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과 이삭의 죽음
창세기 35:16-29
16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26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28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29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세기 35:16-29
16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26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28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29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1. 라헬이 죽음
본문 16절에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라고 하였는데, 벧엘은 야곱이 신앙을 회복한 곳입니다.
벧엘로 올라가 신앙을 회복한 야곱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야곱이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타락한 자리에서 옛날의 신앙을 다시 찾으라는 뜻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갈 때에 네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상, 곧 이방 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귀걸이를 떼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 죄를 모두 회개하면서 옛적의 신앙을 찾아 벧엘로 올라간 것입니다. 떠나서 벧엘로 올라가니 사면 고을들이 크게 두려워하게 했습니다.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가는 출발만 해도 하나님께서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렵게 해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성 사람들을 살육하고 약탈했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모여서 야곱의 가족을 해하려고 한다면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수가 적고 그 지방 사람들은 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야곱이 두려워했지만 회개하여서 우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꿔 입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벧엘로 올라가려고 출발을 하니, 하나님께서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들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5절에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했기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벧엘에 올라가서 옛날의 신앙, 곧 환난 때에 하나님을 만났던 그 신앙을 다시 찾으려고 거기에 단을 쌓으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에 야곱에게 승리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승리자로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벧
엘에 올라가는 신앙은 참으로 복 받는 신앙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떠나기만 해도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고, 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인격을 주셨습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음
본문 16-17절에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야곱의 일행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에브랏에 못 미쳐서 얼마 떨어진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심히 신고하다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라헬이 또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고하였습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게 될 때에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부르고 죽었습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다가 죽게 되었으니, 다시 말해서 죽는 고생을 하면서 아들을 낳았으니,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노니’라 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했습니다. 베냐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죽을 고통을 하면서 해산한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슬픔 중에 낳는 아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슬픔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짖지 아니하고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요긴한 손이요, 능력의 손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오른손의 아들이 되고, 어머니에게는 슬픔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해산한 것은 잘 된 것이었습니다. 죽으면서라도 해산한 것이 잘 되었습니다. 무엇이 잘 되었습니까? 이제 열두 아들이 되었으니 잘 된 것이 아닙니까? 라헬이 해산 못 했더라면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죽으면서라도 해산을 했기 때문에 열두 아들이 된 것입니다.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음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교역자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4장 15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
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서 낳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 것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성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도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전도해서 교인을 하나 얻기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도 교역자가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만 이루어집니다. 해산하는 수고는 일심정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서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루는 것입니다. 방심 부주의하고 상심하고 이것저것하고 돌아가다가는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일심정력을 다 기울이고, 전심전력을 다 하고, 생명 전체를 다 기울여야 합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해산하지 않았습니까? 죽을 각오하면서 해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사각오하고 일심정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일심정력을 기울여,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 가져다 바쳐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역자들이 교회에서 교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신학교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강해서 발간하는 것도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 번역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금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문을 가지고 성경을 새로 번역하려고 하는데, 번역할 학자를 찾는 중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맡겨야 성경 번역을 잘 하겠습니까? 몇 사람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그 일을 맡아서 자기 생명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성경 번역하는 것을 생명같이 여기고, 거기에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치고, 그것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여야 앞으로 좋은 번역이 나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정성을 안 들이고 마음이 안 들어가면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없습니다. 거기에 혼이 들어 가야 합니다. 일본말로 하면 ‘다마시’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라고 부르는 일본의 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옛날 고려 청자가 왜 유명합니까? 일본 사람들이 가져다가 아무리 만들려고 해도 안 됩니다. 몇 십 년 해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 결론이 어떻게 났습니까? 일본 사람들의 결론이 고려 청자기에 는 고려 사람들의 혼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혼이 들어가서 그렇게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혼이 안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혼이 들어간 것입니까? 고려사람들이 늘 압박받는 가운데서 생명을 다 바쳐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사각오를 하고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 혼을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맡아서 하는 일은 절반하고 노라리를 절반하는 것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안 됩니다. 못 씁니다. 하나를 맡았으면 그것을 위해서 생명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과 뜻, 정성, 자기 생명과 시간 등 전체를 다 기울여야 그 일이 되어 나갑니다. 그래서 해산하는 수고라는 것입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해산하지 않았습니까? 죽을 각오하면서 해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사각오하고 일심정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일심정력을 기울여,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 가져다 바쳐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역자들이 교회에서 교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신학교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강해서 발간하는 것도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 번역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금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문을 가지고 성경을 새로 번역하려고 하는데, 번역할 학자를 찾는 중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맡겨야 성경 번역을 잘 하겠습니까? 몇 사람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그 일을 맡아서 자기 생명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성경 번역하는 것을 생명같이 여기고, 거기에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치고, 그것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여야 앞으로 좋은 번역이 나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정성을 안 들이고 마음이 안 들어가면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없습니다. 거기에 혼이 들어 가야 합니다. 일본말로 하면 ‘다마시’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라고 부르는 일본의 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옛날 고려 청자가 왜 유명합니까? 일본 사람들이 가져다가 아무리 만들려고 해도 안 됩니다. 몇 십 년 해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 결론이 어떻게 났습니까? 일본 사람들의 결론이 고려 청자기에 는 고려 사람들의 혼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혼이 들어가서 그렇게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혼이 안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혼이 들어간 것입니까? 고려사람들이 늘 압박받는 가운데서 생명을 다 바쳐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사각오를 하고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 혼을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맡아서 하는 일은 절반하고 노라리를 절반하는 것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안 됩니다. 못 씁니다. 하나를 맡았으면 그것을 위해서 생명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과 뜻, 정성, 자기 생명과 시간 등 전체를 다 기울여야 그 일이 되어 나갑니다. 그래서 해산하는 수고라는 것입니다.
