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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9일 목요일

고린도전서 1:1-17 성도를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성도를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1-17

1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내 형제들
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14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에 대해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니, 

1:5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너희 안에서 견고하게 되어, 

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다.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1:9 너희를 불러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1:10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굳게 합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다. 

1:11 나의 형제들아, 내가 글레오의 집 사람들을 통하여 너희에 대한 말,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1:12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각각 "나는 바울에게" , " 나는 아볼로에게" , " 나는 게바에게" , "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1:13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지셨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또는,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1:14 내가 너희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니, 

1:15 이는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6 내가 또 스데바나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으나, 그 밖에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1: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다.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도록 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1. 교회와 성도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본문 1-3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란 하나님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교회를 자기 교회라고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세웠다, 자기 교회다, 자기 마음대로 해야 된다, 또 몇 사람이 단합해서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교회를 훼손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려고 하는 것은 죄 짓는 것이며, 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거룩함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란 성도가 거룩하여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행동이 거룩하여졌다는 뜻이 아니고 성도의 영이 거룩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도 속을 들여다보면 부패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개인마다 따지고 보면 다 불완전하고, 부패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거룩한 교회라는 말입니다. 왜 거룩합니까? 첫째,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샀으므로 거룩하고, 둘째,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으므로 거룩하고, 셋째, 성령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계시므로 거룩하고, 교회는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으므로 거룩한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또 성도를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고, 성령이 성도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성령의 전입니다. 즉 성령이 성도를 성전 삼으시고 그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룩합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부패성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룩한 교회입니다. 즉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성령이 교회 가운데 계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셨고, 또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므로 거룩한 교회입니다. 또 중생한 영이 있습니다. 중생한 영은 새 생명으로 살려놓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입니다. 교회가 거룩하고 교회의 일원인 성도도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셨고, 중생한 영이 있고, 성령이 같이 하시므로 성도는 거룩한 무리이며,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입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제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즉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각처에서 우리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리라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즉 각처에서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는데, 항상 성도들에게 구속의 은혜, 즉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 평강이 충만하기를 바울이 원하며 축원합니다.

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사

말씀이 풍성함

본문 4-7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말씀이 풍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성경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에 풍족합니다. 즉 신령한 지식이 풍족해서 마귀에게 속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갑니다.

영을 분별함

영을 분별하는 지식,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는 지식 등 신령한 도리에 대한 지식이 풍족합니다. 이런 지식이 풍족하므로 고린도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말씀이 풍성하고, 지식이 풍성합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오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막고, 또 신령한 지식으로 분별하므로 마귀를 잘 이겨나가는 교회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림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확실하게, 굳건히 섰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하였는데,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좋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처음부터 말씀을 많이 배웠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설립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르쳤다고 하였습니까? 바울이 일 년 육 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교회를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8:11에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됩니다. 또 말씀의 터 위에 세워야만 교회가 바로 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선한 싸움을 싸우는 가운데서 모든 지식을 많이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있어 마귀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나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도 잘 분별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또 여러 가지 은사가 풍족한 교회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성도는 매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됩니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셨으므로, 어느 때, 어느 시에 예수님이 오실지 모르므로 깨어 있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고린도 교회를 우리가 본받아야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경을 많이 배워 말씀이 풍성한 교회이며, 또 성경의 터 위에 세워놓은 교회입니다.

