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문답, 큰 계명,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마태복음 22:23-46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마태복음 22:23-46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1. 부활에 대한 문답 (23-33)
사두개인들이 부활 문제를 물음
부활 문제에 대해서 사두개인들이 물어본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본문 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는데, 구약에 그렇게 나왔습니다. 신명기 25 :5절에,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후사를 세우기 위해서 맏형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여자를 둘째에게 준다는 말입니다. 동생이 아들을 낳으면 처음 것은 형에게 주고 그 다음은 자기 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얻었다가 자녀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 여자를 둘째 동생이 취했습니다. 둘째도 자녀가 없이 죽고 셋째가 취하고, 이렇게 일곱째까지 한 여자를 일곱
사람이 아내를 삼았었는데, ‘부활 때에는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하고물어봤다는 말입니다. 누가 물어보기를 ‘후사 세우는 일이 무슨 뜻인가?’ 물어봅니다. 여기 맏아들이 아내를 얻었다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둘째가 그 여자하고 살아서 첫 번째 나은 것은 형을 주고, 형의 후사를 내어 주고나면 그 다음은 자기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계대 계승법, 후사법이 있었는데 요새는 그런 법을 안 합니다. 요새는 영적인 후사, 믿음의 후사를 가르칩니다. 믿음의 아들, 믿음의 후사를 계승하는 것 가르치고, 본문에 나오는 것은 구약시대의 의식과 제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법을 했었던 것이고, 신약 시대에는 신령하고 진정한 진리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금은 즉 말하면 믿음의 계대가 계승해 내려가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부활 때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사두개파는 부활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3:8에,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사두개 교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했고 바리새교인들은 다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또 영도 믿지 않고, 그러나 바리새교인들은 다 믿습니다. 사두개 교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부활할 때 일곱 사람이 한 여자를 취했는데 ‘부활 때는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하고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함
본문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이 왜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까? 왜 믿지 못하는가 하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활을 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성경에 ‘부활이 있다’고 했으니까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겠습니까? 다 썩어지고 화장해서 없어졌는데 말입니다. 성경에 살아난다고 했으니까 살아날 줄로 믿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내실 줄을 믿는 것입니다. 죽어서 다 썩어졌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낸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살아난다고 했으니까 살아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장례할 때에 ‘앞으로 살아난다’ 하면서 장례를 치르십시오. 세상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신랑과 같이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너는 먼저 신랑과 같이 살러 가라.’ ‘너는 먼저 아버지 집에 먼저 가라. 난 조금 있다가 간다.’ 가는 사람은 ‘나 먼저 갈 테니 뒤에 오너라’, ‘잘 가라’, ‘잘 있어라’, 그렇게 장례하십시오.
어떻게 살아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다 죽어서 원소로 돌아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서 다시 부활한 몸으로 살려낼 것을 ‘믿습니다!’ 하면서 장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살아난다고 했으니까 부활을 믿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낼 줄로 믿어야 합니다. 이 부활 신앙이 중요한 신앙입니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하나님
본문 30-32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6 상반에,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애굽기에 있는 성경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무슨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데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고 산 자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사람도 산 자와 같이 살지, 죽은 자와 같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산 하나님이기 때문에, 산 자와 같이 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아브라함과 같이 산다는 말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이삭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서 이삭과 같이 사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이 하늘나라에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야곱과 같이 사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8:11에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앉아 있습니다. 하늘나라 가서 앉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와서 살아있습니다. 앉아서 하나님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세상 떠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사시는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죽어 없어진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죽은 자와 같이 살지 않고 산 자와 같이 살듯이, 하나님께서는 산 자와 같이 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은 떠났지만, 지금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아있습니다. 살아서 하나님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또 이삭은요? 이삭은 세상 떠났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살아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 때에 기록을 했는데, 아브라함은 모세의 오백 년 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주전 이천 년 전 사람이고, 모세는 주전 천오백 년 전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3:6의 기록의 말씀이, ‘오백 년 전에 살아 있던 아브라함이 지금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같이 사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살다가 죽었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 사람들은 지금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가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강대석 목사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가서 누구와 살까요?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또 조치훈 목사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한순천 목사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또 김성결 목사도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김학조 장로 하나님과 같이 가서 사는 것입니다. 홍풍환 장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는 것이 나을까요? 거기 가서 사는 것이 나을까요? 거기서 사는 것이 낫습니다. 여기는 지금 환난, 풍파, 괴로움이 많고 고통이 많은 세상인데 다 벗어놓고 가서, 아무 고통 없고, 환난 없는, 영광이 충만한 낙원에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겁니까?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이제 또 누구 살려고 갈사람 있어요? 살려고 갈사람 있으면 가십시오. 여기 교회에서 증명서 해줄 것이니까 가서 사십시오. 살려고 가는 것입니다. 죽으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 떠난 사람.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산 세계이지, 하늘나라는 죽은 세계가 아닙니다.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영원히 영생복락을 누리는 산 세계로,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다 인도하십니다.
