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라
말라기 1:1-12
말라기 1:1-12
1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
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4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통해 증명하심
말라기 선지자는 맨 마지막 선지자이며, 주전 440년에서 410년까지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400년간 선지자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본문 1-3절에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경고인데, 경고와 경책이 비슷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하면서 반문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무슨 사랑을 하셨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서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아주 귀한 것을 알고 그것에 참여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고, 결국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고,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축복을 팔아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왜 그 사랑을 모릅니까? 무엇을 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택하셨고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택해서 예수님을 믿게 해주신 것만 해도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를 택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그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만 해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에서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권고가 없었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 또한 없었습니다. 그는 다 황폐해졌고 그래서 다시 쌓았지만 하나님께서 또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게 해주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에서와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해주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에서의 땅, 곧 에돔 땅과 같이 되지 않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에돔 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황무해지고 헐렸으며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게 해주셨고, 하나님의 권고가 있었습니다. 돌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봐주지 않으시는 곳은 비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된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같은 곳은 비가 안 와서 매년 흉년이 듭니다. 여러 해 동안 흉년만 듭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다른 나라를 통해 구제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흉년이 안 듭니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이북에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목사들이 서로 싸웠는데, 총회나 노회를 할 때마다 이남파, 이북파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3·8선으로 갈라놓으신 것 같습니다. 노회나 총회로 모여서 목사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릅니다. 얼마나 황무해졌습니까? 얼마나 비참해졌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해마다 흉년이 들지 않고 풍년이 들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아마 금년에도 풍년이 될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을 알고 사랑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 가운데서 연단시키시고, 그 외에 여러 가지로 연단시켜나가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에서는 불택자인데, 에서와 같이 되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새벽 거리에 나가보면 청년들이 비틀비틀하면서 다닙니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방탕하고 술을 먹다가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자들입니까? 그들과 같이 되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귀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겨주시고 경멸하는 자를 경멸하심
장자의 명분이 아주 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복이고, 장차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이삭의 자손을 통해서 보내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령한 복과 구원의 복이 장자의 몫인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습니다. 팥죽 한 그릇 먹는 것이 좋고, 물질이 제일이고, 배로 하나님을 삼아 먹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누구든지 경홀히 여기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기시고, 경홀히 여기는 자는 결국 다 빼앗기고 맙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고, 경멸히 여기는 자를 경멸히 여기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사람은 경멸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겨주시고 존귀한 사람이 되지만,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경멸히 여기시고 경멸히 여김을 받을만한 인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세상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멸시를 받도록 만드십니다. 또 사람 앞에서 경멸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존경하며 항상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절대 무시하지 못합니다. 자녀들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지 않고 경외하지 않으며 경멸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경멸히 여기십니다.
물론 인격 자체가 경멸히 여길만한 인격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다른사람들도 경멸히 여깁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두려워해야 경멸히 여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시를 받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자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경외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 절대 사람이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늘 경외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 누구도 이삭을 경멸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도 우리 아버지가 경외하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그 또한 경멸히 여김을 받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 그 자녀도 멸시를 받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반드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부모를 존중하게 되며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하나님을 시원찮게 섬기면 하나님께서도 시원찮게 여기셔서, 자녀들도 부모를 시원찮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도 시원찮게 생각하게 됩니다. 에서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긴 것이 분명하니까 하나님께서 에서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경멸히 여김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에서와 같은 자를 영영한 진노에 처하게 하시므로 세상이 하나님의 위엄을 알게 됨
본문 4절에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에돔(에서 족속)이 뭐라고 말하였습니까? 황폐한 곳을 우리가 다시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이렇게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존중히 여기며, 경외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쌓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헌다고 하셨습니다. 쌓으면 헐고, 또 쌓으면 다시 헐어버리십니다. 반복해서 쌓아도 하나님께서 계속 헐어버리시기 때문에 안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자기가 쌓으려고 해서 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5절에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에돔의 심판 받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크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멸시함
본문 6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시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멸시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를 멸시하고, 알아주지 않으며, 존경하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덜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도 그를 존중히 여기지 않고, 존중 받지 못하는 인격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멸시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절대로 멸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데, 그 누가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존중 받지 못한 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잘됩니다.
