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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욥기 31:13-40 욥이 자신의 결백에 대해 말함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욥이 자신의 결백에 대해 말함
욥기 31:13-40

13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14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16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17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19내가 언제 사람의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20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21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22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23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24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25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26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27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28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29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30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31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32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33-34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35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찌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36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37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하였으리라 38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39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40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1. 종들을 멸시하지 않았음

본문 13-14절에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종들의 사정을 다 알아주고 들어줬다는 것입니다. 종들을 멸시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종들을 멸시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멸시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종이나 자기나 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는데, 그 종을 멸시한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종을 멸시한 적이 없으며, 그 사정을 잘 알아주었다는 것입니다.

2. 가난한 자와 고아를 돌보았음

본문 16-18절에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가난한 사람과 과부, 고아를 잘 돌보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28절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으며 게으른 사람은 도와줘선 안 됩니다. 일을 하려고 해도
일할 수 없게 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도와줘야겠습니다. 과부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해서 먹고 살도록 해야 합니다. 과부도 일할 수 없는 과부를 도와줘야 합니다. 과거에 몇 세부터 과부로 등록하고 그에따라 도와주라고 했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을 보면 60세부터 과부로 등록하고 그 여자를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없고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없는 사람 중에서 신앙, 믿음 잘 지킨 과부를 60세부터 등록하게 하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라고 하였습니다. 고아를 돌보는 것은 사회적 책임입니다. 고아는 나와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없기 때문에 부모 역할을 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고아를 특별히 도와주는 일을 욥이 많이 했습니다. 

본문 18-20절에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의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버지처럼 하였고,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과 궁핍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욥이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자기의 양털로 그 몸을 덥게 입혀서, 그 사람으로 욥을 축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덮을 것이 없을 때에 양털을 가져다 덮어주면, 그 사람이 감사하여 욥을 위하여 얼마나 복을 빌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욥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문은 권세의 자리입니다. 권세 잡은 사람이 자기를 도와준다고 해서, 그 권세를 힘입어 손을 들어 고아를 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들어서, 다른 사람의 권세를 의지하여 또 다른 사람을 압박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의지해서 다른 사람을 압박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본문 22-23절에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정치적인 힘을 의지하여 고아를 쳤다고 하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는
것이 마땅하고 내 팔뼈가 부러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재앙과 위엄을 두려워하여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3. 금을 기뻐하거나 의뢰하지 않았음

본문 24-25절에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기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산 적이 없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욥기 22장 24-25절에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금이나 은 등의 재물을 기뻐하거나 의지하며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다 버린 것입니다. 보배를 진토에 버리며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린 다음에, 전능하신 하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배가 되시고 귀한 은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 등의 재물을 의지하고 살며, 그것들을 가지고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보배가 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은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금이나 은 등의 재물은 다 뒤에다 돌려 세워놓고 진토와 같이 버리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야 합니다. 강가의 돌과 같이 다 버리고 포기하며, 없는 것인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따라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재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의지하며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을 기뻐하며 살아도 안 됩니다.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으로만 살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용하도록 힘을 써야겠습니다. 그것을 의지하고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어놓으라고 하시면 내어놓을 각오를 하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자기의 생명으로 삼고, 하나님만 자기의 의지로 삼고 나가야 합니다. 

4. 해와 달에게 미혹되지 않았음

본문 26-27절에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라고 하였습니다. 태양이 빛나는 것, 달이 명랑한 것을 보고 마음을 다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8장 16절에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 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새롭게 나오는 세력들에 대하여
경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태양의 빛남과 달이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거기에 마음이 유혹되어 마음을 다 빼앗기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것만 좋아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해와 달뿐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새로 나오는 세력, 그 모든 것들에게 유혹이 돼서 마음을 빼앗기고 도취가 되면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세상의 것이 번쩍번쩍하며, 빛나고 좋은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만 살려고 하고, 세상의 그러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에 미혹을 받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무엇이 좋다. 아름답다. 빛이 난다’라고 해도 그러한 것들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유혹시킬만한 세력이 많아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바치고 하나님과만 교통하는 참된 믿음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만 즐거워하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신명기 4장 19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일월성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에 미혹이 되어서 그것을 섬기면,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을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까? 달 섬기는 사람도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북두칠성을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북두칠성에게 기도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칠성이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여간 해와 달을 신격화하고,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죄가 있었는데, 거기에 욥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보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칠천 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알은 태양신인데, 그 태양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에 미혹이 되어서 마음이 끌려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5.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음