쌓아 놓은 대로 하늘에서 받음
이 세상에서 한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라났으면 자라난 대로 가는 것입니다. 열 달란트 남긴 사람은 열 달란트가 가서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열 므나 남긴 사람은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해라. 다섯 므나 남긴 사람은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해라. 세상에서 한 것 거기서 다 받습니다. 보화를 하늘에 쌓으면 하늘에 그 보화가 다 있습니다. 거기는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영원히 사는 곳에 쌓아 놓고 가십시오. 거기에 쌓아 놓고 가십시오.
처녀들이 시집가게 되어 시집갈 날짜가 가까워 오면, 하나씩, 하나씩 싼다고 합니다. 검사 잘하지 않으면 다 잃어버립니다. 자기 어머니 것이나 집안에 있는 것 몰래 싸 두었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거 왜싸 놓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좀 있으면 가야 하는데, 이대로 간 후에 다시 오면 어머니가 안 줄 테니까. 그러니까 가기 전에 뒤에다 싸 두었다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처녀만도 못합니다.
우리도 곧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데 가기 전에 가서 쓸 것들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하러 두고 가겠습니까? 다 싸가지고 갈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가서 살려고 가는데 뭘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까? 여기 쌓아둔 것은 다 없어집니다. 그 나라에 가지고 간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라도 더 가지고 가려고 하고, 더 하려고 애를 쓰고, 더 쌓으려고 하고, 더 자라나려고 하고, 더 남기려고 하고 하면, 거기 가면 다 남아 있습니다.
마태복음 5:19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하늘나라에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천국에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라나면 자라난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못 자라나면 못 자라난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이 짧은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 판결이 납니다. 또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 놨으면 거기 가면 그 보물 다 있습니다. 땅에다 쌓아 놓은 것은 다 없어집니다.
누가복음 12:16-21에,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농사 잘 되서 여러 해 쓰고 먹을 것을 수확을 잘 거뒀는데 쌓을 곳이 없으니까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거기 쌓아놨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이르기를 영혼아 여러 해 쓸 것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는 하늘에서 부요치 못합니다. 세상에서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대하여서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쌓아두었으면 하늘나라에 가면 부요할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하늘에 보화가 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다 버리고 따라가는 자가 하늘에서 부요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9:21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에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미련퉁이는 세상에만 쌓으려고 자꾸 노력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라도 하늘에 쌓고 가려고, ‘이것도 하늘에 쌓아야겠다.’ 또, 좀 생기면, ‘이것도 하늘에 쌓아야겠다.’ 또, 좀 생기면, ‘이것도 하늘에 쌓고 가야겠다.’ 하늘에 다 쌓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면 다 남아있습니다.
하늘나라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같이 살아서 하나님과 사는 것이고, 이삭과 야곱도 살고, 거기 모든 앞서간 성도들이 다 살아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앞서간 성도들 살아서 만납니다. 거기 가면 ‘살아생전에 만나는 것’입니다. ‘살아 생전’ 입니다. 이제 앞서간 성도들, 살아서 만나는 것입니다. 다 만납니다. 천당 간 성도는 다 만나는 것입니다. 아담도 만나고, 노아도 만나고, 에녹도 만나고, 나귀 바친 사람도 만나고, 마가 요한의 어머니도 만나고, 다 만나는 것입니다. 다 만나는데, 부요해서 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위해 하늘에 쌓아두면 하늘에 보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놓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 가면 부요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연보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연보하라고 하는 말씀은, 또 쌓으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으십시오. 또 쌓자. 또 쌓자. 세 번, 네 번, 다섯 번. 다 올라가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쓴 것만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쓴 것,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지 하늘나라에 쌓아 둔 것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자라난 대로 하늘에서 받음
그 다음에 자라나야 됩니다. 자라나고 간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는 큰 자가 됩니다. 자라난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랑과 동행하려면 비슷해야지, 허리 아래에서 달싹 달싹 하는 것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그래도 좀 비슷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라나지 못해서 어린 아이 같으면 허리만큼도 자라지 못하면 어떻게 다니겠습니까?
