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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4일 월요일

마태복음 8:19-27 머리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라가자 이병규목사성경간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머리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라가자
마태복음 8:19-27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1. 머리 둘 곳이 없으신 예수님을 알고 따라가라

본문 19-20절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 어디를 가시든지 나는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따라가면 잘 될 줄 알고 따라간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 따라가면 여러 면에서 잘 될 줄로, 세상에서 잘 될 줄로, 또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행복을 누릴 줄 알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지 십자가 지지 않고 따라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것, 머리 삼고 있던 것, 다 포기하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은, 쉬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개 베고 쉬는 것처럼 쉬는 것, 휴식, 안식, 평안을 누리는 것, 이것이 머리 둘 곳인데 ‘나는 세상에 그런 것이 없다. 너도 나를 따라 오려면 세상의 평안과 세상의 안식과 세상의 행복과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고 따라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머리 두실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머리 두실 곳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두실 곳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머리를 두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고, 언제나 편히 쉬고, 거기서 행복을 누리고, 거기서 모든 충만, 만족과 충만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뜻은, 하나님께 머리를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머리 둘 곳이 없다’ 하는 말의 요지는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아야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간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편히 쉬고,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기쁘고 즐거움을 누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삼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머리 둘 곳을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아야 됨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머리를 세상에 둔다면, 하나님께 둘 머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 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머리를 두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고, 편히 쉬고, 행복을 누리고, 만족하고, 충만하고,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머리 둘 곳을 삼고 따라가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안에 머리 둘 곳을 삼지도 않고, 세상에도 머리 둘 곳을 삼지 않고, 둘 다 없으면 그것은 불쌍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안식을 누리시는 주님이신데, 편히 언제나 쉬시는 예수님이신데,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항상 마음이 즐겁고, 항상 마음이 안식을 누리고, 항상 쉼을 얻고, 언제나 은혜가운데 강건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2. 예수님을 중단 없이 따라가라 

본문 21-22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 중 또 다른 하나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하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9:59-62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부친을 장사하고
와서 예수님을 좇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보고 “죽은 자들로 저희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또 다른 사람이 나왔는데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친 장사를 하고 좇겠다는 것은, 부친이 세상 떠난 것이 아닌데, 앞으로 부친을 모시고 있다가 세상 떠난 다음에 와서 예수님을 좇겠다는 것입니다. 부친이 안 믿는다면, 그 부친의 영혼이 죽은 것인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끼리 장사하게 두어두란 말씀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인데, 안 믿는 사람은 다 영혼이 죽은 자니까 죽은 사람끼리 장사하게 두어두고, 너는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는 살았으니까 산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산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가정을 작별하고 나서 좇겠습니다”하니까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족에게 작별하는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따르는 것을 ‘중지’하고 가족과 작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따르는 것이 생명인데, 생명 길을 중지하고 가족과 작별하겠다는 것은, 가족을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것이고, 부친을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다 앞세우는 것은 전부다 우상입니다. 부친이든 가족이든 돈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첫째이지 가족이 첫째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효도해야 되고, 예수님 따라갈 때 효도할 수 없으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족 작별하는 것도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가족을 위하는 것이고, 예수 따라가면서 가족을 위할 수 없으면 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 보다도, 부친보다도, 가족보다도, 예수님을 첫째로 하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됩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삼고 예수님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고 따라가야 됩니다. 그리고 산 자는 산 자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악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족을 돌보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첫째로 하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가면서 가족을 돌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을 중지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상이 되고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첫째로 하고 따라가면서 예수님께 몸과 마음 다 바쳐놓고 주를 위해 따라가면서, 다른 것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머리 둘 곳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따라가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는 우리가 다 되어야 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걱정이다, 무엇이 안 된다, 무엇이 속상하다, 무엇 때문에 신경 쓰인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평안하고, 항상 안식을 누리고, 항상 쉬고, 언제나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근심 걱정이 다 뚝뚝 떨어져나갑니다.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데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 예수님을 머리 둘 곳으로 삼고 따라가라

