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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갈라디아서 2:11-21 진리는 즉시로 바로 행해야 함(진리의 직행성).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진리는 즉시로 바로 행해야 함
(진리의 직행성)
갈라디아서 2:11-21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 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 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가 책망 받을 만한 일을 해서 내가 그를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2:12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가 그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가니, 

2: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였고,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다. 

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이 앞에서 게바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인데도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합니까?" 라고 하였다.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지만 

2:16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이니,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2:17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시냐? 결코 그럴 수 없다. 

2:18 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스스로 범법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으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는 것이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지금 육체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2: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


1.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함

본문 11절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게바는 베드로를 가르키는데,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나이 많은 대사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젊은 사람이고, 맨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으로 베드로를 면책한 일은 아주 중대한 일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하지 않으면 진리가 다 무너지겠기에 부득불 면책을 했습니다.

본문 12절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으로는 할례 받은 사람이 할례 안 받은 이방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같이 먹으면 그것은 불법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방 사람과 같이 교제하고 같이 음식을 먹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바와 바나바와 또 바울과 여러 사람이 안디옥에서 이방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먹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할례를 주장하던 몇 사람이 안디옥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비난을 받을까봐 음식을 먹다가 안 먹은 체 하고 물러갔습니다. 베드로가 음식을 먹다가 안 먹은 체 하고 물러가니까 남은 유대 사람들도 물러갔습니다. 바나바도 저희 외식하는데 유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물러갔는가?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방할까봐 물러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먹었다”고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방할까봐, 그 비방하는 말을 안 들으려고 안 먹은 체하고 물러갔습니다. 즉 외식한 것입니다. 다른 유대 사람들도 베드로가 물러가는 것을 보고 할례 받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물러갔습니다.

이신득구(以信得救)의 진리를 세워 나가기 위해서임

이것을 바울이 보니까 큰일 났습니다. 왜 큰 일이 났는가 하면, 지금은 “할례를 안 받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세워나가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즉 “예수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할례는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된다.”는 진리를 세워나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서 할례 안 받은 사람과 같이 음식을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온 것을 보고 그 사람들의 비방이 두려워서 베드로도 물러가고, 바나바도
물러가고, 많은 유대 사람들이 물러간 것을 그대로 두면, “할례를 받아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안 받으면 안 된다, 베드로도 할례를 안 받아도 된다고 하고 무할례자들과 같이 먹다가 할례 받은 사람들이 오니까 물러가지 않았느냐?”하며 “할례를 안 받아도 구원받는다는 말은 헛되다, 할례를 받아야만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두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외딴 데 가서 베드로와 단 둘이 만나서 베드로의 잘못을 말해주면 안됩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자들이 올 때에 물러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할례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있는데, 바울이 외딴 데 가서 말해 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바른 진리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 직접 배웠고, 대사도이며 또 연로한 베드로에게 좀 미안하지만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 진리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베드로와의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고, 도덕적으로는 안 된 일이지만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진리를 세워나가지 않으면 진리가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직선적으로 바울이 베드로에게 책망을 한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란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았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안받은 자와 같이 먹었으니까 이방을 좇은 것 아닙니까? 이방에 와서 이방 사람과 같이 먹었으니까 이방을 좇았다는 말입니다.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란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먹다가 할례자들이 왔을 때에 물러갔으므로, 이방사람들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바울이 바른 책망을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임

본문 15-16절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란 바울이나 게바는 본래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이방 사람은 다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바울이 바로 말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란 할례를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할례나 무슨 다른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 사람이나 유대 사람이나 의인이 되어 다 같이 차별 없이 같이 먹다가 할례자들이 와서 물러갔으므로 죄인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할례자들이 왔어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되겠는데, 할례자들을 두려워해서 물러갔으므로 이방인과 함께 먹은 것이 죄 지은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먹으려면 “믿음으로 구원 받으니까 괜찮다”하고 끝까지 먹든지 하였어야 되겠는데,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면서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해서 물러갔으므로 죄인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죄인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방사람과 같이 먹다가 안 먹은 체 하고 물러갔으니까 이방사람들과 같이 먹은 것이 죄인으로 나타난 게 아닙니까?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먹다가 안 먹은 체 하고 물러나므로 그 행위가 죄라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한 결과가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란 예수님은 죄짓게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끝까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지, 예수님이 그 사람을 의롭게 하다가 또 죄인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게바가 잘못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는 것으로, 이방 사람과 먹던 것은 바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과 먹다가 안 먹은 체 하고 물러 간 것은 이방인과 먹은 것을 죄인으로 인정한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고, 베드로가 잘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밝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임

