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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일요일

사도행전 7:1-37 스데반의 강도 (講道).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스데반의 강도 (講道)
사도행전 7:1-37

7:1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이것이 사실이냐?" 하므로, 
7:2 스데반이 말하였다. "부형여러분, 들어 보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하란에서 살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7:3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시므로, 
7:4 그가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서 살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곳에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으나, 
7:5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곳에서는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시지 않고 아직 자식이 없는 그와 그 후손에게 이곳을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7:6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후손이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고 종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7:7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할 것이니, 그 후에 그들이 그곳에서 나와 이곳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다.' 하시고, 
7:8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덟째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고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열두 족장에게 그렇게 하였다." 
7:9 "그런데 족장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다 팔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7:10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시고, 그에게 이집트 왕 바로 앞에서 은혜와 지혜를 주시어, 그를 이집트와 그의 온 집의 통치자로 세우셨다. 
7:11 그때 온 이집트와 가나안에 흉년과 큰 환난이 임하여 우리 조상들이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7:12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먼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로 보냈고, 
7:13 두 번째 갔을 때에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었고, 또한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7: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아버지 야곱과 친족 일흔다섯 명을 모두 초청하므로, 
7:15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 그 자신과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서 죽었고, 
7:16 그들의 유해는 세겜으로 옮겨져서 아브라함이 세겜 땅 하몰의 아들들에게 은을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었다." 
7: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워졌을 때에 백성이 늘어나서 이집트에서 번성하였다. 
7:18 마침내 이집트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즉위하니, 
7:19 이 왕이 우리 민족에게 교활한 정책을 써서 우리 조상들을 학대하고 그들의 아기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였다. 
7:20 그 무렵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으며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양육을 받다가, 
7:21 마침내 버려졌는데,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들로 양육하였으므로, 
7: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로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말과 행동이 능하였다." 
7:23 "그가 사십 세 되었을 때에 그의 형제들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아보려는 마음이 일어났다. 
7:24 어떤 사람이 불의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모세가 그를 보호하러 나서서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 그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복수하였다.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깨달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 
7:26 이튿날 그가 서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화해시키며 말하기를 '너희는 형제들인데 어찌하여 서로에게 불의를 행하느냐?' 하니, 
7:27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는 자가 그를 밀치며 말하기를 '누가 당신을 우리의 통치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소? 
7:28 당신이 어제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 합니까?' 라고 하므로, 
7:29 모세가 이 말을 듣고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고, 거기서 아들 둘을 낳았다." 
7:30 "사십 년이 찼을 때에 시내 산 광야에서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니, 
7: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갈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와,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시니, 모세는 무서워서 감히 자세히 바라보지 못하였다. 
7:33 그때에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7:34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받는 학대를 내가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출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와라.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겠다.' 라고 하셨다." 
7:3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누가 너를 통치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라고 말하며 거부하던 이 모세를, 가시덤불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난 천사의 손을 통하여 통치자와 해방자로 보내셨다. 
7:36 이 사람이 이집트 땅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놀라운 일들과 표적들을 행하며 백성들을 이끌어 내고, 
7:37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다.' 라고 말한 모세이다. 

