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3일 토요일

누가복음 19:1-10 삭개오의 신앙,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삭개오의 신앙
누가복음 19:1-10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 난관을 돌파한 신앙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심

본문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라는 도시는 염해 위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 지방은 향품이 많이 나서 경제적으로 부유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그곳에 세리장을 파견하였고, 세관도 그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는데, 세리장이며 또한 부자입니다. 당시에 세리장은 돈을 꽤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로마정부에서 세금을 받을 때, 세리장들에게 청부를 주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지방에 “1년에 얼마씩 세금을 상납하라”는 청부를 주고 세금을 징수하는데, 그 지방 세리장의 자유대로 세금을 거둬들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정부에서 청부한 액수보다 몇 배나 더 세금을 많이 받아도 괜찮았습니다. 세금을 백성들에게 많이 받아서 로마정부에는 정해진 세액만 상납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방 세무서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세금을 많이 착복하여 치부(致富)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리라고 하면 백성들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 백성들의 물질을 착취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본문 3절에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보았는데, 작은 키 때문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려고 했지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상당히 작았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뚫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옆에서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본문 4절에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한 번 보려고 늘 사모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늘 들었으며, ‘어떠한 예수님인가? 한 번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항상 사모했고, 또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예수님을 꼭 뵈어야겠다, 영접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말이 삭개오에게 들려왔습니다. 이에 ‘옳다, 이번에 내가 예수님을 뵈어야겠다, 이 지방에 예수님이 한 번 오시기가 아주 힘든데, 이번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보면 한번이라도 보는 것이고 이번 기회를 잃어버리면 앞으로 보기 힘들다,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보겠다는 간절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들이 많고 키가 작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가지 난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할 때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난관이고, 키가 작은 것이 난관입니다. 키만 크면 넘겨다보면 되겠는데 키가 작으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며 포기하고 집에 돌아갔으면 다 끝났을 것입니다. 일생 동안 예수님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꼭 한 번 보겠다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든 봐야 한다, 이번 기회에 못 보면 일생 못 볼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도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무슨 방도가 없을까?’라고 삭개오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어 뚫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좀 들어가 봅시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들어가 보게 하겠습니까? 서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새치기하겠다고 하면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원망해야 쓸 데 없는 것이고, 원망하면 죄만 짓는 것입니다. 또 키가 작아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원망해도 쓸 데 없습니다. 본래 작게 생긴 것을 갑자기 크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낙심하기 쉽지만 삭개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인데 그 외의 것을 원망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꼭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을까? 얼핏 생각난 것이 뽕나무에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앞으로 뛰어나가 뽕나무에 기어 올라갔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리장 쯤 되었으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장’자리, 즉 세리장 쯤 되려면 40~50대는 되었을 것 같습니다. 또 삭개오는 부자이므로 몸도 뚱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삭개오는 키가 작고, 몸은 뚱뚱할 가능성이 있으며, 나이도 꽤 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그 동네에서 세리장은 로마 관리이므로 나름대로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이들같이 뽕나무 위에 기어 올라간다는 것은 세리장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새 군수, 경찰서장, 세무서장 등이 보통 유지급인 것처럼 당시 세리장도 상당한 유지입니다. 그 유지급이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군수가 뽕나무에 기어 올라갔다고 해봅시다. 저 따위가 무슨 군수냐?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그럴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삭개오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다’는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속에서 불붙듯 올라왔기 때문에 체면을 차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는 생각할 바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식구들도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멸시할 수 있습니다. 혹 주위에서 자녀의 동무들이 “너의 아버지, 저기 올라갔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얼마나 멸시하겠습니까?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올 때 다윗이 그 앞에서 춤추는 것을 보고 부인 미갈이 멸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또 뽕나무에 나이 많은 사람이 올라가면 떨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기어 올라가도 괜찮은데, 나이 한 50쯤 되면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모험을 무릅쓰고 또 위신이나 자존심, 명예심 등을 다 내어놓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한 번 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실은 뽕나무보다 더한 데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 하면 아무데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가 어떻게 장애가 됩니까? 아무데라도 올라갈 수만 있으면 다 기어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할 것입니다. 소나 나귀의 잔등이에라도 기어 올라갈 수 있고, 나무 단 쌓아 놓은 데도 올라갈 수 있고, 낫가리 위에도 올라갈 수 있고, 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데 체면이 어디 있으며, 위신이 어디 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겠냐, 는 것을 왜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보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해서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속에 불붙듯 올라왔기 때문에, 어디를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데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남이 못 올라가는 데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남이 멸시와 천대를 하여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뽕나무를 쳐다 보신 예수님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우러러 바라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날 네 집에 가서 유숙하여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삭개오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한량없는 즐거움에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분명하다, 내가 뽕나무에 오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또 삭개오라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을까? 또 나 같은 죄인의 집에 어떻게 오시겠다고 하시는가?’, 감개무량한 마음이 생기고 믿음이 쑥 들어갔습니다. 이에 과연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뽕나무를 쳐다보며 가셨을까요? 보통 앞만 보고 가지, 나무 꼭대기를 왜 쳐다보겠느냐는 말입니다. 뽕나무 위를 안 보고 지나가셨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요? 예수님은 벌써 다 아셨습니다. 여리고에 가시기 전부터 그곳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말해 드리지 않아도 모두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것을 다 알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신 목적은 삭개오를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니고 삭개오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이므로 내가 삭개오를 가서 만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시지 않았어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시고 “우러러보시고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찾아오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예수님을 사모하여 간절히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 멸시받는 것, 위험한 것, 이 모든 것을 다 무릅쓰고 뽕나무 위에 올라간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 자기는 키가 작고, 죄인이라는 것 등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조건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3가지 난관을 다 돌파하고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보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교회와 집에 찾아오셨고, 우리 심령 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곳에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하시러 찾아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불러서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과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가서 유하여야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머물 데가 없어서 그 집에 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집에 선물을 주시려고 가시려는 것입니다. 그 집에 구원의 선물을 주시려고, 사죄와 칭의의 선물을 주시려고, 의를 주시려고, 영생을 주시려고, 삭개오를 불러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세리 노릇을 하다 죄만 짓고 망하겠으므로 예수님께서 가만히 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삭개오는 택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만히 두시면 죄만 짓다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차차 뒤로 미끄러져, 그만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죄만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는 일 안하고, 믿음은 다 내어 버리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과 더불어 짝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이름을 부르시면서 ‘너 거기에 있지 말고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네가 살고 있는 이 여리고, 네가 하던 일, 네가 생활하던 그 행태, 네가 하던 행동 등, 그대로 두면 안 되겠으므로 속히 거기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바라만 보지 말고 어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내려오라고 하실 때 내려와야 합니다. 내려오는 것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로 내려가야 합니다. 겸손히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로 내려가라는 말입니다. 바라만 보지 말고 더 가까이 예수님 곁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있던 위치에 있지 말고,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더욱 더 예수님을 찾아가는 생활, 한걸음 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생활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날마다 가까이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뽕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

