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권위
아가 6:1-14
1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 4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5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7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11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3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아가 6:1-14
1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 4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5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7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11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3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1. 동산에 계신 주님
예루살렘 여자들도 함께 주님을 찾음
본문 1절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고 예루살렘 여자가 말하였습니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는 술람미 여자를 가리킵니다. 신령한 성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잘 따라가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여자들도 그를 어여쁘게 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는 하나님이 어여쁘게 보시며 사람들도 어여쁘게 봅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고 하였는데,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애를 쓰며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여자가 같이 찾으러 가자고 합니다. 신령한 성도가 예수님을 깊이 사귀어 체험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면 육에 속한 성도들도 예수님을 흠모하며 함께 찾으려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와보라고 했을 때에, 그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요 4:39). 이와 같이 예수님을 발견한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말해주어서(아 5:10-16) 예루살렘 여자들도 함께 찾으러 가자고 나선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3절은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셨다고 했
는데, 이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라고 하였는데, 성도들이 믿음 쓰는 것은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믿음을 쓰는 교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 말씀을 지키는 교회가 향기로운 꽃밭이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계십니다.
는데, 이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라고 하였는데, 성도들이 믿음 쓰는 것은 향기로운 꽃밭입니다. 믿음을 쓰는 교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 말씀을 지키는 교회가 향기로운 꽃밭이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계십니다.
거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습니다. 영적 신령한 꽃, 믿음의 꽃이 제일 잘 핀 것을 꺾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의 눈물이 없는 영광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게 하십니다. 백합화가 잘 피지 못한 것은 좀 더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것은 잘 핀 백합화부터 꺾어 가십니다. 열매로 말하면 잘 익은 열매를 먼저 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따 가시는 열매, 먼저 꺾어 가시는 백합화는 참 좋은 것입니다.
요새도 사방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잘 익은 열매를 따시고, 꽃이 잘 핀 좋은 백합화를 먼저 꺾어 가십니다. 사람들도 잘 익은 열매를 먼저 따고 설익은 과실은 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은 백합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양을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양 떼를 잘 먹이
시고 백합화를 잘 가꾸어서 피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잘 익게 해서 다 데리고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산으로 가야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음
예수님을 찾으려면 예수님의 동산으로 가야 찾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 동산에 가면 안 되고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술람미 여자의 신앙이 좋아도 자기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못 찾고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산은 예수님을 위하는 동산이고 예수님이 계신 동산입니다. 주님을 위한 동산, 주의 인도를 받는 동산, 주를 순종하는 동산, 주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는 동산이 예수님의 동산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교회에 다녀서도 안 되고 자기의 것을 만들어 놓아도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동산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자기의 것을 만들어 놓지 말고 내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예수님의 것으로 만들어 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의 동산에 갈 수 있고, 그것이 주의 동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됩니다. 주를 위하여, 주의 것으로 삼고, 주의 뜻대로, 주만 순종하는 동산이 주의 동산입니다.
예수님을 찾으려면 예수님의 동산으로 가야 찾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 동산에 가면 안 되고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술람미 여자의 신앙이 좋아도 자기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못 찾고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산은 예수님을 위하는 동산이고 예수님이 계신 동산입니다. 주님을 위한 동산, 주의 인도를 받는 동산, 주를 순종하는 동산, 주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는 동산이 예수님의 동산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교회에 다녀서도 안 되고 자기의 것을 만들어 놓아도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동산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자기의 것을 만들어 놓지 말고 내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예수님의 것으로 만들어 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의 동산에 갈 수 있고, 그것이 주의 동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됩니다. 주를 위하여, 주의 것으로 삼고, 주의 뜻대로, 주만 순종하는 동산이 주의 동산입니다.
교회도 자기 교회를 만들어 놓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의 동산이 아닙니다. 자기 동산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한 분 계신데 자기가 돈을 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잘 됐다고 합니다. 교인이 몇 백 명이 모이고 목사님도 모셨는데 그 교회에서는 그 권사님만 의지하고 그 권사님을 주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에 가야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세운 교회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교회를 자기 교회로 만들어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에 가서 조그만 교회를 더 세우든지 다른 교회를 나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돈을 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해도 교회가 자기 교회가 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 거기에 예수님께서 안 계십니다. 예수님의 교회, 주가 인도하는 교회, 내 것이 아닌 주의 것, 주의 명령대로만 순종하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앉으라 하면 앉고, 서라 하면 서면서, 주의 동산을 만들어 놓아야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안에 있고 그곳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산이 되고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자기의 것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주님께서 슬슬 보따리 싸서 떠나시는 것이 됩니다. 그곳이 예수님의 동산이 아닌데 거기에 왜 예수님이 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슬슬 떠나가시면 그 다음에 마귀가 슬슬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도 다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영권이 다 떠나고 일이 안 됩니다. 아무 일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서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 그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십니다. 자기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는 주님이시고 사람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사람의 동산을 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동산, 예수님의 동산으로 삼고 주님이 돌아와서 자기 동산에 계시도록 하고 당신의 뜻만 이루어 나가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양 떼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의 동산을 만들어 놓아야 예수님께서 들어와서 양 떼를 먹이시고 예수님께서 들어와서 왕 노릇하시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런 동산이 됩니다. 우리 마음도 예수님의 동산, 우리의 몸도 예수님의 동산, 우리의 가정도 예수님의 동산, 교회도 예수님의 동산, 교단도 예수님의 동산, 진리와 영감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져 나가는 그러한 동산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거기로 가서 예수님께서 양도 먹이시고 그렇게 해야 양들이 잘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백합화를 먼저 꺾으심
그 다음에는 ‘백합화를 꺾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을 먹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왜 꺾으십니까? 가져가셔서 더 귀하게 사용하시려고 백합화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백합화를 꺾을 때는 잘 핀 것을 꺾을 것입니다. 가지가 지저분하게 잘 피지 못하고 꽃이 제대로 피지 않고 꽃이 몇 개 안 피거나 아예 피지도 않은 그런 것은 안 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꺾으실 때에 꽃이 잘 피고 가지도 잘 치고 향기도 잘 나고 흠이 없고 아름다운 그런 백합화를 먼저 꺾어다가 귀한 자리에다가 귀하게 쓰시려고 먼저 꺾어 가십니다.
