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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수요일

누가복음 5:1-11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누가복음 5:1-11

1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히라 하시니 11저희가 배둘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1. 예수님이 찾아 오심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으로 이것은 본문의 중심 교훈입니다.

본문 1-2절에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게네사렛 호숫가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키는데, 갈릴리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8:20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 옆에 계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와서 함께 계시지만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동행해 주셨지만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눅 24:1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고 그들이 엠마오에서 더 가시려고 하는 예수님을 간청해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 예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그 시간에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며 또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언제나 믿어야 됩니다. 그 예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자기 생각대로 나갔던 죄,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죄를 회개하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배를 타시고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 앉아서 언덕에 서 있는 많은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1절에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타시고 육지에서 조금 떠나서 배에 앉아서 언덕에 섰는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가르쳐 주신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또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됩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감사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주일마다 오전 10시나 10시 10분에 성경 공부를 했는데, 오늘 신구약성경을 다 마쳤습니다. 1966년도부터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하여 한 주일에 한 시간씩 약 22년 동안 성경공부를 매주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구약 성경을 다 마쳤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22년 동안 내내 공부한 사람들도 여기 있습니다. 주일날 한 시간 가지고 공부했는데 22년 동안의 세월이 신구약 성경 공부를 다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마태복음으로 다시 두 번째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일 오전 10시나 10시 10분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신구약 성경을 배우지 못합니다. 22년간 공부시간 내내 나온 사람은 신구약성경을 다 배웠습니다.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러므로 공부시간 1시간 늦어지는 것은 그만큼 손해입니다. 주일 공부시간 한 시간 안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10년이 가면 얼마나 많은 손해가 나겠습니까? 또 20년이 가도 신구약 성경을 다 못 배웁니다. 그러나 나온 사람은 다 배웁니다. 공부하는 것이 그만큼 큰 것입니다. 우리교회 온 사람한테 성경 어디서부터 배웠느냐고 물어보면 이사야부터 배웠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10년 혹은 9년 전에 오신 분입니다. 신약 어디에서부터 배웠다고 하는 사람은 한 10년 된 사람이고,
다른 곳으로 간 사람도 성경 어디 배우다 갔냐? 고 하면, 사도행전 배우다 갔다는 사람, 창세기 배우다 갔다는 사람 등이 있는데 그러면 몇 년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시켜 줄 때에 그 시간에 빠지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그 아주 큰 것입니다. 티끌 모아서 태산이라는 말과 같이 한 주간에 한 시간 공부하였는데, 1년이 가면 벌써 52시간, 10년이 가면 520시간, 20년이 가면 1000시간 넘지 않습니까? 그렇게 쌓아지면 성경을 많이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에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학교 4년 동안에 신구약 성경을 다 공부 못합니다. 신학교 4년 동안에 그저 성경공부 시작했다가 중간쯤에 끝나고, 또 다른 것 시작하다가 중간쯤에 끝나고 대개 그렇습니다. 우리 신학교 예를 들어 에스겔을 공부했다하면 서론하느라고 상당히 시간 많이 지나가고 본문은 5, 6장 배우다 끝납니다. 그러면 에스겔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도 서론 하느라고 여러 시간, 몇 주간 보내
고, 본문은 7, 8장하면 끝납니다. 그러면 한 학기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워주는 시간 몇 십 년을 내내 빠지지 않고 배우면 신학교 졸업한 사람보다 더 많이 배웁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시몬(베드로)의 배를 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많이 배웠습니다. 그것이 큰 은혜입니다.

2.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본문 4절에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에게는 개별적으로 예수님이 명령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그 다음에 개별적으로 시몬을 향해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그때 시몬이 본문 5절에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이 밤새도록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도 고기가 없었습니다. 또 밤새도록 깊은 곳에서도 잡아보았지만 고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지금까지 다 잡아 보았는데 고기가 없습니다, 그물을 던져야 쓸데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또 고기 잡는 법으로 볼 때 새벽에는 물고기가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먹이를 찾으러 얕은 데로 나오는 때입니다. 지금은 새벽으로 고기가 얕은데 나오는 때인데,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 것은 고기 잡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또 경험적으로 볼 때에 깊은 곳에서도 고기를 다 잡아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시몬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며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몬이 믿음이 있는 증거입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아보았지만 물고기가 없었기에 물고기가 없는 줄 알면서도 주님이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때 물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능력의 역사입니다. 새벽에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없는 줄 경험과 지식으로 알면서도“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립니다, 난 고기 있는 줄 알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의 말씀에 내리라고 했기 때문에 내립니다, 결과는 주님이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입니다. 그때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대성공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은 개별적인 하나님의 명령인데 베드로가 그것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지키므로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자기에게 명령하는 그 명령을 지킬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디모데후서 4:1-2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날을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항상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처럼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우리가 잘 지켰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면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잘못하고 방심 부주의하며 돌아가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전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즉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권면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물을 깊은 곳에 내리라고 할때 내리지 않으면 물고기도 못 잡고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입니다. 그물을 내리면 안 될 것 같아도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밤새도록 못 잡았는데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때 잡았습니다. 주의 말씀을 의지해서 할 때 성공했습니다. 

그러므로 힘쓰지 않으면 안 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별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개별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양심에 가책 받는 죄를 지었다면 그 죄를 회개하라고 주시는 말씀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하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일 때도 있습니다. 강포한 자에게는 강포하지 말고, 군인들은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고, 세리는 탈취하지 말라고,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개별적인 명령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것이 개별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책임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 책임을 다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디모데후서 4:1-2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가서 힘써서 이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인줄 알고, 이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대로 하도록 힘을 써야겠습니다. 

3.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힘

그물이 찢어지는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그물이 찢어져서 물고기가 나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해서 되어진 것은 실패할 것 같으나 실패가 안 되고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주십니다.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 실패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성공하게 해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혔기 때문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하였습니다. 서로 협력하는 협동정신이 중요합니다. 혼자 다 가지려하면 안됩니다. 혼자 다 가지려고 배에 실었다면 배가 침몰되었을 것입니다. 두 배에 실을 것을 한 배에다 실었다면 가라앉을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욕심 부리지 말고, 언제나 협력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남을 도와줄 때에는 도와 주어야 하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할 때에는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에게도 물고기를 필요한대로 많이 주었을 것입니다. 서로 협동하고, 남을 도와 줄 줄 알고, 또 남의 신세를 갚을 줄 아는, 그런 베드로와 요한의 관계입니다. 두 배에 가득히 실었지마는 그 배가 가라앉지 않고 무사히 나오게 되었습니다.

4. 베드로가 예수님을 발견함

본문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라고 하였습니다. 고기가 두 배에 가득히 들어찼다면 상당히 많은 돈의 가치입니다. 대목장을 지금 본 것입니다. 이번에 두 배에 가득히 잡은 것만 갖다 팔아도 오랫동안 고기를 못 잡은 것은 다 봉창한 것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두 배에 가득히 잡은 물고기를 팔면 값이 얼마입니까? 조기 한 마리가 3만원이라면 10마리면 30만원, 100마리면 300만원, 1000마리면 3000만원입니다. 한 1000마리 잡았을 것 같습니다. 두 배에 나누어 실었다고 하였으므로 한 500마리씩 안 잡았겠습니까? 그러면 한 3000만원 벌었습니다. 이것은 1년 생활비를 번 것입니다. 요한이 실어다 주었으므로 요한에게도 한 500만원 주었다면 2500만원이 남습니다. 그러면 1년 생활비를 한꺼번에 다 번 것으로 대 성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이젠 1년 생활비 다 벌었사옵나이다”라고 감사드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물고기 잡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물고기가 어디서 왔을까? 조금 전만 하여도 없던 것인데 물고기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또 몇 마리만 왔으면 저 혼자 배에 실어 갈 수 있겠지만 이렇게 두 배에 가득히 찰 만큼 많은 물고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몰려올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주장하는 예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도 주장하시는 예수님, 즉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대 주재 여호와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주장하시는 대 주재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비교해 보면 자기 자신이 감히 설 수가 없고, 자신은 죄가 많고, 더럽기가 한정이 없고, 너무 믿음이 없고, 너무 악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그 물고기를 팔아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물고기를 주장하시는 예수님, 동시에 모든 만민을 주장하시는 예수님, 천지와 우주와 그 모든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예수님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만물을 주장하시는 대 주재이신 줄로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했고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내가 모시기를 감당치 못할 자라는 뜻입니다. ‘육신에 속하고, 정욕에 속하고, 죄 가운데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것 만큼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것 만큼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위대하심을 발견하고, 자기를 발견한 것 만큼 자기는 점점 더러운 것을 발견하게 되므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에 도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무능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밤새도록 잡아보았지만 잡지 못하므로 인간의 무능을 깨닫게 됩니다. 제 능력을 다했지만, 제 기술을 다 썼지만 못 잡았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주장하시는 예수님의 주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잡아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쓰시려고 깊은데로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 한 것은 베드로 잡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고기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때에, 예수님의 목적에 들어맞은 것입니다. 이젠 베드로를 예수님이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잡히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점점 더 발견해야 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발견한 것만큼 거룩하시고, 높으시고, 위대하시고, 의로우시고, 참되십니다. 인간은 자기를 발견한
것만큼 죄인이고, 부패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인 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주일이 지나가고 또 그 다음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가고 또 그 다음 달이 지나가고 일년이 지나가고 또 다음해가 옵니다. 그러므로 세월만 보내지 말고, 자기를 좀 더 발견해야 하며, 예수님을 좀 더 발견하여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에 좀 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기를 발견하고, 또 한 달 동안에 좀 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기를 발견하고, 일년 동안에 좀 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기를 발견하여, 회개하고 바로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예수님을 좀 더 깊이 발견하지 못하면서, 자기를 좀 더 깊이 발견하지 못하면서 한 주, 한 달, 일년을 보낸다면 그것은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믿는 일 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믿는 일을 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면 낭패입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이라도 예수님을 좀 더 발견하고, 자기를 좀 더 발견하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은 것처럼 예수님에게 좀 더 잡혀야 됩니다. 자기가 잡힌 것만큼 다른 사람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잡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서워 말라고 하였는데 왜 무서워 말라고 하였는가? 베드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대했습니다. 이사야 66:2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것 만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벌벌 떠는 사람을 하나님이 권고하십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벌벌 떨면서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십니다. 무서워 말라 하는 말 가운데는, 지금 무서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베드로가 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 그 말씀을 두려워하고 벌벌 떨 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에게 잡히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벌벌 떨 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벌벌 떨면서 순종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그 사람은 디모데후서 4:1-2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말씀을 전파하라 하면 무조건 전파하는 것입니다. 또 때를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라 하면, 계속 나가서 힘써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5.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쫒음

본문 11절에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는 사람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첫째이므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갑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일이 안됩니다. 말씀 전파하는 것이 첫째가 아니기 때문에 안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첫째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만 따라가며 말씀을 전파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들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을 건져내는 역사를 하게 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이 깊은 진리를 우리가 깨달아서 내가 사람을 낚으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예수님에게 잡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발견해야 하고, 자기를 좀더 발견해야 사람을 낚을 수 있습니다. 가족을 건지려면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을 건지려고 해도 예수님을 좀 더 발견하고, 자기를 좀더 발견하고, 자기가 먼저 말씀을 순종을 하고, 전파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 좀더 잡히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가면서, 하나님 말씀을 벌벌 떨며 순종하면서 이 말씀을 전파하면 다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 다른 사람을 전도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물고기 잡는 것만 열심히 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는 예수님께 안 잡히우고, 물고기만 잡으려는 사람은 물고기도 못 잡고 다른 사람도 못 잡습니다. 물고기 잡으려고 힘쓰지 말고 먼저 자기를 잡으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예수님께 잡히어서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또 자기가 죄인인줄 발견하고 점점 깨져 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힘써 따라가는 사람이 자기 가족도 구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역할을 우리가 다 힘써 해야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누가복음 5:1-11

1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히라 하시니 11저희가 배둘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1. 베드로의 순종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한 배에 오르셨는데 시몬의 배였습니다. 육지에서 배를 조금 띄게 하시고 배에 앉으사 배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본문 4절에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가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 보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만능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때 대성공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밤새도록 잡으려고 해도 한 마리도 못 잡았고, 여러 곳에 다 다녀 보았지만 거기에도 물고기가 없었는데 이제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질 때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습니다. 아침에는 물고기가 먹이를 찾으러 얕은데로 나오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는 것은 고기 잡는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보아도 깊은 곳에 고기가 없는 때입니다. 또 밤새도록 잡아 보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실 때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니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습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없던 곳인데 어디서 나와서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몰아 온 것입니다. 사방에서
예수님이 물고기를 몰아 온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여 준 것과 같이 바다의 물고기를 예수님께서 다 몰아다가 깊은 곳에 있게 만들어 잡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다의 물고기도 몰아 올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도 몰아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이시므로 그의 피조물을 다 몰아올 수도 있고, 다 죽일 수도 있고, 다 살릴 수도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물고기가 심히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여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습니다.

