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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3일 금요일

요한복음 21:15-19 예수께서 베드로를 다시 세워 주심.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께서 베드로를 다시 세워 주심
요한복음 21:15-19

21: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하셨다. 

21:16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쳐라." 하셨다. 

21:17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근심이 되어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말씀하기를 "내 양들을 먹여라. 

21: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겠고,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셨다. 

21: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 떠나간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많이 보고 심부름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심판받는 자리에 가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택하여 불러주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금까지 길러주셨는데 베드로가 예수님
을 배반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다시 세워 쓰시려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 잡을 때에 찾아가셨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지금까지 양육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지만 우리는 쉽게 배반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죽은 신앙이 되면 생명의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의 길로 갔을 때에 감사함으로 순교를 당할 만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환경을 당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환경을 실제 당해보면 믿음 없는 사람은 다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예
수님을 따라가겠다”고(마 26:33) 말한 베드로가 믿음이 좋은 것 같았지만 결국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2.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회개하는 자

본문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가 예수님의 첫 마디입니다. 왜 “이 사람들 보다”라고 하였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경쟁을 해서 네가 나를 더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죽는데 까지 주를 따라가겠나이다”라고 주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지만 네가 더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버린다고 해도 너는 버리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나를 부인한 것은 더 사랑하지 못해서 부인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언제나 회개를 재촉하십니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죄를 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3에 있는 음란과 방탕과 술 취함과 쟁투와 시기와 이런 것 등을 다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욕, 정욕, 사욕 등입니다. 물욕으로 기울어지고, 정욕으로 기울어지고, 사욕으로 기울어졌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왜 기도가 안 되는가 하면 죄로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치 못한 것이 아니라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죄악이 가로막아서 하니님과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과 직통합니다. 죄가 가리워져서 하니님이 멀어졌습니다. 또 기도가 상달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와서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 주를 멀리 떠났다가 이제옵니다”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떠났던 것, 주님을 뒤에다 세우고 세상으로 나갔던 것,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것, 이기주의, 물질에 대한 욕심, 정욕, 사욕 등을 회개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가페 사랑을 해야 하는데 아가페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또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산제사 드리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한 것, 순종 못한 것,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많습니다. 욕심이 많습니다. 속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음란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이기주의가 가득 했습니다. 고집이 가득했습니다. 예수 중심이어야 하는데 육신 중심입니다. 그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후 닭이 울 때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회개 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닭이 울 때 마다 “주님이여 제가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며 매일 아침 울면서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육신으로 기울어졌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을 아가페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좀 더 높고 깊은 사랑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시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을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그 사랑가운데에 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

요한복은 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였고 23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와서
저와 함께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와서 동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동고 동락하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십계명부터 지켜야 합니다. 모세의 계명은 613가진데 계명의 강령이 십계명입니다. 즉 계명의 중요한 대지들이 십계명입니다. 모세의 계명은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계명으로 죄를 깨달아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율법주의이고,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폐법주의입니다. 요새 폐법주의가 많이 나와서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았으니 죄인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우리는 다 의인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죄인이라 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해주셨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이젠 다 의인이다”하며 “죄인이라고 하지 말아라” 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미국에도 나왔습니다. 구원파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한쪽은 맞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해주셨으니까 죄가 없는 것은 맞습니다. 또 예수님이 의를 입혀주셨으므로 의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또 가라사대”가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이 무엇을 가지고 이기셨습니가? “또 가라사대”로 이기셨습니다. “또 가라사대”가 있습니다. 한쪽만 보지 말고 다른 성경을 또 보아야 합니다. 다른 성경에는 계명을 어기면 죄라고 하였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징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은 잘못된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죄 사함 받았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계명을 어기고 나가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죄
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은 구원을 받으려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감사해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십계명 가운데 제일 중요한 계명이 안식일을 지키는 4계명입니다. 4계명은 십계명 가운데 제일 중심계명이고, 제일 중요합니다. 구약에도 안식일을 너희 표징으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겔 20:20). 또 하나님이 엿세동안 일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므로 하나님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창 2:3). 하나님이 안식을 주시는 날이고 생명과 은혜를 주시는 날입니다. 주일에 일하면 안됩니다. 매매하지 말고, 주일에 시험치지 말고, 주일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생명 내놓고 지켜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가페 사랑을 하도록 언제나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조금밖에 사랑 못합니다. 자녀보다도 하나님을 덜 사랑합니다. 부모보다도 하나님을 덜 사랑합니다. 돈 보다 하나님을 덜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어기고 다 딴 길로 갑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면 사랑이 우상입니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이 우상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도 가고, 정성도 가고, 물질도 가고, 아낌없이 모든 것이 다 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모든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잘 섬깁니다. 예배시간 늦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늦어지겠습니까? 예배시간 전부터 일찍 나가서 준비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첫째는 회개이고 둘째는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더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아니하고 죽는데 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했지만 네가 부인했는데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양을 치는 자

본문 16절에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더 사랑하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내 양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양을 치는 것은 양을 잘 먹이고, 인도하고, 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어린양을 먹일 수가 있습니다. 어린 양이라는 것은 유치부 아이들, 유년부 아이들, 중고등부 아이들. 또 나이가 많아도 신앙이 어린 사람들, 즉 믿음이 초보적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야만 양을 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 있는 아이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잘 양육하려면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양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육 할 수 없습니다. 괜히 입으로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어린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두번째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은 아가페 사랑으로 물어 보셨습니다. 한국말로는 사랑이 다 같지만 헬라어로는 네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사랑이고, 휠리아 사랑은 친구 간의 사랑이고, 스톨게 사랑은 동족간의 사랑이고, 에로스 사랑은 남녀 이성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최고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예수님이 물어보실 때 베드로는 휠리아 사랑으로 답변을 했습니다. 즉 아가페 사랑은 못하지만 “친구간의 사랑은 내가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번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네가 휠리아 사랑을 하느냐?로 물어보신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못한다고 네가 두 번 답변을 했지만 그러면 휠리아 사랑은 하느냐?고 세 번째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실 때에 에누리 해서 휠리아 사랑을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 휠리아 사랑을 하느냐? 하니까 에누리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휠리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 친구간의 사랑인 휠리아 사랑을 하느냐? 동족간의 사랑인 스톨게 사랑을 하느냐? 물론 남녀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 하여야 양을 칠 수가 있습니다. 양을 칠 때 자기부터 먹어야 됩니다. 자기가 양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양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자기부터 꼴을 먹을 수 있고, 자기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자기부터 자라날 수 있고, 자기부터 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에게 맡긴 양을 칠 수 있습니다. 즉. 부모, 형제, 자녀, 친척 등이 다 자기에게 맡긴 양입니다.
이번 추석에 친척 집에 가서 양을 먹이고 왔으면 하나님께 합격이고, 양을 먹이지 못하고 떡만 먹고 왔으면 불합격입니다. 부모, 형제, 친척들을 일년에 한번 만나더라도 다 자기에게 맡긴 양입니다. 자기에게 맡긴 양이 많이 있습니다. 또 자주 만나는 친구들도 다 자기에게 맡긴 양입니다. 양을 먹여야 합니다. 양을 먹일 때에 누구부터 먼저 먹여야 합니까? 자기부터 먼저 먹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맡긴 양을 먹여야 합니다. 또 자기에게 맡긴 멀리 외국에 있는 양들에게는 편지로 먹일 수 있고, 전화 할 때에 성경 말씀을 해 주므로 먹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성경 말씀을 해 주어야 합니다. 전화를 할 때에 성경을 미리 찾아 놓고 “이 말씀을 해주어야겠다” 하고 상대방이 나오면 잘 있었냐? 하고 간단히 안부를 묻고 성경 말씀을 읽어주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를 따르라

본문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밀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회개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휠리아 사랑을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십자가의 밑에까지 따르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였습니 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지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어디까지든 생명 내놓고, 모든 고난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심판하는 자리, 십자가 자리 까지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안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희생이 와도, 어떠한 고난이 와도,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와도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종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서 주 앞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요한복음 21:15-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9

21: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하셨다. 
21:16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쳐라." 하셨다. 
21:17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근심이 되어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말씀하기를 "내 양들을 먹여라. 
21: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겠고,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셨다. 
21: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예수님

