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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일 토요일

마태복음 7:3-14 신앙진보의 정로 (正路)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신앙진보의 정로 (正路)
마태복음 7:3-14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 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1.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

우리가 정로를 걸어야만 믿음도 진보되고, 우리의 영도 자라나고, 구원을 이뤄나갈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찰자(先察者)가 되라는 것입니다. 선찰자라는 것은 자기부터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본문 3-4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눈 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고 빼라고 하느냐 외식하는 자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두 자기 속에 들보가 있는 줄 알아야 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것은, 티인 줄 알아야 됩니다. ‘들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들보라는 것은 집을 만들 때 쓰는 큰 보짱, 보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 구옥으로 말하자면 그 들보는 굵은 것을 갖다가 만듭니다. 직경 한 30cm나 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어떤 집은 그 이상 굵은 것을 쓰는데, 그런 것을 들보라고 합니다.

요새는 양옥집 짓는 것도 스라브(표준어:슬레이트), 콘크리트 할 때 허리가 굵은 것, 트러스 굵은 것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굵지 않으면 스라브가 무너집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거기 입당 예배에 가보니까 그 예배당의 건너가는 보, 트러스를 한 1미터 되도록 해놓았습니다. 1미터가 얼마나 굵겠습니까? 시멘트 콘크리트를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든든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들보라 함은 그것은 무조건 큰 것입니다. 티라 하면 그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티가 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티 그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는 티가 있고,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 줄 알아야 됩니다. 형제의 눈 속에 티라는 것은 형제가 행동으로 나타내는 허물입니다. 형제의 허물과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허물과 죄가, ‘티‘이고,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은 ’들보‘입니다. 물론 형제의 눈 속에도 들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의 부패성까지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부패성을 볼 수 있습니까? 행동으로 나타난 죄만 볼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난 죄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은 자기가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속에 얼마나 흉악한 것이 많이 있는지, 더러운 것이 많이 있는지, 욕심이 많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 고 하셨는데 그런 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모든 부패성은 자기가 자세히 살펴보면 다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들보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과 다른 사람 외부로 나타난 것을 비교하면, 남의 것은 십분의 일도 안 됩니다. 백분의 일도 안 됩니다. 자기 속에 부패성과 죄악성이 많이 있는데, 외부적으로 짓는 죄는 그것의 십분의 일이나 백분의 일 밖에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는 그 부패성이 있는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을 보면 ‘음란과 호색하는 것과 쟁투와 시기와 또 술 취하는 것과 여러 가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모두 열아홉 가지, 우리 속에 있는 부패성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도 ‘속에서 나오는 것에서 여러 가지 죄가 많이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의 부패성이 사람 속에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들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하나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보고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나이까?”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시고서 손가락으로 땅에다가 글을 쓰셨는데, ‘여인으로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것을 쓰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죄 없는 자 치라’는 그 말을 듣고 자기 자신이 죄가 없는지, 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한 것이기 때문에 음욕을 품은 적이 없는지, 사람들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달아나고 하나도 안 남았다고 했습니다.