2. 베드로의 예수님 발견

본문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성공 했습니다, 소원 성취했습니다”라고 보통 같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인데 그렇게 말하지 않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으로소이다”라고 자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성공한 것을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시기에 말씀 한마디에 바다의 물고기도 다 순종하는가! 하며 바다의 물고기도 몰아 올 수 있는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은 얼마나 부족하고, 얼마나 죄가 많은 자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 앞
에 설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말씀 한마디에 바다의 물고기도 몰아오시는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감히 설 수가 없는 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로 알고 따라왔지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구주시다,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그래서 믿는다, 또 주일날 교회에 나가야 된다, 그래서 나간다” 이런 정도로만 그치지 말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또 영원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복중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이 겸하여 있는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이 합해서 한 위가 되십니다. 즉 이성결합으로 한위가 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면만 보지 말고 하나님 면을 언제나 보아야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인간면만 보고 하나님 면을 못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삼대 성인 가운데 하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도 “예수님이 구주시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렇게 보통으로 알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서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또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설때에 얼마나 부족한 자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다 부족하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너무 죄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가책 되는 것도 많고, 불충성 한 것도 많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너무 정성 없이 하나님을 섬긴 것이 많고, 또 기도 한다고 해도 변변히 기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자기 정체가 다 드러납니다.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 불충성 한 것, 하나님을 거역한 것 등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보시기에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합당한 기도를 했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기도를 얼마나 했나?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는데 기도 시간을 얼마나 가졌는가? 기도하기를 쉬었다면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긴다”하며 다닌 것입니다. 예배 시간 늦어 진 것도 하나님 앞에 죄이며 합당치 않습니다. 

대통령 조찬 기도회를 해마다 한번씩 하는데 필자를 포함해서 청함 받은 사람 1500명쯤이 힐튼 호텔에서 모이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못 들어가기 때문에 조찬 기도회에 참여 하려면 반시간 전에 가야 합니다. 반시간 전에라도 자리가 뒤에 몇 자리만 남겨놓고 거의 다 찹니다. 필자가 반시간 전에 갔더니 거의 다 찼습니다. 조금만 늦었다면 못 들어갈 뻔 했습니다. 대통령 조찬 기도회 하는 것도 반시간 전에 일찍부터 가서 대통령 오기를 기다리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오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필자가 명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에는 예배 시간이 지나면 문을 걸고 안 들여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밖에서 아우성을 치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도 열어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번 문을 걸어 잠그었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는 미리 오느라고 저 산동네에서부터 뛰어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이 난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문을 잠그지 않으니 마음 푹 놓고 늦어 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충성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불충성해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합당하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데 대통령 앞에 가는 것보다 못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겠는데 미리 준비 없이 예배당에 와서 한 시간 예배만 드리고 가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를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 임금 앞에 갈 때에 이렇게 가면 임금이 기뻐하겠습니까? 임금이 복을 주겠습니까? 그 시간에 오지 않고 늦어지면 임금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로만 믿고 다녔습니다. 또 물어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도 보통 그리스도라고 따라 다니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진보되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것을 믿고 감
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을 감사 하여야합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내 모든 것이 드러날 때 나는 무능하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몇 년 따라 다녔지만 참으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주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따라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교회당에 가는 것을 교회당에 가는 것으로 알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또 그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같이 하십니다. 또 명령 한마디면 바다의 물고기도 다 복종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공중의 메추라기도 다 몰아오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는데 이제야 바로 된 것입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자기 부족한 것을 바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겼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주여! 주여! 하면서 껍데기만 주님을 따라다닌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3. 베드로의 사명

본문 10절에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명령 한마디를 올바로 순종하면 대성공입니다.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은 자기가 하려고 했으므로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하면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해 주시므로 대성공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며 남이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순종만 바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깨닫고 순종만 바로 하면 하나님이 일을 다 해 주십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면 그물을 내리면 됩니다. 그것만 순종하면 됩니다. 아무 염려 없습니다. 물고기 한마리 못 잡았어도, 다 실패했어도 이제라도 순종만 바로 하면 됩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안 된 것입니다. “순종 바로 하면 된다”하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순종을 바로 할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하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것이 바른 순종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명령이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다릅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찾아서 올바로만 순종하면 전부 성공입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길이 없다 하지 말고 순종만 바로 하면 됩니다. 순종을 바로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순종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서 찾고, 신앙 양심에서 찾고,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고, 경험에서 찾고,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찾습니다. 자기 경험은 다 내어 버리고,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도 다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 보았지만 잡지 못했으므로 아무리 자기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순종만 하면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순종만 하면 일은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취한다는 말은 각주에 보면 사로잡힌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네가 나가서 다른 사람을 사로 잡을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많이 잡히게 하신 것은 물고기 잡는 것이 원 목적이 아니고 베드로 잡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베드로를 잡으려고 물고기를 잡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 예수님에게 잘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날탕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녀도 자기가 살아서 인본주의로 따라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되겠으므로 물고기를 잡게 만들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복종케 하시려고 물고기를 잡게 만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께 잡힌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성공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젠 예수님께 잡혔으므로 이제부터는 나가서 다른 사람을 취하면 다른 사람이 잡힐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취하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나가서 건져 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께 잡혀야 다른 사람도 자기에게 잡힙니다. 예수님께 자기가 잡히면 다른 사람도 자기에게 잡힙니다. 아이들이 왜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까? 부모가 하나님께 잡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잡히지 않습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이 반장들의 말을 왜 듣지 않습니까? 자기가 예수님께 잡히지 않아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왜 목사 말을 듣지 않습니까? 목사가 하나님께 잡히지 않았으므로 교인들이 목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저부터도 목사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잡히지를 않아서 교인들이 제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제 제가 완전히 잡히면 교인들도 다 완전히 잡힙니다.
제가 아직도 완전히 잡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이렇게 설교하는 것도 저보고도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잡혀야 합니다. 목사가 완전히 잡히고, 집사들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잡히고, 또 주일 학교 반장들이 하나님께 완전히 잡혀야 합니다. 전부 하나님께 잡혀야 합니다.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왕 노릇 하는 교회, 예수님만 보이는 교회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서 전도하는 것도 내가 예수님에게 완전히 잡혀서 전도하
면 나한테 잡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먼저 안 잡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안 잡히는 것입니다.
금년에 전도 몇 명했습니까? 한 사람도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해도 전도가 안 된다고 합니다. 왜 전도가 안되겠습니까? 자기가 잡히지 않아서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물치고 돌아다녀도 왜 물고기가 안 잡힙니까? 자기가 말씀대로 순종을 안해서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안 잡히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을 안해서 안 잡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안 잡히는 것은 자기가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잡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주의 명령대로 순종할 것, 그러면 하나님이 물고기도 몰아다 주시고 메추라기도 몰아다 주십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순종 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잡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하고, 자기가 잡혀온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또 나가 전도하면 전도가 잘 됩니다. 아파트 문을 잠그고, 경비가 못 들어가게 하고, 별소리 다 해도 자기가 예수님께 잡히었으면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믿음으로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께 붙잡혀서 명령대로 순종하는 저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4:1-24 예수님 승시(勝試)와 가버나움 전도,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 승시(勝試)와 가버나움 전도
누가복음 4:1-24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서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14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신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1.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심

본문 1-2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기도하실 때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본문 2절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사십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으나 성령에게 이끌리어서 모든 것을 다 이겨 나가셨습니다.

물질시험

본문 3-4절에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시험은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는 물질시험을 했습니다. 언제나 초계단시험이 물질 시험입니다.
마귀가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할 때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신명기 8:3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이겼습니다. 산다는 것은 영혼이 산다는 말입니다. 영혼이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삽니다. 말씀만 있으면 영혼도 살고 또 육신도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
다”는 것은 영혼은 말씀으로 살고 육신은 떡으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 하나만 가지고 다 산다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영혼도 살고, 영이 살면 또 육신도 먹을 것을 주어서 살린다는 말입니다.

영광시험

본문 5-7절에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것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셋째 번 시험인데 여기는 둘째 번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4-6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번 시험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고, 셋째 번 시험은 천하 만국을 보이면서 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준다”는 것은 마귀가 권한 밖의 것은 못주고, 권한 안의 것을 자기에게 절하면 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하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마귀가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한 권한 안에서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마귀에게 한번 절했다면 실패합니다. 마귀에게 절하면 그것은 벌써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데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양보 하는 것이며 신앙 양심을 양보 하는 것이며, 진리를 양보 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 양보, 신앙양심 양보, 믿음을 양보하는 것은 마귀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는 일, 진리를 팔아먹는 일, 신앙양심을 팔아먹는 일 등이 다 마귀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신명기 6:13의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이겼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에게 경배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만 그를 섬기라”에서 “다만”이란 다른 것은 다 떨어져 나가고 그것 하나만 하는 것이 “다만”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하나만 합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하나만 나는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나갈 때에 마귀는 떨어져 나갑니다.

명예 시험

본문 9-11절에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이번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 올
라간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시험 받은 것입니다.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고 하였는데 왜 뛰어 내리라고 하였습니까? 뛰어 내리라는 것은 자기가 높아지기 위한 것입니다. 뛰어 내려도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상하지 않으면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자기 위하는 것, 자기 인기와 인심 얻는 것, 자기가 위대해 지는 것, 자기가 큰일 하는 것, 뛰어 내려도 발이 상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 앞에 인심을 얻고, 위대해지고, 또 모든 사람 앞에 큰일 할 수 있다는 그런 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고, 위대해지고, 대접받고, 자기가 모든 사람 앞에 존귀함을 얻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91:11-12에 “발이 상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마귀가 말씀을 갖다 댄 것은 성경을 이용한 것입니다. 뛰어 내리는 원목적은 자기가 높아지기 위해, 자기 인심을 얻기 위해, 자기가 위대해지기 위해, 자기가 커지기 위한 것입니다. 즉 교만입니다. 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으므로(시 91:11-12), 그대로 되나 해보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명예, 교만, 자기 위하는 것을 갖다 넣어주고 거기에 성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을 가지고 와서 시험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알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신명기 6:16의 “말씀하시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세 번째도 성경으로 이기셨습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2. 가버나움 전도

본문 14-16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라고 하였습니다. 각 동네에 회당이 있었는데 회당은 제사 드리는 곳이 아니고 성경을 공부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성경에 대해서 한마디 하겠다고 하면 “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사야 61:1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본문 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나시기 전 약 700년 전 사람인데 벌써 장차 그리스도가 나서 이와 같은 일을 하겠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가 났기 때문에 오늘날 너희에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본문 18절의 말씀처럼 죄와 마귀에게 영적 포로 된 자에게 영적 자유를, 즉 영적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그리스도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와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란 그리스도가 복음 전파하는 것은 은혜의 해란 말입니다. 이렇게 영적 자유, 영적 해방, 영적 은혜, 영적 눈이 밝아지는 일, 이런 것을 그리스도가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방신학자들은 제도적인, 사회적인 것으로 오역을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게 눌린 사람을 해방 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부자에게 눌린 사람, 권력에 눌리운 사람. 정치적 억압에 눌리운 사람, 이런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것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신학자들이 자본주의 제도나 정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할 일이다 하며 계급투쟁, 해방운동 등 각종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정치적 기관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의 자유, 영의 해방, 영의 눈 뜨는 일에 육신운동을 붙이는 것은 기독교를 악용하는 죄가 됩니다.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 22-24에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데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누가복음 3:1-22 세례요한의 전도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세례요한의 전도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
누가복음 3:1-22

1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구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본봉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여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게 하라 5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7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무
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 세례요한의 전도

본문 1-4절에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본문 4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는 말씀을 만들어 놓고 없어집니다. 말씀을 나타내고 없어지는 것이 소리인데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없어지는 것이 세례요한의 직무입니다. 소리는 “어”하면 그것으로 말씀을 만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를 소리로 내면 소리는 말을 만들어 놓고 없어집니다.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는 말은 안 없어집니다. 그러나 소리는 없어집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안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때 말한 음성은 없어집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의 직무가 말씀을 나타내고 자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자기는 없어지는 것이 세례요한의 직무입니다. 