그 다음에는 ‘백합화를 꺾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을 먹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왜 꺾으십니까? 가져가셔서 더 귀하게 사용하시려고 백합화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백합화를 꺾을 때는 잘 핀 것을 꺾을 것입니다. 가지가 지저분하게 잘 피지 못하고 꽃이 제대로 피지 않고 꽃이 몇 개 안 피거나 아예 피지도 않은 그런 것은 안 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꺾으실 때에 꽃이 잘 피고 가지도 잘 치고 향기도 잘 나고 흠이 없고 아름다운 그런 백합화를 먼저 꺾어다가 귀한 자리에다가 귀하게 쓰시려고 먼저 꺾어 가십니다.
‘백합화를 꺾는다’는 것은 주님이 성도를 먼저 불러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꺾어서 먼저 데려가셨고, 야고보를 꺾어서 데려 가셨는데, 백합화를 잘 피웠기 때문에 꺾어서 먼저 데려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꾸로 순교 당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백합화를 잘 피웠기 때문에 주님이 데려가신 것입니다. 또 주기철 목사를 꺾어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꺾어서 데려가는 성도가 있는데 그는 백합화를 잘 피운 성도로, 그를 먼저 꺾어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꺾는 백합화는 아름다운 것이고, 귀한 것이고, 주님이 꺾어다가 귀한 자리에다가 놓고 사용하시려고 먼저 꺾어 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절에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환난이 오기 전에 미리 피난처로 데려간다고 하였습니다. 백합화는 잘 핀 것을 먼저 꺾어가고, 열매는 잘 익은 열매를 먼저 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퍼렇게 선 것을 따다 무엇을 하려고 따겠습니까? 백합화도 잘 피고 제대로 된 것이 필요한 것이지, 잘 피지도 못하고 한 편은 벌레가 먹은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잘 꺾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데려가는 성도, 순교의 자리로 인도하는 성도, 환난과 고난 받는데로 인도하는 성도는 다 예수님께서 쓸 만하기에 꺾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반열에 가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꺾어 가시는 성도는 아름다운 백합화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귀한 자리에 놓고 예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해서 거기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려고 꺾어 가십니다. 그리고 양 떼를 길러 가려고 먹이시는데, 먼저 잘 먹인 양 떼가 잘 자라나면 꺾어 가시고 또 다른 양 떼를 먹이시는 데가 예수님의 동산입니다.
아직 백합화가 변변하게 피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안 데려가십니다. 좀 놔두었다가 꺾어 가시려는 것입니다. 열매로 말하면 아직 설었습니다. 익은 다음에 따가려고 열매를 가만히 놔두시고 잘 익은 것은 미리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또 순교의 자리에 나가게 하는 것은 더 좋은 자리로 인도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참 복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꺾어 가시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갖다 쓰려고 데려가시는데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성도입니다.
본문 3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속하셨고, 내 모든 것은 주의 것이며, 주의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인도를 받고 주의 주장을 받는 그 자리에서 살게 됩니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백합화가 핀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십니다. 가시밭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고, 골짜기의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는데 이렇게 바람이 불어오면 꽃잎이 찢겨서 향기가 날리는 그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고 또 골짜기와 같이 아무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백합화를 피운 성도처럼 그 가운데서도 양 떼를 계속해서 먹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2.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권위
본문 4-10절까지는 왕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가서를 공부할 때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육신으로 생각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벌을 받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육신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신령한 도리를
가르쳐주느라 이렇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4-10절까지는 왕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가서를 공부할 때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육신으로 생각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벌을 받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육신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신령한 도리를
가르쳐주느라 이렇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어여쁘고 고움; 둘째, 위엄스러움
본문 4절에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라고 하였는데 성도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어여쁘다는 것입니다. 디르사만큼 어여쁘다고 하였습니다. ‘디르사’는 고대 북방 나라의 수도라고 합니다. 수도의 명칭입니다. 이렇게 북방 나라의 훌륭한 도시만큼 예수님께서 성도를 보실
때에 어여쁘게 보신다고 합니다. 또 여기에는 기쁘게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그런 성도라는 것입니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성도의 고움이 예루살렘과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또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이 있습니다. 성도의 아름다움은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있는 그런 아름다움입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성도이기 때문에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 있게 보이고, 또 백합화 꽃이 피었기 때문에 아름답게도 보이는 것입니다. 또 디르사와 같이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보여집니다.