자라나서 어느 정도 커야합니다. 자라나서 하나님과 같이 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서 아브라함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자라나서 가는 사람이 복이 있고 하늘나라에 많이 쌓아 놓고 간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복인 것입니다. 연보하라는 것도 하늘나라에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인 줄 아십시오.
이민이라도 가려고 하면 잘 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잘 살라고 하면서, 또 잘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의 이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이민은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고,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길에 아스팔트 같은 것이 없습니다. 전부 금입니다. 금! 전부 황금 길입니다. 문은 진주고, 기초석은 보석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 하늘나라에서 척척 걸어 다닙니다. 찬송가에서 나오는 것처럼 척척 걸어 다닙니다.
찬송가 231:4에 “영화롭게 시온성문 ’척척 걸어 다닐 때‘(주: 필자가 바꿔 부른 것) ……” 을 함께 불러 봅시다. 먼저 들어간 사람은 황금 길을 ‘척척’ 걸어 다닙니다. 우리도 이제 좀 있다가 들어가면 척척 걸어 다니게 됩니다.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니까, 앞서간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고 우리도 조금 있으면 가서 하나님과 같이 살겠고, 영원히 살게 될 텐데 세상에서 만들어진 대로 되는 것입니다.
쌓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라는 대로 가는 것이고, 쌓아 놓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보화도 하늘에 쌓아 놓은 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늘나라에 쌓아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안 쌓아두면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이고 쌓아 놓으면 거기 남는 것입니다. 세상에 쌓아 둔 것은 다 좀이 먹고 도둑맞게 되고 동록이 슬고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쌓아 두어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늘나라에 쌓아 둔 것
은 절대로 안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에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고, 또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을 어떻게 믿는다고 했습니까? 성경에 부활한다고 했으니까 믿으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 낼 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없는 데에서 있게 하는데, 죽어서 다 없어졌다고 해도, 원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도 없는 데에서도 만드셨는데 말입니다.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부활 신앙, 하늘나라에 아브라함과 야곱과 살아있는 모든 성도들, 또 들어가서 척척 걸어 다니는 신앙, 또 쌓아 놓은 대로 가서 받는 것, 자라난 대로 가서 나타나는 것, 이만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이 중요한 것입니다.
2. 큰 계명에 대한 문답 (34-40)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34-40절에,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율법사가 하나 나왔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잘 아는 율법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28-34에, “서기관 한 사람이 저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도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서기관 중 하나가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 물어봤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물어보니까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네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라”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제일 큰 계명
마가복음 12:30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 제일 큰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계명이 크다고 하십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가 그렇게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목숨까지 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까지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것입니다.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가복음 12:32에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서기관이 많이 깨달았습니다. 많이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시니까 ‘옳소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3에,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번제), 소나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그 제물 전체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 가깝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는 것,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어느 정도 바로 깨달았으니까 많이 깨달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깨달으면 예수 믿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율법을 배웠지만 율법주의에 속하지 아니하고, 율법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더 찾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제사 드리는 것보단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모든 번제물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니까, 많이 깨달은 것 아니겠습니까? 율법을 자꾸 깨달아 나가면, 마지막에 예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표면적 진리, 율법을 말하는데, 이것은 십계명과 같이 표면적으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는 것이고, 이면적 진리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면적 진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소나 양을 잡아서 제사 하는 것은 표면적 진리이고, 이면적 진리는 그리스도가 와서 피 흘려 구속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는 것은 표면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면적 진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말씀을 지키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서도 믿으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이면적 진리는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3.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41-46)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본문 41-46절에,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
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하시니까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늘 배워서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느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 다윗이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이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시편 110편 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했는데, 여호와(하나님)께서 내 주(그리스도)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윗이 왜 그리스도를 주라고 했을까요? ‘내 주께서’라고 말하는 것은 ‘다윗의 주’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인데 왜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원수를 발아래 둔다는 것은 완전 정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를 완전 정복하기까지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고 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완전정복 하십니다. 완전 정복해서, 모든 원수를 발아래 밟고 최후에 승리하고, 최후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악한 세력은 다, 발로 밟히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계 통일을 하는 것입니다. 완성됩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나라가 계속 확장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말뚝을 깊게 박고 천막을 길게 치라고 했습니다. 계속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간다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전부다 정복이 됩니다. 전부 다 정복 되가지고 원수가 발아래 다 밟힐 날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슬람권에서 날고뛰지만 얼마 안 있으면 다 예수님 발아래 밟힐 날이 오게 됩니다.
