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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베드로전서 3:21 말씀과 선한양심을 따라가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말씀과 선한양심을 따라가라
베드로전서 3:21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1. 예언의 말씀을 따라가라

본문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디모데전서 1:18-19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언이란 성경말씀을 가리키는데 특히 앞으로 행해야 될 말씀, 또 앞으로 이루어질 말씀을 가리킵니다. 요즘 예언한다고 하여 점장이처럼 “당신이 어떻게 되겠다, 당신 속에는 죄가 있다, 이 집에 마귀가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구약의 다니엘이나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대한 예언이고, 또한 우리가 행해야 될 성경 말씀 모두가 예언입니다. 즉 이대로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성
경 말씀도 예언이고, 이대로 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도 예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것도 예언이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도 예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라고 했는데, 디모데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지도를 따라갔습니다. 즉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디모데가 잘 따라갔습니다. 우리도 오늘날까지 성경 말씀이 지도해서 그 인도를 따라왔습니다. 지금도 말씀이 우리를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고 하며 지도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도해 줄 때에 그 말씀을 따라가야겠는데, 어떻게 따라가야 합니까? 여러 면에서 우리를 지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를 드려라, 주일을 지켜라, 서로 사랑하라”는 등, 지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부부 간에 사랑하고 순종하라”는 등, 지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에 멍에를 메고 충성 잘하라는 것이 지도하는 말씀입니다. 또 시험이 들어올 때에 그 시험을 이기라는 것도 지도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전에도 우리를 지도해 주셨지만, 지금도 우리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우리를 지도합니다. 그러므로 너를 지도한 예언의 말씀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2. 선한 양심을 따라가라

또 선한 양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21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디모데전서 1:19에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양심을 버리면 파선된 배와 같음

선한 양심을 버린 믿음은 파선된 믿음입니다. 배가 깨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버린 신자는 파선된 신자입니다. 항해하다가 배가 파선되면, 침몰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선한 양심을 버린 믿음은 배가 깨진 것처럼, 깨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착한 양심을 버린 자의 믿음은 벼 알에서 쌀알을 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벼 알에서 쌀알을 빼내면 겨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버리면 그것은 껍데기 믿음이고, 죽은 믿음으로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양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한 양심이 아닙니다. 로마서 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갈 때에 억울하다고 하면 “네가 아무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하며, 양심이 나와서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그들이 옳게 살지 못한 것을 그들의 양심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선한 양심이 아닙니다.

선한 양심은 예수 믿는 사람이 갖는 양심임

선한 양심은 착한 양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갖는 양심입니다. 즉 선한 양심은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는 선한 양심이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판 받은 양심임

또 중생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판받는 양심이어야만 선한 양심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양심대로 한다고 하면서 죄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비판받는 양심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비판받지 않은 양심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라든지, 주일을 안 지키는 것이라든지, 무덤에 가서 절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 등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나갑니다. 그 양심은 선한 양심이 못됩니다. 왜 못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를 상고하여, 성경 말씀을 따라 가야 선한 양심이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선한 양심을 주셨고, 그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선한 양심을 안 쓰면 옳은 것을 따라갈수 없습니다.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쓰는 게 중요합니다. 선한 양심을 쓰면 하나님의 뜻을 점점 찾아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선한 양심을 따라갈 때에 중생한 영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써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중생한 영이 자라나고, 하나님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안 따라가면 점점 하나님이 멀어집니다. 그 사람은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쓰는 것이 믿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부인이 어떤 교인이 교회도 잘나왔는데 귀신이 들렸다고 보고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데 왜 귀신이 들렸습니까? 그것은 양심을 안 썼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안 쓰면 마귀가 들어옵니다. 양심을 안 쓰면 진실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거짓은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양심을 쓰는 것이 진실인데, 진실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못 들어옵니다. 그러나 양심을 안 쓰면 각종 마귀가 다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안쓰면 앞으로 어떠한 마귀가 들어올지 모릅니다. 양심을 안 쓰면 마귀가 여러 가지 죄악 된 요소를 갖다가 집어넣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마귀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선한양심을 써야 됩니다. 요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양심을 안 씁니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양말 한 켤레를 사는데, 장사꾼이 자기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아주 싸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는 대로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똑같은 양말이 있어서 얼마냐고 물어 보니까 양말 가격이 더 쌉니다. 그러니까 “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속인 것입니다. 하여간 거짓말하고, 속이고, 양심 안 쓰며, 돈 몇푼 벌겠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결국은 자기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믿음을 팔아먹으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겠습니까? 양심을 버린 믿음은 파선된 믿음으로, 언제 마귀에게 끌려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쓰는 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양심을 안 쓰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헛수고 하는 것입니다. 헛되이 믿고, 다른 것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잘못된 것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냥 나가는 사람은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을 안 쓴 사람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다 나타납니다. 그 때에 가서 후회해도 쓸 데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양심을 써서 믿는 일을 바로 해야 합니다. 믿는 일을 바로 하는 게 양심을 쓰는 것입니다. 하여간 믿는 일을 하는지 믿는 일을 안 하는지를 보면 양심을 쓰는 것인지 안 쓰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

