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7일 금요일

사무엘상 6:1-14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냄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냄
사무엘상 6:1-14

1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3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4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이니라 5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6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9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13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려 함

본문 1절에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 블레셋 나라에 있은 지가 일곱 달입니다. 일곱 달 동안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나라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빼앗아 여기저기 옮겨 가면서 재앙을 많이 받았습니다.

본문 2절에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고 블레셋 사람의 제사장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
입니다. 또 복술자는 점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러다가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본처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어떻게 돌려보내야 되겠는가’를 의논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5장 11절에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라고 하였습니다. 블레셋 백성들이 방백들을 모으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다 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궤가 가는 데마다 큰 재앙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는 곳마다 독종이 나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또 쥐가 나와서 많은 땅을 해롭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죽고 큰 환난이 임해서 본처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들이 다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려보내야 되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많은 의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우상 섬기는 제사장을 불러다가 의논하기도 하고 복술자를 불러서 의논하기도 한 것입니다.

2.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함

본문 3절에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도 제사를 드려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자기들이 지은 죄를 깨달았습니다. 속건제는 죄를 범한 다음에 사함을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알고서 지은 죄를 속죄하는 제사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온 죄에 대한 것과 여호와의 궤를 경외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 죄에 대해 속건제를 드려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많이 내렸지만 그들이 속건제를 드리면 병도 낫고 여호와의 손이 옮겨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4절에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간 곳마다 독종이 크게 나서 앓다가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종의 형상을 방백 수대로, 금 독종 다섯 개를 만들어 보낼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으로 쥐 다섯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종 재앙과 쥐 재앙을 내려서 땅을 다 해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독종과 쥐의 형상으로 하나님께 영화를 돌려서 하나님께
서 손을 거두어서 재앙이 경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애굽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
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동안 바로의 장자가 죽고 큰 재앙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낸 것에 대해 블레셋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다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큰 이적으로 나왔다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서 나왔고 그때부터 사무엘까지는 약 300~400년이 됩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어떻게하든지 하나님을 잘 대접하여 좋게 돌려보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쁘게 하면 전부 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하나님의 궤를 조금이라도 손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손해주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잘 모셔서 돌려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굽 사람들이 다 망한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된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제사장들이 지혜가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복술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점을 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당이 “당신은 예수를 믿어야 살지 그렇지 않으면 못산다”고 했답니다. 그것 참 이상 합니다. 무당은 하나님과 반대인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 무당을 이용하신 것 같습니다. 무
당은 마귀를 섬기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데, 특별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당나귀도 이용하셔서 발람 선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닭도 이용하셨습니다. 닭이 울 때 베드로가 회개를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바벨론 왕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용하시고,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노하실 때 몽둥이로 이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이용하셔서 당신의 할 일을 해나가십니다.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나라에 빼앗겼지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궤를 보호하시고 돌려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이방 나라에 갔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궤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언약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시다가 나중에는 돌아오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의 믿지 않는 제사장, 복술, 방백들, 여러 백성들을 다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궤를 돌려 보내지 않으면 자기들이 다 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이렇게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순종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돌려 보내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가는 데마다 재앙을 만나서 다 죽고, 큰 환난이 임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돌려 보내자고 말하고 제사장들은 돌려보낼 방법으로 속건제를 드려야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이용해서 돌려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3. 소 수레에 궤를 실어 보냄

언약궤를 소 수레에 싣고 돌려보냄

본문 7-8절에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헌 짐짝을 싣고 다니던 그런 수레에 모시지 않고 새 수레를 만들어 실어 돌려보내야 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우니까 새 수레를 잘 만들어서 모신 것입니다. 또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소로 수레를 끌게 하여 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송아지는 떼어서 집에 데려다 가둬 놓고 암소만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
아 궤 곁에 두라고 하였는데, 독종 다섯 개와 쥐 다섯 개의 금 보물을 담은 다른 상자를 만들어 하나님의 궤 곁에 두어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젖 먹는 송아지를 떼어 놓았습니다. 보통 소 같으면 가다가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면 끝까지 벧세메스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송아지들을 떼어다가 집에 가두라는 것입니다. 보통 소입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가는 소입니까? 송아지들을 떼어다가 집에 가두고 젖 나는 소 둘로 수레를 메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벧세메스, 이스라엘 땅으로 가는 큰 길에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그다지 무거운 것이 아닌데, 왜 소 둘로 메게 하였겠습니까? 두 마리가 같이 가야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 마리만 돌아서도 못 가게 됩니다. 또 한 마리에게만 메고 가게 하면 우연히 갈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나타나서 무사히 벧세메스까지 가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들에게 내린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때 같으면 수레가 벧세메스까지 가지 못할 조건입니다. 새끼 있는 소가 어떻게 떼어 놓고 가겠습니까? 또 두 마리의 소를 사람이 몰고 가면 괜찮지만, 사람이 몰지도 않는데 두 마리의 소가 그 멍에를 계속 같이 메고 벧세메스까지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린 재앙인지, 그저 우연히 만난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은 옳은 방식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저 믿어야 합니다. 소가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돌아서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식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복술자들이 하는 방법입니다. 이들의 제사 방법은 바르지 못했으나 물질을 희생하여 속건제를 드리려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소가 돌아서는지, 돌아서지 않는지를 보아서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린 재앙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한 것은 복술자들의 생각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복술자들은 언제나 점을 하는 식으로 합니다. 

