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예정에 항거치 못함
로마서 9:19-33
로마서 9:19-33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사
9:19 그러면 너는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책망하십니까?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라고 할 것이니,
9:20 사람아, 참으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박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께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어리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9:22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망받도록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려 하셨다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
9:24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그릇으로 부르시되,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셨으니,
9:25 호세아서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함과 같다.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외쳤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더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니,
9:28 주께서 그 말씀을 땅 위에서 남김없이, 그리고 속히 끝내실 것이다."
9:29 또 이사야가 미리 말하기를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한것과 같다.
9:30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이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었으나,
9:31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9:32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9:33 기록된 것과 같으니 "보아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두니,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9:20 사람아, 참으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박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께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어리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9:22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망받도록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려 하셨다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
9:24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그릇으로 부르시되,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셨으니,
9:25 호세아서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함과 같다.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외쳤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더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니,
9:28 주께서 그 말씀을 땅 위에서 남김없이, 그리고 속히 끝내실 것이다."
9:29 또 이사야가 미리 말하기를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한것과 같다.
9:30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이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었으나,
9:31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9:32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9:33 기록된 것과 같으니 "보아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두니,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1. 밤빌리아 버가에서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돌아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듬
본문 19절에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하나님께서 불택자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도 결국은 하나님을 순종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순종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책망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가룟 유다는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순종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
에 가룟 유다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았느냐? 불공평하지 않느냐? 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천당에 보내느냐? 지옥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 무자비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입니다.
본문 20-21절에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답변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아”에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는데 대해서 불공평하지 않느냐? 또 지옥 보내기로 예정해 놓고 지옥 보내는 것은 너무 무자비하지 않느냐? 또 바로 왕 같은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퍼지게 했다고 하면 바로도 하나님을 순종한 것이 아니냐? 책망할 것이 없지 않느냐? 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안택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거기에 대해 답변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기에 하나님을 감히 힐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가 답변입니다.
집안에도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이 있습니다. 수저나 밥을 먹는 그릇은 귀하게 쓰지만 쓰레기통은 천히 쓰지 않습니까? 필요하기 때문에 천히 쓸 그릇과 귀히 쓸 그릇을 만든 것입니다. 변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변기를 만든 것이고, 발등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등상을 만든 것이고, 의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의자를 만든 것이고, 침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침대를 만든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필요하시기 때문에 다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필요한 것을 다 만들어 놓고 살지 않습니까? 연탄집게도 만들어 놓고 살고, 변기도 만들어 놓고 살고, 밥그릇도 만들어 놓고 살고, 그릇, 의자, 발등상 등 이런 것들을 다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필요하시므로 택자와 불택자를 내신 것입니다.
즉 바로 왕 같은 사람도 필요하므로 바로 왕을 내셨고,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므로 가룟 유다를 내신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필요 없는 것 같지만 우리와 하나님과의 차원은 너무 다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과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이 다릅니다. 내가 필요한 것과 아이들이 필요한 것이 같습니까? 아이들은 무엇을 필요합니까? 아이들은 알사탕,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 필요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차원을 하나님과 사람을 같게 하므로,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이해 못합니다. 하물며 창조자와 피조물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너무 차이가 큽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즉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시계와 사람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또 자기 아이 생일이라고 해서 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 지져먹고, 닭을 잡아먹었다고 합시다. 그것도 불공평하고 무자비합니까? 자기 아이들은 생일이라고 좋다고 하는데, 닭과 물고기기가 죽었다고 무자비하고 불공평하다고 갖다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너무 차이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생일에 닭을 잡아먹을 수 있고, 물고기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불공평이 하나도 없습니다. 좋아서 기쁘다고 뛰어 가다가 개미새끼 하나 밟아 죽였다면 그 사람이 무자비한 것입니까?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밟아 죽였어야 무자비인 것입니다. 결혼하러 가다가 개미하나 죽였다고 합시다. 자기는 좋아서 결혼식 하러 가다가 개미를 밟아서 개미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원통한 일입니까? 이것을 무자비 하고,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개미가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에 불공평하고 무자비 하다고 갖다 붙일 수가 없습니다.
