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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일 금요일

마태복음 3:1-17 세례 요한의 전도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세례 요한의 전도
마태복음 3:1-17

1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3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 자기처리 (自己處理)

광야에서 전파

본문 1-2절에,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있었습니다(눅 1:80). 세례요한이 자기처리부터 먼저 했습니다. 자기처리가 중요합니다. 자기처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자기처리를 하였는가? 세례요한이 제사장의 아들로서 호사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빈들에 나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고 이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안일주의에 빠질 수 없어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을 좀더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서 예수님을 세상에 나타내려고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 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겠으므로 이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고 광야에 나가서 오랫동안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파하였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복음이 가까웠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천국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천국으로 다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들어오려면 죄를 회개하여야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천국을 가지고 오셨고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오셨고,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도 가지고 오셨습니다. 천국이 임했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쓸데없습니다. 회개하면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서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소리의 위치

본문 3절에,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는 소리라고 했습니다(요 1:23). 소리는 말씀을 나타내고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사랑한다”라고 하면 소리는 없어지고 그 “사랑한다”는 말만 남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요한이 소리라는 것은 말씀되시는 예수님만 나타내고 자기는 없어질 존재로 안 것입니다.“나는 말씀 하나 나타내놓고 없어질 존재다”로 세례요한이 자신을 바로 알았습니다.

의식주 초월

본문 4절에,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의복은 약대 털옷을 입었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집은 광야입니다. 약대 털옷이란 요새 낙타 외투와 같은 고급이 아니고 낙타 가죽을 벗겨서 가죽 그대로 입은 것입니다. 옛날 개가죽 저고리 입고 다닌 것과 같습니다. 개가죽 저고리는 비 오는 날은 개 비린내가 납니다. 약대도 가죽을 벗겨서 그대로 입은 것으로 개 가죽과 비슷할 것입니다. 비린내도 나고, 짐승냄새도 나지만 그 약대 털옷이 자기에게 적당한 옷입니다. 옷은 적당한 옷을 입는 것이 좋습니다. 이불, 옷을 싸가지고 다닐 수 없으므로 약대 털옷 하나 입어 놓으면 잘 때면 한 쪽은 요가 되고 한 쪽은 이불이 됩니다. 또 툭툭 털고 일어서면 옷이 됩니다. 꿇어앉아서 기도하다가 툭 털고 일어서면 펴지는 것입니다. 밤에 잘 때에 요나 이불이 필요 없고, 대중 앞에 설 때에 점잖은 옷이 되고, 기도하기에 장애가 없고 또 그다지 비싸지도 않습니다. 약대 털옷은 세례요한에게 가장 적당한 옷입니다. 의복은 너무 좋은 것 입어도 안 되고 너무 나쁜 것 입어도 안 됩니다. 의복에 대해서는 중쓸쓸하게(중간 정도로 쓸쓸하게, 수수하게), 다른 사람에게 신경이 안 쓰이도록 입는 것이 좋습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교역자가 의복을 너무 잘 입고 다녀도 안 되고 너무 겨자자(초라)하게 입고 다녀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겨자자하게 입고 다니면 “할머니 거지” 같다고 하고, 너무 쪽 빼입고 다니면 “기생오라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의복은 너무 겨자자하여도 안되고, 너무 고급으로 하여도 안 되고 중쓸쓸하게 하여야 하며, 헌 옷이라도 깨끗하게 빨아 입고 다녀야 합니다.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경남 김해에 있는 장영실 장로님이 신학을 했었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장영실 장로님에게 “머리를 왜 그렇게 하고 다니냐”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장로님이 털털해서 머리를 늘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이 강의시간에 “장영실 장로 머리 틀렸다”고 늘 말했습니다. 전도자는 좀 깨끗하게 하고 다녀야 하며 자기처리부터 바로 하여야 합니다.

또 세례요한이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석청은 벌들이 돌에 꿀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메뚜기 잡아먹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또 어떻게 석청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광야에 나가서 메뚜기 먹는 것도 고생이 많았을 것 같고, 석청 먹는 것도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을 때는 먹고, 못 찾을 때는 굶고 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의식주 초월입니다.
전도자는 거기서 나는 것을 먹고, 주는 것을 먹고, 또 없으면 못 먹을 것을 예산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 지방에 가면 음식이 좋지 않아도 그 지방에서 주는 것을 먹는 것이며, 거기서 나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싸가지고 다니면 덕이 안 되고 전도가 안 됩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고 먹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굶기시지 않습니다. 먹을 것 염려, 걱정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러 나갈 때는 먹을 것을 위해 염려나 걱정하지 말고 말씀만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아무 집이나 한 곳에 들어갔으면 대접을 잘 받으려고 좋은 데로 옮기지 말고 거기서 떠나도록 그 집에 있어야 합니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대접 잘하는 집만 다니다가 하나님께 비방이 돌아가면, 전도자의 자격이 안 됩니다. 아무데나 가서 있고, 주는 대로 아무것이나 먹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중대한 사명을 깨닫고 광야 생활하면서, 의식주를 초월하면서, 자기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의 위치에 있으면서, 사명을 다 하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가는 전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속화된 전도자가 아닙니다. 안일주의에 빠지고 자기 육체 중심, 물욕, 정욕에 빠진 전도자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대접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먹고 회개를 외치며 예수님만 소개하는 것으로 자기의 사명을 다하였
습니다. 소리는 없어질 때가 되면 없어지는 것과 같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을 예산을 하고, 세속화되지 아니하고, 깨어 있는 전도자, 사랑이 역사하는 전도자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합니다.

