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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수요일

요한복음 12:15-41 인자의 죽음과 영광.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인자의 죽음과 영광
요한복음 12:15-41

12: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네 왕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았다. 
12:16 그분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이 일들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것들이 그분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며, 사람들이 그분께 이러한 일들을 행하였음을 기억하였다. 
12:17 또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었던 무리가 증언하였으므로, 
12:18 이렇게 무리가 그분을 맞으러 나온 것은 그분께서 이 표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2:19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보는 바와 같이 당신들이 하는 일이 소용없다. 보아라, 세상이 그를 따라 간다." 라고 하였다.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자들 가운데 헬라인 몇이 있는데,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그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님, 저희가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니, 
12:22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말씀드렸다. 
12: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12: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12: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자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버지시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하여 주소서.' 라고 하겠느냐? 그러나 내가 이것을 위하여 이때에 왔다. 
12:28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라고 하니,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가 "천둥이 울렸다." 라고 말하였고, 다른 이들은 "천사가 그분께 말하였다." 라고 하였다.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 성이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다.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고, 이제 이 세상의 지배자가 쫓겨 날 것이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이들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12:33 예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셔서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암시하셨다. 
12:34 그러자 무리가 그분께 대답하기를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계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선생님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인자는 누구입니까?" 하니, 
12: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다녀 어두움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두움 속에 다니는 자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12:36 너희는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어 빛의 아들들이 되어라."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숨으셨다. 
12:37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12:38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성취하려는 것이니 그가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라고 하였으므로, 
12:39 그들이 믿을 수 없었으며, 이사야가 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12:40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여, 내가 그들을 고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2:41 이사야가 이것을 말한 것은 그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12: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분을 믿었으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이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12:43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12:44 예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으니, 이는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어두움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2:47 어떤 이가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2:48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분이 계시니, 내가 말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12:49 이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을 친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12: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다."

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의 상징입니다. 스가랴 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성경 말씀에 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나귀 주인이 자신의 나귀를 단 마음으로 예수님께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왕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스라엘 왕이시여, 호산나”라고 하며 왕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2.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

본문 17-19절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너희 하는 일’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는 말씀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가므로 그들을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0-23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인 몇 사람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의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안드레에게 갔고, 이후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께로 가서 “헬라 사람 몇 명이 왔는데 선생님을 만나려고 합니다”라고 그들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헬라인들을 만나 주셨습니까? 만나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왜 만나려고 하는지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아셨던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실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망명 생활을 하시도록 권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공기를 보면, 전부 예수님을 죽이려는 험악한 공기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예수님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이렇게 귀한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헬라로 도망을 치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시지 않아도 벌써 ‘이 사람들이 나를 헬라로 망명 시키려고 이렇게 온 모양이다’라는 것을 아시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할 때가 왔다, 승천할 때가 왔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닥쳐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영광을 얻을 시기로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만 보시지 않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천하의 택한 백성들이 다 구원 받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고통이지만 많은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죽음만 보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찬송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다음에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
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을 네 번째로 하셨는데, 이것은 시편 22편 말씀의 첫 마디입니다.

시편 22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찌르고 옷을 제비 뽑고 많은 황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죽이는 것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고 이방 사람들이 구원 받고 택함 받은 많은 생명들이 구원 받는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생명들이 구원 받을 것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찬송입니다. 독생자를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이신데, 어떻게 버릴 수 없는 아들을 버리시면서 까지 이 백성을 구원하십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시면서 까지 택한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소리입니다.
또, 실제 많은 백성들이 구원 받는 것을 볼 때에 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백성들이 구원 받을 것을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서 찬송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일이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또, 죽으신 다음에는 영광의 부활, 그 다음에는 승천하시여 더욱 더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생명들이 구원 받는 일, 그 다음에 부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일, 그 다음에 승천하는 일, 하늘나라에 가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시는 일, 이것이 다 영광이 됩니다. 

십자가는 잠간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잠간 몇 시간뿐인데,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통만 보지 말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부활, 승천,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모든 죽음을 승리적으로 통과해야 하겠습니다. 

