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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일 화요일

창세기 31:1-55 야곱의 귀국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야곱의 귀국
창세기 31:1-55

1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2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4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5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8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으니라 10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11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14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15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17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18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19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20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21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삼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24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5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28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29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31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 하였음이니이다 32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35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36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37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 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41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42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43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44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46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48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49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감찰하옵소서 함이라 50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 하였더라 51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53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 55라반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1. 야곱이 귀국을 결정함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하심

본문 1-2절에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일한 지 2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라반의 아들들이 말하기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아 이와 같이 거부가 되었다”고 하며 야곱을 시기하고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핀즉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물질 문제로 오해와 다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실제로 라반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짐승을 다 빼앗아 자기에게 주었다고 야곱이 말한 것을 보면 불과 6년 동안에 많은 재산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같습니다.

본문 3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20년 만에 야곱에게 임하였습니다. 야곱의 꿈에 가끔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일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살아왔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외삼촌과 그 아들들이 시기하고있으므로 순순히 보내 줄 것인지, 또 야곱에게 많은 가속과 가축이 있는데, 무사히 먼 길을 갈 수 있을지, 또 고향으로 돌아가도 형 에서가 잘 영접해 줄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함께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위로해 주시며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안심하였고, 담대히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야곱이 아내들에게 말해줌

본문 4-5절에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 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내 레아와 라헬
을 불러 장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야곱이 보호를 받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본문 6-7절에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하여 장인을 섬겼으나, 장인은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장인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으나 하나님께서 라반을 금하여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8-10절에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이 아무리 야곱에게 품삯을 주지 않으려고 열 번이나 변역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시므로 야곱의 양떼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돈을 잘 벌고, 사업이 잘되는 것도 하나님이 같이 해 주시고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라반과 야곱이 삯을 정할 때, 점이 있는 것이 야곱의 것이라고 하면 양들이 점 있는 것만 낳았습니다. 또 바꿔서 얼룩무늬가 있는 것이 야곱의 삯이라고 하면 그 때부터는 새끼를 얼룩무늬로만 낳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것만 자꾸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야곱은 재산이 자꾸 많아지니 좋지만, 장인이나 처남들은 큰일 났습니다. 양이 전부 야곱의 것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빼앗기게 되자 이제는 안색이 좋지 않아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수를 써서 살구나무, 신풍나무, 버드나무의 가지를 얼룩얼룩 베껴서 새끼 밸 때에 앞에 놓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다고야곱이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에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
나님께서 다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면 재산을 얻을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안 주시면 할 수 없습니다. 라반은 하나님께서 안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되게 하실 때는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되게 해 주실 때는 아무렇게나 해도 됩니다. 그래서 라반이 ‘안 되는 것을 너에게 준다’ 해도 그것이 야곱에게는 가장 잘 되는 것이 도고, ‘잘 되는 저것은 내 것이다’ 하면 그것이 라반에게는 안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재산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알고, 하나님이 안 주시면 안 주시는 줄로 알고,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말씀하시되, “야곱아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고 하였는데, 다 야곱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을 나게 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또 본문 13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반과 그의 딸들의 엇갈린 생각

본문 14-16절에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가 자기 남편에게 아버지가 자신들을 외인으로 여기니까 이제는 아버지하고 상관없다며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라반의 딸들의 생각은, 그들의 재물은 그들과 그 자식의 것이니 이제 야곱이 하자는 대로 자신들도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라반의 생각은 그와 달랐습니다. 본문 43절에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나의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고 하였습니다. 아버
지는 딸들과 외손자들과 양떼 모두가 다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말과 딸들의 말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아버지의 말 중에서 “딸은 내 딸이다”라고 한 말이 맞습니까? 라헬과 레아가 라반의 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 “자식은 다 내 자식이다”라고 했는데, 자기 딸이 낳았으니까 전부 제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또 “양떼는 다 내 양떼
다”라고 했습니다. 라반의 생각은 야곱이 양 한 마리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결국은 라반의 양을 다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를 써서 나뭇가지를 벗겨서 얼룩덜룩하게 해 놓고 다 빼앗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라반의 말이 맞습니까? 라반의 말이 근거가 없는 것입니까?
딸은 자기 딸이요, 딸이 자식을 낳으면 자기 혈통에 속했으니까 다 제 자식이 맞고, 양떼도 야곱이 가져온 것은 하나도 없으니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딸들의 말은 다릅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외인으로 여기니 그것들은 다 자신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 것이니 이제 다 가지고 갑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서로 의견 차이가 생겼습니다.
사실은 딸들의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욕심을 가지고 제 딸이라고 했지, 출가한 줄 알아야 하는데 출가외인인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시집갔으면 야곱의 것이지 자기 딸이 아닙니다. 자기 딸도 야곱의 아내지, 자기 딸이 아닙니다. 또 자손도 야곱의 자손이지 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괜한 욕심으로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사실 딸들은 출가외인입니다. “외인으로 여기니”라고 한 것을 보아 출가외인이 맞습니다. 딸들과 자식들은 라반의 소유가 아니라 야곱의 소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지 못하면 싸움이 납니다. 그래서 죽이려는 것입니다. 일단 출가하면 외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딸이 아니고, 야곱의 아내이다. 내 자식이 아니고, 야곱의 자식이다’라고 알아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만들어놓으니까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출가해 놓으면 출가외인으로 하고, ‘내 것이 아니고 사위의 아내다. 사위에게 주었으니까 사위의 아내이다. 또 손자도 내 것이 아니고 사위의 아들, 딸이다’라고 해야만 하나님께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고가 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야곱의 가족이 출발함

본문 17-20절에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 할 새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
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내와 종과 열한 아들을 이끌고 몰래 달아났습니다. 이때는 아직 열두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는 이제 길을 가다가 낳는 것입니다. 열한 아들을 이끌고 자기 장인이나 처남
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달아났습니다.
야곱은 돌아간다고 말하면 라반이 못 가게 하거나 재산과 아내와자식들을 빼앗을까봐 말없이 도망한 것이지만,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떠나게 해 주실 것도 믿고 장인에게 말했어야 합니다. 그래도 라반은 야곱에게 은인입니다.
빈손 들고 온 야곱이 지금은 아내 넷, 아들 열하나, 딸 하나에 가축도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모두 외삼촌 집에서 살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삼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떠나기 전에 외삼촌에게 말했더라면 떳떳이 기쁜 마음으로 길을 출발했을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마땅히 순종해야 하나 인륜에도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라반의 추격과 수색

라반이 야곱을 쫓아감

본문 21-23절에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달아난 지 3일쯤 된 다음에
야 장인이 도망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다 가져갔습니다. 양도 다 가져가고, 딸들도 다 데려가고, 손자도 열하나를 다 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이 동네사람들과 자기 친척을 다 모아서 7일간을 따라갔습니다. 야곱은 양떼를 데리고 길르앗 산을 향하여 갔고 라반은 7일간을 따라가 길르앗 산에서 만났는데 그들이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라반이 ‘이런 놈은 죽이고, 내 딸을 다 빼앗고, 내 손자도 다 빼앗고, 양도 다 빼앗아오겠다’ 하고 쫓아온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도망을 꾸짖음

본문 25-28절에 “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쫓아와서 말하기를 야곱이 실로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입 맞추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인데, “왜 내 딸들과 내 손자들을 빼앗아 도망쳤느냐? 네가 어리석도다” 하면서 따지는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보내고 딸들과 손자에게 입 맞추며 보내야 마땅한데 어째서 칼로 사로잡아 빼앗은 것처럼 도망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사위와 딸들과 외손자들이 가는데 즐거움으로 잘 보내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잘 가라고 입 맞추고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몰래 도망쳤느냐는 것입니다. 왜 포로 잡은 것처럼 잡아서 가느냐며 지금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몰래 도망치지 않고 만약 라반에게 말했더라면 라반의 말처럼 즐겁게 보냈겠습니까?
안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반은 ‘야곱이 내 딸들을 데려가고 외손자들을 데려가고 내 양들도 데려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로 자기 것이라고 하면 결국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다가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원리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원리원칙으로 하면 일단 딸들이 야곱과 결혼했으므로 딸들은 야곱의 아내입니다. 출가한 딸들은 이제 라반과 야곱 중에서 야곱에게 더 가까운 것입니다. 부부는 무촌이고 아버지는 일촌입니다. 그런데 서로 자기 것이라고 하는 데에서 사고가 생깁니다. 원리원칙을 떠나서 그런 것입니다.
다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떠날 때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즉 기쁨과 즐거움으로 작별을 하고 떠날 수 있습니까? 지금 재산 문제 때문에 화가 나서, 얼굴이 다 변했는데, 야곱이 어떻게 했으면, 라반이 야곱을 즐거움과 노래로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야곱이 자기 재산을 뚝 떼서 장인에게 주었다면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 라반은 야곱이 자신을 속여서 화가 난 것입니다. 라반의 생각은 정당하게 약속을 지켰어야 하는데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나뭇가지를 벗겨서 얼룩덜룩하게 만들어놓은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속여서 자기의 양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답변할 것이 없습니다. 속인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얼룩얼룩하게 나뭇가지를 벗겨놓고 자기 것을 많게 만든 것이 라반과 아들들을 격동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다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셨더라면 섭섭하기는 할 것이나, 그만큼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재산을 가져가지만, 라반의 생각에는 빈손으로 왔다가 한 무더기를 얻어서 가져가는 것이고, 자기 양을 다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한 절반쯤 주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절반쯤 떼서 “외삼촌에게 드립니다. 나는 절반만 가져가면 됩니다”라고 했으면 웬만한 사람은 들어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안 들어주면 “내가 얼마나 가져가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 내 놓아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분의 1을 가져가라고 하던지 절반이면 좋다고 했을 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하고 갔더라면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보낼 수 있을 뻔 했습니다. 다 주고 와도 야곱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 주셔야 잘되는 것이지, 자기가 좀 더 많이 가져가야 잘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이 2천 마리라고 하면 천 마리만 가져와도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해주시면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싸우고 다투지 말고, 양보하고 서로 화목하는 것이 낫습니다. 물질에 손해 보고 양보하고라도 화목하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고 쫓아갔으나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해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을 해할 만한 것이 라반의 손에 있어서 해하려고 오긴 왔는데, 어제 밤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라반이 야곱을 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없어진 드라빔을 수색함

본문 30-32절에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 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있었는데, 라반의 집에 있었던 것을 라헬이 가지고 나왔습니다. 조그만 우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자기 아비 집에서 나올 때 도적질해서 온 것입니다. 라반이 와서 “너희가 왜 드라빔을 도적질했느냐?”고 하니까, 야곱은 외삼촌에게 여기서 다 찾아보고 외삼촌 것이 발견되거든 그사람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도적질 한 것을 야곱은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 33-35절에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고 하였습니다.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보니까 드라빔이 없고, 레아의 장막에도 없었습니다. 라반이 찾아보니까 없었습니다. 종의 장막에도 없습니다. 라헬이 안장에 올려놓고 안장 위에 올라가 앉아서 아버지가 들어오니까 마침 월경 중에 있어서 일어날 수 없으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드라빔을 찾지 못했습니다.

4. 야곱이 라반을 책망함

야곱이 라반을 책망함

본문 36-37절에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라헬이 발각되서 드라빔을 빼앗기게 되었으면 일이 바로 될 뻔 했습니다. 이 때 빼앗겼으면 야곱의 일행에게 우상이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경수가 난다고 해서 속였기 때문에 우상을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솔직하게 해서 빼앗겼다고 하면 서로가 더 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이 외삼촌에게 한 말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충성스럽게 일한 것을 말함

본문 38-40절에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양을 칠 때, 물어찢긴 것은 외삼촌 것으로 하지 않고 스스로 보충했다고 했습니다. 또 도적 맞은 것도 야곱이 물어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밤낮 자지 못하고 20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일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만큼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물어냈다고 했는데, 짐승에게 물어찢긴 것을 외삼촌께 보고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물어냈다는 것입니다. 도둑맞은 것도 물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은 외삼촌의 것과 달리 무늬 없는 양인데, 어떻게 물어냈겠습니까? 자기 것은 얼룩무늬나 점 있는 것이었기에 그것
으로 물면 안 받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자기 것을 팔아서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사다가 물어주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어떤 방법으로든 물어냈다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충성되게 했는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백 마리를 맡았으면 백 마리 모두 꼭 그대로 있는 것이고, 새끼 50마리를 낳으면 50마리가 꼭 그대로 다 보존된 것입니다. 야곱에게 맡긴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천 마리 맡겼으면, 천 마리 그대로 있지, 하나도 축나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밤낮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잘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와 같은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서 맡은 일을 잘하려고 하고, 그 다음에는 물어 뜯겼든지 도둑맞았으면 자기가 물어내서라도 하나도 손실이 없이 맡은 일에 충실하게 해나가려고 하는 야곱의 충성을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 같으면 도둑맞든지 물어 뜯겼으면 그대로 보고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나쁜 사람 같으면 자기가 한 마리 잡아먹고는 도둑 맞았다고 잡아뗐을 텐데, 이런 것은 큰 죄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일 했습니다.

