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나귀타고 상경하심
누가복음 19:28-48
누가복음 19:28-48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46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
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1.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내용입니다. 본문 30절에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그 매인 것을 왜 푸느냐고 물어 오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고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대로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가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즉시로 나귀 새끼 주인이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나귀가 귀중한 짐승으로 값이 비싸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바로 보낸 이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 그는 나귀 덕분에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했습니다. 나귀를 타고 왕의 거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나귀가 없으면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지금은 나귀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나귀 주인이 나귀를 아낌없이 단 마음으로 바쳤을 때, 그 나귀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바로 그 마음이 하늘나라에 상달이 된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주님이 필요하다”하실 때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또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하실 일을 해 나가십니다. 만일 그 사람이 나귀를 안 바쳤다고 해도, 그 나귀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또 나귀 안 바치고 살면 그가 얼
마나 잘 살았겠습니까? 바쳤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남아 있고, 또 지금 만대(萬代)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가 된 것입니다. 즉 자기의 영적 구원이 이루어졌고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으며 하늘 나라에 쌓아 놓은 것이 되었습니다.
본문 37절에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나귀를 예수님이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 이용 당하는 일,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이 나귀는 예수님을 태워 온 나귀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
습니다. 길 가에 옷을 펴서 나귀가 그 옷을 밟고 가게끔 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둘러 서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따라갔습니다. 이 나귀가 그 전에 사람 옷 위로 걸어가 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옷을 밟고 걸어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태우면 나귀라도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습니다. 실은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귀까지 대우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하게 대우 받아 귀하게 됩니다.
또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갔다는 것은 그 나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나귀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태운 일은 만국(萬國)에 처음 있는 사건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이용당한 나귀가 귀하고, 나귀를 바친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주님께 이용당한 만큼, 주를 위해서 쓰여진 만큼 하늘나라에 상급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그 만큼 도움이 된 것이며 그것이 하늘나라에 쌓여집니다.
본문 37절에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라고 하였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은 조금 경사가 졌는데, 가까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감람산은 높지 않은 산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이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오는데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을 하며 따라 왔습니다.
본문 38절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는 이 말씀은 누가복음 2:14 말씀과 비슷합니다. 2:14에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영광’은 본문 19:38의 언급과 같은 의미이며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부분은 문자적으로 다른 표현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 왕인 동시에 우주의 왕으로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모든 마귀를 다 멸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통치하실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시고 통치하시며 잘 길러 가시는 왕으로서 믿고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님은 영적 왕이자 우주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적을 멸하시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잘 통치해서 육성시켜 나가시는 그러한 왕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또 누가복음 2:14에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하였는데, ‘하늘의 평화’나 ‘땅의 평화’나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나 그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신령한 영역을 뜻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란 예수님의 구속을 입고 영적 생명으로 기뻐하는 자들을 가르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영적 생명이 살고 그 영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은 신령한 면인데, 이 신령한 면이 곧 하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평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이 말씀은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심령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가 나올 때에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본문 39절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말씀에는 돌 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사람들이 소리 지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방은 돌 감람나무라 하였고, 유대는 참 감람나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가만히 있으면 돌 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
눈이 어두워져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함
본문 41-42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신 일이 3번 나와 있습니다. 한 번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또 한번은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을 보시고 우셨으며,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또 히브리서 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42절에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네가 알았다면 망하지 않을 뻔 했는데, 평화에 관한 일을 네가 알지 못하고 눈에 숨겨졌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에서 ‘좋을 뻔 하였거니와’는 작은 글씨로 썼습니다. 성경에 작은 글씨로 쓴 것은 번역하는 사람들이 그 뜻을 해석해서 옮긴 것입니다. 원문에는 큰 글자로, “평화에 관한 일을 았았더면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이라고 하였는데, 평화에 관한 일이 무엇일까요? 평화에 관한 일은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원수가 되었는데, 원수 된 사람들을 화평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 사이를 화평케 하시며 죄 된 상황에서 건저 주시려고 이 세상에 하늘 영광을 다 내어 놓고 찾아오셨습니다. 평화하자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평화에 관한 일은 또 무엇입니까? 죄 사함 받는 길입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하나님과 막혔던 그 죄, 그로부터 사함 받는 길을 네가 알고 그 길로 가서 하나님과 평화 했다면 좋았을 것인데 이것을 못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함 받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평화 하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59:1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이라는 것은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막힌 죄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은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데,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로 예수님이 오셨는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죄가 그냥 있어서 죄 값으로 멸망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 하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것을 보여 주고 말해주어도 너희가 모르고 결국에는 망하겠기에 이에 예수님께서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셨습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숨기워졌습니까? 