1. 아브라함을 들어 증거함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구약의 모든 사실을 들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교훈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13-14에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고치겠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하는 거짓 증인들의 말을 가지고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이려고 공회에 잡아다 놓았습니다. 또 거짓증인을 세워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며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것과 율례를 고치겠다고 하는 것 역시 아주 큰 죄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거짓증인을 세워 심문을 하는데, 1절 말씀과 같이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이 아브라함부터 들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본문 2-3절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스데반은 믿음의 조상부터 들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메소보다미아는 갈대아 땅으로 바벨론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창세기 11-12장의 말과 조금 다릅니다. 창세기 12:1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2:1-2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란에서 부른 것이어야 하겠는데, 11장에 보면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창세기 11:31-32에는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2:1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는데, 그 전에 아브라함이 벌써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왔습니다. 하란에 와서 아버지가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갈대아 우르에서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부름을 받아서 오다가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창세기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하란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로, 사도행전에서는 ‘죽기 전에 갈대아에서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습니까? 본래는 갈대아 땅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아버지를 모시고 하란에 와서 살다가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는 처음부터 갈대아 우르 땅에서 불렀다고 하였고, 창세기 12장에는 중간에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하란에서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습니까? 둘 다 옳은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다 옳은 줄 믿어야합니다. 어느 것이 틀렸다고 하면 안 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날 때에 어떤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하였습니까? 사도행전 7장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날 때에도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너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모시고 하란에 갔습니다. 거기서 얼마동안 있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에 재차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아,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명령하실 때와 두 번째 명령하실 때는 서로 조금 다릅니다. 사도행전에는 갈대아 우르에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였는데, 떠나오다가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는 재차 하나께서 나타나셔서 무엇을 떠나라고 하셨습니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란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처음에 갈대아 우르에서 말씀하실 때에는 고향과 친척만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는 아비 집까지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명령한 다음에 잘 안 들으면 또 다시 명령하는 수가 있습니다.
야곱에게도 선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밧단 아람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떠나서 아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또 다시 천사가 나타나 앞으로 가면서 인도해 주었고, 또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말씀해 주신 다음에 잘못하면 또 나타나십니다. 또 잘못 나아가면 다시 나타나셔서 명령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주자주 권면하심으로 당신의 목적을 이루게 하시려는 섭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처음에 갈대아 우르인 자기 고향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고, 이에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듣고 떠나서 가다가 하란에 머무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더 이상 갈 생각을 안 하니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너 왜 갈 생각을 안 하니, 처음에 내가 네게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가라고 할 때에는 어느 정도 왔는데 중간에 오다가 머물렀구나, 또 다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러면 너로 큰 민족이 되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네 이름이 창대해지고 네 자손이 이 땅에 가득해지고 모든 천하만민이 너 때문에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떠나야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떠나지 못하면 가지 못합니다. 가다가 머물렀으므로 떠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떠나지 못하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 요새로 말하면 물욕(物慾)과 정욕(情慾)과 사욕(私慾),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떠나야 합니다. 물욕은 물질에 대한 욕심, 정욕은 인정(人情), 사욕은 자기 중심,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이것들을 떠나야 하나님을 따라갈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주관을 떠나야 합니다. 제 생각, 제 뜻, 자기 위하는 것, 또 제 것으로 삼아놓는 것, 이것을 다 떠나야 합니다. 이것을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이 언제나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못 따라갑니다. 자기 위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주장을 떠나야 합니다. 인정을 떠나야 하고 의지하고 살던 것을 떠나야 합니다. ‘친척’은 ‘인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아비 집’이라는 것은 ‘의지하고 살던 것’을 말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던 것, 그것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사람 의지하고 사는 것, 어떤 세력 의지 하고 사는 것, 단체 의지하고 사는 것 그것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또 인정을 떠나라, 네 생각, 네 뜻을 떠나라, 너 위하는 생각도 떠나라, 그리고 온전히 빈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만 따르라는 것입니다. 모든 염려는 다 하나님께 맡기고, 또 내 모든 것도 다 하나님께 맡겨놓고, 내 생각, 내 뜻도 다 뒤에다 세우고, 내 지식도 뒤에다 세우고, 내가 잘 되겠나? 못 되겠나? 하는 것
도 다 뒤에다 세워놓아야 합니다. “오직 주의 말씀 하나만 따라 가고자 합니다. 그 말씀 따라가다가 평안해도 좋고 곤고해도 좋고,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고, 환난을 받아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내게 있는 것 다 없어져도 좋고, 모든 사람 앞에 버림을 당해도 좋고, 말씀 하나만 따라가면 나는 만족입니다”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말씀 하나만 자기의 생명을 삼고 따라가면 큰 복을 받습니다. 그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보통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시려고,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입혀주시려고, 영광의 그릇으로 삼으시려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자주자주 권면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를 복 되게 하려고 네 이름을 크게 만들려고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네 자손을 창성하게 하려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려고 내가 너를 찾아와서 인도하니 너
는 다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즉시 따라간 아브라함의 신앙

