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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8일 토요일

아가 4:1-16 일어나 같이 가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일어나 같이 가자
아가 4:1-16

1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2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6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 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9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1.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

본문 1-2절에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의 말인데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를 이렇게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외모는 게달의 장막 같고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포도원을 지켜야 했지만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느라고 포도원을 잘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어여쁘고 어여쁘게 보시며 귀하게 보십니다. 믿음 쓰는 것을 보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육십 명 가운데 포함되어 하나님의 연을 옹위해나가는 것을 보시고, 기둥을 세워나가는 것을 보시고, 칼을 차고 싸우며 나가는 것을 어여쁘게 보십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너울은 면사포를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 때부터 썼는데 이것을 쓰는 이유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네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은 눈의 영안이 떠서 영의 세계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비둘기의 눈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 있으면 예수님이 아주 아름답게 보아주십니다. 영안이 밝아서 영적 면을 다 분별하고 신령한 세계를 향해 나가는 것을 보면 아주 귀한 것입니다.

‘머리털’은 권세 아래 있는 것을 말하는데,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권세 아래 있어서 잘 받들어나가고 순종하면 길르앗 기슭에 누운 염소와 같이 아름답다는 것 입니다. 교역자들도 권세 아래, 제도 아래에서 윗사람을 잘 받들어 나가고 그 제도를 잘 받들어 나가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귀한 자가 됩니다. 순종을 잘하고 머리를 잘 받들어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가 권세 아래서 머리를 잘 받들고 순종을 잘해나가는 것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성도의 이’, 치아는 말씀을 씹어 먹는 이를 말하는데, 단단한 식물을 잘 먹고 새김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단단한 식물을 잘 씹고 되새겨서 그것을 생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 기도를 했지만 그대로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되새기라는 말입니다. 육십 명 가운데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 하고 기둥을 세워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일을 잘해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말씀을 받은 후에는 씹어서 새김질을 해야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기도할 때에 말씀을 새김질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배운 말씀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바로 서는 생활을 해야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라는 말씀은 윗니와 아랫니가 잘 맞추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잘 씹어서 새김질하고 잘 소화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새김질하는 성도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본문 3절에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성도의 입술과 입과 뺨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대하여 증거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입술과 입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히 13:15).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감격하여 입술로 찬송하며 증거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므로, 입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힘써 복음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세상 떠나고 나면 한마디도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너울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석류 한쪽은 붉은 빛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성도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자리에서 구속의 은혜가 얼굴에 넘치는 성도가 주님 보시기에 이감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영적 생활을 하는 자는 심령이 평안하고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같이 광채가 납니다.

본문 4절에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의 목이 망대 같다고 하였는데, 망대 중에서도 원수를 이긴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가 달린 견고한 망대와 같습니다. 목이 망대와 같다는 것은 진리를 어기는 일에 목을 굽히지 아니하며 또 진리의 말씀을 굳게 세워나간 것을 말하는데,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나가는 견고한 성도의 목은 일천 방패가 달린 다윗의 망대와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목은 꺾여도 심령의 목은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 목을 굽히는 것은 개의 목과 같습니다(사66:3). 불의한 일에 머리를 숙이고 진리와 신앙양심을 양보하는 것은 꺾여진 개의 목과 같아서 하나님 앞아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술람미 여자와 같은 목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지켜나가시며 세워 나가십니다. 또한 술람미 여자의 목은 멍에를 잘 메는 목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잘 메는 목이 아름다운 목입니다.

본문 5절에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새끼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두 유방은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한 말씀과 같이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라고 하였습니다. 흉배라는 것은 가슴에 붙이는 것인데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므로 의의 흉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믿음과 사랑, 의와 사랑을 앞세우고 나가라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성도가 가는 곳에는 의와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의와 믿음, 사랑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성경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믿어야 옳은지를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은 용납하지 말고 남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만드는 일도 없도록 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끝까지 용서하고 전면에 옳은 진리를 내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유방의 다른 의미는 성도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와 같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나타나고 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주 아름답게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고 하였습니다. ‘날이 기울었다’는 것은 말세를 말하고, ‘그림자가 간다’는 것은 종말이 왔다는 뜻입니다. 말세가 되어서 날이 다 기울어지고 종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성도는 순교를 각오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몰약 산은 순교의 산이고 유향의 산도 향기로운 죽음의 산을 말합니다. 순교를 당하는 것은 제일 큰 복인데, 순교를 당하지 못하더라고 ‘몰약의 작은 산이라도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각오로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8-1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순교 당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교를 당하며 가는 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운 바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몰약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순교를 당하지 못해도 성도는 유향의 작은 산에라도 가야 합니다. 즉 죽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향기로운 죽음을 하라는 것입니다. 순교 당하는 것이 제일 큰 복이고, 순교를 당하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에 향기를 날리며 죽어야 합니다.