전부 속에 죄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죄 없다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라고 요한일서에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속에 모든 부패성을 가지고 늘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티,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고 자기 눈 속에는 그 티보다 몇 십 배, 몇 백배 큰 것이 있는 줄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속의 있는 그것을 모르면, 형제보고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며 남의 것만 말하는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자기 눈 속에 들보를 뺀 다음에야 형제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둘째는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개가 거룩한 것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다 물고 찢고 발로 밟고 할 것입니다. 또 진주를 돼지에게 던진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돼지가 진주를 다 가만히 두겠습니까? 진주를 다 깨뜨려 내버리고 발로 밟고 다 찢어버리고 이럴 것인데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거룩한 것은 무엇입니까? 또 진주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것은 영감 받은 것,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의 심신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몸과 마음이 거룩한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입니까? 그 마음도 거룩하고 그 몸도 거룩한 것입니다. 성전입니다. “너희가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은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이니까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거룩하지 않습니까?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몸이라 하면 여기에는 우리 몸과 마음, 영 다 포함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이고, 성령이 언제나 내주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할 때 그것이 얼마나 다 거룩하고 얼마나 참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모스크바에 장병일 목사가 일, 이년 전에 갔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음악학교 선생 한 사람이 밖으로 지나가다가 찬송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소리가 나니까, ‘아 이렇게 좋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한번 들어 가보자’ 하고 구경하러 왔다가 그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학교 선생이라고 하는데, 그 선생이 지금 성가대 찬양대를 인도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른답니다. 성도들이 찬송 부르는 것을 듣고서 ‘야, 여기가 거룩한 장소다’ 하고 나와서 예수 믿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거룩합니다. 영감 받아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기도하는 마음과, 몸, 다 거룩합니다. 성도의 몸은 의의 병기입니다. 의의 병기는 거룩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것을 어디다 주지 말라고 했습니까? “개에게 주지 말라.” 개에게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개는 좋은 것입니까? 개는 나쁜 것을 뜻합니다. 개가 뭐 좋겠습니까? 개는 싸우고 다투고 물고 찢고 음란하고 자기 혼자 다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원에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얼마 전에 보니까 새끼가 좀 컸습니다. 그래서 새끼를 마당에 놓고 나눠 먹으라고 오징어를 몇 개 찢어서 조그맣게 해가지고 던져주었습니다. 그런데 큰 개가 자기 혼자 다 먹으려고 가지고 달아났습니다. 새끼에게 안 줬습니다. 새끼는 그것 얻어먹으려고 따라가고, 큰 개 이것은 안주려고 또 달아나고, 그러다가 저 위에 딴 데 가서 큰 개가 혼자 먹었습니다. 아니 그것 좀 나눠먹지, 자기 새끼지 남의 새끼입니까? 나눠먹지 왜 혼자 다 먹으려고 그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개라는 것은 혼자 다 먹는 것인가 보다’ 하고 거기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처음으로 만나면 인사가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으르렁 하면서 그냥 잡아 죽이려는 태도를 가지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하는 말은 개와 같이 물고 찢고 욕심 채우고 또 음란하고 하는데, 여기에다가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몸, 거룩한 마음인데, 이것을 갖다가 싸우고 다투고 물고 찢고 또 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너희 몸과 마음을 갖다가 그런 데,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데 빠지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로마서 13:13-14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 믿는 사람은 방탕하고 술 취하면 안 됩니다. 주일날 예배당 안 오고 놀러 다니는 것도 방탕한 것입니다. 그것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입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 술 취하는 것도 안 됩니다. 술 먹으면 안 됩니다. ‘한 잔 먹으면 괜찮다’, ‘석 잔 먹으면 괜찮다’ 이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한 잔 먹으면 그 만큼 취하는 것입니다. 한 잔 먹으면 나타나진 않아도 속에서 그만큼 취하는 것입니
다. 한 잔에 하나도 안 취했으면 백 잔도 안취하고 천 잔도 안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천 잔도 한 잔씩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포도주, 맥주, 다 먹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 잠언 23장 보면 ‘포도주는 보지도 말라’ 그랬는데, 맥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 이것도 예수 믿는 사람보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 빠지면 거룩한 것을 어디에다가 주는 것입니까? 개에게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도의 몸과 마음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영감 받은 것은 거룩합니다.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쟁투는 싸우는 것입니다. 시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또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성도의 몸과 마음을 그런데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것은 그런 데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진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주는 진리를 가리키는데 진리가 진주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값진 진주를 만나서 자기 있는 것을 다 팔아가지고 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몸과 마음을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기구로 사용되는 몸과 마음을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조금 깨닫고 많이 깨달은 것의 차이가 있지만, 또 바로 깨닫고 바로 못 깨달은 것은 차이가 있지만, 깨달은 것은 깨달은 것입니다. 진리 전체를 백 개라 하면 백 개 중에 한 열 개 깨달은 사람 있습니다. 구십 개는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칠십 개를 잘못 깨닫고 삼십 개만 바로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50% 깨달았습니다. 진리의 50%는 바로 깨닫고 절반은 바로 못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80% 바로 깨닫고 20% 못 깨달은 사람입니다. 어떤 90% 바로 깨달은 사람이 있고, 95% 바로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은 정도가 다 다른데 그래도 깨닫긴 깨달은 것입니다.
조금 깨달았어도, 깨달음으로 진리의 기구로 사용되는 몸과 마음은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지 않습니까? 진리의 기구로서 사용되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입니까? 그것을 갖다가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돼지는 뭐 귀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진주 알고 있습니까? 그저 발로 밟고 그다음에 입으로 씹어서 가루 만들고 깨뜨려 내버리고 상하게 하고 찢어버리고 그렇게 합니다. 그것을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성령의 감동받은 너희의 몸과 마음은 거룩한 데 언제나 주라. 거룩한 생활 하라”고 하십니다. 또 진리를 깨달아서 진리의 기구로 사용되는 너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한 데에 던지고 말씀에, 진리에 던지라는 말입니다. 항상 진리의 말씀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고 새김질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가 만들어지도록 해야 됩니다.