우리도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고 나는 없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자기의 직무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 나”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했다, 나다”합니다. 두 번째는 “나, 예수”입니다. 자기 다음에 예수님을 갖다 놓습니다. 즉 자기가 예수님보다 앞세워졌습니다. 셋째는 “예수, 나”입니다. 예수님 다음에 자기입니다. 첫째나 둘째보다는 낫지만 “예수, 나”도 안 되었습니다. 넷째는 “예수, 예수”입니다. 나와 세상은 간곳이 없고 구속
의 주만 남아야 됩니다. 예수님만 남고 “나”라는 것은 없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낮아지든지, 멸시받든지, 쫓겨나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죽든지 예수님만 나타내고 나는 없어지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다”하며 바른 자리에 섰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 다음에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

◉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첩경이란 말은 길이라는 말로 길을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것은 길을 평탄케 하라는 것으로 곧게 하라는 말입니다. 즉 양심을 똑바로 쓰라는 말입니다. 구역성경에 첩경을 곧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첩경을 곧게 하라는 것은 길을 곧게 하라는 것입니다.

◉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는 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골짜기, 욕심의 골짜기, 음모의 골짜기, 이 골짜기가 메워져야 됩니다. 회개하면 골짜기가 메워집니다. 골짜기를 파놓고 다니지 말고 아무리 과거에 골자기가 있었어도 회개하고 골짜기가 메워져야 됩니다. 억울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맡기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것이므로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자기 골짜기를 메우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는 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져야 합니다. 즉 교만이 낮아져야 됩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낮아져야 됩니다. 높아진 것들이 많이 있으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 굽은 것이 곧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똑바로 써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구부러진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부터 곧아지면 하나님이 그 사람도 곧게 해 주십니다. 자기부터 곧아지고, 자기부터 평탄하여지고, 자기부터 골짜기가 메워지고, 자기부터 산이 낮아져야 합니다.

◉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지는 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험한 사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험한 사람들은 어떤 험한 것이 나올지 모르므로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험한 것이 다 없어지고 평탄하게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다 와도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아주 험합니다. 남자 가운데도 아주 험한 분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가까이 했다가 한번 걸리는 날에는 경치는 것입니다. 만나면 험한 것이 나오므로 될 수 있는 대로 그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지 않고 슬슬 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평탄해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험하게 나갔을까? 내가 왜 신경질을 부렸을까? 내가 왜 혈기를 냈을까? 내가 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었을까? 험한 것을 다 회개하고 평탄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필자도 과거에 험악하게 나간 것이 많습니다. 다 회개하는 중에 있습니다. 박래석 목사님이 중풍에 걸려서 세브란스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원무과에서 빨리 수속을 해 주지 않아서 험한 것이 한번 나왔습니다. 원무과에 들어가서 “사람이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 무슨 이런 병원이 있느냐, 책임자가 누구냐? 나서라”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다 일어서서 왜 이러십니까? 하며 원무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데려왔는데 왜 가만 놔두냐? 조금 있으면 죽겠는데 빨리 하라구”하니 저기로 모시고 가라고 하면서 빨리 입원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험한 것이 나온 것입니다. 잘 사정하여 일을 처리 했어야 했는데 원무과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 험한 것이 나온 것입니다. 또 원장이 누구냐 하며, 원장한테 간다고 하였
습니다. 그때 원장이 아는 의사였습니다. 험한 것이 나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험한 것이 나오면 안 됩니다. 험한 것이 평탄하게 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회개하고 평탄해져야 되겠습니다.

◉ 육체가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본다고 하였는데 우리 몸의 구속을 이루어 나가는 일을 해야 되겠습니다. 

로마서 8:23에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입니다. 영의 구원은 벌써 받았고, 마음의 구원은 이루어나가고, 몸의 구속도 지금 이루어나가는 중에 있습니다. 법적 구원은 이미 받아서 의인이 되었고, 마음의 구속은 지금 점점 회개하면서 골짜기가 메워지고, 높은 것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것이 평탄해지는 것이 마음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점점 죄에서 벗어져 나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나갑니다. 즉 몸의 구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임

본문 7-9절에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줄 알아야 됩니다. 북한이 도끼와 같습니다. 북한을 도끼로 만들어서 찍으려고 하시는데 특별히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안 찍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고 나가면 찍어버리실 것입니다. 다시 전쟁으로 멸망시키실 줄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좋은 열매를 맺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주라

본문 10-11절에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무리가 세례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어볼 때 옷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나눠주라고 하였습니다. 나눠주는 생활, 구제하는 생활로 옷도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좀 나눠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는 사
람들은 거기서 옷을 사 입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 옷 좀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도 여러 켤레 두면 무엇하겠습니까? 헌신이 있고 새신이 있다 하면 새신을 주고 헌신을 자기가 신고 다니면 또 다른 새신이 생깁니다. 이전에 모스크바에 뭘 보낼 때에 얼마 신지 않은 새 구두를 알마타에 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알마타에 가보니 내 신과 비슷한 것을 오석진 목사님이 신고 다니시길래 아무 말 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오석진
목사님이 이것이 목사님이 보내 주신 신이라고 할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새신을 또 주셨습니다. 주면 자꾸 하나님이 주시는데 왜 안주십니까? 러시아나 중국에 선교하러 가는 사람에게 웬만하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또 가난한 이웃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며 믿는 일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은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본문 12-13절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세리들이 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어 볼 때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세리들은 정한 세 외에 더 받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정부에 청부맡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광주도시에서 1년에 세금 1억을 정부에 바치라는 청부를 맡았다면 정부에 1억만 바치면 되므로 광주에서 2억, 3억, 4억을 받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리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정당하게 받아야지 더 높여서 받는 것은 하나님께 죄입니다.

군병들은 강포하지 말며 받는 요를 족한 줄 알라

본문 14절에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군병들이 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며 물을 때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또 무소하지 말며,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아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강포하기 쉽습니다. 강포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또 사실 아닌 것을 거짓으로 고발해서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는 요를 족한 줄 알라는 것은 자족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각자에게 적당한 하나님의 뜻이 다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무리에게 적당하게, 세리에게 적당하게, 군인들에게 적당하게 가르쳤습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될 하나님의 뜻. 마땅히 자기가 이루어나가야 될 하나님의 뜻이 다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하라, 너는 그것을 고쳐라”하면 그것을 고쳐야만 됩니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을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리가 의복이나 몇 가지 주고, 쌀이나 얼마 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리는 정한 세 외에 더 받는 것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세금을 더 받아 가지고 구제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군인들도 옷이나 몇 가지 주고 의복이나
쌀을 얼마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은 강포, 무소하며 받는 요를 족한 줄 알지 못하고 불평 불만하는 그것을 고쳐야 됩니다.
자기가 고쳐야 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가 고쳐야 될 것을 찾아서 그것을 고치면 믿는 일이 되고 그것을 고치지 못하면 믿는 일이 안됩니다. 각자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고쳐야 될 것이 있고, 또 하여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면 믿는 일이 되고 그것을 못하면 믿는 일이 안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무엇을 고쳐야 되겠습니까?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술 마시는 사람은 술을 끊으면 되는 것이고, 싸움 잘하는 사람은 싸움을 안하면 되는 것이고, 남을 미워하는 사람
은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또 정당하지 못한 수입을 보는 사람은 정당한 수입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간음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도둑질 하는 자는 도둑질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주일을 지키지 않고 결혼식에 다니는 사람은 주일을 잘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혈기를 잘 부리는 사람은 혈기를 안 부리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 고쳐야 될 것을 마땅히 하여야 하며 고쳐야 합니다. 십일조 못 드리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땅히 고쳐야 될 것과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본문 15절에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렸는데 세리요한이 세례를 주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볼 때 백성들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람을 보내어서 물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 보고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라고 물어 볼 때 세례요한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선지자입니까? 할 때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0-23에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다, 그리스도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아니다”라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마귀에게 끌리워 갑니다. “아니다”라는 말을 해야 마귀에게 안 넘어갑니다. “아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아니다”는 자기를 부인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이며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를 부인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리는 말씀만 나타내고 없어집니다. 말씀 나타내고 없어지는 소리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히 쓰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

본문 16절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해서 “그는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시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들메를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감히 하나님 앞에 가서 그 신들메를 풀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자기를 바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알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알면 죄인 가운데 괴수입니다. 언제든지 자기는 강폭하고, 험악하고, 골짜기가 있고, 구부러지고, 죄인가운데 괴수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절대 의로우신 거룩하신 예수님인 줄을 알아야 됩니다.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자인 줄로 아는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 하였는데 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불이 성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불을 성령이라고 하면 성령과 성령으로 세례 준다는 것으로 둘 다 성령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불은 성령이라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2:49-50에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안다고 하였는데 말씀이 영생입니다. 
또 ‘말씀이 불이다’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5:14에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말로 불이 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명기 33:2에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불같은 율법이라고 했는데 말씀이 불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불기둥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같이 계시면서 인도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혀서 앞길을 인도해 나간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성령과 말씀으로 세례를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헬라어 원어로 ‘밮티조’인데 “씻는다, 적신다, 담근다”의 뜻이 있습니다. ‘밮티조’라는 말을 침례교에서는 물에 ‘담근다’라고만 해석을 하는데 성경에 보면 ‘밮티조’의 변형이 여러군데 있습니다. “눈물로 발을 적셨다, 예수님이 떡을 찍어다가 가룟유다에게 줬다”에서 ‘적셨다, 찍는다’도 ‘밮티조’의 변형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세례를 “담근다”라는 뜻으로만 주장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에 씻어서 우리를 정결케 한 표로 물세례를 주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의 양식은 물에 담갔다 꺼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물을 떠서 적시는 적수세례를 주는 것도 성경적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요단강에서 물을 떠서 세례를 주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물속에 들어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을 떠서 세례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하루 3천명을 세례 주었을 때 3천명을 언제 물에 담갔다가 꺼냈겠습니까? 한사람 담갔다 꺼낸다면 3분씩 소요된다 해도 24시간 온종일 세례를 주어도 3천명을 다 세례를 못줍니다. 그러므로 뿌려서 세례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또 빌립보 옥사장이 밤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일어나 세례를 받은 것이지 강에 간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고 집에서 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이 믿는다고 하므로 일어나 세례를 준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거꾸러진 다음에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나았는데 거기서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강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물을 떠서 머리에 적시는 적수세례가 옳다고 봅니다. 세례의 뜻은 씻어서 정결케 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 정결케 했다는 표를 치는 것이 세례입니다. 