2. 일어나 같이 가자

레바논을 떠나 함께 가자

본문 7절에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게 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허물을 대속해주시고 아무 흠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허물이 많지만 예수님께서 피를 뿌리셔서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고 사랑하시므로 아무 흠이 없게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순전히 어여삐 여기시고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독생자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성도이므로 외모로 보면 아무 보잘 것이 없지만 믿음을 보시고 진정으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가 1장 5-6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게달의 장막이 컴컴하고 아무 보잘 것이 없는 것처럼, 외모는 아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에 솔로몬의 휘장 같이 호화찬란하며 빛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해졌어도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아주십니다.

본문 8절에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고 하였습니다. 레바논은 술람미 여자의 고향인데 ‘나의 신부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성도야’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편 45편 10-11절에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레바논에 있는 네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기 백성, 자기 집을 다 버리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분만 바라보고, 예수님 한분만 사랑하고, 예수님 한분만 위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은 다 잊게 되는 것입니다. 룻이 “어머니의 백성, 어머니의 나라가 나의 나라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자기 백성을 생각하는 것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기 지방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난 생각이고 자기 지방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난 것임을 자기 스스로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육신의 나라를 떠나지 못하면 하늘의 나라를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에게 고향인 레바논을 떠나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향에 연연하지 말고 고향을 깨끗이 떠나 예수님과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고향이 우리 고향이 되고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나라가 되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가고 예수님의 백성이 우리 백성이 됩니다. 과거에는 레바논이 자기 고향이고 자기 집이고 거기서 살았지만 다 떠났습니다. 친척과 아비 집 등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는 곳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병나는 사람들을 보면 근심걱정 불만, 두려움으로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병이 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운한 것, 섭섭한 것, 원수 맺는 것, 과거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병이 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집사가 집을 사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것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원통하게 생각하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 목사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고생을 많이 하다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걱정할 것 없이 이미 떠난 사람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돈도 떼인 것이 있다면 잊어버려야 하며, 그러지 못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꾸 속상해 하고 한탄해 하면 병이 납니다.
또 어떤 집사는 다른 사람들과 도박을 하다가 다 떼였던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 얼마나 근심 걱정을 하고 속을 태웠는지 병이 났는데도 계속 그 사람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도 그 생각만 자꾸 하여서 이제부터는 그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것 없이도 집도 있고 먹을 것이 있으니 다 잊어버리라고 하였더니, 이제는 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또 그 이야기를 하여 안 하겠다더니 왜 또 하느냐고 해도 계속 그렇게 염려하다가 결국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다 잊어버리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잊어버리십시오. 동대문시장 나가서 소매치기 당한 줄 알고 싹 다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근심한다고 해서 누가 가져다주겠습니까?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는 것도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 잊어버린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잘 잊어버리는 것이 복인 줄 알고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으로만 나가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또 잘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만 따라가면 됩니다.