중생한 영에게 사용되는 양심이 선한 양심이며, 그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의 인도를 받아 선한 양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며, 성령께서 그 선한 양심과 같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버리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양심을 써야 됩니다. 양심을 어기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를 팔아먹고, 예수를 팔아먹고, 믿음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따라가는 것이 사는 길이고, 영이 자라나는 길입니다. 또 의가 이루어져 나갑니다. 의를 이룬 것만큼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습니다. 양심을 따라가고, 양심을 안 따라 간 사람과의 차이는 많습니다.

마태복음 13:41-42에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이란 믿음을 지킨 사람입니다. 믿음을 지킨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면 해와 같이 빛납니다. 이 세상에서 말씀을 지킨 것만큼, 선한 양심을 쓴 것만큼 하늘나라에 가면 그 빛이 큽니다.
어떤 사람은 별과 같이, 어떤 사람은 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달과 같이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훈련장소입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면 완전히 다 나타납니다. “너는 양심을 따라갔구나, 너는 영이 자라났구나” 등 다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며 예수를 믿지 말고, 말씀을 지키며, 선한 양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씀을 지킬 때에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는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다 지키는 말씀이 있지만, 특별히 개별적으로 그 사람에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셉에게는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할 때에 “제 7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때에 요셉이 제 7계명을 지켜야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제 7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것을 다 잘해도 쓸 데 없습니다. 마귀에게 걸려 들고 맙니다. 가룟유다에게 있어서는 “물질에 대한 시험을 이기라”는 것이 개별적으로 주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그 말씀을 지켰습니까?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망했습니다. 롯과 아브
라함에게 있어서는 “싸우지 말고, 서로 양보하라”는 것이 개별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롯은 소돔, 고모라에 욕심을 가지고 갔다가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양보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대케 해주셨습니다. 일제시대 말기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제 2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안 지키고 신사참배하면 다른 것을 다 잘했어도 불합격입니다. 또 해방 이후에는 제 4계명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즉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것을 다 지켜도 주일을 안 지키면 하나님께 낙제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고, 화목하지 못하는 사람은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여야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하여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 있는데, 그것을 지켜야 됩니다. 자기가 지키기 힘든 말씀,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또 선한 양심을 따라가려면 손해가 많아도 따라 가야합니다. 쫓겨나도 따라가야 합니다. 선한 양심 따라가다가 쫓겨나는 때도 있고, 많은 재물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선한 양심을 따라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다 잃어 버렸어도 선한 양심을 따라 갔으면 그것이 생명이고, 대성공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해와 같이 빛납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는다”고 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가고, 양심을 따라 가야 합니다. 즉 말씀에 비판 받는 양심을 따라 가면 살고, 또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이것을 못하면 다 낭패입니다. 일생동안 예수 믿었어도 헛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녁 다섯시에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처럼, 양심을 써서 믿는 일을 제대로 하여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 누리게 될 영광과 상급이 큽니다.

베드로전서 3:8-22 고난 승리.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고난 승리
베드로전서 3:8-22

8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3:8 마지막으로, 너희는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해져라. 

3:9 악을 악으로, 또는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여라. 이는 너희가 복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못하게 하고,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하여 이것을 이루어라. 

3:12 이는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향하시고 주님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기울이시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3:13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는 자가 되면 누가 너희를 해치겠느냐? 

3:14 그러나 너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들이니,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흔들리지도 마라.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3:16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너희의 선한 행실을 비방하는 자들이 너희를 비방하는 그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3:17 선을 행하다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 

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시므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너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3:19 주께서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선포하셨다. 

3:20 그들은 전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던 날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했던 자들이다.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던 사람이 적으니 여덟 명뿐이다. 

3:21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 곧 세례이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다. 

3:22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권능들이 그분께 복종한다.