베냐민이 이스라엘의 오른손의 아들이 됨
라헬이 해산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때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하면서 낳았으니, 또 죽으면서 낳았으니 슬픔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죽으면서라도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습니까?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안 낳았으면 열두 지파가 못 됩니다. 이스라엘이 열두지파가 되어야 하나님의 구원 운동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나갑니다. 열한 지파면 안 됩니다. 12수가 만수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죽으면서라도, 오늘로 말하자면 전도해서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바울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서 이루어 놓아야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원만하게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라헬이 고통과 슬픔을 당하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낳아 놓았는데 아버지에게는 어떤 아들이 되었습니까?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능력의 아들, 요긴한 아들이 된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능력의 사람, 요긴한 사
람이 됩니다. 자기가 요긴하게 됩니다.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요긴한 사람이 됩니다. 요긴한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두 기둥이 된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요긴한 기둥감들이 많이
생깁니다. 요긴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고통 중에 아이를 하나 낳아 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해 놓으십시오. 고통을 많이 당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나 해 놓으십시오. 성도를 하나 구원해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 성도가 무슨 성도가 됩니까? 오른손의 성도가 됩니다. 오른손의 성도같이 요긴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니 죽어서도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라헬이 죽어서도 그 아들은 오른손의 아들이 되었으니 얼마나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하다가, 충성하다가, 해산하는 수고하다가 죽어도 그것은 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요긴한 것입니다.
람이 됩니다. 자기가 요긴하게 됩니다.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요긴한 사람이 됩니다. 요긴한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두 기둥이 된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요긴한 기둥감들이 많이
생깁니다. 요긴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고통 중에 아이를 하나 낳아 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해 놓으십시오. 고통을 많이 당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나 해 놓으십시오. 성도를 하나 구원해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 성도가 무슨 성도가 됩니까? 오른손의 성도가 됩니다. 오른손의 성도같이 요긴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니 죽어서도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라헬이 죽어서도 그 아들은 오른손의 아들이 되었으니 얼마나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하다가, 충성하다가, 해산하는 수고하다가 죽어도 그것은 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요긴한 것입니다.
