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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빌립보서 1:9-26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립보서 1:9-26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2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1:9 그리고 나는 너희 사랑이 지혜와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어, 

1:10 너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전하고 흠이 없게되며,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한다. 

1:12 형제들아, 내게 일어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 

1:13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이 온 경호대와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어, 

1:14 많은 형제들이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님을 신뢰하므로 더욱 겁 없이 담대히 말씀을 전하였다. 

1:15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또 어떤 이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위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므로 사랑으로 전파하지만, 

1:17 다른 이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할 것으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1:18 그러면 무엇이냐? 가식으로 하든 참으로 하든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있으니, 내가 이것 때문에 기뻐한다. 또 기뻐할 것이니, 

1:19 나는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로 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원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이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이다. 

1: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산다면 이것이 내 사역의 열매이니 내가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1:23 내가 둘 사이에 끼여 있다.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것이 훨씬 더 좋지만, 

1:24 육신에 머무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다. 

1:25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내가 너희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을 확신한다. 

1:26 이는 내가 너희에게 다시 갈 때에 너희의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여라. 이는 내가 가서 너희를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함께 협력하며, 

1:28 또한 어떤 일에도 대적자들 때문에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자 함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이고,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이니,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다. 

1:30 너희도 동일한 싸움을 싸우고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이 싸움을 보았으며, 지금도 내 안에서 듣고 있다.


1. 열매 맺기를 기원함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함

본문 9절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하였는데,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점점 풍성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도의 사랑이 자라나서 점점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성도의 사랑이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점점 더 많아져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영이 자라나는 증거입니다. 또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즉 지식 있는 사랑, 총명 있는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간구했습니다. “총명”은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민한 감각성을 말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고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십자가를 멀리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지만, 예민한 감각으로 볼 때에는 사단의 사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태복음 16:23절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도 지식과 총명이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립니다. 자신을 망치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줍니다.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랑을 해야만 자신의 구원도 유익이 되고, 다른 사람의 구원도 유익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유익이 됩니다. 

지식과 총명이 있는 바른 사랑을 한 대표적인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었어도 자기 집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요셉이 살아있다”고 얼마든지 통지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7년 흉년이 올 때에도 자기 집에 통지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알려 주지 않았겠습니까? 7년 풍년 들고, 그 다음에 7년 흉년이 오는데, 준비하라고 알려 줄 수 있지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2년 들었으면 아직도 5년의 흉년이 남았습니다. 그
래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흉년이 들 때에도 자기의 부모와 형제들이 굶어죽지 않겠는가? 하는 염려가 되겠지만, 그래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면 오겠지”하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처음에 애굽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왔을 때에는 형들을 정탐군으로 몰아서 시므온을 잡아 가두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형들을 돌려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야곱이 베냐민을 안보내려고 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고 형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동안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이 굶어죽지 않았을까? 상당히 염려가 많이 되어 사람들을 시켜서 밀가루 한 포대라도 보내어 주었을 법 한데, “굶어죽게 되면 올 것이다”하고 안 보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형들은 다시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이것이 지식과 총명으로 형제를 구원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했으므로 형제가 구원을 받았지,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에 오자마자 버선발로 뛰어 나가서 목을 안고 울었다고 하면 형제가 회개하였겠습니까? 회개는 무
슨 회개입니까? 형제를 죽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요셉과 같이 하기 힘듭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을 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총리가 되자마자 “다 같이 와서 살자”고 하며 집에 통지하였을 것입니다. 또 흉년이 든 후에는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반드시 사람이나 곡식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들은 손자에 대해서 무조건 사랑하는데, 그것은 사랑에 빠뜨려 아이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밥을 안 먹으면 할머니가 밥을 먹여주는데 이것은 아이들에게 못된 버릇만 길러주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손자를 무조건 사랑하다가 아이들을 버려 놓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에게 오토바이를 사 주었는데, 아이들이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병신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지식과 총명이 없는 사랑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일에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도와줘서 손해 날 사람은 안 도와주어야 하며, 또 도와주어야 될 사람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해야 됩니다. 무조건 도와준다고 되는 게 아니고, 무조건 안 도와준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선교할 때에도,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랑으로 바로 해야지, 바로 못하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총명과 지식이 있는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단이 소속이 아닌 어떤 목사가 있는데, 그 목사는 인사할 때에 여자 집사들의 등을 두드려 주곤 했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일에 지식과 총명으로 하는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져야겠습니다. 즉 분별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는지를 잘 분별해야 됩니다. 분별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는 것은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쉽고, 결과는 하나님의 일에 손해가 나고, 자기도 손해를 보게 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위해 기도함