3.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본문 7-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 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성도는 무엇을 하라 그랬습니까? 첫째는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구해야 됩니다.
구해야 되고 또 찾아야 됩니다. 찾지 않으면 못 찾습니다. 찾는 사람이 찾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두드려야 됩니다.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문이 열려야 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구하기를 힘써야 되고 찾기를 힘써야 되고,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아야 되고, 두드려야 됩니다. 문을 두드려야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에, 항상 두드리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뭘 구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구해야 됩니다. 하나님, 신령한 세계를 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신령한 것을 구해야 되겠습니다. 힘써 구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가만히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져 내려가서 롯의 처와 같이 소금기둥이 됩니다. 힘써 구해야 됩니다.

시편 42:2-6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
도가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고 얼마나 찾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으려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사방으로 돌아다닙니다. 요단 땅에도 가고, 헤르몬 산에도 올라가고, 미살 산에도 가고, 요단 들판, 헤르몬 산, 제일 높은 산, 미살 산, 사방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느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사방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만큼 성도가 하나님을 구하느라고 많은 힘을 썼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구하느라고 많은 힘을 써야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힘을 쓰고,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힘을 쓰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려고 힘을 쓰고,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구하는 생활, 신령한 세계 들어가려고 힘을 쓰고, 영적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힘을 쓰고, 구하느라고 사방 다니고, 산으로 들로 사방 다니면서 하나님을 구하려고 찾고, 신령한 것을 구하려고 찾아야 합니다. 구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주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주십니다.

찾으라

또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찾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진리를 찾아라.’ 하나님의 그 말씀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찾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배우려고 애를 써야 되고, 얻어먹으려고 입을 열고 헐떡헐떡 해야 되고, 시편 기자와 같이 사모해야 되고 애를 써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저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소년 때부터 성경 배우려고 많은 힘을 썼습니다. 김의홍 목사가 가르치는 운상동 교회라고 있는데, 우리 고향 우리 집에서 거기로 가려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가야 됩니다. 한 시간 반, 거의 두 시간 가야 됩니다. 거기 걸어가서 성경 배우고 또 걸어오는 것입니다.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두 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이기선 목사님 사경회 할 때는 오십 리를 걸어가서 사경회 참여했습니다. 오십 리를 걸어가려면 다섯 시간 이상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또, ‘박천’이라는 데서 사경회 하는데 거기는 오십 리가 넘습니다. 거기도 찾아갔습니다. 은혜 받으려고, 말씀 받으려고 찾아가는데, 마침 초겨울이라서 박천 가는 길에 대동강이 얼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짝 얼어붙었다고 배도 못 다닌다고 합니다. 배나 연락선을 타고 가야하는데 얼었으니까 어제 저녁에 배는 못 오고, 그렇다고 걸어가려면 빠질 염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야하나 생각하는데 긴 막대기 가져다가 지고가면 된다고 합니다. 긴 막대기, 한 10미터짜리 막대기를 지고가다 얼음판에 빠지면 막대기가 얼음에 걸릴 것이고 막대가 걸리면 그것을 붙잡고 나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겠습니까? ‘막대기는 무슨 막대기’하면서 믿고 걸어갔습니다. “깨져서 죽으면 죽자”하고 “건너가자”하고 건너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깨지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건너가자” 그러면서 몇 사람이 걸어가는데, 얼음이 바짝 바짝 바짝 소리가 납니다. 이 다음번에 빠지느냐, 그 다음에 빠지느냐 하면서 건넜습니다. 그 강이 깊으니까 지금 빠지면 쏙 들어가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사오니. 믿사오니.’하면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경회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못 봤지만 중들이 그런 데를 건너가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면서 “바짝바짝”하는 데를 건너가다가 “바짝”하고 빠질 것 같으면 “아이쿠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런다고 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다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은 편안할 때 하는 것이지 죽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다 하나님 찾을 줄을 알면서 미혹을 받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 배우려고 이렇게 사방으로 다니는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 여기서도 김현봉 목사님 이전에 삼월 초하루 주간에 삼각산 집회를 했었습니다. 관악산, 삼각산, 그때 사방에서 말씀 배우려고 추운 겨울인데도 갔습니다. 그 때가 추울 때는 영하 6도 되는 때였습니다. 난로도 안 피우고 해도 가서 마루방에서 참여하고 거기서 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숙사가 얼마 없으니까 대부분이 마루 거기서 잤습니다. 영하 6도에 바깥에서 자려면 얼마나 추운지 압니까? 요새 사경회는 뭐 5월이니까 영하 몇도 됩니까? 요새 사경회는 영상입니다.