삭개오는 내려가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악수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악수했다는 말씀은 없는데, 아마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주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너무 귀하고, 삭개오는 예수님이 귀합니다. 그래서 한참 서로 쳐다보았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어떤 성도가 “이병규 목사를 찾아 왔다”고 하길래 “내가 이병규”라고 하니 얼굴을 가까이 하고 한참을 쳐다봅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느냐고 하니 여러 해 동안 한 번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어 한참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쳐다보아야 아무 볼 것도 없는 것을 쳐다보면 뭘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한참 쳐다보면 그것은 참 볼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아야 볼 것 없습니다. ‘주여, 바라봅니다’하고 예수님만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더 가까이,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내려오시라고 하시는데,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또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자리, 그 자리에까지 나아가야겠습니다. 이 기회가 지나가면 못 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한 번 지나가시면 다시 오시기 힘듭니다.

삭개오는 그 기회를 잘 붙잡았습니다.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붙잡지 않으면 기회는 지나가버립니다. 오늘 할 일을 오늘에 해야 합니다. 지금 할 것을 지금 해야 합니다. ‘내일 하겠다, 이 다음에 하겠다’하면 결국 마귀에게 다 빼앗깁니다. 내일은 마귀의 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일 잘 하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잘해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너라” 하실 때에 내려가야 합니다. ‘이만 했으면 족합니다’하지 말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야 말입니다. 

본문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한 사람은 마음이 즐겁습니다. 또 영접할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로 발견한 사람은 그 속에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모시는데 왜 즐겁지 않겠습니까? 한량없는 즐거움이 그 속에 생깁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만족하게 됩니다.

예전에 최권능 목사의 집이 조그만 오두막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선교사가 최권능 목사의 집에 온다고 하니 사모님이 “이런 집에 어떻게 선교사가 오겠습니까?”하고 좀 꺼렸다고 합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가 “아니, 우리 집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선교사가 왜 못 오겠는가? 예수님이 계신 얼마나 좋은 집인데 못 오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선교사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형편없는 집인 모양인데, 그래도 최권능 목사는 바로 그 집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크고 훌륭한 외관의 집들보다 더 좋은 집으로 알고 항상 만족하며 감사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한 번은 최권능 목사의 따님이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자기 아버지의 신앙을 간증하면서 전도한다고 합니다. 그 따님이 우리 강해서를 한 질 달라고 해서 주었습니다. 강해서를 가지고 가르쳐야지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전화가 왔는데, 강해서 가지고 전도하니 다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 못 다한 것 다 하시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셋집이라 해도 하나님을 모신 집이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집입니다. 두, 세 사람 밖에 누워있지 못할 만한 좁은 방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모신 집이 왕궁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죄인으로 지목하고, 자신의 집을 죄인의 집이라고 하지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본문 7절에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니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죄인의 집도 모르고 들어갔다”고 비방을 했습니다.