본문 10-11절에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의 미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분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신령한 양식, 즉 단단한 식물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젖으로 먹이는 것인가?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영적양식이냐? 육신의 귀에 즐겁게 하는 것이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냐? 육신의 감정이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함

“허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바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한 교회가 되려면 봉사에 믿음을 써야 합니다. 봉사에 믿음을 쓰면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믿음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믿음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이 들어와도 믿음으로 통과하면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또 궁핍할 때에도 믿음으로 통과하면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풍성할 때에도 풍성한데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통과하면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함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을 믿음으로 통과 하여 의의 열매가 맺히면, 성도의 생활 전체가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이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믿음으로 통과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냐? 아니냐?’를 언제나 분별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또 평안할 때에 안일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써서 올라가야 합니다. 즉 시온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또 자유가 없을 때에 믿음을 쓰면서 잘 참으면 의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자유가 있을 때에도 그 자유를 가지고 믿음을 쓰면 의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그렇게 하므로 우리의 인격이 좋은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2. 수난 중에도 복음이 진보됨

본문 12-14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일입니다.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는데,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하여 복음의 길이 막히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나 도리어 복음이 점점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위대 안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끌리어 다니면서 재판을 받을 때에 “너는 왜 감옥에 왔느냐?”라고 하면 예수 믿기 때문에 왔다고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냐?”고 또 물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바울이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데에 끌려가서도 또 그렇게 말을 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믿음을 쓰면 의의 열매가 맺히고, 복음의 진보가 됩니다. 즉 복음이 전파됩니다. 

또 교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도 감옥에 갇힐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본문 14절에 형제 중 다수가 복음을 더욱 담대히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생명을 내어 놓고 바울을 도와주며, 바울이 감옥에 가기 전보다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함으로, 바울이 감옥에 갇히기 전보다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됩니다. 

본문 15-17절에,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은 바울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성공되어 나가는 것을 투기하고 분쟁하여 바울을 괴롭게 하려는 전도자들입니다. 바울이 비 진리를 용납하지는 않았으며, 바울을 반대하기 위해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더라도, 올바른 복음이 전파되면 바울은 기뻐하였습니다.

본문18절에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외모로 하든지, 참으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은 자기를 투기하며 비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후욕을 당하고 멸시를 받아 낮아져도 그리스도만 전파되고 진리만 전파되면 그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비 진리를 용납한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5에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란 비 진리에 대해서는 일시라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성도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한 것입니다. 비 진리를 용납하면 바른 진리가 다 파괴되고, 바른 진리를 세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 진리는 일시라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3.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

본문 19-20절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자기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존귀해지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죽는 곳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진다고 하면 간다는 것입니다. 단 마음으로 갑니다. 내가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면 사는 것도 좋다는 말입니다. 사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진다면 죽는 것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감옥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진다면 감옥에 가는 것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진다면 고난 받는 것을 택하고, 낮아져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해진다면 낮아지는 것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즉 자기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존귀해지면 아무 것을 당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아무 곳으로 가라고 해도 가고, 십자가를 지라고 해도 십자가를 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고, 낮아지라고 하면 지극히 낮아지고, 감옥에 가라고 하면 감옥에 가고, 소돔 고모라로 가라고 하면 소돔 고모라로 가고, 아골 골짜기로 가라고 하면 아골 골짜기로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존귀해진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담대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존귀해진다고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으라고 해도 다 내어 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내 몸에서 존귀해지는 것, 그것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죄인으로 취급을 받아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바울을 전염병과 같은 놈이라고 했는데, 전염병으로 취급을 받아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또 반역자로 놀림을 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디모데후서 4:6절에 “내가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낮아지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자기손해 안 보려고 그리스도를 존귀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 욕 돌리고, 자기 이기주의로 나가느라고 하나님께 욕 돌리는 것은 바울과 아주 반대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그리스도 한 분만 내 몸을 통해서 존귀해지면 만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 죽어야 존귀해진다고 하면 죽어도 만족하는 것입니다. 순교 당해야 그리스도께서 존귀해진다고 하면 순교당하는 것이 참 좋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고 순교자의 상급이 큽니다. 그리스도께서 존귀해지는 것을 원 목적으로 세워야 됩니다. ‘낮아져도, 비천하게 되도, 흙덩이와 같이 된다고 해도, 그리스도 한 분만 존귀해지면 만족하다’는 이런 신앙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평생소원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릴 때에 이원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교회에 안다녔습니다. “너의 평생소원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으니까 “세계일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소원이 “주의 일 하다가 주 앞에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도 예수 믿고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떠나는 날 천당 가라”고 하였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평생소원은 썩어진 소원입니다. 우리의 평생소원은 찬송가에도 있듯이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
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면 우리도 존귀해 집니다. 아무리 부끄러움을 당해도 예수님 한 분만 존귀케 하면, 그 사람도 하늘나라에 가서 존귀케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평생소원이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