2. 언사합당 (言辭合當)

본문 5-9절에,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언사합당은 말씀을 합당하게 전했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를 전파하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려 나왔습니다. 회개를 하여야 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신앙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면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그것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방사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1:17에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돌 감람나무 되는 이방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0-11절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 증언하시기를,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고 하였고 또 “부드러운 옷을 입기 위해 정부에 아부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하였고, ‘의를 세워나가는 세례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의가 다 무너지는 시대인데 의에 대해서는 반석과 같이 강직하게, 또 생명보다도 의를 더 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만 전한 세례 요한입니다. 육신의 안일주의를 위해서 아부하고, 부드러운 옷을 입기 위해서 아부하는 세례요한이 아닙니다. 시대적인 조류, 시대적인 풍조, 시대적인 바람이 많이 돌아가지만 거기에 절대로 동요 되지 않고 의를 견고하게 세워나간 세례요한입니다.

미가서 6:9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에도 진리를 세워 나가고, 의가 다 무너진 시대에 의를 세워나가는 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일신의 평안과 자기 일신의 행복과 자기 일신의 안일주의를 위해서 어떤 세력에 아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는 자리에 언제나 서서 나갔습니다. 즉 예수님만 흥하고, 교회만 흥하고, 진리만 흥하고, 자기는 쇠하는 자리에 내려가겠다는 신앙입니다. 이것
은 진리를 세워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참 교회를 세워나가고, 참 이스라엘운동을 해 나가겠다는 세례요한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3. 구주 증거

본문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여 예수님을 경외, 공경하며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 주는 것이며 회개케 하는 세례입니다. 이것은 외부적이고 의식적인 세례이며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도리를 성취하시는 일은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셔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우리의 영을 살려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3-17절에,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내가 어떻게 예수님께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젠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의 뜻은 ‘씻어서 정결케 한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의식이 아니고 정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에스겔에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케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제도가 요한의 때까지 내려와서 요한이 구약 때부터 내려오던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이 무슨 제도가 새로 생겼느냐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또 세례요한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례 받으러 나오므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세례는 구약 때부터 내려왔습니다.

구약의 성례는 유월절과 할례이며 신약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성찬은 유월절에 해당하고, 할례는 세례에 해당됩니다. 할례는 구약의 예식으로 할례의 뜻은 “하나님께 속한다, 정욕을 제거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의식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로서 또 하나님의 제도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는 의미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또 성도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으실 때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왔겠느냐? 물을 떠서 세례를 주었겠느냐?하는 세례 방식이 문제입니다.

본문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속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물에서 올라 오실새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물속”에 들어 갔다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물속”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세례요한도 세례를 주고 물속에서 올라왔다고 하면, 세례요한도 물속에 들어 갔다가 나왔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8:38-39에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줄때 물에 내려가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왔다고 했지, 빌립이 물속에 내려가 물속에서 올라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에서 떠서 세례를 주고 육지로 올라 온 것입니다. 물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도 물속에서 나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에 내려가서 물을 떠서 세례를 주고 물에서 육지로 올라온 것이라고 하여야 옳습니다. 침례교에서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뜻이 우리와 다릅니다. 침례교 세례의 뜻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옛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것이고, 물속에서 건져서 축복해 주는 것은 새 사람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상징하는 예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뿌려서 정결케 하는 예식에 의해서 씻어 정결케 하는 예식이며, 물로 뿌려서 정결케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담갔다가 물속에서 꺼냈다면 베드로가 어떻게 하루에 삼천 명을 세례를 주었겠습니까? 철야하면서 세례를 주었다고 해도 삼천 명 세례를 못 줍니다. 사도행전 16:33에도 옥사장이 세례를 받을 때 물가에 내려가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물을 떠서 세례를 주는 적수세례가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육지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저희에게 임하심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비둘기가 성령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우주에 충만하며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비둘기가 되어 오셨겠습니까? 예수님께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하신 것은 비둘기는 구약시대에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예수님이 앞으로 속죄 제물이 될 것을 알게 해 주려고 제물 되시는 예수님께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면서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지금 누구의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발에 걸려서 못 들어가는데 회개하라고 하였답니다. 비둘기가 발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지금 네 속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발에 걸려서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임한 것은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 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비둘기가 온유하듯이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여 하나님께 바쳐지는 생활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 2:1-4에, 성령이 바람, 불, 혀로 보인 것도 성령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표징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성령이 바람 같다는 것은 바람이 임으로 부는 것 같이 성령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일하시 는 것을 나타내며, 성령이 불같다는 것은 성령께서는 불 같이 마음을
뜨겁게 하고, 강하게 역사하고, 성령이 혀와 같은 것은 말씀을 분별하게 하고 말씀을 증거 하게 해 주고, 성령이 혀 같이 갈라졌다는 것은 의와 진리와 불의와 의를 갈라놓고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뜻을 갈라 놓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그런 표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은 우주에 충만하신 성령이시고, 안 계신 곳이 없으시는 성령 이시고,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떠났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떠난 것이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왔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늘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에게 감동이 임할 때가 있고 감동이 떠날 때가 있습니다. 죄가 있고 불순종 하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