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 동행함
누가복음 2:41-52
누가복음 2:41-52
41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서 동행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과, 다시 찾아야 됨을 알려주고, 다시 찾은 다음에는 동행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
예수님께서 열두살 났을 때에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명절인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돌아올 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셨습니다. 부모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하룻길 즈음 간 후, 친척과 아는 자 중에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장날에 예수님을 잃음
예수님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는 명절 지키다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명절은 복잡하고 뒤숭숭한 날입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복잡하기 쉽고, 은밀한 골방을 잃어버리기 쉬운 때가 명절입니다. 세상이 많이 들어오고, 육신의 것이 많이 오고, 마음이 산심되고, 육체로 기울어지기 쉽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 명절이 위험한 날입니다. 장날이 위험한 날입니다. 장날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천로역정에 예수님을 장날에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장날에 장 본다고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사람이 많이 왔다 갔다 하고, 그날에 예수님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시골 도시는 모두 장날이 있는데, 우리 기도원 가는 길에 모란시장이라고 있습니다. 아주 복잡하던데 5일에 한 번씩 장이 선다고 합니다. 그런 장날에 예수님 잃어버리기 쉽고, 명절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은밀한 골방 가운데 계시고, 은밀한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의식적인 제사를 드렸기에 잃음
또 다른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는데 의식적으로 지켰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양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유월절 양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의 의식적 제사입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뜻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의식적인 제사로만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중심 알맹이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알맹이가 빠진 의식적 예배만 드리면, 그것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알맹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진정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거저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드린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식만 잘 지내면 예배드린 줄 압니다. 강단에다가 꽃을 많이 갖다 놓고 그러는데, 어떤 교회는 꽃을 굉장히 많이 갖다놨더랍니다. 목사님 얼굴만 겨우 보이게 꽃으로 둘러쌌더랍니다. 그 꽃구경하느라 말씀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교는 반시간도 못하는데, 그것도 성경은 보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 세상얘기, 무슨 책본 얘기, 거저 성경 본문만 봐놓고, 재미나는 얘기만 하고 관둔다고 합니다. 그런 의식적인 예배, 의식적인 설교, 이런 가운데서는 안 됩니다.
하여간 알맹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드려져야 되고, 영을 드려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없이 의식적인 예배만 드리고 간 것이 마리아와 요셉이 이와 같은 가운데 들어간 이유입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 알다가 잃음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고 내려갔기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계시겠거니 생각하고 거저 내려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내려가서 찾아보니까 없습니다. 친척과 아는 자들과 동행했던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니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있겠거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는 사람 중에 같이 있겠거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친척 가운데 같이 있는 줄 알아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 안 계십니다. 요즘 신자들도 예수님께서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그저 “같이 교회가자”, “가서 예배드리자”, “예배드렸으면 가자”하며 돌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잃어버립니다.
2. 예수님을 잃으면 근심과 슬픈 마음이 들어옴
예수님이 같이 계신 줄 알고 있다가 가보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근심이 들어왔습니다. 본문 48절에,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하며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근심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기쁨이 들어오고, 예수님을 잃어버리
면 근심이 들어옵니다. 속에 근심이 들어오고, 만족이 없고, 또한 슬픈 마음이 생깁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는 슬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갖다 주어도 그것으로 만족이 없습니다.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속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모든 것을 다 갖다 주어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3. 예수님을 찾는 방법
회개하고 돌아가는 신앙
예수님을 찾는 방법 첫째는, 회개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멀리멀리 떠나갔는데 얼마나 갔는가? 하룻길이면 한 백 리 입니다. 또한 찾느라고 이사람 저사람 물어보고 찾느라 하루 걸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하룻길을 올라갔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인지 생각하고 찾아서 회개하고 다시 그 자라에 가야됩니다. ‘왜 떨어졌는가?’, ‘무얼 하다가 떨어졌는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그것을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선 옛날의 신앙, ‘어떻게 받았느냐?’, ‘어떻게 들었느냐?’, ‘어떻게 예수님을 섬겼느냐?’, ‘어떻게 주님으로 더불어 동행했느냐?’, ‘어떻게 즐거워했느냐?’, 그 신앙을 향해서 다시 회개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찬송가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하고 돌아오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찾는 신앙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와서 어디 가서 찾았습니까? 성전에 와서 찾았습니다. 본문 46-47절에,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데, 오늘날의 신령한 뜻은 영적 성전을 가리킵니다. 영적 성전,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예수님을 만나는 곳 입니다.