본문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라고 하였는데,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자기가 아니고, 또 사는 것이 육신이 아니고, 사는 것이 직장이 아니고, 사는 것이 물질이 아니고, 사는 것이 공부가 아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있지만 육신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하는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이니까 유익합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어도 그 생명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삽니다. 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으로 사는데, 죽어도 그 생명으로 천당 가는 것입니다. 그냥 그 생명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이 사나 죽으나 변함이 없습니다. 중생한 영혼이 육신의 장막 집을 쓰고 살다가, 죽으면 그냥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놓는 것일 뿐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어놓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던 영혼이 죽으면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하는 신앙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을 일이 닥쳤을 때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 가운데 빠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그 생명 그냥 가는 것입니다. 계속 그 생명으로 사는데, 육신의 장막 집만 벗어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육신의 장막 집 벗어놔도 그냥 그 생명 가지고 그냥 하늘나라 가서 산다는 말입니다. 

사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그랬는데,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안 죽는다는 말입니다. 안 죽고 장막 집만 벗어 놓고 하늘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초월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죽음을 초월한 신앙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갔던 일이 있는데 바벨론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공포하기를, 이제 30일 동안에 왕 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법령을 냈습니다. 누구든지 이제부터 30일간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는 법령이 공포가 됐는데, 다니엘이 그걸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감사 기도를 했습니다. 전과 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루 세 번씩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다가 발각되면 사자 굴에 갑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면 굶주린 사자들이 나와서 잡아 뜯어 먹게 되는데, 다니엘이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왜 살려달라는 기도를 안했을까? 지금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다니엘이 죽으면 그대로 그 생명을 가지고 하늘나라 가서 사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 세상 가서 사는 것을 믿었습니다. 

죽는 것은 천국으로 이사 가는 것

죽는 것은 천국으로 이민 가는 것, 이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장막집 쓰고 살고 천막집에서 살다가 죽으면 금, 은, 보석으로 꾸며놓은 집에 가서 사는 것입니다. 천막집에서 살던 사람이 좋은 집으로 이사갈 때 울며 갑니까? 안가겠다고 발버둥치며 이사 갑니까? 아닙니다. 천막집에서 살다가 금, 은, 보석으로 꾸며놓은 집 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이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다니엘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았고 바울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았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더 좋은 데 가니까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더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천막집에서 살다가 더 좋은 곳으로 가니까 더욱 감사하다 하며 감사로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 가운데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그 신앙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영으로 살기 때문에, 그의 생명의 역사로 살기 때문에, 이제 죽어도 그 생명 그대로 가지고 가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2장에 19-20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향해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장사 내 장사입니다. 내 죄 때문에 죽었으니까 예수님 죽은 것은 내가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우리 육신의 생명은 언제나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어 진다는 말입니다. 

매일 주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어진다는 말은, 주를 위해서 희생하고 고난당하고, 죽음의 길을 자처해서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고 자기를 날마다 죽음에 넘겨준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자기라는 자는 날마다 죽이고, 다시 살아나려고 하면 또 죽이는 것입니다. 매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이 자기 속에서 역사하고, 중생한 영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한 영이 영적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중생한 영혼이 그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명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초월한 것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는데, 죽는 것은 장막 집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벗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장막 집 벗어 놓고 가면, 더 좋은 데 가게 되고 더 유익한 것입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라고 하는 자리에 언제나 서야 합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육신이면 안 되고, 사는 것이 돈이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살려고 합니다. 또 육신으로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으로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향락으로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부귀영화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살지 아니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죽어도 그 생명 가지고 가니까 유익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면 자라나는데, 자라난 만큼 그대로 하늘나라에 갑니다. 자라나지 못한 자는 못 자라난대로 가고, 많이 자라난 자는 많이 자라난 대로 갑니다.