감히 갖다 붙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피동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고 귀히 쓸 그릇이 필요하면 귀히 쓸 그릇을 만들어 놓고 또 천히 쓸 그릇이 필요하면 천히 쓸 그릇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뚝 떼어가지고 하나는 밥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요강을 만들었다고 그것이 무자비하고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밥그릇이 필요하므로 밥그릇을 만든 것이고, 변기가 필요하므로 변기를 만든 것입니다. 다 귀히 쓰는 그릇만 만들면 밥그릇에 대변을 보겠습니까? 또 다 변기로 만들면 변기에 밥을 담아 먹겠습니까? 한번도 안 써본 변기일지라도 변기에 밥을 못 담아 먹습니다. 요강에 김치 내온 여자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일꾼들 밥을 하는데 김치 담을
그릇이 없으므로 요강에 김치를 담아서 내왔는데, 일꾼들이 요강에 김치를 담아왔냐?고 하니까 이것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요강이라고 하면서 괜찮다고 잡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사용한 요강 같더랍니다. 그래서 이 요강은 찌그러져서 오줌 눠봐야 말짱 헛것이라고 하며 아주 잘못 샀다고 하니까 그 여자가 내가 눠보니까 괜찮다고 하더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필요로 해서 내셨으므로 인간이 여기에 대해서 힐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우리 인간은 다 그릇입니다. 즉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필요하면 만드는 것으로 우리가 거기에다 “불공평 하다, 무자비 하다”라고 갖다 붙일 수 없습니다. 주인이 필요해서 만드는데 무슨 무자비입니까?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음
그렇다면 선악과는 무엇에 필요해서 만들었는가? 선악과를 내실 때에 먹지 말라는 말씀을 준 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주인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며, 또 “너는 말씀을 지켜야 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에덴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또 먹지 말라고 한 말씀을 지킴으로 아담과 하와를 자라나게 만들고, 복을 주시려고 선악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그만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 먹고 쫓겨났기 때문에 어떤 유익이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고, 그 다음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 주셔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쫓겨 날 때에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을 말합니다. 즉 독생자를 보내 주셔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속해 주심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해 주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뜨끈뜨끈한 사랑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얻은 유익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쫓겨난 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치가 되었습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기로 예정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고, 따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가 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합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4가지가 유리해 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택한 백성이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안 죽었을 텐데, 선악과를 따 먹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속해 주는 것이, 신자들에게 더 행복이 되기 때문에, 또 더 큰 복을 주시려고 선악과를 따먹기로 예정해서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안 따먹기로 예정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안 따먹기로 예정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그 만큼 알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또 언제나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기로 예정했다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낼 때에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을 줄 알고 냈겠습니까? 안 따먹을 줄 알고 냈겠습니까? 모르고 냈겠습니까? 모르고 냈다면 하나님께서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데 모르고 냈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또 우리를 창세전에 어디에서 택했다고 하였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면 벌써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예수 믿어서 구원 받도록 택한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도록 다 예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을 줄 모르고 냈다고 하면,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 있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사람을 따라서 한 것이 됩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을 줄 모르고 냈는데, 따 먹었으므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없고, 사람을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창세전에 다 예정하신 것입니다. 따 먹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할까? 하다가 독생자를 보내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대로 된 것입니다. 따 먹을 줄 모르고 냈다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고 내신 것입니다. 또 그것을 꼭 안 따먹어야 될 것 같으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려고 손이 올라갈 때에 하나님께서 “야! 따먹지 말라”고 하셨으면 안 따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가만히 둔 것이다”라고 하면 그러면 자유가 큰가? 죽는 것이 큰가? 가령 아이들 자유 때문에 아이가 면도칼로 목을 베는 것을 부모가 보고도 가만히 두면 되겠습니까? 아이가 면도칼로 목을 베면 죽는데 “야! 목 베면 죽는다”고 말만하고, 그 아이의 자유 때문에 부모가 방치해서 아이가 죽었다면 그 책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음을 방관한 책임을 부모가 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유라고 하지만 죽는 것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지, 자유 때문에 죽는 것을 가만히 두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가만히 둔 것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도록 하신 것이고, 또 따 먹은 후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예정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다 예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선악과를 내신 것입니다. 즉 독생자를 주시려고 말입니다. 따 먹지 않으면 독생자를 주시겠습니까? 따 먹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따 먹은 다음에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깨달을 때에 독생자를 주시는 것이지, 안 따먹었을 때 독생자를 보내면 “독생자 뭐 하러 왔습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독생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독생자를 주시기 위해서 미리 기초공사를 다 해놓으신 것입니다.
