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9
요한복음 21:15-19
21: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하셨다.
21:16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쳐라." 하셨다.
21:17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근심이 되어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말씀하기를 "내 양들을 먹여라.
21: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겠고,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셨다.
21: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21:16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쳐라." 하셨다.
21:17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근심이 되어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말씀하기를 "내 양들을 먹여라.
21: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겠고,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셨다.
21: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예수님
과거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어보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오늘날 예수님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언제나 물어보시는 줄을 알고,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 그것을 잘 살펴서,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예수님 말씀에 합당한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는 것은, ‘시몬’은 베드로이고,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아들입니다. 첫마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은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전에 말한 것을 기억시키고,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네가 안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시며,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
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보다 더욱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재촉하는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네가 과거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릴 때에도 주를 안 버리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실제로 네가 안 버렸느냐? 세 번 부인한 너니까 회개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라는 그러한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의 각주에 보면,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뜻도 있고, ‘이것들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주님은 물어보시는 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인한 것입니다. 믿음 못 지킨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 못 지킨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간 것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해서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모든 것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하는 뜻이 있는데, ‘모든 것’이라 함은, 세상 만물과, 돈 사랑하는 것과, 사람 사랑하는 것, 자기 사랑하는 것, 자기 가족 사랑하는 것, 이것보다도 ‘네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시는 것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사랑하느냐?” 다른 모든 것 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못하느냐?” “얼마나 더 사랑하느냐?”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말로만 사랑하느냐?” 우리가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조금 사랑하느냐?” “많이 사랑하느냐?” “더 많이 사랑하느냐?” “최고의 사랑을 하느냐?” 이것을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사랑을 했다고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데에도 단 마음으로 나갔을 것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습니다. 죽을까봐 부인했는데, 그것은 예수님보다는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것을 물어보시는 것인데, 우리가 어느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나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가 삼키어지고,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 하겠는데, ‘얼마나 사랑하느냐?’ 이것을 예수님께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얼마나 사랑할까?’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독자보다도 더 사랑했고, 모든 재산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롯과 분쟁할 때에 재산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고, 이렇게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마리아는 나드 300 데나리온 짜리의 가장 값진 향유를 바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갖다 부었는데, 그것은 사랑으로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불평을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다니긴 따라다니는데, 제자이긴 제자인데, 마리아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신자가 많습니다. 대부분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쏟아 붓는, 자기의 모든 전부를 다 쏟아 붓는, 전 재산을 다 쏟아 붓는 그런 사랑이 많지 않습니다. 마리아만큼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다 쏟아 붓는 사랑인데, 손들어 보라구요. 왜 안 듭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속에서 끓어 넘쳐 나오는 진정한 사랑,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랑, 모든 재산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랑, 독자보다도 아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랑, 그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 믿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연결되어야 됩니다. 사랑의 세계에서 살아야 됩니다. 다른 것을 다 잘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낙제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낙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진정으로 참으로 사랑을 하는 저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따라다니긴 따라다니는데, 제자이긴 제자인데, 마리아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신자가 많습니다. 대부분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쏟아 붓는, 자기의 모든 전부를 다 쏟아 붓는, 전 재산을 다 쏟아 붓는 그런 사랑이 많지 않습니다. 마리아만큼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다 쏟아 붓는 사랑인데, 손들어 보라구요. 왜 안 듭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속에서 끓어 넘쳐 나오는 진정한 사랑,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랑, 모든 재산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랑, 독자보다도 아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랑, 그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 믿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연결되어야 됩니다. 사랑의 세계에서 살아야 됩니다. 다른 것을 다 잘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낙제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낙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진정으로 참으로 사랑을 하는 저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왜 사랑하지 못할까?’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마리아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왜 사랑하지 못하겠지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거기에 다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돈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돈 사랑하는 마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보다 돈을 앞세워 놨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이 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지 못한다.’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 두 임금 섬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서 부터 뜨겁게 올라오지 못할까?’ ‘왜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신데, 자기 남편보다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하면, 그 신랑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껍데기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만 사랑해야 됩니다. 예수님만 사랑해야 되겠는데 다른 것을 겸해서 사랑하니까, 예수님 사랑하는 것이 차차 식어지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 말 뿐입니다. 진짜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됩니다. 돈이나, 세상이나, 다른 것들 입니다.