명령 받은 아브라함은 즉시로 다 내어 버렸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즉시로 다 내어 버리고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만 따라 가다가 어떠한 곤고(困苦)나 환난을 당하든, 그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살겠는지 죽겠는지, 그저 아브라함은 말씀 하나만 따라 갔습니다. 즉시로 따라 갔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즉시로 따라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만복을 주어서 큰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서 오다가 아브라함처럼 하란에서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중 가운데 머물지 말고 이제는 계속해서 말씀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말씀을 따라가겠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즉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려야 합니다. 나 위하는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시원치 않습니다. 믿는다고 해도 진보가 없고,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고, 언제나 앉은뱅이, 졸고 잠자는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즉, 언제나 중간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다 벗어 버리고 “예, 갑니다”하여야 합니다. 힘 있게 나서서 따라 가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런데 버리지를 못하므로 얽매어 있습니다. 얽매어 있어서 앞으로 가지를 못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못할 것을 떠나야 하고 버리지 못할 것을 버리고 안 떠나지는 것을 떠나야 합니다. 떠날 수 없는 곳을 떠나야 합니다. 떠날 수 없는 것 때문에 못 가므로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버릴 수 없는 것 때문에 못 가므로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놓을 수 없는 것 때문에 못 가므로 그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내놓기 힘든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떠나기 쉬운 것을 떠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떠나기 어려운 것을 떠나야 합니다. “갑니다다”하고 이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사람이 되니 점점 진보가 되고, 전진하고, 인격이 커지고, 복의 기관이 되고, 자기가 커집니다. 커지면 벌써 복이 온 것입니다. 따라 가지 않고 욕심만 채우려고 하니 일이 안 됩니다. 다 내어놓고 말씀을 따라 가면 잘 되겠는데 내어놓지 않고 욕심만 채우려고 하니 하나님의 복이 오지 않습니다. 또 있는 것도 유지가 못 됩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내어놓지 않고 “내 것이다”하고 꽉 붙잡고 앉아 있으면, 거기에 녹이 쓸고 좀이 먹습니다. 도적이 와서 다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가운데 빠지지 말고 일단 다 내놓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위하는 것도 맡기고, 다 내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아예 빈 몸을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 명령만 따라가겠습니다”하고 한 발자국씩 따라 가면 인격이 커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옵니다. 벌써 복의 기관이 그만큼 된 것입니다. 또 자손이 창성해집니다. 자기가 내어놓고 말씀을 따라가야 자손이 잘 됩니다. “내 아들이다, 내가 붙잡아야 되겠다”하며 아들을 붙잡으려고 발
발 떨고 있으면 아들이 붙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속상해서 죽게 될 날이 옵니다. 아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해 놓고 맡겨 놓으란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무엇만 하면 됩니까? 말씀만 따라가면 됩니다. 내 것으로 삼으려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어서 흑암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한 걸음씩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주일부터 지키고 십일조 드리고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십일조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 내야 합니다. 다른 데 내는 것은 무효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 양심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 무엇을 행하지 않았는가’, ‘마땅히 해야 할 것, 무엇을 못하고 있는가’, 그것부터 찾아서 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한 것, 즉 기도해야 할 줄 알면서 기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바로 해야 합니다. 왜 기도하지 못했나, 마땅히 새벽기도해야 할 줄 알면서도 왜 못했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물욕과 정욕과 사욕에 속해서 세상에 빠져 돌아가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의로운 일인줄 알면서 행하지 못하고, 마땅히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줄 알면서 바치지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줄 알면서 전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못된 버릇을 고쳐야 될 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끊어 버릴 것을 끊어 버려야 될 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죄 가운데 빠지고 마귀의 궤계(詭計)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왜 못 따라 가는가?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갔기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환란과 연단을 통해 복 주시는 하나님

