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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1일 토요일

고린도전서 13:8-13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영원히 자라남.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영원히 자라남
고린도전서 13:8-13

8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13:8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들도 사라질 것이다.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질 것이다. 

13:11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였으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다. 

13:12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13: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가운데 제일 큰 것은 사랑이다.


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온전히 알게 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예언, 방언, 지식이 다 폐함

사랑이 얼마나 오래가느냐 하는 것인데, 본문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폐할 날이 옵니다. 예언은 언제 폐합니까? 예언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그 예언이 다 폐합니다. 노아 홍수가 온다고 예언했었는데, 홍수가 왔으니까 홍수가 온다는 예언은 폐하여 진 것입니다. 또, 가룟유다가 벌 받아 죽지 않았습니까? 가룟 유다가 벌 받아 죽는다는 예언은 가룟유다가 목 매어서 죽은 다음에는 그 예언이 폐하여 진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간다는 예언은 포로로 간 다음에 그 예언이 폐하여졌습니다. 그 다음에 70년 후에 돌아온다고 한 예언은, 70년 후에 돌아온 다음에는 예언이 폐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라는 것은 예언이 성취되면 폐하여 지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것을 예언해놓고 이루어졌다면, 그 예언은 폐하는 것입니다. 

또한 ‘방언도 그치고’라고 했는데, 방언이란 ‘말’이라는 말입니다. 방언의 원어가 “글로싸”인데, “글로싸”는 말, 언어라는 뜻입니다. 방언이 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보통 말이라는 뜻입니다. ‘말’도 폐할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방언도 그치고”란 말도 폐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말이 언제 폐하겠습니까? 하늘나라 갈 때에 다 폐하여집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사용하는 말을 안 씁니다.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세상의 말이 필요 없습니다. 신령한 영의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그 말은 세계 통일입니다. 세계 통일을 하는데, 하늘나라에도 지금처럼 여러 방언(외국어)이 있어서 통역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 다 폐할 날이 옵니다.
또한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였는데, 우리의 지식도 폐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지식이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우리 인간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령, 일년에 춘하추동 4절기가 있다는 지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이제 하늘나라에 가면 춘하추동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또 예배당에 가면 나무 의자를 해놓는데,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나무 의자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다 폐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폐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한복 만드는 지식, 양복 만드는 지식 등은 세상에서는 필요해도, 하늘나라에 가서는 그 지식이 다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기술자라고 하여도 기술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다 폐할 날이 옵니다. 그러면 무엇만 안 폐하여 집니까? 사랑만 안 폐하여집니다. 사랑은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고 계속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함

본문 9-11절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정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는데, 현재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또 부분적으로 예언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다 폐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령, 어떤 소경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기둥과 같다고 합니다. 또 어떤 소경은 코끼리 배를 만져보고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합니다. 소경이 코끼리를 아는데 전체를 못 보니까 부분적으로 압니다. 어떤 소경은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 다리가 굵으니까 절구통 같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코를 만져본 소경은 구렁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즉 눈이 번쩍 떠졌을 때는 온전히다 압니다. 제대로 바로 압니다.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필요합니까?
눈 뜨기 전에는 코끼리를 부분적으로 알았는데, 다 보았을 때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필요 없습니다. 전에는 절구통인 줄 알았는데 코끼리 다리였구나, 전에는 벽인 줄 알았는데 코끼리 배였구나, 전에는 구렁이 인줄 알았는데 코끼리 코였구나 하며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안 다음에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다 폐하여 진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압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폐하여 집니다. 그러면 온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재림, 구원완성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11절에 보면 장성한 다음에 폐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구원완성, 사랑완성이 온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게 된다, 또 장성한 다음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알고 말하던 것이 다 폐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혼이 장성하기 전에는 말하는 게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이제 장성해서 커진 다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온다는 것은 구원완성, 사랑완성을 말합니다. 구원완성과 사랑완성은 사람이 죽을 때에 완성됩니다.

요한일서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서 사랑이 완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거기에 두려움이 절대 없습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사랑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증거이고,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못한 증거입니다.

예수 재림하시면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온전해짐

본문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하였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그 때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 때는 온전히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가 문제인데, ‘온전한 것이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다 폐하여 진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다 이루어졌으니까 폐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세계가 이루어지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것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다 폐합니다. 온전한 게 왔기 때문입니다. 