과거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어보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오늘날 예수님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언제나 물어보시는 줄을 알고,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 그것을 잘 살펴서,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예수님 말씀에 합당한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는 것은, ‘시몬’은 베드로이고,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아들입니다. 첫마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은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전에 말한 것을 기억시키고,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네가 안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시며,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
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보다 더욱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재촉하는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네가 과거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릴 때에도 주를 안 버리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실제로 네가 안 버렸느냐? 세 번 부인한 너니까 회개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라는 그러한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의 각주에 보면,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뜻도 있고, ‘이것들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주님은 물어보시는 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인한 것입니다. 믿음 못 지킨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 못 지킨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간 것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해서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모든 것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하는 뜻이 있는데, ‘모든 것’이라 함은, 세상 만물과, 돈 사랑하는 것과, 사람 사랑하는 것, 자기 사랑하는 것, 자기 가족 사랑하는 것, 이것보다도 ‘네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시는 것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사랑하느냐?” 다른 모든 것 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못하느냐?” “얼마나 더 사랑하느냐?”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말로만 사랑하느냐?” 우리가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조금 사랑하느냐?” “많이 사랑하느냐?” “더 많이 사랑하느냐?” “최고의 사랑을 하느냐?” 이것을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사랑을 했다고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데에도 단 마음으로 나갔을 것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습니다. 죽을까봐 부인했는데, 그것은 예수님보다는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것을 물어보시는 것인데, 우리가 어느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나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가 삼키어지고,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 하겠는데, ‘얼마나 사랑하느냐?’ 이것을 예수님께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얼마나 사랑할까?’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독자보다도 더 사랑했고, 모든 재산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롯과 분쟁할 때에 재산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고, 이렇게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마리아는 나드 300 데나리온 짜리의 가장 값진 향유를 바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갖다 부었는데, 그것은 사랑으로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불평을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다니긴 따라다니는데, 제자이긴 제자인데, 마리아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신자가 많습니다. 대부분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쏟아 붓는, 자기의 모든 전부를 다 쏟아 붓는, 전 재산을 다 쏟아 붓는 그런 사랑이 많지 않습니다. 마리아만큼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다 쏟아 붓는 사랑인데, 손들어 보라구요. 왜 안 듭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속에서 끓어 넘쳐 나오는 진정한 사랑,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랑, 모든 재산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랑, 독자보다도 아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랑, 그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 믿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연결되어야 됩니다. 사랑의 세계에서 살아야 됩니다. 다른 것을 다 잘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낙제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낙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진정으로 참으로 사랑을 하는 저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왜 사랑하지 못할까?’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마리아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왜 사랑하지 못하겠지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거기에 다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돈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돈 사랑하는 마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보다 돈을 앞세워 놨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이 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지 못한다.’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 두 임금 섬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서 부터 뜨겁게 올라오지 못할까?’ ‘왜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신데, 자기 남편보다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하면, 그 신랑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껍데기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만 사랑해야 됩니다. 예수님만 사랑해야 되겠는데 다른 것을 겸해서 사랑하니까, 예수님 사랑하는 것이 차차 식어지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 말 뿐입니다. 진짜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됩니다. 돈이나, 세상이나, 다른 것들 입니다.

2.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

예수님의 사랑을 알라

그러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들어가야 되겠는데, 사랑하려면, 첫째는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 몰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하늘 영광 보좌를 다 내놓으시고, 지극히 낮아져서 말구유에 탄생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입니다. 창조자, 천지 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하신 분입니다. 잠언 8장에 보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천지, 이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저기 화성에 로켓트가 가서 착륙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화성에 가려면 얼마나 멉니까? 인공위성처럼 빠
른 것도 일곱 달이 걸렸다고 합니다. 금성에는 석 달을 가야하고, 화성에는 일곱 달을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더 먼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보다 백배 더 멀리 있는 별, 만 배 더 멀리 있는 별이 있습니다. 태양계만 해도 굉장히 멀고, 태양계 같은 것이 우주에 이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고 있는데, 또 은하계 같은 게 이천억 개라고 합니다. 얼마나 먼지 한량이 없습니다. 제일 멀리 있는 별 같은 것은,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빛이 지구에 와 닿지 못한 별이 있다고 합니다. 태양에서 빛이 지구에 8분 만에 내려오는데, 그렇게 빠른 빛인데, 그런 빛이 아직까지도 지구에 오지 못했다고 하니까, 얼마나 먼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대신 죽어서, 우리를 대속해주시고, 건져주신 그 사랑,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생각만 해도 그것 참 놀랄만한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로마서 8장에는 계속해서 폭포수와 같이 쏟아내려 부어주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38-39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폭포수와 같이 내려 부어주시는 사랑, 계속해서 폭포수와 같이 내려 부으시는 사랑인데, 그 사랑에서 끊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폭포수와 같이 쏟아내려 부어주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한강보다 조금 좁은 것 같은 폭포가 있습니다. 그것이 한 오십 미터라고 하는데, 그 높은데서 떨어집니다. 그 많은 물이 계속해서 쏟아내려 부어지는데, 그 폭포 아래에 가서 폭포수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안 맞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내리 쏟는데 어떻게 안 맞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계속해서 내리 쏟아부어주는 사랑입니다. 계속 내리 쏟아 부어주십니다. 폭포수가 내리 쏟아지듯이, 쏟아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저 계속 쏟아 부어주십니다. 우리 예배당 만큼의 폭포수가 쏟아진다고 합시다. 그저 계속 쏟아 부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만큼 쏟아내려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몸 버려 피 흘려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물어주시고 건져주신 그 사랑, 우리가 받을 사형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는 살려주신 그 사랑, 폭포수와 같이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계속 쏟아 내려부어 주시는 그 사랑,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계속 쏟아 부어 주시는데, 그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떠나지 말고, 그 사랑 안에서 살면, 폭포수 아래서 사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 안에서 살면, 예수님의 사랑이 점점 깨달아지고, 또 많이 깨달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이 넘치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되고,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되는, 그런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목숨 바쳐도 오히려 부족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해서 하는 일들이, 그것이 믿는 일들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바치는 것도 그 사랑에 감격해서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서 바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봉사도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연보도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전도하는 것도 그 은혜에 감격해서 단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학생들 태우고 오는 것도 단 마음으로 감사해서 기쁘고 즐거움으로 해야합니다. 무엇이나 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라

첫째는 그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 밖에서 살면, 그다음에는 믿음이 안됩니다. 물고기가 물 바깥에 나와서 잘 하겠다고 펄떡펄떡 뛰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그래야 헤엄을 치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 밖에 나간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었어도 그 믿음이 시원치 않습니다. 믿음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얼 봉사를 한다 해도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를 시키면 나만 시킨다고
‘두두두두’ 하고, 왜 나만 시키냐고 ‘두두두두’ 하고, 두두두할 거면 그만 두십시오. 단 마음으로 할 거면 하고, 부득이하게 하는 거라면 관두라고요. 식당 밥 하는 것, 사경회 때 국수 삶는 것 단 마음으로 했습니까? 단 마음으로 했다면 되었습니다. 얼마나 단 마음으로 했습니까? “왜 나만 시키느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감격이 있는 것입니까? 안 시켜줘서 걱정인데, ‘시켜줄까?’ 하고 가까이 슬슬 돌아가다가, “이거 해라” 하면 기쁨으로 해
야하겠는데, “왜 나만 시키느냐?”라고 합니까? ‘나만 시키느냐?’라고 할 사람은 아예 그만 두십시오. 당초 처음부터 그만 두고, 처음부터 근처에 오지도 마십시오. 또 시키면 큰일 날 테니 말입니다.

3.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본문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시니 베드로가 뭐라고 답했습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린 양 먹이라는 것이 첫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년부나 유치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으니까, 초신자들인 어린 양부터 먹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양 무시하면 큰 양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어린 양들 다 잡아 죽이고, 다 내다버리면, 큰 양들은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린 양들을 잘 먹여야 합니다. 또 집안에 어린 양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 어린 양들 입니다. 자녀들, 손자들, 이 어린 양을 잘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유년부, 유치부를 잘 인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을 먹이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첫째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유년부와 유치부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어야겠습니다. 첫째로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교회에 잘 보내고, 집에서 잘 먹이고, 가정예배 드리고, 성경 가르쳐주고, 교회 잘 보내고, 어린 양을 잘 길러나가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감사해서 기쁘고 즐거움으로 어린양을 잘 먹일 수가 있습니다.

내 양을 치라

본문 16절에,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양을 치라는 것은 양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길러라.’ ‘돌봐주어라.’ 먹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는 것은 잘 기르라는 뜻도 있고, 돌봐주고, 이리가 오는 것을 막아주고, 양이 병나지 않게 해주고, 병 난 양을 잘 돌봐주는, 이런 것이 다 ‘양을 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하는 것이 양을 치는 것입니다. 병 난 사람을 잘 돌봐주고, 시험에 든 사람을 잘 돌봐주고, 약한 사람을 잘 붙들어 주고, 시험에 든 사람을 건져주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또 악한 사람을 제재하고, 못되게 돌아가는 것을 돌아가지 못하게 해놓는 그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성경말씀 가르쳐주고, 교회로 인도하고, 그다음에는 잘 쳐서 못된 데로 가지 못하게 인도하고, 교회에 안 빠지게 하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장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로도 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이 치는 것인데, 못된 데 가지 못하게 만들고, 구렁텅이에 안 빠지게 만들고, 독초를 먹지 못하게 만들고, 가지 못할 길로는 안 가게 만들고, 구렁텅이가 있고 언덕이 있어서 떨어질 데에는 못 가게 만들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잘 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쳐야 됩니다.