본문 5-6절에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4, 15장에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즉,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준다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따라 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큰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환난과 연단을 주십니다. 본문 6절에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네 자손이 사백 년 동안을 종살이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창세기 15장 1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왜 사백 년 동안 애굽에 가서 종살이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 년 동
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통하여 연단이 된 다음 주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감기를 자주 앓는다고 합니다. 감기를 앓을 때에는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할 기회도 생기고 반성할 기회도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은 이런 연단, 저런 연단, 이런 시련, 저런 시련이 많이 오는데 그 가운데서 점점 자기가 깨끗해져 나갑니다. 하나님을 점점 앙망하게 되고,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바로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도 알게 됩니
다. 그러므로 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많은 연단을 주십니다. 그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만들어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따라 가면 평안만 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시련이 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만들어집니다. 하늘나라의 기업에 참예할 자격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이 올 때에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거기에서 더욱 연단을 잘 받고 더 믿는 일을 잘해서 자신의 신앙을 잘 지켜나가는 그자리에 서야 하겠습니다.

본문 7절에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심판하시고 택한 백성은 건져 주십니다. 아무리 환난 가운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건져서 잘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환난이 올 때에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거기서 믿음을 지켜 나가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쳐 주십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백성은 반드시 건져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심

본문 8절에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받아 이삭이 태어난 후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례에는 할례와 유월절이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된 표이며, 정욕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할례를 행하는 예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은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즉 ‘너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뜻이 있습니다.

예레미아 4:4에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어 내버리라’는 것은 마음에서 정욕을 다 제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할례의 뜻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것, 즉 하나님께 속한다는 뜻이고, 둘째는 정욕을 제거시킨다는 것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할례에 이스라엘 백성이 참여하여야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외부적으로는 할례를 행했지만 마음은 할례를 행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51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 때, 외부적으로만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도 할례를 행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외부적인 종교 의식에만 참여하지 말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서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여야 합니다. 즉, 모든 정욕을 다 제거시키고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2. 요셉을 들어 증거함

본문 9, 10절에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
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요셉이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그를 애굽에 팔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근성입니다. 시기하여 팔아 버리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팔고,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한테 가지고 가서 이것이 아버지 아들의 옷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는 것인데, 도리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아담 자손 전체의 근성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근성도 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시기해서 팔아먹는 것,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일을 해나가시는데, 이것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미워하는 악한 근성들이 아담의 자손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따라 가야 합니다. 왜 말씀을 안 따라가고 비방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옳으면 자기가 좀 손해를 보고 멸시를 당하고 낮아져도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아니면 따라 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고 성령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말씀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틀린 것을 눈여겨보지 말고 자기가 바로 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틀린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자기가 잘 하면 틀린 사람이 회개하고 바로 서는 날이 옵니다. 남편이 잘못하는데, 자기도 잘못하면 둘 다 망할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겠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감동을 바로 따라가겠나?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서겠나?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바로 서고 내가 바로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그 빛이 비추어 나갑니다. 빛이 비추어 나가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밝아집니다. 요셉을 시기해서 애굽에 판 그 조상들의 죄, 또 스데반 당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배반하여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던 일 등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반대하며 멸시하고 배척하는 일은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갔으나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이 요셉을 자기 집의 총리로 삼았습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가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었지만 감옥에서도 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술 감독과 떡 감독이 꿈꾼 것을 해석해주므로 얼마 후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무슨 죄를 짓고 감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면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 밖에 없습니다.

요새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자기를 요셉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아주 참람된 일입니다. 죄를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런 악한 생각을 하면 점점 더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고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다가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만듭니다. 죄를 짓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도 없고 사람 앞에도 말하기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죄가 없습니다. 죄를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그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거기서 요셉과 같이 믿음을 잘 지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어 올리실 날이 옵니다. 또 다른 사람도 살려낼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자기 믿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믿음 지키는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나를 멸시한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자기 현재의 처지․위치․형편에서 믿음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창성하게 만들어서 그 사람을 높여 주시고 들어 쓰실 날이 옵니다.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 받아서 많은 생명이 살아납니다. 자기 하나 믿음 지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순종해서 믿음 지키는 사람을 들어서 그 사람도 살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도 살려 나가는, 그런 역사를 해 나가십니다. 시기해서 팔아먹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징계를 많이 하셨지만, 그들도 마지막에는 믿음을 지키는 사람 때문에 살 날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떠한 형편을 당하든지 우리가 믿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점점 이루어져 나가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시기로 팔렸던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셔서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시고 바로 왕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하나님께서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기해서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시고 여러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또 요셉을 애굽과 바로 왕의 치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도 건져내셨습니다.