신령한 지혜가 풍족함

그 다음에는 신령한 지혜가 풍족한 교회입니다. 신령한 지혜가 있어서 영의 분별을 잘 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은사가 풍족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날마다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못하고, 잊고 다닌 것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3. 성도를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도를 지키심

본문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재림 하실 때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본문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끝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케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불러서 그리스도 예수와 교제케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불러서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신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 신용을 지킨다, 약속을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케 하십니다. 빌립보서 1: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착한 일을 시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했다는 말입니다. 즉 “중생을 시켜 놓았다, 살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성도의 구원을 견고케 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며,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끝을 맺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시작 하셨으므로 예수님의 날까지 성도를 지키실 줄을, 즉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도를 연단시키심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려고 여러 가지 시험으로 연단을 시켜나가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책망 받을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 가지 연단이 필요하고, 징계도 필요한 것입니다. 징계를 통하여 회개시키며, 부패성을 뽑아 버리도록 해서 예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는 일을 끝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성을 빼어 버리게 해서,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흠과 티가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유다서 1:24-25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마두원 목사님이 축복 기도할 때 늘 사용 했는데,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를 거침이 없게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를 보호해서 거침이 없게 하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 앞에 흠이 없게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 흠이 많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면으로 연단시키고 징계하여 깨닫게 만들고, 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흠이
없이 만들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설 때에 모든 더러운 옷을 다 벗어 버리고, 흰 옷을 입고 서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주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8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예수님 앞에 선다는 말입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믿음을 지키는 행실이 세마포를 입는 것입니다. 믿음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며, 구원을 잘 이루어 나간 사람은 세마포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즐거움으로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날을 위해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서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입은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도록 연단하시고 결국 세마포 옷을 입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옷을 입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옷을 입고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에 흠과 티가 없이, 즐거움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해야 됩니다. 세마포 옷을 잘 장만해 놓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흠 없이 세우시려고 여러 가지로 연단하여 깨닫게 만드십니다. 즉 책망할 것은 책망하고, 회개시킬 것은 회개시키고, 바로 세울 것은 바로 세우고, 깨닫지못하는 것은 깨닫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히시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많이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잘 받아야 됩니다. 즉 입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리를 받아야 하고, 진리를 믿어야 하고,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냥 지나치지 맙시다. 진리가 자기에게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4. 당파를 만들지 말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으라
 
본문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같은 뜻, 세 가지입니다. “같은 말”이란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이고, “같은 마음”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며, “같은 뜻”이란 같은 뜻을 가지고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라

같은 말이라는 것은 진리대로 하는 것입니다. 진리대로 말하는 것이 같은 말입니다. 이 사람도 진리대로 말하고, 저 사람도 진리대로 말하는 것이 같은 말 아닙니까? 바울이 가서 말한 것도 진리대로 말했고, 디모데가 가서 말한 것도 진리대로 말했습니다. 진리대로만 말하면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말하면 같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단에서 중국에 선교할 때에 여러 사람, 여러 목사들을 교대로 보내지만, 다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번에 갔던 목사와 이번에 가는 목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또 작년에 중국 선교가서 한 말도 같은 말이며, 재작년에도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대로 하면 여러 사람이 해도 다 같은 말이 됩니다. 

같은 마음을 가져라

그 다음에는 같은 마음이라고 했는데,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 처럼 마음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자기 마음을 다 내어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같은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기주의이며, 전부 자기만 위하는 자들이므로 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빌립보 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영광과 권세와 존귀를 다 내어 놓고, 지극히 낮아져서 종의 형상을 가지시고, 종노릇하시다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즉 자기의 영광과 권세와 자존심은 다 내놓고, 종살이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종살이 하면 다 같아집니다. 이 사람도 종살이, 저 사람도 종살이 하면 둘 다 종살이 하므로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 할 때에 신랑, 신부한테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신랑의 마음대로 해도 같은 마음이 될 수 없고, 신부의 마음대로 해도 같은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피차간 자기 마음을 다 내어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같은 마음이 됩니다. 서로 낮아져서 섬기는데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만 같은 마음이 됩니다. 자기 영광, 권세, 이권문제, 자존심, 자기 나타내려는 것 등을 다 버려야 합니다. 이것들을 가지고는 같은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종살이 하자”하고 나가면 같은 마음이 됩니다. 