셋째, 눈; 넷째, 머리털
본문 5절에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는 것은 성도의 눈이 예수님을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왜놀랍니까?
요한계시록 1장 17-18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볼 때에 너무 무서워서 앞에 거꾸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완전무결하시고 영광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자기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 앞에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거룩하고 너무 완전하고, 자기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놀랜다는 것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햇빛을 바라볼 때에 눈으로 밝은 햇빛을 바라보면 눈이 잘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는 것은 성도의 눈이 예수님을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왜놀랍니까?
요한계시록 1장 17-18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볼 때에 너무 무서워서 앞에 거꾸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완전무결하시고 영광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자기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 앞에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거룩하고 너무 완전하고, 자기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놀랜다는 것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햇빛을 바라볼 때에 눈으로 밝은 햇빛을 바라보면 눈이 잘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5절에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화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였는데,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만국의 여호와 왕을 뵈었기 때문에 화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도가 놀라는 그런 상태입니다. ‘네 눈이 놀래니 나를 돌이켜 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성도가 회개하고 점점 눈이 밝아지는 것만큼 예수님을 쳐다보게 됩니다. 죄가 있는 더러운 눈, 세상에 속해 있는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놀랍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정결한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신령한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라고 하였는데, 성도의 머리털은 권세 아래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권세 아래에서 순종하는 생활은 예수님 보시기에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와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이
본문 6절에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이는 쌍태 암양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랫니와 윗니가 딱 맞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김질하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이는 쌍태 암양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랫니와 윗니가 딱 맞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김질하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대로 지나가지 말고 이 말씀을 씹어서 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그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대로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새김질하면서 자기 자신이 그대로 만들어지고 나가서 그 말씀을 자기 영양소로 만들어서 그 말씀이 자기 힘이 되고 생명이 되고 자기 자체가 되도록 새김질하는 성도의 이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는 그런 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여섯째, 너울 속의 뺨
본문 7절에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너울 속의 너(성도)의 뺨’이라는 것은 겸손한 성도의 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석류는 쪼개면 안이 시뻘겋습니다. 그러므로 속에 은혜가 뛰노는 성도의 뺨이라는 것입니다. ‘너울 속’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여 구속의 은혜 가운데 뛰놀고 너울을 썼으므로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께만 향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예수님께만 향하는, 구속의 은혜가 넘치는 성도의 얼굴, 그 뺨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얼굴이 윤택합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그런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너울 속의 너(성도)의 뺨’이라는 것은 겸손한 성도의 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석류 한 쪽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석류는 쪼개면 안이 시뻘겋습니다. 그러므로 속에 은혜가 뛰노는 성도의 뺨이라는 것입니다. ‘너울 속’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여 구속의 은혜 가운데 뛰놀고 너울을 썼으므로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께만 향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예수님께만 향하는, 구속의 은혜가 넘치는 성도의 얼굴, 그 뺨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얼굴이 윤택합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그런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왕후와 비빈과 시녀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완전한 자
본문 9절에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왕후가 육십이나 되고, 비빈이 팔십이나 되고, 시녀가 무수하게 많지만,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딸’,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제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제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합니다. 제일 많이 사랑하니 예수님도 그 술람미 여자를 제일로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모든 전체를 다해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을 제일로 사랑하되 독자와 같이 사랑하고 외딸과 같이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가장 귀한 그 사랑으로 예수님은 성도를 인도해 주십니다.