본문 23-27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 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참 가는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하시고 편안히 주무셨다고 했습니다(막 4:38). 그런데 노도광풍이 일어나가지고 물결이 굉장히 높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배가 지금 당장에 전복되어가지고 바다에 다 빠질 것 같았습니다. 높이 올라가니까 배가 뒤집어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우면“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랬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랬습니다. 다 죽게 됐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손짓 하시며 설명) <<바다에 나갔다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배가 이렇게 바다로 가다가 물결이 일어나서 이렇게 됐다가 또 이렇게 됐다가 이렇게, 이렇게 되었는데, 여기에 사람이 있으면 물결이 와서 이것이 올라갈 때에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물결이 올라가면 배가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사람 타가지고 사람하나 있었다라고 하면 물결이 이렇게 될 때 이리로 불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 죽게 되었습니다. 또 물결이 배에 다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 뒤에서 평안히 고물(배의 뒤)을 베개하고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와서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하며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상당히 무서워한 것 같습니다. 정신 다 없어져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잠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잠을 주무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평안히 잠을 주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노도광풍이 일어나고 배가 아무리 당장에 전복될 것 같고 했지만,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시는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잠을 주무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았으면 하나님께 다 맡긴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 주실 줄 믿고 주무셨습니다. 범사에 믿으며, 범사에 바라며, 범사에 견디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바다를 내신 것도 하나님께서 내셨고, 바람을 내신 것도 하나님께서 내셨는데, 그저 막 내신 것이 아니라 한계를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뚜껑을 덮어 놓으셨고, 아무리 물이 철렁거려도 뚜껑을 덮어놓으셔서 그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자나 짐승들이 무섭게 돌아가지만 코를 다 꿰고 목을 다 매가지고 잡고 계십니다. 무서운 사냥개가 있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사냥개의 끈을 잡고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사람을 죽이려는 무서운 황소라도 아버지가 황소고삐를 잡고 계십니다. 코를 꿰어놓고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뚜껑을 다 덮어놓고 있으십니다. 아무리 솥에 물이 끓고 있어도 뚜껑을 덮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시되 한계를 달아 놓으셨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바닷물은 모래의 한계를 넘어오지 못합니다. 여러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소의 고삐를 누가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고삐를 쥐고 계십니다. 아무리 바람 불어도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면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이 있는데, 바람 아무리 불어도 고삐로 목 매가지고 사자나 무슨 황소나 다 아버지께서 잡고 계시고, 아무리 바다 물결이 높이 올라가도 한계 안에 있습니다. 한계 여기까지 밖에 못 옵니다. 여기 안에서만 찰랑 거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정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한계를 다 정해 놓으시고, 또 목을 매서 고삐는 아버지가 쥐고 계시고, 그러니까 겁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아버지께서 지켜주시고, 하나님으로 생명을 삼고 하나님으로 안식을 삼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을 계속 누리고 있으시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셨습니다. 무엇하러 보내셨냐 하면 구속사역을 이루시려고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분이 아버지이시고 목적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려고 보내셨는데 죽을 수 있습니까? 구속사역 이루기 전까지 죽을 수 있습니까?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 안 죽으십니다.
요한복음 8:20에,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고 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잡으려고 하지만 잡는 사람이 없습니다. 못 잡았습니다. 왜 못 잡았습니까?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못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사에 때를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 안 죽습니다. 바다에 안 빠집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안 빠집니다. 안 죽습니다. 구속사역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어야만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셔서 구속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때가 안 되었는데 바다 물이 아무리 흉흉하다 할지라도, 때가 안 되었는데, 왜 죽겠냐는 말씀입니다. 죽을 염려가 절대 없습니다. 죽을 염려는 절대 없고 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장해 놓으셨습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을 보증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고삐는 누가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결의 꼭지, 바람의 꼭지, 한계의 뚜껑을 다 덮어 놓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더 못 올라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바람아 불어라. 물결아 쳐라. 그래도 내 아버지께서 너의 목을 매서 네 고삐를 다 붙잡고 있다. 염려 할 것 없다. 그리고 구속을 위해서 보내셨으니까 구속을 이루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안 데려가실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확신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바람 불어도 문제없습니다. 바람이 조금 부나, 많이 부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편안히 고물을 베개하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잠이 더 잘 왔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 잠재울 때 그네 같은 것에 흔들흔들해두면 더 잘 자지 않습니까? 가만히 바닥에 눕혀 놓는 것보다, 아이들 왔다 갔다 할 때 더 잘 자는 것처럼, 예수님께
서 파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까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러니까, 바람이 더 시원시원한 것이 더 잘 주무시지 않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심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나아와 깨우며 말하기를 “주여 구원하소서. 죽겠나이다” 그랬습니다.
