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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3일 월요일

전도서 1:1-18 세상 것은 헛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음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세상 것은 헛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음
전도서 1:1-18

1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
어 13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수 없도다 16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1. 헛된 세상

지혜로운 솔로몬의 결론

본문 1-2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주전 1000년경의 사람이니까 다윗의 아들은 주전 950~960년 정도
가 될 것 같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솔로몬이 자신을 전도자로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은혜를 많이 받고 진리를 많이 깨달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해주려고 전도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만 해도 진리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잠언과 아가서도 대부분 솔로몬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진리를 많이 깨달아서 그 진리를 전해주는 입장에서 자신을 전도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절에서만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 썼는데, 솔로몬이 일생 동안 모든 경험을 해보고 마지막에 한 말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이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세상이 참으로 헛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보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하였습니다. ‘해 아래서 하는 수고’라는 것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수고를 말합니다. 욥기 14장 12-14절에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고하지만 나중에 보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헛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음

본문 4-5절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고 하였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면 다른 한 세대가 옵니다. 버스도 앞 차가 가면 뒤에 차가 오고, 가면 또 오는 것과 같습니다. 해는 떴다가 지고, 그 해가 다음 날 또 뜨고 지며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은 영원히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근본적인 진리가 영원히 있다는 뜻입니다. 기본적인 진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세대는 자꾸 지나가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기본 진리는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세세토록 있다는 뜻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풀이 봄 동산에 나와서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에 쇠잔 하는 것처럼, 그리고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영광이 그와 같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만 세세토록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왔다가 자라났다가 기울어졌다가 쇠해졌다가 멸망합니다.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생성했다 소멸합니다. 한 세대가 왔다 가고 다음 세대가 오는 일이 계속됩니다. 그런 중에 ‘땅은 영원히 있다’는 것은 진리가 영원히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산 것은 영원히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소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롭고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만사는 다 떴다 집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정치가도, 대통령도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권세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몰락합니다.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히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계십니다. 또 우리의 중생한 영, 말씀대로 만들어진 것도 영원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자라나는 일, 믿는 일, 영원한 진리로 만들어지는 일에 힘을 써야겠습니다. 세상 일이 잘된다고 기뻐할 것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패권을 잡은 국가들도 몰락할 때가 옵니다. 다른 국가가 올라옵니다.

본문 6절에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바람이 한 가지만 부는 것이 아니고, 동풍이 불 때도 있고 서풍이 불 때도 있고 북풍이 불 때도 있습니다. 유행도 가만히 있으면 한창 돌아가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따라서 돌아가는 것을 따라가려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대로 바로 서서 생명으로 삼고 나가는 것은 영원히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합합니다. 흐를 때에는 무슨 강이다, 무슨 강이다 하지만 바다에 들어가면 다 바다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누가 훌륭하다, 누가 잘났다 하지만 바다로 흘러가면 다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줄 알면 됩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까지만 큰 강이다, 작은 강이다, 천천히 흐른다 하는 것이지 바다에 들어가면 끝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허무하지 않습니까? 천하를 호령했던 칭기스칸, 진시황제, 이성계, 왕건 등이 당시에 아무리 훌륭했어도 바다에 갈 때까지입니다. 또 부자로 살았다, 사장을 했다, 금수레를 타고 다녔다 해도 진리에 바로 서고 진리를 붙잡는 것 외에는 다 허무한 것입니다. 오직 말씀에 굳게 선 사람만 영원히 승리합니다

2. 만물이 피곤함

만물이 피곤한 이유

1)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대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본문 8절에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만물이 다 피곤해 하고, 사람도 피곤해 합니다. 왜 피곤합니까? 피곤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만물이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대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대로 하면 피곤하지 않을 텐데, 그대로 하지 않으니까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리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거슬러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만사가 다 틀어집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순리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밤에 자고 낮에 깨어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신 순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대로 생활하면 평안합니다. 그러나 역으로 하면 아주 피곤합니다. 만사를 순리대로 하면 괜찮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순종하지 않고 억지로 재산을 받아서 나가니까 허랑방탕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순리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 부부 간에 아내가 남편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순리대로 하는 것입니다. 진리 문제가 아닌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따지고 들어가면 밤낮 싸우고 멸시하고, 집안이 뭐가 되겠습니까? 하여간 다 하나님께서 내신 순리대로 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도 순리대로 목사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아래에서 부터 거슬러 올라오면 자기도, 윗사람도 다 피곤합니다.