2.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
예수님의 사랑을 알라
그러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들어가야 되겠는데, 사랑하려면, 첫째는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 몰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하늘 영광 보좌를 다 내놓으시고, 지극히 낮아져서 말구유에 탄생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입니다. 창조자, 천지 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하신 분입니다. 잠언 8장에 보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천지, 이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저기 화성에 로켓트가 가서 착륙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화성에 가려면 얼마나 멉니까? 인공위성처럼 빠
른 것도 일곱 달이 걸렸다고 합니다. 금성에는 석 달을 가야하고, 화성에는 일곱 달을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더 먼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보다 백배 더 멀리 있는 별, 만 배 더 멀리 있는 별이 있습니다. 태양계만 해도 굉장히 멀고, 태양계 같은 것이 우주에 이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고 있는데, 또 은하계 같은 게 이천억 개라고 합니다. 얼마나 먼지 한량이 없습니다. 제일 멀리 있는 별 같은 것은,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빛이 지구에 와 닿지 못한 별이 있다고 합니다. 태양에서 빛이 지구에 8분 만에 내려오는데, 그렇게 빠른 빛인데, 그런 빛이 아직까지도 지구에 오지 못했다고 하니까, 얼마나 먼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대신 죽어서, 우리를 대속해주시고, 건져주신 그 사랑,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생각만 해도 그것 참 놀랄만한 사랑입니다.
른 것도 일곱 달이 걸렸다고 합니다. 금성에는 석 달을 가야하고, 화성에는 일곱 달을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더 먼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보다 백배 더 멀리 있는 별, 만 배 더 멀리 있는 별이 있습니다. 태양계만 해도 굉장히 멀고, 태양계 같은 것이 우주에 이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고 있는데, 또 은하계 같은 게 이천억 개라고 합니다. 얼마나 먼지 한량이 없습니다. 제일 멀리 있는 별 같은 것은,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빛이 지구에 와 닿지 못한 별이 있다고 합니다. 태양에서 빛이 지구에 8분 만에 내려오는데, 그렇게 빠른 빛인데, 그런 빛이 아직까지도 지구에 오지 못했다고 하니까, 얼마나 먼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대신 죽어서, 우리를 대속해주시고, 건져주신 그 사랑,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생각만 해도 그것 참 놀랄만한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로마서 8장에는 계속해서 폭포수와 같이 쏟아내려 부어주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38-39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폭포수와 같이 내려 부어주시는 사랑, 계속해서 폭포수와 같이 내려 부으시는 사랑인데, 그 사랑에서 끊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폭포수와 같이 쏟아내려 부어주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한강보다 조금 좁은 것 같은 폭포가 있습니다. 그것이 한 오십 미터라고 하는데, 그 높은데서 떨어집니다. 그 많은 물이 계속해서 쏟아내려 부어지는데, 그 폭포 아래에 가서 폭포수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안 맞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내리 쏟는데 어떻게 안 맞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계속해서 내리 쏟아부어주는 사랑입니다. 계속 내리 쏟아 부어주십니다. 폭포수가 내리 쏟아지듯이, 쏟아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저 계속 쏟아 부어주십니다. 우리 예배당 만큼의 폭포수가 쏟아진다고 합시다. 그저 계속 쏟아 부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만큼 쏟아내려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몸 버려 피 흘려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물어주시고 건져주신 그 사랑, 우리가 받을 사형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는 살려주신 그 사랑, 폭포수와 같이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계속 쏟아 내려부어 주시는 그 사랑,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계속 쏟아 부어 주시는데, 그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떠나지 말고, 그 사랑 안에서 살면, 폭포수 아래서 사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 안에서 살면, 예수님의 사랑이 점점 깨달아지고, 또 많이 깨달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이 넘치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되고,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되는, 그런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목숨 바쳐도 오히려 부족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해서 하는 일들이, 그것이 믿는 일들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바치는 것도 그 사랑에 감격해서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서 바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봉사도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연보도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전도하는 것도 그 은혜에 감격해서 단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학생들 태우고 오는 것도 단 마음으로 감사해서 기쁘고 즐거움으로 해야합니다. 무엇이나 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라
첫째는 그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 밖에서 살면, 그다음에는 믿음이 안됩니다. 물고기가 물 바깥에 나와서 잘 하겠다고 펄떡펄떡 뛰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그래야 헤엄을 치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 밖에 나간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었어도 그 믿음이 시원치 않습니다. 믿음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얼 봉사를 한다 해도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를 시키면 나만 시킨다고
‘두두두두’ 하고, 왜 나만 시키냐고 ‘두두두두’ 하고, 두두두할 거면 그만 두십시오. 단 마음으로 할 거면 하고, 부득이하게 하는 거라면 관두라고요. 식당 밥 하는 것, 사경회 때 국수 삶는 것 단 마음으로 했습니까? 단 마음으로 했다면 되었습니다. 얼마나 단 마음으로 했습니까? “왜 나만 시키느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감격이 있는 것입니까? 안 시켜줘서 걱정인데, ‘시켜줄까?’ 하고 가까이 슬슬 돌아가다가, “이거 해라” 하면 기쁨으로 해
야하겠는데, “왜 나만 시키느냐?”라고 합니까? ‘나만 시키느냐?’라고 할 사람은 아예 그만 두십시오. 당초 처음부터 그만 두고, 처음부터 근처에 오지도 마십시오. 또 시키면 큰일 날 테니 말입니다.
