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말
욥기 32:1-22
1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6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7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8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9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10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1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
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12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찌니라 14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15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16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18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19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20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22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욥기 32:1-22
1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6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7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8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9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10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1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
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12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찌니라 14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15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16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18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19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20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22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1. 엘리후가 참고 있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함
엘리후가 연로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기다림
본문 1-5절에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전(前) 장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순종한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순종만 하면 됩니다. 순종만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순종하는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고난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다고 성내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을 잘 순종해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으로 그 사람에게 채워주십니다.
본문 6-7절에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연로한 사람이 말을 다 할 때까지 잘 참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인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입니다.
연장자가 말을 할 때에 젊은 사람은 끝까지 듣고 있다가 연장자가 말을 마치면 자기 말을 해야 합니다. 연장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기 생각대로 말해버리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말한 것이 나이 많은 사람이 한 말과 같겠습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지혜도 더 많으니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욥기 12장 12절에 “늙은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늙은 사람이 더 지혜가 있습니다. 엘리후가 이것을 알고 나이 많은 사람이 말을 할 때까지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지 않고 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며 자세히 들은 것입니다.
본문 11-12절에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귀를 기울였고, 기다렸고, 자세히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자세히 들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잠언 18장 13절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사연을 바로 안 다음에 답변하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하여 다른 사람이 말할 시간을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연도 바로 안 다음에 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또 나이가 많다고 자기 생각대로만 얘기하며 상대방의 말은 끊는 사람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엘리후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되다가 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어두운데서 헤매는 자이며 흑암에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또 자세히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잘 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다른 사람들의 흥망성쇠를 다 보고 산 사람입니다. 성경도 10년을 연구한 사람보다 20년을 연구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 것이고, 40년을 연구한 사람은 더욱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이 많은 사람이 오랜 경험과 여러 사람의 흥망을 살펴보고 경험하면서 몇 십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에 젊은 사람이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보통은 노인의 총명이 깊지만 예외도 있음
본문 8-9절에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노인과 장수하는 자가 더 지혜가 있고 모든 면에서 낫지만 그러나 전부 그렇지는 않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심령이 있다는 말은 성령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계시므로 젊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자의 기운을 그 사람에게 주셨기 때문에 젊은 사람도 깨닫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통은 젊은 사람과 노인을 비교하면 노인이 낫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모를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젊은 사람에게 그것을 알도록 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2. 엘리후가 세 친구의 말보다 더 나은 말을 하겠다고 함
본문 10-13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 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기 속에도 계시며 자신에게 총명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참고 있다가 이제는 말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세 친구는 말로 욥을 이기지 못하나 자기는 젊었어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욥을 이길 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33장 19-22절에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는 말을 잘하여 욥의 세 친구처럼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엘리후가 잘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엘리후는 지금 세 친구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 친구의 말은 욥에게 합당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엘리후도 자기는 잘한다고 했어도, 결국 욥에게 바른 말을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바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3. 엘리후가 할 말이 많다고 함
본문 15-20절에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안하니까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속에서 자꾸 자기 의견이 나와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음이 마치 봉한 새 포도주처럼 계속 올라오고 가죽부대가 터질 것처럼 나온다는 것입니다.
4. 엘리후가 아첨하지 않는다고 함
엘리후가 욥을 향해 자신의 신앙 정도에서 말함
본문 21-22절에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자기는 절대 아첨을 하지 않고 바른 말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속으로 참으려고 하였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서워서 자기의 할 말을 못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첨하지 못한다. 사람의 낯을 보지 않는다. 나이 많은 사람의 말을 들어도 결국은 시원치 않다. 부득불 자기가 말할 수밖에 없어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엘리후가 자기 신앙의 정도에서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엘리후의 신앙으로는 욥의 깊은 신앙 세계를 알 수 없음
그러나 엘리후의 말은 욥의 신앙 정도로 볼 때에 바른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욥에게 괴로움을 주는 말입니다. 그가 참으려다가 속에서 나와 할 수 없이 얘기한다고 했지만, 기껏 이야기한 것이 ‘욥이 병상에서 고통 받는 것은 징계를 받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엘리후는 굉장한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자기가 제일 옳게 말하는 것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그 말은 엘리후 자신에게는 합당한 말이지만 욥에게는 합당치 않은 말입니다.