다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에는 ‘거울 속으로 보는 것 같다’고 그랬습니다. 본문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거울 속으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아는 것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것은 확실하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은 확실한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눈이 클까 작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 예수님 재림 때에는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아, 예수님은 이렇게 생겼구나!”하고 완전히 다 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예수님 재림 때에는 온전히 다 알게 됩니다. “아, 이거구나. 주님의 이런 것은 내가 잘 몰랐었구나”하게 됩니다. 우리가 희미하게 전에는 알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확연해집니다. 또한 하늘나라가 지금은 희미합니다. ‘하늘나라가 이렇다, 저렇다’ 성경에는 말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직접 거기에 가보면 ‘아! 이걸 가지고 이야기 했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열두 보석을 기초 석으로 해놓았다고 했고, 진주 문이라고 했고, 또 바닥은 모두 정금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만 압니다. 이것은 성경을 보고 희미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가보면 ‘아, 이게 정금이로구나. 이게 진주 문이로구나’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면, 만져보고 쓸어보고 ‘아, 이걸 가지고 그랬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열두 진주와 기초석들에 대해서도 ‘이거로구나’하며 다 알게 됩니다. 이렇게 온전한 것이 오게 되어있는데, 우리가 ‘온전’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것입니다. ‘온전’을 향해서 나가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성경책이 완성된 때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책이 완성 된 다음에도 부분적으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즉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23-24절에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가서 잊어버린 자와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들여다보니까 자기 얼굴이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하지 않으니까 다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에 자기를 비추어 보면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드러납니다. 성경 말씀이 거울이므로 거울에 자기 정체를 갖다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부족하고, 뭐가 묻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내가 이면이 잘못되었구나, 이런 것이 부족하다, 내가 영안이 어둡다, 영안이 시원치 않다, 내가 아직 앉은뱅이다, 내가 혈루증 앓는 자와 같다, 내가 절름발이 신앙이다” 등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하지 않으므로 그냥 잊어버립니다. 거울은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을 알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압니다. 성경을 보고 회개하고, 방향도 정하고 나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모든 것이 환하게 보입니다.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서로 대하여 본다고 하였습니다. 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환하게 보이니까 그때는 온전하게 됩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나라에 갈 때, 또 구원완성의 세계에 들어갈 때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구원을 점점 이루어 가기 때문에 구원완성이 못됩니다. 구원을 이룬 것만큼 자라난 것이며, 자라난 것만큼 깨닫게 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희미하게 알고 나가다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환해집니다. 그 때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다 폐하여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자라난 것만큼, 자기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간 것만큼 부분적으로 알던 것을 점점 많이 알게 됩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좀더 장성하면 좀 더 밝아지고, 좀 더 장성하면 좀 더 밝아집니다. 그러나 온전함에 도달하려면 구원완성의 날, 세상 떠날 때에야 완전에 도달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합니다. 아무리 장성한 사람이라도 아직 온전한 것이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점점 자라난 만큼 밝아지고, 온전함 속에 쑥 들어갈 때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다 없어집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도시 같은 것을 보려면 산에 올라가야 잘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보면 더 잘 보입니다. 하나도 가리우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장성한 만큼, 자라난 것만큼 온전함에 도달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나라에 쑥 들어갈 때에, 즉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완성될 때에는 가리우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 이거였구나”하며 다 알게 됩니다. 

좀 자라나도 완전히 다는 모릅니다. 그저 부분적으로 압니다. 가령, “성령을 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야 된다, 행해야 된다, 힘써야 된다, 예정이다, 누구든지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등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올라가보면 그 보다 좀 더 또 훤하게 압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이 더 잘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사랑의 완성, 구원 완성의 세계에 들어갈 때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다 폐합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입니다. 사랑만 충만해서 사랑
으로만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힘을 써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해서 그 이웃을 구원해 내려고 힘을 써야 됩니다. 먼저 자기가 예수님의 사랑에 삼키워져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며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야 됩니다.

2.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날 것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신앙으로 자라날 것

이제는 ‘자라나는 것’이 나옵니다. 본문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를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장성하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깨닫는 것이 어떠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참 한심합니다.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도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점점 자라납니다.
자라나보면, “아, 이게 이거로구나.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몰랐었구나. 저건 저걸 말하는 것이로구나”하게 됩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 때가 유치해 보입니다. 즉, 처음 믿을 때, 믿음이 어릴 때, 중생한 영혼이 어릴 때에 생각하던 것과 깨닫던 것들 말하던 것들이 다 유치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나야 됩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가 점점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서 우리가 나가는 것입니다. 장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라나야 하고, 우리가 매일 매주간 매달 매년 자라나야 됩니다. 자라나지 못하는 사람은 병신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나지 못한다면 병신 아니겠습니까? 또한 자라나지 못하면 죽습니다. 못 삽니다. 장성한 사람들, 장년들도 계속 신진대사가 있어야 그 건강이 유지가 됩니다. 속에서 새 살이 나오고, 낡은 것은 닳아져 없어지고, 머리털도 새 것이 나오고, 그렇게 계속 나와야 됩니다. 손톱도 새 것이 나오고, 계속 잘라내고 또 나오고 해야 합니다. 자라나는 것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영이 자라나야 됩니다. 사랑 안에서 중생한 영혼이 자라나야 됩니다. 자라나려면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히브리서 5장을 보면 단단한 식물, 연단, 이런 것들로 자라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3절에,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환란과 시험을 이기는 신앙으로 자라날 것