본문 11-15절에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라고 했습니다.

그 일 후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온 땅에 흉년이 드니 그 조상들이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들을 보내었는데, 재차 양식을 사러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후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고, 그 온 가족 일흔 다섯 사람을 애굽으로 청해갔습니다. 한편 성경에 보면 야곱 가족의 수를 70인이라 말한 곳도 있고 75인이라 말한 곳도 있는데, 70인은 대략적인 숫자이고 75인은 자세히 기록한 숫자입니다.

대략적인 숫자와 자세히 언급한 숫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보통 한국백성을 몇 명이라고 합니까? 사천삼백 만이라 하는데, 딱 사천삼백 만일까요? 몇 십 몇 명이 다 나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천 만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대략적으로 사천 만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면 사천삼백 만 몇 십 몇 명, 이렇게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시기로 죽인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말함

지금 이 강도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애굽에 팔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내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니었다면 흉년에 다 죽었을 것인데, 그를 통해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이와 같은 일이 계속 됩니다. 시기해서 죽이려고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빌라도에게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셔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셨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바로 이것을 유대 역사를 들어 암시적으로 강도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시기해서 죽인 예수님을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 또한 애굽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세상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잡아 죽이려고 그를 팔아먹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고 또한 애굽도 건져내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아무리 죽이려 하고 시기해서 팔아 먹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대로 하나님의 세우신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스데반이 지금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16-17절에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라고 했습니다.

3. 모세를 들어 증거함

본문 18-22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 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인물이 일어나 우리 조상을 궤계로 괴롭게 하고 또 어린아이들을 나일 강에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 때, 그 때 모세가 태어나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부친에게서 석달을 돌봄 받았습니다.

나일 강에 놓은 모세를 건지시고 기르신 하나님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서 길렀는데, 더 이상 숨길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까? 아이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발각이 되면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도 죽고 부모도 죽고 모두 죽는 것입니다. 더 숨길 수 없으니 결국 왕의 명령대로 나일 강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갈대상자를 만들어 그 안팎에 역청을 칠하고 나일 강에 놓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세를 내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스라엘과 애굽이 모세를 내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공주를 보내어 모세를 건져내셨습니다. 공주가 목욕하러 나왔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갈대상자를 열어본 것입니다. 상자 안에 아주 보기 좋은 아이가 있었고 이에 공주는 모세를 자기 아들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 나라 공주의 아들로 삼으셨습
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 신분으로 애굽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웠습니다.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에서 모든 학술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아주 능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3-25절에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져내려고 하셨지만 그 형제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저희 역사를 통하여 스데반이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싸움을 말리던 모세가 사람을 죽인 것이 드러나 도망함

본문 26절에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 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모세가 나가보니 이스라엘 백성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둘 다 이스라엘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화목케 하려고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라고 했는데, 가만 보니 어제 싸우던 사람이 또 싸우는 것입니다. 즉, 어제 애굽 사람하고 싸우던 이가 오늘 또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고 했습니다. 그 동무를 해하던 사람이 어제 모세가 애굽 사람 죽인 것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또 이스라엘 백성끼리 싸움이 붙은 상황에서 모세가 화목하라고 하니, 그가 모세를 밀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제의 일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어제 자기가 크게 압제를 당하고 애굽사람한테 죽을 뻔했는데, 그때 모세가 와서 애굽 사람을 쳐 죽여 자기를 살려놓았으니 얼마나 감사해야 합니까? 그 모세가 왔을 때 그저 벌벌 떨면서 그 앞에서 아무 소리 못해야 원칙인데, 오늘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밀뜨리면서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를 죽이려하느냐”하고 사람들 많은 데에서 어제의 일을 폭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났습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세가 애굽 사람 죽인 것이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나그네로 산 모세