1. 일반에게 주신 교훈

형제를 체휼하며 원수에게 복을 빌어줄 것

본문 8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라고 했습니다. ‘체휼하라’는 말은 동정하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하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사정이 딱할까’하고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동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는 말입니다. “네가 욕했으니까 나도 욕한다. 보복한다. 네가 내게 악행을 했으니까 나도 악행 한다. 악으로 대한다. 네가 나를 때렸으니까 나도 때린다”, 이렇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욕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십시오. 내게 악행 하는 사람의 복을 빌어 주라는 말입니다.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어주라고 그랬습니다. 원수 갚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가 잘 되기 위해서 축복해 주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저 사람이 내게 악을 행했다 해도 나는 악으로 갚으면 안 됩니다. 도리어 복을 빌어주고 사랑으로 하십시오. 사랑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저 사람이 나를 욕을 했다고 해도 같이 욕하지 말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사랑으로 그걸 이겨야 되겠다’ 하며 그 사람이 자기를 욕했어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위해주면 그 사람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으면 영원히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되면 그 사람 건져낼 수 있습니까? 악을 선으로 갚고, 욕하지 말고 축복해 주면 언젠가는 그 사람을 건져낼 날이 옵니다. 그 사람 건져내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원수지고 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내게 악한 일을 해도 악으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욕을 해도 같이 욕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자기가 망합니다. 자기 믿음이 떨어지고, 그 사람하고 영영 원수가 되고, 그 사람 건져낼 수가 없고, 자기가 전도해도 다 여기서 막혔으니까 하나님 역사가 떠나고 비참한 자가 됩니다. 절대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말조심하고 남을 축복하며 화평할 것

본문 10-12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생명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생명 안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좋은 날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첫째 ‘혀를 금하라’ 그것입니다. 혀가 죽이는 독입니다. 말조심하라는 말입니다. 하지 않을 말은 하지 마십시오. 욕하지 마십시오.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고 했는데 혀를 금해서 악한 말을 하지 말고, 남을 욕하지 마십시오. 남을 욕하면, 그 욕을 그 사람이 안 받으면 제게로 돌아옵니다. 그 사람을 축복해 주면 그 복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남을 절대 욕하지 마십시오.

남을 저주하면 자기가 저주 받습니다. 그러나 남을 축복하면 그 사람이 받든 안 받든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무조건 축복해 주고 욕하지 마십시오.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에 궤사를 말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진실하라는 말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악은 멀리 떠나고,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을 행하여 화평을 구하여 쫓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할 수있는 대로 화평하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려고 하십시오.
악에서 떠나서 선을 쫓아가고, 욕으로 욕을 갚지 말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선으로 악을 이기고 화평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십시오. 화목하는 자는 누구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불목하는 자는 마귀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화목하십시오. 화목 하는 것이 참 좋은 것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라고 하였는데, 주님은 의인을 향하시고 귀는 의인의 간구하는 데 기울이셔서 잘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를 향하시느니라’는 것은 악행하는 자는 주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주의 얼굴은 의인을 향하시고,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는 주님이십니다.


2.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데 대한 교훈

열심히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할 것

본문 13-15절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는데,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고 욕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고, 또 내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고, 그렇게 열심히 선을 행하면 그 사람들이 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라고 했는데,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를 행하다 고난 받는 것이 좋습니다. 악을 행하다 고난 받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의를 행하다 고난 받으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의를 행하십시오. 악한 사람에게도 의를 행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도 의를 행하고, 욕하는 사람에게도 의를 행하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으로 갚아준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고 소동치도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라고 했는데,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언제나 거룩한 길을 걸어 나가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이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했다가 그 소망에 대해서 잘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항상 예비하라고 하십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진실할 것

본문 16-17절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또 소생해 올라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면 다른 사람이 신임해줍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가다가 거꾸러지면 다른 사람이 도와서 일으켜 세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 없이, 양심을 안 쓰고 거짓말 하고 속이는 사람이 쓰러지면, 그것은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속여 먹을 것이니까 거꾸러지더라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양심 안 쓰는 사람은 한 번 거꾸러지면 망하고 그만두게됩니다. 아주 망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고 그랬습니다. 의인은 양심을 쓰는 사람입니다. 양심을 쓰고 옳게 하겠다는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사람들도 도와줍니다.