본문 41-42절에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5. 언약의 증거돌

언약의 돌 기둥을 세움

본문 43-49절에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나의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
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돌무더기와 돌 기둥을 쌓아놓고 증거를
삼자.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라고 하면서 그것을 라반은 아람말로 말하고 야곱은 히브리말로 ‘갈르엣’ 또 ‘미스바’라고 했습니다.

장인에게 사위로서 맹세하는 야곱

본문 50-54절에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 하였더라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이 장인으로서 자신의 딸을 박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딸을 주었으니까 박대하면 안 되고, 그 딸 외에 다른 아내를 취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딸 준 부모 입장에서는 다 이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증거가 되신다고 하면서 그렇게 안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야곱이
“네,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딸 시집 보낼 때 이렇게 보냅니다. “네가 내 딸 박대 안하겠느냐? 다른 아내를 취하지 않겠느냐?” 하고 물어보고 약속하고 보냅니다. 야곱이 이삭의 경외하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리고, 여러 형제를 위해서 떡을 먹으며 잔치를 열었다고 했 습니다. 화목연을 베푼 것입니다. 

본문 55절에 “라반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잘 되게 해주셨습니다. 잘못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잘 되게 해주셨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야곱과 아내들과 자녀들이 전부 다 여기서 몰살당하고, 가지고 온 양도 전부 다 빼앗길 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창세기 26:1-35 이삭의 창성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이삭의 창성
창세기 26:1-35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6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7그 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
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18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
로다 하였더라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26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1.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에 거하면 복 받음

본문 1-2절에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에는 흉년이 자주 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흉년이 들었는데, 이번 이삭 때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갈 것 같으니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지시하는 땅, 즉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합한 곳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곳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이
삭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번성케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합한 곳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곳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시고 또 번성케 해주십니다.

본문 4절에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합한 곳에 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말씀에 합한 곳을 떠나면 안 됩니다. 아무리 고난이 와서 먹을 것이 없고, 다 굶어 죽을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와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 그 말씀에 합한 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합한 곳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같이 해주시고 번성케 해주시고 또 자손과 천하 만민도 다 복을 받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복을 약속받았던 것처럼, 이삭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에 있으면 그 약속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2.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함

본문 6-7절에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그랄
에 갔는데, 거기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왜 누이라고 했는가 하면,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리브가를 그의 아내라고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라고 했어도 안 죽습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쓴 것입니다. 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아내라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바로 해야만 되겠는데,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이삭이 잘못한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오래 있는 동안에 이삭이 그 아내를 껴안은 것을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랄의 왕입니다. 이삭을 불러서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하고 이삭에 대해서 책망을 했습니다.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여서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10-11절에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내라고 했어도 안 죽을 뻔 했습니다. 아비멜렉이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남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죄인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또 백성 중 하나가 동침했다면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벌 받을 줄을 아비멜렉은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왜 이렇게 했느냐? 우리가 죄를 범할 뻔 하지 않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라고 했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합니다.

본문 11절에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고 하는 엄격한 도덕을 지키는 아비멜렉이기 때문에 거기 가서 자기 아내라고해도 안 죽습니다. 처음부터 아내라고 했어도 아비멜렉이 이렇게 말했을 뻔 했는데, 괜히 누이라고 해서 양심만 안 쓰고 도리어 실수 한 것 입니다. 죽을 것 같아도 솔직하게 하면 안 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서 살려주십니다.

3.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해짐

본문 12-14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그 해에 농사를 했습니다. 농사해서 백 배나 얻었습니다. 참 잘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과 소떼가 심히 많고 노비가 심히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노비는 종을 가리킵니다.

농사해서 백 배 얻는다는 것은 한 가마니 심으면 백 가마니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료 값이 있겠습니까, 농약 값이 있겠습니까? 또 수리조합에 물 값 물어줄 것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잘 오게 해주셔서 수리조합의 도움 없이도 농사가 잘 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한 가마니로 백 가마니 얻는 농사를 했습니다. 또 그 이듬 해에 백 가마니를 심어놓으면 만 가마니가 됩니다. 처음에는 열 가마니쯤 심었다고 합시다. 열 가마니면 천 가마니 얻었을 것입니다. 백 배나 얻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한 가마니에 17만원 정도 된다고 하면,
천 가마니에 1억 7천만 원입니다. 자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한 해만 더 심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 가마를 심어서 한 해에 백 배나 더 얻게 되면 십만 가마니입니다. 십만 가마니면 170억 원입니다. 170억원이면 요새도 부자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백 배나 주셨고이렇게 거부가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농사만 한 것이 아니라 양도 쳤습니다. 목축도 했다고 했는데, 양과 소가 또 심히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종들도 심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부가 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거부가 된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잘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흉년이 들었지만 그 흉년을 이기고 참으며 어려운 난관을 잘 통과해 나가면서 하나님 말씀에 합한 그 땅을 떠나지 않고 흉년과 어려움, 궁핍이 올 때에 그것을 잘 이기고 통과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백 배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잘되니 블레셋 사람이 시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시기합니다. 자기네보다 잘 되니까 시기가 일어났습니다.

본문 15-16절에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들이 있었는데 그 땅의 백성이 시기가 나서 그것을 다 막고
메웠습니다. 흙으로 메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자꾸 강해지니까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삭이 자꾸 강해지고 돈이 많아지고 세력이 세지니까 도리어 무서워했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잡아 죽이지 않고 떠나가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떠나가라고 하면 떠나는 것입니다. 이 동네에서 핍박을 하면 저 동네로 가고, 저 동네에서 핍박을 하면 다른 동네로 가라고 하였습니다(마10:23).

4. 우물 양보와 하나님의 축복

본문 17-18절에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고 하였
습니다. 이제는 아비멜렉이 떠나라고 해서 이삭이 그랄 골짜기로 갔고 거기 장막을 치고 거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그것을 거기 사람들이 메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우물이 중요합니다. 목축을 하는 데에는 물이 있어야 되는데 그 지방은 고원 지대라서 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물이 있어야 양을 먹일 수가 있고, 우물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이 다 메웠었는데, 그 우물을 이제 다시 팠습니다. 팠던 것을 다시 파니까 좀 쉬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의 이름을 아브라함 때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본문 19-20절에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서 샘의 근원을 얻었습니다. 물이 많이 난 모양입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말하기를 그 물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파기는 이삭의 종들이 팠는데, 자기네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고 했습니다.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이 우물은 다툼의 우물인 것입니다. 그 우물을 팠는데 그 사람들이 와서 자기 것이라고 다투자고 하니까 그것을 양보하고또 다른 것을 팠습니다.

본문 21절에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다른 우물을 또 팠는데, 그곳의 사람들이 또 와서 이것도 자기네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그 우물을 ‘싯나’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싯나라는 것은 성경 각주에 보면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첫 우물은 다투기 때문에 다투는 우물이라고 하여 양보하였고, 다른 곳을 파니까 또 와서 자기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제 대적이라 하는 의미의 싯나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것도 양보했습니다. 두 번째 양보했습니다. 양보하고 거기서 또 옮겨서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본문 22절에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다른 우물을 팠는데, 더이상 다투지 않
았습니다. 이번에는 다투러 안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이름하고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세번째 우물은 다투지 않기 때문에 르호봇이라 하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르호봇은 장소가 넓음을 뜻합니다. 이제는 다투지 아니하고 여기서 번성하게 되었으니까 장소가 넓다는 의미입니다. 넓은 곳에 가서 판 모양입니다.
우물을 파기는 이삭의 종들이 팠는데 그것을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와서 다투고 하니까, 이삭은 ‘우물을 가지고 난 다투고 싸우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사는 사람이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양보한다’라 고 하면서 양보하고 또 다른 것을 팠던 것입니다. 우물을 하나 파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리고 다른 것을 팠는데 또 와서 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네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적을 하면서 자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 우물도 이삭의 것이지만 그들이 와서 그들의 것이라고 대적을 하니까 양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심으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하나님께서 앞으로 좋은 것을 주실 줄로 믿고, 하나님의 인도대로만 따라간다는 신앙을 가지고 우물을 양보했습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우물을 또 팠습니다. 세 번째 우물을 팠는데, 거기에는 다투러 오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여기서 번성하라고 이 좋은 우물을 주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장막을 치고 번성을 하게 되었고, 그 이름을 장소가 넓다는 의미의 르호봇이라 이름을 붙이고 거기서 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자기의 것을 두 번 양보 했습니다. 싸우지 않고 믿음을 잘 지키면 양보해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싸우고 다투느라고 믿음을 다 팔아먹는데, 믿음이 떨어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물이 아무리 많아도 망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 잘 지키며,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또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물도 주시고 장막 칠 곳도 주시고 양 먹일 것도 주시고, 모두 다 주십니다. 믿음 지키면 다 주십니다.

본문 23-25절에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했습니다. 그 밤에 우물을 또 팠습니다. 두번 양보하고 세 번째 우물을 판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블레셋 사람들이 너희들을 핍박을 하고 내쫓으려 하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해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장막을 쳤고, 그 종들은 거기서 우물을 또 하나 팠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주셨습니다. 두 개를 양보했더니 두 개를 주신 것 아닙니까? 더 좋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처음의 두 개를 가지고 싸웠다면 양쪽 모두 서로
망할 뻔했는데, 안 싸우고 두 번 양보하고 떠났더니 더 좋은 것 두 개를 또 주신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싸우자 그래도 내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한두 번 싸우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내내 다니면서 싸우자고 할 리가 없습니다. 싸울 건수가 있어야 싸우자고 하지, 아무런 건수가 없는데 왜 싸우자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자기 것이라고 하고 둘째 번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무슨 건수를 붙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늘 이 길로 다니면서 양을 먹여서 우리가 우물을 파려고 했는데 너희가 먼저 팠다’든지 또는 ‘우리가 먼저 우물가 자리를 잡아놨는데 너희가 먼저 팠다’든지, ‘우리가 늘 이곳으로 다니면서 양을 먹였다’든지 하는 등의 무슨 건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우물 둘을 양보하고 저쪽 넓은 곳에 가니까 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넓은 곳에 무슨 건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브엘세바로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우물을 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들이 왔어도 건수를 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양보하면서 잘 되는 방법입니다. 양보하면서 믿음 지키면 잘 됩니다. 믿음 지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믿음 안 지키며 양보하는 것은 안 됩니다. 양보하면서 믿음 지키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바로 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으로 살고 충성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5. 아비멜렉이 이삭과 맹약함