본문 29-30절에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미워하는 자가 망할 때 기뻐한 적이 없고, 미워하는 사람이 재앙을 만날 때 기운을 뽐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이 망할 때 기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이 망할 때, 아무리 악한 자가 망해도 ‘나도 그런 자가 아닌가?’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죄 짓다가 망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도 어떠한 죄가 없는가?’하고 살펴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바로 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망할 때 ‘잘 망했구나. 망할 줄 알았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병이 났을 때 ‘그렇게 되도 싸다. 못되게 살더니 병이 나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가면, 자기도 얼마 안 가서 보응 받을 날이 옵니다. 벌써 믿음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벌 받는 것을 마땅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까? 자기도 벌 받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긍휼 없이 다른 사람이 망할 때에 ‘그래도 싸다’라고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을 자기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하나님께는 다 죄인인 것입니다. 설령 자기는 망한 사람과 같은 죄를 안 지었을지 몰
라도, 다른 죄 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망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징계를 받을 때, 자기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 역시 그런 자가 아닌가?’하고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회개하고 근신하며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징계를 받을 때 기뻐하는 자는 긍휼이 없는 자인데, 그런 사람은 자기도 얼마 안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6. 나그네와 행인을 대접하였음

본문 31절에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장막 사람들의 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주인이 고기를 많이 줘서, 배부른 때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욥이 자기 장막에 있는 사람들에게 짐승을 잡아서, 그 고기를 때때로 나누어준 모양입니다. 주인의 고기에 다 배가 불렀다는 것입니다. 장막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에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나그네와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고 장로님이라는 분이 평양입석교회에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오는 손님은 그 장로님이 다 맡아서 늘 대접을 했습니다. 누가 찾아오든지, 그 장로님의 집으로 다 데려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면 거기서 숙식을 다하고, 잘 대접하여 보냈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나그네 대접 하는 일이 참 좋은 것입니다. 교회 장로나 집사들은 나그네 대접할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방 하나를 준비해놓고, 나그네가 오면 자기 집으로 데려 가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오면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 받을 일이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식사도 잘 대접하고, 밤에 잘 자도록 하여보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그네는 특별히 교회 나그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때는 교회 나그네가 많았습니다. 또 예수 믿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고 쫓겨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나그네들을 잘 영접하여 대접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일 때문에 다니는 나그네들, 특별히 교회를 찾아온 나그네들을 잘 대접하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전도 부인과 집사가 와서 점심을 대접해야겠는데, 입장이 참 곤란했습니다. ‘누구 집에 데리고 가서 점심을 대접해야겠는가?’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갑자기 왔기 때문에 곤란했습니다. 미리 올 줄 알았으면 교회에서 준비라도 했을 텐데, 갑자기 예배 시간에 온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오후 예배까지 보고 가려고 하는데,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주위에 물어 보며 잘 대접하라고 했는데, 대접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에는 장로님 집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갑자기 보내도 고 장로님처럼 대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아야겠습니다. 또 어느 집사님들 집에도 갑자기 보내면 반갑다고, 우리 집에 보내달라고 하며 맞이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서로 자기네가 모시고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 모시고 가면 큰 복을 받는 줄 알고, 그렇게 대접하는 것을 우리가 좀 배워야겠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그네를 대접해야 얼마나 하겠습니까? 나그네가 먹어야 얼마나 먹겠습니까? 하루 저녁 자고 가도, 얼마 먹지 않습니다. 또 방 하나 내어줘도 되는 것입니다. 자기네 식구들은 한 방에 몰려서 자도 되는 것입니다. 한 방 내어줘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김 장로님 집에 가서 한 달이 넘게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내가 가니까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그 분이 장로가 아니었을 때입니다. 창광교회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때는 LA동부교회를 세우기 전입니다. 하여간 그 집 식구들이 상당히 기뻐했습니다. 또 그 집은 방이 두 개 밖에 없고, 아이들이 둘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 식구는 다 한 방에 모이고, 나한테 방 하나를 내어줬습니다. 침대도 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부부가 쓰는 것이고, 하나는 아이들이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쓰던 것을 나한테 주고, 자신들은 바닥에서 자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나한테 방 하나를 내어 주고 한 달간을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왔는데, 제가 그때의 기억을 늘 잊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만나면 참 감사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집에서 대접 받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네는 바닥에서 좀 자더라도, 얼마나 좋은 일을 한 것입니까? 하여간 우리가 나그네 대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온 교인이 다 배워야 합니다. 장로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도 하고, 교인들도 해야 합니다. 교회 나그네를 따스하게 대접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욥은 나그네를 잘 대접했습니다. 이것을 잘해야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서도 가책이 없고,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또 그러한 일은 상급 받을 일입니다. 주를 위해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 소자(小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그 상을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나그네 대접하는 일이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배워서 그 일을 잘해야겠습니다.

7. 큰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음

본문 33-34절에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서워하여 할 일을 안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수 없다고 하며 담대히 나가서 전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은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품에 품고 허물을 가린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28장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욥은 자기의 죄를 숨기지 아니하고, 솔직하게 다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8. 남의 소산을 빼앗은 일이 없음

