 진리 안에서 자유 할 것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 것
자유로 한다고 하니까, 신앙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뭐 남의
말을 안 듣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먹고 싶으면 먹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게 됩니다. “자유인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서, 때리고 싶으면 때리는 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마귀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
는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유니까 아무
렇게나 하는 것이 자유라고 하면서, 남의 실과 따 먹어도 자유이고,
아무 말이나 해도 자유이고, 또 방탕해도 자유이고, 술 먹어도 자유라
고 합니다. 예배당 가고 싶으면 가는 이것도 자유이고, 자리정돈 안
하는 것도 자유라고 하는 이런 자유는 마귀의 자유입니다. 육체의 자
유입니다. 이런 것은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자유를 주셨는데, 이것은 하늘나라까지 가는 자유
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누가 말을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있느냐? 내 마
음이지 왜 간섭하느냐? 자유다”라고 하며 육체의 기회를 삼는 자유는
망하는 자유입니다. 마귀의 자유이고 망하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영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 죄 짓는 사람들은 “자유인데 누가 와
서 날 간섭하느냐? 난 자유이다”라고 하면서 누구의 말도 도무지 안
듣고 나갑니다. 요새 젊은 사람 중에 육체의 자유를 가지고 나가는 사
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 안 듣습니다. 자기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무
슨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자기들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고, 하고 싶
은 대로 하는 것이고, 자기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도 이런 풍속이 들어옵니다. 자기들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해서 누구의 말도 안 듣습니다. 이것은 육체
의 자유인데, 그것은 마귀의 자유이고 망하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망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무한히 자라나는 자유
그러면 자유는 어떤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까? 새 부대에 넣은 자유
가 진짜 자유입니다. 아까 새 부대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진리의 말
씀, 성경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속에 있는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또한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했는데, 선한 양심을 쓰는
자유가 진짜 자유입니다. 선한 양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말
씀대로 나가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양심인데, 진리에 비판 받은 양심
입니다.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중생한 영은 진리와 영감
에 의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영감으로 사는데 진리와
영감에게 이용당하는 양심, 그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이어야만 진짜입니다. 선한 양심 아니고 보통양심은 안 됩
니다. 보통 양심 쓰는 사람은 양심대로 하느라고 조상에게 제사한다고
하고, 양심대로 한다며 우상 섬기고, 양심대로 한다며 주일날 결혼식
을 하고, 양심대로 하느라고 다른 사람과 원수 되고, 싸우고 하는데,
그러한 양심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이 제사하는 것은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까? 양심을 어
기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은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
일에 결혼식 하는 것도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 국가에서 주일
에 선거한다고 하면, 그것은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양
심은 못 쓸 양심입니다. 마비된 양심이고,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인간적인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은 무엇이 선한 양심입니까? ‘진리에 비판 받은
양심’이 선한 양심입니다. 그것은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고, 그 양심의 자유에 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선한 양심이 아니면 못 삽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 성경에 있는데,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못 찾
아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도 선한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벌써 믿
음을 버린 자입니다. 파선한 사람들입니다. 선한 양심을 안 쓰는 사람
은 믿음이 파선되었다고 했습니다. 배가 깨졌다는 그 말입니다.

선한 양심 안 쓰니까 믿음이 파손되었는데, 배가 깨지면 다 침몰될
것이 아닙니까? 그거 타고 나가다가 다 죽을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선한 양심 안 쓰면 그것은 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다가 망
합니다. 양심 안 쓰다가 망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한 양심을 써서
하나님을 향해서 무한한 자유로, 무한히 찾아가고, 무한히 자라나고,
무한히 향상하고 전진하는 이 자유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로 한다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
다. 자유에는 법이 있는데, 새 가죽부대 즉, 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자
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
유라는 말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자유, 성령 안에 있는 자유, 이 자유
는 참 좋습니다. 기쁘고 즐거움이 충만하고 무한히 자유스럽게 나가
고, 어디 하나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무한한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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