3. 병든 제물을 드리지 말라
하나님께서 병든 제물은 받지 않으심
본문 7-9절에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 더러운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런 것을 드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더럽지 않고 깨끗한 것으로 드려야 하는데, 왜 더러운 것을 갖다 드렸겠습니까? 또 양이 많아 괜찮은 것으로 드릴 수 있었는데, 왜 이런 것을 골라 드렸겠습니까? 하여간 그들이 눈 멀고, 절고, 병든 양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너희 총독에게 그것을 갖다 드려보아라. 관리들에게 저는 것, 병든 것, 눈먼 것을 갖다 드리면 관리가 받겠느냐? 총독도 안 받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것을 받으시겠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자신들은 좋은 것을 먹고 지내면서 왜 이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병든 것은 팔아도 돈 몇 푼을 못 받으니까 좋은 것은 팔아서 돈을 벌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자고 한 것 같습니다. 결국 무엇이 목적이었습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 사랑입니다. 좋은 것을 가져다 팔아야 제 값을 받을 수있으니, 몇 푼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아마 돈을 받아서 무엇을 하자고 했을 것입니다. 돈이 첫째였고, 하나님 섬기는 것은 둘째 혹은 셋째였습니다. 돈이 먼저였고, 하나님 섬기는 것은 그 다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 바로 목적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 팔고, 병이 나고 절며 더러운 것은 하나님께 가져다 바쳤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과수원을 했는데, 목사님을 대접한다면서 과수원에서 썩은 사과를 가져온 적이 있었습니다. 벌레 먹고 썩어진 것만 있었는데, 잘한 것 같습니까? 그 사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수원 일을 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을 텐데, 좋은 것을 팔아서 비료 값도 물어주고 인건비도 물어줘야 될 것 아닙니까? 좋지 않은 것은 팔아봐야 몇 푼 안 되니까 썩은 사과를 이곳, 저곳으로 선물한 모양입니다. 사방에 선물을 하면서 목사님도 좀 갖다 주라고 한 모양입니다. 사정을 아니까 나는 감사하게 먹었습니다. 맛도 있었습니다. 벌레 먹은 것이 더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바로 되었습니까? 몇 년 안 되어서 그 사람이 과수원을 다 팔아치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사과는 없습니다. 정성을 들여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자기 돈 버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둘째, 셋째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도 좋은 것을 자신을 위해 먼저 사용하고, 좋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도 첫 시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느라 새벽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쓸데 없는 일에 이것 저것 다 써버리고 마지막에 가서 남은 찌꺼기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정성을 드리지 않는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정성을 다해 첫 번째, 첫 열매, 첫 시간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병든 것, 눈먼 것, 절름발이는 온전한 것이 아닌, 병든 제사를 말합니다. 희생으로 드린다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물이 되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됩니다.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고 신령이 빠져나간 제사, 또 진리가 빠져나간 제사는 병든 제사, 절름발이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제사할 때에는 신령과 진정을 합해야 합니다. 그렇게해야 두 눈이 다 있는 것입니다. 신령이 없는 제사, 진리가 없는 제사는 병들고 눈먼 것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절름발이 제물인데, 절름발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신령과 진정, 이 둘이 다 있어야 합니다. 하나가 없으면 절름발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미리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오전에는 나왔다가 오후에는 빠지고, 삼 일 예배에 빠지는 사람은 절름발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빠지지 말고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서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흠 없는 제물이 되고, 정성을 다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함
본문 7절에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상을 경멸히, 가볍게, 시원찮게,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상을 첫째로 생각하고 존중히 여겨야지, 왜 경멸히 여깁니까? 주의 상을 존중히 여겨야 할 것 아닙니까? 자기를 존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을 경멸히 여긴다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본문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통째로 드려야 합니다. 좋은 것은 자기가 다 먹고 찌꺼기와 병든 것으로만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연보도 다 쓰고 남는 것으로 가져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쓰기 전에 하나님께 바칠 것을 먼저 준비해놓아야 합니다. 남은 것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절름발이 신앙입니다. 성경에 남는 것으로 연보하라고 하였습니까? 무엇이나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제사도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자신이 흠 없는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첫째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기는데, 그렇게 열심히 믿을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일생동안 믿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나님께 다 바칠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경멸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없어질 것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존귀히 여기며 경외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것이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자기도 존귀해지는 것이며, 복 받는 길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병든 것, 절름발이, 눈 먼 것으로 가져다 바치는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제물로 바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온전한 제물, 산 제물로 바쳐져야 하겠습니다.
4. 이방이 주께 돌아옴
본문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깨끗한 제물을 드리고 분향하는 사람들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제거시키십니다.
5.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본문 12절에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섬기기를 경멸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지키지 않고, 경건하게 드리지 않으며, 인본주의와 인간의 감정주의로 손뼉을 치면서 하나님의 단을 더럽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요새 인간의 감정을 만족시키려고 음악가에게 돈을 주면서 음악을 하게 하고, 또 춤추게 하는 교회가 많다고 하는데, 얼마나 한심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을 데려다가 강단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성경말씀보다 세상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병든 것으로 강단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단을 더럽히고 경멸히 여기는 행동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경멸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경멸히 여기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자신도 경멸히 여김을 받게 되고 더러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지극히 높여서 ‘나를 사랑하는 자가 여기 있다’고 해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며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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