여덟째, 아침빛 같이 뚜렷함; 아홉째, 달 같이 아름다움;
열째,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함
본문 10절에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렇다는 것입니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라고 하였는데, 아침빛은 새로 올라오는 빛이 아닙니까? 새로운 역사, 새로운 소생함,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이것이 술람미 여자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침빛 같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날마다 새 사람, 날마다 새 노래, 날마다 소생함, 날마다 새롭게 되어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실 때에는 ‘야! 아침빛 같이 뚜렷하구나. 날마다 아침이로구나. 늘 아침 같이 새롭게 솟아올라오고, 아침 같이 새롭게 소생해 올라오는구나. 새로운 생명의 역사
가 아침 같이 새롭게 생명의 역사가 있구나. 광선이 비추어 나오는구나’라고 하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아침빛 같이 뚜렷하게 나오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본문 10절에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렇다는 것입니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라고 하였는데, 아침빛은 새로 올라오는 빛이 아닙니까? 새로운 역사, 새로운 소생함,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이것이 술람미 여자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침빛 같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날마다 새 사람, 날마다 새 노래, 날마다 소생함, 날마다 새롭게 되어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실 때에는 ‘야! 아침빛 같이 뚜렷하구나. 날마다 아침이로구나. 늘 아침 같이 새롭게 솟아올라오고, 아침 같이 새롭게 소생해 올라오는구나. 새로운 생명의 역사
가 아침 같이 새롭게 생명의 역사가 있구나. 광선이 비추어 나오는구나’라고 하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아침빛 같이 뚜렷하게 나오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다음에 ‘달 같이 아름답고’라고 하였습니다. 달은 태양빛을 반사해서 세상에 비추어 내보내는 천체입니다. 즉, 성도가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내보내는 때에 예수님께서 그 성도를 달 같이 아름답게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 내보내야 합니다.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봤다는 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생활, 예수님을 받아가지고 보여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달의 역할입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도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에 예수님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빛이 없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주는 이 사람을 달과 같이 아름답게 예수님께서 보아주십니다. 또 어두운 세상이 그만큼 밝아집니다. 해 같이 맑고 밝게 진리를 그대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빛으로 내보내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만 바울은 혼잡하지 아니하고 진리 그대로를 빛으로 내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해 같이 맑고’라고 하였는데,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도 섞지 아니하고 무엇을 가리지 아니하고 인본주의를 쓰지 아니하며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증거하고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은 해 같이 맑은 사람입니다. 또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은 선한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나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도가 선한 싸움을 잠시라도 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잘 싸워서 나가니,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들어와도 꼼짝 못하고 다 격퇴를 당합니다. 따라서 원수가 그 동산에 침입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기치를 벌이고 잘 싸웠기 때문에 원수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하였습니까? 4절부터 첫째 성도에 대해서 어여쁨이 디르사와 같고 고운 것은 예루살렘과 같고 그 위엄은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위엄스러운 것, 셋째는 성도의 눈, 넷째는 머리털입니다. 성도의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새끼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권세를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을 순종하는 것도 인간에게 주신 권세이고, 부모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세입니
다. 그러므로 부모를 잘 순종하고, 선생을 잘 순종하고, 나라 권세에 잘 순종하고 공장이나 회사의 윗사람, 군대의 상관 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세에 잘 순종하는 성도는 머리털이 아름다운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와 같이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다섯째는 성도의 이입니다. 성도의 이는 쌍태 노루, 아래 위가 딱딱 맞아서 새김질 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김질하지 안하고 성경을 배우고 그냥 내버리고 돌아가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새김질해서 그대로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할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잘 새김질해서 진리를 세워나가고 그 진리를 즐거워하므로 새김질을 잘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이가 아름다운 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너울 속에 뺨입니다. 겸손히 예수님만 향하고, 구속의 은혜가 뛰노는 성도의 얼굴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석류 한 조각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곱째는 완전한 자, 외딸,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첫째로 여기고 제일 사랑하고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갖다 바치고 예수님을 제일 귀중히 여기고 믿는 사람이 제일 첫째이고 그것이 외딸입니다.
세상을 둘째, 셋째로 여기는 그 사람이 완전한 자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시간도 첫 시간, 마음도 첫 마음, 물질도 가장 좋은 첫 열매, 귀중한 것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완전한 자이고 하나밖에 없는 자이고 가장 귀중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아홉째는 달과 같이 아름답고, 열째는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러운 여자입니다.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러운 성도인데 선한 싸움을 잘 싸우니 사랑이 충만한데도 위엄스럽다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이 예수님을 받아서 예수님을 비추어 내보내고 진리를 받아서 얼굴에 진리가 나타나고 진리를 입으로 밝히며 나가니까 해와 같이 맑고 아침 빛 같이 뚜렷하며 날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역사. 새 노래, 새 사람.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 성도가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다. 그러므로 부모를 잘 순종하고, 선생을 잘 순종하고, 나라 권세에 잘 순종하고 공장이나 회사의 윗사람, 군대의 상관 등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세에 잘 순종하는 성도는 머리털이 아름다운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와 같이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다섯째는 성도의 이입니다. 성도의 이는 쌍태 노루, 아래 위가 딱딱 맞아서 새김질 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김질하지 안하고 성경을 배우고 그냥 내버리고 돌아가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새김질해서 그대로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할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잘 새김질해서 진리를 세워나가고 그 진리를 즐거워하므로 새김질을 잘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이가 아름다운 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너울 속에 뺨입니다. 겸손히 예수님만 향하고, 구속의 은혜가 뛰노는 성도의 얼굴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석류 한 조각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곱째는 완전한 자, 외딸,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첫째로 여기고 제일 사랑하고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갖다 바치고 예수님을 제일 귀중히 여기고 믿는 사람이 제일 첫째이고 그것이 외딸입니다.