그런데 양심 안 쓰면 첫째, 하나님이 안 도와줍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도와주겠습니까? 양심 안 쓰는데 도와줘야 무슨 소용이 없습니다. 거짓말하고 돌아가니까 그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을 안 쓰는 사람은 절대 도와주지 마십시오. 도와주면 함정에 빠져서 둘 다 같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을 쓰는 사람이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직합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양심을 쓰고 거짓말 하지 말고 진실하게 말하십시오. 매를 맞아도 진실하게 하고 맞으십시오. 부끄러움을 당해도 진실하게 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십시오. 진실한 말을 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십시오. 그러면 살아나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 안 당하려고 거짓말 슬슬하고, 매 안 맞으려고 거짓말 하고, 양심 안 쓰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내버리고, 사람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도와줘야 쓸 데 없기 때문입니다. 또 거짓말 하고 또 속일 건데, 100번 도와줘도 쓸 데 없습니다. 양심 안 쓰고 거짓말 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양심을 쓰라는 말입니다. 양심 쓰는 사람은 믿음직합니다. 신임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매를 맞아도 사실대로 하고 매를 맞으십시오. 돈을 많이 손해를 봐도 진실하게 하고 손해를 보라는 말입니다. 돈을 손해 보지 않으려고 거짓말 하면, 그 이상, 몇 백 몇 만배 더 손해를 봅니다. 자기가 불신임 받고나면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양심 쓰고 언제나 진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양심대로 하면 다른 사람이 욕해도 마지막에 다 드러나니까 그 사람이 부끄러워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욕하던 사람이 부끄러워합니다. 양심대로 한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떳떳하다는 것입니다. 욕을 먹었어도, 고난을 받았어도, 손해를 봤어도, 양심대로 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고, 그러나 욕하는 사람은 이제 부끄러움을 당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나음

본문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사람이 좋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습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사람도 많은데,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으면 복이 있습니다.
고난을 안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큰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안 받는 것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고난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이 상당히 좋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얼마나 좋은지, 큰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고 평안한 사람 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3. 고난승리

본문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죄인을 위하여 고난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서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죽었는데,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입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육체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성령으로는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죄를 위해서 고난 받으면 성령으로 다시 살려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죄를 위해서 고난 받으면 영으로 다시 살려주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살려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지만 의를 위해서 고난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살려 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를 위해서 고난 받으면, 의를 위하여 다시 하나님이 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루터파에서는 본 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지옥에 갔던 일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우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을 보아 예수님의 영이 육신을 떠나 즉시 낙원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별세하시어 영혼이 지옥 가서 전도했다고 주장하며 연옥설의 근거를 삼고 있으나 이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사람이 한번 지옥에 가면 다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 절에 대한 신임할 만한 해석으로는, (1) “영으로”를 예수님의 영으로 보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속을 완성하고 부활로 대 승리한 사실을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성령으로 전하여 알게 했다(믿게 한 것이 아님)는 것입니다. 또한, (2)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에게 가서 노아를 통하여 그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다가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그 영들도 그들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복음 전파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전 절에 말한 옥에 있는 영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들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순종치 않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노아시대 사람만 가리킨 것이 아니고,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 전체를 다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믿는 자의 조상이요, 대표가 된 것처럼(롬4:16) 노아시대 사람들은 불순종한 자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식구 여덟 명 이외에는 전 세계가 다 불순종하였으니 노아시대 사람들은 불순종의 대표가 된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했는데, 노아 시대에 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가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는 겨우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구원 얻은 무리는 언제나 소수입니다(눈 12:32).

본문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노아시대에 물로 심판한 것은, 그 때 노아시대 사람들을 표본으로 들어서 여러 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는 다 심판 받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는다는 것을 대표적인 일 하나를 예로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노아시대에 사람이 지상에 가득했지만 순종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몇 사람입니까? 여덟 명입니다. 몇 년 동안 노아가 전도했다고 봐야 되겠습니까? 방주 예비할 동안 전도했다고 보면 약 70년간에 노아가 전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70년간에 구원 받는 사람 몇 사람입니까? 자기 아내, 아들 셋, 며느리 셋, 자기까지 8명입니다. 70년 동안 전도했다고 해도 자기 가정만 구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난 것 아닙니까? 70년간 전도해서 8명 구원 받았어도 대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천하보다 더 귀한 줄 알고 우리가 계속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습니다. 여덟 명이 세계를 다 살려놓은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했는데, 여기서 ‘ 물’은 노아시대의 물입니다. 노아의 시대의 물과, 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물>은 순종하는 자는 구원하고 불순종하는 자는 심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노아시대의 물은 불순종 심판, 순종자는 구원한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을 믿는 성도에게 죄 씻음을 받고 구원 얻은 표로서 인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 하반절에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는 영이 중생하였는데, 중생한 사람도 몸은 죄와 사망 하에 있습니다. 몸에 부패성이 있습니다. 우리 몸을 중생시킨게 아니고 영을 중생시켰습니다. 육체는 부패성은 정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은 영은 인정받아 새로 살아났습니다. 영이 이제 하나님 찾아가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중생한 영을 쓰
는 양심인데, 중생한 영이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영이 양심이 있어서 찾아갑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서 계속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8:10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어떻게 됩니까?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너의 몸은 죄와 사망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어떻게 됐습니까? 의로 인하여 살아났습니다.