영적 성전을 찾아서 들어갈 때에, 그 성전은 은밀한 골방인 것이고, 그 성전은 거룩한 곳이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런 영적 성전을 찾아서 들어가니까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은밀한 골방을 찾아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골방에 계시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그 은밀한 곳에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 성전 입니다. 영적 성전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와주시고 값아 주십니다. 그런 영적 성전을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다시 찾아야 됩니다. 다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찾는 신앙
성전에 들어가 보니까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생들 중에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강론할 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치려고 하고, 말씀대로 믿으려고 하고, 말씀대로 바로 서려고 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해야 하고, 되새기고 묵상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으로 받고, 성령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즐거움이 되고, 그 말씀이 생명이 되고, 그 말씀이 자기의 전체가 됩니다.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서 멀리 떠났던 것을 회개하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책을 선반 위에 얹어놓고 한 주간 한 번도 안 보고 있다가, 주일날이 되면 먼지를 툭툭 털어서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주중에는 성경 한 번도 안 보다가 주일이 되면, “아, 벌써 주일이 되었구나”하며 성경책 위의 먼지를 툭툭 털어서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성경을 봐야 합니다. 밥은 매일 먹으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안 먹습니까?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되새기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려고 애를 쓰고, 말씀대로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본문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하시며,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계셔야 할 줄을 모르고 찾아다녔냐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든지 우리도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그곳에서 말씀을 강론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을 가져야 겠습니다.
4. 예수님을 찾은 뒤 동행하라
예수님과 같이 한가지로 내려가라
영접한 다음에는 동행했는데, 본문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동행하셨다고 했는데, 우리도 한가지로 내려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한가지로 집에 돌아가는 것, 한가지로 나사렛 고향에 내려가셨습니다. 요즘 구정이라 고향 가는 사람 많다고 하는데, 고향 갈 때에 어떻게 가야하겠습니까? 예수님과 한가지로 가야합니다. 한가지로 못 갈 바에는 가지 마십시오. 고향에 갈 때에 왜 그리 여러 번이나 가려고 합니까? 구정에, 추석에 또 무슨 때에 가려고 합니까? 그것 다 풍속 습관 쫒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사무실 직원들은 일 년에 한 번 가보게 합니다. 저는 우리 고향인 이북에 가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더 좋은 고향에 가려고 합니다. 더 좋은 고향 ... 물론, 앞으로 이북에 있는 고향에 가서 교회 세우게 해주시면 교회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교회 세우는 것이지 뭐 고향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예 목적을 더 좋은 고향 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저께 목욕탕에 갔었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고향 가려하느냐 물으니까 고향에 안 간답니다. 그래서 제가 더 좋은 고향에 가야 된다고 더 좋은 고향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희들끼리 “더 좋은 고향이 있댄다”라고 하며 저희들끼리 전도를 하더라구요. 세상 고향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고향에 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언제든지 한가지로 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마음이 고향에 다 가있고, 사람들에게 가있는 것은 안 됩니다. 한가지로 동행, 동거, 동락해야 합니다. 동행하는 신앙, 예수님과 언제나 한가지로 가는 것에 언제나 힘을 써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모시고 다녀야 됩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신 후에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순종하며 받들어라
한가지로 내려가신 예수님은 부모를 순종해서 잘 받들어 나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아야 됩니다. 순종하는 것을 본받아야 되고, 받들어 나가는 것을 본받아야 됩니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는데, 하나님께 순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받들어 나가야 합니다. 순종하고 나서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순종함으로 받들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도 교회의 인도자에게 순종하고 잘 받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잘 되어 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나갑니다.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기주의로 나가는 신앙을 가지지 말고, 명예영광주의로 하지 말고, 자기는 그저 죽어지고 순종하여 받드는 일
만 잘하면 됩니다. 그게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저께 어떤 젊은 목사 하나에게 앞으로 잘 좀 해나가라고 하니까, 집회할 때에 자기에게 기도도 좀 시키고 내세워줘야 교인들도 자기를 인정하고 받들어주겠는데, 한 번도 기도 안 시키니까 자기를 안 받들어주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석남 목사가 옆에 있다가 “젊은 목사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그들을 다 내세워주겠느냐?” 하며 그 정신을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들이 이삼십 명 있다고 하면, 어떻게 전부다 내세워주겠습니까? 내세워주면 받들어나가고, 안 내세워주면 안 받들어나가겠다 하는 그 정신부터가 잘못 되었습니다.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무슨 내세워주는 게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순종하여 받드는 것 뿐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다 쇠하고, 낮아지고, 죽고, 없어지고, 그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만 즐거워하고, 진리가 전파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잘 되어 나가는 것으로만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경회 같은 때에는 기도하면 은혜가 될 사람을 시켜야 됩니다. 