그 방법이 좋지 않은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성공이 되어야 합니다. 또 성공하려면 소를 벧세메스까지 오게 해야 합니다. 궤를 가져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잘못된 방법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소를 돌아서지 않게 하셨습니다.

본문 10-12절에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두 소가 바른대로 가는지 살펴보느라고 멀리서 따라갔습니다.
소들은 앞만 보고 가니까 뒤에서 방백들이 따라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소가 울며 갔다고 했습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젖먹이는 송아지를 떼어 놓았으니까 소에게는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울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송아지한테 갈 것 같은데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메고 가게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돌아서려고 해도 돌아서지 못한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서 끌고 가게 하신 것 같습니다. 송아지에게 돌이키려 해도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소가 울면서 간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큰 길로만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간섭하셔서 소를 바로 가게 하셨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큰 길로 가게 하셔서 울면서 목적지 벧세메스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끝까지 목적지로 나가야 함

하나님의 궤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끌고 나갈 때에 뒤에 있는 모든 것을 돌아보면 안됩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가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라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송아지를 떼어 놓았지만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인정으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정으로 기울어지면 뒤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정으로 기울어지면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 독자를 바칠 때에 인정으로 기울어졌다면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정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속에 슬픔이 남아 있지만 앞을 향하여 울면서 가는 것이 하나님께 이용 당하는 태도입니다. 인정에 얽매어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나가다가 중단을 하거나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궤를 메고 멍에를 멨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가야 됩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가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것처럼 우리도 멍에를 메고 나가는데, 뒤를 돌아보면 하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뒤돌아보는 것은 송아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송아지를 돌아보느라고 멍에 메는 것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송아지는 자녀들을 말합니다. 자녀를 떼서 집에 돌려보내고 반대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사람도 아이들을 떼어 놓으면 우는 것이 소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딸을 외국으로 보냈는데 딸 이야기만하면 눈물이 줄줄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도 소입니다. 눈물이 줄줄 나오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서 돌아서면 안 됩니다. 눈물이 줄줄 나와도 돌아서지 말고 가야 합니다. 벧세메스 앞길을 향해 목적지까지 가야지 돌아서면 실패합니다. 송아지 한테 가면 안 됩니다. 아무리 눈물이 나도 송아지한테 가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에 전부 실패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벧세메스까지, 끝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메고 가는 책임은 아주 중대한 것입니다. 중대한 책임을 맡아 나가다가 송아지 한 마리 떼어 냈다고 그것을 못 참고 송아지한테로 돌아서게 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궤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궤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소가 사람이라면 ‘블레셋에 다른 소가 얼마나 많은데, 왜 내가 꼭 메어야 하는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멍에를 다른 소에게 메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에게 메게 하셨는데, 그것을 다른 소가 메면 되겠습니까?
다른 소 몇 백 마리가 있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메게 하신 소가 끝까지 메고 가야지 멍에를 벗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일단 멍에를 멘 소가 끌고 나가야지 다른 소가 메면 하나님의 일이 실패합니다. 울면서라도 끝까지 목적지를 향해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큰 길로만 바로 가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언제나 정로로만 가야 합니다. 가다
가 보면 좌우로 갈라진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갈라진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정로로만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목적지로만 가야지, 왼쪽 길이 빠르다고 해서 왼쪽으로 빨리 달아나도 안되고, 오른쪽에 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도 안 됩니다. 길이 아무리 많아도 왼쪽이나 오른쪽 길은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갈 길이 아닙니다. 자기가 갈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메워주신 멍에를 메고 가라고 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 하나로만 가야지 ‘왼쪽 길로 갈까, 오른쪽 길로 가볼까?’ 하며 한눈 팔면 안 됩니다. 물론 좋은 것이 많습니다. 왼쪽으로 가도 좋은 것이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오른쪽에 가도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들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이 아닙니다. 