본문 22절에,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심복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나갔습니다. 십자가에까지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습니다. 

너희도 예수님과 같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신앙양심을 써서 중생한 영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달음박질 하는 것입니다. 전진하며 항상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고 천사와 권세와 능력들이 복종하는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며 죄와 싸우면서 죽기까지 복종하면, 하나님이 살려가지고 이제 영광스런 가운데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죄와 싸우면서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선한 양심을 써서 계속 하나님을 찾아가면서 자라나는 사람, 달음박질 하고 자라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광스럽게 된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 옆에 가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7 부부에게 주신 교훈.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부부에게 주신 교훈
베드로전서 3:1-7

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라. 

3:2 이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라도, 너희가 두려움으로 행하는 정결한 행실을 보고, 말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3 너희는 머리를 땋거나, 금 장식을 달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치장하지 말고, 

3:4 오히려 마음에 숨은 자를 온유하고 안정된 영의 썩지 않을 것으로 치장하여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값진 것이다.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였다.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그에게 순종한 것과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며 어떤 무서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여자의 딸들이 된 것이다.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니,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또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이니, 귀하게 여겨라. 이는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3:8 마지막으로, 너희는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해져라. 

3:9 악을 악으로, 또는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여라. 이는 너희가 복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못하게 하고,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하여 이것을 이루어라. 

3:12 이는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향하시고 주님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기울이시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3:13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는 자가 되면 누가 너희를 해치겠느냐? 

3:14 그러나 너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들이니,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흔들리지도 마라.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3:16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너희의 선한 행실을 비방하는 자들이 너희를 비방하는 그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3:17 선을 행하다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 


1. 아내에게 주신 교훈

본문 1절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됩니다. 왜 복종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복종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복종하라고 했기 때문에 복종해야 됩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돈도 많이 주고, 자기를 위해준다고 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복종하라고 했으니까 복종하는 것입니다. 잘 못해주든, 가난하든, 병들었든, 하여간 성경에 복종하라고 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외모로 하지 말고, 속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 온유한 성품, 온유한 말, 온유한 대답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유순하게, “예~예~” 해야 됩니다. 맞서지 말고 온유하라는 말입니다. 남편이 잘못했다고 해도, 속이 상해도 ‘성경에 복종하라고 했으니까 복종하자, 성경에 유순하게 하라고 했으니까 유순하게 하자’ 하라는 말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언제나 남편을 우러러보면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윗사람에게 할 것이기도 합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 머리되는 윗사람에게 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머리되는 사람에게 잘 복종하고 유순하게 나가라는 말입니다.
잘 우러러 받들어나가면서 순종해나가면 그것이 잘되는 길입니다. 가정도 잘되고, 직장도 잘되고, 사회도 잘되고, 교회도 잘되고, 다 잘됩니다. 성경에 순종하라고 했으니까 순종하는 겁니다. 잘해준 게 뭐냐? 시집올 때 뭘 해줬느냐? 그건 옳지 않습니다. 하나도 안 줘도 그저 성경에는 남편을 복종하라고 했으니까 복종하는 겁니다. 언제나 우러러 받들면서 복종하면 잘 되어나갑니다. 이것이 잘되는 법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이렇게 하면 잘 됩니다. 섭섭한 거 있어도 그건 다 참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앞으로 좋은 걸로 갚아주실 거니까 그거 분풀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원수 갚으셨습니까? 원수를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원수였었는데 원수인 우리를 위해서 죽지 않으셨습니까? 그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라는 말입니다.


2. 남편에게 주신 교훈

아내가 연약한 그릇인 줄 알고 사랑할 것

본문 7절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연약한 그릇이요”고 했습니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라’는 지식을 언제나 따라서 아내와 동거해야 됩니다.
남자보다 여자는 연약합니다. 마음도 연약하고 몸도 연약하고, 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연약한 그릇은 연약한 그릇대로 취급을 해야지, 그걸 강한 그릇대로 취급하면 다 깨져 나갑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연약한 그릇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연약한 그릇을 가만 가만 다뤄야 됩니다. 그걸 갖다 콱 갖다 놓고, 콱 갖다 놓으면 다 깨진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그릇은 살살 들어서 살살 옮겨 놓고 해야 됩니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 줄로 언제나 알고 그 연약한 그릇에 잘 맞춰 살라는 말입니다.