2. 말씀대로 행하는 신앙

회개한 삭개오

본문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4배나 갚겠다는 말은 출애굽기 22장 1절에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라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또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는 것은 이제는 “성경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또 성경대로 바로 하는 마음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기쁨으로 준 삭개오

그 다음에 자기의 소유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믿음을 쓴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너무 감사해서 내가 무엇으로 보답을 할까? 하나님을 내가 무엇으로 기쁘게 해 드릴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는데, 내 재산 절반은 팔아서 구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그 재산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 사용하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해서 인색한 사람은 믿음을 쓰지 못합니다. 물질에 대해서 믿음을 써야만 다른 데에도 믿음을 쓸 수 있습니다. 물질이 제일 기초입니다. 첫 계단이 되는 물질에 대해서 믿음을 안 쓰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예 절반 뚝 잘라서 “이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에 쓰겠습니다”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 재산 절반을 팔아서, 뚝 떼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에 써야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선교하는 일도 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는 것, 믿는 일에 쓰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 재산 절반을 아예 팔아서 뚝 떼어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쓰겠습니다’는 신앙을 가지면 삭개오와 같은 신앙을 소유한 것입니다. 

지난날, 없이도 살았는데 절반만 있어도 많은 것입니다. 6.25때 피난 갔던 일을 생각하면 절반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신학생들도 처음 입학할 때 빈손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4, 5년 지나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면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또 더러는 조사가 되어서 교회 나갈 때면 짐을 한 차 싣고 갑니다. 한 번은 “언제 이렇게 많이 모아서 한 차 싣고 가느냐?”라고 물어봤더니 다 주워 온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 동네에서 부자들이 새 것으로 사다 쓴다고 좋은 물건들을 내어다 버릴 때 그것들을 주어다 놓으면 아주 멀쩡하하다고 합니다. 나도 사무실에 주어다 놓은 옷장 두어 개가 있는데 모두 멀쩡합니다. 빈손 들고 왔어도 4, 5년 정도 되면 한 차 싣고 가는데, 우리가 왜 못살겠습니까? 다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해서 마음을 바로 해야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물질에 인색한 사람은 그저 쌓아놓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기도 못 쓰고 죽습니다. 죽은 다음에 그 자손들이 그것을 다 지키겠습니까? 그러기도 쉽지 않고, 또 자손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 그 물질 때문에 방탕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한 삭개오가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아예 처음에 소유 가운데 절반 뚝 잘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남은 것 가지고 토색한 것을 4배로 쳐서
갚으면 그 재산 다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했습니다.

4배나 갚겠다는 말은 성경에서 나왔는데, 성경대로 하겠다는 정신이 삭개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즉, 성경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는 것을 보니 삭개오에게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죄는 날마다 찾아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전 삭개오의 생활이 법에 걸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금은 로마정부에서 받으라고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받았고 또 바칠 것을 다 바쳤으므로 저촉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고소해도 걸릴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생각할 때에 삭개오에게 죄가 많습니다. 이에 토색한 것이 있으며 4배로 갚아야 하나님께 바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른 생각하면 다 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죄가 많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눈에 있는 티고, 자기 속에 있는 죄는 들보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속에는 여러 가지 죄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입술로 지은 죄, 행동으로 지은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되 부족한 것, 또 순종하지 못한 것 등 이러한 것들이 다 죄인데 그것을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성경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생(餘生)은 ‘성경대로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겠다’라고 의식하며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라는 삭개오의 말은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정한 세 외에 더 받지 말라”고 한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한 세 외에 더 받는 것은 자기
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바, 바로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간음하는 자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다 있습니다. 각자에게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말씀이 다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주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봄철이 되어 날이 따스해지고 곧 꽃이 피겠는데, 이제 주일에 꽃 구경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안 가려고 해도 집안 식구가 가자고 하면 할 수 없이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운 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심판받는 사실을 모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일에 놀러 다니면 안 됩니다. 예배시간에 빠지고 주일날 놀러 다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팔아먹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식구가 가자고 해서 가면 식구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어기고 다른 것을 따라가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우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우상을 이겨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이겨야 할 것을 이겨야 합니다. 또 마땅히 자기가 지켜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세리가 지켜야 할 진리는 정한 세 외에 더 받지 않는 것입니다. 더 받았으면 4배나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지켜야 할 말씀을 바로 지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가 다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욕심 부리는 사람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십일조 드리지 않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서 인도하시는데, 신앙 양심을 써야만 합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켜야 할 진리를 지키면 됩니다. 

3. 구원받은 삭개오

본문 9, 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집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즐거워하며, 또 예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진리를 그대로 지키는 사람의 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심령 속에 예수님을 모셨으므로 벌써 구원이 이르렀고, 또 재산을 가지고 믿는 일에 쓰게 되었으므로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모하여 난관을 돌파하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애를 써서 예수님을 만나고, 죄를 회개하고, 자기가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것을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전심을 기울여서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을 이제는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내려오너라” 할 때에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죄인이라서 못갑니다’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모시면 다른 사람이 비방하지 않을까, 이런 염려로 “못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은 천재일우의, 큰 복인데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즐거움이 생기고 회개가 나오고 소유한 재산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지켜야 할 성경 말씀을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오늘날 우리 에게도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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