평화에 관한 일을 알만하게 다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전부 숨기워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게 해 놓으셨음에도 눈이 어두워져서 평화에 관한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은 멸망의 길로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왜 눈이 어두워 졌을까요? 믿지 않기 때문에 어두워 졌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중심과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 져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느냐? 이 시대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천기(天氣)의 기상은 분별하면서 너희가 이 시대를 분별하지는 못 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를 보는 눈이 가려졌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6:3에는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이 가려져서 보지도 못합니다. 또 신령한 진리를 듣는 귀가 다 어두워졌습니다. 시대를 분별할 만한 징조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고, 평화의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나아가다가는 망하게 굅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를 분별할 만한 징조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세례 요한의 운동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중요한 표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엘리야의 심정으로 왔고 또 권능으로 왔는데, 그것은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과 같은 위대한 징조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타난 것을 보고도 사람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무엇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는 눈이 가리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그런 회개 운동이 없었습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회개 운동입니다. 오랫동안 회개 운동이 없다가 세례 요한 때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를 자복하는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보면 알만 하지 않습니까? 앞서 언급한대로 세례 요한이 나타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요한 같은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또 요한의 말을 듣고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먼저 계시고 나는 그 신들메도 감당치 못한다, 그는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그 말을 듣고 분별할만 함에도 그 시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귀로 들을 줄도 모르고 마음으로 생각할 줄도 모르니 왜 이렇게 되었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 평화에 관한 것을 알라
우리는 언제든지 신령한 눈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신령한 귀가 열려서 신령한 말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신령한 눈이 열려서 그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상이 무엇입니까? 종교가 부패하고 죄악이 관영한 것입니다. 그것이 시대상입니다. 그것을 보고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소, 양, 비둘기를 파는 곳으로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가 부패하고 죄악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노아 시대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분별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느 때입니까? 우리도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도 노아의 때와 같이 죄악은 관영하고, 종교는 부패하고, 하나님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가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과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듣는 귀가 열려 평화에 관한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에 관한 것을 모르고 그저 맹목적으로, 의식적으로 나아가다가는 결국 예루살렘 성의 멸망당할 사람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심으로 심령의 평화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영적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더불어 화평하며, 죄 사람을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언제나 하나님과 화평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실현되어 나가야 합니다. 영이 사는 평화의 세계에서 말씀이 실현되어 나가야만 온전히 바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바로 보고, 진리에 대해서 바로 듣고, 시대의 죄악과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멸망함
본문 43-44절에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즉 평화의 관한 일을 알고, 날마다 권고를 받아서 회개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고, 점점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으로 깊은 교통을 하며, 그로부터 날마다 더욱 더 많이 평화를 얻어 나가는 생활, 또 하나님과 평화 하는 동시에 사람과 평화 하는 생활, 이것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망한다는 뜻입니다. 원수가 너를 둘러싸고 어떻게 한다고 하였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지만 죄 값으로 망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여 다 무너지고, 과거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 사람들을 앞으로 원수가 와서 죽인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돌로 다 메어쳐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눈으로 이러한 상황을 다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눈으로 성의 죄악상과 앞으로 임할 심판, 그리고 평화에 관한 일을 보시고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망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 평화에 관한 일 모두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 세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가 노아의 때와 같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하고, 또 종교는 타락 되어서 의식주의와 물질주의로 기울어 진 것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타락된 교회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평화에 관한 것과 심판에 대한 것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다 보셨습니다. 어느 시대나 죄악이 들어차면 심판이 옵니다. 죄악의 결과는 멸망이므로 반드시 망합니다. 공자(孔子)도 “죄악이 들어차면 하나님이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원리적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원리적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이치와 순리를 말하는 것으로, 공자는 과거 어느 시대에나 죄가 들어차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죄악이 들어차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입니다. 노아 시대에 죄악이 들어찼기 때문에 그 사회가 망했고, 소돔 고모라도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말세에도 죄악이 관영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심판은 죄 때문에 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온 것입니다. 죄악이 들어차면 공산주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차고 넘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공산주의 사상을 보내어 죄를 때려 부수십니다. 공산주의가 한 번 점령하게 되면 그 사회는 더욱 고통스럽고, 괴롭고, 말 한마디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자유가 없는 사회가 됩니다. 생활은 점점 더 곤란해집니다. 실제 지금 공산주의 사회를 보면 경제적으로 어렵고 여러 면에서 얼마나 곤란합니까? 북한과 남한을 보아도 처음 해방 때에는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했는데, 오늘날 얼마나 차이가 많습니까? 또 월남, 동독과 서독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가만히 두어도 점점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내보내셨기 때문에 그 도구로 사용하시고, 후에 공산주의 자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말세입니다.