아내들은 언제나 남편이 자기 사랑하는 것을 의심합니다. 사랑하나 안 사랑하나 늘 의심합니다.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아, 오늘은 참 사랑하는구나. 좋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내일도 사랑하나 안 사랑하나 또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또 “사랑합니다”하고 살면 또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하루 한번씩 “I love you", “난 당신 사랑합니다”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못합니다. 속으로 사랑하고, 속으로 사랑하면 모르니까 어디 나갔다가 오면서 군고구마 하나씩 사다주고, 그렇게 군고구마 하나 사다주면 사랑하는 줄 알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고구마 사왔다고 하루 종일 좋아합니다. 고구마 집에 있어도 사다 주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니까 그 연약한 그릇에 잘 맞춰서 살아야 됩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가 연약한 것도 모르고 그저 쾅쾅 다뤄도 그걸 잘 참으십시오. 주님이 준 십자가인줄 알고 거기서 잘 참아야지, “여보, 당신, 다른 사람은 나 연약한 그릇이라고 그렇게 했는데, 또 다른 집에서는 자기 부인에게 잘 해주는데 이게 뭐예요?” 그러지 말고, 자기에게 당한 십자가를 잘 참으며 나가면 됩니다.

남편은 언제든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 늘 사랑합니까? 변함 있습니까? 늘 사랑합니까?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또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틀림없이 사랑한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욕을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욕 한다’, 또 뭐 잘못해줘도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해준다’ 그렇게 언제나 알면 됩니다. 의복을 안 사줘도 ‘사랑하기 때문에 안 사준다’, 고구마 안사와도 ‘사랑하기 때문에 안 사온다’하고 남 하는 걸 보지 말고, 언제나 사랑한다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걸 다 승리적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귀히 여겨 사랑으로 잡을 것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귀히 여기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성경에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으니까 귀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귀히 여길 만한 행동을 안 해도, 그래도 성경에 귀히 여기라고 했으니까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내가 귀히 여길 만한 일을 못하고 반대만 하고, 악돌이가 되어서 물어뜯어도 성경에 귀히 여기라고 했기 때문에 ‘귀히 여기자’하고 자꾸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저 자꾸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에는 누가 이기겠습니까? 사랑이 이깁니다. 사랑으로 귀히 여기는 것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다 사랑으로 다 사로잡고, 귀히 여기는 걸로 다 사로잡아 가지고 얼마든지 끌고 나갈 수 있습니다. 호랑이 같은 부인들, 또 깍쟁이 같은 부인들, 악돌이 같은 부인들, 그런 사람이 있어도 사랑으로 다 사로잡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로잡아 나가면 다 잘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히 여기면서 끝까지 사랑하면서, 사랑으로 포로로 잡아가지고 잘 인도하여 나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날아다닐지라도 그물 속에 들어가 놓으면 제까짓 것이 날아다닐지라도 뛰어야 벼룩이고, 날아야 하루살이지, 뭐 사랑의 그물 속에 들어가 놓으면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뛰어도 그만이고 날아도 그만입니다. 사랑으로 사로잡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잘 될 것 같습니까? 잘 될 것 같습니다. 가서 이제 잘 하십시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은 윗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하면 됩니다. 교회 와서 윗사람들 잘 순종하며 잘 받들어 나가고, 자기 아랫사람도 잘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혼자 사는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 많이 하고, 윗사람을 잘 받들어 나가고, 교인들 잘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잘 됩니다. 자기도 잘 되고 다른 사람도 잘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9-25 예수님을 본받고 그가 주신 은혜 중에서 살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을 본받고 그가 주신 은혜 중에서 살라
베드로전서 2:19-25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전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19 누구든지 부당하게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여 슬픔을 참으면 이것이 은혜이다. 

2:20 너희가 죄를 지어 매를 맞고 참는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그러나 너희가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일이다. 

2:21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2:22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분의 입에는 거짓이 없으셨으며, 

2:23 그분은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셨으며,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맡기셨다. 

2:24 그분이 나무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이 채찍에 맞아 상하심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분께 돌아왔다.


본문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끼쳐준 예수님의 본대로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22절에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입에 궤사도 없다는 말은 거짓말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실하게만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욕을 받으셨지만 대신 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란 고난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협했다는 것은 죽인다든지 앞으로 망한다든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권세가 있으셔서 한 번만 기도하면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서 고난당하게 하는 자들을 다 멸망시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도 아니하시고 또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십니다.


1. 예수님을 본 받으라

궤사가 없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신 길은 입에 궤사가 없는 길입니다. 거짓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말을 신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실보다 더 나가지도 말고 덜나가지도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는 일 그것을 본받아야 됩니다. 