본문 26-29절에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
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얼마나 잘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흉년이 들어서 거할 곳이 없이 되어서 그랄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피난을 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흉년이 들어서 블레셋 나라로 피난 간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 나라에 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백배
나 더 주셨습니다. 양과 소들도 심히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너는 우리보다 강성한즉 여기서 떠나가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못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곳을 떠나서 이제는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옛날에 양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파고 양을 먹이려고 하였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우물을 양보하고 또 다른 곳을 팠습니다. 다른 곳에 갔을 때에도 그곳에 그들이 와서 또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했는데, 또 양보했습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서 살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가지고 살 것이지 이런 우물 하나 가지고 싸워서 살고 못 사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사는 것이 우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고 하면서 양보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는 것이 우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는 것을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만 순종해서 믿음 지키면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넓은 곳에 좋은 우물을 하나 주셨고, 그 다음에 브엘세바에서 또 우물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점점 세력이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점점 많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나라의 왕이 그 친구하고 군대 장관을 데리고 그 골짜기로 찾아왔습니다. 이삭을 찾아 왔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피난민을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말하였습니다. 자 이것 보십시오. 안 믿는 사람이 봐도 여호와께서 이삭과 같이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왕이 이삭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맹약을 세워서 서로 맹약을 맺고 서로 해하지 않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삭을 해하지 않은 것처럼 이삭도 그들을 해하지 않도록 맹세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이 전에 이삭에게 선한 일만 했고 평안히 이삭을 가게 했는데, 이제 이삭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왕이 와서 서로 해하지 않는 맹약을 하자는 것을 보면 이삭이 왕의 세력과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혹은 왕의 세력보다 어떤 면에서는 좀 더 번성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 왕이 “우리가 너희는 해하지 않지 않았느냐?”고 하며 “우리가 서로 해하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남을 해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삭이 처음에 피난 갔을때, 블레셋 왕이 그를 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처음에 조금 번성했을 때에도 이삭을 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삭에게 ‘이것이 어디라고 우리나라에 와서 양을 먹여서 이렇게 부자가 되었느냐? 우리 풀이다. 우리
풀 가지고 양 먹였으니까,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없애 치워라’ 하면 다 죽일 수가 있습니다. 왕이 죽이려고 하면 그것 하나 못 죽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블레셋 나라 왕이 이삭을 죽이지 않고 평안히 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죽일 만한 세력이 있어도, 안 죽이고 선을 행해야 됩니다. 해할 만한 세력이 있고 기회가 있어도 해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평안히 대접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멜렉도 여기서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평안히 너를 선대하지 않았느냐? 고로 맹약하자.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 시는 것을 분명히 우리가 보았다. 고로 맹약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에 이삭이 “나를 이전에 내쫓은 사람들이 왜 왔느냐? 우물을 둘 다 빼앗은 자들이 왜 왔느냐?” 하면서 보복을 했다면 이삭이 여기서 망합니다. 또 전에 거기서 쫓겨난 것 아닙니까? 그 다음 우물을 둘 다 빼앗긴 것 아닙니까? 이제 이삭이 세력이 세지니까 찾아온 것 아닙니까? 이삭이 여기서 보복했다면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30-31절에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고 했습니다. 자 이것 보십시오. 이삭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상대는 전에 자
신을 쫓아낸 사람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자기의 원수입니다. 자기를 쫓아낸 자기 원수라는 것입니다. 우물을 다 빼앗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재물을 빼앗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잘 대접을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선대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고 하였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 있으면 떡 하나 더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들끼리 먹지 말고 떡 하나를 내게 가져오십시오. 자, 이것 보십시오. 원수가 왔는데, 자기를 쫓아낸 사람인데, 우물이 재산인 때 자기 재산을 다 빼앗은 그런 사람이 왔는데, 그들을 위해서 잔치하고 잘 대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 반드시 그 보응을 받게 되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선에 대한 보응을 또 받게 됩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화목하십시오.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원수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고 기뻐하십니다.

지방에 어떤 목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 교회의 집사가 자기에게 시험거리 노릇을 한 모양입니다. 목사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가 음식을 차려놓고 다른 집사들을 몇 명을 초청하고 그 목사도 초청을 했습니다. 과거에 시험이 좀 있었지만 이제
는 잘 풀고 지내려고 목사를 초청하고 또 집사 몇 명도 초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잘 차렸다고 합니다. 그 날은 목사가 가서 그저 먹기만 했으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주고 먹기만 했어도 화목이 되는 것인데, 가서는 말하기를 집사가 잘못했으니 자복을 하면 이것을 먹고 자복하지 않으면 안 먹겠다고 했답니다. 잘 했습니까? 자복을 받아야 음식을 먹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사가 자복을 했겠습니까, 안했겠습니까? 그 목사는 자복을 받고 이것을 먹어서 그 집사를 꼼짝 못하게 만들게 할 생각을 가지고 했는데, 집사는 자복을 안 했습니다. 자복 안 했으니 목사가 음식을 안 먹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 차려놓은 것을 다른 집사들이 다 나눠먹고 목사는 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집사는 다른 교회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는 쫓겨났습니다. 그 집사가 쫓아낸 것이 아니라, 다른 집사가 보니까 이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음식을 먹었으면 되지않습니까? 집사가 음식을 차렸는데, 목사가 잘 안 먹는 것으로 차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안 먹는 음식이라도 차려주면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으면 됩니다. 사람이 먹는 것은 다 먹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목사를 위해서 음식을 잘 차리고 모신 것은 그 집사가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가 악독하여 그것도 하나 용납 못하고 집사에게 자복을 받고 먹겠다고 하다가 일이 다 틀어진 것입니다. 자기도 다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집사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이삭이 하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원수가 된 사람도 잔치하고 대접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다 없어집니다. 원수를 없애야 좋은 세상이 되지, ‘저 사람이 내게 원수이므로 나도 원수다’ 하면 내내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다 떠나고,
그 다음에는 피차 물고 찢어지면서 둘 다 망합니다. 원수가 있으면 없애십시오. 화평 하라는 것입니다. 잔치하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맹약하자고 하니까 이삭이 맹약 해준 것입니다. 하자는 대로 해주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본문 32-33절에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고 했습니다. 아비멜렉과 이삭이 맹약한 그 날에 우물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세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라고 했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세바’는 맹세라는 뜻이고,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이 아비멜렉과 맹세했으니까 맹세의 우물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이것은 잘 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찾아온 것은 참 잘 한 것이고, 이삭이 잔치를 베풀고 대접한 것도 참 잘 한 것이며, 맹세해달라고 하니까 맹세해준 것 또한 참 잘 한 것입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해달라는 대로 해줘서 화목하는 것이 좋지, 조건을 대서 ‘네가 화목을 하면 내가 맹세해주겠다. 우물 판 것 두 개를 네가 빼앗았으니
까, 그것 둘을 다 내놓으면 내가 맹세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못 한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저 무조건 사랑하고 화목 하는 것입니다. 두 개를 안 빼앗기려고 블레셋 나라하고 싸웠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그 다음의 우물들을 발견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안 주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싸우다가 둘 다 망할 것이 아닙니까? 양보하고 믿음 지키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많은 복을 주셔서 잘 되고, 계속 잘 되어 나가니까 왕이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니 이제는 서로 해하지 않기로 맹약하자”고 한 것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복입니까? 상대가 화목하자고 할 때는 조건부로 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영접해서 대접하고, 맹약해달라면 해주고, 사랑하고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6. 에서가 아내를 취함
본문 34-35절에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했는데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방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헷 족속은 이방 나라이므로 그 부모에게 근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서는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에게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2017년 1월 2일 월요일

창세기 16:12-16 육에 속한 신자 이스마엘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육에 속한 신자 이스마엘
창세기 16:12-16

12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1. 육신에 속한 신자 이스마엘

갈라디아서 4:22-26절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계집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과, 자유하는 여자인 사래에게 난 아들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했고 이삭은 약속으로 났다고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29-30절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도 육신에 속한 신자가 있고 영에 속한 신자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에 속한 신자이고, 이삭은 성령에 속한 신자인 것처럼 교회에도 두 가지 부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절에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신령한 신자가 못 되었고 육신에 속한 신자라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아이같이 대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는 육신의 속한 신자와 영에 속한 신자가 있는데, 육신에 속한 신자가 강하겠습니까? 영에 속한 신자가 강하겠습니까? 외부적으로 볼 때 육체적으로 누가 세력이 강할 것 같습니까? 육신에 속한 신자가 강합니다. 

본문 12절에 “들나귀 같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친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육신에 속한 신자가 강합니다. 모든 사람을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신자입니다. 육신에 속한 신자가 세력도 세고, 일도 잘하고, 숫자도 많이 모이고, 모든 것이 세상 면으로도 잘 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합니다. 교회도 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끌어들이면 그 사람들이 일을 잘합니다. 이스마엘들이 돈도 잘 벌고, 힘도 세고, 일도 잘하고, 그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면 뭐든지 잘 해 냅니다. 직분을 주면 그 직분에 힘을 많이 씁니다. 돈도 많이 내고, 그러나 이 이스마엘은 인본주의 써서 얻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경대로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4:4절에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했는데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여종을 취해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성경대
로 자기 몸에서 날 자를 후사로 삼으려고 인본주의를 써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요새도 인본주의를 써서 얻은 교인은 이스마엘 교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힘을 많이 씁니다. 일도 잘해서 교회는 잘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갈이 사래를 멸시했던 것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이스마엘 교인은 처음에는 복종하다가, 조금 지나면 불순종하고 멸시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이스마엘의 방법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교회로 갑니다. 이스마엘 교인을 간섭하면 다른 데로 가지만, 다른 데 가 봐야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2. 이스마엘의 특성

“창세기 16:6절에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이 잉태한 것을 알고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다가,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까 도망한 것처럼, 이스마엘들은 자기 방법을 쓰다가 안되면 보따리 싸고 도망합니다. 본문에서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내쫓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따리 싼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방법은 보따리 싸는 것입니다. 보따리 쌀 때에 “보따리 싸면 되겠는가? 보따리 싸지 말라”고 한번은 권면해야겠습니다. 그렇게 권면하고 그래도 보따리를 싸면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야 합니다.
벼룩이 뛰어야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하루 종일 뛰어도 1km도 못 뜁니다. 하루살이가 암만 날아가도 얼마 못 날아가는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두면 보따리 싸가지고 기껏해야 광야로 달아납니다. 다른 데 갈 데가 없습니다. 광야로 달아날 때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서 샘물 옆에 있는 하갈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람을 피하여 도망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돌아가서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사자가 말해 줍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로 하는 사람 같으면 돌아가라고 말해주는 것이 원리원칙입니다.
우리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졸업생의 매부도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졸업을 했는데 얼마 있다가 자기 생각과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교단을 나가서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때 그의 매부인 목사가 “우물도 한 우물을 파야 된다”고 하며 배우던 곳에서 충성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 신학생이 그 말을 듣고 고민을 하며 망설였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방황하다가 요새는 어떤 이상한 교파에 간 모양입니다. 들려오는 말이 장로교도 아닌 다른 교회에 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데 목사도 아직 안 됐다고 합니다. 도망가야 광야생활입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자기가 자라나고, 오랫동안 길림을 받은 그곳이 낫습니다. 진리가 옳은 데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이삭의 동방에서 살도록 하심

이삭과 가까이 있는 것이 축복임

돌아가서 복종하라는 사자의 말을 듣고 하갈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것은 참 잘한 것입니다. 하갈이 돌아와서 복종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줘서 그 자손을 잘 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스마엘이 들나귀와 같이 되어서 강하고 창성하고 번성해서 많은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이삭의 동방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의 모든 형제라는 것은 이삭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마엘을 이삭의 동방에 살도록 하신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멀리 떠나 살도록 하지 않고 동방에서 살도록 한 것은 이삭의 영향력을 받아
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그대로 하면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축복해주고, 이삭을 통해서 구원운동을 하실 것입니다. 이삭의 영향력을 받아 이스마엘도 그대로 해서 복을 받도록
축복한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빛은 가까운 곳에서 부터 비춰 나갑니다.
마태복음 5:13-15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집안사람은 가까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빛은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비춰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마엘 자손을 하나님께서 사랑해서 이삭으로부터 빛이 비춰나가서 영향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떠나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당 가까이에 있는 것이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는 것이 복 받는 것이고, 교회 사찰 직분 맡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찰도 몇 년 전에 사찰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그만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문지기가 복이 있다 했는데, 교회에 있는 것이 그 얼마나 복이냐? 보이는 것이 예배당이고 성도들이니 이것이 큰 복인데 왜 이 복을 떠나려 하느냐?”고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 옆으로 이사 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옆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 옆에 있으니 새벽기도 오기 좋고, 또 늘 목사님 만날 수 있고, 교인들 만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또 교회가 바로 하면 다른 교회가 보고 배우니까 그 배운 교회도 복 받습니다. 직접 인도는 안 받아도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따라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기도원 사경회와 교역자 수양회의 전통

기도원 집회 하는 것은 처음에는 우리 기도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원이 삼각산에 하나 있었고, 경남에는 무척산에 기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운몽 목사님이 하는 기도원이 용문산에 있었고. 그 다음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도원 집회를 1953년인가 54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김현봉 목사님 모시고 집회를 일 년에 두 번씩 했는데 그땐 우리 밖에 하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땐 기도원이 많이 없었습니다. 여름에 목회자 수양회 하는 것도 우리밖에 모이는 데가 없었습니다. 우이동 가서 천막을 치고, 1955년인가 몇 년 후부터 매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배워갔습니다. 이제는 기도원을 각처에 세워놓고, 그곳에서 교역자 수양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 보고 배
운 것입니다. 또 그때는 오후 2시에 예배 드리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김 목사님 계실 때 아현교회가 오후 2시에 예배 드렸습니다. 그것을 명륜교회가 배워서 2시에 예배 드렸는데 그 다음엔 각처에서 배워가서 지금은 오후 2시에 예배드리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합동 측에도 있고 다른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까운 곳에서 바로 서 나가는 교회가 있으면, 그 옆에 교회가 배우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형제의 동방에서 산다’는 것은, 이스마엘이 육에 속한 성도이지만 그래도 이삭 가까이에 있으면 보고 배워서 바로 하라고 옆에 두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나가면 비참하고 불쌍합니다. 바른 인도를 받는 것이 좋고, 또 가까이 참여하는 것이 좋고, 바로 나가는 데서 배우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진리로 바로 나가는 교회와 목회자를 가까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사경회로 모였는데 모인 것이 복입니다. 모이니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그 얼마나 복입니까! 그리고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으니 복입니다. 여기 사경회에 오지 않으면 못 고칩니다. 지적을 받고 고칠 것을 고치면 상당히 큰 수확인 것입니다.