이기선 목사님께서 과거에 잘한 것을 생각하면 교만해지고 과거의 잘못한 것을 생각하면 낙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잘못한 것을 회개하며 이제부터는 어린아이처럼 새 출발을 하면 됩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
면 주님께서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며 건져주십니다. 걱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생활로 레바논에서 완전히 떠나는 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고향, 같은 지방 사람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고향 사람이다. 우리지방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은 다 레바논에서 떠나지 못한 생활들입니다. 그러므로 싹 떠나야 됩니다. 떠나지 못하고 말뚝을 박아 놓고 자기 고향 사람만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다 떠나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나가는 것이 레바논을 떠나서 가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으로 가자 예수님께서 레바논을 떠나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길은 헤르몬 꼭대기, 스닐 꼭대기, 산꼭대기로 가는 길, 또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어서 잡아먹는 짐승도 있는 험한 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환난과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며 환난의 길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산꼭대기로 가는데 힘들고 가다가 사자굴이나 표범산이 있어서 잡혀 먹힐 염려도 있어서 가다가 ‘나는 힘들어서 산 아래로 내려가 평탄한길로 가겠으니 예수님은 그길로 가시려면 가십시오, 나는 거기로 못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평지로 가면 예수님과 동행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산꼭대기로 가시고 나는 평지로 가는데 어떻게 동행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대로 가야 합니다. 자기마음대로 가지 말고, 자기 이로운대로 가지 말고, 자기 쉬운 대로 가지 말고, 또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산꼭대기로 가자고 하시면 산꼭대기로 가고, 사자 굴로 가자고 하시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가야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자굴이나 표범산으로 가다가 잡아먹으려고 하면 절대 예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미국에서 사파리 투어를 가자고 해서 가 보았더니 맹수들이 있는 곳에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사자들과 표범들이 많이 엎드려 있었고 이 맹수들이 차가 지나가면 차위에 올라타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자동차 문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으르렁대기는 하지만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잡혀 먹힙니다. 마찬가지로 환난과 핍박이 와도 예수님만 바짝 의지하고 딱 붙어서 따라가야지 조금이라도 떨어져서 가면 사자에게 잡혀 먹힙니다. 예수님만 바짝 의지하고 가면 예수님께서 다 물리쳐주시고 예수님을
떠나면 사망이지만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예수님과 같이 가면 즐겁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은 참 즐겁습니다. 가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아름답게 여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
다. 한 번 순종하면 예수님께서 아름답게 봐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됩니다. 또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는 사람들도 회개해야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돈을 바라보지 말고, 방탕하는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기쁘고 즐거우며 죄가 들어 오려다가도 다 쫓겨납니다.
이렇게 순종을 하면 예수님께서 아주 아름답게 봐주십니다.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험산준령으로 가고 표범산과 사자굴이 있는 산으로 가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 가면 예수님께서 아주 귀하게 여겨주시고 돌봐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건져주시고 이기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일날 교회에 가자고 하시고, 가족들은 놀러가자고 합니다. 토요일 날부터 가자고 합니다. 토요일 날 놀러 가면 주일날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물론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은 주일날을 생명을 내놓고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것은 이 성경말씀대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를 이기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는 것은 고향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고향에서부터 떠나자는 것입니다. 레바논에 살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떠나서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는데 이것이 진짜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명기 3장 9절에 “헤르몬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칭하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칭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 올라가야 합니다. 시룐과 헤르몬은 다 같은 한 산입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태백산맥과 같이 한 줄기로 되어 있는데, 이 높은 산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룻이나 요셉을 보면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높은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얼마나 높은 길을 걸어갔습니까? 생명을 내어 놓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구해주실 것을 믿은 신앙이었습니다. 도지사 직분을 다 내놓고 목숨과 가족까지 다 내놓고 높은 경지의 신앙의 길을 걸어갔는데 지금 우리에게도 이 길을 걸어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도 세상을 멀리 떠나 방주를 준비하는 높은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재산과 70년의 시간을 방주 짓는 데에만 투자하고 하나님께 바쳐서 방주를 잘 지어나간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그대로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고상하고 높은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산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산을 내려다 보아라

그런데 이런 길을 걸어가면 아주 힘이 듭니다. 평탄한 땅이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로 걸어 가려니 힘이 드는 그런 험산 준령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가서 두려움이 없고 힘들지 않고 기쁨이 있게 됩니다. 또 주님이 붙들어주셔서 힘 있게 가는 것입니다. 발자국을 떼었다, 짚었다만 하면 거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힘이 들지 않고 예수님이 붙들어주시니까 발자국만 떼면 가게 되는 길이고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산으로 가니까 아주 힘든 길인 것 같아도 그곳이 즐거운 길인 것입니다
또 거기에다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어도 잡히지 않게 해놓으셨습니다.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을 때에는 예수님을 바짝 의지하면 사자와 표범도 예수님을 보고 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짝 의지하고 계속 의지하며 나가면 주님이 다 통과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주께서 맹수라도 오지 못하게 천사를 보내어 다 묶어 두십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고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아주 높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의 길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곳으로 가도 성도는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짝 붙어서 가면 해하지 못한다
는 것을 믿고 즐거움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다 보아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세상을 내려다보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 작아 보이고 볼 것이 하나도 없고 형편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새로운 새 생명의 길을 동행하며 내려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올려다보면 안 됩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로 가도 즐거움이 있고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곳으로 가도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3. 주의 마음을 빼앗음

본문 9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눈으로 한번 바라만 보았는데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만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옵니다. 앙망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로 옵니다. 우러러 바라봐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고 사모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바라보면 예수님이 좋아서 그 마음에 오시게 됩니다. 