‘두두두두’ 하고, 왜 나만 시키냐고 ‘두두두두’ 하고, 두두두할 거면 그만 두십시오. 단 마음으로 할 거면 하고, 부득이하게 하는 거라면 관두라고요. 식당 밥 하는 것, 사경회 때 국수 삶는 것 단 마음으로 했습니까? 단 마음으로 했다면 되었습니다. 얼마나 단 마음으로 했습니까? “왜 나만 시키느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감격이 있는 것입니까? 안 시켜줘서 걱정인데, ‘시켜줄까?’ 하고 가까이 슬슬 돌아가다가, “이거 해라” 하면 기쁨으로 해
야하겠는데, “왜 나만 시키느냐?”라고 합니까? ‘나만 시키느냐?’라고 할 사람은 아예 그만 두십시오. 당초 처음부터 그만 두고, 처음부터 근처에 오지도 마십시오. 또 시키면 큰일 날 테니 말입니다.
3.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본문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시니 베드로가 뭐라고 답했습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린 양 먹이라는 것이 첫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년부나 유치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으니까, 초신자들인 어린 양부터 먹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양 무시하면 큰 양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어린 양들 다 잡아 죽이고, 다 내다버리면, 큰 양들은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린 양들을 잘 먹여야 합니다. 또 집안에 어린 양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 어린 양들 입니다. 자녀들, 손자들, 이 어린 양을 잘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유년부, 유치부를 잘 인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을 먹이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첫째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유년부와 유치부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어야겠습니다. 첫째로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교회에 잘 보내고, 집에서 잘 먹이고, 가정예배 드리고, 성경 가르쳐주고, 교회 잘 보내고, 어린 양을 잘 길러나가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감사해서 기쁘고 즐거움으로 어린양을 잘 먹일 수가 있습니다.
내 양을 치라
본문 16절에,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양을 치라는 것은 양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길러라.’ ‘돌봐주어라.’ 먹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는 것은 잘 기르라는 뜻도 있고, 돌봐주고, 이리가 오는 것을 막아주고, 양이 병나지 않게 해주고, 병 난 양을 잘 돌봐주는, 이런 것이 다 ‘양을 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하는 것이 양을 치는 것입니다. 병 난 사람을 잘 돌봐주고, 시험에 든 사람을 잘 돌봐주고, 약한 사람을 잘 붙들어 주고, 시험에 든 사람을 건져주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또 악한 사람을 제재하고, 못되게 돌아가는 것을 돌아가지 못하게 해놓는 그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성경말씀 가르쳐주고, 교회로 인도하고, 그다음에는 잘 쳐서 못된 데로 가지 못하게 인도하고, 교회에 안 빠지게 하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장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로도 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이 치는 것인데, 못된 데 가지 못하게 만들고, 구렁텅이에 안 빠지게 만들고, 독초를 먹지 못하게 만들고, 가지 못할 길로는 안 가게 만들고, 구렁텅이가 있고 언덕이 있어서 떨어질 데에는 못 가게 만들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잘 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쳐야 됩니다.
것입니다. 장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로도 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이 치는 것인데, 못된 데 가지 못하게 만들고, 구렁텅이에 안 빠지게 만들고, 독초를 먹지 못하게 만들고, 가지 못할 길로는 안 가게 만들고, 구렁텅이가 있고 언덕이 있어서 떨어질 데에는 못 가게 만들고, 그런 것이 다 치는 것입니다. 잘 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쳐야 됩니다.