세상을 둘째, 셋째로 여기는 그 사람이 완전한 자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시간도 첫 시간, 마음도 첫 마음, 물질도 가장 좋은 첫 열매, 귀중한 것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완전한 자이고 하나밖에 없는 자이고 가장 귀중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아홉째는 달과 같이 아름답고, 열째는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러운 여자입니다.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러운 성도인데 선한 싸움을 잘 싸우니 사랑이 충만한데도 위엄스럽다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이 예수님을 받아서 예수님을 비추어 내보내고 진리를 받아서 얼굴에 진리가 나타나고 진리를 입으로 밝히며 나가니까 해와 같이 맑고 아침 빛 같이 뚜렷하며 날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역사. 새 노래, 새 사람.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 성도가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 개가 맞습니다. 4절의 아름다운 것, 고운 것을 합해서 열 개로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가 5장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것이 열 개가 되기 때문에 성도에 대한 것도 열 개여야 맞습니다.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합해서 열 개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것이 열, 성도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것이 열, 그렇게 해야 좋겠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보니까 아름답고, 예수님은 성도를 보시므로 아름답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보니 아름다운 것이 열입니다. 열 가지 아름다움, 예수님의 십대 미(美)가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보니 몇 가지가 아름답습니까? 성도의 십대 미가 있습니다.
열 가지가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술람미 여자와 같은 길을 걸어갈 때, 새김질 잘하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구속의 은혜가 속에서 역사해서 얼굴에서 뛰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예수님을 잘 비추어서 내보내고 명랑하게 말씀을 바로 받아서
진리의 빛을 전파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잠자는 성도가 되면 안 됨
잠자는 성도는 어떻겠습니까? 잠자는 성도는 이가 다 썩었습니다. 말씀을 새김질을 못하므로 썩은 이입니다. 뺨은 구속의 은혜에 뛰놀지 못하여 시꺼멓고 머리털은 새어 꽁지만 남았고 완전하여 하나뿐이 아니라 여러 사람 가운데서도 맨 꼴찌입니다. 왕비들이 칭찬하기는 커녕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아침빛 같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 저녁빛 같이 차차 저물어 컴컴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빛 같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구름장에 다 가리어졌고 아무 권위가 없어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입니다.
잠자는 성도가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깨어서 살 소망이 있는 성도가 되고 생명 있는 길, 아침마다 새로워지고 새 생명의 역사가 있고, 새 노래, 새 사람, 새로운 소생함이 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산에 가야 합니다. 자기 동산에 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자기라는 것은 다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것도 다 내놓고 자기는 무요, 공이 되고 예수님의 것에 들어가 살아야 합니다. 내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의 주만 보이는 예수님의 동산에 들어갈 때에 새로워지고 새김질하고 산 역사가 있습니다. 술람미 여자와 같이 따라 가야 합니다. 레바논에서 일어나서 따라가야 합니다.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를 향해서 따라가고 사자굴, 표범산이라도 달음박질하여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끝까지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성도가 됩니다.
3. 호도 동산에 내려감
성도의 할 일 - 교회를 잘 돌보고 호도 송이를 먹음
본문 11절에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어디로 갑니까?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 람미 여자)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포도원을 돌보는 생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가 교회를 잘 돌보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순이 났나’라고 하는 것은 어린 성도들에게 순(믿음)이 났는지를 본다는 뜻이고,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라고 하는 것도 어린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돌보고 어린 양 떼들을 잘 살피고 잘 돌보는 생활을 하며 자기는 호도 동산으로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호도 동산’은 진리의 동산입니다.
호도는 겉은 딱딱한데 껍데기를 까면 그 안에 먹을 것이 많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단단한 식물, 진리의 말씀을 먹으려고 호도 동산에 가는 것입니다. 물렁물렁한 젖이나 먹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진리의 말씀, 단단한 식물을 먹고 딱딱해서 까기는 힘이 좀 들지만 그래도 이것을 먹어야 속에 영양가치가 있고 내가 힘을 얻고 내가 소생함을 얻고 달음박질을 하기 때문에 호도 송이를 먹으려고 호도 동산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단단한 진리를 먹어야 심령이 힘을 얻어서 달음박질을 할 수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로 말씀을 먹어야 함
단단한 식물이라는 것은 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젖으로 먹는 것은 성경을 쉽게 해석하는 것이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을 좀 더 깊이 해석해서 잘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주고 알지 못하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좀 더 깊은 뜻을 알게 해 주는 것인데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자기 심령이 힘을 얻습니다. 단단한 식물을 얻지 못하면 힘을 못 얻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다 젖으로 먹일 수 있고 다 단단한 식물로 먹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다’고 하는 말씀도 젖으로 먹이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젖으로 먹이려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달 같고 다 해 같다고 하면 됩니다. 또 그 말도 안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해같고 달 같고 아침빛 같으니까 좋긴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 놓으면 할 것이 없습니다. 다 되었는데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힘이 안납니다. 