내 양을 먹이라

본문 17절에,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먹이라’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양 떼를 잘 먹이는 것, 꼴을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먹는 풀을 ‘꼴’이라고 그럽니다. 꼴을 잘 먹으면 살이 됩니다. 꼴을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신령한 양식을 양 떼에게 잘 먹여서, 양 떼가 강건하도록, 살찌도록, 힘이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강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잘 먹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령한 양식을 잘 공급해서, 이 양식을 먹고 양 떼들이 힘을 얻고, 또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얻어서, 자라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먹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방 가서도 먹이고, 전도할 때에도 그렇고,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먹이는 일, 즉, 교회에서는 신령한 양식 잘 먹여주는 것이 첫째입니다. 양식을 먹어서 힘이 있어야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신앙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양식을, 신령한 꼴을 교회에서 먹여주고, 교인들이 심방을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신령한 꼴로 잘 먹이고 자라나게 해야 됩니다. 강건해져야 됩니다.

4. 아가페 사랑하느냐

아가페 사랑

세 번 물어보셨는데, 첫째 번, 둘째 번은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하느냐?’ 물어보셨는데, 대답은 ‘최고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고 물어보셨으면 ‘최고의 사랑을 했느냐’고 물어본 것인데, ‘필리아 사랑을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적인 사랑, 친구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했습니까? 아가페 사랑한다고 대답했으면 예수님 마음이 편안할 텐데, 에누리 해가지고 친구적인 사랑, 우애적인 사랑을 한다고 답변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가페 사랑을 한다고, 최고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하기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양심을 쓰긴 합니다. 양심 없이 대답만 “예, 예” 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최고의 사랑은 하지 못하고,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 다 최고의 사랑을 하냐고 물어보시고, 두 번 다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는, ‘네가 필리아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이 세 번째 물음이 문제입니다. ‘친구적인 사랑은 네가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근심이 들어왔습니다.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으면, 좀 에누리 해가지고 친구적인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을 것인데, 세 번째는 ‘그러면 친구적인 사랑은 네가 하느냐?’라고 물어보실 때에는 베드로에게 근심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아이쿠, 내가 친구적인 사랑을 한다고 두 번 대답했는데, 이번에는 친구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어보시는구나. 큰일 났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최고의 사랑을 하느냐?’ ‘그 중간 치기 사랑을 하느냐?’ 최고의 사랑을 100점짜리 사랑이라고 하면, ‘한 50점짜리 사랑은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50점 못 맞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해서 50점 사랑도 근심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가페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필리아 사랑,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이 아가페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양심을 쓰긴 써서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양심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못한 것은 못했다고 해야지, 못한 것도 모르고 양심도 안 쓰고, “예, 예, 합니다” 하고 돌아가면, 그 사람은 희망 없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린 양을 먹이고,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도 먹이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도 전도하고, 어른도 전도하고, 양들을 잘 돌보고 먹이는 이것이 ‘치는’ 것입니다. 또한 안 믿는 사람에게도 성경말씀 전하는 것, 이것은 전도하는 것도 되지만 먹이는 것도 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숨까지 드리는 사랑

본문 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했습니다. 순교입니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네가 젊어서는 네 원대로 했지만, 팔을 벌리는 것은, 네 원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결박해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죽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릴지, 예수님을 사랑하면 순교도 단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고 하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가 못 박혀 죽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십시오”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됩니다.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나가게 됩니다. 순교 당하는 자는 큰 복이 있는 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
고, 순교자는 상이 따로 있습니다. 좌석도 따로 있습니다. 특별 좌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교하지 못합니다. 순교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 사랑에 삼키어지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삼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내어놓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

본문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르라.” 마지막에는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느냐? 그럼 나를 따르라’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아마나 꼭대기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악 4:8).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 그의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 그의 인도를 따라가는 생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회개하게 되고, 어린 양을 먹이고, 또 양들을 치고, 양들을 먹이고, 그 다음은 순교의 신앙을 가지게 되고,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따라가는데, 어디든지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마나 꼭대기나 스닐, 어디나, 겟세마네 동산, 골고다 산상, 심판자리, 어디나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디든지 따라가는 신앙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져야겠습니다.

요한복음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요한복음 21:1-14

21:1 이 일들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나타내신 일이 이와같다.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중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21: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다." 하니, 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당신과 함께 가겠다." 하고, 그들이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들은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21:4 날이 샐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21:5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대답하였다. "예, 없습니다." 
2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 하시므로 그들이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었다. 
21:7 그러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주님이시다." 하니, 시몬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에 뛰어들었다. 
21:8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약 이백 규빗 정도 떨어져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21: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빵이 놓여 있었다. 
21:1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너라." 하셨다.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리니, 그 안에 큰 물고기가 백오십삼 마리나 들어 있었다. 물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시니, 제자들 중 아무도 그분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제자들이 주님이신줄 알았기 때문이다. 
21:13 예수께서 오셔서 빵을 집어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다.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이었다. 
21: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하셨다. 
21:16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쳐라." 하셨다. 
21:17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근심이 되어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말씀하기를 "내 양들을 먹여라. 
21: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겠고,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셨다. 
21: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21:20 베드로가 돌아서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았으니, 그는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던 자이다. 
21:21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21: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원한다고 한들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퍼져 나가서 그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기를 내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21:24 이 사람이 이것들에 대하여 증언하고 이것들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인 줄안다. 
21:25 예수께서 하신 일이 이 밖에도 많아서, 그것들이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예수님이 디베랴의 바닷가의 일곱 제자들에게 찾아가셨는데 이것이 부활하신 후 세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14절).

본문 1-3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배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같이 계시지 아니하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먹어야 되겠는가? 옛날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전에 하던 물고기 잡는 일, 옛날 사업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배대의 아들들 요한과 야고보 또 다른 제자들 둘이 있었는데,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
고기 잡으러 가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가자, 나도 가노라하며 그 날 밤에 나가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이유

제자들이 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까?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닐 때에는 생계 걱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다른 사람들이 가져온 것들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므로 생활 염려가 없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다음에는 생활 염려가 들어왔습니다. 무엇을 해 먹어야 하나?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예수님께서 다 해 주셨지만, 이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지만 잠시 보여 주시고 없어지셨으므로 “물고기 잡으러 가야 되겠다”하며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3년 동안 무엇을 배웠습니까?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운 것 다 집어치우고,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3년 동안에 배워준 것,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먹을 것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고, 또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므로 3년 동안에 먹을 것을 다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서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만 하면 먹을 것 주실 것이 분명한데 믿지 아니하고, 믿음이 타락이 되었습니다. “나가서 벌어야겠다” 그래서 물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운 경험적인 신앙지식도 다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교훈도 다 버리고, 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일할 것도 다 버리고,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갔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신학교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교 여러 해 동안 잘 다녔는데 신학교 그만두고 직장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세상 직장 구하러 다니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것은 분명히 물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업을 안해야겠는가? 물론 교역자로 택함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전문적으로 해야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생이나 목사로 전문적으로 몸 바쳐 일할 사람은 세상 일을 하면 안됩니다. 나가면 망합니다.
일반 신자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일반 신자는 세상일을 해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세상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면서 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 나라를 받들어 나가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일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세상으로 나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는 일은 다 집어치우고, 세상일이 첫째인 사람은 이 제자들과 같습니다. 완전히 물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몸 바쳐서 전적으로 이것만 할 사람이 있고 또 믿으면서 세상 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믿으면서 세상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첫째로 하여야 합니다. 즉 믿는 일을 첫째로 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세워 나가면서 세상 일을 하면 괜찮습니다. 그것은 물고기 잡으러 갔어도 첫째가 믿는 일이므로 거기서도 고기 잡아서, 즉 돈 벌어서 하나님 일에 바쳐지므로 그것은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제대로 믿는 일 하는 사람은 바칠 줄 아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제물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야 합니다. 

전전주일에 부활절을 지켰는데, 부활절 연보 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연보 하지 않은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어 주시고, 나를 위해서 살아 나셨는데 부활절 연보 안하는 것, 말이 됩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연보 할 때에 자기 힘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자기의 경제적인 실력에 의지해서 얼마나 해야 하는가? 거기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는 일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주의로 나가고, 세상주의로 나가면서 믿는 일은 둘째, 셋째로 하는 것은 믿는 일하다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세상으로 나가다가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믿는 일을 첫째로 하여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세상일을 해도 내가 이것을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한다, 하나님의 의를 세워 나간다”는 이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함

이 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열심히 잡았지만 얼마나 잡았습니까? 아무것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왜 못 잡았습니까? 불순종했기 때문에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잡으러 가라”하셨기 때문에 잡으로 갔으면 물고기를 잡았을 것인데, “물고기를 잡으러 가라”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서 사람을 낚아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라”는 등의 사명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순종하지 않고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며 불순종하여 갔으므로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잡게 해 주어야 잡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기술이 있다고 해서 잡는 것이 아닙니다. 왜 못 잡았습니까? 하나님이 잡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잡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배반하고 물질주의로 나갔으므로 못 잡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못 잡게 하시면 꼼짝 못합니다. 아무리 기술자라도 쓸데 없습니다. 반드시 가다가 실패합니다. 제자들이 일생동안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것인데, 일생동안 자기가 가진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아도 안 잡혔습니다.
하나님이 못 잡게 하시면 못 잡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잡게 해주시면 잡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못 잡게 하시면 못 잡는 줄 알아야 합니다.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집도 하나님께서 세우게 해주시면 세울 수 있고, 하나님께서 세우지 못하게 하시면 세우지 못합니다. 나라도 하나님이 파수하게 해주시면 파수할 것이고, 하나님이 파수하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사명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는 것도 다 잃어 버리고, 물고기 잡는 것이 첫째가 되어서 나간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 가셨습니다.