소 두 마리가 처음 멘 멍에로 조화롭게 목적지까지 감

블레셋 방백들은 뒤에서 소들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지, 뒤로 돌아서거나 서지 않는지 살피면서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확인하고 방백들이 이번 재앙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소들이 자연적으로는 그렇게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조건으로 갈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첫째는 송아지를 떼어 놓은 것이고 두 번째는 소 두 마리가 멍에를 같이 멘 것입니다. 둘이 멍에를 메었기 때문에 딱딱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돌아서도 안 되고 하나가 더 빨리 가도 안 됩니다. 둘이서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몰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는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멍에를 오랫동안 메어 봤다면 연단이 되어서 두 마리 소가 잘 맞춰 나갔겠지만, 이 소들은 처음으로 멍에를 메어보는 소들입니다. 처음으로 멜 때에는 잘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지게도 처음으로 져보면 등에 잘 붙지 않습니다. 

예전에 명륜 교회에서 박 집사(후에 박삼석 목사)와 산에 가는데 내 짐을 박 집사의 지게에 좀 지게 했습니다. 산꼭대기로 한참 올라가는데 박 집사는 서울 사람이라서 지게를 져 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내가 뒤에서 따라 가는데, 덜러덩 덜러덩 흔들흔들 하며 가는 것입니다.
개천에 다리가 없어서 돌을 밟고 건너서 갔습니다. 그런데 지게가 등에 붙지 않으니까 흔들흔들 하다가 뒤로 넘어져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짐을 건져서 지게를 지니까 내 등에는 딱 붙었습니다. 흔들흔들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면 나는 지게를 많이 져 봤기 때문입
니다. 그 이야기를 명륜 교회에 가서 한 번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떤 집사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유는 목사님이 짐을 잘 지면서 왜 본인이 안지고 집사에게 지게 해서 넘어지게 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가 잘못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내가 짐을 잘 지는데 내가 안 지고 집사보고 지고 가라고 하다가 넘어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사가 지고 가는 것도 잘한 것입니다. 목사가 지고 가는 것도 좋지만 집사가 목사 대신 지고 가는 것도 잘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자꾸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니까 내가 지고 갈 걸 그랬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연단되지 않은 것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결혼식하는 것도 훈련한다고 합니다. 결혼식을 하기 며칠 전에 신랑 신부가 만나서 입장하는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일 날은 딱 떨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은 결혼식하기 전에 훈련을 안 하기 때문에 어떤 신랑은 멍청하게 서서 신부를 맞으러 나가고, 또 신부는 오른쪽으로 서야 하는데 왼쪽으로 섭니다. 또 신부와 손잡고 들어오는 장인에게 뻣뻣하게 서서 인사도 안 하고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아야 할지 신부가 신랑의 손을
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연습을 안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지만 훈련을 하면 딱 맞습니다. 소가 처음으로 멍에를 메는데, 어떻게 딱 맞춰서 둘이 갈 수 있겠습니까? 훈련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또 처음으로 멍에를 메면 목이 아픕니다. 멍에를 많이 메 봐야 목이 아프지 않습니다. 빈 수레를 끌어도 처음에는 아픕니다. 큰 막대기를 목에 올려놓았는데 목이 안 아프겠습니까? 멍에를 여러 번 메서 굳은 살이 배기고 가죽이 두터워져야 멍에를 메도 아프지 않는데, 처음으로 메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멘 소 둘이 조화를 잘 이루어서 나갔습니다. 처음으로 메어서 목이 아플 텐데 계속 참으면서 잘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돌아서지 않도록 하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궤를 메고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소가 하나님께 이용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도 소와 같이 하나님께 이용 당해야 합니다. 소와 같이 이용당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끌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야 함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늘 봄날과 가을날과 같이 살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한테 오십시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살기 좋고 돈 잘 버는 좋은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가 하면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 창광 교회입니다. 여기가 한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인 줄 알면 됩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청년들이 어디 좋은 곳이 없냐고 물으면, “별거 있나?”라고 하였습니다. ‘별거’는 이상하고 신기한 것입니다. “여기 별거 없으면 거기도 별거 없는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명언입니다. ‘무엇이 좋다’, ‘어디가 좋다’, ‘누가 좋다’ 하고 떠들어도 별거 없습니다. 여기에서 별거 없으면 거기도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살기 좋다고 하는 곳에도 교통사고 나서 죽은 사람, 병들어서 죽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애틀이나 밴쿠버가 살기 좋다고 합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영하 4도쯤 내려가는 정도이고 눈이 조금 와서 금방 녹습니다. 여름에는 뜨
겁지 않고 서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겨울 내내 비가 옵니다. 겨울에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많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 것이 정상이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정상이 아닙니다. 겨울에 해를 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름에 내내 비 한 방울 안 오고, 겨울 내내 비 오는 것이 좋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달라스가 좋다고 합니다.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합니다. 겨울에 춥지 않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름에는 너무 덥습니다. 문을 열면 ‘확’하고 더운 기운이 닥칩니다. 애틀란타는 서늘하다고 합니다. 애틀란타와 달라스가 약간의 기후 차이가 있지만 두 곳 모두 여름에는 덥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이 제일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춘하추동이 확실하고 눈도 오고 가을과 여름이 확실합니다. 미지근해서 가을인지 겨울인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뭐가 좋습니까? 더운 곳에 있던 학생들은 눈 구경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눈이 오면 ‘야’ 하고 나가서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구경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 눈이 오는 것을 보고 너무 신기해서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보따리에 싸서 갔는데, 돌아가 보니까 다 녹아 없어졌다고 합니다. 얼마나 눈이 귀하면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눈 구경을 시키려고 했겠습니까?