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음

본문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면 거기서 새싹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시면 밀알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많은 생명의 열매가 맺혀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이 성경 말씀으로 설교를 하고 얼마 있다가 감옥에 갇히고 그 다음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자기가 안 죽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자기가 진리를 지키다가 죽으면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므로 많은 열매가 맺을 것을 주기철 목사님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단 마음으로 순교의 재물로 바쳤습니다. 밀알이 종자 아닙니까? 종자가 땅에 들어가서 썩어져야 새싹이 나오고 많은 생명이 살게 됩니다. 안 죽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또 그대로 있으면 얼마
나 있겠습니까? 새가 와서 먹을 수도 있고 쥐가 와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일, 말씀을 지키다가 죽는 일, 말씀을 전하다가 죽는 일, 이러한 일들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죽는 일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열매가 맺혀 나옵니다. 

스데반이 전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전도하다 죽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또,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고 사울이 회개했습니다. 사울이 어디에서부터 회개하게 되었는가 하면 스데반이 죽는 것에서부터 회개할 감동이 생긴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에 ‘하나님 믿는 사람이 참 귀한 것이구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어서 죽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 앞에 크게 잘못 했구나’라고 벌써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을 생각했으면서도 끝까지 고집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없애려고 다메섹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중에 예수님의 빛을 보고 완전히 꼬꾸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을 회개시킨 사람은 스데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사울을 회개시켰습니다. 또, 사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었는데, 바울은 자신을 순교의 재물로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순교 당했고 베드로도 순교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안 죽었다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또, 아벨이 의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아벨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재물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이유가 되어 형 가인이 그를 죽였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말씀대로 바로 섬기는 일, 그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섬기지 못했는데, 아벨은 바로 섬겼습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아벨이 흘린 순교의 피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아벨의 순교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아벨의 순교의 씨로 말미암아 그 후에 셋이 나왔고 에녹이 나왔고 노아가 나왔고 아브라함이 나왔습니다. 순교 당하는 것은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귀한 역사입니다.

우리도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죽어도 더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죽으면 없어질 것 같으나 더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작정은 ‘내가 이제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야만 많은 사람이 구원 받는다’라는 것이므로, 헬라 사람들이 와서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난 것입니다. 만나봐야 도망치라는 것 아닙니까?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는데, 죽는 것이 영광입니다. 죽는 것이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서 죽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 또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영광이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희생해야 살립니다. 희생하지 않으면 못 살립니다.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희생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희생하지 아니하고 이기주의로 나가면 그것은 한 알 그대로 있다가 마지막에는 없어집니다. 이기주의로 나가지 말고 땅에 떨어지는 밀이 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떨어지는 밀이 되면 많은 생명이 살아납니다.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 결사 각오해야 합니다. 

4. 육신의 목숨과 영의 목숨

본문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영적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적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합니다.
육신의 목숨과 영의 목숨이 있습니다. 육신의 목숨을 내놓으면 영의 목숨이 살 수 있고, 육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영의 목숨이 살지 못합니다. 이 둘은 아예 바꿔 가지는 것입니다. 둘 다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바꾸어 가지는 마당인데, 둘 다 가지겠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바꾸는 자리에서 둘 다 가지겠다고 하면 주겠습니까? ‘네 것을 내 놓아라 그러면 영생하는 생명을 준다’,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꾸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꾸면 누구에게 이익(利益)이 남겠습니까? 하나님의 것과 우리의 것을 바꾸자는 것인데, 바꾸면 우리에게 이가 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육신의 목숨, 우리가 살아야 얼마나 살겠습니까? 또, 육신을 가지고 사는 생활은 고생입니다. 육신의 목숨은 고생하다 얼마 가면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의 목숨, 즉 중생한 영은 영원한 목숨입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목숨입니다. 그것하고 바꾸자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믿음을 지키면 영의 목숨을 찾습니다. 육신의 목숨을 안 내어 놓으면 영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이 되고 하늘나라의 면류관이 없고 생명이 살아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꾸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질 아침 안개와 같은 생명, 풀과 같은 육신의 생명, 풀의 꽃과 같은 영광, 이러한 것들은 금새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적 생명을 주십니다. 몇 억 만 년 세세토록 살 수 있는 영적 생명이 자라납니다.
또 영적 생명이 살아납니다. 큰 자가 됩니다. 육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말씀을 지키면 믿음을 지키면 영원한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육신의 목숨이 아까워서 그것을 안 내어 놓으려고 하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진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육신의 목숨을 안 내어 놓으면 믿음을 못 지킬 날이 옵니다. 또, 육신의 목숨을 안 내어 놓는 사람은 진리를 지키지 못할 날이 옵니다. 그리고 그때에 영적 생명을 빼앗깁니다. 그 사람의 심령은 죽은 것이고 생명의 역사는 중단된 것입니다.
또, 영원한 것들을 다 잃어버립니다.