본문 4-5절에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모릅니다. 심령의 눈이 다 어두워졌습니다. 세상이 첫째인데 눈이 어두워진 것은 정해 놓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얘들아 너희가 고기가 있느냐? 물어보시니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없나이다”하였습니다.

2.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순종하는 것이 큰 은혜

본문 6절에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실 때에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을 때에 왼편만 잡아 보았겠습니까? 오른편도 다 잡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그곳은 다 잡아 본 곳입니다, 물고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다 틀어집니다. 물론 잡아 보았습니다. 물론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자기 경험적인 지식을 다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할 때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심히 고기가 많아서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되었습니다.

어떻게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까? 하나님께서 잡히게 해주셔서 많이 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잡히게 해주시면 잡히는 것이고, 하나님이 못 잡히게 하시면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자기가 잘해서 잡은 줄 알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잡히게 하면 잡힐 것이고, 하나님이 안 잡히게 하면 못 잡을 것입니다. 순종을 할 때에 하나님이 잡히게 하시므로 고기가 심히 많아서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말씀을 주신 것이 큰 은혜이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 큰 은혜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을 언제나 영접해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고기를 다 몰아 주시고, 많이 잡히게 해주시고, 큰 기적적인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순종을 하면 인간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대성공을 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할 때에는 오른 편에 던져야 합니다. 왼편에 던지면 안됩니다.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신 말씀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오른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

오른편이 어디인가? 오른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 오른편에 던지는 것입니다. 던지기만 하면 수가 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간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바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오른편에 던지라 하시면 오른편에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해도 안 된 것인데, 또 고기가 없었던 것인데 어떻게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까? 하나님께서 몰아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다의 고기도 몰아다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무슨 일할 때에 하나님이 몰아다 주셔야 합니다. 자기가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몰아다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순종만 바로 하면 하나님이 다 몰아다 주셔서 대성공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고기 잡는 어부와 같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것은 사람을 낚는 일이 대성공을 한다는 뜻입니다.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음

우리가 바로 순종만 하면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이 대성공하게 됩니다. 자기 구원도 잘 되고, 다른 사람의 구원도 잘되고, 가족 구원도 잘되고, 교회적으로 하는 일도 잘되고, 교단적으로 하는 일도 잘됩니다. 순종만 바로하면 다 잘 됩니다. 안될 것 같은데 되었습니다. 없던 것인데 이루어졌습니다. 대성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일도 순종만 바로하면 잘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세상 일을 잘되게 하려고 “믿는다”하면 안 됩니다. 세상일이야 잘되든지 못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믿는 일만 잘 하려고 하나님 말씀만 순종해 나가면 영적일이 대성공이 되고, 구원역사가 이루어지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고, 그 다음에 세상 것은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 주실 것 같으면 잘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잘 되게 해주면 교만하여져서 믿음에서 떠날 것 같으면, 회개시키고 바로 세우시려고 하나님이 안 되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입니다.
세상 일이 안되어도 믿는 일이 잘되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보통은 믿는 일이 잘되면 세상일도 잘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순종만 바로하면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 우리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 우리 교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일은 하나님께서 해주십니다. 먼저 영적일이 잘되게 해주시고, 사람을 많이 낚게 해주시고, 그 다음에는 세상일도 필요하면 잘되게 해주십니다. 

3. 예수님 발견

본문 7절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이 먼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았습니까? 고기 잡히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요한도 심령의 눈이 어두워서 조금 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지만 보고도 몰랐습니다. 고기가 잡히는 것을 보고, 이것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것이 어디서 왔겠느냐? 이분이 누구시기에 그 분의 명령대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이렇게 많이 잡히냐? 이분이 어떤 분인가? 하고 다시 찾아보니 예수님인 것입니다. 고기 잡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시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기 잡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해야 되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고기 잡히는 것을 보고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히게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깨달음이 없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을 것들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들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모셔야 됩니다.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겉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다음에 바다에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께로 간 것을 보면 바다가 얕은 것 같습니다. 

고기 잡히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일해 주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에 뛰어 내려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신 목적은 제자들이 타락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가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려고, 믿음없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발견하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다음에는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옷을 두른 후에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하였는데 다 벗은 것은 아니고 윗옷만 벗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벗고 있었던 것이 잘못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이가 많았는데 왜 벗고 있었습니까? 이것은 방심부주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지가 몇일 안되었는데, 마음을 다 풀어 놓고 세상으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방심, 부주의한 것을 회개하고 다시 세마포 겉옷을 입고 예수님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멀리서 쳐다보고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이신데, 예수님이 구주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이제는 따라가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워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천한 것에 다 찾아오셨습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셨습니까?”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고기 잡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천한 곳입니다. 부산에도 자갈치 시장이라고 있는데, 자갈치 시장은 형편없는 곳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고기 잡는 그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찾아가신 이유는 물고기 잡으러 가서 형편없이, 비참하게 된 제자들을 건져주시려고 찾아 가신 것입니다. 안 건져 주면 다 망하겠으므로 건져 주시려고 찾아갔습니다. 또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물고기를 잡으려고 해도 안 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믿는 일을 먼저 하지 않고 물고기를 먼저 잡으러 나간 사람은 믿는 일이 첫째로 안 됩니다. 아무리 하여도 안 됩니다. 한 마리도 못 잡습니다. 믿느라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일이 안됩니다. 왜 안 되는가? 믿음이 둘째, 셋째이고 세상을 첫째로 하고 따라가는데 믿는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도 안 됩니다.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것은 믿는 일이 하나도 안 되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믿는 일이 안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세상 일을 안 해야겠는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믿는 일을 첫째로 하고, 믿는 일을 먼저 잘 해나가면서 세상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역자로서 신학생으로서, 몸 바쳐서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충성 하려하다가 세상 사업으로 나간 것은 분명히 물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믿음을 저버리고 나가는데 하나님이 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100프로 다 실패입니다. 먼저 신앙이 실패이고 그 다음에 세상일도 실패합
니다.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되게 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오십 간은 약 삼백 척입니다. 한 간은 육 척인데 약 1.8m정도입니다. 원문에는 이백 페쿠스로 되어 있는데 구약에는 한 페쿠스가 한 규빗으로 되어 있고 영역 성경도 규빗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이므로 일척 반(약 45cm)쯤 됩니다. 그러므로 이백 페쿠스는 삼백 척쯤 됩니다. 따라서 오십 간은 가까운 거리입니다.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그물을 끌고 육지에 올라갔습니다. 그물에 든 고기를 여럿이 끌어 올렸습니다. 도와주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실패할 것 같지만 절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큰 고기 일백 쉰 세마리가 들어가면 보통은 그물이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면 고기가 다 나가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는 고기가 안 나가도록, 그물이 찢어지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실패할 것 같으나 성공입니다.

4.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신령한 의미

본문 11절에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큰 고기 일백 쉰 세 마리가 들어갔으면 그물이 다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 찢어졌습니다. 큰 물고기가 힘이 얼마나 센 줄 아십니까? 물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면 그물이 다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 찢어지시게 해주셨기 때문에 안 찢어졌습니다. 그물 찢어질 걱정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 어디서 왔을까? 예수님이 다 배 오른편에 몰아 다 놓으신 것입니다. 큰 것들만 골라다가 몰아 다 놓으셨습니다. 몰아다 오른편에 놓았으니 이제는 그물을 던지라 할 때에 던지기만 하면 고기가 그물 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물고기 잡느라고 오른편, 왼편에 그물을 다 던져서 잡아 보았겠는데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혔습니다. 고기가 어디서 났을까? 그것은 다 예수님이 몰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고기를 몰아다 놓으시고 거기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몰아다 놓으셨으므로 거기에 그물을 던지면 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이것은 물고기 일백 쉰 세 마리를 잡아 팔아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면, 사업적인 면, 경제적인면, 그런 것을 해결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여기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물고기 잡는 것을 통해서 좀 더 신령한 도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물고기 잡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태복음 4:19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야 되겠는데 사람을 낚는 법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야 잡는다”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기가 먼저 잡혀야 함