이슬람교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알라라는 신이 하나님이라 합니다. 또 아브라함과 이삭 다 믿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안 믿습니다. 요한1서에 보면 아들을 부인하는 영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니까 그것은 다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슬람도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니까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요한 1서 4:3에,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 난 것이 아닌데,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를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심판 받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발에 다 밟히고 맙니다. 이 세상이 다 하나님의 세계인데 하나님이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테러하고 훈련시키고 해도, 얼마 안 되서 발등상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그러면 성경에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또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그 사람들이 답변할 수 있을까요? 한마다도 답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안 것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 한 것은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갈라놓지 못해서 이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의 신성은 ‘다윗의 주’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갈라놓지 못하면, 흑암 속에 빠지고,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게 되고, 꽉 막히는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갈라놓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을 갈라놓아야 합니다. 영의 목숨, 육의 목숨 둘입니다.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면 얻는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육의 목숨, 잃는다는 것은 영의 목숨.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내놓고 따라가면 영의 목숨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갈라놓아야 합니다.
육의 양식이 아닌 영의 양식을 먹이라
교회에서 영의 사람을 길러 나가야 합니다. 육의 사람을 기르면 안 됩니다. 육신을 즐겁게 하고, 육신 중심이고, 먹자주의(주: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함)이고, 사람 모으는 것 위주로 하고, 진리를 세워 나가는 데 등한히 하고, 육신적으로 오락하고 친목하고 나가면, 육의 사람의 교회입니다. 성전이 풀밭이 됩니다. 육의 사람 중심으로, 육의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해 나가니까, 성전이 풀밭이 되었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교회는 영이 살아야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중생한 영이 살아야 합니다. 육은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하셨는데, 교회에 나가면 영이 살 줄로 알고 계십시오.
영이 살고, 영적 역사가 있고, 영적 생명이 있고, 생명의 힘이 나고, 생명이 자라나고, 영의 양식을 먹고, 양식도 둘입니다.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있습니다. 신령한 성경말씀, 신령한 뜻, 성경의 신령한 참뜻은 영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귀에 즐겁게 하고, 육신의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잘 된다고 하고 하는 것들은, 육의 양식입니다. 사람들이 다 육신 중심으로 나가기 때문에 육신의 양식을 먹여주면 좋아합니다. 교훈도 육의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 귀에 즐거운 말, 자기가 복 받는다는 말, 잘 된다는 말, 이것들이 전부 다 육의 양식입니다. 영의 양식이 아닙니다. 거짓말 보태서 ‘잘 된다, 잘 된다’, 육신을 즐겁게 하고, 육신 중심이고 육신 잘 된다고 하고, 육신에 복 받는다고 하는 것들이 육의 양식이고, 영의 양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영의 양식은 ‘영이 살아야 한다, 생명 길 걸어야 한다, 낮아져서도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도 영의 양식을 주는 교회가 있고, 육의 양식을 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육의 양식이라는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위를 맞추고, 안 믿는 사람이 들어와도 참 잘한다고 하고, 믿음 없는 사람이 들어도, 목사가 책 참 많이 봤고, 공부 많이 했고, 참 아주 잘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양식입니까? 그것이 육의 양식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은 안 믿는 사람은 모릅니다. 이것은 귀가 열린 사람만 알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이 잘 모릅니다. 귀가 열린 사람에게 이 신령한 양식을 먹여 줘야 영이 삽니다. 영이 사는 것이 목적이지 않습니까? 영이 살고 자라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라나서 하나님께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영이 사는 양식을 언제나 먹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이 사는 양식은 참 진리인데 어떻게 하면 그 양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육의 양식 먹여주는 사람은 ‘잘 된다, 잘 된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복 받는다’ 이런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3:16-17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육의 양식입니다. ‘평안하다, 재앙이 너에게 임하지 않는다, 복을 받는다, 좋은 말, 좋으신 하나님, 위로하는 말, 평안하다’는 말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선지자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은, 책 보고 안 것 같은
것들로 인간적인 마음에서 깨달아진 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으로 생각하는 정도의 깨달음은 안 믿는 사람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의 양식은 거기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신령한 양식을 얻어라
예레미야 23:18-22에,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하루도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만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고 했는데,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야만 그 신령한 양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발견했을 텐데 참여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나오고 자기 생각에서 나오고 지식에서 얻은 것은 들으면 그럴 듯 하고 ‘잘 한다, 근사하다’ 하지만 영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긴 잘해서 듣기는 좋은데 복을 받는다고는 하는데 영이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이 참 잘한다고 그럽니다. 참 잘한다고 하더랍니다. 책도 보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라서, 지식적으로 잘 알아서 잘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와 보니까 심령은 텅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영은 먹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식 얻어서 오는 것이지 영의 배가 부르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저것 갖다 붙여서 복잡하게만 만들어 놓습니다.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는 않고, 연구한답시고 이것저것 갖다 붙여서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알지 못하게 만들고, 영에서 더 멀어지게 합니다.