단단한 식물로 날마다 자라날 것

단단한 식물을 먹고 날마다 자라나야 됩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도 단단한 식물을 먹고 그 영혼이 자라나야 계속 생명의 역사가 있고, 그 다음에 자라난 그대로 갑니다. 젖이나 먹으면 못 자라납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예수님이 탄생한 것을 알고 찾아왔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젖으로 먹이는 것은 ‘옛날에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 올 때에 나타난 별을 따라 유대 나라로 와서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께 경배하고 갔다’고 하며 크리스마스트리를 굉장하게 하고 축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굉장하게 크리스마스트리 해놓은 것을 봤습니다. 어떤 집은 전부 다 전구로 장식해 놓고, 마구간도 지어 놓고 거기에다 말구유도 만들어 놓고 동방박사 세 사람도 만들어 놓은 집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산타 할아버지 오라고 마당도 환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때가 12월 20일 경인데 얼마나 굉장하게 장식해 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별 따라 온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저 그대로 모방을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그런 행사 안 해도 단단한 식물로 먹음으로서 참 뜻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실제로 별이 나타났고, 옛날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에 신령한 뜻이 있는데, 그 신령한 뜻이 단단한 식물입니다. 별이 나타났다는 신령한 뜻은 하나님이 영적 빛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빛, 우리 속에 있는 중생한 영혼과 성령의 감동과 진리와 영감의 역사가 영적 빛인데, 하나님께서 이 영적 빛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진리와 영감의 빛, 영적 빛으로 인도합니다. 그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의 인도를 따라가야만 예수님 계신 곳에 가서 참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모르고 크리스마스트리만 만들어 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단한 식물을 먹고 중생한 영이 자라나야 됩니다. 자라난 그대로 하늘나라 가는 것입니다. 영으로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죽는 것이 기쁜 일임을 알 것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고 했는데, 죽는다고 하면 장막 집에서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이사 가는 날이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뵈러 가는 날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뵈러 가는 날이니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결혼식 하는 날, 눈물을 뚝 뚝 흘리면서 갑니까?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갑니다. 옛날 신부들은 눈물 흘리며 갔다고 하지만, 요즘은 뒤도 안돌아보고 갑니다. 신랑한테 시집가서는 편지도 한 장 안합니다. 괴로운 세상 끝마치고 고대하던 신랑 되신 예수님 만나러 가는데, 얼마나 좋고 기쁜 일입니까? 이 세상은 괴로운 세상입니다. 또한 몸은 욕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장막 집, 괴로운 세상, 욕된 몸, 육체를 다 벗어버리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 만나러 가는데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는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이 늘 있고 늘 하늘 문이 열려있고, 천당을 늘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그러다가 “오너라!” 하면 “예”하고 기쁘고 즐거움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믿음의 자리에 서는 것이 참 신앙에 선 사람입니다. 