본문 17-20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분봉왕 헤롯을 책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서 살기 때문입니
다. 헤롯이 책망을 받고 회개했으면 복을 받았겠는데 회개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 가두었다가 헤르디아의 간계에 의해서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

본문 21-22절에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뜻은 씻어서 정결케 한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무엇을 씻어서 정결케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느라고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이 모든 것을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 의를 이루시려고 입니다.
◉ 말씀을 순종하시려고 입니다.
◉ 모본을 보이시려고 입니다.

본문 22절에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비둘기가 성령이 아니고 성령이 어떠한 성령인 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표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제물에 사용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앞으로 희생의 제물, 속죄의 제물이 되실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에는 첫째는 급하고 강한 바람, 둘째는 불로 나타났고, 셋째는 혀로 나타났고, 넷째는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람, 불, 혀, 갈라지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이 성령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일하시는 것을 상징하고, 성령이 불같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불과 같이 뜨거운 것을 말하며, 성령이 혀같다는 것은 혀는 맛을 아는 것과 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맛을 알게 하고 전도의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갈라지는 것은 성령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갈라 놓는다는 뜻입니다.

2017년 10월 29일 일요일

누가복음 2:41-52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 동행함,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 동행함
누가복음 2:41-52

41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서 동행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과, 다시 찾아야 됨을 알려주고, 다시 찾은 다음에는 동행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

예수님께서 열두살 났을 때에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명절인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돌아올 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셨습니다. 부모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하룻길 즈음 간 후, 친척과 아는 자 중에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장날에 예수님을 잃음

예수님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는 명절 지키다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명절은 복잡하고 뒤숭숭한 날입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복잡하기 쉽고, 은밀한 골방을 잃어버리기 쉬운 때가 명절입니다. 세상이 많이 들어오고, 육신의 것이 많이 오고, 마음이 산심되고, 육체로 기울어지기 쉽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 명절이 위험한 날입니다. 장날이 위험한 날입니다. 장날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천로역정에 예수님을 장날에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장날에 장 본다고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사람이 많이 왔다 갔다 하고, 그날에 예수님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시골 도시는 모두 장날이 있는데, 우리 기도원 가는 길에 모란시장이라고 있습니다. 아주 복잡하던데 5일에 한 번씩 장이 선다고 합니다. 그런 장날에 예수님 잃어버리기 쉽고, 명절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은밀한 골방 가운데 계시고, 은밀한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의식적인 제사를 드렸기에 잃음

또 다른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는데 의식적으로 지켰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양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유월절 양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의 의식적 제사입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뜻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의식적인 제사로만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중심 알맹이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알맹이가 빠진 의식적 예배만 드리면, 그것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알맹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진정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거저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드린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식만 잘 지내면 예배드린 줄 압니다. 강단에다가 꽃을 많이 갖다 놓고 그러는데, 어떤 교회는 꽃을 굉장히 많이 갖다놨더랍니다. 목사님 얼굴만 겨우 보이게 꽃으로 둘러쌌더랍니다. 그 꽃구경하느라 말씀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교는 반시간도 못하는데, 그것도 성경은 보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 세상얘기, 무슨 책본 얘기, 거저 성경 본문만 봐놓고, 재미나는 얘기만 하고 관둔다고 합니다. 그런 의식적인 예배, 의식적인 설교, 이런 가운데서는 안 됩니다. 

하여간 알맹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드려져야 되고, 영을 드려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없이 의식적인 예배만 드리고 간 것이 마리아와 요셉이 이와 같은 가운데 들어간 이유입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 알다가 잃음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고 내려갔기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계시겠거니 생각하고 거저 내려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내려가서 찾아보니까 없습니다. 친척과 아는 자들과 동행했던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니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있겠거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는 사람 중에 같이 있겠거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친척 가운데 같이 있는 줄 알아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 안 계십니다. 요즘 신자들도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그저 “같이 교회가자”, “가서 예배드리자”, “예배드렸으면 가자”하며 돌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잃어버립니다. 

2. 예수님을 잃으면 근심과 슬픈 마음이 들어옴

예수님이 같이 계신 줄 알고 있다가 가보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근심이 들어왔습니다. 본문 48절에,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하며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근심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기쁨이 들어오고, 예수님을 잃어버리
면 근심이 들어옵니다. 속에 근심이 들어오고, 만족이 없고, 또한 슬픈 마음이 생깁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는 슬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갖다 주어도 그것으로 만족이 없습니다.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속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모든 것을 다 갖다 주어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3. 예수님을 찾는 방법

회개하고 돌아가는 신앙

예수님을 찾는 방법 첫째는, 회개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멀리멀리 떠나갔는데 얼마나 갔는가? 하룻길이면 한 백 리 입니다. 또한 찾느라고 이사람 저사람 물어보고 찾느라 하루 걸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하룻길을 올라갔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인지 생각하고 찾아서 회개하고 다시 그 자라에 가야됩니다. ‘왜 떨어졌는가?’, ‘무얼 하다가 떨어졌는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그것을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선 옛날의 신앙, ‘어떻게 받았느냐?’, ‘어떻게 들었느냐?’, ‘어떻게 예수님을 섬겼느냐?’, ‘어떻게 주님으로 더불어 동행했느냐?’, ‘어떻게 즐거워했느냐?’, 그 신앙을 향해서 다시 회개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찬송가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하고 돌아오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찾는 신앙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와서 어디 가서 찾았습니까? 성전에 와서 찾았습니다. 본문 46-47절에,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데, 오늘날의 신령한 뜻은 영적 성전을 가리킵니다. 영적 성전,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예수님을 만나는 곳 입니다.

영적 성전을 찾아서 들어갈 때에, 그 성전은 은밀한 골방인 것이고, 그 성전은 거룩한 곳이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런 영적 성전을 찾아서 들어가니까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은밀한 골방을 찾아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골방에 계시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그 은밀한 곳에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 성전 입니다. 영적 성전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와주시고 값아 주십니다. 그런 영적 성전을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다시 찾아야 됩니다. 다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찾는 신앙

성전에 들어가 보니까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생들 중에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강론할 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치려고 하고, 말씀대로 믿으려고 하고, 말씀대로 바로 서려고 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해야 하고, 되새기고 묵상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으로 받고, 성령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즐거움이 되고, 그 말씀이 생명이 되고, 그 말씀이 자기의 전체가 됩니다.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서 멀리 떠났던 것을 회개하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책을 선반 위에 얹어놓고 한 주간 한 번도 안 보고 있다가, 주일날이 되면 먼지를 툭툭 털어서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주중에는 성경 한 번도 안 보다가 주일이 되면, “아, 벌써 주일이 되었구나”하며 성경책 위의 먼지를 툭툭 털어서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성경을 봐야 합니다. 밥은 매일 먹으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안 먹습니까?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되새기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려고 애를 쓰고, 말씀대로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본문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하시며,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계셔야 할 줄을 모르고 찾아다녔냐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든지 우리도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그곳에서 말씀을 강론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을 가져야 겠습니다.

4. 예수님을 찾은 뒤 동행하라

예수님과 같이 한가지로 내려가라

영접한 다음에는 동행했는데, 본문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동행하셨다고 했는데, 우리도 한가지로 내려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한가지로 집에 돌아가는 것, 한가지로 나사렛 고향에 내려가셨습니다. 요즘 구정이라 고향 가는 사람 많다고 하는데, 고향 갈 때에 어떻게 가야하겠습니까? 예수님과 한가지로 가야합니다. 한가지로 못 갈 바에는 가지 마십시오. 고향에 갈 때에 왜 그리 여러 번이나 가려고 합니까? 구정에, 추석에 또 무슨 때에 가려고 합니까? 그것 다 풍속 습관 쫒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사무실 직원들은 일 년에 한 번 가보게 합니다. 저는 우리 고향인 이북에 가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더 좋은 고향에 가려고 합니다. 더 좋은 고향 ... 물론, 앞으로 이북에 있는 고향에 가서 교회 세우게 해주시면 교회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교회 세우는 것이지 뭐 고향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예 목적을 더 좋은 고향 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저께 목욕탕에 갔었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고향 가려하느냐 물으니까 고향에 안 간답니다. 그래서 제가 더 좋은 고향에 가야 된다고 더 좋은 고향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희들끼리 “더 좋은 고향이 있댄다”라고 하며 저희들끼리 전도를 하더라구요. 세상 고향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고향에 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언제든지 한가지로 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마음이 고향에 다 가있고, 사람들에게 가있는 것은 안 됩니다. 한가지로 동행, 동거, 동락해야 합니다. 동행하는 신앙, 예수님과 언제나 한가지로 가는 것에 언제나 힘을 써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모시고 다녀야 됩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신 후에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순종하며 받들어라

한가지로 내려가신 예수님은 부모를 순종해서 잘 받들어 나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아야 됩니다. 순종하는 것을 본받아야 되고, 받들어 나가는 것을 본받아야 됩니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는데, 하나님께 순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받들어 나가야 합니다. 순종하고 나서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순종함으로 받들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도 교회의 인도자에게 순종하고 잘 받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잘 되어 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나갑니다.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기주의로 나가는 신앙을 가지지 말고, 명예영광주의로 하지 말고, 자기는 그저 죽어지고 순종하여 받드는 일
만 잘하면 됩니다. 그게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저께 어떤 젊은 목사 하나에게 앞으로 잘 좀 해나가라고 하니까, 집회할 때에 자기에게 기도도 좀 시키고 내세워줘야 교인들도 자기를 인정하고 받들어주겠는데, 한 번도 기도 안 시키니까 자기를 안 받들어주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석남 목사가 옆에 있다가 “젊은 목사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그들을 다 내세워주겠느냐?” 하며 그 정신을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들이 이삼십 명 있다고 하면, 어떻게 전부다 내세워주겠습니까? 내세워주면 받들어나가고, 안 내세워주면 안 받들어나가겠다 하는 그 정신부터가 잘못 되었습니다.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무슨 내세워주는 게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순종하여 받드는 것 뿐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다 쇠하고, 낮아지고, 죽고, 없어지고, 그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만 즐거워하고, 진리가 전파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잘 되어 나가는 것으로만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경회 같은 때에는 기도하면 은혜가 될 사람을 시켜야 됩니다. 기도할 줄을 몰라서 딴소리만 하고, 그러면 대중 앞에서 은혜가 안 됩니다. 기도할 때에 은혜가 될 사람을 시키느라고 지금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모조리 안 시킨다고 뭐라고 합니다. 사경회 때 모조리 시키려고 하면, 목사가 한 몇 백 명 되는데 그 가운데 기도 은혜 있게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경회 때 은혜 받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 내세워주는 게 목적입니까? 순종하여 받드는 것이 목적이지,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는 쇠하여져도 하나님의 일만 잘 되고, 하나님의 일만 잘 받들어나가고, 순종하여 받드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그런 모습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한 늘 시험에 들고, 결국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 마음,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저는 소년 때에, 청년 때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교회에 나가는데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한 번 시키나, 무슨 결혼식이나 잔치집 가면 누가 알아주지 않았고, 밥 한 술 주면 먹고 안 주면 관두고 그저 옆에 있다가 옵니다. 그렇게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 섭섭한 것이 없습니다. 한 반에 장로 딸, 장로 아들, 누구 아무개 다 알아줘도, 저는 우리 가정이 안 믿으니까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가집에 가면 알아줍니다. 먹을 일에나 가지, 상가집에는 사람들이 잘 안 옵니다. 그래서 상가집에 가서 찬송가를 불러주고 하면 좋아해서 매번 갔습니다. 또 병난 집에 가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얼마든지 봉사하고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순종하여 받드는 생활이 예수님의 생활입니다.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생활입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목숨을 희생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섬김을 받으려하는 생각을 그만두고 남을 대접하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섬기며, 순종하며 받들어나가며 예수님을 닮아나가는 생활을 해야되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라나라

본문 52절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났다는 것은 영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키가 자랐다는 것은 몸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영이 자라나고 몸도 자라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믿는 일 잘하고 제대로 하면서 자라나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아가고 칭찬을 받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로마서 14:18을 보면,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기뻐하심을 받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이렇게 자라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 영이 자라나고 다른 것, 키도 자라나고 몸도 자라나야 합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육신의 것, 세상 것도 자라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자라나면서 외부적인 것도 자라나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영이 자라나지 못하면서 외부적인 것만 자라나는 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은 실력은 자라나지 못하고 껍데기만 자라난 것입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외부적인 것이 자라나야 강해지고 모든 것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영은 자라나지 못했으면서 외부적인 것만 자라나면 바람에 튕겨서 날아갑니다. 영적 실력은 닭 한 마리 만큼밖에 없는데, 몸뚱이는 소만큼 커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힘은 닭 한 마리 만큼밖에 없는데, 몸뚱이가 소만큼 커졌다면 힘이 없어서 바람 불면 날아갑니다. 비실비실하다가 날아가 버립니다. 닭의 다리에 소를 갖다 놓으면 그 다리가 똑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이 자라나면서 몸도 자라나야 합니다.