잠시 잠간 있다 마는 것과 영원히 있는 것을 바꾸자고 하는데, 왜 안 바꿉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을 내어 놓아라, 영원한 것을 네게 준다’라고 하는데, 바꾸지 않으면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어리석은 자는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므로 육신의 생명에 애착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에 속한 것들을 영원한 것과 바꾸지 않겠다고 하므로 그만 믿는 일을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데 왜 안 바꾸려고 합니까?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만 바꾸자는 것이 아니고 다 바꾸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아라, 한 쪽에 쌓아 놓은 재산과 자녀 할 것 없이 다 내어 놓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맞바꾸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것을 다 내어 놓으면 내 것을 다 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 것을 모두 내어 놓으면 누구의 것을 다 줍니까? 하나님의 것을 다 주십니다. 맞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비교해 봅시다. 우리의 것은 쌓아 놓아 봐야 헌 누더기 같은 것, 냄새나는 것, 조금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무궁무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하고 맞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내어 놓겠다고 우리가 떨고 앉아있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못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내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 전부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다 내어 놓았으므로 아버지의 것이 자기의 것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0에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라고 하였습니다. 내 것을 다 아버지 것으로 삼아 놓아야만 아버지의 것이 전부 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왜 안 바꾸려고 떨고 있습니까? 

이러한 상황은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아라, 세계 일등 부자의 것과 맞바꾸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다 내어 놓아 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계 일등 부자의 재산은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 일등 부자는 자동차가 몇 대이고 비행기가 몇 대이고,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맞바꾸자면 안 바꾸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은 도대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안 바꾸겠다고 합니까? 내어 놓으면 하나님의 것이 자기의 것이 됩니다. 내 것
을 다 내어 놓아야 하나님의 것이 주어집니다. 제 것이라고 붙들고 앉아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안 주십니다.

교회도 내 것이다, 하고 붙잡고 앉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안 주십니다. 교회도 점점 쇠퇴해 가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것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자기 물건 가져다 놓고 다른 사람의 것과 맞바꾸는 물물교환 시장은 비슷한 것끼리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환은 엄청난 것과 맞바꾸는 것입니다. 돈으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은 십만 원 어치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내어 놓으면 몇 백억, 몇 조가 되는데 이것과 맞바꾸어 놓으니 가난한 사람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바꾸겠다고 앉아 있습니까? ‘육신의 생명을 내어 놓아야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내어 놓고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내어 놓고 믿음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어 놓지 않으면 안 주십니다.

5.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본문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십자가를 지고 말씀대로 가야만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다 내어 놓고 예수님을 따라 갈 때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내어 놓지 않으
면 하나님께서 안 주십니다. 내어 놓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말씀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다 내어 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가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같이 있게 되고,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고, 아버지의 것을 다 그 사람에게 주십니다. 

본문 27절에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하시며 십자가를 지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6.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본문 28절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이 첫 마디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이것이 첫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실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고 소리가 났습니다.

독생자를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내어 놓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더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육신의 생명을 내어 놓고 말씀을 지키다가 죽으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영광을 받으십니다. 