힘을 쓸 것도 없고 또 힘을 안 쓰니깐 힘이 나지도 않고 진보도 없고 자라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단한 식물을 먹인다고 하는 것은 한 계단 더 들어가서, 아침빛 같이 뚜렷하다는 것은 ‘새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된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 새로운 소생함이 있어야 한다. 산 역사가 있어야 한다. 새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 나가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또 힘이 나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새롭게 되어야겠다. 아침마다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되겠다. 자라나야 되겠다. 소생해 올라가야 되겠다. 이렇게 하니 힘이 납니다. 그렇지만 먹기에는 힘이 듭니다. 새로운 역사가 날마다 있으려고 하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힘을 많이 써야 하므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껍질이 딱딱해서 껍질을 까기가 어렵습니다. 깨닫기도 힘이 들고 그대로 하기도 힘듭니
다. 공짜로 먹는다고 해야 입을 넙죽 벌리고 좋아할 텐데 거저먹는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까느라고 힘을 써야 하고 기도해야 되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호도 동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경회를 하는 것은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공짜로 먹는다고 해야 입을 넙죽 벌리고 좋아할 텐데 거저먹는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까느라고 힘을 써야 하고 기도해야 되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호도 동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경회를 하는 것은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농사해서 먹는 것만 배우면 안 되고, 농사하는 법을 배워야 함
요새 부흥회라고 하는 부흥회들은 대부분 젖으로 먹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다 복 받고, 다 잘되고, 다 하늘로 올라가며, 다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하하하”하고 입을 벌리고 웃으며 좋아하지만 실제로 된 것이 있습니까? 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농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농사해서 먹는 것만 가르쳐 준 것과 같습니다. 먹는 것만 자꾸 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농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농사하면 인절미도 먹고 기장도 먹고 차조도 먹고 또 구이로도 먹고 쪄먹고 부침개도 해 먹고 국수도 해 먹고 오이도 따 먹고 참외를 따먹고 토마토도 따 먹고 딸기도 따 먹고 사과도 먹고 배도 먹고 밀감도 먹고 바나나도 먹고, 이렇게 한참 하는 것입니다. ‘이거 신난다, 당장에 부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란 농사를 해서 당장에 다 먹는 것과 같습니다. ‘나도 농사하겠다. 나도 농사하겠다’라고 하며 들뜨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바나나 한 개를 먹을 수가 있습니까? 되어야 먹을 것이 아닙니까? 당장 무엇이 나옵니까? 먹기에 좋은 것과 좋은 열매만 자꾸 말해주면 복이 하늘에서 다 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 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단한 식물을 먹어서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힘을 들여서 땅을 파야하고, 심어야 하고, 소독을 해야 되고,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해야 된다는 등 이렇게 저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가을에 가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단단한 식물로 가르쳐야만 힘이 나옵니다.
새김질을 해야만 합니다. 새김질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단단한 식물입니다.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위엄스럽다는 것은 ‘성도가 이렇게 위엄스러워 마귀가 꿈쩍 못한다’라고 가르쳐주는 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이것도 맞습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거
가지고 뭐 힘이 납니까? 나가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싸우는 성도가 되어야 마귀가 꿈쩍 못하는 위엄스럽고 승리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앞에 말한 것과 같이 다 된다는 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단단한 식물로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호도동산에 내려가서 호도를 먹이는 자리에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본문 12절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부지중에 거하다 보니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예수님과 같이 타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이 할 일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모시고 수레 가운데 타고 가는 것입니다. 한참 하다 보니 언제 예수님께서 오셨는지 예수님과 같이 수레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부지중에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하면 됩니다. 골짜기에 내려가서 잘 살피고 포도나무 잘 돌보고 어린 신자들을 잘 돌보고 전도하고 석류나무 꽃이 잘 피었나 보고 그 다음에 호도 동산에 내려가서 호도와 같이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애를 한참 쓰다 보니 언제 오셨는지 예수님의 수레 가운데 타서 귀한 백성 가운데로 그 수레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자기 할 일만 잘하면 예수님의 수레를 부지중에 함께 타고 가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할 일을 안 하고 수레만 타겠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태워 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안 태워주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할 일을 부지런히 해 나가면 부지중에 어느덧 수레 가운데 타고 가는 것입니다.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하고 단단한 식물을 먹으려고 자꾸 애를 쓰고 새김질하고 단단한 식물을 먹고 또 새김질하면서 포도원을 돌보고 또 나가서 전파하다보면 부지중에 예수님의 수레 가운데 같이 타고 하나님 백성, 내 백성 가운데 이르게 됩니다.
4. 유혹과 보호
그들로 돌아오게 하고, 너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
본문 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소리치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합니다.
그들로 돌아오게 하고, 너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라
본문 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소리치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합니다.