몸이 자라난다는 것은, 어린사람들의 경우는 육체가 자라나는 것도 되지만, 장정들은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다른 것도 자라나야 함을 말합니다.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교회도 자라나야 되고, 가정도 자라나야 되고,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다른 것도 자라나야 됩니다. 영이 자라면서 구역도 자라나고, 반장을 하면 그 반도 자라나고, 영이 자라나면서 다 자라나야 합니다. 

영이 자라나지 않았으면서 아이들만 많이 모아다가 놓은 것은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요새 주일학교 하는 교회들을 보면, 영적 면은 길러나가지 못하고 그저 아이들만 많이 모아다 놓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만 많이 모아다 놓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얼마 있어서 자라고 나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다 세상으로 나갑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장년부로 올라오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그것이 왜 그러느냐 하면, 영이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이 자라
나면서 주일학교도 부흥이 되고, 교회도 점점 부흥이 되게 해놓으면 실력이 있으니까 바람이 불어도 안 날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별을 못하고, 미련하고 지혜가 모자라서, 여러 가지 풍조에 밀려서 다 밀려나갑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몸이 자라난 것은 강건합니다. 그러나 영은 못자라나고 몸만 자라는 것은 바람 불면 다 날라갑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했습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집사도 되어야 하고, 영이 자라나면서 장로도 되어야 하고, 영이 자라나면서 목사도 되어야 합니다. 영이 못 자라나면서 집사 된 것은 가다가 그만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장로도, 영이 못 자라난 사람이 장로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목사도, 영이 자라나지 못한 사람이 목사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자라나서 안 날라가는 사람, 영적 실력을 가지고 다 이길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정복해나가는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자라나고, 예수님과 같이 지혜가 있고, 예수님과 같이 순종하여 받드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누가복음 2:41-52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된 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된 일
누가복음 2:41-52

41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 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1. 예수님이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감

본문 41-44절에ࡒ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에 명절이 세 번 있습니다. 그 세 개의 명절을 모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첫째 명절은 유월절인데, 유월절은 성력으로 정월 14일부터입니다. 둘째 절기는 맥추절,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셋째 절기는 수장절 혹은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너희 남자들은 매년 세 번씩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되 빈손으로 내게 오지 말라(신 16:16)’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예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1년에 세 번 있는 명절 가운데 유월절은 아주 큰 명절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지키려고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유월절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가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셨을 때였는데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좇아 올라갔습니다.

2. 예수님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

분문 42-44절을 보면, 그들이 유월절 절기의 전례를 좇아올라 갔다가 그 날들을 다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는데,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에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아보았지만 만나지 못하여서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렸으니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보통 아이 하나를 잃어버리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게다가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실 것임을 미리부터 하나님께서 다 알게 해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할 때도 알게 해주셨고, 해산한 때에도 다 알게 해주셨고, 또 천군 천사가 여러 번 나타나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또, 애굽으로 피난 갈 때에도 알게 해 주셨고, 동방박사가 와서 예배드릴 때에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다 알게 해 주셨는데, 그런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상당히 큰 문제입니다.

3. 예수님을 잃어버린 원인

은밀한 골방을 잃어버림

그럼 잃어버린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잃어버렸습니까? 예수를 잃어버린 원인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명절 지키느라고 북적북적하고,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고, 여러 사람이 가고, 친척들이 가고, 아는 자들이 가고, 모르는 자들도 가고, 그렇게 명절 지키는 분위기에 들떠서 내려간 것 같습니다. 복잡하고 뒤숭숭하고 그런 들뜬 분위기일 때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마귀가 장 날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시골에 가면 장날이 있습니다. 5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게 있는데 장날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아주 복잡합니다. 그런 날에 마귀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날에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들뜬 분위기에서 은밀한 골방을 잃어버릴 때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때가 그런 때입니다.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고, 친척이 많고, 아는 사람도 많이 오고, 왔다 갔다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기쁘다고 하면서 돌아갈 때에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다 생명이 끝난 것입니다. 생명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신데, 온 세계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큽니다. 예수님 잃어버린 것은 세계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음

왜 잃어 버렸습니까? 둘째 이유는 예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나서 내려올 때에는 예수님을 찾아서 내려와야 되겠는데, 찾지 않고는 그저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그냥 내려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거기서 미리 찾았다면 떠나기 전에 찾아서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을 언제 잃어버리는가 하면, 예수님을 찾지 않을 때 잃어버립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됩니다. 늘 예수님을 찾고, 사모하고, 앙망하고, 예수님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찾아서 예수님으로 더불어 살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찾는 생활이 잠시라도 끊어지면, 그때에 예수님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낮이나 밤이나, 무슨 일을 하나, 어디를 가나, 늘 예수님을 찾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예수님을 그만 잃어버립니다. 

언제 잃어버린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찾지 않을 때, 예수님을 찾지 않는 날에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는 시간, 그 시간에 예수님을 잃어버립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하지 않은 까닭에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중심 생활을 하지 않아 잃음

셋째 이유는 예수님 중심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을 헛 지키고 왔습니다. 유월절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지켰는데 껍데기만 지킨 셈입니다. 유월절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유월절의 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유월절에 양 잡아서 제사 드리고, 유월절을 그저 명절로만 지키고 그냥 내려온 것입니다. 그 핵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실체는 예수님이신데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소나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은 그림자 제사이고, 실체는 예수님이십니다. 핵심, 알맹이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지켰어도 의식적으로만 지켰고 알맹이는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도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식적으로 드리기 쉽습니다. 또 예수 믿는 것을 의식적으로만 믿기가 쉽습니다. 가서 그저 참예하면 되는가 보다, 예배시간에 예배당 와서 참예하면 그저 예수 다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한번 부르고 예수 다 믿은 줄 알고, 예배시간 참여하면 예수 다 믿은 줄 압니다. 그러나 예배에는 알맹이가 있는데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모든 것보다 귀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잠시라도 떠나면 안 될 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실체로 영접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살고,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잠시라도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는 그런 생활을 했다면, 그리스도를 안 잃어 버렸을 것인데, 그만 그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12살 난 그들의 아들이지만 그 분이 그리스도였습니다. 벌써부터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다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부모에게다 알게 해 주셨고, 자기들도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또한 동방박사가 와서 다 알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실체가 되시고 알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로만 유월절 지키고 온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성도, 신자가 많습니다. 알맹이는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그저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예배시간에 거저 참여하면 되는 줄로 압니다. 또한 예배시간에 늦어지면서도 ‘아, 아직도 설교 시작 안 했군, 됐다’고 하면서, 예배시간을 성경말씀을 강론하는 것, 그 전에만 오면 늦지 않은 줄 압니다. 그리고 끝날 때에는 3절 찬송가 부를 때 먼저 달아나는 것입니다. 교회만 왔다 가면 그것으로 예수 다 믿은 것인 줄로 압니다. 그런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친척과 아는 사람들 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뭐 우리가 아는 자중에 있겠지. 친척 중에 있겠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빨리 고향에 돌아가느라고 잃어버렸습니다. 39절에 마리아와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았다고 그랬습니다. 나사렛은 북쪽이고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야 되겠기 때문에, 고향 가느라 급급해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바쁘게 고향 가는 데에만 정신이 다 팔리고 마음이 거기에 다 가 있는 바람에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 버렸습니다. 고향 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갔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 제일 좋고 중요한 것이 예수님입니다. 돈보다, 직장보다, 고향보다, 아는 자보다, 친척보다, 동행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사하는 것보다, 알맹이,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냥 고향에 가면 뭘 합니까?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고향가면 뭘 합니까? 예수님 잃어버리고 다른 것 다 잘한들 뭘 합니까? 예수 한번 잃어버리면 모두 헛된 것입니다. 예수 한번 잃어버리면 고향가도 헛된 것이고, 성공해도 헛된 성공이고, 돈 벌어도 헛된 거고, 직장이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그것다 헛된 것입니다. 예수 한번 잃어버리면 전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한번 소유하면 그것은 전부 성공입니다. 예수 한번 소유하면, 예수님으로 생명을 삼고 나가면, 그것은 고향 못가도 성공이고, 돈 못 벌어도 성공이고, 먹을 것이 없어도 성공이고, 또 친척이 없어도 성공이고, 다 성공입니다. 

그러면 뭘 먹고 사느냐고 하는데, “먹고 살 것은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그랬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것은 다 이방사람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벌써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먼저 아시고 다 준비해 놨다”고 그랬습니다. 그럼 왜 먹을 게 없느냐고 불평하는데, 날아다니면 먹을 게 있습니다. 날아다니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을 다 찾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을 게 생깁니까? 날
아다니면 됩니다. 먹을 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날아만 다니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셨다고 하십니다. 날지 않고 목침 베고 낮잠 자면 굶어 죽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이기 때문에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날아만 다니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다 해놓으셨습니다. 날아만 다니면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놓으셨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4. 예수님을 찾는 방법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찾음

예수님을 잃어버린 생활이 되면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모가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 부끄러운 일이고, 아들 찾느라고 돌아다니는 것은 또 얼마나 마음에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룻길을 내려가서 찾는데, 하루 종일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자리로 올라가야 됩니다.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그 자리로 올라가야 됩니다. 근원지로 올라가서 거기서 찾으려고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찾으려면 돌아서야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야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올라가야 됩니다. 

어떻게 하다가 잃어버렸습니까? 내려가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찾습니까? 올라가야 찾습니다.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잃어 버렸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찾으려고 올라가야 됩니다. 이제부터 올라가야 합니다.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하는데,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아브라함이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지경에 싸였습니다. 자기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올라가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날마다 올라가야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뒤에 세워놓고 올라가는 생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온 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성전(아버지 집)에 가야 찾음

올라가서 찾으니까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본문 46-47절에,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본문 48절에,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며 근심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잃어 버렸으니 얼마나 근심했겠습니까?
게다가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근심이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근심하면서 너를 찾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본문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부모가 근심하며 사흘 동안 찾아다녔습니다.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놀란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니까,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가야 찾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성전입니다. 또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마태복음 21:13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집은 성전이고,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는데, 기도하는 집에 가야 예수님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는 방법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과 성전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의 집에 앉아서 말씀을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고 대답도 하시고’라고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집은 성경을 강론하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새김질하고 성경말씀을 상고하고 강론하는 집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집에 나아가서 예수님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집은 예루살렘입니다. 신령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야 됩니다.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가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찾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근심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4:1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며 내 아버지의 집이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고, 내 아버지 집에 있으면 근심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하나님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십니다. 또한 근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근심 있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가면 됩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근심 걱정이 들어가서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콱 죽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어디로 가면 된다고 하십니까? 아버지의 집에 가라는 말입니다. 가서 모든 염려를 다 아버지께 맡기십시오. ‘모든 염려는 다 주께 맡겨 버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짐을 아버지께서 대신 져주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라. 그리고 너는 순종만 해라. 그러면 그 짐을 아버지께서 다 맡아 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가는 것이 낫습니까? 아버지께 갖다 믿기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버지께 가져다 믿기는 것이 낫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근심이 없습니다. 찬송가 중에서 ‘나 주를 멀리 떠났다 내 주를 찾아 이제 온다, 그 귀한 세월 보내고 내 집을 찾아온다’라는 내용의 찬송이 있는데, 아버지의 집을 찾아와야 됩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되면 근심 걱정이 가득해집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그 부모’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라며 놀랐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놀랄 일이 많이 생기고, 근심 걱정이 많이 생기고, 또한 애타는 마음도 생기곤 하는데,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근심 걱정이 다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는 생활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버지 집은 성전생활, 제단생활, 경배생활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아버지의 집은 성전이라고 했는데, 성전생활을 해야 됩니다. 성전생활을 하며 성전에 들어가야 만나는 것입니다. 어느 성전이냐 하면, 영적 성전입니다. 영적 성전을 찾아서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근심 걱정이 다 없어집니다. 항상 평안하고 항상 즐겁습니다.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그곳은 낙원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낙원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을 찾으니까 문제가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뭐 때문에 걱정이다, 뭐 때문에 걱정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밥을 떠서 국에다 넣을까, 국을 떠서 밥에다 넣을까?”와 같은 이런 걱정들이 태산 같았는데,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다 해결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 사경회에 참여 할 때에 걱정을 가득하게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 올 때에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저 목사님을 만나서 물어봐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경회 중간쯤 되니까 다 해결 됐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 아버지 말씀을 받았고,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집’을 찾으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하며 아버지 집을 찾아 돌아오십시오. 