연단 받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연단 받아야 자라납니다. 신앙이 연단을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지키려면 고난이 옵니다. 환난과 핍박이 오는데 그걸 이겨야 됩니다. 말씀대로 바로 믿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시험이 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오는데 그걸 이기면 연단을 받아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라나려면 시험이 올 때 이겨야 됩니다. 요새 믿는 사람들이 너무 평안하게 믿어서 문제입니다. 시험이 들어오면 이길 생각을 안 하고 시험에 넘어갑니다.
325년에 니케야공의회가 모였는데, 그 때부터 기독교는 많은 환난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리우스파하고 정통파하고 싸우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아리우스파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긴 하는데, ‘예수님은 피조물이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영혼이 없고 사람의 로고스가 들어왔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통파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해서 그 둘이 많이 싸웠는데, 아리우스파에서 이 정통파를 많이 죽였습니다.
어떤 때는 정통파 교회의 교인들을 다 잡아다가 남자들도 많이 죽이고, 여인들의 유방을 자르고 다 죽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진리, 말씀 하나 지키다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는 피조물이다”하면 사는데, “예수는 하나님이다”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정부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잡아 죽였습니까? 로마정부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할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땅굴 속으로 피하여서 그 속에서 오랫동안 숨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그 굴에서 믿었고, 거기서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많이 받고, 생명을 내놓았고, 죽을 고난을 받았지만 그들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요새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기에 비하면 너무 믿음을 못 지킵니다. 너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너무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 연단을 못 받아서 마치 온실에 있는 꽃과 같아서 툭 열어 놓으면 다 시들어지게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환난을 받아야 됩니다.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자라납니다. 자라나려면 젖이나 먹어서는 자라나지 못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됩니다. 단단한 식물은 하나님 말씀의 깊은 도리입니다. 신령한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로 배워야 됩니다.
그리고 지켜야 됩니다.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전에 것을 생각하면 유치합니다. 자라나보면 전에 어린 아이 때의 하던 것이 참 부끄러워집니다. 자라나려면 단단한 식물을 먹고, 연단을 받고, 시험을 이겨서 승리 적으로 통과해야합니다. 그래야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깊이 이루어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자라납니다.

3.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자라날 믿음, 소망, 사랑
 
본문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주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습니다! 또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소망은 예수님이 앞으로 재림할 것을 믿습니다! 또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하늘나라를 믿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재림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안 됩니다. 믿음 떨어지면 안 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야 됩니다. “바라봅니다! 지금은 이렇지만 앞으로 부활할 것을 바라봅니다. 예수님 재림할 것을 바라봅니다. 지금은 육신을 가지고 살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부활할 때에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을 바라봅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조금 있으면 하늘나라 가서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살 것을 바라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 세 가지가 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가면 이 세 가지가 다 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가 해석하기를 ‘믿음과 소망은 세상에만 있고 하늘나라에는 사랑만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은 신부와 같은데, 신부가 가마 타고 시집갈 때 소망은 앞에서 메고 가는 사람이고, 믿음은 뒤에서 메고 가는 거라고 합니다. 앞사람은 바라만 보고 가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사람은 가마 때문에 안 보이니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앞에 사람 끄는 대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간다는 것입니다. 가마가 도착한 후에 신부가 방에 들어가면, 앞에서 메던 사람과 뒤에서 메던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은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신부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말을 제가 들었는데 그게 맞습니까? 그게 맞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갈 때에 세 가지 다 갑니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다 갑니다. 하늘나라에는 세 개가 다 영원히 있습니다. 영원히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믿음은 또 뭘 하겠나? 소망은 또 뭘 하겠나?”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가도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또 그 말씀 믿고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진리의 나라입니다.
소망은 뭘 하겠습니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신데, 무한하신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고 닮아가고, 또 바라보고 닮아가고, 그리고 또 바라보고 닮아가는 것을 계속 영원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소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한이시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소망하고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이 세 가지 가운데 첫째라는 말입니다. 제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세계에서야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로 자라나가지고 가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자라나야 됩니다. 영원히 자라나야 됩니다. 자라나는 생활을 가져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