본문 29절에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 말 때문에 도망쳤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였으니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잡으려고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어디로 도망했습니까? 미디안 산골,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미디안은 광야이고 산골입니다. 사람도 거의 없으며, 양이나 치는 그런 광야와 산골로 도망한 것입니다. 거기서 모세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미디안 나그네 생활을 40년간 했습니다. 아들 둘을 낳으면서 40년간 미디안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 전에 모세는 애굽에서 40세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에 가서 40년간 양을 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후를 준비했습니다. 광야 40년의 기간은 모세에게 신학교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 2년간 갇혀 있었습니다. 애굽의 감옥은 2년간 요셉의 수양처였습니다. 거기서 요셉이 수양을 받아 2년 동안 기도 많이 하고 연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학술 배운 것이 40년, 미디안 신학교 생활이 40년입니다. 학술만 배워서는 안 되고 미디안 신학이 또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40년간 했습니다. 우리도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만 미디안 신학이 또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생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생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든 신을 벗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을 벗으라고 했는데, 그 내용이 본문 33절에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신 벗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 임재(臨在)하신 하나님

본문 30-32절에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산골, 광야생활 사십 년이 차니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가시나무가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그 영광이 이렇게 가시나무에도 충만하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타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가시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에 나무가 타지 않으니 모세가 기이히 여겨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가시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울까? 또 불이 붙었는데 왜 타지 않을까?’, 모세가 가시나무로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갔을 때에 주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무서워서 감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네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하나님

본문 33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했습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옛날에는 신을 벗어야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신을 벗으라는 것은 ‘자기’를 벗으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것, 그런 ‘자기’라는 것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왜 죽였습니까? 자기가 하려고, 자기가 이스라엘을 건져내려고 하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네자신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이용당해야 하지, ‘네가 하려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네가 하려고 하다가는 사람을 죽이고 또 너도 죽게 된다. 그러니 네가 하겠다는 것을 다 벗어버리고 네 자신을 벗어 버려야 한다. 너는 무(無)요 공(空)이 되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만 이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네 자신을 다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죄는 무엇이든지 간에 다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 벗어 버리는 그것만 하지 말고 네 자신 자체를 벗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하나님께 이용당하고 피동 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순종하는그런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신을 벗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위치는 거룩한 위치임

또 ‘너 섰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네 위치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모세의 위치는 거룩한 위치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일을 맡기실 자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 섰는 네 위치가 거룩한 위치인 줄 알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위치는 거룩한 위치입니다. 모세의 위치를 거룩한 위치라고 하심과 같이, 성도의 위치도 거룩합니다. 교역자의 위치도 거룩한 위치입니다.

자기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본문 34절에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괴로움 받는 것을 보시고,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려 내려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하시려고 손을 내밀어 일을 착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배척한 모세를 들어 속량(贖良)하신 하나님

본문 35절에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밀치며 배척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배척한 모세를 들어 그들을 건져 내시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모세를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배척했는데, 그것이 본문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모세를 배척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배척 받은 그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속량하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버린 예수님을 들어 구주로 세우신 하나님

여기에 담긴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들어 구주로 삼으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셉도 형제들이 애굽으로 팔아먹었고, 못 쓰겠다고 내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요셉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먹은 것처럼 이와 같이 너희도 예수님을 팔아먹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내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내어버림받은 그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오늘날도 너희가 버린 예수님을 구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도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하면서 내어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내어버린 그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즉, 스데반은 너희가 버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낸다는 사실을 지금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것, 너희가 예수님을 내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너희의 구주로 세웠다는 것,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버린 모세,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37-38절에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8:15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나온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리스도가 너희 형제 중에서 나올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예언한 자가 모세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 말을 들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예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