내 양을 먹이라
본문 17절에,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먹이라’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양 떼를 잘 먹이는 것, 꼴을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먹는 풀을 ‘꼴’이라고 그럽니다. 꼴을 잘 먹으면 살이 됩니다. 꼴을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신령한 양식을 양 떼에게 잘 먹여서, 양 떼가 강건하도록, 살찌도록, 힘이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강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잘 먹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령한 양식을 잘 공급해서, 이 양식을 먹고 양 떼들이 힘을 얻고, 또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얻어서, 자라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먹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방 가서도 먹이고, 전도할 때에도 그렇고,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먹이는 일, 즉, 교회에서는 신령한 양식 잘 먹여주는 것이 첫째입니다. 양식을 먹어서 힘이 있어야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신앙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양식을, 신령한 꼴을 교회에서 먹여주고, 교인들이 심방을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신령한 꼴로 잘 먹이고 자라나게 해야 됩니다. 강건해져야 됩니다.
4. 아가페 사랑하느냐
아가페 사랑
세 번 물어보셨는데, 첫째 번, 둘째 번은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하느냐?’ 물어보셨는데, 대답은 ‘최고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고 물어보셨으면 ‘최고의 사랑을 했느냐’고 물어본 것인데, ‘필리아 사랑을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적인 사랑, 친구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했습니까? 아가페 사랑한다고 대답했으면 예수님 마음이 편안할 텐데, 에누리 해가지고 친구적인 사랑, 우애적인 사랑을 한다고 답변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가페 사랑을 한다고, 최고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하기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양심을 쓰긴 합니다. 양심 없이 대답만 “예, 예” 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최고의 사랑은 하지 못하고,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 다 최고의 사랑을 하냐고 물어보시고, 두 번 다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는, ‘네가 필리아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이 세 번째 물음이 문제입니다. ‘친구적인 사랑은 네가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근심이 들어왔습니다.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으면, 좀 에누리 해가지고 친구적인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을 것인데, 세 번째는 ‘그러면 친구적인 사랑은 네가 하느냐?’라고 물어보실 때에는 베드로에게 근심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아이쿠, 내가 친구적인 사랑을 한다고 두 번 대답했는데, 이번에는 친구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어보시는구나. 큰일 났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최고의 사랑을 하느냐?’ ‘그 중간 치기 사랑을 하느냐?’ 최고의 사랑을 100점짜리 사랑이라고 하면, ‘한 50점짜리 사랑은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50점 못 맞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해서 50점 사랑도 근심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가페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필리아 사랑,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이 아가페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양심을 쓰긴 써서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양심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못한 것은 못했다고 해야지, 못한 것도 모르고 양심도 안 쓰고, “예, 예, 합니다” 하고 돌아가면, 그 사람은 희망 없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린 양을 먹이고,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도 먹이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도 전도하고, 어른도 전도하고, 양들을 잘 돌보고 먹이는 이것이 ‘치는’ 것입니다. 또한 안 믿는 사람에게도 성경말씀 전하는 것, 이것은 전도하는 것도 되지만 먹이는 것도 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숨까지 드리는 사랑
본문 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했습니다. 순교입니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네가 젊어서는 네 원대로 했지만, 팔을 벌리는 것은, 네 원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결박해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죽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릴지, 예수님을 사랑하면 순교도 단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고 하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가 못 박혀 죽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십시오”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바치게 됩니다.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나가게 됩니다. 순교 당하는 자는 큰 복이 있는 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
고, 순교자는 상이 따로 있습니다. 좌석도 따로 있습니다. 특별 좌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교하지 못합니다. 순교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 사랑에 삼키어지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삼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목숨까지도 단 마음으로 내어놓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
본문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르라.” 마지막에는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느냐? 그럼 나를 따르라’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아마나 꼭대기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악 4:8).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 그의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 그의 인도를 따라가는 생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회개하게 되고, 어린 양을 먹이고, 또 양들을 치고, 양들을 먹이고, 그 다음은 순교의 신앙을 가지게 되고,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따라가는데, 어디든지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마나 꼭대기나 스닐, 어디나, 겟세마네 동산, 골고다 산상, 심판자리, 어디나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디든지 따라가는 신앙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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