돌아오라는 말이 네번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여자’는 보통으로 믿는 신자을 가리키고, ‘술람미 여자’는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말씀대로 신령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믿는 성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골방에 들어가서 신령한 교통을 하며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동행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호도 동산에 가서 호도를 먹는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으면서 가는 성도가 술람미 여자인데 예루살렘 여자는 자꾸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야,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가지 말고 자기들과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무슨 예수를 그렇게 믿느냐?” 아무래도 예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이 안 됐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믿자. 우리에게로 좀 돌아오라”, 자꾸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야 될까요? 안 돌아가야 될까요? 돌아가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그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도 모두 왕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예수님을 같이 섬겨도 다릅니다. 술람미 여자가 가는 길이 다르고 예루살렘 여자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또 술람미 여자가
있는 장소가 다르고 또 예루살렘 여자가 있는 장소가 다릅니다. 먹는 양식도 다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젖이나 먹고 살고 술람미 여자는 단단한 식물, 호도 동산에 가서 호도를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고 새김질하면서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로 가는 것입니다. 험산 준령으로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는 평탄한 길로만 갑니다. 왕궁에만 있습니다. “허허” 좋아만 합니다. “하하”하면서 좋다고만 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무슨 예수를 그렇게 믿느냐?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술람미 여자야”라고 하면서 자
기와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인경수 목사가 캐나다 교회를 맡으려고 그쪽 교회의 초청으로 떠날 때에 제가 예레미야 15장의 말씀을 가는 선물로 주었습니다. 캐나다 가는 사람에게 선물로 아무것도 줄 것이 없고 또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므로 그 말씀(돌아가지 말라는 것) 하나를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9절부터 내가 읽고서 그것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9-20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 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이제 외국에 나가면 여러 목사들이 다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같이 나가자고 합니다. “다 같이 하자. 유별나게 믿을 것이 뭐 있느냐?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라고 나올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래도 너는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네게로 돌아오는 것은 괜찮지만 네가 그리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제가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찌니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리고 인 목사님한테 얼마 지나, 한 달쯤 있다가 편지가 왔는데, 선물로 준 예레미야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고 늘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돌아오라’는 유혹이 있음
예루살렘 여자는 돌아오라고 하면서 바로 믿으려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좀 신령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단단한 식물을 먹고 말씀대로 바로 믿으려고 하고 진리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것이 뭐 있느냐? 우리도 다 예수님 믿는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이 예수님을 믿고 같은 성령인데 뭘 그렇게 별나게 하느냐? 돌아와서 우리와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것이 언제나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입니다. 신사 참배 바람이 불어올 때에도 신사 참배하는 목사들이 안 하는 목사들에게 “돌아오라. 독선주의로 나가면서 유별나게 그럴 것이 무엇이냐?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돌아오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고,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준다고 했다. 또 스가랴에 보면 하루 동안에 죄를 사해준다고 했고, 권세를 복종하라고 했는데, 그 독선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따라 가지 말고 돌아오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8.15 해방 후에 또 시험이 들어왔는데, 이북에서 주일날에 선거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때에 주일 날 선거를 하면 주일날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못 한다고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안 하려고 작정을 하고 나갔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 교인이 거의 백 몇 십명이 됐는데 처음에는 일, 이십 명이 안하겠다고 나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로 한 분이 나가서 “우리가 일본 시대 때에도 진리를 다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 어떻게 이대로 하겠느냐? 이번에는 주일날 선거를 하고 그 다음에 잘 믿어야겠다”며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 선거하기로 돌아서고 몇 명이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 남은 소수의 사람들도 위협과 공갈을 받자 다 넘어가고 결국에는 얼마만 남았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성경적으로 바로 믿으려고 하고, 신령한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서 영적 신앙의 생명의 길을 걸으라고 하면, 언제나 돌아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너라.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왜 그렇게 하느냐? 뭐 이상하게 믿을 필요가 무엇이냐?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물 음식을 왜 안 먹느냐? 돌아오너라. 우리는 먹고도 잘만 믿는다. 돌아오너라. 먹어도 괜찮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 먹어도 괜찮습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성경 어디에 나왔습니까? 사도행전 15장 28-29절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성령이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요긴한 것만 우리에게 말한다고 하면서 이 네가지,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하는 것을 멀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믿으려고 하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직장에 안 나가 간다고 하면 유별나게 믿지 말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장로이고 집사이지만 다 나오는데, 네까짓 것이 무엇이냐? 집사도 못 되지 않았느냐? 나오너라, 나오너라”라고 하면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에게로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
그런데 돌아오라는 유혹이 있을 때에 그 유혹에 넘어가면 일이 다 잘못됩니다. 주님께서 아주 섭섭하게 생각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 여자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가 섬기는 정도하고, 술람미 여자가 단단한 식물을 먹고 침궁에까지 들
어가서 섬기는 것과는 정도가 다릅니다. 그 길이 다릅니다. 정도가 다르고 그 길이 다르고 예수님을 취급하는 정도가 다르고 예수님을 발견하는 정도가 다르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정도가 다른데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아가면 예수님의 일이 다 낭패가 됩니다. 예수님의 신부 하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말이 됩니까?