한국도 지금은 냉난방이 잘 되어 있고,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겨울에 춥다고 하는데, 뭐가 춥습니까? 옛날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려면 얼마나 추웠는지 아십니까? 겨울에 보통 영하 15~19도가 계속 됐는데, 요새는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날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
께서 덥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요새는 에어컨과 히터가 있고 보일러도 연탄에서 가스로 점점 바뀌고 있는데 얼마나 편안합니까? 집안에 들어가면 다 훈훈합니다. 더울 때는 좀 더워야 좋습니다. 덥고 추운 것도 당해봐야 몸이 연단이 됩니다. 늘 더운 데만 있으면 안 됩니
다. 인도에서는 영상 9도에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파키스탄도 영상 5도에 몇 백 명이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영도도 안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영하 9도에도 안 얼어 죽는데, 그들은 영상 9도에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주와리입니다. ‘어주와리’란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기온이 영하 9~19도까지 내려갔다가 영상 30도까지 올라갔다가, 이렇게 왔다갔다 해야 사람의 몸이 단단해져서 제대로 됩니다. 더운 데만 있으면 어주와리가 됩니다. 물품으로 말하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고 항아리로 말하면 절반만 굽다 꺼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최상의 법인 줄 알아야 합니다. 최상의 일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주신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른 곳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곳에도 슬픈 일이 많고 이혼도 많고 사망도 많고 다 나가서 일해서 먹어야 합니다. 이 땅위에는 평안이 없고,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대도 좋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곳이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곳이 낙원이지, 이 세상에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곳이 있다고 해도 좋은 곳이 아닙니다. 좋은 곳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세상의 좋은 곳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만 걸어가야 합니다.

송아지를 떼어 놨다고 해서 돌아보지 말고, 왼쪽이나 오른쪽 길이 좋아 보인다고 그리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길로만 가야 합니다. 가라는 길로만 가야지 세상에 여기가 좋다, 저기가 좋다 하며 좋은 곳을 따라 가면 하나님의 궤가 가야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자기 신앙도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멍에를 메어 놓은 이상 끝까지, 목적지까지 죽도록 충성하여 그 멍에를 메고 나가야 합니다. 벧세메스까지 울면서 가야 합니다.

4.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영접함

본문 13-14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소가 벧세메스에 이르러 섰습니다. 왜 섰습니까? 다 가서 하나님께서 서라고 하셔서 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가게 하셨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궤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소는 눈물을 흘리면서 갔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해서 성공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성공하여 나갑니다. 
 
하나님의 궤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 밭에 가서 서니까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잡아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주의 종들이 가는 길입니다. 수레를 메고 왔다고 해서 대접받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는 희생의 제물로 바쳐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메고 온
수레는 패서 장작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불에 때고 자기는 희생이 되어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성도도 하나님께서 메어주신 멍에를 끝까지 메고 나가 순교를 당하는 일, 하나님을 위해서 끝까지 희생당하는 일,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순교당하는 일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눈물 흘리면서 나가다가 자기 몸 전체를 모두 불살라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메고 나가던 수레를 패서 장작으로 사용하고 소는 태워 번제물로 바쳐 드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메어주신 멍에를 끝까지 메고 나가다가 몸과 생명까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 드리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요, 복 받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메어주신 멍에를 메고 나가다가 순교를 당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큰 복을 받습니다. 순교자의 반열에 영원무궁토록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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