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본받고 그가 주신 은혜 중에서 살라
베드로전서 2:19-25
베드로전서 2:19-25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전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19 누구든지 부당하게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여 슬픔을 참으면 이것이 은혜이다.
2:20 너희가 죄를 지어 매를 맞고 참는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그러나 너희가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일이다.
2:21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2:22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분의 입에는 거짓이 없으셨으며,
2:23 그분은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셨으며,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맡기셨다.
2:24 그분이 나무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이 채찍에 맞아 상하심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분께 돌아왔다.
2:20 너희가 죄를 지어 매를 맞고 참는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그러나 너희가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운 일이다.
2:21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2:22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분의 입에는 거짓이 없으셨으며,
2:23 그분은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셨으며,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맡기셨다.
2:24 그분이 나무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이 채찍에 맞아 상하심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분께 돌아왔다.
본문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끼쳐준 예수님의 본대로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22절에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입에 궤사도 없다는 말은 거짓말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실하게만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욕을 받으셨지만 대신 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란 고난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협했다는 것은 죽인다든지 앞으로 망한다든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권세가 있으셔서 한 번만 기도하면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서 고난당하게 하는 자들을 다 멸망시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도 아니하시고 또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십니다.
1. 예수님을 본 받으라
궤사가 없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신 길은 입에 궤사가 없는 길입니다. 거짓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말을 신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실보다 더 나가지도 말고 덜나가지도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는 일 그것을 본받아야 됩니다.
본문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귀신의 왕이 들렸다는 욕도 받았고, 또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라고 욕도 받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요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욕도 받았고, 로마 가이사 황제를 반역한 반역자라는 등 여러 가지 욕을 많이 받았지만 위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릴 욕하고 핍박하고 고난을 준다고 할지라도,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또 위협하지도 아니하시고 거짓말도 아니 하신 예수님의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귀신의 왕이 들렸다는 욕도 받았고, 또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라고 욕도 받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요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욕도 받았고, 로마 가이사 황제를 반역한 반역자라는 등 여러 가지 욕을 많이 받았지만 위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릴 욕하고 핍박하고 고난을 준다고 할지라도,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또 위협하지도 아니하시고 거짓말도 아니 하신 예수님의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신 예수님
그리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는데,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심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은 사랑으로 일관해 나가시면서,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가 원수 갚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고 공의로 원수 갚으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갈 길만 걸어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30냥에 팔아 먹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롯유다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친구여 너 하기를 하라’고 말씀하시고, 가롯 유다의 심판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결국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먹은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 돈을 제사장들에게 갖다 주려고 하였으나, 제사장들이 받지 않자, 성전에 그 돈을 던지고 가서 목매어 죽었습니다. 목매어 죽은 것도 온전하게 죽은 것이 아니고 높은 나무에 목매어 죽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져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나와 죽었다고 했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가차 없이 심판 하십니다. 며칠 내로 이렇게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준 빌라도는 어떻게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했습니까? 빌라도는 주후 36년에 네로 황제 때 참수 당했다는 설도 있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주후 36년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불과 10년 안에 빌라도가 목 잘려 죽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살 했든지 심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에 헤롯왕은 주전 4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전 4년에 났다고 그러는데 그 해 죽었습니다.
베들레헴 아이들을 두 살 이하로 다 죽이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그 헤롯왕이 그 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시켰습니다. 헤롯의 아들도 사도행전에 보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친히 공의로 심판했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가만 둬도, 예수님이 친히 원수 갚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가롯 유다도 빌라도도 헤롯왕도 하나님께서 다 공의로 심판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공의로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를 말살하려고 하는자는 다 하나님이 심판해서 멸망시킵니다. 일본도 1945년 망하기 직전에 한국 기독교 목사와 장로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계획해 놨다고 합니다. 금강산의 어느 굴 속에 전기를 다 가설해 놓고는, 1945년 8월 15일 지나서 한 2, 3일 내로 목사와 장로들을 수련회 한다고 전부 모아 놓고, 목사 장로가 다 모이면 스위치 한번 눌러서 전부 다 몰살하려고 계획했답니다. 그런 계획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1945년 8월 15일 며칠 전에 미국을 시켜서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일본 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망했습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시고 공의로 심판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끔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요새 기독교 선교사를 안 받아 들입니다. 선교사 간 사람들을 다 쫒아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복을 못 받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잘되게 하고 자유를 주는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줍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선교사를 쫒아 내는 나라들은 하나님이 얼마 안 가면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면 진리운동 방해하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2. 예수님이 주신 은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심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친히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본문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친히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당신은 친히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자기 할 일만 한 것입니다. 자기 할 일을 하시되 원수 갚는 것과 대적하는 세력들, 핍박하는 세력들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은 자기 할 일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 구속사역을 이루는 것, 친히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우리 죄 값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형 선고를 받아 마땅히 죽게 되었는데, 그것을 대신 예수님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하여 사형 받을 것을 예수님이 받으셨고, 사형 집행 받을 것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고,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지 않았으면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있습니다. 죄가 없으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예수님 속에 들어가 계시고, 또 마
리아의 복중에서 완전한 사람이 돼서 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자격이 됩니다. 죄 있는 사람들 같으면 죽어도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됐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 진노를 풀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또 사람이 아니면 우리의 죄를 대속할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속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고, 또 마리아에 복중에 탄생했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시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대속 할 수 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