그러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할 때에 그물을 던진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즉 자기가 잡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잡으려면 자기가 먼저 예수님께 잡혀야만 다른 사람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안 잡히고 다른 사람을 잡아다가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려고 하면 그것은 안됩니다. 자기부터 하나님께 잡혀야 됩니다. 자기부터 순종해야 됩니다. 양심을 쓰고, 믿음을 쓰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최선의 모든 것을 다 기울여서 배 오른편에 던져야만 자기가 하나님께 잡히는 것이 됩니다. 자기가 먼저 잡혀야만 다른 사람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것은 네가 먼저 잡히라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 예수님에게 잡혀서 명령을 순종해라, 그러면 사람을 낚을 수가 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안 잡히고 다른 사람을 잡으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잡히지 않습니다. 왜 안 잡히는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에게 먼저 잡히면,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므로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그 사람에게 잡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안 잡히므로 이기주의이고, 혈기가 왕성하고, 욕심이 가득합니다. 이것을 보니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마귀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잡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달아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예수님께 잡히면 “하나님의 형상이 저기에 있다, 우리도 가서 잡혀야 되겠다, 하나님께 잡혀야 되겠다”하며 다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고기를 몰아다 놓았기 때문에 이제 배 오른편에 그물만 던지면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좀 조심해야 될 것은 던지라 할 때에 즉시 던져야지 좀 이따 던지면 고기가 다 달아납니다. 배 오른편에 고기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좀 지나면 다 떠나는 것입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안 됩니다. 오른편에 던지라 할 때에 즉시 던져야 됩니다. 기회가 지나가서 고기 못 잡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물을 던졌더라면 잡았을 것인데, 안 던졌단 말입니다. 안 던졌으므로 못 잡았습니다. 못 잡은 것은 다 달아났습니다.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그물은 구속의 도리를 잘 가르치는 것

복음을 전할 때에 좋은 그물을 장만해야 됩니다. 즉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사람에게 감동이 되도록 구속의 도리를 제대로 가르쳐주고, 또 하나님의 은혜도 가르쳐주고, 영생의 도리도 가르쳐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가르쳐주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가르쳐주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만 하나님께 합당하게 되는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 그물입니다. 그물을 잘 준비해 가지고 다니다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할 때에 던지면 거기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낚시질 하는 것도 고기에 합당한 미끼를 먹여야 됩니다. 또 낚시 밥을 잘 무는 때가 있습니다. 
달라스에 갔을 때에 LA 동부교회 김득연 장로가 달라스에 오셨습니다. 장로님이 낚시를 잘 한다고 하시며 낚시질 하러 가자고 하십니다. 그래서 점심을 싸 가지고 가려고 하는데 반찬은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기 잡아 먹으면 되니 냄비 하나 가져가고, 간장하고 밥만 가져가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 삼-사십 분 가니 저수지가 있습니다. 저수지 안에 큰 물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는데, 물고기들이 낚시 밥을 물지 않아서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고기 잡는 것도 기술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또 미끼도 어떤 물고기는 지렁이를 잘 먹는 물고기가 있고, 새우를 잘 먹는 물고기가 있고, 또 작은 물고기 잘 무는 물고기도 있다고 합니다. 갈치 같은 것은 갈치 꼬리를 잘 문다고 합니다. 그 물고기에 적당한 것을 미끼로 끼워야만 잘 무는 것입니다. 또 낮이라서 못 잡았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물고기들에게 조반을 먹여 놓았으니 낮에 미끼를 잘 물겠습니까? 고기도 잡는 기회가 있습니다.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할 그 때에 던져야지, 그 전에 가서 던져도 고기가 없고, 그 다음에 가서 던져도 고기가 없습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 그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패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른편에 고기를 다 모아 놓은 것을 던지기만 했으면 잡았을 것인데, 그물을 안 던지므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다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4:12에 고기 잡는 것은 사람을 낚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일 년 내내 가도 한 마리도 못 잡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일 년에 고기 몇 마리 낚아서 교회로 데리고 왔는가? 금년에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진 사람은 많이 잡아 올 것이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지 않은 사람은 한 마리도 못 잡아 올 것입니다. 

밤새도록 잡아 보아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하였습니다. 왜 못 잡았습니까? 자기가 불순종하므로 잡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였는데 물고기 잡으러 갔기 때문에 못 잡았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첫째가 되어야겠는데, 물고기 잡는 것이 첫째입니다. 즉 돈 버는 것이 첫째이고, 사업하는 것이 첫째이고, 자기 생활 문제 해결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잡겠습니까?
제일 먼저 잡아야 될 고기가 누구라고 하였습니까? 자기입니다. 자기가 제일 먼저 예수님께 잡혀야 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일 년 가도 한 사람도 교회로 인도 못 하고, 몇 년을 교회에 나왔어도 한 사람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부끄러운 줄도 알지 못합니다. 

오른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러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였는데 우리에게 있어서 오른편은 어디입니까? 오른편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곳입니다. 즉 고기를 모아다 놓은 곳, 하나님이 명하시는 곳, 하나님의 뜻이 오른편입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옆에다 모아 놓고 “이 고기를 잡아라”, 가정에서도 “큰 고기를 잡아라, 작은 고기를 잡아라”, 또 직장에서도 “이 고기를 잡아라”고 하시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공장 사장은 고기 잡으려고 직원 전체를 모아 놓고 한 주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목사님을 청하여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고기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가면 고기가 다른데로 갑니다. 자기 가족이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가면 헤어지고, 죽고, 아이들은 나갑니다. 고기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친구들, 늘 만나는 사람들 얼마 있으면 못 만날 날이 옵니다. 이사 가고, 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른편은 어디입니까? 오른편은 하나님께서 고기를 모아다 놓은 곳이 오른편이고, 하나님의 뜻이 오른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감동, 성경 말씀, 신앙 양심, 신앙 경험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알 수 있습니다. 그물을 던져야만 될 만하게 일을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것이 오른편입니다. 또 고기를 잡으라고 모아다 놓은 곳이 오른편입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그것이 다 오른편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그물을 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잡았다가 놓아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4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세가 되면 성경말씀을 쫓아오지 않고,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어서 자기 사욕에 맞는 얘기를 하면 그것이 좋아서 따라갑니다. 육신 중심, 욕심 중심, 이기주의, 이런 것을 좋아하는 때가 오는데 “너는 바른 말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끝까지 계속해서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판대 앞에까지 가서라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서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은 하늘나라에 가면 다 드러납니다. 또 심판대 앞에서 드러납니다. 잡았느냐? 못 잡았느냐? 몇 마리 잡았느냐? 다 드러납니다. 네 자신이 얼마나 잡히었느냐? 얼마나 순종을 했느냐? 다른 사람을 얼마나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느냐? 이것이 다 드러납니다. “자기 혼자만 예수 믿고 천당간다” 이것은 안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순종입니다. 즉 순종은 믿는 것이며, 전도하는 것이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면을 다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만 하면 안됩니다. 여러 면을 순종해서 금년에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해서 자기부터 잡혀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잡히었는가? 예수님 앞에 잡히운 고기가 되어야 합니다. 낚시질 할 때에 낚시 문 고기가 잡히면, 잡혔으므로 자기가 도망치려고 해도 못 치고, 자기가 좌로 우로 가려고 해도 못 갑니다. 낚시 줄이 끄는데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먼저 예수님께 잡히어서 도망치려고 해도 못 치고,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못하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데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잡힌 사람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할 때에 그물을 던지면 잡는 것입니다. 기회 주었을 때에 던져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던져도 쓸데 없습니다. 고기 다 지나간 다음에 던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은 예수님께서 다 몰아다 놓았기 때문입니다. 몰아다 놓으시고 던지라 할 때에 던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물이 있어야 던질 수 있습니다. 그물은 구속의 도리, 즉 구원의 도리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예수 천당”하시며 전도하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옛날이고, 구속의 도리를 잘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잘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금년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서, 고기를 많이 잡아야겠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전도 못 했으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자기도 안 잡힌 사람이고, 다른 사람도 못 잡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배 오른편에 고기를 많이 몰아다 놓으셨는데 그물을 안 던져서 다 내버립
니다. 다시 기회가 안 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자기가 먼저 잡히워야겠습니다. 그 다음에 배 오른편에 하나님이 몰아다 놓은 고기가 많이 있는데 거기에다가 그물을 던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감동과 신앙 양심과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등을 통해서 아는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즉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곳에 그물을 던져야겠습니다. 그러면 고기가 많이 잡힙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고기가 없었지만 이번에 순종만 하면 많이 잡힙니다. 순종해서 잡히는 것이지 자기가 노력해서 잡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므로 자기도 잡히고, 다른 사람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5. 믿는 일을 하면 먹을 것 염려는 예수님께서 다 해 주심

본문 12-1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올라가보니 먹을 것을 예수님이 다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날 밤에 밤새도록 고기가 하나도 안 잡혔죠? 먹을 것이 없다고 했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순종해보니 먹을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
을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너희들이 물고기 안 잡으러 갔어도 내가 먹을 것을 이렇게 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느냐? “먼저 믿는 일하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먹을 것을 다 주실 것인데 너희들이 믿는 일을 배반하고 믿음을 떠나서 물고기 잡으러 갔지만 먹을 것이 없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제 너희가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니 내가 먹을 것을 준다” 그래서 먹을 것을 준비했다가 주신 것입니다.