본문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귀신의 왕이 들렸다는 욕도 받았고, 또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라고 욕도 받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요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욕도 받았고, 로마 가이사 황제를 반역한 반역자라는 등 여러 가지 욕을 많이 받았지만 위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릴 욕하고 핍박하고 고난을 준다고 할지라도,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또 위협하지도 아니하시고 거짓말도 아니 하신 예수님의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신 예수님

그리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는데,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심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은 사랑으로 일관해 나가시면서,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가 원수 갚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고 공의로 원수 갚으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갈 길만 걸어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30냥에 팔아 먹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롯유다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친구여 너 하기를 하라’고 말씀하시고, 가롯 유다의 심판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결국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먹은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 돈을 제사장들에게 갖다 주려고 하였으나, 제사장들이 받지 않자, 성전에 그 돈을 던지고 가서 목매어 죽었습니다. 목매어 죽은 것도 온전하게 죽은 것이 아니고 높은 나무에 목매어 죽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져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나와 죽었다고 했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가차 없이 심판 하십니다. 며칠 내로 이렇게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준 빌라도는 어떻게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했습니까? 빌라도는 주후 36년에 네로 황제 때 참수 당했다는 설도 있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주후 36년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불과 10년 안에 빌라도가 목 잘려 죽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살 했든지 심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에 헤롯왕은 주전 4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전 4년에 났다고 그러는데 그 해 죽었습니다.
베들레헴 아이들을 두 살 이하로 다 죽이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그 헤롯왕이 그 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시켰습니다. 헤롯의 아들도 사도행전에 보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친히 공의로 심판했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가만 둬도, 예수님이 친히 원수 갚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가롯 유다도 빌라도도 헤롯왕도 하나님께서 다 공의로 심판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공의로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를 말살하려고 하는자는 다 하나님이 심판해서 멸망시킵니다. 일본도 1945년 망하기 직전에 한국 기독교 목사와 장로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계획해 놨다고 합니다. 금강산의 어느 굴 속에 전기를 다 가설해 놓고는, 1945년 8월 15일 지나서 한 2, 3일 내로 목사와 장로들을 수련회 한다고 전부 모아 놓고, 목사 장로가 다 모이면 스위치 한번 눌러서 전부 다 몰살하려고 계획했답니다. 그런 계획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1945년 8월 15일 며칠 전에 미국을 시켜서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일본 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망했습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시고 공의로 심판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끔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요새 기독교 선교사를 안 받아 들입니다. 선교사 간 사람들을 다 쫒아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복을 못 받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잘되게 하고 자유를 주는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줍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선교사를 쫒아 내는 나라들은 하나님이 얼마 안 가면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면 진리운동 방해하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2. 예수님이 주신 은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심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친히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본문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친히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당신은 친히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자기 할 일만 한 것입니다. 자기 할 일을 하시되 원수 갚는 것과 대적하는 세력들, 핍박하는 세력들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은 자기 할 일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 구속사역을 이루는 것, 친히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우리 죄 값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형 선고를 받아 마땅히 죽게 되었는데, 그것을 대신 예수님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하여 사형 받을 것을 예수님이 받으셨고, 사형 집행 받을 것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고,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지 않았으면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습니다. 죄가 없으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예수님 속에 들어가 계시고, 또 마
리아의 복중에서 완전한 사람이 돼서 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됩니다. 죄 있는 사람들 같으면 죽어도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됐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 진노를 풀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또 사람이 아니면 우리의 죄를 대속할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속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고, 또 마리아에 복중에 탄생했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시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대속 할 수 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