영의 양식을 얻으려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야 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듣겠는가?” ‘누가 귀를 기울여 그 여호와의 회의의 말씀을 알아 들어가지고 나가서 고하겠는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다는 것 무었을 말하는 것일까요? 신령한 골방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은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만난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회의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영적 교통. 교역자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기도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교통이 되고, ‘영이 깨닫는 것’이 ‘영의 양식’입니다. 영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지는 않고, 책이나 이것저것 봐가지고 귀에 즐거운 말이나 하고, 영의 양식이 있어야 하는데, 교인들이 늘 굶고 돌아갑니다. 영이 굶고 돌아가게 되어 힘을 못 씁니다. 자라나지 못합니다. 영의 양식을 먹어야 힘을 쓰고 자라나갈 텐데 그
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영의 양식 먹지 못하고 굶으며 다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첫째로, 교역자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도원,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기도 많이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원 주신 것입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특별히 산에 기도하러 갈 때도 있는데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밀하고 세미한 음성, 하나님과의 교제, 은밀한 교통, 자기의 심령이 깨닫고 영이 깨달아지는 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영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자기 심령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배우는 것이 첫째고, 그 다음에 읽어야하고, 그 다음에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야하고,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의 양식입니다. 그것을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힘이 납니다. 힘이 나고 자라납니다. 생명이 소생해 올라옵니다. 분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이 무엇인지 분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내적 감동과 외적 감동을 분별하라
성령의 감동도 두 가지입니다. 내적 감동과 외적 감동이 있습니다. 육신의 감정적인 감동이 있고, 영의 감동의 두 가지 외부적 감동과 내적 감동이 있습니다. 육신의 감정적인 감동은 육의 세계입니다.
신비주의는 감동이 크지만 그것은 육신의 감정적 감동입니다. 육신의 감정적 감동도 큽니다. 눈물 흘리고 다 바치고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감동입니다. 신비주의자들도 영적 감동이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외부적인 감동입니다. 외부적인 감동이 빨리 됩니다. 그리고 육신의 감동을 섞어 놨으니까 아주 잘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감동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감동이 중요합니다.
말죽거리에 영도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영도 기도원 뒷산으로 기도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에서 저녁마다 집회를 한다고 하기에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참여했었습니다. 가봤더니 여간 열광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뼉까지 쳐가면서 여간 열심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주도에서까지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열광적으로 엄청나게 하는데, 영혼은 까딱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부적인 역사가 아니라 외적 역사입니다. 외부적 감동 아무리 받아도, 그것은 생명체가 아닙니다. 생명체는 영이 살아나고, 영이 자라나야 합니다. 아무리 외부적으로 열심히 하고, 힘을 얻고, 태산이 갈라지고, 뜨끈뜨끈하고,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고 하지만, 그것은 다 외부적인 감동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외부적 감동입니다. 또 지진이 났습니다. 외부적 감동입니다. 불이 지나갔습니다. 외부적 감동입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기는 하셨지만 거기 계신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바람, 불, 지진, 세 번 다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라’라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외부적인 감동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몇 십 년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국엔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 몇 십 년을 그렇게 해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다 지나간 다음에 세미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 감동입니다.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심령 속 깊은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동이 되고 영의 감동이 되고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심령 속 깊은 가운데서, 가느다란 감동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들으니까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그 다음에 나가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후계자가 되게 했습니다. 세미한 음성을 우리가 듣고, 영의 양식을 먹고 자라나고, 그 다음에 나가서 하나님의 일을 바로하고, 후계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종을 길러내고, 후대에 엘리야 운동을 엘리사에게 전해주고, 엘리사 운동을 그 다음에 전해줘서 후대에 영적생명운동이 계승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고 다윗의 자손만 알고 있다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신성과 인성. 또 영의 감동과 육의 감동. 영의 감동도 내적 감동과 외적 감동으로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신령한 양식을 찾는다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회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공부하고 연구해서 하는 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사람, 깨달은 사람, 이 말씀이 생명을 살리고, 자라나고 하나님의 일이 건설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