탕자가 아버지 집을 찾아오니까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를 떠나 살 때에 재산을 다 없애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했으나 그것도 없으니까, 이제는 다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멀리서 보시곤 자기 아들인줄 알고 즐거워하며 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내 아들은 잃었다가 다시 찾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다” 하면서 그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잔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고, 제일 좋은 옷으로 내다 입히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아버지가 기뻐서 영접해주십니다. 

이제는 돌아갈 생각을 하십시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다하려 해도 일이 안 됩니다. 걱정이 안 없어지고 계속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집을 찾아서 돌아가십시오.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이니까 거기서 기도하십시오. 아버지 집을 찾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은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집입니다. 강론하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 상고하고, 연보하고 하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경을 상고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곳이 낙원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날마다 찾아서 낙원에서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산 제물로 바쳐야 찾음

예수님을 생명으로 삼고, 예수님이 중심인 예수 중심생활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찾는 예수 중심생활을 해야 됩니다. 예수는 실체이십니다. 실체, 알맹이, 핵심인 예수님이 한번 빠져나가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 잃어버린 거니까 예수님 한분 다시 찾아서 예수님으로 살고, 성전생활을 늘 하고, 제단생활을 하고,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산 제물로 바쳐져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으니까 우리도 산 제물로 바쳐져야 됩니다. 로마서 12:1에 보면,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산 제물로 바치는 생활,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값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하는 이 몸 바치는 생활, 제단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같이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낙원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다 져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잘 이루어 나가게끔 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향을 간다 해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됩니다. 찾아 모시고 가지 않고,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갈 때는 그저 근심, 걱정, 염려, 놀라는 이런 것들이 가득했는데, 이제 예수님을 모시고 고향에 갈 때는 아주 기쁘고, 즐거움으로 갔습니다. 

5. 순종하며 자라나는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자

본문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께서 이제는 한가지로 내려가셨는데, 동행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했는데, 순종하여 받드는 것을 우리도 배워야 됩니다. 예수님의 하신 것, 순종하며 부모를 받들어나가는 생활을 배워야 됩니다. 

본문 52절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랐습니다. 지혜가 자랐다는 것은 영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키가 자라고 몸이 자라는 동시에 영도 자라나야 됩니다. 몸만 자라야 하는게 아닙니다. 누가복음 2:40에, “자라며 강하여 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라고 했는데, 강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이 자라나며 강하여 지고, 키가 자라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나고, 영이 자라나고, 부모를 잘 순종하고 받들어 나가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주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사랑스럽고, 사람이 볼 때도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귀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도 귀한 사람, 좋은사람, 모범이 될 만한 사람,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람,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사람, 예수님과 같은 이런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누가복음 2:25-39 시므온과 안나가 그리스도를 영접함, 이병규목사강해설교

시므온과 안나가 그리스도를 영접함
누가복음 2:25-39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시므온과 안나의 신앙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시므온과 안나가 준비를 잘 했다가 영접을 했습니다. 탄생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하는 것을 시므온과 안나에게서 배워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두 사람이 특별히 영접을 한 것입니다. 준비를 잘한 시므온입니다. 

1. 의롭고 경건했던 시므온

본문 25-27절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경건한 생활 한 사람이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기다린 것을 내포합니다. 언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겠는지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오신다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기다리는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한 것을 볼 때 성령의 인도를 언제나 받는 시므온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 성령의 인도, 성령의 위로, 그것이 언제나 충만한 시므온입니다. 성령께서 지시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지시해 주었습니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 하리라’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주의 성령께서 지시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은 것을 보면 늘 그 신앙이 깨어 있었고, 늘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고, 성령으로 늘 모든 것을 행한 사람이고, 영이 늘 깨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잘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특별한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감동이 때때로 있습니다. 믿음이 좋고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죽기 전에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시므온입니다. 

2. 아기 예수님을 영접한 시므온

본문 27-28절에,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 안에 늘 거주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므온이 늘 깨어 있는 생활, 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성령께서 감동을 시켜서 성전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가보니까 마침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와서 율법의 전례대로 할례를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오는 것을 만났습니다.

그 때에 시므온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뭐라고 찬송했습니까? 본문 29-32절을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찬미한 내용을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라고 했는데,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평안히 놓아주십니다. 자유와 해방과 평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 그리스도이신 줄 알고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평안해집니다. 모든 근심걱정, 고통, 염려, 괴로움, 이것 다 예수님만 영접하면 평안해진다는 말입니다. 근심걱정이 다 뚝뚝 떨어져 나가고, 모든 괴로움도 떨어져 나가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그 심령이 참으로 평안해 진다는 말입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본 것은 구원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구주시라는 말입니다.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사오니’라는 말입니다.

본문 31절에,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구주시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운동은 이방까지 나갑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 빛을 비춰서 건져냅니다. 

본문 32절에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송한 것은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큰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찬송한 것입니다.

3. 많은 사람의 패함과 흥함을 위해 오신 예수님

본문 33-34절에, 시므온이 저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말하기를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또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패하고 흥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흥하고 예수님을 반대하면 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돌로 오셨습니다. 이 돌을 반대하면 깨지고 돌을 영접하는 자는 산 돌이 되어서 산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흥하고 반대하면 패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비방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끔 하십니다. 패하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시고 세움을 입으신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흥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잘 된 사람이 많습니다. 살아난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흥함

그러나 패한 사람도 많습니다. 망한 사람도 많습니다. 요새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 군대가 가서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다 파괴시켰습니다. 그 이슬람 사람들이 아무리 호언장담하며 결심했지만 아무 맥도 못추고 다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이슬람국가가 여러 개가 된다고 합니다. 50여개 된다는데, 그렇게 여러 국가지만 전부 다 미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전에 애굽같은 나라는 얼마나 강했습니까? 블레셋나라는 또 얼마나 강했습니까? 또 바벨론 나라는 얼마나 강했습니까? 바벨론이 지금 이라크와 이란인데, 옛날에는 세계를 다 통치하던, 세계패권을 잡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바벨론이나 애굽이나 앗수르나 블레셋나라나 이런 나라들이 이슬람교가 들어간 다음에는 전부 다 약해졌습니다. 전부 가난해 졌고, 전부 맥을 못 추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는 여자들이 나가서 일해야 된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놀고 먹고 그런다고 하니까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남자들이 나가서 일해야지 여자들이 나가서 일하니, 다른 나라보다 절반밖에 못할텐데 그게 어떻게 나라가 잘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슬람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코란을 들라고 합니다. 코란을 받던지, 칼을 받던지 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스람교 코란이라는 성경이 있는데 이스람교 안 믿으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여버리는 것 밖에 없으니까 나라가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루 다섯 번씩 모하메드 태어났던 곳인 메카를 향하여 기도해야 되고, 또 뭘 해야 되고, 그 사람들 하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 하느라고 제대로 일하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또 머리에 빙빙 둘러 감고 다니는데 여름에 얼마나 덥겠습니까? 여자들은 뒤집어쓰고 눈도 제대로 내 놓지 못하고, 얼굴 다 뒤집어쓰고 다녀야 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데만 구멍을 조금씩 뚫어 놓고 그 곳으로 내다보아야 됩니다. 그렇게 여자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데, 그러면 일은 여자들한테 시켜먹고, 그러니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일대로 안하고 이렇게 남을 괴롭게만 하고 남자들은 놀고먹고, 나라가 자꾸 약해지게 됩니다. 계속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강하던 나
라가 이제는 제일 미약한 나라들이 됐습니다.

우리 한국이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유력한 나라가 되었는데 이북과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이것은 한국이 하나님을 섬기는 영국이나 미국으로부터 전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전해줄때 그 축복해 준 것을 받은 것입니다. 문명이 들어갈 때 기독교도 같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혜택을 받아서 이 만큼이라도 된 것입니다. 

이북은 기독교가 들어갔었지만 지금은 예배당 문 다 닫아놓았기 때문에 이북은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도 자꾸 떨어지는것입니다. 공산주의 처음 할 때는 다 괜찮았지만 공산주의를 자꾸 하면 내내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기 의욕이 다 없어지게 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뭐 일해서 돈 벌어 잘 살겠다는 의욕이 다 없어집니다. 시키는 일을 시간만 때우고 주는 배급 받아 먹으면 됩니다. 뭐 잘해야겠다는 의욕이 있어야 되겠는데, 잘 하면 뭐 하냐는 말입니다. 다 국가 소유니까 잘해도 못해도 받는 건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서 시간만 때우고 배급 타다 먹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농사 하는 사람들도 농사 좀 더 잘해서 곡식 좀 많이 내야 하겠다고 해야 많이 나겠는데 많이 나면 뭘 합니까? 다 국가에 다 갖다 바치는데 배급 타다 먹으면 마찬가진데, 농사해서 곡식이 많이 난 것이나 조금 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잘 해야겠다는 노력이나 의욕이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이나 때우고 배급 받아 먹으니 능률이 도무지 나지 않습니다. 카자흐스탄의 그 어떤 도시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농사해도 3분의 일은 농장에 다 흘리고, 3분의 일은 가다 길 바닥에 다 떨어뜨리고, 3분의 일만 국가로 들어가더랍니다. 농사한 것을 신고 가는데, 하나도 아끼지 않고 땅에 흘려지면 흘려지는 대로 그대로 가더랍니다. 그것 뭐 내꺼냐고 하며, 흘린 사람이나 안 흘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한 알이라도, 곡식 한 알이라도 아껴야 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흘리고 가도 마찬가지고 안 흘리고 가도 마찬가지니까 3분의 일만 창고에 들어간답니다. 

그렇게 잘 하겠다는 의욕이 전혀 없어지니까 자꾸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치고 뒤떨어지지 않은 국가가 없습니다. 다 뒤떨어졌습니다. 그렇게 나가니까 어떻게 발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잘 하려고 하고, 많이 좀 수확하려고 하고, 좀 더 많이 벌려고 하고, 그 다음 자기 유익이 되려고 그렇게 하여야 되겠는데, 자기 유익이 안 되니까 잘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하려고 하면 괜히 힘만 들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나으니까 자꾸 뒤떨어집니다.