본문 29-30절에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뢰와 같은 소리로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들었습니다. 우뢰 소리와 같이 무슨 소리가 나는 것만 들었지 내용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에서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실 때에도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긴 들렸는데, 무슨 소리인지 분별 못했습니다. 영의 귀가 열린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영의 귀가 열리지 못한 사람은 분별하지 못합니다.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무슨 소리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나아갑니다. 

본문 31절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임금은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가 쫓겨 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은 마귀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뱀의 후손은 네 발꿈치를 물 것이요 너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창 3:15). 그러므로 예수님
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마귀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지키다 죽는 것은 마귀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진리를 지키다 죽는 것이 대승리입니다. 그것이 마귀를 멸하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 모든 택한 백성을 다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본문 33-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신다는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하신 것입니다.

7.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따르라

본문 34절에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죽는다고 하십니다. 이에 “그러면 그 인자는 누구냐”고 하며,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관에 맞지 않는 의견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7:27에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올 때는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또 그리스도가 오시면 영원히 계신다”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네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관과 맞지가 않습니다. 

무엇이 안 맞습니까? 먼저, 그리스도가 어디서 오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배워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왔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그리스도가 온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잘못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또,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하시니 ‘이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성경을 잘못 배우고 잘못 알고 있으면, 그것이 진리를 배척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배우고 바로 알고 있었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했겠는데, 성경을 바로 배우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요새도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즉, ‘관(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인생관, 말세관,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관, 하나님에 대한 신관(神觀), 교회관, 세상 국가에 대한 국가관, 이러한 것들이 바로 되지 못하면 신앙이 바로 못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관, 은혜관, 성령관 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모르면 참된 것을 받지 못하고, 삐뚤어진 것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에서 탈선 됩니다. 

신비주의관, 해방신학관 등 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관이 바르지 못하면 바른 길로 못가고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일생동안 믿는 일 하려고 힘을 많이 써도 결국 낭패하고 맙니다. 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관을 바로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관, 성경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새 말세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여러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년 대환난이 다 지난 다음에 오신다, 7년 대환난 전에 오신다, 또 중간에 오신다’ 등 말세관이 다릅니다. 환난이 이르기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환난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난 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 들려 올라갈 텐데, 환난을 이길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환란 중간에 오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성도가 환난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환난 후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이 바르지 못하면 신앙 준비도 바로 못하고 믿는 일도 제대로 못합니다. 잘못된 길로 갑니다. 오늘 바리새인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7. 빛 가운데 행하라

본문 35-3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잠시 동안 빛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는 빛 가운데로 가면 될 것인데 왜 어두움에 붙잡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은 예수님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밝혀 주시는데, 어째서 어두움에 붙잡혀 있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빛의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빛을 떠나므로 어두움밖에 있을 곳이 없습니다. 어두움에 헤매는 자는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참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빛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가운데 붙잡히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즉, 진리의 밝은 빛은 받아 가지고 있으나 그 빛 가운데서 살지 못하고 빛을 떠나 잘못된 것을 따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두움에 잡힌 것입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갈팡질팡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본문 36절에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면 어두움이 오겠는데 빛이 잠간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진리를 밝히는 빛이 조금 있다, 그 밝히는 진리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빛의 아들, 말씀의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빛을 세상에 비추어 내보낼 수 있는 참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8. 보는 눈이 복이 있고 깨닫는 마음이 복이 있음

본문 37-38절에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지만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이 백성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1에 “주여 우리에게 전한 말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누가 믿었으며’라는 것은 아무도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주의 팔이 나타난 것을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었습니다. 주의 권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주의 팔이 나타나서 권고해 주시는데, 그 권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 39-40절에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6:10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다는 말입니다. 또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못 믿습니다. 눈이 멀었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마음이 완악한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여 결국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종류가 다릅니다. 보고 깨닫는 종류가 있고, 듣고 깨닫는 종류가 있고, 듣고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게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시고, 아예 눈은 멀게 만드시고, 귀는 아예 막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눈이 복이 있고 깨닫는 마음이 복이 있고 진리를 진리인 줄로 아는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아는 것입니다. 또 모르는 사람은 왜 모릅니까? 하나님께서 벌써 그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고 귀가 막히게 하셨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나가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예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오면 안 됩니다. 양이 아니고 염소인데, 염소가 양의 우리에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또 곡식이 아니고 가라지인데, 가라지가 곡식 안에 들어오면 되겠습니까?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그 종류가 다릅니다. 술람미 여자와 같은, 그러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예루살렘 여자의 신앙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신령한 성도로서 영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있고 육신에 속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양(羊)입니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께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다 같은 성경을 보고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지만, 육의 사람으로 믿는 종류와 영의 사람으로 믿는 종류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 종류가 다릅니다. 신령한 귀가 열리고 신령한 눈이 열려서 신령한 길을 걷는 종류와 신령한 것을 모르는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서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모르면서도 목사 일을 볼 수 있고 장로 일을 볼 수 있고 집사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에 속한 신자요, 세상에 속한 신자입니다.