목에는 구슬 한 꿰미를 달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순종을 말합니다. 잠언 1장 8-9절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 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금 사슬이고 눈으로 예수님을 한 번 바라보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아주 아름답게 보시고 성도에게서 예수님의 마음과 눈이 떠나지 않고 손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순종만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바라만 보고, 한 번 순종만 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4. 사랑과 진리 생활

본문 10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 보다 승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주는 달콤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취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은 달콤하고 서로 기쁘게하며 취하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고, 또 성도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본문 11절에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꿀방울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시편 19편 10절에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되새김질 하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혀 밑에는 젖이 있다고 하였는데 젖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5. 잠근 동산 생활

본문 12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라고 하셨는데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은 왕만 먹는 것입니다. 비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와서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 되시는 예수님만 그 동산에서 즐거워 하실 수 있고, 예수님만 그 덮은 샘물을 열고 예수님만 그 봉한 샘물을 잡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로 더불어 즐거워하시고 같이 먹고 같이 즐거워하십니다. 예수님과 동거, 동락,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이만큼 잠근 동산만큼, 덮은 우물만큼, 봉한 샘만큼 성도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에는 잡다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 안에 다만 예수님만 들어와서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을 언제나 잠근 동산처럼 잘 지켜야 합니다. 동산 문을 잠그지 않으면 지나가던 사람도 들어오고 장사꾼도 들어오고 불량배도 들어오고 도적도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을 잘 잠가두어 예수님만 들어와서 편히 쉬고 즐거워하는 동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자기도 나가지 못하게 하여 예수님과 온전히 교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심령은 언제나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 지켜져야 합니다. 잠근 동산이 되어야 합니다.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라고 하였는데, 우물에는 물이 고여 있고 샘에는 물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물은 생명의 역사를 가리키는데, 성도 속에는 언제나 진리와 영감으로 인한 생명의 역사가 흘러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14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역사가 있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항상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보기에는 게달의 장막 같고 얼굴은 거무튀튀하여도,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봐주시고 잠근 동산같이 봐주시고 덮은 우물과 같이 봐주시고, 봉한 샘같이 봐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도와 더불어 낙원에서 사는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레바논을 떠나서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말씀만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3-14절에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아름다운 골방 생활을 상징합니다. 성도가 침궁에 들어가서 예
수님과 같이 살며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영적 생활을 하며 생명의 역사가 있을 때 거기에는 언제나 신령한 꽃이 피어 있고 또 신령한 과수의 실과와 향기 나는 기름과 향품이 가득하게 됩니다(갈5:22-23; 엡 5:9). 신령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히게 됩니다.

본문 15절에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레바논의 산들은 높기 때문에 언제나 눈이 덮여 있고 그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은 고갈함이 없이 변함없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심령 속에는 끊이지 않는 생수의 강이 계속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네 개의 강이 나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생명의 강이 흘러 내려가서 많은 사람을 소생시킵니다.

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본문 16절에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북풍’은 찬바람, ‘남풍’은 더운 바람을 말하는데, 북풍은 환난과 핍박을, 남풍은 안일과 풍부와 유혹을 가리킵니다. 성도가 심령 속에 향기를 가지고 있다가 바람이 불면 향기를 멀리까지 날려 보냅니다. 이것은 마치 가시밭에 있는 백합화가 바람이 불면 찢기지만 향기가 더 많이 나와서 멀리까지 날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새 너무 풍성하고 너무 평안한 것도 일종의 환난입니다. 강압적으로 내려오는 환난은 북풍이고, 따스하게 만들어서 녹이는 환난은 남풍인데, 요새는 남풍이 부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힘을 못 씁니다. 그래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향기가 납니다. 풍부와 평안과 유혹이 온다고 해도 거기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향기를 더욱 날립니다(히 11:24-26). 요한계시록 12장에 용이 물을 토한다고 하였습니다. 용이 물을 토해서 계속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향기가 나오고 열매를 맺힙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믿음 지키는 성도는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또 강압적으로 가정에서 핍박하고 쫓아내려고 해도 거기에서 믿음 지키면 향기가 나며 열매가 맺힙니다.
어떤 집에 남편이 매일 핍박을 하는데도 부인이 그것을 잘 이기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남편이 방법을 바꿔서 계속 부인이 원하는 것을 사다주며 잘해주었습니다. 얼마 후 교회에서 심방을 가니까 부인이 남편이 잘해준다고 남편 밖에는 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남편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신앙을 양보한 것입니다. 아무리 북풍과 남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북풍이 불다가 남풍으로 돌아서도 속에 신앙만 있으면 다 이기고 거기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레바논을 떠나서 주님과 같이 가는 생활을 하면 이 시험, 저 시험이 와도 괜찮습니다. 속에 술람미 여자와 같을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다 이깁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와 같은 신앙을 갖지 못하면 바람이 불어오면 넘어지고 썩어져서 냄새가 납니다.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나는 예수님 한 분만 사랑한다’는 결심을 가지고 결사각오하며 나갈 때 향기가 날립니다. 또 예수님께서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거두십니다.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실과는 성도가 믿음 지킨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