‘믿습니다’ 함으로 죄 사함 받게 하심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 받습니다. 예수님이 다 해놨습니다. 다 해놨는데 이젠 믿으면 됩니다. 밥으로 말하면 밥을 다 해놨는데 이젠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면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밥 다 해놨는데 먹으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시고 죄가 없으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대신 짊어지시고 죄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밥 다 해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젠 먹으면 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죄 사함 받습니다. ‘믿습니다’하면 죄 사함 받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이 속에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부터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믿기 전의 영혼은 죽었던 영혼이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내세도 모르고 자기 영혼도 모릅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알고 자기가 죄인인 줄도 알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살아나서 압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산 생명, 산영혼이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고, 또 목자가 되셔서 ‘너는 내 양이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도 되시고 우리의 목자도 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새 생명, 산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유교에서는 공자의 교훈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교훈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지만, 공자의 교훈을 지켜도 구원 못 받고, 석가모니의 교훈을 지켜도 구원 못 받습니다. 왜 못 받습니까? 불교에서는 선한 일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선한일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선한 일을 아무리 행해도 원죄를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사람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납니다. 조상 때부터 원죄는 내려옵니다. 아담 때부터 선을 행함으로 원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지옥가야 합니다. 또 지금부터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 전에 지은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가령 10살부터 선을 행했다고 하면 5살 났을 때, 9살 났을 때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 죄에 대하여는 죄 사함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지옥에 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죄 사함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이 불교나 유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선을 행했다고 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죄 사함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서 피 흘려 우리 죄를 대속해 줬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사형을 받지 않습니다. 또 3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산 생명이 있습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목자시고 우리는 양이 됐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는데 죄에 대해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왜 죽은 자일까요?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사형 받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 일생 동안 지을 죄를 예수님이 다 대신 짊어지시고 대신 죄 값으로 사형 받았습니다. 우리 죄는 사형 받는 죄입니다.
하지만 대신 예수님이 사형 받았습니다. 우리 죄가 예수님을 죽인 죄이고 우리가 사형 받을 죄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형 받지 않고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본문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라는 것이 사형 받은 죄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이 죽은 죄입니다. 내가 죽을 죄였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죄 지을 환경이 닥쳤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럴 때에,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내가 죽은 거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어떤 죄든지 우리 앞에 당면 했을 때에, 양심의 가책과 성경에서 죄짓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죄를 질까 말까 할 때가 혹시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죄가 내가 사형 받은 죄다, 내가 받을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라는 말은 죄를 지려고 할 때에, ‘내가 받을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죽었다, 예수님과 내가 함께 죽었다,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 죽음은 내 죽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 짓고도 자기가 잘 될 줄 알고 짓는데 만약 죄 지으면 죽인다고 하면 죄 지을 사람 많지 않습니다. 홧김에 ‘너 죽고 나 죽고 하자’ 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죄 짓고 잘 사려고, 재미 보려고 합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놀러 가는 것은 죄입니다. 만일 이 죄 짓고 그대로 사형 받는다 하면 주일을 범하겠습니까? 어떤 손해가 있어도 교회 나가고 하나님 잘 섬길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영이 사는 것은 의에 대하여 삽니다. 의에서 우리 생명이 살므로 의는 천하보다 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이 살아야 됩니다. 영이 살아야 새 생명의 역사가 있고 마음이 기쁘고 세상을 다 이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영이 살지 못하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말은 영은 의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에 나라입니다. 의를 아주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8복 가운데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얻습니다. 의에 주리고 굶주린 자는 배가 부릅니다. 만족 한다는 말입니다. 의에서 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의를 행해야 합니다. 옳은 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을 하며 의에서 살아야 됩니다. 죄
에서 죽고 의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했는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은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 나은 사람은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줬기 때문에 나았다 생각하십시오. 감기 걸렸다 나은 사람도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았다 그렇게 믿으십시오. 최정숙 전도 부인이 이번에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못 왔습니다. 이제 좀 있으면 나아서 올 것입니다. 그럼 물어 보십시오. 어떻게 나았나 물어보십시오. ‘어떻게 나았나요?’라고 물을 때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았다고 하면 만점이고, 모 병원에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나았다고 하면 그것은 낙제입니다.

길을 잃었던 우리에게 목자와 감독이 되어 주심

본문 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과거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습니다. 갈 길을 몰랐습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하며 미신을 섬기고 성황당에 가고 또 무당한테 가서 물어보고 환상 보고 손금보고 사주팔자 보고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다닌 것입니다.

옛날 어떤 정승이 있었는데, 그 정승이 자기 딸이 과부될 팔자라는 미신을 믿고는, 어느 날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 하나를 자루에 잡아넣어 메고 들어 와서 하룻밤 자기 딸하고 자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남자를 물에 빠뜨려 죽였답니다. 그 남자는 그 처녀와 하룻밤 자고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제 정승의 딸은 과부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정승은 자기 딸이 시집가도 잘 산다고 믿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어리석었습니다. 양과 같이 길을 잃어 버려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방황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른길을 찾아야 합니다. 감독되신 이에게, 목자 되신 이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요 우리의 감독이요 우리를 지키시는 자시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주인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양들이 이제는 제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 길을 찾았습니다. 제 목자를 찾았습니다. 이제는 지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염려 없습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고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길을 잃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는 생명길을 찾았으니까, 우리의 감독이시요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목자 있는 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걱정이 없습니다. 목자가 다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함정에 빠져도 나오게 해주시고, 잔잔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주시는, 감독되시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염려와 걱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