9.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라

본문 41-43절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관원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이 있지만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내놓지 못하고 속으로만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 유대교에게 출회를 당하면 아무 생명이 없었습니다. 즉, 이 관원들은 출회를 당하지 않으려고 드러내 놓고 믿는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내어 놓고 믿지 못했습니다. “나는 믿는다”고 내어 놓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어 놓고 믿는 사람과 내어 놓지 못하고 속으로 믿는 사람은 어떻게 다릅니까? 내어 놓고 믿으면 영이 자라납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다음에 빛이 비추어 나갑니다.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므로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 나가고 자기의 영은 자라나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납니다. 내놓지 않고 몰래 믿어도 믿기는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내어 놓지 않았으므로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고, 오그랑망태기가 됩니다. 

자라나지 못하므로, 중국 여자들의 발처럼 믿음이 오그랑망태기가 되는 것입니다. 중국 여자들의 발을 보았습니까? 옛날에 중국 여자들은 어렸을 때 가죽신을 만들어 발에 신겨놓고 벗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몸이 성장해도 발이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전에 그런 중국 여자를 보았는데, 나이가 한 4, 50세 났는데 발은 여섯 살 난 아이들 발 같았습니다. 몸뚱이는 큰데 발은 아이 발 같아서 뒤뚱뒤뚱하면서 잘 걷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오그랑망태기입니다. 

속에 깨달은 진리, 깨달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했으면 쑥 자라났을 것인데, 또 빛이 환하게 비추어 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인데, 무서워서 안 믿는 체하여 오그랑망태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는 믿었으므로 하늘나라에 가면 불 가운데서 나온 것과 같은, 해 받는 구원은 받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크게 여겼고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신앙 양심을 못 쓰고 믿음을 쓰지 한 것입니다. 믿음을 쓰지 못하므로 자라나지 못합니다. 믿음을 써야 자라납니다. “믿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믿음을 써야 자라납니다. 은혜 받은 다음에는 믿음을 써야 또 자라납니다. 은혜 받은 다음에 믿음을 쓰는 것은 연보하는 것입니다. 
연보하는 것은 은혜 받은 믿음에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믿음을 쓰면 자라나고 은혜가 견고해집니다. 은혜 받고서 믿음을 안 쓰면, 은혜를 무엇에 덮어 놓은 것처럼 자라나지 못하고 힘이 없습니다. 

열두해 혈루증(血漏症) 앓은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몰래 가서 옷을 만져 그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라고 하실 때에 자신이 만졌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오는데 누가 만졌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숨기려고 했는데 이제 “누가 만졌느냐?”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큰일났습니다. 여자는 나서지 않았다가는 당장 여기서 심판 받아 죽을 것 같으므로 “예, 제가 만졌습
니다”하고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만진 것을 나타내려고 하셨습니까? 믿음을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만져서 병이 나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안 나은 체 하는 것은 믿음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병이 낫긴 나았는데 안 나은 체 하는 것, 이것은 믿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고 은혜도 못 자라나고 영도 못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못 드러내고 복음의 광채도 비추어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병이 나았으면 믿음을 쓰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믿음을 쓰라, 전도해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신앙 양심을 쓰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믿음을 못 썼기 때문에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요새 이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믿습니다”하고 믿음을 쓴 자는 많이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