본문 18절에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헐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할례입니다. “할례는 안 받아도 된다, 할례는 필요 없다”고 헐어 놓았습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므로 이제는 “할례를 받음으로 의인이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라고 헐어 놓았습니다. 할례를 폐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자들이 두려워서 이방사람과 같이 먹다가 안 먹은 체 하고
물러갔으므로 다시 할례를 세운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전에 믿음으로 구원 받는 줄 알고 할례를 폐지했었는데, 이제 할례자들이 두려워서 이방사람들과 함께 먹다가 물러갔으므로 다시 할례를 세우는 것이 되었으며,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죄지은 자로 만든 것입니다. 안 물러갔으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선 사람이었겠는데, 물러갔으므로 헐었던 할례를 다시 세우는 것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범법하는 자로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습니까? 사도행전 10:1-16에서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세 번씩이나 직접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었다”고 비방할 때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 것 같이 성령이 임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후에는 베드로가 안디옥에 가서 그만 돌아앉았다는 말입니다. 안디옥에 가서 실수를 한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진리를 한번 받은 다음에 그 진리에 대해서 까딱하면 희미해지기 쉽고, 떠나기 쉽습니다. 한번 받은 진리를 끝까지 굳게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나바도 사도 바울과 같이 이 진리를 전파하고 있었는데 돌아앉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철저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과 같이 철저한 사람이 쉽지 않습니다. 한번 바른 진리를 깨달았으면 일시라도 양보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 진리만 세워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때에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망해 주는 게 복입니다. 또 자기를 책망해 주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진리 문제에 대해서 잘못 되었을 때에 책망해 주고, 바로 가르쳐 줄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로 서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직접 하나님께 계시를 받고, 또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친히 증거하고, 성령이 임하는 것도 보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에게 증거도 했지만, 그만 진리에 희미해져서 돌아앉았습니다. 우리는 비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한번 깨달은 진리는 버리지 말고, 그 진리에 굳건히 서서, 그 진리를 끝까지 세워나가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윗사람이라고 해도 진리에 대해서 바로 하지 못할 때에는 바로 하자고 권면해야 합니다. 바울과 비교하면 베드로가 윗사람 아닙니까? 바울은 베드로에 비하면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고, 그 진리를 바로 세워 나가기 위해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문제가 아닌 것은 윗사람에 대해서 순종하고, 잘 받들어 나가야 됩니다.

2.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삶

율법으로는 죽은 자임

본문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향해서 우리는 다 죽은 자 입니다. 율법으로 볼 때에는 우리가 다 죄인입니다.
율법을 다 행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율법에 정죄 받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으로 볼 때에는 우리는 다 죽은 자입니다. 즉 율법적으로는 우리가 다 죄를 범했고, 그 죄 값으로 하나님이 사형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을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는 산 자임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란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는 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율법으로는 사형 받아 죽은 자들인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벌써 예수님과 함께 사형을 받아 죽은 자이며, 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난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임

◉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 예수님의 장사는 내 장사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긴한 요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였는데, 법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죄 때문에 내가 받을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장사는 내 장사입니다.

법적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법적으로 정죄를 받아서 내가 죽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또 한 가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내가 죽은 것과 같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 함께 죽는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내가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할 때에 나는 그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나타납니다.

◉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삶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와 연합된 영적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 영혼이 엽합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라는 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사형 언도를 받아서 사형을 받은 자입니다. 누가 대신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혼을 중생을 시켜 놓았습니다. 즉 죽었던 영혼을 살려 놓고,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연합을 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고, 우리는 그 생명으로 삽니다. 이제는 무슨 생명으로 삽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 영혼을 중생시켜서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놓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삽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내 속에 역사합니다. 우리 중생한 영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제나 생명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삶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피난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산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역사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는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다 받았습니다.

또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다 받아서 산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서 산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도 영접했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도 받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사랑도 받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의 역사도 받았는데 이제는 그것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 기쁨, 위로, 능력, 지혜 등을 믿음으로 다 주셨는데 이제는 그것을 가지고 삽니다. 내가 육체가운데 살지만 육체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로 살면 반드시 다 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다 죽을 것이고, 쇠할 것이고, 썩어질 것이고,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살면 즉 믿음으로 받은 모든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 생명의 역사로 살게 되면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흐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은 육체로 살긴 살지만 육체는 멀리 떠나서,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그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함

본문 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고, 믿음으로 날마다 영혼이 소생해 올라가는 일은 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란 “만일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 예수님이 헛되이 죽은 게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어 주셨으므로, 예수 안에서 그가 주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은혜를 폐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세워나가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도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진리를 세워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게 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진리, 영혼이 자라는 진리, 믿음 안에서 날마다 넘치는 기쁨으로 사는 진리,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진리 등을 폐하지 아니하고, 세워나가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까지 진리를 세워 나간 것처럼,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진리에 어긋난 것은 받지 말고, 진리를 끝까지 세워나가는 사명감을 가지고, 진리에서 굳게 서서, 모든 것을 다 바쳐 진리를 세워나가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