말씀 찾으려고, 말씀 배우려고 사방에서 다니는 것, 그것 하나 찾으면 이것은 진주를 하나를 찾는 것입니다. 보배를 하나 찾는 것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됩니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떤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야 됩니다. 어떤 일이 하나 생기면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대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못 찾으면 그것은 안 됩니다. 일이 안 됩니다.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능으로 그 일을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범사에 자기가 마땅히 행해야 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남의 걱정 하지 말고 자기 걱정만 하십시오.

세리들이 세례 요한에게 “어떡해야 합니까?” 물으니까 “정한 세 외에 더 받지 말고 늑징하지 말아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군인들이 “어떡해야 합니까?” 하니까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고 강포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각자가 다 자기에게 해당한 그 하나님의 뜻이 다 있습니다. 자기에 해당한 하나님의 뜻, 그것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말했는지 성경에서 찾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100 % 다 주십니다. 성경을 바로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하면 만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두드리라

셋째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했는데 두드리라는 것은 문 열어 달라고 자꾸 두드려대는 것입니다. ‘문 열어 주세요’ 하고 자꾸 두드려야 열어주지 않습니까? 두드리라는 것은 말씀대로 하려고 자꾸 힘을 쓰고 자꾸 시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계속 힘을 써 나가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말씀대로 자기가 걸어가려고 자꾸 두드려보는 것입니다. 해보는 것입니다. 안되면 또 해보고, 또 안 되면 또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드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안 된다면 또 해본다는 말입니다. 해도 해도 또 안 되면 또 해본다는 말입니다. 또 안 되면 또 해보는 것입니다. 계속 해보면 마지막에는 되는 날이 옵니다.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척척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됩니다. 자꾸 두드려 보는 생활, 자기가 실패했지만 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한다’ 하면서 수고를 해야 됩니다. 또 내가 두 번 실패했지만 세 번째는 내가 한다 하면서 수고를 해야 됩니다. 다섯 번 실패했지만 여섯 번째는 한다 하면서 수고를 해야 됩니다. 여섯 번 실패했지만 일곱 번째는 내가 한다 하면서 수고를 해야 됩니다.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마침내는 문이 열립니다.

술이나 담배 끊는 것도 두드려야 됩니다. ‘끊겠다’ 하고 가만히 있다보면 그 다음엔 또 먹습니다. 계속 힘을 써서 두 번 안 되면 세 번, 세 번 안 되면 네 번, 자꾸 힘을 써서 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문이 열려가지고 다 끊어버려집니다. 예수님을 몇 십 년 믿었어도 담배하나 못 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도 못 받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를 몇 십 년 믿어도, 담배 하나 못 끊고 돌아가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두드려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두드려 보라!’ 이것입니다. 술 하나 못 끊고 돌아가는 것, 두드려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이것은 이기려고 힘을 쓰고, 자꾸 힘을 쓰면 하나님께서 이길 힘을 줍니다. 그러니까 ‘두드리라 그러면 반드시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고 하신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전도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두드려 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하면서 또 가는 것입니다. 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힘을 써서 겨우 한 사람 데려놓는 수가 있습니다. 두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또 심령이 막혀서 캄캄하고 은혜가 안 되고 하니까 자꾸 두드려서 은혜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면, 그 다음엔 심령의 문, 영의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열어주는 것입니다.