마리아가 믿는 신앙하고 베드로나 제자들이 믿는 신앙하고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는데, 그것이 술람미 여자의 신앙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화를 내면서 “그것을 왜 허비했느냐?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 돌아오너라. 그런 짓을 하지 말고 돌아와서 우리와 같이 되거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오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전폭적으로 쏟아 부어서 말씀 전체를 다 지켜 나가려고 하는 이 술람미 여자와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자꾸 돌아오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자꾸 “돌아오고,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주 섭섭하게 생각 하시고 술람미 여자는 그만 낙제합니다. 예수님의 좋은 신부로 나가다가 뒤로 나가 그만 나동그래지고 마는 신부가 됩니다. 나가 자빠져서 머리가 다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그런 신부가 됩니다. 안 돌아가고 계속 술람미 여자의 길을 걸어가야 예수님이 아주 기뻐서 강건하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고 호도 동산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같이 계시고 수레 가운데 태우고 가고 동거동락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해서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 되어 예수님께서 같이 오셔서 마시고 먹고 흘러내려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주는 이런 귀한 일이 가득하게 되었는데 왜 예루살렘 여자 쪽으로 돌아갑니까? 그리로 가면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아가
면 안 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해서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 되어 예수님께서 같이 오셔서 마시고 먹고 흘러내려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주는 이런 귀한 일이 가득하게 되었는데 왜 예루살렘 여자 쪽으로 돌아갑니까? 그리로 가면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아가
면 안 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본문 14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꾸 돌아오라고 하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하십니다. 여기 ‘마하나임’이라는 곳은 춤추는 장소입니다. 춤추는 장소에서 춤추는 여자들처럼 술람미 여자들을 그렇게 구경이나 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 여자들을 그저 춤추러 다니는 여자들로 생각합니다. “돌아오너라. 돌아와서 구경이나 좀 하자”, 이렇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을 따라가려고 보려는 것이 아니라 구경을 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좀 보자”라고 하며 구경만 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구경만 하고 그 신앙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성경말씀을 구경만 하고, 바로 믿는 사람을 그저 구경만 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네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너희가 하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이 그 신앙을 본받으려고 돌아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믿는 것을 구경이나 하려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경거리 삼으려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삼손에게 주어진 재주를 구경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주 한번 부리라고 하면서 그들의 신전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만 해도 삼천 명인데 그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서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 좀 부려보라고 했습니다. 구경 좀 하자고 하면서 무슨 재주를 구경하려고 했습니까? 과거에 신앙 생활하던 것을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자를 찢어 죽인 일, 또 나귀의 뼈로 천 명을 죽인 것, 여우새끼 300마리를 잡아다가 꼬리를 매어 불을 놓은 일 등 과거에 신앙생활하던 역사를 이제는 그 사람들이 구경을 좀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경 좀 해보자는 것입니다. 구경거리로 믿는 일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요새도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를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려고 내세워주기는 합니다. “잘한다, 잘한다”라고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잘한다. 잘한다”라고 하지만 자기가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안 들어가면서 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 추도 예배를 사방에서 다 합니
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하고 신비주의에서도 하고 통합 측에서도 하고 합동에서도 하고 고려 파에서도 합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실제로는 안 따라가려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를 보고 “돌아오라. 나도 너희와 같이 믿겠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에 참여하려고 하고, 그런 신앙에 자기도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술람미 여자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는 동시에 구경거리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잘 믿나 보자. 잘 믿었으면 왜 그 모양이냐? 잘 믿었으면 좀 된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잘 믿었는데 왜 그렇게 못 사느냐? 왜 배를 쫄쫄 곪느냐? 집도 하나 없느냐? 잘 믿었으면 왜 그 모양이냐?”라는 식으로 어떻게 하든지 돌이켜서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믿으려고 하는 것을 춤추는 것처럼 구경거리로 삼아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절대 돌아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돌아오라고 해도 너희는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하고 신비주의에서도 하고 통합 측에서도 하고 합동에서도 하고 고려 파에서도 합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실제로는 안 따라가려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를 보고 “돌아오라. 나도 너희와 같이 믿겠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에 참여하려고 하고, 그런 신앙에 자기도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술람미 여자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는 동시에 구경거리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잘 믿나 보자. 잘 믿었으면 왜 그 모양이냐? 잘 믿었으면 좀 된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잘 믿었는데 왜 그렇게 못 사느냐? 왜 배를 쫄쫄 곪느냐? 집도 하나 없느냐? 잘 믿었으면 왜 그 모양이냐?”라는 식으로 어떻게 하든지 돌이켜서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믿으려고 하는 것을 춤추는 것처럼 구경거리로 삼아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절대 돌아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돌아오라고 해도 너희는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술람미 여자의 그 길을 걸어서 신앙의 맛을 보았는데 맛을 보고 믿는 사람이 맛을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한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맛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진리가 달다고 하고 예수님이 좋다고 하고 말씀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고, 맛을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가다가 늘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맛을 보지 못했으니 쓰다하면 쓴 줄만 알고 맛이 없다고 하면 맛이 없는 줄만 알기 때문에 그것을 표준으로 하면 안 됩니다. 맛을 본 사람이 양보하지 말고 그 말씀에 굳게 서서 끝까지 이것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돌아가면 안 됩니다. 핍박과 환난을 받아도 그게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로 가는 것입니다. 사자굴, 표범산에 가도 양보하지 말고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지켜서 험산 준령을 핍박과 환난을 받으면서 걸어 나가야만 나도 살고 예수님께서도 그 동산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역사가 흘러가게 됩니다. 나눠줄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에게로 돌아가지 않아야만 그런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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