기도할 줄을 몰라서 딴소리만 하고, 그러면 대중 앞에서 은혜가 안 됩니다. 기도할 때에 은혜가 될 사람을 시키느라고 지금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모조리 안 시킨다고 뭐라고 합니다. 사경회 때 모조리 시키려고 하면, 목사가 한 몇 백 명 되는데 그 가운데 기도 은혜 있게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경회 때 은혜 받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 내세워주는 게 목적입니까? 순종하여 받드는 것이 목적이지,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는 쇠하여져도 하나님의 일만 잘 되고, 하나님의 일만 잘 받들어나가고, 순종하여 받드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그런 모습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한 늘 시험에 들고, 결국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 마음,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저는 소년 때에, 청년 때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교회에 나가는데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한 번 시키나, 무슨 결혼식이나 잔치집 가면 누가 알아주지 않았고, 밥 한 술 주면 먹고 안 주면 관두고 그저 옆에 있다가 옵니다. 그렇게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 섭섭한 것이 없습니다. 한 반에 장로 딸, 장로 아들, 누구 아무개 다 알아줘도, 저는 우리 가정이 안 믿으니까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가집에 가면 알아줍니다. 먹을 일에나 가지, 상가집에는 사람들이 잘 안 옵니다. 그래서 상가집에 가서 찬송가를 불러주고 하면 좋아해서 매번 갔습니다. 또 병난 집에 가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얼마든지 봉사하고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순종하여 받드는 생활이 예수님의 생활입니다.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생활입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목숨을 희생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섬김을 받으려하는 생각을 그만두고 남을 대접하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섬기며, 순종하며 받들어나가며 예수님을 닮아나가는 생활을 해야되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라나라
본문 52절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났다는 것은 영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키가 자랐다는 것은 몸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영이 자라나고 몸도 자라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믿는 일 잘하고 제대로 하면서 자라나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아가고 칭찬을 받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로마서 14:18을 보면,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기뻐하심을 받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이렇게 자라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 영이 자라나고 다른 것, 키도 자라나고 몸도 자라나야 합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육신의 것, 세상 것도 자라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자라나면서 외부적인 것도 자라나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영이 자라나지 못하면서 외부적인 것만 자라나는 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은 실력은 자라나지 못하고 껍데기만 자라난 것입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외부적인 것이 자라나야 강해지고 모든 것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영은 자라나지 못했으면서 외부적인 것만 자라나면 바람에 튕겨서 날아갑니다. 영적 실력은 닭 한 마리 만큼밖에 없는데, 몸뚱이는 소만큼 커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힘은 닭 한 마리 만큼밖에 없는데, 몸뚱이가 소만큼 커졌다면 힘이 없어서 바람 불면 날아갑니다. 비실비실하다가 날아가 버립니다. 닭의 다리에 소를 갖다 놓으면 그 다리가 똑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이 자라나면서 몸도 자라나야 합니다.
몸이 자라난다는 것은, 어린사람들의 경우는 육체가 자라나는 것도 되지만, 장정들은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다른 것도 자라나야 함을 말합니다.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교회도 자라나야 되고, 가정도 자라나야 되고,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다른 것도 자라나야 됩니다. 영이 자라면서 구역도 자라나고, 반장을 하면 그 반도 자라나고, 영이 자라나면서 다 자라나야 합니다.
영이 자라나지 않았으면서 아이들만 많이 모아다가 놓은 것은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요새 주일학교 하는 교회들을 보면, 영적 면은 길러나가지 못하고 그저 아이들만 많이 모아다 놓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만 많이 모아다 놓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얼마 있어서 자라고 나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다 세상으로 나갑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장년부로 올라오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그것이 왜 그러느냐 하면, 영이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이 자라
나면서 주일학교도 부흥이 되고, 교회도 점점 부흥이 되게 해놓으면 실력이 있으니까 바람이 불어도 안 날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별을 못하고, 미련하고 지혜가 모자라서, 여러 가지 풍조에 밀려서 다 밀려나갑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몸이 자라난 것은 강건합니다. 그러나 영은 못자라나고 몸만 자라는 것은 바람 불면 다 날라갑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했습니다. 영이 자라나면서 집사도 되어야 하고, 영이 자라나면서 장로도 되어야 하고, 영이 자라나면서 목사도 되어야 합니다. 영이 못 자라나면서 집사 된 것은 가다가 그만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장로도, 영이 못 자라난 사람이 장로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목사도, 영이 자라나지 못한 사람이 목사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자라나서 안 날라가는 사람, 영적 실력을 가지고 다 이길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정복해나가는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자라나고, 예수님과 같이 지혜가 있고, 예수님과 같이 순종하여 받드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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