라헬을 장사지내고 묘비를 세움
본문 19-20절에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고 하였습니다. 라헬이 죽었으므로 베들레헴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에 장사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장사를 했습니까?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에 장사했고, 사라도 막벨라 굴에 장사했고, 레아도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다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야곱도 죽을 때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말하기를 창세기 49:30-31절에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하면, 먼저 살펴 본대로 막벨라 굴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와 리브가, 야곱, 레아 다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베들레헴에 장사되었습니다. 왜 라헬을 막벨라 굴에 같이 장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즉 아브라함 부부, 이삭부부, 야곱의 아내 레아와 야곱 자신은 그곳에 장사되었고 라헬 하나만 막벨라 굴에 장사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왜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을 가족 묘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장사해 묘비를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라헬이 길가는 도중에 죽었으니 장사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길 가다가 죽었으니 거기에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다가 길에서 죽었으니 그곳에 장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장을 안했습니까? 일단 파묻어 놓았다가 다음에 막벨라 굴로 가져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른 사람들은 막벨라 굴에 가져다 장사한 것입니까? 그것은 더 큰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었고, 그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자손에게 준 것을 후대에 알게 하려고, 특별히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 할 때에 가나안 땅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그 조상들을 한 무덤, 즉 막벨라 굴에 함께 다 모아 놓은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어디에 있었다고 했습니까? 애굽에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입관하여 두었습니다. 애굽에서 죽었으면 애굽에서 입관하는 것이 원리원칙이고, 베들레헴에서 죽었으면 거기에서 입관하는 것이 원리원칙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하였습니다(창 50: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실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이 400년 동안 그 증거가 된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이 애굽에 있고 그것을 메고 나가라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땅은 가나안이다, 메고 나가야 한다’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메고 나가라고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나안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애굽에서 죽었지만 가나안에 가서 장사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 나라는 가나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돌아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애굽에서 입관한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으로 한 것입니다.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새 어떤 이가 세상 떠나서 장사를 지내면 하루 종일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벽에 장지로 떠나서 종일 걸려서 밤중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전라도, 또 경상도까지 다녀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새벽에 떠나서 밤중에 돌아와서는 병이 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세상 떠났는데 어디에 장사했습니까? 베들레헴에서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울에서 떠나면 서울에서 장사하십시오. 무엇하려고 고향에 내려갑니까? 고향에 가면 또 무엇을 합니까? 결국 거기서 썩어질 것인데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조상 섬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조상 묘지를 명당 자리에 쓰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섬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하러 그렇게 합니까? 거기서도 썩어져 없어집니다. 영혼이 천당에 갔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장사 잘하고 비석 잘 세워나도, 몇 백 년 지나가면 다 없어집니다. 몇 백 년 지난 무덤에 가 보십시오. 무덤이 있나 말입니다. 자손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자손들이 몇 백 년 전 조상을 찾아갑니까? 나 부터라도 몇 백 년 전의 우리 조상을 알지도 못합니다.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아마 잘 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해 놓아도 몇 백 년 가면 다 없어집니다. 비석만 덜덜 굴러다닙니다. 돌은 글자가 절반쯤 떨어져 나가고 희미해지고 그러다가 없어집니다. 괜히 그러는 것입니다.
본문 19-20절에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고 하였습니다. 라헬이 죽었으므로 베들레헴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에 장사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장사를 했습니까?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에 장사했고, 사라도 막벨라 굴에 장사했고, 레아도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다 막벨라 굴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야곱도 죽을 때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말하기를 창세기 49:30-31절에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하면, 먼저 살펴 본대로 막벨라 굴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와 리브가, 야곱, 레아 다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베들레헴에 장사되었습니다. 왜 라헬을 막벨라 굴에 같이 장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즉 아브라함 부부, 이삭부부, 야곱의 아내 레아와 야곱 자신은 그곳에 장사되었고 라헬 하나만 막벨라 굴에 장사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왜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을 가족 묘인 막벨라 굴에 장사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장사해 묘비를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라헬이 길가는 도중에 죽었으니 장사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길 가다가 죽었으니 거기에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다가 길에서 죽었으니 그곳에 장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장을 안했습니까? 일단 파묻어 놓았다가 다음에 막벨라 굴로 가져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른 사람들은 막벨라 굴에 가져다 장사한 것입니까? 그것은 더 큰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었고, 그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자손에게 준 것을 후대에 알게 하려고, 특별히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 할 때에 가나안 땅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그 조상들을 한 무덤, 즉 막벨라 굴에 함께 다 모아 놓은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어디에 있었다고 했습니까? 애굽에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입관하여 두었습니다. 애굽에서 죽었으면 애굽에서 입관하는 것이 원리원칙이고, 베들레헴에서 죽었으면 거기에서 입관하는 것이 원리원칙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하였습니다(창 50: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실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이 400년 동안 그 증거가 된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이 애굽에 있고 그것을 메고 나가라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땅은 가나안이다, 메고 나가야 한다’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메고 나가라고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나안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애굽에서 죽었지만 가나안에 가서 장사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 나라는 가나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돌아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애굽에서 입관한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으로 한 것입니다.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새 어떤 이가 세상 떠나서 장사를 지내면 하루 종일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벽에 장지로 떠나서 종일 걸려서 밤중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전라도, 또 경상도까지 다녀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새벽에 떠나서 밤중에 돌아와서는 병이 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세상 떠났는데 어디에 장사했습니까? 베들레헴에서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울에서 떠나면 서울에서 장사하십시오. 무엇하려고 고향에 내려갑니까? 고향에 가면 또 무엇을 합니까? 결국 거기서 썩어질 것인데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조상 섬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조상 묘지를 명당 자리에 쓰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섬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하러 그렇게 합니까? 거기서도 썩어져 없어집니다. 영혼이 천당에 갔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장사 잘하고 비석 잘 세워나도, 몇 백 년 지나가면 다 없어집니다. 몇 백 년 지난 무덤에 가 보십시오. 무덤이 있나 말입니다. 자손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자손들이 몇 백 년 전 조상을 찾아갑니까? 나 부터라도 몇 백 년 전의 우리 조상을 알지도 못합니다.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아마 잘 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해 놓아도 몇 백 년 가면 다 없어집니다. 비석만 덜덜 굴러다닙니다. 돌은 글자가 절반쯤 떨어져 나가고 희미해지고 그러다가 없어집니다. 괜히 그러는 것입니다.