선악과는 행위계약인데, 행위계약을 실패할 줄 알고도 선악과를 내신 것은 나중에 독생자를 주셔서, 독생자의 피로 구속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려고 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줄 알고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제자로 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내가 열둘을 택했지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신 것입니다. 즉 알고 택하신 것입니다. 모르고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과 불택자를 내셨는데, 그렇다면 불택자가 억울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겠으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쓰는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쓰는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즉, 택한 백성은 귀히 쓰는 그릇이고, 불택자는 천히 쓰는 그릇입니다. 주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2. 택자외 불택자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택하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사람은 왜 안 택하셨는지 그게 문제입니다.
그냥 다 택하셨더라면 좋겠는데, 왜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아서 지옥가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해서 하늘나라에 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왜 다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다 택해야지,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았다고 하면 불공평하지 않느냐? 불공평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유는 불택자도 필요하기 때문에 불택자를 내신 것입니다. 택한 백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택한 백성을 내셨고 불택자도 필요하
기 때문에 불택자를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필요하시니까 택한 백성을 내셨습니다. 또한 불택자도 필요하시니까 불택자를 내셨습니다. 다 필요해서 내신 것입니다.
잠언 16장4절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당하게 잘하신 것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불택자도 내셨습니다.
기 때문에 불택자를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필요하시니까 택한 백성을 내셨습니다. 또한 불택자도 필요하시니까 불택자를 내셨습니다. 다 필요해서 내신 것입니다.
잠언 16장4절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당하게 잘하신 것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불택자도 내셨습니다.
불택자는 진노의 그릇
본문 22-23절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보이시려고 진노의 그릇을 준비했다고 하셨는데 이 그릇이 불택자입니다. 영광의 그릇을 하나님께서 준비했다고 하신 이것은 택한 백성입니다.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사랑의 그릇이 필요했고, 또한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을 통해 세세무궁토록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 진노의 그릇이 필요하신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노의 그릇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진노의 그릇은 세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에서 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유대인 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택자는 긍휼의 그릇
또 한 가지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 있다고 하였는데, 긍휼의 그릇은 영광받기로 예비한 그릇입니다. 긍휼의 그릇인 택한 백성은 세세토록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고,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인 불택자는 세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시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되겠는데 나타낼 그릇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에 택한 백성을 내셨고, 또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기 위해서 진노의 그릇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불택자를 내신 것입니다. 불택자를 내셔서 지옥에 보내어 세세토록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즉 세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택한 백성을 내셔서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을 내신 것입니다. 지옥 가는 불택자는 세세토록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연탄집게를 만든 것과 같습니다. 연탄집게는 늘 연탄만 집게 되므로 쇠가 시뻘겋게 달궈져서 슬슬 녹지 않습니까? 그래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또 귀히 쓰는 그릇은 이 시계와 같습니다. 같은 쇠인데 어떤 쇠
는 시계를 만들어서 늘 팔에 차고 다니고, 어떤 쇠는 연탄집게와 같이 만들어서 언제나 연탄불로 쇠를 녹게 만듭니다. 그러나 연탄집게도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불택자가 필요하시므로 불택자를 내셨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택자가 필요하시므로 택한 백성을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 “...무슨 말 하리요”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필요해서 하셨으므로 무슨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감히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나무는 책상 만드는 곳에 이용당하여서 책상으로 잘 쓰임을 받고, 어떤 나무는 땔감으로 이용당해서 불에 태워져 버립니다. 우리 기도원에서도 땔감 가지고 밥 해먹지 않습니까? 그러면 땔감으로 이용당하는 나무가 불공평합니까? 어떤 나무는 땔감으로 이용해서 밥을 해먹고, 또 어떤 나무는 강대상을 만드는 것에 이용당한다면 그것이 불공평하고 무자비합니까? 같은 나무인데 어떤 나무는 우리가 아침에 불을 때서 밥을 해먹고, 또 어떤 나무는 강대상을 만들어서 잘 보관하며, 먼지 앉을 새라 잘 닦고 아낀다면 그것이 불공평합