4.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함

이스마엘이 육에 속했으므로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함

영에 속한 신자보다 육신에 속한 신자가 세상적으로나 육체적인 면에서는 늘 앞섭니다. 육에 속한 신자가 앞서 있고 강해서 잘 되어 나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육에 속한 신자가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할 것입니다. 앞으로 신령한 신자를 핍박할 자는 속화된, 육에 속한 신자인 것입니다. 형제간이라도 육에 속했다고 하면 언젠가는 신령한 성도를 핍박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핍박한다고 했으니깐 핍박 받을 것을 미리 예산에다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가 같이 믿어도 교회에 직분이 있어도 육으로 믿는 사람이 영으로 믿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왜 핍박을 합니까? 이스마엘이 육에 속해 있는 까닭에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신자는 육에 속한 자와 맞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노선이 다르니까 핍박을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시기심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맏아들인데 동생 이삭을 아버지가 축복을 해 주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복이 즉 하나님의 축복이 동생에게 다 갈 것 같기 때문에 핍박을 합니다. 자기에게는 보이는 것은 없고, 아버지가 자기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고, 또 형이라는 권리문제, 또 이삭에게는 무엇이든(축복까지) 다 주지 않겠나 하는 이권문제에 때문에 핍박을 합니다. 이렇게 시기와 권리다툼과 이권문제 때문에 핍박을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자리에 서면 누구나 다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형인데 모든 것이 동생에게로 가는데 형인 이스마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연히 핍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신자들이 이스마엘을 이기는 법

1) 영으로서 육의 욕심을 버릴 것 

그러면 영에 속한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스마엘은 계집종의 아들이 아닙니까? 계집종을 아예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잉태한 것을 깨닫고 주인을 멸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으로써 육을 눌러야 합니다. 영으로써 육을 이겨야 영권이 앞섭니다. 영으로써 육을 제어해 나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집안이 바로 되고, 교회도 바로 되고, 세상도 바로 되고, 자기 개인도 바로 되는 것입니다. 영으로써 육을 이길 때에 신자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육신의 것이 언제나 영보다 강하지만 육을 앞세우지 말고, 영으로써 육을 이기면 생명이 있습니다. 이기지 못하면 생명이 없습니다. 욕심을 이겨야 됩니다. 욕심을 제어하면 살고, 욕심을 제어하고 쳐서 복종 시키지 못하면 영이 죽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욕심 즉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죽이면 살고,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욕심을 언제나 제어해야 합니다.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목회자라고볼 수 없습니다. 성도는 욕심을 버려야 됩니다. 욕심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이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기는 데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기지 못하고 욕심을 따라가면 망합니다.
안 믿는 사람도 욕심을 이겨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육신을 이겨야 됩니다. 마귀는 욕심을 충동시켜 타락시키고, 안일주일에 빠지게 하고, 향락주의에 빠지게 만들어서 범죄하게 만듭니다. 계속해서 욕심을 이겨나갈 때에, 영으로써 육(이스마엘)을 이길 때에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믿는 일을 할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도 조금 할 수가 있습니다. 욕심 안 버리면 하나님의 일 못합니다. 욕심으로 하면 하나님 일 한다고
하다가도 마지막엔 자기 일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욕심을 버려야 됩니다.

2) 자족을 배울 것 

욕심을 버리고 자족을 배워야 됩니다. 논어에서 曲肱之樂(곡굉지락) 즉 '팔 베개의 즐거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공자가 “飯疏食飮水(반소사음수)하고-나물 먹고 물 마시고,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라도-팔 베개를 해도, 樂亦在其中(낙역재기중)이니-즐거움이
그 속에 있나니,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는-옳지 못한 부귀는, 於我如浮雲(어아여부운)-나에게는 뜬구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 베개를 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어서 옳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물먹고 물 마시고 그릇이 없어 소쿠리에 밥 담아 먹고, 바가지에다 국 떠다 먹고, 베개가 없어서 팔꿈치 베고 자도,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도덕군자들도 욕심을 버리고 도를 닦아 나가면 이렇게 즐거워하면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욕심을 버리니까 불의한 부귀영화도 헛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심을 버리고 安貧樂道(안빈낙도)의 삶을 누리면 즐거움을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지만 이것도 잠시의 즐거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평강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찾으면 걱정이 하나도 없고, 신령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령한 길을 걸어가면 교인들이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대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시켜서 물어다 먹이시듯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않아도 다 주십니다.
목회자들은 밥그릇 없으면 소쿠리에다, 국은 바가지에다 떠 먹고, 나물먹고 물 마시고 베개 없으면 팔꿈치 베고 자면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고생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각오하고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지고 가겠다는 것은 목회자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 것이나 베고 자도 괜찮습니다. 지난 여름에 용인에천막치고 기도할 때 베개를 안 가져갔습니다. 공기 불어넣는 베개가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안 가져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손
전등을 베고 잤습니다. 손전등은 베개하기 아주 좋았습니다. 아무 베개라도 베고 자면 되지 꼭 좋은 베개를 베고 자야 좋겠습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욕하면 먹자. 때리면 맞자. 죽이면 죽자.” 이렇게 “3자”를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굶어 죽을 각오. 또 얼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 매 맞든지 총 맞든지 맞아 죽을 각오. 아예 굶어 죽을 각오로 나가면 쌀 한 말 가지고도 굶어 죽지 않습니다. 또 목회자들 중 어떤 목회자는 저녁에 용산 시장을 가곤 한답니다. 가난한 목회자인데 왜 거기에 가냐고 물어보니까 저녁에 가면 천원만 가져가도 한 광주리씩 채소를 가져온답니다. 몇 백 원을 가져가도 한 광주리 가져온답니다. 저녁에 팔다 남아서 버리려던 것인데 한 이백 원만 줘도 한 광주리나 줍니다. 떡잎사귀들, 시퍼런 것들 그것이 영양이 더 많습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우거지 국 한 바가지 해 먹으면 고혈압에 안 걸립니다. 변비도 안걸리고 아주 건강합니다. 우거지 국이 좋은 것입니다. 보통은 한 달에 쌀 한 말은 구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교회 일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쌀 한 말 안 주시겠습니까? 또 용산 시장 가서 몇 백 원만 가져가면 채소 한 광주리 가져 올 거니까 소금 쳐서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활의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먹여 살리십니다.

3) 죽을지언정 대접받지 않을 각오를 가지고 나갈 것 

영으로써 육을 이기고, 욕심을 이기는 데에 생명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을 배우고 대접은 죽을지언정 안 받으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바울도 죽을지언정 대접을 안 받을 각오를 가졌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5절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고 한 것은 ‘죽을지언정 교인들에게 대접을 안 받겠다는 결심하고 욕심을 버리고 자족을 배우고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한 줄 아는 생활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목회자 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금 있으면 조금만 가지고 맞춰 살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많이 가진 대로 하나님께 바로 해야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맞춰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조금 주시면 첫째, 쌀부터 사 놓으면 됩니다. 쌀하고 연탄부터 사 놓으면 됩니다. 쌀하고 연탄하고 소금 한 말 사두면 다른 건 다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쌀 가지고 연탄에다 밥해 먹고, 소금을 반찬 삼아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채소 도매상에 저녁 때에 가서 싸게 파는 채소 사다가 먹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최대한 낮아지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왜 못 하겠습니까? 할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의복이 없으면 의복 싸게 파는 곳에 가면 싼 옷이 많습니다. 아주 싸게 덤핑하는 데서 사면되는데 그것도 살 만한 돈이 없으면 조금 있는 목회자들이 자기가 안 입는 의복 하나, 둘씩 모아서 줘도 됩니다. 목회자들은 정 없으면 신청을 하십시오. 내 것이라도 하나 줄 테니까. 그런데 내 것을 주면 좋겠는데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두 사람만 옷 몇 개를 줬습니다. 내 구두 맞는 사람 있으면 하나 주려고 합니다. 누구든 저에게 오십시오!
하여튼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욕심을 이기고, 하나님을 방패로 삼고, 하나님을 상급으로 삼고 나가십시오. 하나님을 상급으로 삼아야 상급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방패로 삼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십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 것을 제 것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상급도, 방패도 안 되어 주십니다. 제 것으로 삼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 것으로 삼아놓고, 다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을 위해서 써야만 하나님께서 상급이 되어주시고, 그 사람 편이 되어주십니다. 그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5. 육에 속한 이스마엘 신자도 감찰해 주시는 하나님

본문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감찰하고 계셨습니다. 육에 속한 신자도 하나님께서 감찰해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감찰해 주시지만 영에 속한 신자와는 종류가 다릅니다. 하지만 육에 속한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감찰해
주시고 또 창성케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모시고 산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 우리도 창성한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영에 속한 것도 약속의 것도 말씀에 선 것도 아닙니다.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육에 속한 신자도 예수를 구주를 믿었으면 구원 받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육에 속했지만은 예수를 믿었으니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해 받는 구원입니다. 해 받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쫓겨나서 광야에서 죽게 된 비참함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 불러서 “돌아가 상전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부르짖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복종하게 만들어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한 것입니다. 너의 고통을 하나님이 들어 서 네 앞 길을 열어준 것을 생각해서 하나님의 인도대로 계속해서 동방에서 살며, 잘 순종해서 창성하라고 이런 이름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는 아브라함이 86세였습니다. 아브람이 86세 될 때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창세기 15.5-18 믿음으로 의인이 된 아브람이 받은 복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창세기 15:5-18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8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
니 14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 믿음으로 의롭게 됨 (以信得義)

본문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네 자손이란 장차 아브람의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자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뜻입니다. 즉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뜻입니다. 정식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도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그리스도를 약속한 최초의 복음이 있습니다.

본문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말씀을 믿으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을 의인이라 칭해주셨습니다. 아브람의 자손 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을 아브람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로마서 4:3절에도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절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아브라함부터 말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정식으로 그리스도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네 몸에서 날 자가 아들이 된다, 그 아들을 통해서 앞으로 그리스도가 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즉 아브람이 99세 때이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89세로 아이를 나을 수 없는 연령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다 말라져서 꽃이 필 수 없는 때인데, 그래도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람이 100세 때에 이삭을 주셨고, 또 그 이삭으로 말미암아 여러 자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건설 되었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그리스도를 약속한 약 2000년 후에 아브람의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또 아브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모든 성도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너는 의인이다”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피 흘려주셨고 또 죽기까지 복종하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를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인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을 사형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즉 우리가 일생동안 지을 죄 값을 예수님이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믿습니다”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 받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켜 주
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대형(代刑)과 대행(代行)입니다. 즉 우리 대신 형벌 받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이 절반이고, 우리의 의를 대신 행해주신 것이 절반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면이 두 가지가 다 옵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것도 오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의가 우리에게 입혀집니다. 그러므로 “믿습니다” 하면 의인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죄 사함 받고, 의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의인이 되었습니다.

