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영접한 자들
누가복음 19:1-10, 28-44
누가복음 19:1-10, 28-44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
예수님을 보기 위해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감
여리고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 가운데 첫째가 삭개오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여리고라는 도시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세리장이요, 부자요, 키가 작은 사람이요,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듣고 보고자 하여 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늘 오시기를 기다리던 구속주, 메시아가 오셨다는 말을 삭개오가 듣고서 나아온 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구속주의 오실 것을 믿고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여리고의 삭개오가 있는 그 동네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본문 3-4절에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셨는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갔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또 자기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이리로 지나가시는데 내가 금번에 반드시 예수님을 봐야 되겠다’는 간절하게 소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사람 위로 넘겨다 볼 수 없었고, 또한 예수님을 둘러싸고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뚫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달아 나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뽕나무가 길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면 그 옆의 길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세리장이라 하면 그래도 괜찮은 직책의 사람인데, 요새로 말하면 세관장 같은 것입니다. 그 지위가 상당합니다. 또한 부자이고 그러면 나이도 꽤나 됐을 것입니다.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보통 뽕나무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남 보기에도 그렇고 위신도 안 되고 말입니다. 또한 세리장의 지위를 가지고 아이들처럼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자기의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만나려는 것이 원 목적이었습니다. 무슨 부자다, 세리장이다, 이런 지위, 자존심, 이것들을 다 내버리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한 분 지나갈 때에 내가 보면 최고의 만족이다’라고 생각하고, ‘이 기회 지나갈 때에 못 보면 일평생 예수님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젊은 아이들 같으면 쉽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수 있지만, 나이든 사람은 힘듭니다. 오르다가 떨어질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사람이 많고 예수님을 볼 수 없는 난관 가운데, 어떻게 하든지 이기고 기어코 예수님을 보고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 여러 가지 어려운 난관이 많지만 그런 난관을 다 돌파하여 이기고 기어코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기회라는 것은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나가십니다. 삭개오의 집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지나가십니다. 지나가는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지나가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여리고라는 동네를 쭉 지나가시는데, 그 동네 지나가는 시간이 불과 몇 십분, 얼마 안 걸릴 것 같습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얼마 안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 예수님이 찾아오신 그 기회, 이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갈 수 없는 상황, 여러 부분에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갈 수 없는 면이 많았습니다. 남들이 다 아는 사람이고, 부자이고, 세리장이며, 그 동네에서 그래도 높은 지위에 있는데, 뽕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보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목적이지, 다른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지나보내면 이젠 구주를 영접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생각하지 않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실 때에 보고자 했습니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예수님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시다가 길가의 뽕나무 위에 삭개오가 있는 걸 아시고 우러러 쳐다보셨습니다. 이에 삭개오가 얼마나 기뻤는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자기를 쳐다봐 준 것이 얼마나 반갑습니까? 앞에만 보고 가실 줄 알았는데, 뽕나무 위에 있는 자기를 이렇게 아시고, 우러러 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자기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실 때에 너무나도 감개무량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시며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 집에서 머물러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까지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쳐다보시고, 와주시고, 또 자기를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는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너무 즐거워서 본문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급히 내려와서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얼마나 참 기쁘고 감사할 일인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귀한 일이고, 아주 큰 은혜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무엇 때문에 찾아 오셨겠는가? 찾아오신 것이 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하시러 찾아오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리고에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셨는데, 그 여리고에서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가 하면, 삭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 하나 찾으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도 아시고, 삭개오가 구주를 사모하는 것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가시기 전에 다 아셨습니다. 영을 통해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할 때가 많았는데,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아직 오시지 않으셨는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이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멀리서부터 영적으로 그 나다나엘과 통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렇게 사모하는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삭개오가 여리고에 있는 것을 아시고 가셨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까지 아시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왜 찾아가셨습니까?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가신 것입니다. 오신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것까지는 지금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만 듣고 너무 즐거워서 예수님을 보고, 한 번 바라만 보려고 이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며 삭개오를 불러주신 예수님,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께서 불러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는 말씀, 불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의 이름을 알아주시고, 우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는 그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은 삭개오
기회를 지나보내지 않는, 잃어버리지 않는 삭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구원하러 찾아오셨지만, 그때 상황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가 뽕나무에 안 올라갔다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이 가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함께 가는데, 엠마오라는 동네를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두 제자가 간청을 해서 예수님을 엠마오로 모시고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지나가시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 기회를 지나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못 찾습니다. 기회를 지나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붙들고, 이제는 집에 모시고 들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들어가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붙잡으면 들어가시려고 하십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생명수를 주시고, 모든 은사를 주십니다. 구하는 자, 사모하는 자, 갈급증이 난 자, 목마른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수를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지금 지나가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사모하고 영접해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다 지나가고 맙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회에 예수님을 사모하고 만나보려고 애를 써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이 있어도, 난관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방해되는 것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뽕나무에까지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방거리가 될 만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찾아보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바라보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는 것이 원 목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기회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보고, 찾아보고, 가까이 하고 영접하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영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기뻐서 ‘내가 오늘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집에 같이 들어가십니다. 우리 집이 예수님을 모시는 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에 들어가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모시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만 영접하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은 그런 행동을 비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뭘 저렇게 하는가. 예수가 뭐 길래 영접하는가’하고 이렇게 비방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왜 죄인의 집에 들어갔는가’하고 흠을 잡아서 비방하는 사람도 언제나 있습니다.