로마서 1장 26-27절에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순리대로 쓰지 않고 음욕이 불 일듯 하고, 순리대로 못 쓰기 때문에 거기서 피곤함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의 성을 주신 것은 경건한 자녀를 낳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 2장 15절에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자녀를 위해서 이성을 주셨는데, 그것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음란과 방탕에 쓰면 그 때문에 피곤해집니다.

2)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두 번째는 욕심을 채우려고 해서 피곤합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늘 더 좋은 것을 추구합니다. 귀는 들어도 차지 않아서 세상 것을 다 돌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제주도에 귤이 좋다고 하는데, 처음에 들어갈 때는 좋아 보여도 나중에는 별 것 없습니다. 세계를 다 돌아다녀도 별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별것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욕심을 채우려고 하니까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적당한 분량대로 취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더 많이 하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큼만 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잠언 25장 16절에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꿀을 만나도 조금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7절에는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먹으면 괜찮지만, 많이 먹는 것은 욕심입니다. 지나친 것은 아무리 좋아도 피곤합니다. 지나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적당하게 취하고 더 이상 취하지 말 것을 배워야 피곤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적당하게 만나서 얘기해야지, 친구 집에 자주 가면 안 됩니다. 잠언 25장 17절에는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이웃끼리 친하다 할지라도 적당히 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면 손해가 나고 피곤합니다.

피곤한 원인이 두 가지라고 하였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사용하지 않고 역리로 사용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욕심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죄악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피곤하다고 하였습니다.

3. 새로운 것이 없는 변화

본문 9절에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전부터 하던 일들을 후에도 다시 하기 때문에 해 아래에서는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새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오래 전 세대에 다 있던 것이지, 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옛날에 하던 것을 요새 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이 없습니다.

본문 11절에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는 것처럼, 장래 세대도 그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새 것이라 해도 옛날에 있던 것입니다. 좋은 왕이 나왔다 해도 옛날에도 좋은 왕이 있었고, 나쁜 왕이 나왔다 해도 옛날에도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부패한 교회가 나왔다 해도 옛날에도 부패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 바른 교회가 있다고 해도 옛날에도 소수의 바른 교회가 있었습니다. 집을 지었다고 해도 옛날 사람들도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무너졌다고 해도 옛날에도 다 무너졌습니다. 무엇이든 새 것이 없습니다. 또 새로운
신발, 명품들, 컴퓨터 등도 옛날부터 있었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옛날에 있던 원리가 아닌 것은 요새 발명할 수 없습니다. 원자탄도 옛날에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지, 새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는데 요새 무슨 새 것이라고 해도 옛날에 있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계산법, 기호법 등이 다 있던 것입니다.

또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 년 전 세대, 또 오백 년 전 세대를 기억하는 것 같지만 기억할 수 없습니다. 가령 이성계 씨가 한국의 조선을 세웠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지, 우리가 이성계를 기억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고 해도 한글을 만들었다는 지식을 알 뿐입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전에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해도 훌륭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지, 생각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뒷시대에도 그 뒷시대의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 이기주의이기 때문에 전 시대 사람들을 기억해주지 못하고, 또 기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한다고 해도 조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속 습관으로 하는 것입니다. 캘빈을 기념한다는 것도 캘빈을 이용하는 것이지, 캘빈을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또 생각해 줄 수도 없습니다. 캘빈은 천당에 갔는데, 무슨 생각을 해주겠습니까? 천당 간 이상 생각해줄 필요가 없고, 생각해도 헛된 것입니다.

4. 사람의 지혜의 한도

지혜의 한도와 헛됨

본문 12-13절에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지혜를 써서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을 연구하여 살펴보는 것이 괴로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어 수고하게 하신 것이고, 세상의 일을 연구한다고 해도 남는 것은 고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연구가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연구해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인생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연구가 끝이 없습니다. 연구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남는 것은 수고와 고생 밖에 없습니다.

본문 14절에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람을 잡는 것처럼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고생뿐입니다. 연구를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구부러진 대로, 이지러진 대로 하나님께 맡기고 사용해야 함

본문 15절에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구부러진 것이 많고, 이지러진 것, 부족한 것,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이지러진 것을 채우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되지만,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구부러진 것을 바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모자란 것, 부족한 것을 사람은 채울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합니다. 나무도 구부러진 나무를 곧게 할 수 있습니까? 가늘 때는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있지만, 그것도 힘듭니다.
그러나 굵은 나무를 곧게 하려고 하면 부러지고 맙니다. 구부러진 것은 구부러진 대로 써야합니다. 구부러진 나무로 지게도 만들고, 들보도 만든 것이 많습니다. 배를 만들 때에도 배 아래가 둥그니까 구부러진 나무를 사용합니다. 또 소의 멍에도 논이나 밭을 갈 때에 구부러진 것을 사용합니다. 오히려 똑바른 것은 못씁니다.