구원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직도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법적으로는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었지만 속에는 부패
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의인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부패성을 다 벗어놓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갑니다. 그러므로 오실 예수님을 믿어서 아브람이 의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다 의인이 됩니다. 그래도 법적(法的)으로는 의인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부패성을 점점 빼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해야 되고, 또 계명을 지켜야 됩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아브람의 자손 된 우리들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2. 의인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창성하게 하심

의인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창성해지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믿음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통해서 믿음의 자손이 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믿음의 자손으로 기르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또 새로운 사람을 전도해서 교회로 데리고 나오면 믿음의 자손입니다.
개척교회를 세워서 전도하는 것도 믿음의 자손입니다. 또 선교사를 보내어서 그곳의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믿음의 자손입니다. 지금 선교사 안 받아 주는 나라가 많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선교사를 안받아 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라디오 방송으로 전도하는 것이 상당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 미국 LA에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의 남철우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 말씀하시기를 전 세계에 방송국을 1000개를 세우겠다고 계획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선교사를 안 받아 주는 나라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므로, 라디오
방송으로 선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설교 방송을 듣고 온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을 믿음의 자녀로 인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믿음의 자녀로 만들려면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며, 성경을 가르치는데 힘을 많이 써야 됩니다. 아브람이 지금은 자녀가 없지만 앞으로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두 번째 허락은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심

본문 7-9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을 섬기는 지방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그리스도를 약속
해 주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할 때에 아브람이 무조건 그곳을 떠났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서 말씀만 따라간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의 자손이 번성해지니까 땅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한 땅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어디까지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본문 18절에 보면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애굽 강은 나일 강입니다.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는 얼마나 많은 땅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서 그 땅을 자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솔로몬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솔로몬 때에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솔로몬의 영향력에 들어갔고, 솔로몬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없긴 왜 없습니까? “믿습니다”하며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 사람을 위해서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했으니 내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나라가 있습니다. 또 나라가 망하고, 잘되고, 흥하고, 쇠하는 것도 하나님이 다 성도를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구원 역사를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간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애굽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유익을 주시려고, 또 그것을 통해서 연단하시려고 주시는 것입니다.

3. 아브람이 제물을 쪼개어 제사를 드림

본문 8-9절에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새끼를 취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을 증거를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해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삼년 된 암소라고 했는데, 소나 양이 제대로 다 크려면 삼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다 큰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신령한 뜻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께 제물이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33세는 사람으로 말하면 다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년 된 소나 양 등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제물이 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을 믿으며 삼년 된 암염소나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취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해 주신 것, 제물이 되어 주신 것을 믿고, 우리도 하나님께 몸 바치며 나가야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하며, 몸을 하나님께 바쳐 놓고 나가야 합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었는데 소와 양과 염소를 둘로 쪼개어 서로 마주보고 놓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17절과 5:8절에 새는 제물로 드릴 때 아주 쪼개지 말라고 했습니다. 절반 쪼개 놓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약의 뜻도 있습니다.

본문 10-11절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솔개는 독수리보다 조금 작은 새로 마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마귀의 시험이 오는 것을 뜻합니다. 솔개가 올 때에 아브라함이솔개를 어떻게 했습니까? 쫓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마귀가 와서 제물을 더럽히려고 합니다. 또 자기가 먹으려 하는데, 이 때에 솔개를 쫓아야 합니다. 솔개를 쫓아내는 신앙, 즉 마귀를 쫓아내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요새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울증에 걸린 것은 솔개가 온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하나님이 나와 같이하신다”하면 우울증은 다 물러갑니다. 솔개를 쫓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려고 할 때에 솔개가 옵니다. 어떤 사람은 손님이 와서 예배 드리러 못 간다고 합니다. 손님이 오면 같이 나가자고 하면 되지, 왜 못나옵니까? “오늘은 주일이니까 예배당에 같이 갑시다”하며 같이 나오면 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교회에 안 간다고 하면 “기다리라. 나는 갔다 올 것이다”하면 됩니다. 왜 손님한데 잡혀서 교회에 못나옵니까? 그것이 솔개한데 잡힌 것입니다. 즉 마귀한데 잡힌 것입니다. 하여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 간다”하는 신앙을 가져야 마귀를 이기는 신앙입니다.

4. 아브람에게 계약하신 하나님

본문 12절에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제사 드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아브람이 제사 드리다가 잠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사백년 종살
이 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이 잠든 죄 값으로 사백년 종살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었기 때문에 애굽에서 사백년 종살이 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잠든 것은 신앙의 잠이 든 것입니다. 신앙의 잠이 든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엘리아도 신앙의 잠이 들어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여 달라고 하였고, 요나도 신앙의 잠이 들어서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도 신앙의 잠이 들어서 범죄했습니다. 신앙의 잠이 들 때가 있는데, 신앙의 잠이 들면 캄캄해지고 두렵습니다. 믿음이 괜찮은 사람들도 신앙의 잠이 들
어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브람이 신앙의 잠이 들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벌써 신앙의 잠이 든 증거입니다. 성도는 두려워하지 말고 극강담대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믿습니다”하며 나가야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두려워하면 그 다음에는 마귀가 와서 누릅니다.

본문 13-14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또 애굽에서 나올 때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많은 연단을 받고 나온다는 것이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백년 동안 종살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즉 사백년 후에는 이 땅을 반드시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문 15-17절에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하였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쪼갠 쪽으로 불이 지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약을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확증입니다. 즉 “제사를 받았다, 제물을 받았다, 계약은 지킨다”는 뜻으로 불이 지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의인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창성하게 해주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고, 또 연단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인도해 주셨는데,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짐으로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창세기 11.1-32 바벨탑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창세기 11:1-32

1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0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데라는 칠십 세에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 바벨탑을 쌓음

바벨탑을 쌓은 이유

본문 1-4절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세계의 언어가 하나였고, 아직 말이 각 나라의 말로 갈라지기 전이었습니다. 땅의 구음이 하나이고, 그 자손들이 다 동방으로 옮겨서 시날 평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시날 평지가 상당히 넓고 살기가 좋았던 모양입니다.이제 바벨탑을 어디까지 쌓자고 그랬습니까? 하늘에까지 닿도록 쌓자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왜 쌓자고 했습니까? 이름을 내는 것과, 또 흩어짐을 면하는 것과, 또 홍수를 면하려고 쌓았습니다. 이전에 노아시대에 홍수로 다 멸망 받은 것이 생각이 나서, 또 홍수로 멸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이제 대를 높이 꼭대기로 하늘까지 쌓아서, 아무리 홍수가 임해도 꼭대기까지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역청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역청으로 흙을 대신해서 쌓으면 물 샐 틈이 없어 홍수가 나더라도 물이 안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며, 또 우리의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쌓는데, 우리가 하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하나님 이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니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으로 살아야 될 자들인데, 하나님은 뒷전에 돌려놓고 자기들끼리 대를 쌓자고 했습니다. 또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두고 다시 홍수가 나도 우리가 침몰되지 않게 꼭대기까지 대를 쌓자, 우리 이름을 내자고 단결을 했습니다.
온 땅 사람들이 모여서 지면에 흩어지지 말고 같이 살자고 일치단결 했습니다. 또 일치단결해서 그 대와 탑을 높이 쌓았는데 공사가 착착 진행이 되었습니다. 온 백성이 다 모여서 그것을 쌓는데 얼마나 진행이 잘 되겠습니까? 탑이 자꾸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뒷전에 놓고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긴 섬겼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물론 노아의 자손이니까 하나님을 섬겼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을 주인과 주권자로 모시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자기들끼리 탑을 쌓으려고 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멸망 시키지 않겠다고 무지개를 두고 계약을 했는데도 그 계약은 뒷전에돌려놓고 믿지 않고, 다시 홍수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쌓아서 홍수를 면하자, 또 우리 이름을 내자, 이 탑을 높이 쌓아놓으면 후대에도 우리 이름이 얼마나 나겠느냐, 또 우리가 이 땅에서 흩어짐을 면하자, 그냥 있으면 흩어지겠는데 대를 쌓고 있으면 흩어지지 않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를 높이 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섭섭한 것은 하나님을 뒷전에 돌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것, 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한 것, 말씀을 뒤에다 세워놓고, 뒷전에 돌려놓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고 말씀이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단결하고, 자기들끼리 견고히 하고, 자기들끼리 흩어지지 아니하고, 자기들끼리 후대에 전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야 되겠는데 우리끼리 일해보자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해보자 그래야지, 우리끼리 일해보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일해보자라고 했어야 하는데, “우리끼리 일해보자”고 한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뭐 해보자는 생각을 다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이용당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대로, 하나님만 위하고, 하나님의 주장을 받고, 하나님께 이용을 당하고, 하나님의 명령만 순종하고, 그 뜻만 이루어드리면 인간의 공로 하나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흩어지지 않게 해주시면 흩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흩어지게 해주시면 흩어질 것이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자기네끼리 흩어지지 않아야 되겠다, 이런 결심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뜻만 생각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본 바벨탑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고 인간의 단결로 살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힘과 사업으로 보호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보호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세력 확장으로 살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과 세력 확장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넷째는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 영광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은 인본주의입니다.
또 진리보다 통일 단결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 명예영광주의입니다. 인간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주의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창세기 11장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바벨론 나라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4:30절에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건설하자’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나의 도성을 삼고”라는 것은 '내 것이다’라는 것인데, ‘우리 것이 커져야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는 말은 '우리의 이름을 내자’와 같은 것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제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것, 인간의 것으로 삼는 것,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잘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베드로전서 5:13절에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로마를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했는데,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바벨론과 같습니다. 다니엘 때 바벨론은 세계의 주권 국가로 메대바사 전에 있는 나라입니다. 세계를 통일하고 세계를 주장하는 주권국가가 바벨론입니다. 베드로 때에는 로마가 세계 주권국가였기 때문에그 나라가 바벨론인 것입니다.