믿는 일을 하면 먹을 것 염려는 예수님께서 다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 염려 걱정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믿는 일을 하고, 그 다음에 세상 일을 하면 먹을 것, 염려 걱정은 예수님께서 다 하십니다. 준비해 놓았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를 구할 수 없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만능이십니다. “와서 먹어라” 떡도 떼어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며 예수님 께서 같이 잡수셨습니다. 이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사명을 다 내어 버리고 믿는 일을 하지 않고, 물고기 잡으러 간 것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잡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할 때에 순종했더니 인간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역사로 고기가 심히 많이 잡히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적 구원운동이 잘 된다는 뜻이 첫째이고, 많은 생명을 건져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는 일을 첫째로 하면 많은 생명을 건져 낼 수 있습니다. 자기 영혼도 잘되고 다 잘 됩니다. 세상일도 필요하면 잘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다음에는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물고기를 잡히게 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주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해주고, 예수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으로 물고기를 잡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먹을 것도 주시고, 생선도 주시고, 떡도 주시고, 다 주십니다. 오늘날 이렇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것을 철저히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요한복음 20:1-31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막달라 마리아.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막달라 마리아
요한복음 20:1-31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다.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 모르겠습니다." 하니, 
20:3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20:4 둘이 함께 달려갔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20:5 몸을 굽혀 가는 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다. 
20:6 그러는 동안에 시몬 베드로도 그를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가는 베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20:7 그가 또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도 보았는데, 그것은 가는 베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다른 곳에 따로 개켜져 있었다. 
20:8 그때에야 먼저 무덤에 온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으니, 
20:9 이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야 한다는 성경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0:10 제자들이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20:11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울면서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20:12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는데,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앉아 있었고 한 천사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 
20:13 그 천사들이 그 여자에게 묻기를 "여자야, 왜 울고 있느냐?" 하니, 그 여자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저의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제가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20:14 그 여자가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은 알지 못 하였다. 
20:15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그 여자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하였다. "주인님, 당신이 그분을 옮기셨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제게 말하소서. 그러면 제가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 
20:16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가 그분께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라부니." 하고 불렀으니 (이는 '선생님' 이라는 뜻이다.) 
20: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하시니, 
20:18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라고 전하였고, 또한 주께서 자기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셨다고 전하였다. 
20:19 그 날, 곧 안식일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셨다. 
20:20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0: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다. 
20:22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들이 용서함을 받을 것이고,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20:24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디두모라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0:25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라고 말하니,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주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어 보며, 내 손을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 고 하였다. 
20:26 팔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었고 도마도 함께 있었으며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셨다. 
20:27 그때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아라. 또한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하시니, 
20: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말하였다. 
20:2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되다." 라고 하셨다. 
20:30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들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20:31 오직 이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감

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 새벽 미명 날이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죄악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장사 지내신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산 예수를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지금 우리 곁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무덤 앞의 돌이 옮겨간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마리아의 열심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신지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덤에 왜 찾아갔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무덤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서 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사하신 무덤이 어떻게 됐을까?’하며, 예수님을 향해서 간절한 마음과 열심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열심은, 마리아로 하여금 새벽에 자지 않고 주님의 무덤을 향해 찾아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인들이 수비하고 있었고, 또 로마 국권으로 돌을 굴려 놓아 인봉되어 있었습니다. 또 그곳은 죄수들이 사형 받은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에 무서워하지 않고 주님의 무덤을 새벽에 혼자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보니 군인들은 다 없고, 무덤의 돌은 옮겨져 있었습니다. 무덤을 덮었던 돌이 다 옮겨졌고,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도 없습니다. 이에 본문 2절에 막달라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는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다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보면,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 간 것 같다고 마리아는 보고한 것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확인함

본문 3-5절에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둘이 무덤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마리아가 누군가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로 갔다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니, 빨리 달음질해서 그 내용을 알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젊었기 때문에 먼저 달아나고 베드로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 무덤 옆에 서 있었습니다. 한참 있다 베드로가 도착했습니다. 본문 6-7절에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왔지만 무덤에는 먼저 들어갔습니다. 젊은 사람이 먼저 왔는데, 무덤에 들어간 것은 나중에 온 베드로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장점은 빨리 가는 것이
고, 늙은 사람인 노인들의 장점은 모든 것을 세밀하게 근본적으로 찾아보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고 세밀하게 연구하는, 그러한 베드로였습니다. 세밀히 찾아보니,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가 무덤에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없어지고,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본문 8절에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했는데, 요한은 무덤 밖에서 아직 안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혼자 들어가서 보고 나온 다음에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다른 제자’, 즉 요한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믿더라’라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은 것이 아니고, 시체가 없어졌다고 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시체가 없어졌구나’라고 믿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가 시체가 없어졌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들어가 보니 시체가 없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말한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돌아가지 않고 남아 울던 마리아

본문 10절에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본문 11절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라고 한 것을 보면,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보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어떻게든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라도 찾아보고 가야지’라는 마음에 돌아가려고 해도 마음이 안 돌아서고 발걸음이 안 돌아섭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보려고 울면서,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다음에도 혼자 남아 무덤에 있었습니다. 울면서 찾아보려고 하며, 무덤 속을 또 한 번 들여다보았습니다. 

본문 12절에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무덤을 다시 보니 흰 옷 입은 천사 둘이 예수님의 시체 누웠던 곳에 있는데, 하나는 머리 편에 있었고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여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사는 보통 사람과 같이 흰옷을 입고 나타난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

본문 14절에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뒤에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가 뒤로 돌이켜 예수님을 보긴 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은 아예 생각도 안하고 있으니, ‘웬 사람이 하나 서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뒤에 사람이 하나 선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그가 동산 지키는 자인줄 알고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말씀하시지만 마리아는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습니다. 동산 지키는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시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동산 지킴이가 와서 자기 보고 이런 말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여’라는 말은 그 당시의 존칭어로 많이 사용된 말이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신 줄 알고 ‘주여’한 것이 아니고, 동산 지킴이에 대한 존칭어로서 ‘주여’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봄

본문 16절에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시며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마리아가 들으니 평소에 늘 부르시던 예수님의 음성이란 말입니다. 자기 이름을 늘 부르시던 예수님의 음성이기에 ‘아,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니, 또 그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이니 돌아보았습니다. 돌아보니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때에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줄을 알았습니다.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선생님!”하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본문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지지 말라’는 것은 든든히 붙들어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는 붙들어 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손님 붙들어 놓듯이 붙들어 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느니라 너는 내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 예수님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 아버지는 너의 아버지이고 믿는 사람의 아버지이고, 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고 믿는 사람의 하나님이다’라는 뜻입니다.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가서 전함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리라(본문 18절)’고 하며 전파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파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으로 만나본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만나보고, 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시며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또 “내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다”, “내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다”, “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내가 부활한 것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 아침에, 마리아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열심히 찾아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찾아보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주님을 제일 처음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기는 봤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에 대해서 끝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빈 무덤만 보고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빈 무덤만 보고 돌아가는 그러한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받아 나아가서 그 사실을 전파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9:28-42 예수님의 구원성취와 예수님의 장사.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의 구원성취와 예수님의 장사
요한복음 19:28-42

19:28 이 말씀 후에 예수께서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19:29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대니,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셨다. 
19:31 그 날은 준비일이었다.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치워 달라고 요청하니, 
19:32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19:33 예수께 와서는 이미 돌아가신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 
19:34 군인들 중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19:35 이것을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의 증언이 참되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으니, 그의 증언을 너희도 믿게 하려는 것이다. 
19: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9:37 또 다른 성경에 다시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볼 것이다." 라고 하였다. 
19:38 이일들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무서워하여 그것을 숨겨 왔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가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왔다. 
19:39 전에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와서, 
19:40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관습대로 향료들과 함께가는 베로 쌌다. 
19: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는 아직 아무도 장사된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19:42 그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었고 또한 무덤도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거기에 두었다.

1. 예수님의 성경 성취

신구약 성경을 다 순종하시고 완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성취하셨습니다. 본문 28절에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목마르다” 하시는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상에 일곱 마디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목마르다” 하시는 말씀은 다섯 번째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못 자국으로 다 흘러나가기 때문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면 목이 마르다고 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못 자국으로 피가 흘러 이렇게 목이 마르게 되기까지 되셨습니다. 또한 머리에도 가시 면류관을 쓰셨기 때문에 머리에서 피가 많이 흐르셨습니다.

그렇게 피가 많이 흐른 결과로서 목이 마르다는 것입니다. 매를 많이 맞은 다음에도 목이 마르는데 그것을 ‘대갈(大喝)’이라고 합니다. 매를 많이 맞은 다음에도 목마름이 있고, ‘혈갈(血喝)’이라고 피가 많이 흐른 다음에도 목마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피를 다 쏟으시고 이렇게 목이 마르게 되도록 까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벌써 예언한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은 목마르신 것입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편 69:21)”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목마르실 때에 이렇게 ‘초로 마시웠사오니’하는 시편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목마르심이 나타났습니다.