이지러진 것은 한쪽이 기운 것입니다. 충실한 것이 좋은데 이지러졌다고 합시다. 3분의 1이 썩었거나 떨어져 나갔으면, 그것을 채울 수 있습니까?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다 되지만, 사람은 이지러진 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지러진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안 되고 속만 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하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지러졌다고 속상해하지 말고 그대로 쓰면 됩니다. 그대로 써먹을 때가 있습니다. 절반이 이지러졌다고 하면 톱으로 베고 남은 것을 쓸 수 있습니다. 이지러진 것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비뚤어지고 구부러지고 부패하고 모자란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바로 세워주시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는데 사람으로서는 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것은 구부러진 것대로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것도 구부러진 대로 써먹을 때가 있으니까 구부러졌다
고 다 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자란 것, 부족한 대로 쓸 데가 있습니다. 모자라고 구부러졌다고 걱정만 하지 말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바로 세워주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구부러진 대로 쓸 수 있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쓸 수 있습니다. 불장난을 잘해서 불을 잘 내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어디다가 쓸까 생각을 하다가 불 때는 곳에 취직을 시켜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불을 얼마나 잘 때는지 젖은 나무을 갖다 주어도 잘 태웠다고 합니다. 구부러지고 모자라지만 써먹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구부러지고 이지러진 것을 하나님께서 바로 세워주시기를 기다리고, 바로 하기를 노력하며 교육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시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 사람을 교육시킨다고 하면 제대로 되는 사람은 한, 두 명밖에 없고 대개는 그냥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대로 써먹어야 합니다. 온전한 것을 써먹으면 좋겠는데, 온전한 것이 없으면 부족해도 부족한 대로 쓰는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에게 구부러진 것과 이지러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가르쳐주시면서 기다리시면서 모자란 것도 그대로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수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곧아지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구부러진 것을 하나님께서 곧게 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주면서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부러진 것은 구부러진 대로, 이지러진 것은 이지러진 대로 채울 수는 없지만 쓸 수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많으면 번뇌와 근심이 많음

본문 16절에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많이 받아서 과거의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지혜가 많았습니다.

본문 17절에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를 많이 받았지만 또 지혜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한정이 없습니다.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이 세상에 많지 않습니까? 그것을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요새 의사들이 미친 사람은 미쳤다, 미련한 것은 미련하다고 하지만, 왜 부족한지 그 원인을 물어보면 다 모릅니다. 무슨 병이 생겼다, 암이 생겼다 하지만 왜 생겼는지, 무엇이 부족해서 생기는지는 모릅니다. 아무리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해도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18절에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점점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아는 것이 많으면 번뇌가 들어옵니다. 이 세상 공기 가운데에 세균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균이 코 안에 들어올까 봐 상당히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무 데나 가도 마음대로 숨을 쉬고 다니는데, 공기 가운데 세균이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세균이 들어오지 않겠나 하면서 코를 이렇게 붙잡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르고 사는 것이 제일 편안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무 데나 가서 편안하게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또 소가 병이 들었는데, 그 소를 잡아다가 팔았다고 소고기를 먹지 않아야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우병 걸린 소고기를 잡아다가 팔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돼지고기도 우리가 먹고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식을 더하는 자에게는 근심이 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에서 전자파가 나와 암에 걸린다고 텔레비전을 안 봅니다. 또 봐도 저만큼 가서 옆에서 봅니다. 그러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음을 푹 놓고 봅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는 것은 지식이 더하면 근심이 더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알 것만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고 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세상 것을 다 알려고 공부를 하면 한정이 없고 일생 동안 해도 못합니다. 만 분의 일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성경말씀만 알고, 보통 원리만 알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여간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고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많은 사람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지식이 많은 사람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사람들이 번뇌가 더 많고 근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잘 알고, 이 세상의 것도 전혀 모르면 안되니까 어느 정도 원리만큼만 알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상책입니다
또 가정의 식구 중에 모자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모자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도 모자라지 않은 데가 있습니다. 100% 다 모자란 것이 아니라 30% 모자라면 70%는 모자라지 않습니다. 모자라지 않은 것을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50% 모자라서 못 써먹지만 모자라지 않은 50%를 써먹는 것입니다. 그런 두 사람을 모으면 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세워주시기를 기다리는데, 그래도 다 바로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곧게 할 수 없고, 사람이 채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손해 보지 않으면서 그대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그렇습니다. 구부러진 것이나 이지러진 것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
고, 탄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로 써먹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면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며, 건설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