죄악이 들어차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처럼 ‘죄의 대가로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나 죄악이 들어차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서울에 고층 건물이 많이 올라갔지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질 날이 오고, 사람들이 아무리 많지만 다 죽는 날이 옵니다. 그런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공산주의를 끌어 들이고, 멸망으로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바로 서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는 사람이 없으면 다 망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평화에 관한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패한 종교사와 평화에 관한 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생명을 살려 나가시는 역사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살아있는 생명 운동을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권고를 받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이
는 권고받는 날을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였는데, 권고를 받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지나가면 권고 받지 못합니다. 정해진 기간이 있는데, 그 기간에 권고를 받으면 하나님의 긍휼의 팔이 임해서 건짐을 얻지만, 권고 받는 기간에 권고를 받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 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권고 받는 기간에 권고를 받아서 부지런히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회개의 권고를 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찾아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를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한 죄,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한 죄를 전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기주의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이용당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으로부터 권고를 받아서 그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에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권고 받아 하나님 앞에 매일 충성하고,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몸 바쳐서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권고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할 때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에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야 하며, 나귀를 바쳐라, 할 때에는 나귀를 바쳐야 하고, 독자를 바쳐라, 할 때에는 독자를 바쳐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적극적인 권고가 있습니다. “네 몸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하실 때에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그 정도로 권고를 잘 받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잘 이루어져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성전을 정결케 하심
본문 45절에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며 순전히 주님만 섬기는 장소가 소나 양, 비둘기를 팔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나아가 출세를 꾀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용인에 있는 어느 기도원에서 사람 다섯 명이 비정상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전에 죽어 나간 사람들과 합하면 이곳에서 족히 삼십 명 가량은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기도원이 사람 죽이는 곳이다”라고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왜 기도원에서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정신질환자나 마귀 들린 사람들을 위하여 순수하게 기도해 주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영리적으로, 즉 돈을 벌 목적으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병이 낫지 않으니 막대기로 때려서 마귀를 내쫓는다고 하다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돈 벌 목적으로 사람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막대기로 때려서 마귀를 내쫓는다고 하면 마귀가 막대기한테 혼이나 나겠습니까? 그러다 여러 사람을 죽이고 결국 다른 모든 기도원도 수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기도원에 환난이 한 번 올 것 같습니다. 때려서 사람이 죽으면 한 달에 얼마씩 받고 무조건 파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강도의 굴혈과 같습니다. 지금 종교가 돈 버는 것에 눈이 다 팔려 이만큼 부패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무슨 기관, 무슨 사업 하면서 이제 사람을 다 죽이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피해가 막심하게 가게 되고, 이에 참된 종교들도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안 믿는 사회에서 보면 기도원, 하면 사람 죽이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기도원 가겠다,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못 가게 할지도 모릅니다. 안 믿는 식구가 있으면 요새 기도원은 사람 죽이는 곳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쉬우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원은 기도 하는 곳이지 때리는 곳이 아니다”라고 잘 이야기 해주십시오.
안수 기도 한다고 때려서 병 고치는 곳도 있습니다. 삼각산 임마누엘 기도원에 가면 전진이라는 전도부인이 있는데 때려서 병을 낫게 한다는 것입니다. 박신원 목사가 간암이 들렸는데 그 기도원에 갔다가 매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성경 말씀대로 영리적 강도의 굴혈이 되어서 이권 문제와 의식주의, 그리고 교권주의로 기울어졌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파는 것을 다 내어 쫓으시고 정결케 하시며 기도하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