‘믿습니다’ 함으로 죄 사함 받게 하심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 받습니다. 예수님이 다 해놨습니다. 다 해놨는데 이젠 믿으면 됩니다. 밥으로 말하면 밥을 다 해놨는데 이젠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면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밥 다 해놨는데 먹으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시고 죄가 없으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대신 짊어지시고 죄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밥 다 해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젠 먹으면 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죄 사함 받습니다. ‘믿습니다’하면 죄 사함 받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이 속에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부터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믿기 전의 영혼은 죽었던 영혼이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내세도 모르고 자기 영혼도 모릅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알고 자기가 죄인인 줄도 알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살아나서 압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산 생명, 산영혼이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고, 또 목자가 되셔서 ‘너는 내 양이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도 되시고 우리의 목자도 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새 생명, 산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유교에서는 공자의 교훈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교훈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지만, 공자의 교훈을 지켜도 구원 못 받고, 석가모니의 교훈을 지켜도 구원 못 받습니다. 왜 못 받습니까? 불교에서는 선한 일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선한일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선한 일을 아무리 행해도 원죄를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사람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납니다. 조상 때부터 원죄는 내려옵니다. 아담 때부터 선을 행함으로 원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지옥가야 합니다. 또 지금부터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 전에 지은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가령 10살부터 선을 행했다고 하면 5살 났을 때, 9살 났을 때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 죄에 대하여는 죄 사함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지옥에 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죄 사함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이 불교나 유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선을 행했다고 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죄 사함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서 피 흘려 우리 죄를 대속해 줬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사형을 받지 않습니다. 또 3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산 생명이 있습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목자시고 우리는 양이 됐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는데 죄에 대해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왜 죽은 자일까요?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사형 받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 일생 동안 지을 죄를 예수님이 다 대신 짊어지시고 대신 죄 값으로 사형 받았습니다. 우리 죄는 사형 받는 죄입니다.
하지만 대신 예수님이 사형 받았습니다. 우리 죄가 예수님을 죽인 죄이고 우리가 사형 받을 죄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형 받지 않고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하지만 대신 예수님이 사형 받았습니다. 우리 죄가 예수님을 죽인 죄이고 우리가 사형 받을 죄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형 받지 않고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본문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라는 것이 사형 받은 죄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이 죽은 죄입니다. 내가 죽을 죄였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죄 지을 환경이 닥쳤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럴 때에,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내가 죽은 거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어떤 죄든지 우리 앞에 당면 했을 때에, 양심의 가책과 성경에서 죄짓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죄를 질까 말까 할 때가 혹시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죄가 내가 사형 받은 죄다, 내가 받을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라는 말은 죄를 지려고 할 때에, ‘내가 받을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죽었다, 예수님과 내가 함께 죽었다,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 죽음은 내 죽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 짓고도 자기가 잘 될 줄 알고 짓는데 만약 죄 지으면 죽인다고 하면 죄 지을 사람 많지 않습니다. 홧김에 ‘너 죽고 나 죽고 하자’ 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죄 짓고 잘 사려고, 재미 보려고 합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놀러 가는 것은 죄입니다. 만일 이 죄 짓고 그대로 사형 받는다 하면 주일을 범하겠습니까? 어떤 손해가 있어도 교회 나가고 하나님 잘 섬길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영이 사는 것은 의에 대하여 삽니다. 의에서 우리 생명이 살므로 의는 천하보다 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이 살아야 됩니다. 영이 살아야 새 생명의 역사가 있고 마음이 기쁘고 세상을 다 이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영이 살지 못하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말은 영은 의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에 나라입니다. 의를 아주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8복 가운데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얻습니다. 의에 주리고 굶주린 자는 배가 부릅니다. 만족 한다는 말입니다. 의에서 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의를 행해야 합니다. 옳은 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을 하며 의에서 살아야 됩니다. 죄
에서 죽고 의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했는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서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은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 나은 사람은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줬기 때문에 나았다 생각하십시오. 감기 걸렸다 나은 사람도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았다 그렇게 믿으십시오. 최정숙 전도 부인이 이번에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못 왔습니다. 이제 좀 있으면 나아서 올 것입니다. 그럼 물어 보십시오. 어떻게 나았나 물어보십시오. ‘어떻게 나았나요?’라고 물을 때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았다고 하면 만점이고, 모 병원에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나았다고 하면 그것은 낙제입니다.
길을 잃었던 우리에게 목자와 감독이 되어 주심
본문 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과거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습니다. 갈 길을 몰랐습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하며 미신을 섬기고 성황당에 가고 또 무당한테 가서 물어보고 환상 보고 손금보고 사주팔자 보고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다닌 것입니다.
옛날 어떤 정승이 있었는데, 그 정승이 자기 딸이 과부될 팔자라는 미신을 믿고는, 어느 날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 하나를 자루에 잡아넣어 메고 들어 와서 하룻밤 자기 딸하고 자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남자를 물에 빠뜨려 죽였답니다. 그 남자는 그 처녀와 하룻밤 자고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제 정승의 딸은 과부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정승은 자기 딸이 시집가도 잘 산다고 믿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어리석었습니다. 양과 같이 길을 잃어 버려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방황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른길을 찾아야 합니다. 감독되신 이에게, 목자 되신 이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요 우리의 감독이요 우리를 지키시는 자시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주인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양들이 이제는 제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 길을 찾았습니다. 제 목자를 찾았습니다. 이제는 지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염려 없습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고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길을 잃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는 생명길을 찾았으니까, 우리의 감독이시요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목자 있는 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걱정이 없습니다. 목자가 다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함정에 빠져도 나오게 해주시고, 잔잔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주시는, 감독되시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염려와 걱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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