중국에서는 등소평이 그런 문제를 알아서, 이제는 공산주의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경제를 자유경제로 해야 나라가 살지, 그렇지 않으면 살지 못하겠다고 해서 한 십여 년 전에는 농지를 전부 개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농지가 국가 소유였던 것인데, ‘개인이 전부 다 맡아서 이제부터 농사해 먹어라’, ‘농사짓도록 해라’고 하여 잘 한 사람 많이 먹게 하고 돈 벌수 있게 했습니다. 또 장사도 옛날에는 월급 줘 가지고 팔았는데 이제는 각자가 장사하게 하고 돈 많이 벌면 자기 것이 되게 하고, 집도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중국에 자유경제가 들어가서 상당히 많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의 이 복음의 빛이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역사가 따라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성경말씀대로 하는 법칙, 성경말씀대로 하는 통치, 이런 정치가 들어가야 다 잘 되게 만들어 놓으십니다. 

이렇게 성경이 다 잘 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경대로 했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들이 다 잘되었고, 우리 한국까지 그 혜택이 왔고, 기독교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 만큼 받은 것입니다. 전에는 얼마나 한심했습니까?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형편없는 나라였고, 제일 약속국가였고, 제일 못 사는 나라였는데,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서 기독교가 퍼지는 바람에 기독교에 딸려오는 축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축복도 따라옵니다. 그래서 이 만큼 된 것입니다. 

패하고 흥함을 위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교가 들어가면 흥해집니다. 반대하는 국가는 패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방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를 보면, 비방 받는 표적이라고 했는데 기독교가 들어갈 때에 사람들이 비방을 합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흥해집니다. 잘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언

본문 35절에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것은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찌른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마리아의 마음이 칼로 찌르듯 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 드러낸다고 하십니다.

4. 성전에서 늘 기도하던 안나

본문 36-37절에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했습니다. 안나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선지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초대교회는 선지자의 직분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늙었다고 했습니다. 출가한 후 몇 해 동안 남편과 살았습니까?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됐는데,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고, 일곱 해 동안 남편과 같이 살았으니까, 백 다섯살은 됐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늘 성전에서 기도한 모양입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늘 있었습니다. 또 주야로 금식하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6․25사변 직후에는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밤에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서 늘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명륜교회에 윤할머니가 있었는데 성전인 교회에 와서 늘 기도했고, 또 명륜교회에 김성애 집사라고 있었는데 매일 저녁 예배당에 와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추우면 뒤집어쓰고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고 나이는 칠십이 넘었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미국에 가서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직도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김진수 목사의 사모가 완동교회 교인으로 처녀일 때 매일 성전에 와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좋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곤 김진수 목사와 결혼시켰는데, 시집 간 다음에는 기도 안합니다. 그래서 처녀들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 같습니
다. 그와 같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 과거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요새 보면 기도원에 가서 늘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하십시오. 기도 많이 하면 증거가 있는데, 기도를 많이 했다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오래 전 아현교회에 김현봉 목사님 계실 때에 제가 한번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경기노회 교회들을 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경기노회는 서울에 한 몇 몇 개의 교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몇 교회 가보다가 아현교회에 처음으로 가 보게 되었습니다. 가보니까 옛날 한옥 집을 헐어가지고, 건물은 납작한데 기둥이 한 몇 십 개였습니다. 문을 열어보니까 낮인데 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더기를 구석에 쌓아놓았었는데 헌 방석을 구석에 쌓아놓고 있었고, 거기에 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목사님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까 삼각산에 가셨다는 겁니다. ‘삼각산은 또 뭘 하러 갔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산에 기도하러 간다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가시냐고 물으니까 매일 가신답니다. ‘별 교회가 참 다 있다’ 고 생각하고선, 목사님 한번 만나보아야겠는데 언제 만나볼 수 있겠냐고 하니까, 목사님이 삼각산 안 가시는 시간에 와서 만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현교회에도 매일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날은 김목사님을 못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에 또 가니까 그 땐 김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보니까 조그마한 영감이 머리를 빡빡 깍고선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몇 마디 말을 하다가, “이 교회 세운지가 몇 년 됐습니까?” 물으니까, 이십 일년 됐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삼년 있다가 떠나야 된다고 배웠었는데, 그것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안 맞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십 일년 있었습니까? 저는 삼년 있다가는 떠나야 된다고 배웠다”고 물었습니다. 이십 일년을 쫓겨나지 않고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한마디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가르쳐 주시려냐고 하니까, 사경회를 할 테니까 사경회에 오면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 집회에 참석해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몇 사람만 데려가도 사경회 해줍니까?”하니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동창생 황가정 목사가 신당동 교회에 있었는데, 성산교회 김순 목사랑 그리고 한 사람 더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는 삼각산 기도원이었는데, 지금 올림피아 호텔자리입니다. 호텔 뒤에 그때는 제일 기도원은 없었고 돌집이 자그마한 것 있었습니다. 겨울에 갔는데 추웠습니다. 추우니까 많이 나는 아카시아 나무를 찍어다가 불을 때었는데, 불을 때면 방안에 연기가 가득했습니다. 그 때 김재홍 목사가 주인으로 있었는데, 제대로 건사를 안 해서 불을 때면 연기가 다 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거기 있으면서 공부하기를 한 주간인가 있으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좀 싸우기도 하고, 안 맞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 하고는 안 맞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신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주장하고 김목사는 자기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며 싸웠는데, 하루는 그렇게 싸우다가 목사님이 보따리 싸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가려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순 목사도 가려고 하고, 저도 보따리 싸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안되겠습니다. 강사를 모셔놓고는 싸워놓고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마저 다 끝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중간에 가는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셔서 한 주간을 다 마치는 동안 의견충돌이 거의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한 주간 있는 동안에 처음에는 안 맞아도 계속 배우다 보면 해결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으니까 생각이 안 맞을 것 아닙니까? 깨달아지면 다 맞게 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우리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 하는 것, 또 집에서도 항상 기도하는 생활 이런 것, 성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것에 속합니다. 금식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은 금식을 내내 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금식은 한 끼씩 안 먹은 것입니다. 점심을 안 먹던지, 한 끼씩 안 먹는 금식을 내내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많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 늘 깨어 있었습니다. 

5. 안나가 아기 예수님을 영접함

본문 38절에,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마침 이때에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기를 데리고 가니까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왔다”라고 가서 말해주었습니다. 안나가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는 생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 다. 다른 사람은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속에서 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고,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렸고, 성령이 그 위에 계셨고,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감동을 받았고,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본다고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 성전에 들어가실 때에,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이신 줄을 깨닫고는 하나님께 찬송을 했습니다. 

안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과부생활을 하면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전문’입니다. 그리고 성전 중심생활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안나도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우리도 내일 모레가 성탄절인데,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육신 중심생활을 하고, 세상에 빠지고, 마음에 허망한 생각을 가지고 나가고, 죄 짓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예수님 영접을 못합니다. 이렇게 준비 하는 것,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준비 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영접하는 저희가 되어야겠습니다.

누가복음 2:1-20 예수님의 탄생,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의 탄생
누가복음 2:1-20

1이 때에 가이사 이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1. 요셉이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감

본문 1절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전 31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황제 지위에 있던 자로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 전체를 다 호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때에 유대나라도 로마 식민지에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4절에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고 하였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호적 하러 갔습니다. 

2. 마리아가 예수님을 해산해서 말 구유에 뉘임

본문 5-7절에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해산해서 강보로 싸서 말 구유에 뉘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 말하면 영원전부터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의 복중을 통해서 인간의 몸(인성)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있을 곳이 없어서 말 구유에 예수님을 강보로 싸서 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내놓으시고 이 세상에서 제일 낮은 자리인 말 구유에까지 낮아지셔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부터 고난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세상에 출생할 때에 말 구유에서 출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뉘일 자리가 없어서 말 구유에 뉘였습니다. 이렇게 고난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극히 낮은 자리로 고난을 당하시면서 오셨습니다. 탄생하실 때부터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란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다 자기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알지 못해서 내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부 자기 이기주의, 자기 중심 생활, 자기 안일주의에 빠져 구주가 왔으나 구주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처럼 이기주의, 안일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3.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함

본문 8-11절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구주가 났는데 곧, 그리스도 주시라고 전해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는 그 때에 천사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제일 처음 알려주었습니다.

왜 목자들에게 제일 처음 알려주었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알려주지 아니하고, 들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제일 처음 구주가 탄생하신 것을 알려 준 것을 보면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구주가 오시길 늘 기도생활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밤에 밖에서 기도 생활을 많이 하면서 심령이 늘 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령이 늘 깨어 있는 사람, 늘 기도에 힘쓰는 사람, 성경 말씀을 읽고 구주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제일 먼저 구주가 오신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심령이 잠자고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은 구주가 왔어도 모릅니다. 밤에 들에서 양을 치며, 기도하며, 구주가 오기를 기다리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주가 탄생했으니 너희는 빨리 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가서 보아야 합니다. 가서 보면 강보에 싸서 뉘인 아기를 볼 것인데, 그 강보에 싸인 아기가 구주가 된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알기만 하고 가만히 있지 말고, 가보면 확실한 증거가 있을 것이니 구주가 난 것을 안 다음에는 “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보는 생활, 거기에
도달하는 생활, 실천하는 생활 등 그 세계에 들어가 보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13절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라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천군 천사가 공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본문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찬송의 내용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을 가르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십자가 못박혀서 피흘려서 죽으실 목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보낼 수 없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려고 죽일 수 없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즉 택한 백성들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마귀의 세력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성부께서 내놓을 수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으셔서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시며 구속사업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늘 보좌를 내놓으시고, 캄캄한 죄악의 세상, 환란과 고난이 가득 찬 세상에 질그릇과 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는데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늘나라 영광이 충만한 그 자리에서 이 세상에 오신 것만 해도 큰 것인데, 또 당신이 만든 피조물인 이 질그릇과 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은 얼마나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당하시는가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김치 항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33년 동안 질그릇 노릇 할 수 있겠습니까? 질그릇 노릇을 1년만 해도, 한달만 해도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 질그릇 생활을 33년 동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지극히 낮아지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질그릇이 되어서 33년 동안 고난당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질그릇이 되어서 33년 동안 이런 고난을 당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질그릇 가운데 제일 낮은 질그릇입니다. 좋은 질그릇이 아닙니다. 제일 낮은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택한 백성을 구원해내는 일, 당신의 사랑을 모든 택한 백성에게 주는 일,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란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기뻐하심을 입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죄 값으로 사형 받게 된 사람과 같았는데 그런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구주가 오셔서 죄를 사해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조금 있으면 다 사형 받아서 멸망 받을 자인데, 구주께서 거기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대신 죽으시면서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또 해
방을 시켜주셨습니다. 즉 죄와 마귀와 사망의 감옥에서 석방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히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고, 죽었던 영혼은 살아나서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예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가 되어서 예수님과 연결된 생명의 생활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쁜 생활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영적 평화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 평화를 누린 사람이 구주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여 자기 심령에 영적 평화가 있으며 항상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와 더불어 평화할 수 있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할 수 있습니다. 

4.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나심을 보고 전함

본문 15절에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이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가서 보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속히 실행하는 것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들은 다음에는 자기만 알고 있지 말고 속히 그 소식대로 그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가서 만나보는 것입니다.

본문 16-17절에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이렇게 우리에게 말했다”하며 구주가 난 것을 전했습니다. 자기만 알고 있지 말고, 구주가 난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전파할 때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가 체험하고 전파해야 한다.

본문 18-20절에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구주가 오기를 기다리는 생활, 늘 깨어서 기도하는 생활,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하는 생활, 기쁜 소식을 들은 다음에는 빨리 가서 보고 예수님을 전하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누가복음 1:1-44 세례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세례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누가복음 1:1-44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22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25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42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요한이 다 기록했는데, 본문 3절에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라고, 이 누가복음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써 보냈습니다.

데오빌로 각하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데, 그 각하에게 누가복음을 써 보냈습니다. 사도행전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는 뜻인데, ‘데오’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빌로’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 모든 자에게 보낸 편지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각하’라고 한 것을 보면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 누가복음을 보냈습니다.