니까? 무자비합니까? 나무는 때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입장에서 불공평하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무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나무 입장은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땔감 갖다가 불을 때서 밥을 해먹고, 필요하기 때문에 강대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이 나무를 심어서 잘라 사용했는데 무슨 나무 입장에서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나무를 쓸 때에 나무 입장을 생각하고 씁니까? 나무 입장을 보고 강대상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건물의 기둥도 나무 입장을 생각해서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필요하므로 사람이 나무를 이용해서 기둥을 세운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은 차이가 더 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항거할 수 없습니다. 즉 피조물이 조물주에 대해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말 할 권리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이사야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는 생각도 다르고, 차원이 너무 다릅니다. 즉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필요하기 때문에 낸 것을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봐주므로 불택자 없이 다 같이 냈다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불택자 없이 다 같이 냈는데 그 가운데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즉 사람이 죄로 인해서 지옥에 갔다고 하면 일이 다 틀어지게 됩니다. 무엇이 틀어집니까? 다 같이 내서 누구나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안 믿어서 지옥 갔다고 하면 첫째 성경에 택자와 불택자가 있다고 한 것이 안 맞고, 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했다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또 다 같은 사람을 냈는데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해 놓으면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음은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자기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선물을 다 같이 주지 왜 그 사람에게만 주었나? 다 같이 믿음을 주었으면 다 구원 받을 것인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주나? 하며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표준으로 하면 성경 전체에 안 맞고 또 논리에 안맞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어야 믿는다고 하였는데, 믿음을 선물로 다 주지 왜 다 안 주었냐?는 말이 또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을 면할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안 맞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따라오고, 하나님의 주권이 없어지고, 예정도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다 안 믿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고 독생자를 주었다고 하면, 만일 사람들이 다 안 믿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또 다 안 믿을 수 있습니까? 가라지와 곡식 두가지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라지와 곡식, 또 양과 염소가 있다고 하였는데 즉 오른 쪽에 있는 것은 양이고, 왼쪽은 염소로, 믿는 사람은 양이고 안 믿는 사람은 염소입니다. 그러면 염소가 양이 될 수있습니까? 염소가 잘 믿으면 양이 됩니까? 또 마태복음 13장에 가라지 비유가 있는데, 가라지가 곡식이 될 수 있습니까? 곡식 밭에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는다”고 하며 뽑지 말고 가만히 두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곡식 종자가 다른데, 다 같이 내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간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왜 내셨겠습니까? 또 곡식과 가라지가 왜 갈라져 있습니까? 그러므로 종자가 둘인 것입니다.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에 어린 자는 사랑하고 큰 자는 왜 미워했습니까? 다 같이 사랑하면, 난 다음에 “네가 예수 믿으면 널 사랑하겠다”하며 큰 자가 믿으면 큰 자를 사랑하고, 작은 자가 믿으면 작은 자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왜 나기 전에 작은 자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전부 다 안 맞습니다.
본문 25절에,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내 백성 아닌 자’는 이방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고,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고 하십니다. ‘사랑치 아니한 자’도 이방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말 한 것입니다.
본문 27-28절에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아무리 많아도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 즉 택함을 받은 자만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본문 29-31절에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중에 택한 백성을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방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의를 좇아가야 하는 것도 몰랐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3절에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 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의를 위해 하나님과 율법을 좇아갔었지만 결국 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까? 저희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았고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에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혀서 의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부딪혀서 멸망하고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는 망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가 견고한 보호처가 되며, 무슨 일을 당하든지 구원을 이루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