말세의 바벨탑

또한 요한계시록 18:3-8절에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세의 바벨론입니다. 말세의 바벨론은 인본주의 세상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 나라가 다 바벨론입니다. 인본주의로 높아져서 하늘에까지 닿으려고 하는 이 세상 나라들, 하나님으로 살지 아니하고 자력으로 건설하고 자력으로 무엇을 다 하여 살려고 하는 이 인본주의의 세상들, 하늘에까지 높아지려고 하는 이 세상 사람들,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자기들의 힘과 세력을 확장해서 살고 하나님의 보호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사업으로 살려고 하는 이 세상 나라들, 그것이 바벨론인 것입니다. 정치적 바벨론, 종교적 바벨론, 문화적 바벨론이 있습니다. 말세는 바벨론 세대입니다. 정치적 바벨론과 국가적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나서 ‘국가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세력과 자기들의 건설과 자기들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점점 높아져서 하늘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나라들이 바벨론입니다. 문화적 바벨론, 과학적 바벨론도 있습니다. 이제 인공위성 같은 것을 발사하여 달나라도 가고 별나라도 가는 과학 만능을 부르짖고, 하나님보다 과학을 더 크게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 과학으로만 살려고 하는 과학의 바벨탑을 오늘날 쌓고 있습니다. 소련에서는 인공위성을 타고 가면서 아무리 천당이 있나 하고 쳐다봐도 천당이 없다고 발표했답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공중에 올라가면 그것이 다 인줄 알고, 그 이상은 없는 줄 알고,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의 바벨탑입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를 더 영화롭게 하고, 자기를 더 높이려고 하는데, 이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 바벨탑이 있는데, 종교적 바벨탑을 쌓는 것은 진리보다 각 종교간의 단결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나서 단결, 세력 확장, 세력과시, 명예 영광주의로 나가는 것이 종교적 바벨탑입니다. 진리로 하나 되고 진리를 세워나가고 진리를 높이고 진리를 믿음으로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중히 여기기보다는 종교적 단합을 위주로 합니다. 그래서 여러 교파와 종교들이 연합운동을 하는에큐메니컬운동인 WCC 같은 것은 종교적 바벨탑입니다. 아무리 그 세력이 크고 하늘에 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종교적 바벨탑입니다.
진리를 세워나가지 않고 세력만 크게 만들려하고 숫자만 많게 하려 하는 바벨탑입니다. 교단도 진리를 세워나가지 아니하고 교단만 크게 만들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 됩니까? 교단 바벨탑이 됩니다. 교단은 진리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진리는 세워나가지 않고, 인간의 단결과 교세확장을 위주로 교단을 크게 만들려고 하면 교단적 바벨탑이 됩니다.
에큐메니컬은 에큐메니컬대로 바벨탑을 쌓아서, 진리를 양보하고 여러교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신학까지 하나가 되고,. 보수는 겉으로는 보수를 내세우지만 실제 WCC에 들어가서는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세력 확장에 더욱 힘을 씁니다. 종교적 바벨탑이 높아지는 지금, 기독교 100주년 기념을 한다면서 바벨탑을 또 쌓고 있습니다.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바벨탑을 쌓는데 신신학과 신비주의자들이 연합해서 100주년 기념행사를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100주년 행사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진리가 없습니다. 신비주의도 용납하고 온갖 인본주의를 다 쓰며 진리를 떠나서 교단만 확장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크게 하려고 하는 바람에 진리 세우는 것이 무너졌습니다. 목적이 크게 만드는 것이니까, 잘못된 것을 다스리면 커질 수가 없으니 진리를 세워 나가지 못합니다. 바른 진리를 세워 나가려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무조건 다 갖다가 넣어서 교파 하나 크게 만듭니다. 이것이 교파 바벨탑입니다. 진리를 세우기보다는 교회 확장시키는 데만 중점을 두었단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은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데, 예배당은 몇 천 명 들어가는 것 지어놨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교인수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채우려니까 보통해서는 안되겠으니까 신비주의로 나갔습니다. 이 교회는 보수 교회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예배당을 다른 데로 옮겨 갔는데, 옮겨가기 전에는 교인이 얼마 없었습니다. 불과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교회였는데, 옮기면서 굉장히 크게 지어놨습니다 세계 최고로 하려고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이전에 있던 목사는 내보내고, 이제 신비주의 목사를 데려왔습니다. 장로교도 아니고, 순복음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인데 그 교회가 지금 굉장히 큰 교회가 된 모양입니다. 큰 교회 됐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교회는 신비주의 다 된 것 아닙니까? 교인 많이 모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예배당 잘 짓는 것을 위주로 하고, 교회 난방장치 잘 하는 것으로, 세계 제일 잘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이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데 인간의 힘과 단결로 외적으로만 커지고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종교적 바벨론입니다.
교회에서도 집사를 세우는데 표준 없이 집사를 세우고 장로를 세우는데 표준 없이 장로를 세우게 되면 바벨론이 됩니다. 그것이 바벨탑이 됩니다. 어떤 집사를 세우면 바벨탑이 됩니까? 주일날 안 지키고 술 먹고 담배 피는 사람을 집사로 세우면 그 교회는 바벨탑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집사가 술을 먹고 담배 먹고 주일날 안 지키면, 그 교회가 어떻게 진리를 세우겠냐는 말입니다. 교인들 보고 “주일날 지켜라” 하면 교인들은“ 집사도 안 지킨다, 장로도 안 지킨다”고 합니다,
또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지 말라고 하면 “집사는 왜 피냐? 술 먹는 집사 잘만 세워놓는다”고 합니다. 직분을 잘못 세워놓으면 진리 세워 놓는 일은 다 틀려집니다. 그러나 이제 진리 세우는 것은 그만두고 사람 많이 모으고 돈 많이 내게 만들어서 교회 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주일을 가끔 빼먹고 또 술 먹고 담배 피는 사람을 집사로 세워놓으면 그런 사람은 돈은 또 잘 냅니다. 돈은 잘 내고 열심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 직분 세워놓으면 교인은 많이 모을 수 있고, 또 돈 잘 내서 예배당도 크게 짓고, 사람 많이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틀어집니까? 진리 세우는 것이 틀어집니다. 진리를 어떻게 세우겠느냐 말입니다. 주일날 지키라고 아무리 해도 직분자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다른 교회로 갈까봐, 사람 하나 붙잡으려고 집사로 세웠기 때문에, 결국엔 사람 붙잡으려다가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 붙잡으려다가 진리 잃어버리고, 하나님 모시는 것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 세우는 것이 다 틀어지고 진리를 다 내버리면, 사람 많이 모이고 단결하는 바벨탑이 됩니다. 바벨론이란 말 입니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잘 살려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섬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본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 바벨탑입니다. 그러니까 집사 세울 때 주일 빠지는 사람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날 빠지는 사람은 집사 되었으니까 빠지려면 사표 내고 빠져야 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바벨탑이 되어야겠습니까, 목사가 술 먹고 담배 먹고 주일 안 지키는 사람 집사 내면 그 목사는 바벨탑 쌓는 목사입니다. 그 목사는 교회 일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 쌓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 다 잃어버렸는데 일하면 뭐합니까?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종교적 바벨탑을 쌓았는데 말입니다.

이제 말세에는 바벨탑을 쌓는 시대입니다. 말세에 바벨탑을 쌓는다고 했는데, 바벨탑은 옛날 창세기 때에도 쌓았고 또 언제 쌓다고 했습니까? 다니엘 때입니다. 다니엘 4장에 느부갓네살 왕 때의 바벨론 나라가 인본주의의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또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때는 어느 나라입니까? 베드로가 어디 있는 성도가 문안한다고 했습니까? 바벨론에 있는 성도가 문안한다고 했죠? 그 로마에 있는 성도가 바벨론에 있는 성도입니다. 이제 말세에 가서도 바벨론이 나오고 바벨탑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말세의 바벨론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세에는 몇 가지 바벨론이 있다고 했습니까? 몇 가지 바벨탑 쌓는다고 했습니까? 이 세상 국가적 바벨론이 있습니다. 인본주의 국가의 인본주의와 국가적 단결이 바벨론입니다. 또 문화적 바벨론과 과학적 바벨론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문화가 향상되고 과학이 발전되어서 세력이 하늘에까지 들이닿고 그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치하고 향락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말세의 문화적 바벨론입니다. 그 다음엔 무슨 바벨론이 있다고 했습니까? 종교적 바벨탑, 바벨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바벨론이라는 것은 진리보다 인간의 단합을 앞세우고 인간의 힘으로 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말세의 교회들이 진리를 세우는 것은 등한히 여겨서 둘째, 셋째로 하고 첫째가 외적으로 커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씁니다. 먼저 교인 많이 모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커질 수 있지만 진리를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주의나 인본주의나 온갖 방법들이 다 들어와서 교회는 커졌지만 진리가 없어집니다.

뭐가 바벨탑입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이용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지 아니하고 인간들을 위해서 인간의 힘으로 하겠다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우리 힘으로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께 이용당해서 하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 모여서 하겠다, 단결을 위해서 한번 높이 쌓아보자 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하면 바벨탑 쌓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사람끼리 해보자는 것은 바벨탑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말씀의 주장을 받지 않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하늘에까지 높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말씀을 잊고,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앞으로 올 환난을 면할 것이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겠다고 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고 노력하자는 것도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지게 하시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흩어지게 하셨어도 하나님 공경하고 말씀을 순종하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약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께서 하시는대로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하려는 것은 바벨탑이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하자는 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심판

본문 5절에,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쌓아 올라가는데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자기네끼리 잘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신데, 또 하나님께서 주인이신데 그 하나님 뒷전에 돌려놓고 자기네끼리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만 보시니까 바벨탑을 자꾸 쌓아 올라간단 말입니다. 그 바벨탑을 쌓으면 하나님께 손해입니다. 무엇이 손해가 납니까? 바벨탑이 점점 성공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못 들어갑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인본주의로 쌓는 것이니까, 그들이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만큼, 그들이 점점 교만해지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떠나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종교적 바벨탑도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자기의 세력 확장을 더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주로 해서 커지면 진리는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예 세우지 못하도록 단체를 크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진리를 말해도 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뜨려야 진리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깨뜨리셨습니까?

언어를 혼잡케 하심

본문 6-9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시면 이 무리가 하나요, 언어도 하나이니까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고, 결국 탑 쌓는 일이 성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려간다는 건 누구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해서 그들의 성 쌓는 것을 못하게 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데, 또 하나님의 약속은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도 다 버리고 인간끼리 단결, 단합, 인간적 사업, 이렇게 자기들 이름을 내고, 또 인생들의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못하게 하시면 못합니다. 아무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될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이제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돌 가지고 오라면 나무 가져오고, 불 가져오라고 하면 물 가져오고, 물 가져오라고 하면 불 가져오고, 오라면 가고, 가라면 오니까 바벨탑을 쌓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쌓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벨탑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안 두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준행해야 됩니다. 자기네 공로, 자기네 이름 내자, 또 흩어짐을 면하자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흩으시면 흩어지는 것이지, 흩어짐을 면하자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여 살게 하시면 모여 살고, 하나님께서 흩으시면 흩어질 수밖에 없다 하는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바벨탑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게 만들어 놓습니다. 언어가 혼잡해지니 의사소통이 안 되고 대화가 안됩니다. 이제 바벨탑 쌓을 수 있습니까? 쌓을 수 없습니다. 쌓을 수 없으니까 이제 어떻게 합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말이 안 통합니다. 가져오라는데 가져 갔습니다, 세우라는데 헐어놨습니다. 지금, 어떡합니까? 누구 하나 말할 데가 없습니다, 반대만 자꾸 나옵니다.” 하고 하나님께 달려 붙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벨탑 쌓는 일이 잘 되면 하나님께 달라붙지 않습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어 마음이 딱딱 맞고, 손이 딱딱 맞아나가고, 착착 일이 돼나가면, 잘 될 것 같으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쌓는 것이 너무 재미가 있습니다. 돌을 쌓고 또 쌓아서 자꾸 쌓아 올라가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면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게 해서 일을 못하게 만들어놨습니다. 그러니까 바벨탑 쌓던 것을 중지하고, 이젠 하나님께만 달라붙게 됩니다. “말씀만 따라가야 되겠다. 하나님만 따라가야지 별 수가 없다. 이젠. 다 쓸 데 없다. 하려고 해도 못하겠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면 의견이 맞지 않게 됩니다. 의견이 맞지 아니하고 서로 충돌이 될 때에 반대방향으로 자꾸 생각하고 의사소통이 안 될 때에는 내가 바벨탑 쌓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본주의로 나가지 않았나, 내가 인간의 힘으로 뭘 잘해보고, 뭘 좀 크게 만들어보려는 것이 없었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바벨탑 쌓던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제 마지막엔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대로 바로 해나가는데도 반대가 나오고 또 의견 충돌이 있으면, 진리의 말씀대로 굳게 서서 그 진리의 말씀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끝까지 세워나가야지 마귀가 반대한다고 그만하겠습니까? 말씀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는데 반대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니 굳게 서서 말씀대로 끝까지 생명 내놓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해보려고 크게 해보려고 돈을 많이 모아 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잘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잘해보려고 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면서 커나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삼으면서 커나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일주의로 삼지 아니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을 첫째로 하지 않고, 커나가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벨탑 쌓는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섬기는 것을 제일주의로 하고 또 말씀을 세워나가면서 커지고 확장되고 견고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커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의 세계가 커지고 진리의 등대가 높아지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등한히 여기고 인본주의로 커지는 것이냐?’를 우리가 분별해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바벨탑 쌓으면서도 바벨탑인지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셨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만 자꾸 잘못했다고 싸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쌓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말세는 모든 것이 다 바벨탑과 같이 되었는데, 바벨탑을 심판하시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십니다. 바벨탑이 높아짐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임박한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모든 세계가 국가적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또한 인공위성, 원자무기인 핵폭탄을 만들면서 과학적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문화적 바벨탑, 국가적 바벨탑, 종교적 바벨탑, 과학적 바벨탑 등, 진리보다는 단합을 위주로 하는 것과 세력 확장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세에 살고 있는데, 바벨탑을 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진리만 세워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첫째이고 진리만 커지는 것은 괜찮습니다.
요한계시록 18:7절에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 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코 애통히 여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시간 동안에 멸망을 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일시에 멸망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루 동안에 멸망을 시키시고 한 시간에 멸망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은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18:4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내 백성은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바벨탑을 쌓는 것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받을 재앙 들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벨론에서 바벨탑을 같이 쌓으면서 있으면 안 됩니다. 바벨론에 같이 있으면 바벨론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합니다. 이제 바벨론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인데 거기서 나오지 않으면 심판받으니 나와야 됩니다. 그 바벨론에 있어서는 신앙을 못 지킬 것이니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로 하던 모든 일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고 믿음에 서서 하나님으로 사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으로 사는 그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줄을 알고 늘 하나님께로 나가서 말씀으로 자신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재림을 고대하면서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가되어야 되겠습니다.