본문 4절에,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데오빌로가 이미 믿는 사람이고 많이 배운 사람인 모양인데, 이는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 믿고 배운 일에 그 확실함을 가지게 하려고 이 편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이라도, 또한 이미 배운 사람이라도 더 확실하게 깨닫게 하려고 이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우리도 더 확실하게 증거를 받기 위해서,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1. 세례요한의 출생

요한의 아비 사가랴의 신앙

본문 5-7절에,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라고 했습니다. 유다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엘리사벳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사가랴라고 하는 제사장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비야 반열에 속했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물 네 개의 반열로 조직을 했습니다. 한 반열에 여러 사람씩입니다. 그래서 이십 사 반열을 조직하고 순번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순번이 돌아오면 한 주간씩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루 네 번씩, 아침에 세 번, 저녁에 한 번 제비를 뽑아서 순번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한 때는 아비야 반열에 사가랴라는 하는 사람이 제비 뽑혀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하는 때였습니다. 이 사가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좋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경건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수태하지 못해서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본문 8-10절에,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가랴라는 제사장이 제비뽑은 뒤 자기 당번일 때에 성전에 들어가 제사하면서 분향을 했습니다. 그때 모든 성도들은 밖에서 기도했습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하고 있고, 백성들은 밖에서 기도함으로 협력했습니다. 제사장만 하는 게 아니고 또 백성만 하는 게 아니고 온 백성들이 기도해 줌으로 협력하고, 참예하고,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하고, 제사장이나 백성이 하나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 잘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세례요한을 낳게 하심

본문 11-13절에,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그 제단 향단 우편에 나타났습니다.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천사가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나이 많도록 수태를 못해서 아이를 못 낳았는데, 지금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인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네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총애’라는 뜻입니다. 총애라는 말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요한은 세례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나게 하셨고 예수님의 앞잡이가 되게 만드셔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할 길을 예비하게 하시고 예비한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보내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가랴 부부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세례요한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분명히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에게 아이를 낳게 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이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나실인으로 세례요한을 낳게 하심

본문 14-16절에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고’, 세례 요한은 ‘주 앞에 큰 자’가 되게끔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큰 자가 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소개하는 그 직분을 맡은 세례요한은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마시지 말라고 했을까요? 민수기 6:1-4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라고 했는데, 이러한 나실인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나실인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들인데, 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일생동안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들게 하기 위해서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전부 나실인입니다. 우리도 전부 다 하나님 앞에 바쳐진 자들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4:4에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기 23:19에 보면,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고 하시며, ‘하나님께 바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께 바친 자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입니다. 바쳐놓아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피로 값 주고 산 몸인 우리입니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산 몸이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놓고 나가는 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께 바쳐져서 나갔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술을 마시지 아니함은 정신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려지고 모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정신을 똑똑히 가지고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바로 하는 모습, 이 확실한 신앙양심을 써서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이 곧 엘리야

본문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했는데,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권능으로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4장에 보면 ‘말일에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하는 말을 보고 바리새교인들은 ‘승천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예언한다’, ‘옛날 엘리야가 다시 온다’ 이렇게 가르쳐왔고 그 말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세례요한이 말라기에서 말한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말은, 바리새인들이 바라고 있는 엘리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리새교인들이 알고 바라는 그 엘리야는 주전 800년 경에 승천했는데, 그 옛날에 있던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고,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14절에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입니다.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온다 합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다’라고 했는데, 엘리야라는 말은 옛날의 엘리야가 아니고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다는 말입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엘리야의 심령은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엘리야의 심령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다 돌리는 그런 역할을 세례요한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엘리야로 온 것입니다. 엘리야의 능력으로 죄를 분별할 줄 알고 죄를 회개시키고 하나님께로 돌리는 능력, 그것을 가지고 세례요한이 왔습니다.

마음을 돌려서 인륜을 바로 세우는 구원운동

말라기 4장에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리고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린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4:5 -6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식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엘리야의 할 일입니다. 말하자면 인륜을 바로 세우는 일, 아들의 아버지가 원수가 되어 있었지만 화목 시키는 일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 돌리고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리는 일인 것입니다.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그런 가정은 부자간에 여러 가지 마귀의 시험이 많기 때문에 부자간에 화목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륜이 전부 파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윤리, 신과 인간 사이의 윤리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범한 것은 행위계약을 어긴 것입니다. 아담이 행위계약을 범했습니다. 우리 죄로 인해서 하
나님과 원수가 되었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인륜 관계도 바로 섰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로 돌아오고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시어머니의 마음은 누구에게로 돌아갔겠습니까? 며느리에게로 돌아갑니다. 며느리의 마음은 시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선생의 마음은 제자에게로 돌아가고, 제자의 마음은 선생에게로 돌아갑니다. 윗사람의 마음은 아랫사람에게로 돌아가고 아랫사람의 마음은 윗사람에게로 돌아가는, 인륜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운동의 목적입니다.

천륜관계가 정상화되고 인륜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운동입니다. ‘하나님과만 바로 하면 된다, 사람에게는 바로 안 해도 된다’ 하는 이것은 고르반 사상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구원을 통해 볼 때 정상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도 바로하고 사람에게도 바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정상적인 구원운동입니다.

본문 18-19절에,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이렇게 천사가 말하니까, 사가랴가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도 나이 많고 아내도 나이 많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천사가 대답하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섰는 가브리엘이라”라고 했습니다. 미가엘은 전쟁을 하는 천사이고 가브리엘이라는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전쟁할 때는 미가엘이 나오고, 좋은 소식을 전할 때는 가브리엘이 나왔습니다. 가브리엘이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벙어리가 된다

본문 20절에,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고 하셨는데,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벙어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왜 벙어리가 되었습니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벙어리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소경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아서 영적 벙어리가 된 성도가 많습니다. 벙어리가 되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최권능 목사가 “예수 천당!”하며 다닐 때에 어떤 젊은 사람들에게 “예수 천당!”이라고 하니까 “나는 신학생입니다”라며 평양 신학교 다닌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목사가 “벙어리 신학생이 뭣하겠느냐!”라고 했답니다. 전도를 안 하면 벙어리 신학생인 것입니다. 여기도 벙어리 신학생 왔을 것입니다. 벙어리 집사들, 벙어리 권찰, 벙어리 교인들 ... , 벙어리 아닙니까?

나가서 말해야 됩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는데, 왜 전하지 않는가 하면 믿지 않아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랑이가 내려오는 것을 확실히 알면 가서 호랑이 내려온다고 소리 칠 것 아닙니까? 또 전쟁이 난 걸 확실히 알면 나가서 전쟁 났다고 소리 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전쟁이 났다는 것을 믿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믿으면 벙어리가 안 됩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소경이 됩니다. 믿으면 소경이 눈을 뜹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 군대가 와서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 소경되게 하셨습니다.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려 하니까 하나님께서 소경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눈을 뜹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이 믿고 순종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니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믿으면 눈 뜨고, 안 믿으면 소경되고, 믿지 않으면 소경되고 벙어리가 됩니다. 벙어리 신자, 소경 신자 많이 있습니다. ‘벙어리 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벙어리 개’는 자기 욕심만 채우다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의 수태와 전도로 낳은 아들

본문 21-13절에,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사가랴가 벙어리로 지내며 직무의 날을 마치고, 그 일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직무의 기간이 한 주간이었습니다.

본문 24-25절에,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나서 다섯 달 동안 숨어 있다가,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 즉, 아이를 낳는 날에 “인간의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아이를 못 낳으면 부끄러움을 당하던 때입니다. 여기에 대한 신령한 뜻은, 예수 믿는 사람이 전도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하면 믿음의 아들을 낳는 것과 같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구역 보고받을 때 “전도 몇 사람 했느냐?”, “나는 몇 사람 했습니다”라고 다들 말할 때, 전도 하나도 못한 사람은 부끄러울 것입니다. 전도부인들, 견습생들 전도도 하고 심방도 하십시오. 몇 달만 있으면 보고받을 것입니다. “금년에 몇 사람 했느냐?” 물을 때에 어떤 사람은 몇 사람 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한 사람 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한 사람도 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열 사람, 스무 사람 이렇게 많이 했는데, 한 사람도 못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갈 때에 얼마나 부끄러울 것입니까? 한 달란트 맡은 자, 그 달란트 장사 안하면서 벙어리노릇 하지 말고 나가서 전하십시오. 전해서 다른 사람을 일 년에 몇 사람씩 하나님 앞에 인도해야 됩니다. 그것이 달란트 장사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주인 앞에 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부끄러운 일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 받는 것입니다. 게으른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아들을 많이 두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

가브리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함

본문 26-29절에,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잉태된 다음 여섯 달 후에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찾아갔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를 찾아가서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 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했습니다. 그 처녀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하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30-33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걸을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리아에게 네가 낳는 예수님은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어 그 왕권으로 왕 노릇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세무궁토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란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로 인한 영영한 멸망,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구원하려고 보내셨습니다. 또 세례요한은 왜 보내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구원할 예수님의 앞잡이 노릇을 하라고,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에 그것에 대한 예비가 있어야 되므로 예비시키려고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아이 낳을 수 없는 그 사가랴 부부에게 세례요한을 낳게 하셨고, 또 이름도 하나님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보내 주셔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 나게 하시려고 마리아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라”말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자이다’라고 하시고, 자기 백성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왕권을 가지시고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리니’ ‘저희가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이니’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왕이십니다. 우리에게 왕이 되셔서 저희를 통치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신 그리스도

본문 34-35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라며 자신은 처녀인데 어떻게 아이를 잉태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하며 성령으로 잉태한다고 했습니다. 남녀 간의 부부생활로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마리아를 잉태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한다고 하셨는데, 왜 성령으로 잉태하게 했을까? 보통 사람 생식과 같이 부정모혈로, 남녀 간의 결혼생활로 낳게 해도 되는데, 그 방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게 해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처녀 잉태하게 했습니까? 죄가 없이 낳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자의 영을 그리스도에게 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사람처럼 부정모혈로 낳으면 죄가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다 ‘유전죄’가 있는데 일반 생식으로 낳으면 다 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방법대로 한 것이 아니라,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새롭게 잉태를 시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고, 둘째 아담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하면,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십니다.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된 잉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마리아가 낳았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인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셔서 성령으로 마리아를 잉태하게 하신 건데, 나실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십니다.

처녀 마리아의 죽음을 각오한 신앙

본문 36-38절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고 했습니다. 친척 엘리사벳이 아들이 없었는데 이제 늙어서 수태지 못하는 여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했다고 합니다. 이미 여섯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나니”라며 마리아가 대답하기를, “주의 계집종이로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잉태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했는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이 너를 덮어서 잉태하게 할 것인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니까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신앙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인간의 생식 방법, 인간의 모든 생리적 방법을 믿은 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말씀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방법은 안 될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도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면, 구약 법에 처녀가 잉태하면 돌로 때려죽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22:23-24에 보면, ‘처녀가 잉태하면 돌로 때려 죽여라’라고 했는데, 마리아는 다 알면서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며 살고 죽는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긴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든지 안 죽든지, 하나님께서 안 죽게 하시면 안 죽을 것이고, “이미 하나님께 바친 몸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주의 뜻만 이루어지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라고 한 신앙입니다. 안 죽는다고 해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비방하겠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이 비방하든 말든 또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돌에 맞아 죽든 안 죽든 다 하나님께 맡기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는 얼마나 좋은 신앙입니까? 죽어도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부끄러움을 당해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얼마나 좋은 신앙입니까?

남자들은 무엇입니까? 남자들도 계집종입니까? 여기에 계집종이 나왔으니, 남자들은 남종이라 해야겠습니다. “주의 남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여자들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떠한 이유를 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죽으면 어떡합니까?”, “다른 사람이 얼마나 멸시하겠습니까?”, 이런 것은 다 신앙이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멸시 받든지 안 받든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죽어도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39-44절에,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마리아가 문안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 엘리사벳이 복중에서 세례요한 이 뛰놀았다고 했는데, 그것을 보면 복중에 있는 아이도 영혼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친이 온 것을 알고 뛰놀았는데 성령으로 알아서 뛰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