목마르신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운명하심

본문 29-30절에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신 포도주는 로마 군인들이 음료수로 먹기 위해서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신 포도주를 보통 음료수로 먹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해융’이라고 하는 바다풀을 가져다 놨습니다. 그 해융은 소금과 같아서 해융에 물을 대면 물을 많이 흡수하는 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해서 십자가 위에 달려계신 예수님에게 먹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후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가 있고, 우리와 똑같은 영혼이 있는데 이 육체와 영혼이 합해서 ‘인성’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신성이 있으십니다. 하나님 아들의 영, 영원 전부터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인성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와 영혼이 있고, 신성은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라고 하신 것은 인성의 영혼이 돌아가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리를 꺾이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심

본문 31절에,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예비일은 유월절 예비일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날, 유월절 예비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유월절 안식일이 큰 날이었습니다. 그 때에 안식일이 유월절이었습니다. 보통 안식일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서라도 빨리 죽이고 그 시체를 어서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32-34절에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고 갔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 옆에 같이 달렸던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죽이고는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고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으신 뒤였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습니다.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던 피와 물이 모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유월절의 양은 다리를 꺾지 않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제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을 다 순종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 완전한 구속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신구약 성경을 완전히 순종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신구약 성경을 다 이루어 놓은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의를 받으면 신구약 성경을 다 이루어 놓은 완전한 의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속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죄 값을 받으시고 구속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구속 완성입니다. 의의 완성입니다.

여기서 다리를 꺾이지 않음도 흠 없는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다리를 꺾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본문 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다리를 군병들이 꺾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2:46에,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했는데, 구약에서 유월절 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하십니다. 유월절 양의 뼈를 꺾게 되면 완전한 제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뼈를 꺾지 못하게 한 것도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제물이 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심

창에 옆구리를 찔리움을 받으심으로 마지막에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 창이 옆구리에 찔리운 것은 심장까지 찔리신 것인데, 심장과 내장 속에 있던 물과 피가 다 쏟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속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속에 있는 내장까지 찔리움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머리로 지은 죄 때문에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신 것 같고,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속으로 지은 죄 때문에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속에 심장까지 찔리움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 때에 피와 물이 다 쏟아져 나왔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 전체를 다 쏟아부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속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하시며 완전 무결하도록 구속을 완성시켜 주신 것입니다.

2. 예수의 시체를 장사함 

공회의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숨어서 예수를 믿음

본문 38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57-60에,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바위 속을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23:50-51에,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라고 했습니다. 그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마가복음 15:43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아리마대 요셉은 존귀한 공회원이었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국회의원 같은 자리였는데 존귀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자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믿었지만 은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숨어서 예수님을 믿었었습니다. 공회의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쫓겨납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의가 된 상태였습니다. 요한복음 9:22에,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출교당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벌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회의원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숨어서 믿었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러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장사함

1) 공회의원을 한 몫 쓰신 하나님 

그러나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한 몫 쓰실 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51에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고 했는데, 공회의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결의할 때에 가타하지 않는 편에 언제나 서왔습니다.

요한복음 7:50-51에,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공회에서 예수님을 정죄 할 때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율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로 예수님을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할 때에 이 두 사람이 나와서 한 몫 쓰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이 상황에서 나올만한 때가 못 됩니다. 제자들은 다들 도망치고 벌벌 떨며 가서 숨어있는 상태입니다. 감히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달라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숨어서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이 두 공회의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쓴 것입니다.

2) 아낌없이 자신의 돌무덤을 내놓음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와서 세마포로 싸고, 향품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나중에 쓰려고 돌로 파 놓은 새 무덤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내놓았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이 참 아주 고마운 사람입니다.
돌무덤이 아주 상당한 값의 무덤일 텐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마당에 예수님께 다 바쳤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으니까 예수님을 위해서는 아낄게 없이 다 바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돌히 나가서 빌라도에게 시체를 내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볼 때에 속에서 사명감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가서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뜨거워지면 출교당할 것이나 핍박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3) 몰약과 침향을 드려 예수님의 장사를 지냄

본문 39절에,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고 했는데,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상당히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본문 40절에,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16:14에,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 왕이 죽은 다음에 다윗성 무덤에 장사할 때에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우고 분향했다고 했는데, 당시 장례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한 유대인의 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예수님을 쌌습니다.

본문 41-42절에,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3:54-56에,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장사되려던 새 돌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에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을 장사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때에는 이런 큰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볼 때에 정신이 벌떡 들어서 이때는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하며 생명을 내놓고 발 벗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가상칠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하신 가상칠언 중 첫마디가 ‘용’, 용서해달라는 것과, 둘째는 ‘낙’,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 셋째는 ‘모’ 모친을 부탁한 것, 넷째는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목마르다’, 여섯째는 ‘다 이루었다’, 일곱째는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요한복음에는 영혼을 부탁하는 구절은 없지만 다른 복음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명백하게 신앙적으로 모든 것을 마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옆구리가 찔리어서 물과 피가 다 나오게 되셨고, 다리가 꺾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청해서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고, 니고데모가 침향과 몰약을 백 근 즈음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장사하였습니다. 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무덤까지 다 바쳐서 예수님을 장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최후에 생명을 내놓으면서 까지 예수님을 위하는 신앙, 예수님을 받들어나가는 그 믿음을 우리도 본받아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9:1-27 빌라도의 심문과 재판.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빌라도의 심문과 재판
요한복음 19:1-27

19:1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19:2 군인들이 가시로 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겉옷을 입히고, 
19:3 그분께 나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 라고 말하며 그분의 뺨을 때렸다. 
19:4 빌라도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아라, 내가 그 사람을 너희들에게 데려오겠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음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19:5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자주색 겉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말하였다. "보아라, 이사람이다." 
19:6 대제사장들과 하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쳐 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아라.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19: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이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19:8 빌라도가 이 말을 듣자 더욱 두려워하며 
19:9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서 예수께 묻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19:10 그러자 빌라도가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내게는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는 것을 알지못하느냐?" 하니,
19:11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위에서 네게 주지 않으셨다면, 너는 내게 대하여 아무 권한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19:12 이 말 때문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쳐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 주면 총독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자는 모두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자,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서 표석이 깔린 곳의 재판석에 앉았다. 
19:14 그 날은 유월절 예비일이었고, 때는 육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보아라, 너희들의 왕이다." 하니, 
19:15 그들이 소리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왕을 내가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냐?" 하니,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가이사 외에는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19:16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넘겨 받았다. 
19:17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의 장소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가셨으니, 그곳은 히브리어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9:18 거기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다른 두 사람도 그분과 함께 양쪽에서 못 박고 예수님을 가운데 두었다. 
19:19 빌라도가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는데,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19:20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으므로, 유대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 명패를 읽었는데 그것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 '유대인의 왕' 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쓰십시오." 라고 하였으나, 
19: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내가 쓸 것을 썼다." 
19:23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겉옷을 가져다가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각 군인마다 한 부분씩 차지하고, 속옷도 차지하였는데 속옷은 이은 데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으므로, 
19:24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말고 누구의 것이 되는지 제비를 뽑자."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내 겉옷을 서로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 뽑았습니다." 라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군인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19: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19:26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셨고, 
19:27 그 다음에 그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네 어머니이시다." 하시니,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19:28 이 말씀 후에 예수께서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19:29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대니,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셨다. 
19:31 그 날은 준비일이었다.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치워 달라고 요청하니, 
19:32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19:33 예수께 와서는 이미 돌아가신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 
19:34 군인들 중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19:35 이것을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의 증언이 참되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으니, 그의 증언을 너희도 믿게 하려는 것이다. 
19: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9:37 또 다른 성경에 다시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볼 것이다." 라고 하였다. 
19:38 이일들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무서워하여 그것을 숨겨 왔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가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왔다. 
19:39 전에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와서, 
19:40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관습대로 향료들과 함께가는 베로 쌌다. 
19: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는 아직 아무도 장사된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19:42 그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었고 또한 무덤도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거기에 두었다.

1. 빌라도의 재판

예수님께서 우리가 맞을 매를 맞으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이 기록이 됐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을 고난을 대신 다 받으시고, 우리가 받을 사형을 대신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요한복은 18:38에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라고 해놓고는 예수님을 이렇게 채찍질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채찍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씌웠다는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왕으로서의 왕관을 씌우는 의미에서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서 씌웠습니다. 그 가시에 찔리어서 피가 나고 매우 아픈 상태에 있으셨고, 또한 군병들이 자색 옷을 입히고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때렸는데, 그때에 예수님은 매를 많이 맞으셨습니다. 

이사야 53:4-5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채찍에 맞아야 할 그 채찍을 주님께서 대신 다 맞으셨습니다. 이렇게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조롱과 비방을 당하시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와서 꿇어 엎드려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희롱하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가 맞을 것을 대신 맞으시며, 우리 죄 값으로 이렇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놔주지 않은 정치인 빌라도

본문 4절에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무리 심문해 봐도 아무 죄가 없는 줄을 알고 나와서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다”는 말을 빌라도가 여러 번 합니다.