3. 셈의 후예

본문 10-26절에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셈의 후예를 기록함에 있어서 본장에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조상들을 기록하였습니다. 10:21-30절에 있는 셈의 족보와 다른 점은, 벨렉까지는 같으나 10장에서는 벨렉의 아우 욕단의 후예를 기록했고, 11장에서는 벨렉의 후예를 기록하여 아브라함까지 기록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에 셈의 족보는 신앙 계통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며 셈의 후손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셈의 하나님이라고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의 수명이 현저하게 짧아졌습니다. 특히 벨렉 이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더욱 짧아 졌습니다. 또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어지고 족속들이 흩어졌습니다(창10:25). 이렇게 홍수 후에 수명이 짧아 진 것은 홍수 후에 죄악이 세상에 많아졌기 때문이요, 그때부터 육식을 한 데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4. 데라의 후예

본문 27-32절에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데라의 아들과 손자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데라의 맏아들이며, 롯은 아브람의 아우, 하란의 아들입니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그 자부 사래와 그 손자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입니다. 가던 중에 하란에 거할 때에, 데라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데라는 본래 우상을 섬겼으나(수24:2-3), 가나안 땅에 가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명령한 그 말씀(창12:1)을 따라 가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데라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창세기 9.18-29 저주 받은 자와 축복 받은 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창세기 9:18-29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8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29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창세기 10:1-32
1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에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일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위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따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13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15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19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21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충생하였으니 22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에벨은 두 아들은 낳고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31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1. 노아의 술 취함과 세 아들의 행동

본문 9:18-19절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홍수로 모든 사람이 멸절하였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들로 말미암아 후손이 땅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20-22절에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포도 농사를 해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에서 벌거벗고 누워 잤습니다.

본문 22절에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누워있을 그때, 둘째 아들 함이 들어가서 보니까, 아버지가 벌거벗고 하체를 다 드러내고 드러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두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본문 23절에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서 들어간 이유는 아버지가 술 먹고 벌거벗고 다 드러내고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안 보려고 얼굴을돌이키고 뒷걸음질 쳐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어깨에 메고 갔던 옷을 덮어주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못은 누구의 잘못인가 하면 아버지 노아의 잘못입니다. 왜 포도주를 취하도록까지 먹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면 제 정신이 없어지므로 술 취하지 말고 늘 깨어있어야 되겠는데, 술을 취하도록먹고 다 벌거벗고 다 차 내버리고 이렇게 드러내놓고 잤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잘못했습니다. 그때 함이 아버지가 술 먹고 드러누워 자는 것을 보고 나가서 형과 동생한테 이야기했습니다. 거짓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형과 동생이 어깨에 옷을 하나 메고 뒤로 들어가서 뒷걸음질쳐 보지 않고 덮어주고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술이 깬 후에 그것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세 아들들에게 그 행한대로 저주와 축복을 하였습니다.

2. 저주 받은 함

본문 24-25절에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기도를 시키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저주하는 기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가 벌거벗고 누워가지고 있던 것을 아들이 본 사실대로 말했는데, 자기 아들을 저주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성령의 감동을 시키셔서 그렇게 기도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저주를 받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잘못한 것은 노아이고, 함은 그때 사실대로 나가서 본 대로 말했으니 양심 똑바로 쓴 것입니다. 양심 삐뚤게 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대로 하기는 하였으나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함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큰 손해가 나게 된 것입니다.

구원 운동에 손해가 나도록 하였기 때문임

그 당시에 구원운동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노아가 그 당시에 선지자입니다. 또 신앙의 선봉입니다. 노아를 통해서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고, 또 노아를 통해서 방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쓰시던 시대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을 많이 먹고 취해서 다 드러낸 것은 물론 잘못했지만, 함이 나와서 이것을 폭로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노아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큰 손해가 왔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손해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소문이 퍼져 나가면 노아를 사용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많은 지장이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진노하시는가 하면, 구원운동에 손해 주는 것을 진노하십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구원운동에 손해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구원운동을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손해를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신다고 하였습니다
(출 17:16). 또한 잊지말고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하였습니다(신 25:19). 그래서 400년 후에 사울 왕 때에 아말렉을 아예 멸종시키라고 하셨습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싹 다 잡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기에 이들을 400년 후에까지 싹 다 잡아서 멸망시키라고 하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손해주는 자에게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저주하십니다. 자기 아들이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손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바른 말이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주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바른 말이라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말이라도 손해나는 말은 하지 말 것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바른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른 말을 하지 거짓말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바른 말이라고 해도 손해가 막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손해나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밤낮 일생 동안 바른 말하는데 결과는 오그랑 망탱이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에 표준이 있어야 되는데, 바른 말은 표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든 하기 전에, 그 말을 하면 결과적으로 구원운동에 손해가 되겠는지 유익이 되겠는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바른 말이라고 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운동에 손해가 되겠는지 유익이 되겠는지, 교역자를 도와주는 것인지 허무는 것인지, 그것도 모르고 그저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말을 막하면 안 됩니다.
잘못하고 망하는 사람이 더 많겠습니까, 잘하고 망하는 사람이 더 많겠습니까? 잘하는 사람만 씁니까? 잘못하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때 안 묻은 사람이 필요합니까, 때 묻은 사람이 필요합니까?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때 안 묻은 사람을 써야 하지만, 어쩔 때는 때 묻은 사람을 써야 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깨끗하기만 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깨끗하기만 하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응성이 있어야 됩니다. 깨끗하다고 턱턱 털고 돌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빛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때가 묻었어도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실수를 좀 여러 번 했어도 실력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밥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좀 밥도 태워보고 죽도 써보고, 여러 번 실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수한 사람이 잘합니까? 실수한 사람이 잘합니다. 많은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보기에 몇 가지 잘했다고 해서 교만하면 망합니다. 99가지를 잘 했어도 한 가지 교만해서 돌아가면 망합니다. 99가지를 잘못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한 가지를 하나님 앞에 바로 하면 그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때 묻은 사람이라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아랫사람들을 모두 다 갈아 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싹 다 갈아치우면 새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윗사람만 바꿉니다. 장관은 바꾸지만, 그 아랫사람들은 좀 시간이 지나야지 당장에 다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이 하면 잘 될 것 같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도 잡는 것은 대학교 갓 졸업한 사람들을 많이 데려다 놓는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고참들이 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많이 잡아본 사람이 척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체가 어디 있었는지, 머리카락이 어떻게 되어있었는지, 발자국 어떻게 났는지, 대문간 열어 놓았었는지, 영장은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어떻게 되겠는지 답이 척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갓 졸업한 사람은 ‘형법 몇 조에 의해서…’라고 할 뿐 실무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참들이 잘못이 있다고 다 내보내고 신진들만 데려다 놓으면 범인을 못 잡습니다. 고참들이 잘못한 것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고참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몇 번 못 잡아보고는 안 되겠기에 다시 옛날 고참들 불러옵니다. 제대했던 사람들, 정년퇴직했던 사람들을 불러서 하면, 그때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함이 자기를 바로 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구원운동하시는 데에 막대한 손해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아야 됩니다. 아들도 저주받습니다. 자자손손이 형제의 종들의 종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손해 준 사람에게는 절대로 축복을 해 주지 않습니다.


3. 축복받은 셈과 야벳

남의 허물은 모르는 것이 상책

그리고 맏아들과 셋째 아들은 보지 않겠다고 하고 엉덩이를 뒤로 해서 들어가 아버지를 가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 들어갈 때 뒷걸음질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그것을 보면 자연히 말하게 되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허물을 안 보는 것이 상책입니다. 알 것만 알고 모를 것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다 아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그저 웬만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하기 좋습니다.

세세히 다 알아서는 신앙생활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알게 되었다면 '도대체 아버지께서 왜 그러셨을까’ 하고 머리가 복잡해지게 마련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훌륭하신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도 시험 받을 수 있고, 또 언젠가는 말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말 안 할 것입니다. 말 안 하려고 했다가 언제 말할 수가 있는가 하면, 화가 나고 불만이 좀 있을 때, 그 때 말이 쑥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아버지한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부인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부인이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막 공격할 때, 자기 아버지는 안 그런 줄 아느냐고 하면서 왜 자기 보고만 그러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인이 있다가 아버지가 어떻게 하셨는지 물어볼 것이고, 그 말에 벌거벗고 드러누웠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몰랐던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몰랐다면 그 말 안 나왔을 것이고, 며느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되었을 텐데, 자기가 본 까닭에 그만 자기 아내까지 망하게만들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모르는 것이 상책입니다. 웬만한 것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알아놓은 다음에는 누가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하기도 입장이 곤란하니, 모르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안 보고 뒤로 들어가서 가려주었습니다.

셈과 야벳이 받은 축복

셈과 야벳의 한 일에 대해 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본문 26-27절에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포도주에서 깨어 일어나서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셈은 노아의 맏아들인데, 노아가 기도하기를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장차 그리스도께서 셈을 통해 나실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셈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십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은 맏아들인 셈의 자손입니다.
그 다음에 막내 아들인 야벳에 대해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셈의 자손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고,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이므로 셈은 황인종의 조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으로, 함은 흑인종의 조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후에 백인종이 황인종의 나라에까지 와서 산다는 것인데, 백인종들이 점점 창성해서 황인종의 나라까지 관할하고, 거느리고, 통치하고, 도와주고 산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셈의 장막에서 사는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세력이 미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주둔함을 말합니다. 요새 세계적으로 보면 백인들이 황인들의 나라에 와서 주둔하고 세력을 끼치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나안이 셈의 종이라고 했는데, 또 야벳의 종도 된다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그가 셈과 야벳에게 종살이를 한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흑인종의 조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흑인들이 종으로 고생을 많이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손해 주었고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막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저주가 내려와서 종의 종살이밖에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구원 운동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될 것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앞으로 이 구원운동에 손해 주는 자가 절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닥쳐도 구원운동에 손해 주면 안됩니다. 당시의 노아와 같이 요즘의 구원운동을 해 나가는 교역자들에게 손해 주면 안 됩니다. 물론 교역자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교역자라고 다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 종을 써서 일하시는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잘못이 있지만 그래도 그들을 이용하여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그 종의 잘못된 것을 자꾸 폭로시키고 말하고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종을 들어서 일하시는 데에 대해서 얼마나 손해를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손해를 주면 자기만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그 자손도 저주받습니다. 종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운동에 손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누가 망할 것인지 뻔히 다 알 수 있습니다. 구원운동에 손해 주고 돌아갈 때는 그 사람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망할 것은 정해놓은 것입니다. 절대로 구원운동에 손해 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복을 받으려면 구원운동에 유익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역자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하신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를 도와주고 그에게 허물이 있으면 가려주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허물이 있다고 말해도, 자신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알아도 좋은 것이 없고, 오히려 모르는 것이 약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진리 문제가 아니고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어떻게 하든지 그 허물을 가려주고 말하지도 말고 도와주는 입장에 서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또 그 사람이 창성해져서 여러 곳에 번식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 받는 법입니다.

조금만 자기에게 잘못하면 불평, 불만, 원망하고, 자기의 욕심이 조금만 안 채워지면 물고 찢는 것, 그것은 망할 도(道)를 닦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졸업하게 되면 사람을 의지할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자립적으로 나가서 교회 세울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다 나가서 개척교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사람은 자력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안 도와준다고 불평하는 소리는 관두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시지 누가 해 주겠습니까? 안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본문 28-29절에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며 그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하나님의 계약과 신앙에 대하여 많이 가르쳐 주고, 950세에 별세하였습니다.

4. 노아의 계보

야벳의 계보

본문 10:1-5절에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에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위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고 하였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의 자손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야벳의 아들들은 창성하여 바닷게 살았으며, 야벳의 손자 때에 가서는 여러 방언과 나라가 나뉘어졌습니다.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의 족보를 먼저 기록한 것은 노아가 예언한 대로 야벳 자손이 제일 많이 창성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함의 계보

본문 6-20절에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따에서 앗구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함의 계보입니다.