아직도 그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면 사자 굴에 넣겠다”는 시험이 왔을 때에 기도하지 못하고 숨어서 이불 쓰고 기도하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 닫아 걸고 기도하였으면 낙제입니다. 또는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낙제입니다. 그건 합격이 못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전에 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기 때문에 합격한 것입니다(다니엘 6장).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합격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낙제할 것 같습니까? 제자들이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았지만,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을 만나자 전부 낙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물에 내려가 잠을 주무셨는데, 예수님 한 분만 합격입니다. 낙제생은 그 다음에 재수를 하고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는 재수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낙제되고 나서 재수 몇 번이나 했습니까? 한 세 번? 세 번만 했으면 뭐 괜찮은 것입니다. 재수 뭐 열 번, 스무 번, 20년 간 낙제되고, 30년 동안 낙제된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또 받아주셔서 “또 재수해라”하십니다. 그러면 또 한 번 시험 쳐봐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에 배 타고 나가야 됩니다. 풍파 있는 날, 태풍 불어오는 날에 예수님과 같이 평안히 고물에서 베게하고 잠자면 합격이고,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건 낙제입니다. 아무리 풍파가 일어나고 노도광풍(怒濤狂風)에 배가 당장 전복될 것 같아도, 그래도 평안히 잠잘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죽으면 하늘나라 가서 사는 것입니다. 죽어도 하늘나라가서 사는 것이고, 예수님과 교통하면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하늘나라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죽는 것이 큰 일이 아니며, 오히려 기쁜 일입니다. 사는 것이 큰 일이지, 죽는 것이 큰 일이 아닙니다. 죽는 건 그저 육신의 장막 벗어놓는 것일 뿐, 큰 일이 아닙니다. 의복 하나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러한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면 합격이고, 이러한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까봐 겁내는 것은 낙제입니다. 살려달라고 하는 것도 낙제입니다. 살려놨는데 뭘 더 살려달라고 합니까? “내가 좋은 의복 줄 것이니, 더러운 의복 벗어 놔라”고 하시는데 “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얘가 정신 나갔나보다. 의복 갈아입으라는데 뭘 살려달라고 그러나?”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는다는 것은 썩을 장막 벗어놓고, 더 좋은 의복 입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하는 신앙의 자리에 서면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하는 자리에 반드시 이르게 되는데, 그 신앙에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4. 바울의 살고 죽는 것의 유익
육신으로 사는 것으로 열매 맺을 기회를 가짐

본문 22절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떠나서 예수님을 만나서 사는 것이 더욱 좋긴 좋은데, 그러나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이 자기 일의 열매를 더욱 더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라고 하였는데 ‘두 사이’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말합니다. 한 쪽은 사는 것이고 한 쪽은 죽는 것입니다. 그 두 사이에 끼었는데 양쪽 다 좋은 것입니다. 양통(兩通)입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살면 뭐가 좋습니까? 자기 일의 열매를 더 맺힐 수 있어서 좋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믿음에 진보를 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본문 24-26절에,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는 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면 뭘 맺힌다고 하였습니까? 열매입니다. 살면 바울이 내일의 열매를 좀 더 많이 맺히고, 자기 구원을 좀 더 많이 이루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가고, 열매를 많이 맺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믿음에 진보를 줄 수 있고, 그리고 복음을 좀 더 많이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유익입니다. 

죽음은 일 마치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
그리고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 것은 괴로운 세상을 떠나는 것이며, 욕된 몸을 벗어버리고, 십자가 다 벗어놓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뵈옵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까 그게더 좋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6-8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
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
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
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리
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하였는데,
주님과 따로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주와 함께 거하는 그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떠나면 주와 함께 거한다는 것입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서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또한 괴로
운 세상 다 벗어버립니다. 육신의 이 욕된 몸을 벗어버리고 가는 것입
니다. 또한 이 수고를 다 끝마치고 편히 쉬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괴로운 수고와 일 다 끝마치고 안식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떠나면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과 한 집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한
집에서 살게 되니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양통(兩通)으로 좋게 해놓음
그리고 살면 뭐가 유익입니까? 자기 일에 열매가 맺히고, 구원을 이
루어 나가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진보시키고, 복음 전파를 좀 더 많
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는 것도 큰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살아도 유익, 죽어도 유익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양통입니
다. 이리 가도 먹고, 저리 가도 먹는 양통입니다. 이쪽으로 가도 유익
이 되고, 저쪽으로 가도 유익이 됩니다. 둘 다 양통 가지고 사는 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몇 통입니까? 양통입니다. 참 좋습니다. 

한 통만 가지고 있다가 한 통 끝나면, 그것으로 끝인데 양통가지고 살다가 이것 끝나면 저리로 가는 것입니다. 새들도 구멍 뚫을 때 양통으로 뚫어놓습니다. 새가 구멍 하나만 뚫어 놓으면 그 구멍에 사람이 손을 넣으면 꼼작 없이 잡힐 거 아닙니까? 그래서 새들도 구멍을 하
나 더 뚫어놓습니다. 사람이 잡으려고 이리로 손을 넣으면 저리로 달
아나는 것입니다. 또 저리로 손 넣으면 이리로 달아납니다.
새도 양통으로 구멍을 뚫어 집을 짓고 사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양
통으로 해 놓지 않고 살면 어떻게 합니까? 한 통으로 살다가 한통 끝
나면 다 끝나는 것인데 절망 아닙니까? 그러니까 양 통으로 해 놓고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양통입니까? “네” 하십시오. 양통 해놨습니
까? 네. 양통 해놨습니다. 됐습니다. 사는 거 한 통, 죽는 거 한 통, 양
통으로 좋게 해놓았습니다. 