2. 르우벤의 범죄
본문 21-22절에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였다고 했습니다. 서모는 아버지의 첩입니다. 즉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통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다. 아버지의 첩과 동침했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입니다(창 49:3-4). 그러면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 돌아갔습니까? 요셉에게 돌아갔습니다
(대상 5:1-2). 요셉이 장자의 명분을 계승하여 두 몫을 받아서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지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르우벤은 일시적 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시적 범죄 때문에 대대손손 이어질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으니 얼마나 막대한 손해입니까? 이에 르우벤 지파는 생명이 없게 되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값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일시적 범죄로 말미암아 대대손손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입니다. 또한 에서는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까?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잃었습니다. 물질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입니다. 에서는 물질, 즉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고, 르우벤은 일시적 정욕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다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잘 되는 유익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야곱의 열두 아들
그 다음 본문 23-26절에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이 모두 열둘입니다. 레아의 소생이 여섯이고, 라헬의 소생은 둘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여종 빌하와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각각 둘입니다. 그래서 전부 열두 아들입니다.
4. 이삭이 죽어 장사됨
본문 27-29절에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가서 20년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십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이삭에게 찾아 갔습니다. 가보니 누구와 함께 있었습니까? 맏아들 에서와 함께 있었습니다. 에서가 효자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팔아먹었지만 아버지를 끝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제 돌아온 것입니다.
본문 28-29절에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이삭에게로 가서 얼마있으니 이삭이 나이 일백팔십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삭이 나이 많
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다고 했습니다. 참 잘 되었습니다. 전에는 형이 동생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야곱이 형을 속여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또 에서에게 주겠다는 맏아들의 축복을 자기가 에서라고 속여서 대신 다 받았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도 속았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도망쳐 밧단아람으로 피난 가서 20년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와서 화목하여 형제가 함께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잘 되었는가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화목했습니까? 동생은 형을 속이고 형의 것을 빼앗았고, 형은 동생을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화목이 되었습니까? 동생 야곱이 회개했습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화목이 된 것입니다. 회개 안 하면 화목이 안 됩니다. 얍복 강에서 회개하고, 또 얼마 있다가 숙곳에서 회
개하였습니다.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고, 귀걸이 등을 버리고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벧엘의 신앙을 찾으니 다시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에서가 마음이 넓습니다. 형의 아량입니다. 무엇 때문에 잘 되었습니까? 동생의 회개와 형의 아량과 너그러움 때문입니다. 에서에게 용납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원수가 아닙니다. 죽이려고 했지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용납하고 서로 화목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회개하고 형이 아량으로 용납해주어서, 아버지가 세상 떠날 때에는 같이 장사를 해서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삭이 일백팔십세를 살았습니다. 많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일백칠십오세를 살았습니다. 야곱은 일백사십칠세, 요셉은 백십세까지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4대 족장들 중에서 이삭이 제일 오래 살았습니다.
본문에서 잘 한 것은 라헬이 죽으면서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입니다. 죽으면서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을 낳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기 때문에 잘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열두 지파가 이루어지지 못합니
다. 자기는 아들을 낳고 죽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슬픔의 아들이 되었지만, 그 아이는 아버지 야곱에게는 오른손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수고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해 놓는 것이 상책이라 는 것입니다. ‘힘들다. 왜 나만 하느냐’고 불평하지 말고, 해산하는 수
고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서도 해놓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안 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르우벤의 경우입니다. 그가 일시적인 죄를 못 이기고 범죄하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다. 그리하여 대대손손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또 잘 된 것은 야곱과 에서가 화목해져서 아버지 이삭을 함께 장사 지낸 것이 참 잘 된 일입니다. 그것은 동생 야곱의 회개와, 형 에서의 너그러움과 아량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동생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고, 그리하여 형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 고 했지만, 이제는 먼저 동생 야곱이 회개하고, 형 에서는 동생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그 덕분에 마지막에 모두 화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 이삭의 장사를 잘 지내게 된 것입니다. 참 잘 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