함의 조상 가운데서 앗수르가 나왔고 니느웨가 나왔고, 11절 보면 또 큰 성들이 나왔습니다. 창세기 10:11-12절에,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 (이는 큰 성이라)” 했습니다.
또 구스가 나왔습니다. 10:6절에,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넷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누구입니까? 구스입니다. 둘째 아들은 미스라임이고 셋째 아들은 붓입니다. 넷째 아들은 가나안입니다. 넷째 아들이 아버지 앞장 서 다니면서 노아의 수치를 나가 선전한 모양입니다. 이 넷째 아들이 똑똑한 모양입니다. 똑똑한 사람이 이런 것 잘합니다. 넷째 아들이 제일 똑똑한 모양인데, 아버지 말 듣고 나와서 말을 전하다 저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함의 자손 가운데 영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창세기10:8-9절에,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소돔 고모라가 나왔습니다. 19절에,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서 소돔과 고모라까지라. 그러니까 소돔 고모라의죄악이 관영했다가 멸망했는데 이들도 함의 자손입니다.

함 족속은 무엇이나 잘했습니다. 사냥도 잘하고, 그 중에서 영걸도 나오고, 또 큰 성도 잘 쌓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해도 저주받은 백성입니다. 앗수르와 니느웨가 함의 자손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땅을 소유한 자들이 함의 자손들입니다.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인데, 니느웨가 그 죄악으로 인해서 40일 만에 멸망한다고 요나가 공포했었던 곳입니다. 요나 때에 회개하였으나 결국에는 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롯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망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영걸이요, 또 성을 잘 쌓는 사람들이요, 사냥을 잘하기로 유명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손해를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셈의 계보

본문 21-31절에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은 낳고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고 하였는데, 셈의 족속은 이렇게 많이 번성을 했습니다. 6대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셈의 족속은 동편 산에 살았고, 세상이 나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여러 족속으로 나뉘어졌고 동편 쪽으로 갔습니다. 30절에서 셈 족속이 동편 산에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동양으로 많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셈이 황인종인 동양 사람들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셈 자손은 동쪽으로 많이 가서 동양에서 살고, 또 자꾸 동쪽으로 가는성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몽고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또 몽고에서 한국으로 오고, 또 위쪽에는 만주를 거쳐서 캼차카 반도로 지나 바다를 건너서 알라스카로 갔을 것입니다. 알라스카에서 캐나다로 갔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미 대륙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인디안은 다 황인종입니다. 몽고 족속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메리카 대륙을 황인종에게 주셨는데, 그곳에 가서는 우상을 많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빼앗아서 그 땅을 백인종에게 준 것 같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셈 족속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이 나뉘었고 셈 족속이 많이 번성했습니다.

셈은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그를 축복하였습니다. 그 후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계통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셈의 10대 후손에는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 이삭과 그 손자 야곱이 나왔고 그 자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그들이 동편 산에 거하였으며 점점 동쪽으로 이주하여 동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인이 셈 족속입니다.

본문 31-32절에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족속과 방언과 나라가 나뉜 것은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그래서 10장의 족보장은 11장의 바벨탑의 서론이기도 합니다.

5. 노아를 통해 구원운동이 이어져 나감

본문 32절에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노아 후손들로 땅의 열국 백성이 나왔습니다. 그들로부터 지금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룬 것입니다. 노아 아들 때부터 피부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같은 아버지의 자손이라도 얼굴이 좀 흰 아들이 있고, 얼굴이 좀 누런 아들도 있고, 검은 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 받는 법은 다만 구원운동을 도울 때 하나님 앞에 복 받는 것입니다.

신앙의 계통이 노아를 통해 이어져 내려감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신앙의 계통이 계속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던 에녹의 계통이 노아로 내려왔습니다. 노아에게로 이 참된 진리와 생명의 구원운동이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아벨의 계통입니다. 아벨이 죽어서 하나님께서 셋을 주셨고, 셋으로부터 몇 대에 걸쳐 내려오다가, 아담의 7대손 에녹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에녹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던 참된 신앙의 계통이 이제 노아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매우 귀한 신앙의 계통이고, 말씀대로 믿는 신앙의 계통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아벨이 말씀대로 영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제사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제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에녹에게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몇 대를 거쳐서 에녹에게로부터 노아에게로 내려간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가 다 부패하고 타락을 했지만, 그 참된 신앙계통은 하나님께서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께서 이어나가신 다는 것입니다. 끊어지지 않습니다. 흐르고 흘러서 자꾸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어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엘리야 때에는 그 신앙의 계통이 엘리야에게 있었고, 그것이 엘리사에게로 갔습니다. 이렇게 계속 흘러내려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계통에 돕는 자가 될 것

그런데 그 신앙의 참된 진리를 세워나가는 그 구원운동에 우리가 도와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도와주는 것인가 하면 각자 일비지력(一臂之力)을 감당해나가는 것입니다. 일비지력으로 도와나가면서 이것을 세워나가는 자는 복 받고, 아무리 옳은 말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세워나가시는 진리 운동, 참된 생명운동에 손해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저주받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줄거리입니다.
신앙의 생명계통이 아주 중요한 진리를 세워나가는 줄거리인데, 이 참된 진리계통의 진리를 세워나가는 줄거리가 되려면, 여기에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일비지력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방주를 짓는 것도 이것 때문에 짓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지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도움이 되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일비지역이 무엇입니까? 한 팔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해나가시는 진리를 세워 나가고 생명을 살려나가는 일에 나도 한 팔의 역할을 하고 가자, 도와주다 가자는 것입니다. 교역자도 도와주고, 집사도 도와주고, 장로도 도와주고, 교인도 도와주고, 이 일에 다 도우며 나가다가 하늘나라에 가야 됩니다.

그리고 절대로 구원운동에 손해는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하고 다른 사람이 잘못 했어도, 교역자가 약간 실수가 있어도, 또 바른 말이라고 해도, 절대로 이 구원운동에 손해 주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저주받습니다. 자기만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자손도 종의 종이 됩니다.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다음에는 세상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얼굴이 시꺼멓게 됩니다. 속이 편안치 않고 괴로움만 가득한데 얼굴이 어떻게 환하겠느냐 것입니다. 얼굴이 컴컴하고, 이마에 내 천(川)자가 그려지고, 수심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니 얼굴이 시꺼매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디서든지 이 구원운동에 일비지력을 감당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비지력을 하다가 하늘나라에 가자”고 해야 합니다. 이제 이것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노아의 때에 방주 짓는 것 외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쌓아놓아도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다 쓸 데 없습니다. 그러나 방주 잘 지어 놓으면 환난을 다 이기고, 자기도 구원받고 가족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도 구원받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비지력을 잘하다가 가는 사람이 되고, 또한 이 구원운동에 나서서 일하는 사람이 실수가 있어도 가려주어야 합니다. 허물을 가려주면서 이 진리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독을 봐서 쥐 못 친다고 합니다. 쥐새끼를 봐서는 돌로 콱 때려 죽이면 좋겠는데, 독이 깨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을 봐서 쥐를 못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을 조금 잘못해도, 가리워 주면서 구원운동을 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됩니다.
또 교역자가 정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역자가 진리를 세워나가는 것이 아니면 그를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 세워나가는 것이 아닌데, 그를 아무리 받들어줘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곳은 인본주의 교회이고 진리가 아닌데, 영을 살려나가는 진리계통이 아니고, 진리를 세워나가는 교회가 아니면, 아무리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백날 그런 곳에 가서 봉사해도, 진리를 세워나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진리를 세워나가고, 영을 살려나가고, 자기도 의에 살아나가라고 방주 짓는 공사를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인데, 방주를 안 짓는 데에 가서 아무리 도와줘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괜히 이용만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주를 잘 짓고 또 방주 짓는 진리를 세워나가는 그 일에 일비지력을 감당하고 도와주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창세기 8.1-22 회복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창세기 8:1-22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게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2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4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5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7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11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육백 일년 정월 곧 그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14이월 이십 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16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7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게 나왔고 19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20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 물이 걷힘

본문 1-5절에“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식구들과 모든 짐승들을 살리기 위하여 물을 감하게 하셨습니다. 홍수가 난지 15일이 자난 후에 물이 감하여지고 뭍이 드러 났습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홍수가 나기 시작하여 비가 40 주야를 내리고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습니다. 물이 땅에 창일한 기간은 5개월 즉 150일 동안이었습니다.
아라랏산은 현재의 어느 산인지 잘 알 수 없으나 배가 그 산 위에 머무른 것으로 보아 다른 꼭대기보다 높은 곳임을 증거합니다. 노아의 신앙 방주는 모든 산 꼭대기 위에 머물러 모든 산을 정복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방주도 잘 지으면 모든 산들 위에서 모든 산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물이 점점 감하여 아라랏산에 머무른 날 7월 17일부터 74일을 지나 10월 1일에는 물이 더욱 많이 감하여 모든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습니다.

2.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놓아 줌

본문 6-7절에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보내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0월 1일부터 40일이 더 지난 후에 노아가 물이 감한 여부를 알려고 창문을 열고 제일 먼저 까마귀를 내어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비둘기보다 강하고 사체를 먹고 살 수 있는 새이기 때문에 까마귀를 내어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안 돌아왔습니다. 왜 안돌아왔겠습니까?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데 안돌아온 이유는 죽은 시체를 먹느라고 안돌아 온 것 같습니다. 죽은 시체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은 사람과 동물이 죽어서 지면에 많이 있었을 것이고 까마귀들은 그 시체 먹느라 안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썩은 것을 좋아 하는 자는 믿음의 방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본문 8-9절에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두 번째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온 지면에 물이 있어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이 없으므로 방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산봉우리들과 육지가 어느 정도 드러났으나 아직은 초목이 소성하지 못했고 비둘기가 살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본문 10-12절에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칠일 후에 비둘기를 다시 내어 보내니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땅에 물이 감하여져서 새 잎사귀가 나왔다는 표시입니다. 심판으로 비참하여 진 땅 위에 새 잎이 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비둘기는 아름답습니다.
또 칠일을 지나서 비둘기를 내어 보내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땅 위에 비둘기가 먹고 살만한 곳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모든 짐승들도 살 수 있도록 물이 감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은혜를 보답하는 신앙이 되어야 함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와서 노아가족에게 기쁨을 준 비둘기와 같이 은혜를 보답하는 짐승도 있고, 까마귀처럼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짐승도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은혜를 보답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새는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모를 죽이는 사람까지 나타났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죽이는 사람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 나은 편입니다. 요새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세상이 악해졌나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느라고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가 늙어서 다리를 잘 쓰지 못할 때에도 부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몇 달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는 자녀도 있습니다. 반면에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녀도 많고, 고려장하는 식으로 내다버리는 사람도 있고, 죽이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와 같이 보답하는 이런 사람이 복 받을 사람입니다.비둘기는 하나님께 참 제물로 드릴만한 새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 비둘기와 같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보답해야겠습니다. 또 비둘기가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처럼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까마귀와 같이 배은망덕하고 날아가서 썩어진 것이나 먹고 돌아가는 그런 상태에 빠지면 안 되겠습니다.

3. 노아의 식구가 방주에서 나옴

본문 13-14절에“육백 일년 정월 곧 그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14 이월 이십 칠일에 땅이 말랐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10일 방주에 들어간 후 7일 만에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방주에서 산 기간이 1년 17일간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셨으나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 15-19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에 나왔고, 또 모든 짐승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방주를 지었고 방주에 들어갔고 명령에 순종해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명령대로 순종할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 된 것입니다. 이전 죄악의 세상은 심판 받아 멸망하였고 새로운 세계에는 구원 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4. 노아가 제단을 쌓음

본문 8:20절에 “노아가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해서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기쁘게 흠향하시고 다시는 땅에 홍수를 내리지 않겠다고 심중에 작정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계획하는 것과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적 부패한 인간은 마음에 계획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악을 좋아하고 악을 행하고 따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관영해서 물로 심판을 하셨는데,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22절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가 쉬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홍수 심판 때에는 심고 거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10절에“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하였는데 앞으로 세상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이 죄악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