5. 죽어서는 자기유익, 살아서는 남의유익이 됨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그런데 문제는 둘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지 그게 문제입니다. 본문
23절에 바울이 어느 걸 가지길 원한다고 하였습니까? “내가 그 두 사
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욱 좋으나”라고 했습니다. 양통 가운데 너 어느 것을 가지길 원하느냐
할 때는 바울이 어느 것을 택합니까?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욕망을 가지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둘 가운데 내 자유대로 택하
라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을 택하겠다”고 바울은 대답합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양쪽이 다 유익이 되는데, 양통 가운데 어
느 것을 가지기 원하느냐 할 때에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더
원합니다.” 하는 신앙을 가져야 진짜입니다. 그런 신앙 갖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세상 통 가지고 살겠다는 것은 열매로 말하면 아지고 설익은 것이고,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열매로 말하면 제대로 익은 것입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끼
었는데,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난 더 좋습
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되면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됐다. 다 익었다”고 하실 것입니다. 과일로 말하면 다 익었다
는 것입니다. 곡식으로 말하면 다 익었습니다. 농사가 잘 됐습니다. 하
나님의 농사가 잘 된 것입니다. 가을이 되서 서리가 오고 겨울이 되었
는데도 아직도 새파랗게 설어서 익지 않았으면 그건 못씁니다. 서리
오면 다 시들어지고 맙니다. 익었어야 합니다. 서리 오기 전에 빨리
익어야만 주님이 거둬들일 때에 하나님 앞에 가서 한 몫을 합니다. 

생즉타익(生則他益) 사즉아익(死則我益)
본문 24절에,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죽으면 내게 유익하고, 살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합니
다. ‘생즉타익(生則他益)이요 사즉아익(死則我益)이라’ 하는 말이 있습
니다. 죽으면 자기에게 유익이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란 말입니다. 

요새 보통 사람들은 살면 자기에게 유익이고, 죽으면 다른 사람들에
게 유익입니다. “밥 한 그릇이라도 남으니까. 그거 잘 죽었다”는 소리
들으면 반대로 생즉아익(生則我益) 즉, 살면 제게 유익이고, 사즉타익
(死則他益) 즉, 죽으면 남에게 유익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되지 못한
것입니다. 사즉아익하고, 즉, 죽으면 자기에게 유익이고, 생즉타익이라,
즉, 살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고, 반대
로 생즉아익이고, 사즉타익이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기가 언제나 되지 못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알고, 설은 사람이 익은 줄 아는 것이 잘못입니다. ‘생즉타익이요 사즉아익이라’는 신앙, 즉 ‘죽으면 내게 유익이다’라는 신앙,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좋다”는 신앙, 이 자리에 서는 것이 바른 신앙에 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살아서 남들의 믿음의 진보를 시킨 바울
본문 25-26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시 빌립보 교회에 가서 성경을 가
르치며 신령을 양식을 나눠줌으로 그 사람들에게 믿음의 진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자랑이 풍성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
로니가전서 2장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 재림할 때 바울의 자랑이 되
고, 바울은 교인들의 자랑이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4절에,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
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 재림하는 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이 됐다는 말입니
다. 왜입니까? 바울에게 배워서 이만큼 믿음의 진보가 됐으니까, 바울
은 고린도 교회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나 데살로
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또 자랑거리입니다. 바울에게 배운 사람이 그만
큼 잘 됐으니까 바울에게 면류관이요 자랑입니다. 이제 서로 잘 해야
합니다. 서로 면류관입니다. 잘 가르친 사람은 배운 사람에게 대해서
면류관이요 자랑이고, 또 배운 사람이 잘 되면 가르친 사람에게 있어
서 배운 사람이 자랑이요 면류관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제 다시 빌립보에 가서 믿음의 진보를 시키며, 신령한 양
식을 나눠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나고 영혼이 자라난다
는 것입니다. 바울이 잘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풍성하게 하려 함이
라고 했고, 자랑이 나로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