재산을 의지하던 삭개오가 회개하고 변함
본문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이렇게 그 속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삭개오가 믿음이 쑥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것이 너무 커서 감격하게 됩니다. 그 때에 회개할 마음도 나오고, 또 선한 일을 할 생각도 나왔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한 것은 선한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쌓아놓고 그것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과거 이 재산을 의지하고 살려고 했던 것이 어리석고 죄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2:1에 보면 “남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은 사배나 갚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배를 갚는다는 것은 성경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자기 죄 지은 것을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리장으로서 세금을 받을 때에 너무 많이 받거나, 불의하게 세금을 거둬놓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네 배나 갚아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성경대로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부자로서 자기 재산을 의지하고 살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 재산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예수님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면 살고, 또 데려가시면 가고,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예수님 한 분이시면 됩니다.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이제 다 해결이 됐는데, 그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재산 절반을 뚝 잘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구제 사업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재산은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쓰라고 주셨는데, 쓸 때 정당하게 쓰고, 또 구제사업도 하고, 하나님의 일 하는 데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색한 것, 남에게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으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믿음을 쓴 것입니다. 믿음을 쓰면 재산을 초월합니다. 그 물질을 가지고 선한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물질 가지고 살아보려고 하며 물질이
우상이 됩니다. 믿음 없을 때는 물질 가지고 살려고 하지만, 믿음이 들어오면 하나님으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됩니다. 그와 같이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물질은 하나님께 바로 쓰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바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주님을 영접을 하고, 주님을 깨닫고,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또한 주님과 사람에게 합당한 일을 행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의 뜻대로만 살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물질부터 주의 뜻대로 처리를 하고, 그 다음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순종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본문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을 영접한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본문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바로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기 위해서, 죄인을 순종시키시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도 이런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이름을 알아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 집에 유하려고 하십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유하시는 예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
수님을 모신 사람은 이제는 주를 위해서 살고, 주의 뜻대로 살고,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리고로 가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뽕나무에까지 올라가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구원하시고 그 집에 들어가셨으며, 큰 구원의 역사가 그 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영접한 자들
나귀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려고 했는데, 벳바게와 베다니 동네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저 동네 들어가면 아직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볼 것인데,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주인이 왜 푸느냐고 물어보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2-34절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했습니다. 나귀의 임자들에게 “주께서 쓰시겠다”하니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나귀 임자들은 벌써 예수님을 위해서 나귀를 바치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저 동네 있는 아무개가 하나님을 위해서 나
귀를 바치려고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귀를 바치려고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어 가서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풀어 오라고 그러셨습니다. 나귀 풀어올 때에 누가 왜 푸느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푸는데, 주인들이 나와서 왜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그들은 가져가라고 단 마음으로 그 나귀를 바친 것입니다. 나귀 주인의 이름은 여기 기록이 안됐지만 무명으로 나귀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35-36절에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라고 했는데, 그것은 나귀 새끼에 안장이 없으니 예수님께서 타시기 위해서 겉옷, 즉 두루마기 같은 것을 제자들이 나귀 새끼에다 얹어서 그 위에 타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왕의 거동을 하시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왕으로서, 영적 왕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려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신 목적이 있습니다. 나귀는 평화의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서 오십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구약에 그리스도께서 ‘나귀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자기 옷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영접한 자들
그렇게 나귀에다 자기 겉옷을 펴고 예수님을 태운 제자들, 예수님께서 타고가실 때 나귀가 걸어가는 길바닥에다가 사람들도 옷을 벗어서 폈습니다. 나귀는 그 옷 위에 턱턱 발을 딛고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 위에다 옷을 벗어서 깔아준 제자와 나귀가 걸어갈 때에 길에다 옷을 벗어서 깔아준 군중들은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옷을 하나님의 아들 앞에,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 갖다가 깔아줬다 하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옷에 앉으라고 할 만한 자격이 못되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마당에 자기 옷이라도 벗어서 깔아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깔아드릴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는 마음으로 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깔아드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가는 길가에도 옷을 깔아드렸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옷을 깔아드린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자기 옷 위로 하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셨는데, 그 얼마나 영광입니까?