본문 5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라고 했는데,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으면 석방을 했어야 마땅하겠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이렇게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채로 대중 앞으로 끌고나왔습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비루한 정치가였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면 놔줘야 되겠는데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을 끌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비루한 정치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죄를 찾지 못했다고 벌써 몇 번째 천명하면서도 예수님을 석방하지 못하고, 지금 대제사장의 세력에 눌려서 이렇게 예수님을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우리 법대로 하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을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때문에 못 박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빌라도는 알만한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죄는 로마 법정에서 죽일만한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문제이지 정치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종교문제로 죽이려고 하는데 그만 빌라도는 거기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권과 부패한 정권이 합해가지고 예수님을 죽는 데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정치가는 마땅히 공의를 행해야 되겠는데,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제사장들에게 따라가고, 타협하고 협상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타협하고 협상하는 것 자체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놔줘야 되고 죄가 있어야 벌해야 되겠는데, 제사장들이 시기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종교문제로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종교지도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양심을 굽히고, 정의를 굽히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놔주지 못하고는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는데 까지 나가게 됩니다.

본문 7-9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떡하겠는가?’하며 빌라도는 안 믿는 사람이었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두려운 마음이 조금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서냐?” 하고 물어보았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제사장에게 피동이 되어서 자꾸 물어보는 것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의 자리에서도 바른 것을 알려주심

1) 빌라도의 권세로 바로 행했어야 했음 

본문 10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스스로 ‘나는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고 놔줄 권세도 있다’고 자기 권세를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권세를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세를 주신 목적은 권세를 가지고 바로 하라고 준 것이지 이렇게 권세를 가지고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라고 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권세 준 것을 바로 쓰지 못하면 너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 빌라도에게 넘긴 제사장들의 죄는 더 큼

 “나를 네게 넘겨준 죄는 네 죄보다 더 크니라”,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죄는 제사장들의 죄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는 네 죄보다 더 크다고 예수님께서 판결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판결하는 자리에 외부적으로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심판하시고 또한 제사장들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한 판결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전에서 판결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에서 판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빌라도에게 끌려 다니며 사형선고에 받는 자리에 나가시면서도,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언제나 정정당당하시고, 도리어 그 사람들의 죄를 불쌍히 여기시고 탄식하시면서 “왜 그렇게 이런 악한 일을 하느냐? 네게 권세 준 것은 하나님께서 주었는데, 악한일 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바로 서지 못 하면 그 죄가 얼마나 큰데, 그 죄 값을 네가 반드시 받을 것인데, 제사장들도 받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악한 일을 행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범죄하고 있는 사실, 이런 범죄를 하면 안 된다는 것, 죄 값은 반드시 멸망이라는 것과 심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벌써 판결을 다 받은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애씀

1) 빌라도의 두려움 

본문 12절에,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놓는 게 마땅하면 석방이다 하고 놔주면 끝나는데 애를 쓰기만 했습니다. 빌라도에게는 로마 총독의 권세가 있고 또 경비대를 사용할만한 권세가 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놔주는 것을 반대해서 군중들의 떠드는 소리가 심하고 반역이 심하면, 로마 경비대가 빌라도에게 있기 때문에 로마 경비대를 시켜서 해산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놔주어야 될 때는 마땅히 놔주고 제사장들과 여러 백성이 반역을 일으키면 경비대에게 명해서 다 진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겁한 정치가는 타락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혀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놓으려고 하지만, 유대인들은 소리 지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며 빌라도를 위협 공갈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충신이 아니라고,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가이사의 반역자라고 하니, 그것을 어떻게 놓아주겠습니까? 예수를 놓아주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못 된다’는 말에 겁이 났습니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가이사 황제는 우상이었고,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게 되면 총독의 자리가 파면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고 했는데, 자기의 정권,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빌라도는 재판을 하려고 앉았습니다.

2) 보라 너희 왕이로다 

본문 14절에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 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느라고 나와 앉아서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말했습니다. 본문 15절에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 사람들이 가이사가 황제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이사 식민지 밑에서라도 왕이 있으면 독립할 수 있으니까, 사실 유대인의 왕이 있으면 제사장들이 좋아해야 되는데 안 그러니까, 빌라도가 “너희 왕이라고 하면서 왜 죽여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이 우리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아주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합니다. 속으로는 가이사 섬기는 것을 좋아서 섬기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왕이라고 하는 자는 가이사의 반역자이니 반드시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2.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신 예수님

본문 16-17절에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주었습니다.
죄가 없다고 빌라도가 여러 번 말했는데, 불의의 재판입니다. 제사장들이 지금 데려온 것도 시기로 데려온 것도 알았고,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백성에게 아부하느라고, 백성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었습니다. 정치가들이 이렇게 공의에 서지 못하고 백성에게 아부하고, 백성의 비위를 맞추려드는 이런 정치가가 많습니다. 이런 정치가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얼마 안가서 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맡아가지고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틀을 지우고 해골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무거운 형틀을 지고 가시다가 넘어지시면 채찍으로 때려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중에는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지워가지고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본문 18절에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은 못 박히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을 형벌을 다 받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될 고난을 다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고난이 심했겠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히 상상도 못합니다. 한사람의 죄를 위해서 한사람이 죽는 고통만 해도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모르겠는데, 예수님은 만대만민 중의 택한 백성 몇 억만 사람의 그 죄를 다 짊어지시고 그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죄 값으로 죽을 고난을 한꺼번에 받았습니다. 얼마나 그 고난이 크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가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렸을 때에 아픈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아픕니까? 말할 수 없이 아프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픈 때도 있습니다. 죽는 사람은 얼마나 아팠으면 죽었겠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 억만 사람, 몇 백억 사람, 창세 이후로부터 말세까지 하면 몇 십억, 몇 백억 사람들의 죄를 한꺼번에 짊어지고 그 벌을 한꺼번에 받았습니다. 그 고난을 단번에 다 예수님께서 받았습니다. 한사람이 죽는 죄도 큰데, 몇 십억 되는 사람의 죽는 고통을 한꺼번에 받으셨다는 것은 말할 수 없고, 육신의 고통도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벌, 정죄 받고 형벌아래 들어가는 마음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죽을 고난을 예수님께서 다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본문 19-20절에,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 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다가 죄 패를 써 붙였습니다. 죽이는데 죄명이 있어야 하니까 뭐라고 썼는가 하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 말과 헬라 말과 로마 말로 기록했습니다.

본문 21절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이렇게 말하니까, 본문 22절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고 합니다.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쓴 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영적 왕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이스라엘 나라의 영적 왕입니다. 왕으로서 구속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인데 유대인의 왕이라 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까지도 가혹하게, “그냥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빌라도에게 와서 요청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으니 잔소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야 옳은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이렇게 시켰고 또 제사장들의 말을 안 들어주게끔 했습니다. 

본문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서 나눈다고 했습니다. 시편 22:18에 있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시편 22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나타낸 장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응해져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시고, 시편 22편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는 첫마디가 있는데, 그것을 읊으면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예수님께서 눈으로 보시면서, 승리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부탁하심

본문 25-27절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가시 면류관에서 피가 나오고, 양손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발의 못 박은 자리에서 피가 흐르는데, 우리가 몇 억만 사람의 택한 백성의 당할 고난을 한꺼번에 당하는 가운데 있는데, 그렇게 고난가운데서라도 예수님은 정신이 똑똑하시고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을 계속하시면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바로 하려고 힘을 쓰십니다. 

십자가 밑에 어머니가 오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요한이 그 밑에 오는데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가는 것입니다. 죽으면서라도 예수님은 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느라 천륜을 이루느라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인륜에 있어서도 마땅히 자기가 하여야 할 것인 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죽는 자리에서 그렇게 아프고 쓰라린 고통가운데서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했습니다.
다른 제자는 다 달아났고, 지금은 사도요한 하나밖에 십자가 밑에 따라간 사람이 없습니다. 큰 환난인 십자가를 당할 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가운데서도 한 사람, 요한 외에는 그 십자가 밑에 간 사람이 없었고,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여자 몇 사람만 간 것뿐입니다. 
환난당할 때에 끝까지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도 평안할 때에만 주여 주여 하며 따라가는 자가 되지 말고,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사각오하고 십자가 밑에 따라가려면 죽을 각오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그 제자도 죽일 수 있으므로 결사각오하고 예수님의 고난 받는 자리까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데 까지 운명하는데 까지 따라가는 그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자의 자격으로 하신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람의 자격으로 못 박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못을 박히신 것입니다. 성자의 구속 사업을 위해서 못 박히시는데, 육신으로는 마리아가 모친이지만 성자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 있어서는 일개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모친을 여자라고 불렀고, 또 자기 제자에게 그 모친을 부탁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부모를 얼마나 공경하여야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를 얼마나 우리가 공경해야하는가? 구약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아들은 때려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죽으면서까지 자식 된 도리, 인륜의 도리를 다하는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해서 부모를 버리는 자는 성경위반입니다. 인륜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 교회에서는 교역자에 대한 도리, 형제에 대한 도리, 친구에 대한 도리, 국가에 대한 도리, 임금에 대한 도리 등, 우리가 그 모든 것에서 인륜에 대한 것을 해나가면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이루어드리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