같은 뜻을 품어라

또 “같은 뜻을 품으라”고 하였는데, 같은 뜻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그것은 같은 뜻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저 사람도 예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데, 뜻이 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이권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이나,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그 나라만 잘되면 된다, 나는 쇠하여
야 되겠다, 그만 흥하면 된다”는 이것입니다. “나를 대접 안 했다, 멸시한다, 무시한다, 그럴 수가 있느냐,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발로 밟는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아무리 쇠해져도 그의 나라와 의만 잘 되면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쇠하여야 되겠고, 그는 흥하여야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잘되는 법입니다. 자기는 낮아지고, 무시당하면서까지도 그의 나라와 의만 구하고 나가면 자기가 잘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잘되는 법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만 잘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도 잘되는 법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잘되는 법입니다. 만대에 복을 받습니다. 

당파를 만들지 말라

본문 11-12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네 당파가 생겼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는 바울 당파와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는 아볼로 당파와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는 게바 당파와 “나는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그리스도 당파가 생겼습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울 당파, 아볼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볼로 당파, 게바를 좋아하는 사람은 게바 당파입니다. 즉 바울과 같은 신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울 당파이고, 아볼로는 지식이 많은 사람인데, 지식 많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볼로 당파이고, 게바는 베드로인데 신령한 은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게바 당파입니다. 또 한 가지 당파는 그리스도 당파입니다. 그리스도 당파도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당파를 만들었으므로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당파 만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파를 묻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따라가며, 하나님의 말씀만 좋아하면서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전부 유익이 됩니다. 즉 믿음으로만 나가려고 하면 바울도 필요하고, 아볼로도 필요하고, 게바도 필요하고, 다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네끼리 당파를 만들어 하려고 하니까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당파를 만드는 것은 망하는 죄입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당파를 만드는 것은 지옥 가는 죄라고 하였습니다.그러므로 끼리끼리 당파를 만들지 말아야겠습니다. 젊은 사람끼리, 또 여자끼리, 남자끼리, 과부끼리, 처녀끼리, 가난한 사람끼리, 부자끼리, 유식한 사람끼리, 무식한 사람끼리 당파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자기 지방 사람끼리 당파를 만드는데 이것도 악독한 죄입니다. 당파를 만드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느 지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지방이든지 예수를 믿으면 다 한 형제인 것입니다. 또 아무리 자기 고향 사람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해야 됩니다. 자기 고향 사람이 잘못했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또 당파를 만들어 서로 대적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한국사람들이 지역을 나누어 서로 싸우고, 다투다가는 마지막에는 다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파를 초월해 나가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즉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은 당파가 없습니다. 자기 민족도 초월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구스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유무식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부터 지역주의를 없애야 됩니다. 그래야 당파가 없어집니다.

본문 13-15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세례를 받은 것이 없는데 왜 바울파가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파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전하지 말라

본문 16-17절에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 준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세례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것이며, 바울을 보낸 것은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한 것이지, 세례를 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해야 됩니다. 십자가의 도를 사람의 지혜로 전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지혜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된 데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지혜를 쓰지 말고,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령의 인도대로 모든 것을 해야만 됩니다.

2. 예수님은 선한 목자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림

본문 10-12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제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내어 버리고 달아납니다.

본문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는데,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자의 음성이냐 아니냐, 즉 예수님의 음성이냐 아니냐, 이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음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무엇이 가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신령이 가담해야 합니다. 신령이 가담하면 예수님의 음성이 됩니다. 즉, 이것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양식이 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영의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영의 양식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그것이 영의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깨달아야 영의 양식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음성이냐 아니냐, 성령으로 깨달아서 전하는 것이냐 지식적으로만 전하는 것이냐,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말해 줄 때에 지식적으로만 전해주는 것이냐, 성령으로 깨달아서 전해주는 것이냐, 이러한 것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깨달아서 전해주는 말씀은 자기 심령 속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아!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나 예수님의 말씀을 이제 들었다, 주의 음성을 들은 몸이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다’라는 결심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다 아시고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또, 각각 불러서 인도하여 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고,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도 양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서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