높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과 얕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과는 신앙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얕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이 높은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을 볼 때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므로 잘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아브라함이 독자(獨子)를 바치는 것을 보면서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 모세가 애굽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 한 것을 보고도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그가 공주의 아들이라는 높은 지위와 재산과 향락을 다 내버리고 떠난 것을 볼 때에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의 외삼촌이 장로인데, 조카가 평양 신학교에 간다고 하였을 때 그 외삼촌이 “할 짓이 없어서 목사가 되겠다고 거기를 가느냐?”고 하였답니다. 그 장로는 돈도 많고 사는 것이 괜찮았던 모양인데, 자기 조카가 신학교에 간다고 하자 세상에서 잘 살지, 뭐 하러 고생을 하느냐고 나온 것입니다. 목사 일은 고난이 많습니다. 미국 LA의 한 교회에서는 당회를 한 번 하려면 목사가 혈압이 올라 그 예방으로 청심환 2알을 미리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목사를 얼마나 못살게 하면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그 외삼촌은 조카에게 목사를 하지 말라고 나왔던 것입니다. 장로의 정도가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정도가 어린 자는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것이며, 먼저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구제를 받는 것이 복이고 도움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으로 볼 때에는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신앙이 얕은 사람은 받고 기뻐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은 주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실 때에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근심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이것은 다 신앙 정도의 차이인 것입니다.
잠언 30장 8절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부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을까봐 부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가난하게 되면 도둑질을 하여 하나님께 욕이 돌아 갈까봐 가난하게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날, 그날 먹을 것만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 사람 신앙에는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풍성할 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고 배부를 때도 있고 굶주릴 때도 있는데, 그 모든 가운데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정도에서는 잠언의 기자와 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많이 주셔도 거기에서 신앙을 잘 지키고, 아무리 없어도 거기에서 신앙을 잘 지켰습니다.
잠언 30장의 사람은 많이 주면 신앙을 배반하고, 적게 주면 도둑질을 하니까 필요한 양식으로 채워달라는 것이 그 신앙의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신앙의 정도대로, 자기 신앙의 척도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 엘리후도 자기의 신앙 정도대로만 판단한 것입니다. 욥의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 깨닫지 못하고 자기 신앙 정도로 나간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양심, 자기의 생각대로 말한 것입니다. 또 양심대로 한다고 다 바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양심이 바로 된 것입니다. 양심대로 하려고 사람을 죽이고, 양심대로 하려고 제사를 하고, 양심대로 하려고 별 짓을 다 하는데, 성경에 순종한 양심이 바른 양심인 것입니다. 엘리후처럼 자기 판단이 다 옳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서너 살 된 어린 아이가 친구들과 놀다가 “친구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다”고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 말대로 친구가 그 아이의 집에서 밥을 먹었고 아이는 양심대로 말한 것이지 아첨하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을 통해서 그 친구는 밥이나 얻어 먹으러 다니는 아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대로 했다고 다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맞는 말이 바른 말임
바른 말이라도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실상 바른 말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잠언 30장의 기도는 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본인은 바른 말만 한다고 하지만, 돌아다니며 사건만 일으키고 남의 속만 상하게
만들며 일에 방해만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일에 손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은혜 받지 못하게 말하고는 그것을 바른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일에 손해를 주는 일만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은 바른 말이 아닌 것입니다. 엘리후가 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의 신앙 정도와 욥의 정도는 천지 차이입니다. 그래서 그가 욥을 정죄하며 욥을 이긴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오지만 욥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욥이 이겼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얕은 신앙을 가지고 ‘내가 바른 말을 한다. 양심대로 말한다. 아첨하지 않는다. 사람의 낯을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말은 자기 속에서 참을 수 없이 나오는 하나님의 말이라고 하지만,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맞는 말만 바른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복종한 양심만 바른 양심입니다. 아무리 바른 말 같아도 성경에 맞지 않으면 바른 말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를 성경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무슨 문제가 생길 때에는 주위에서 바른 말이라고 하며 해주는 말을 듣지 말고, 먼저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바른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에 따라, 그 정도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요새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역자를 자주 이전하지 말아라. 한 교회에 오래 둬야지, 교회가 좀 되려고 하는데 이전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시험이 들어오고 교인이 많이 떨어지는데, 그래도 오래 있어야 하는지, 교인 절반이 떨어져도 부목사를 두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를 위해 있나, 목사가 교회를 위해 있나 생각해보고 교회가 시험에 들고 교인이 떨어지면 목사가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면 옮기는 것이 옳다는 것도 바른 말이고, 옮기지 않고 오래 둬야 한다는 것도 바른 말입니다. 둘 다 바른 말이지만, 어떤 바른 말이 옳은 말이 될 것인지는 경우가 다 다르고 정도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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