본문 35-37절에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찌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하였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타인의 소유를 빼앗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소산을 빼앗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소송을 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산을 빼앗았으면, 다른 사람이 소송을 냈을 것 아닙니까? ‘내 대적이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대적이 소송을 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했다’라고 소송을 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억울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선을 베풀고, 다른 사람이 억울하지 않게 다 해주며, 남의 소산을 먹은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넉넉하게 주고, 속을 것은 알고도 속는 것입니다. 남에게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조그마한 것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같이 사는 집에서 전기 요금을 서로 조금 내겠다고 싸웁니다. 그리고 쓰레기 값을 조금 내겠다고, 수도 요금을 조금 내겠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같이 사는 집에서 함께 전기 요금을 모아서 낼 때에, 공평하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보고 조금 더 내라고 하면, 조금 더 내더라도 인색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쓰레기통을 같이 쓰다가 쓰레기를 치울 때에도 상대방이 “너희 집은 쓰레기가 많이 나오니까 절반보다 돈을 더 내라”고 말하면 조금 더 내면 되는 것입니다. 전부 만 원이 나와서 두 집에서 오천 원씩 내면 되지만, 혹시 상대방이 “너희 집에서 육천 원을 내라”고 해도 천 원 더 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 원 안 내겠다고 다투면서 ‘한 번 쓰레기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보자. 앞으로는 쓰레기 나올 때마다 적어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천 원 때문에 잘 사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것 때문에 인심만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저렇게 한다고 욕만 먹는 것입니다. 

하여간 조금 속아도 남에게 섭섭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송 내는 일까지 가도록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한참 싸우다가 상대방이 “내가 목사한테 한 번 가봐야 되겠다. 목사가 어떻게 가르쳤느냐?”라고 말하게 되면, 목사를 건드리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까지 건드리게 되면, 천 원 때문에 말이 아닌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가 와서 무작정 돈을 내라고 할 때에는 안 줄 경우이므로 안 줘야 합니다. 불의한 마음을 가지고 빼앗아가려는 것이니까,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웬만한 것은 양보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조금 손해를 봐도, 모든 면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 38절에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라고 하였습니다. 토지가 억울하면 이랑이 일시에 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토지의 소산을 농사한 사람이 먹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다 빼앗아가는 것은 토지가 우는 것과 같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수고를 했습니까? 토지를 위해서 비료를 주고 길을 내주며, 일 년 내내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다 빼앗아 가면 토지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토지가 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닭치는 사람들도 일 년 동안 닭을 치느라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합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닭도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도둑놈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자기를 길러준 사람에게 희생 당하지 못하고 도둑에게 희생을 당하니까,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라고 한 것입니다. 욥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빼앗아 먹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39절에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남의 물건을 빼앗아 먹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값을 내지 않고 남의 소산을 먹음으로, 그 사람이 먹을 것이 없도록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40절에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욥의 말의 끝입니다. 이렇게 남의 물건에 값을 내지 않고 빼앗아 먹었다고 하면, 자기 밭에는 찔레가 나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이 말의 끝을 맺었습니다.

9. 욥의 결백

욥의 결백의 대한 것이 전부 12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음심을 품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욥 31:1-4).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거짓되게 행치 않았다는 것입니다(욥 31:5-6). 세 번째는 탐심을 행치 않았다는 것입니다(욥 31:7-8). 이것은 거짓되게 행하는 것과 다릅니다. 십계명 중 탐심에 대한 것은 10번째 계명이고, 거짓에 대한 것은 9번째 계명입니다. 네 번째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욥31:9-12). 첫 번째는 음란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는 10계명과 9계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4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4가지가 쉽지 않습니까? 첫 번째는 음심을 품지 않음, 두 번째는 9계명, 거짓되게 행치 않은 것, 세 번째는 10계명, 탐심으로 행치 않은 것, 네 번째는 간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음심을 품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와 네번째가 비슷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다섯 번째는 종들을 멸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종과 가난한 사람이 비슷합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도 비슷합니다. 종과 가난한 사람이 한 짝입니다. 종을 멸시하지 않고, 가난한 자와 고아를 돌봐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일곱 번째부터 열두 번째 까지만 하면 됩니다. 일곱 번째는 금이나 재물을 기뻐하거나 의뢰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돈이 첫 번째로 시작합니다. 여덟 번째는 해와 달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돈 다음에는 미혹하는 것이 나옵니다. 돈과 방탕에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은 세상 향락을 의미합니다. 이 둘도 비슷합니다. 돈이 많으면 방탕하다가 미혹됩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가 비슷합니다. 아홉 번째는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는 나그네와 행인을 잘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열한 번째는 큰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두 번째는 남의 소산을 빼앗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부터 열두 번째까지 해봐야겠습니다. 써놓은 것을 보지말고 해봐야겠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음심을 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운데 두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9, 10계명입니다. 거짓되게 행하지 않은 것과 탐심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음심과 네 번째 간음이 비슷합니다. 네 번째까지는 아주 쉬습니다. 다섯 번째는 종을 멸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돌봐주었다는 것입니다. 종과 가난한 사람은 비슷합니다. 종이 나오면 가난한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섯째까지는 쉬운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금이나 재물을 기뻐하거나 의지하며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 버리고 포기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여덟 번째는 해와 달에게 미혹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덟째까지는 되었습니다. 아홉 번째와 열 번째는 무엇입니까?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나그네와 행인을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는 쉬운 것입니다. 마지막 두 개는 무엇입니까? 많은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과 남의 소산을 빼앗지 않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