하늘 문도 하나님께서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줍니다. 천당 갈 것 생각하면 막연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천당을 갈까하고 막연한 사람도 있는데 자꾸 두드려 보십시오. ‘주여, 천당이 얼마나 좋은가 알게 해 주시옵소서. 천당이 얼마나 좋은가 알게 해 주시옵소서’ 자꾸 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매일 그렇게 ‘천당이 얼마나 좋은가 알게 해 주시옵소서. 알게 해 주시옵소서’, 자꾸 기도하면 얼마가면 하늘 문이 환하게 열립니다. ‘아, 이거로구나’ 문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문 열어주십니다.

본문 9-11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겐 좋은 것으로 줄 줄 아는데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야 왜 너에게 안주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은 악한 자라고 그랬습니다. 사람은 다 악한 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셨는데, 왜 악한 자라 그랬냐면 이기주의가 돼서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이기주의입니다. 그 이기주의는 악한 것입니다. 이기주의자들이라도 자식에겐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 찾는 자, 두드리는 자에게 왜 안주시겠느냐는 말입니다.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면 먼저 사랑하십시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사를 받고자하면 먼저 인사하십시오. ‘아 저 사람 인사도 안 한다’, ‘못되 먹었다’고 하면서 날 알아보지 못한다고, 보고도 본체만
체 하고 달아난다고 말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그럼 이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 만나면 먼저 인사하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저기 들어올 때부터 인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인사 할 날이 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이 되면 내가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라는 것입니다. 주면 거기 사랑이 있습니다. ‘없다. 없다.’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주면 있는데 왜 없다고 그럽니까? 주면 있지, 없습니까? ‘사랑이 없다’, ‘무정하다’, ‘바싹 말랐다’고 하는데 말랐으면 거기에다가 물을 주고 기름을 치라는 말입니다. 말랐으면 생명수 주면 될 것이 아닙니까? 사랑이 없으면 사랑주면 될 것 아닙니까? 또, 용서해 주지 않으면 먼저 용서 해주면 될 것이 아닙니까?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내가 먼저 불쌍히 여기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것이 남을 대접하는 도입니다. 이 도는 대접 받는 도가 아닙니다. ‘율법과 선지자니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는 것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남에게 대접했다는 말입니다. 대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대접 받을 생각을 그만두고 대접 할 생각만 해야 합니다. ‘내가 대접해야 되겠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대접해야 되겠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을 대접해야 되겠다’, ‘원수를 대접해야 되겠다’,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끼리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가깝지 않은 사람을 대접해서 가깝게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 나와서도 끼리끼리만 인사합니다. 자기 고향사람끼리, 과부는 과부끼리, 청년은 청년끼리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접을 끼리끼리만 하면 되겠습니까? 아는 사람이 수십 명 되는데, 그것이 다입니까?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다 열리는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 열 사람을 대접하다가 스무 사람을 대접하면 그만큼 열리는 것이고, 그 나라, 그 세계가 커지는 것이고, 그 다음에 백 사람 대접하면 그만큼 커지는 것이고, 천 사람 대접하면 그만큼 커지는 것이고, 만 사람 대접하면 그만큼 커지는 것이고, 계속 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접함으로 커가는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해보고, 대접을 해야 되겠습니다.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입니다. 대접받는 것이 하나님의 도가 아니고,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대접 받으려고 하니까, 누가 대접하지 않는다 하고 뭐 인사도 안 한다 하고, 날 미워한다고 하고, 또 멸시한다 하고, 또 학대한다 하고, 나를 비방한다 하고,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죽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죽이려 하고 학대하고 멸시하고 발로 밟고 별 것 다 해도 상대를 대접함으로 이것을 다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나가십시다. 그러면 다 정복할 수 있습니다. 대접하면 다 정복할 수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의 하나님의 나라가 더 커집니다.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