마가복음 4:38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지금 ‘아고고, 아고고’ 하면서 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고고, 아고고’ 했을 것 같습니까? 배가 올라갔다 이리로 치면 일단 ‘아고고’ 하면서 붙잡고 매달리고 일어설 적에 ‘아고고’ 하면서 이쪽으로 왔다 갔다 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한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한 것을 보면 그 말에 짜증이 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왜 안 돌아봐 줍니까?” 하는 제자들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왜 그랬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4:40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것이 여기서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이 언제나 믿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다음에도 귀신 하나 못 쫓아내가지고, 예수님께 “패역 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믿음이 없고 패역 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아야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다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인데, 왜 이렇게 믿음이 없습니까? 몇 년 동안이나 같이 계시면서 가르치셨는데, 몇 년 동안 있으면서 같이 가르치시고 또 하나님을 다 보여주시고, 예수님께서 신앙의 모든 모본을 다 보여주시고, 어떻게 믿는 것인지 다 보여주셨는데 제자들이 믿음이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 책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 책망 안 받을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시고 살지 않으셨습니까? 이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으로 좀 머리 둘 곳을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세상은 머리 둘 곳을 삼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는 그 믿음, 그 믿음이 너희에게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너희가 편히 쉬지도 못하고 이렇게 난리가 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왜 너희에겐 이렇게 없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 머리 들 곳을 삼았다고 할 것 같으면 너희가 이렇게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서워하지 않았어야 하겠는데 무서워하는 것을 보니까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제대로 삼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머리를 제대로 두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
다. 언제나 만족과 충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하고 시기하고 원망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너희가 이런 상태에 있겠느냐?’라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또 무슨 믿음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바다 물결도 또 바람도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 또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인명재천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손에 다 있는 것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바람 부는 것도 누구 손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고, 물결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 주권, 운전해 나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세계를 운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생명, 자기생명이 우상이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생명인데, 예수님의 피에 우리는 팔리어, 우리의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 것입니다. 나는 죄로 인해서 죽은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인해서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제 산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불러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속사역을 하시려고 불러주셨습니다. 구속사역을 하려고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는데, 구속을 이루기 전에 왜 죽겠냐는 말입니다. 왜 데려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목적은 구속사역을 위해서인데, 한 몫 쓰시려고 불러 주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주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이 죽을 수 있습니까? 죽이시려고 부르셨습니까? 쓰려고 부르셨는데, 구속사역에 사용하시려고 부르셨는데 때가 되기 전에 왜 데려가시겠냐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 안 죽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데려 가십니다. 예수님도 때가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되시고, 제자들도 때가 되면 데려가신다는 말입니다. 때가 되기 전엔 안 죽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죽으려고 목 내놓고 다녀도 안 죽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또 자기네들을 불러 주신 목적이 구속사역을 위해서 불러주신 줄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명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 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자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으라고 했는데, 우리는 예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아야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되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인 줄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줄을 믿고 나가야 되고, 예수님이 영생이신 줄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생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벌써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육신이 살았어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을 가지고 살고, 육신이 세상을 떠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나 저 세상에서 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쓰고 살던 장막 집만 벗어놓고 저기 가서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서 살던 사람이 서울 와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시골에서 농사하는 더러워진 옷 끼고 살다가 벗어놓고, 도시에 와서 또 이젠 다른 것 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난 부산에서 왔습니다.”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정읍에서 왔습니다.” 또 “홍성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왔습니까?” “농사 해먹다 왔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을 때보다 여기에 와 있으면 달라져서 있습니다. 의복은 다 다른 것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의복은 다른 것을 입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거기서 살던 사람이 여기서도 같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고 영생인 것, 이것을 아직도 믿지 못 했습니다. 죽긴 왜 죽습니까? 죽을까봐 겁이 난 것인데 죽긴 왜 죽습니까? 영생을 받았는데 죽긴 왜 죽습니까? 그것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쌀이 없다, 반찬이 없다, 간장이 없다, 아파트가 없다, 자동차가 없다, 무엇이 없다, 무엇이 없다 해도 돈 하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없다, 없다 해도 돈 있으면 다 살 거니까 돈 하나 없다고 하면 다 같은 말인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 때문에 겁나고 저것 때문에도 겁나고, 또 무엇 때문에 겁나고, 다 겁나고 무서워하는 것만 모아 놓으면 겁나는 원인이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왜 다 겁난다고 합니까? 원인이 하나인데,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죽을까봐 입니다. 죽을까봐 겁난다는 것입니다. 테러가 났다, 뭐가 생겼다, 전쟁이 났다 하는데 왜 겁이 납니까? 죽을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쌀값 올라간다, 기름 값이 올라간다 하는 것도 죽을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이 죽는 문제 하나 해결해 놓으면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생명을 허락받아 놓았으면 겁날 것이 무엇입니까? 화재 나고 불 가운데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아무데나 가도 괜찮습니다. 로봇은 안 타지니까 불 가운데도 막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는 소방서에서 로봇을 만들어서 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많은데, 로봇이 들어가면 찢어져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찢어졌다가도 또 건져내서 로봇을 틀어놓으면 또 돌아갈 것이니까 로봇은 죽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때가 이르기 전에는 육신의 생명도 안 죽습니다. 또 육신의 생명이 죽어도 안죽습니다. 영원히 안 죽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 생명 가지고 살았다고 하면 왜 무서워하겠습니까?
무서워하는 것은 아주 육신의 생명만 가지고 산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생명을 가지고 살지 아니하고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하고 꾸짖으셨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4:40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머리 둘 곳이 없으신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나가신 것, 모든 것을 다 승리하시고 나가시는 예수님의 신앙을 따라서 우리도 어떠한 경우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으로 머리 둘 곳을 삼고 기쁘고 즐
거움으로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언제나 안식을 누리면서 나가는 이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