자기 옷 위를 안장으로 해서 예수님을 그 위에 타시게 한 것이 영광이고, 예수님 타고 가시는 나귀가 자기 옷 위로 걸어가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옷 위로 걸어가신다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그 옷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이고, 하늘나라에 쌓은 복이 되었습니다. 그 옷을 그냥 자기가 입고 다녔으면 얼마 안 있어서 다 째져 없어졌을 텐데, 예수님을 위해서 이용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까지 그 옷이 보배로써 상달이 된 것입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신령한 성도에게 평화가 임함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예수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가셨습니다. 본문 37-38절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왕이시여”, 예수님은 왕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왕을 상징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것인데, 이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왕이신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놓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2:14에는 천군 천사가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천군 천사가 부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천사가 찬양합니다.
본문의 38절에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했는데, 하늘에 있는 평화라는 것은 구원받은 신령한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평화라는 것은 ‘구원받은 신령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이 땅 위에서도 성도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하늘에 속한 자들이고, 벌써 하늘에 올라가 앉은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14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얼마나 지금 복된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 예수이신데,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그 백성들, 하나님을 나귀에 태우고 이렇게 모시고 가는 군중들이 그 얼마나 복된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또한 구속주이신데, 하나님이신 동시에 구속주이십니다. 우리들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오신 구주를 위해 이렇게 옷을 나귀 위에다 깔고, 예수님을 태우고, 그 나귀가 가는 길에다가 옷을 펴고 자기 옷 위로 나귀가 걸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바로 영접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큰 구원이 그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벌써 하늘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신령한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구주로 모시고,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즐거워하고,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하늘 세계의 일인데, 이것을 그 사람들이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는 평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영적 평화가 있을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들을 시켜서 하신 말씀인데,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시켜서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일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여리고 성에서는 가장 큰 일이지만,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나귀를 태우고 올라가는길에 제자들과 모든 군중들에게도 큰 구원이 임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그곳에 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큰 구원이 그 자리에 임했습니다.
어느 곳이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데가 하늘나라입니다. 뽕나무 위에나 자기 집이나 길가에나 나귀가 있는 곳이나, 그 어디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 곳이고 영적 생명이 사는 곳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 생명이 살아서 다 기쁘고 즐거워하면서 ‘호산나!’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큰 구원이 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고 가면, 이런 큰 구원이 우리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아낌없이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내 옷이라도 바쳐서 주님을 좀 더 영화롭게, 좀 더 잘 모시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쓴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 겉옷이 가장 귀한 것이지만 이것도 바쳐서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하나님을 예수님을 좀 더 영광스럽게 하려고 바쳐드리는 그것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3. 멸망의 날이 가리워져서 알지 못함
그런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본문 39절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왜 책망하라고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왕이라 하고 그리스도라 하며 예수를 이렇게 존귀하게 대하니, 시기가 나서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본문 40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이 잠잠하다면 여기 있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렇게 큰 구원이 임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믿지 아니하고 이렇게 비방만 하느냐, 반대만 하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41-44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을 바라보시고 우셨습니다. 이런 큰 구원이 왔지만 구주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만 지으니, “너의 멸망은 이제 눈앞에 가리웠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날을 알지 못하고, 회개시키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바른 생명의 길로 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거역하고 죄만 짓고 나아가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제 눈앞에 가리워진 것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멸망이 오겠는데, 그것을 눈이 가리워져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는지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한국이나 서울을 바라보실 때에, 하나님의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거역하고 죄만 짓고 나가는 이것을 볼 때에 이렇게 우실 것 같습니다. 큰 구원이 왔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구원 받을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거역하고 죄만 짓고 나아가는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처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심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오는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심판이 오겠는데, 오늘날 이 세상은 소돔 고모라와 같습니다. 음녀(淫女)와 같은 이 대도시들에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심판이 멀지 않은 줄 알고,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참으로 모시는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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